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6년 생퓔장에서 태어나 나바르 보병연대와 아르마냐크 연대에서 복무하고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뒤 1780년 영지로 물러났다. 1793년 봉기가 일어나자 주민들의 추대를 망설이다 받아들여 방데 남부 전선을 지키는 중부군의 지휘관이 되었고, 야전 지휘는 부관 사피노 드 라레리에게 맡겼다. 6월과 7월 뤼송을 공격했으나 격퇴되었고 8월 14일 뤼송 전투에서도 졌다. 갈레른 행군에서 10월 26일 앙트람 전투 때 라로슈자클랭과 함께 중앙을 이끌어 서부군을 무너뜨렸으나 치명상을 입었고, 12월 5일 보제 근처에서 숨졌다. 동생 샤를 오귀스탱도 1793년 3월 봉기를 이끌다 전사했다.
1792년 9월 20일 발미에서 켈레르만은 뒤무리에의 요청으로 중부군을 이끌고 합류해 서쪽 구릉에 포병을 배치했다. 탄약 마차 폭발로 동요한 보병을 안정시키고 ‘Vive la Nation’을 외쳐 사기를 결집했으며 프로이센군은 철수했다.
1735년 5월 28일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난 프랑스 군인이다. 작센 출신 가문이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했고 조부 대에 귀족이 되었다. 1750년(또는 1752년) 왕립군에 입대해 7년 전쟁에 참전했고, 1788년 준장이 되어 구체제에서 장성이 된 유일한 제국 원수가 되었다. 1789년 혁명에 호의적이었고 1792년 9월 20일 발미 전투에서 중부군을 이끌어 프로이센군을 격퇴한 공로로 ‘발미의 승리자’로 불렸다. 1793년 11월 불충성 혐의로 13개월 수감되었다가 로베스피에르 몰락 후 석방·복직했다. 1804년 제국 원수, 1808년 발미 공작이 되었고 1814년 상원에서 나폴레옹 퇴위에 찬성한 뒤 루이 18세 치하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1820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1792년 발미와 즈마프의 승리로 혁명을 구했으나 1793년 3월 18일 네르빈덴에서 패배한 뒤 파리 진군을 기도했고, 국민공회가 보낸 위원들을 오스트리아에 인도한 뒤 전향했다. 그 전향은 지롱드파를 매장했다.
프랑스 혁명전쟁기의 장군·정치인. 왕정 시대 왕군 장교로 7년 전쟁에 참전하고 셰르부르 항만 책임자를 지냈다. 혁명 후 자코뱅 클럽에 가담했으며 지롱드파의 지지로 1792년 3월 외무장관이 되어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주도하고 잠시 육군장관을 겸했다. 루이 16세와 갈등해 사임한 뒤 북부군 사령관으로 켈레르만과 함께 발미(1792년 9월 20일)에서 프로이센군을 물리치고 즈마프(1792년 11월 6일)에서 승리했다. 1793년 3월 18일 네르빈덴에서 패배한 뒤 파리 진군과 국민공회 해산, 1791년 헌법과 입헌군주정 복고를 기도했으나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오스트리아 측으로 넘어갔다. 망명 생활 끝에 영국에서 사망했고 이름은 파리 개선문에 새겨졌다.
상세 이력 보기
1739캉브레에서 출생. 출처에 따라 1월 25일·26일·27일로 생년월일 기록이 갈린다.
1792지롱드파 지지로 외무장관이 되어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주도하고 잠시 육군장관을 지냈다.
1726년 생퓔장에서 태어나 나바르 보병연대와 아르마냐크 연대에서 복무하고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뒤 1780년 영지로 물러났다. 1793년 봉기가 일어나자 주민들의 추대를 망설이다 받아들여 방데 남부 전선을 지키는 중부군의 지휘관이 되었고, 야전 지휘는 부관 사피노 드 라레리에게 맡겼다. 6월과 7월 뤼송을 공격했으나 격퇴되었고 8월 14일 뤼송 전투에서도 졌다. 갈레른 행군에서 10월 26일 앙트람 전투 때 라로슈자클랭과 함께 중앙을 이끌어 서부군을 무너뜨렸으나 치명상을 입었고, 12월 5일 보제 근처에서 숨졌다. 동생 샤를 오귀스탱도 1793년 3월 봉기를 이끌다 전사했다.
1792년 9월 20일 발미에서 켈레르만은 뒤무리에의 요청으로 중부군을 이끌고 합류해 서쪽 구릉에 포병을 배치했다. 탄약 마차 폭발로 동요한 보병을 안정시키고 ‘Vive la Nation’을 외쳐 사기를 결집했으며 프로이센군은 철수했다.
1735년 5월 28일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난 프랑스 군인이다. 작센 출신 가문이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했고 조부 대에 귀족이 되었다. 1750년(또는 1752년) 왕립군에 입대해 7년 전쟁에 참전했고, 1788년 준장이 되어 구체제에서 장성이 된 유일한 제국 원수가 되었다. 1789년 혁명에 호의적이었고 1792년 9월 20일 발미 전투에서 중부군을 이끌어 프로이센군을 격퇴한 공로로 ‘발미의 승리자’로 불렸다. 1793년 11월 불충성 혐의로 13개월 수감되었다가 로베스피에르 몰락 후 석방·복직했다. 1804년 제국 원수, 1808년 발미 공작이 되었고 1814년 상원에서 나폴레옹 퇴위에 찬성한 뒤 루이 18세 치하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1820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1792년 발미와 즈마프의 승리로 혁명을 구했으나 1793년 3월 18일 네르빈덴에서 패배한 뒤 파리 진군을 기도했고, 국민공회가 보낸 위원들을 오스트리아에 인도한 뒤 전향했다. 그 전향은 지롱드파를 매장했다.
프랑스 혁명전쟁기의 장군·정치인. 왕정 시대 왕군 장교로 7년 전쟁에 참전하고 셰르부르 항만 책임자를 지냈다. 혁명 후 자코뱅 클럽에 가담했으며 지롱드파의 지지로 1792년 3월 외무장관이 되어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주도하고 잠시 육군장관을 겸했다. 루이 16세와 갈등해 사임한 뒤 북부군 사령관으로 켈레르만과 함께 발미(1792년 9월 20일)에서 프로이센군을 물리치고 즈마프(1792년 11월 6일)에서 승리했다. 1793년 3월 18일 네르빈덴에서 패배한 뒤 파리 진군과 국민공회 해산, 1791년 헌법과 입헌군주정 복고를 기도했으나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오스트리아 측으로 넘어갔다. 망명 생활 끝에 영국에서 사망했고 이름은 파리 개선문에 새겨졌다.
상세 이력 보기
1739캉브레에서 출생. 출처에 따라 1월 25일·26일·27일로 생년월일 기록이 갈린다.
1792지롱드파 지지로 외무장관이 되어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주도하고 잠시 육군장관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