국가

프랑스

시민권 51 · 민족·국가 49 · 사건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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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 인물 51전체보기

에티엔 카베

Étienne Cabet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 1788–1856 ○ 뇌졸중

'공산주의'라는 말을 만든 이카리아 운동의 창시자

1848년 2월 3일, 카베의 추종자 69명이 르아브르 항구에서 배에 올랐다. '이카리아로 가자!' 그들은 신대륙에 지상의 공산낙원을 세우러 떠났다.

프랑스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이자 이카리아 운동의 창시자. 1840년 『이카리아 여행』을 출판하여 노동자 협동조합에 기반한 공산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했고, '공산주의(communisme)'라는 말을 처음 정치적 용어로 정립했다. 약 40만 추종자를 거느린 당대 가장 대중적인 사회주의 옹호자로, 『진정한 기독교』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사회 평등의 복음으로 재해석했다. 1848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와 일리노이에 이카리아 공동체를 세웠고, 1898년까지 이어진 미국 최장수 비종교 공동체 실험이 되었다. 계몽주의 유토피아 사상과 노동자 운동을 잇는 교량이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788디종 출생. 변호사 자격 취득
  • 1830–18317월혁명 참여 후 바스티아 검찰총장. 코트도르 하원의원 당선
  • 1833–1834『르 포퓰레르』 창간. 반정부 논설로 반역죄 유죄 판결, 영국 망명
  • 1834–1839영국에서 로버트 오웬과 교류하며 공산주의 사상 구상
  • 1840『이카리아 여행』 출판. 스스로 '공산주의자'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
  • 1841–1847『르 포퓰레르』 복간. 약 40만 명 독자층 확보, 『진정한 기독교』 출간
  • 1848추종자들과 미국으로 이주. 텍사스·일리노이에 이카리아 공동체 설립
  • 1849–1856노부 이카리아 공동체 지도자. 내부 갈등 속 1856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사망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 1805–1881 ○ 뇌졸중

37년을 감옥에서 보낸 봉기의 전략가, '블랑키즘'으로 레닌주의에 길을 열다

"나는 3천만 프랑스인, 나와 같은 프롤레타리아들에게 그들이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한 죄로 고발되었습니다." — 1832년 '15인 재판' 최후진술

프랑스 혁명적 사회주의자. 소수 전위의 무장봉기와 혁명적 독재를 주장하는 블랑키즘을 체계화해 마르크스주의와 볼셰비키 전위당론에 영향을 미쳤다. 37년을 감옥에서 보내 '유폐된 자'로 불렸다.

상세 이력 보기
  • 1824카르보나리 가입 — 군주제 전복을 위한 비밀결사
  • 1827샤를 10세 반대 시위 참여 — 세 차례 부상, 목에 총상
  • 18307월 혁명 참전 — 루이 필리프 입헌군주제에 환멸, 공화주의로 전환
  • 1832'민중의 벗(Amis du peuple)' 결성, 체포 — 재판에서 직업을 '프롤레타리아'라 밝힘
  • 1837바르베스·베르나르와 함께 비밀결사 '계절의 모임(Société des Saisons)' 창설
  • 1839.5파리 봉기 주도 — 실패, 사형 선고 후 종신형으로 감형
  • 18482월 혁명으로 석방, '공화주의 중앙협회' 설립 — 적기 채택과 선거 연기 요구
  • 1849–18595월 봉기 실패로 10년형 — 여러 교도소에서 복역
  • 1865–1870브뤼셀 망명 — 『무장봉기 지침』 등 주요 저술 집필
  • 1870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 라빌레트 봉기 지도, 신문 '조국의 위기' 창설
  • 1871.3.17파리 코뮌 직전 체포 — 부재중 코뮌 위원 선출, 베르사유는 대주교와의 맞교환 거부
  • 1872클레르보 감옥에서 『별을 통한 영원』 집필
  • 1879보르도에서 하원의원 당선(무효화), 사면 석방
  • 1880신문 'Ni Dieu ni maître' 창간, 프랑스 전역 순회 연설

폴 라파르그

Paul Lafargue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쿠바 1842–1911 ✕ 자살

『게으를 권리』를 쓴 마르크스의 사위,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 국회의원

「건강한 육체와 정신으로, 나는 무자비한 노년이 내게서 모든 즐거움을 하나씩 빼앗아 가기 전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 유서, 1911년 11월 25일

쿠바 출생의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쥘 게드와 프랑스 노동자당(POF)을 창당했으며, 경제결정론을 역사적 방법론으로 체계화했다. 말년에는 장 조레스의 개혁주의에 맞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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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4–1865파리에서 의학 공부, 프루동주의 무정부주의자로 제1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 가입
  • 1866–1868런던으로 이주, 마르크스 가문과 교류; 제1인터내셔널 총평의회 위원, 스페인 담당 서기
  • 1868카를 마르크스의 둘째 딸 라우라 마르크스와 결혼
  • 1871–1872파리코뮌 탄압 후 스페인 마드리드로 망명, 『라 에만시파시온』으로 마르크스주의 선전, 아나키스트와 투쟁
  • 1880쥘 게드와 프랑스 노동자당(POF) 공동 창당; 『게으를 권리』 초고를 『레갈리테』에 연재
  • 1882–1891파리로 귀환, POF 이론가로 활동; 파업·선거 투쟁 주도하며 수차례 투옥
  • 1891릴 선거구에서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 하원의원 당선 — 수감 중 선거운동
  • 1890s–1905조레스의 개혁주의와 논쟁하며 정통 마르크스주의 수호; 『경제결정론』, 『소유의 기원』 등 주요 저작 출간
  • 1908–1911툴루즈 통일대회 참석 후 정계 은퇴; 회고록 『카를 마르크스에 대한 나의 추억』 집필

필리프 페탱

Philippe Pétain
외국 정치가 프랑스 프랑스 1856–1951 ○ 반역죄 유죄 · 종신형

베르됭의 영웅에서 비시의 협력자로 전락한 원수

1940년 6월 17일, 페탱은 프랑스에 전투를 중지하겠다고 방송했다.

필리프 페탱은 제1차 세계대전의 장군으로, 베르됭 전투의 승리와 병사들의 사기를 회복한 지휘로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1940년 독일의 침공 앞에서 전쟁 지속을 반대하고 휴전을 요청했으며, 의회가 헌법 제정 권한을 넘긴 뒤 비시 프랑스의 국가수반으로 공화국을 권위주의 체제로 대체했다. 그의 정부는 독일과 협력하고 반유대주의 법령을 시행해 점령 질서에 프랑스 국가기구를 결합시켰다. 해방 뒤 고등법원은 그를 적과의 내통과 반역으로 사형 선고했으며, 드골은 이를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76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입학
  • 1916베르됭 전투 프랑스군 지휘
  • 1917–1918프랑스군 총사령관
  • 1934전쟁장관
  • 1939–1940주스페인 프랑스 대사
  • 1940.06프랑스 각료회의 의장
  • 1940–1944비시 프랑스 국가수반
  • 1945–1951반역죄 유죄 판결과 종신 구금

민족·국가적 배경 인물 49전체보기

에티엔 카베

Étienne Cabet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 1788–1856 ○ 뇌졸중

'공산주의'라는 말을 만든 이카리아 운동의 창시자

1848년 2월 3일, 카베의 추종자 69명이 르아브르 항구에서 배에 올랐다. '이카리아로 가자!' 그들은 신대륙에 지상의 공산낙원을 세우러 떠났다.

프랑스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이자 이카리아 운동의 창시자. 1840년 『이카리아 여행』을 출판하여 노동자 협동조합에 기반한 공산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했고, '공산주의(communisme)'라는 말을 처음 정치적 용어로 정립했다. 약 40만 추종자를 거느린 당대 가장 대중적인 사회주의 옹호자로, 『진정한 기독교』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사회 평등의 복음으로 재해석했다. 1848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와 일리노이에 이카리아 공동체를 세웠고, 1898년까지 이어진 미국 최장수 비종교 공동체 실험이 되었다. 계몽주의 유토피아 사상과 노동자 운동을 잇는 교량이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788디종 출생. 변호사 자격 취득
  • 1830–18317월혁명 참여 후 바스티아 검찰총장. 코트도르 하원의원 당선
  • 1833–1834『르 포퓰레르』 창간. 반정부 논설로 반역죄 유죄 판결, 영국 망명
  • 1834–1839영국에서 로버트 오웬과 교류하며 공산주의 사상 구상
  • 1840『이카리아 여행』 출판. 스스로 '공산주의자'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
  • 1841–1847『르 포퓰레르』 복간. 약 40만 명 독자층 확보, 『진정한 기독교』 출간
  • 1848추종자들과 미국으로 이주. 텍사스·일리노이에 이카리아 공동체 설립
  • 1849–1856노부 이카리아 공동체 지도자. 내부 갈등 속 1856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사망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 1805–1881 ○ 뇌졸중

37년을 감옥에서 보낸 봉기의 전략가, '블랑키즘'으로 레닌주의에 길을 열다

"나는 3천만 프랑스인, 나와 같은 프롤레타리아들에게 그들이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한 죄로 고발되었습니다." — 1832년 '15인 재판' 최후진술

프랑스 혁명적 사회주의자. 소수 전위의 무장봉기와 혁명적 독재를 주장하는 블랑키즘을 체계화해 마르크스주의와 볼셰비키 전위당론에 영향을 미쳤다. 37년을 감옥에서 보내 '유폐된 자'로 불렸다.

상세 이력 보기
  • 1824카르보나리 가입 — 군주제 전복을 위한 비밀결사
  • 1827샤를 10세 반대 시위 참여 — 세 차례 부상, 목에 총상
  • 18307월 혁명 참전 — 루이 필리프 입헌군주제에 환멸, 공화주의로 전환
  • 1832'민중의 벗(Amis du peuple)' 결성, 체포 — 재판에서 직업을 '프롤레타리아'라 밝힘
  • 1837바르베스·베르나르와 함께 비밀결사 '계절의 모임(Société des Saisons)' 창설
  • 1839.5파리 봉기 주도 — 실패, 사형 선고 후 종신형으로 감형
  • 18482월 혁명으로 석방, '공화주의 중앙협회' 설립 — 적기 채택과 선거 연기 요구
  • 1849–18595월 봉기 실패로 10년형 — 여러 교도소에서 복역
  • 1865–1870브뤼셀 망명 — 『무장봉기 지침』 등 주요 저술 집필
  • 1870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 라빌레트 봉기 지도, 신문 '조국의 위기' 창설
  • 1871.3.17파리 코뮌 직전 체포 — 부재중 코뮌 위원 선출, 베르사유는 대주교와의 맞교환 거부
  • 1872클레르보 감옥에서 『별을 통한 영원』 집필
  • 1879보르도에서 하원의원 당선(무효화), 사면 석방
  • 1880신문 'Ni Dieu ni maître' 창간, 프랑스 전역 순회 연설

필리프 페탱

Philippe Pétain
외국 정치가 프랑스 프랑스 1856–1951 ○ 반역죄 유죄 · 종신형

베르됭의 영웅에서 비시의 협력자로 전락한 원수

1940년 6월 17일, 페탱은 프랑스에 전투를 중지하겠다고 방송했다.

필리프 페탱은 제1차 세계대전의 장군으로, 베르됭 전투의 승리와 병사들의 사기를 회복한 지휘로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1940년 독일의 침공 앞에서 전쟁 지속을 반대하고 휴전을 요청했으며, 의회가 헌법 제정 권한을 넘긴 뒤 비시 프랑스의 국가수반으로 공화국을 권위주의 체제로 대체했다. 그의 정부는 독일과 협력하고 반유대주의 법령을 시행해 점령 질서에 프랑스 국가기구를 결합시켰다. 해방 뒤 고등법원은 그를 적과의 내통과 반역으로 사형 선고했으며, 드골은 이를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76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입학
  • 1916베르됭 전투 프랑스군 지휘
  • 1917–1918프랑스군 총사령관
  • 1934전쟁장관
  • 1939–1940주스페인 프랑스 대사
  • 1940.06프랑스 각료회의 의장
  • 1940–1944비시 프랑스 국가수반
  • 1945–1951반역죄 유죄 판결과 종신 구금

장 조레스

Jean Jaurès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 1859–1914 ✕ 암살

노동자 국제 연대와 반전 평화를 위해 싸우다 암살당한 프랑스 사회당 지도자

「공화국의 포도주 통 속에 사회혁명의 포도주를 준비하십시오!」 — 1905년 5월 1일, 마로생의 포도 재배 협동조합을 방문한 자리에서

장 조레스는 프랑스 사회주의 통합의 중심 인물로, 1902년 프랑스 사회당을 이끌고 1905년 쥘 게드의 혁명적 사회당과 통합해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를 출범시켰다. 1904년 창간한 《뤼마니테》를 통해 개혁적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고,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반유대주의와 군국주의에 맞서 공화국의 양심을 대변했다. 마르크스주의 계급 분석에 기초한 《프랑스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사》(1900~1903)를 저술해 프랑스 혁명사학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14년 7월, 독일 사민당과의 국제적 총파업으로 세계대전을 막으려 했으나 개전 사흘 전 민족주의자 라울 비용의 총탄에 암살당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5타른주 공화파 의원으로 국민의회 진출
  • 1892–1893카르모 광부 총파업 지지, 독립 사회당 의원으로 재선
  • 1898–1902드레퓌스 사건에서 진보 진영의 양심으로 활동, 《라 프티트 레퓌블리크》 편집
  • 1902프랑스 사회당 창당 및 지도
  • 1904《뤼마니테》 창간
  • 1905SFIO 출범 — 프랑스 사회주의 정당 통합 주도
  • 1900–1903《프랑스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사》 저술
  • 1914반전 총파업 운동 전개 중 암살당함

직접 연루된 역사 사건 10전체보기

1918–1922

내전과 열강의 개입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소비에트 공화국은 백군 장군들과 십여 개 열강의 개입군에 포위된 채 생존을 건 전쟁을 치렀다. 트로츠키가 조직한 붉은 군대는 500만 명 규모로 성장해 콜차크, 데니킨, 유데니치, 브란겔의 군대를 차례로 격파했고, 노동자와 농민 다수는 지주와 구체제의 복귀보다 소비에트 권력을 선택했다. 그러나 승리의 대가는 참혹했다. 전쟁과 기근, 전염병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양측 모두가 자행한 테러와 전시의 비상 통치는 이후 소비에트 국가의 성격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34.01–07

1934년 2월 6일 파시스트 폭동

1934년 2월 6일 저녁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서 극우 동맹들이 하원 의사당을 향해 밀어붙이다 경찰 발포로 15명이 죽었다. 스타비스키 금융 사기 사건으로 의회 부패에 대한 분노가 쌓인 끝이었고, 극우 언론은 스타비스키가 유대인 이민자 가정 출신이라는 점을 앞세워 그 분노를 반유대 선동으로 옮겨 놓았다. 이튿날 의회 다수를 쥐고 있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사임하면서, 제3공화국에서 처음으로 거리가 정부를 무너뜨렸다. 사흘 뒤 공산당 시위에서 다시 9명이 죽었고, 2월 12일 총파업에서는 따로 행진하던 사회당과 공산당의 대열이 나시옹 광장에서 만나 「단결!」을 외쳤다. 오늘날 연구는 그날 밤을 조직된 쿠데타로 보지 않지만, 히틀러 집권 1년째였던 당시 좌파에게 그것은 프랑스판 파시즘의 총연습이었다. 이 공포가 사회파시즘 노선을 무너뜨리고 7월 통일행동협정과 이듬해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인민전선 보고로 이어졌다.

1934–1938

프랑스 인민전선과 1936년 총파업

1934년 2월 극우 동맹들의 폭동을 계기로 사회당·공산당·급진당이 결성한 인민전선은 1936년 5월 총선에서 승리해 레옹 블룸의 정부를 세웠다. 승리와 취임 사이의 공백기에 프랑스 역사상 최대의 파업이 터졌다. 6월 한 달에만 파업 12,142건에 참가자 183만 명, 그 4분의 3이 공장을 점거한 채 기계 옆에서 먹고 자는 새로운 방식의 파업이었다. 6월 7일 밤 마티뇽 협정으로 사용자들은 임금 인상과 단체협약, 노조 활동의 자유를 한꺼번에 내주었고, 의회는 곧바로 2주 유급휴가와 주 40시간제를 입법했다. 그러나 스페인 불개입과 프랑 평가절하, 개혁의 「휴지기」를 거치며 연합은 안에서부터 무너졌고, 1938년 11월 총파업의 패배로 인민전선 시대는 막을 내렸다.

1940–1944

프랑스 침공과 비시 정부

이 사건은 1940년 5월 10일부터 1944년 해방까지 독일의 프랑스 정복과 제3공화국의 붕괴, 비시의 통치를 가리킨다. 프랑스군은 마지노선 방어와 벨기에 진입을 결합했지만, 독일군은 아르덴을 뚫어 뫼즈강을 건넌 뒤 해협으로 진격했다. 독일군은 6월 14일 파리를 점령했고, 됭케르크 철수에도 프랑스의 조직적 저항은 무너졌다. 필리프 페탱은 6월 17일 휴전을 요청했고 6월 22일 협정으로 북부와 대서양 연안은 독일 점령지, 남부는 비시의 통치 아래 놓였다. 7월 10일 국민의회가 페탱에게 전권을 부여했고, 비시는 독일과 협력하며 반유대 법령, 경찰 검거, 경제 수탈과 노동 동원을 시행했다. 1942년 11월 남부까지 점령된 뒤 1944년 해방으로 체제는 붕괴했다.

1941–1944

제2전선과 노르망디 상륙

제2전선과 노르망디 상륙은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뒤 제기된 서유럽 재개전 요구가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오버로드 작전으로 실현된 과정이다. 이 요구는 동부전선의 압력을 덜어 달라는 소련의 군사적 필요와, 충분한 병력·상륙정·공중우세 없이는 실패할 수 있다는 영미 지휘부의 판단이 충돌하면서 지연되었다. 영국과 미국은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먼저 공격했고, 1943년 회담에서 해협 횡단 상륙을 확정한 뒤 영국 남부에 병력과 물자를 모았다. 1944년 6월 6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지휘한 연합군은 공수부대와 해군 포격에 이어 유타, 오마하, 골드, 주노, 소드 다섯 해변에 상륙했다. 기만작전은 독일군이 주공을 파드칼레로 오인하게 만들었지만 해안의 요새와 전투는 큰 희생을 요구했다. 연합군은 6월 말까지 교두보를 보급 가능한 전선으로 바꾸고, 8월 파리 해방과 독일 국경을 향한 서진의 기반을 마련했다.

1940–1944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해방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해방은 1940년 독일의 프랑스 패배와 비시 정부 수립에서 시작되어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프로방스 상륙과 프랑스 영토의 해방으로 이어진 저항과 국가 재건의 과정이다. 독일 점령, 비시 당국의 협력과 탄압, 강제노동, 반유대주의 정책이 저항의 조건을 만들었고, 샤를 드골의 자유 프랑스와 국내의 다양한 정치 세력, 특히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공화주의자·가톨릭 세력이 서로 다른 목표를 지닌 채 지하 언론, 정보 수집, 탈출 지원, 파업, 사보타주와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장 물랭은 1943년 국민저항위원회(CNR)를 조직해 주요 운동을 조정했으며, 1944년 레지스탕스는 프랑스 내무군(FFI)으로 통합되어 연합군의 진격을 지원하고 파리 봉기에 참여했다. 1944년 8월 파리 해방 뒤 드골의 임시정부가 공화국의 연속성을 선언하면서 비시 체제의 국가적 정당성은 부정되었다.

1947–1948

마셜 플랜과 냉전의 시작

1947년 미국이 유럽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을 내놓자, 소련은 그것을 미국 자본에 유럽을 종속시키려는 시도로 규정했다. 몰로토프는 파리 회담에서 협상을 결렬시켰고, 스탈린은 동유럽 국가들이 원조를 받는 것을 막았다. 즈다노프의 「두 진영」 선언과 코민포름 창설로 세계는 냉전의 두 블록으로 굳어졌다.

1948–1949

베를린 봉쇄와 공수

베를린 봉쇄(1948년 6월 24일–1949년 5월 12일)는 소련이 서방 연합국이 장악한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철도·도로·수로를 차단한 냉전 최초의 대규모 대치였다. 직접적 발단은 1948년 6월 서방이 독일 서부 점령지구에 도이치마르크를 도입하면서 소련 점령지구와의 경제적 분리가 확정된 데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베를린을 봉쇄하면 서방이 통화 개혁을 철회하거나 서베를린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계산했으나, 해리 S. 트루먼 행정부는 철수하지 않고 베를린 공수 작전으로 맞섰다. 미군과 영국 공군은 15개월 동안 27만 8,000회 이상의 비행으로 233만 톤의 식량·석탄·연료를 서베를린에 수송했고, 절정기에는 30초마다 한 대의 수송기가 베를린에 착륙했다. 동시에 서방의 대응봉쇄로 동독 지역은 석탄과 강재 부족에 시달렸다.

1961

베를린 장벽 건설

베를린 장벽은 1961년 8월 13일 동독 정부가 서베를린을 둘러싸며 쌓은 156km의 경계 요새 시설이다. 1949년부터 1961년까지 350만 명의 동독 시민이 서독으로 탈출했으며, 그중 상당수가 베를린의 개방된 구역 경계를 통해 빠져나갔다. 숙련 노동자와 지식인의 대규모 유출로 동독 경제가 붕괴 직전에 이르자, 발터 울브리히트 동독 지도자는 니키타 흐루쇼프를 설득하여 경계 봉쇄를 승인받았다. 1961년 8월 3~5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바르샤바 조약 회의에서 공식 합의가 이루어졌고, 8월 12일 밤부터 13일 새벽 사이 약 2만 5천 명의 동독 군경 병력이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통로를 철조망으로 차단했다. 서방 3국은 베를린의 4개국 공동관리 지위를 직접 침해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사적 대응을 피했고,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은 "장벽은 전쟁보다 훨씬 낫다"고 결론지었다. 콘크리트 장벽은 이후 28년간 냉전의 상징이 되었고, 최소 140명이 장벽을 넘다 사망했다.

1975

헬싱키 협정

헬싱키 협정(1975년 8월 1일)은 유럽 33개국과 미국, 캐나다 등 35개국이 핀란드 헬싱키에서 서명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최종의정서'이다. 소련은 1954년부터 유럽 전후 국경의 공식 승인을 목표로 유럽안보회의를 추진해 왔고, 1970년대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서방이 마침내 응했다. 1972년 사전 협의, 1973~1975년 제네바 실무 협상을 거쳐 35개국 정상이 헬싱키에 모였다. 최종의정서는 정치·군사(제1바스켓), 경제·과학(제2바스켓), 인권·인도적 협력(제3바스켓) 등 세 갈래로 구성되었다. 브레즈네프는 국경 불가침 원칙을 관철시켰다고 판단했으나, 제3바스켓의 인권 조항은 소련과 동구권 내 반체제 인사들에게 정부가 스스로 서명한 약속을 근거로 활동할 발판을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