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라는 말을 만든 이카리아 운동의 창시자
1848년 2월 3일, 카베의 추종자 69명이 르아브르 항구에서 배에 올랐다. '이카리아로 가자!' 그들은 신대륙에 지상의 공산낙원을 세우러 떠났다.
프랑스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이자 이카리아 운동의 창시자. 1840년 『이카리아 여행』을 출판하여 노동자 협동조합에 기반한 공산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했고, '공산주의(communisme)'라는 말을 처음 정치적 용어로 정립했다. 약 40만 추종자를 거느린 당대 가장 대중적인 사회주의 옹호자로, 『진정한 기독교』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사회 평등의 복음으로 재해석했다. 1848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와 일리노이에 이카리아 공동체를 세웠고, 1898년까지 이어진 미국 최장수 비종교 공동체 실험이 되었다. 계몽주의 유토피아 사상과 노동자 운동을 잇는 교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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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88디종 출생. 변호사 자격 취득
- 1830–18317월혁명 참여 후 바스티아 검찰총장. 코트도르 하원의원 당선
- 1833–1834『르 포퓰레르』 창간. 반정부 논설로 반역죄 유죄 판결, 영국 망명
- 1834–1839영국에서 로버트 오웬과 교류하며 공산주의 사상 구상
- 1840『이카리아 여행』 출판. 스스로 '공산주의자'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
- 1841–1847『르 포퓰레르』 복간. 약 40만 명 독자층 확보, 『진정한 기독교』 출간
- 1848추종자들과 미국으로 이주. 텍사스·일리노이에 이카리아 공동체 설립
- 1849–1856노부 이카리아 공동체 지도자. 내부 갈등 속 1856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사망
37년을 감옥에서 보낸 봉기의 전략가, '블랑키즘'으로 레닌주의에 길을 열다
"나는 3천만 프랑스인, 나와 같은 프롤레타리아들에게 그들이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한 죄로 고발되었습니다." — 1832년 '15인 재판' 최후진술
프랑스 혁명적 사회주의자. 소수 전위의 무장봉기와 혁명적 독재를 주장하는 블랑키즘을 체계화해 마르크스주의와 볼셰비키 전위당론에 영향을 미쳤다. 37년을 감옥에서 보내 '유폐된 자'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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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4카르보나리 가입 — 군주제 전복을 위한 비밀결사
- 1827샤를 10세 반대 시위 참여 — 세 차례 부상, 목에 총상
- 18307월 혁명 참전 — 루이 필리프 입헌군주제에 환멸, 공화주의로 전환
- 1832'민중의 벗(Amis du peuple)' 결성, 체포 — 재판에서 직업을 '프롤레타리아'라 밝힘
- 1837바르베스·베르나르와 함께 비밀결사 '계절의 모임(Société des Saisons)' 창설
- 1839.5파리 봉기 주도 — 실패, 사형 선고 후 종신형으로 감형
- 18482월 혁명으로 석방, '공화주의 중앙협회' 설립 — 적기 채택과 선거 연기 요구
- 1849–18595월 봉기 실패로 10년형 — 여러 교도소에서 복역
- 1865–1870브뤼셀 망명 — 『무장봉기 지침』 등 주요 저술 집필
- 1870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 라빌레트 봉기 지도, 신문 '조국의 위기' 창설
- 1871.3.17파리 코뮌 직전 체포 — 부재중 코뮌 위원 선출, 베르사유는 대주교와의 맞교환 거부
- 1872클레르보 감옥에서 『별을 통한 영원』 집필
- 1879보르도에서 하원의원 당선(무효화), 사면 석방
- 1880신문 'Ni Dieu ni maître' 창간, 프랑스 전역 순회 연설
베르됭의 영웅에서 비시의 협력자로 전락한 원수
1940년 6월 17일, 페탱은 프랑스에 전투를 중지하겠다고 방송했다.
필리프 페탱은 제1차 세계대전의 장군으로, 베르됭 전투의 승리와 병사들의 사기를 회복한 지휘로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1940년 독일의 침공 앞에서 전쟁 지속을 반대하고 휴전을 요청했으며, 의회가 헌법 제정 권한을 넘긴 뒤 비시 프랑스의 국가수반으로 공화국을 권위주의 체제로 대체했다. 그의 정부는 독일과 협력하고 반유대주의 법령을 시행해 점령 질서에 프랑스 국가기구를 결합시켰다. 해방 뒤 고등법원은 그를 적과의 내통과 반역으로 사형 선고했으며, 드골은 이를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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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6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입학
- 1916베르됭 전투 프랑스군 지휘
- 1917–1918프랑스군 총사령관
- 1934전쟁장관
- 1939–1940주스페인 프랑스 대사
- 1940.06프랑스 각료회의 의장
- 1940–1944비시 프랑스 국가수반
- 1945–1951반역죄 유죄 판결과 종신 구금
노동자 국제 연대와 반전 평화를 위해 싸우다 암살당한 프랑스 사회당 지도자
「공화국의 포도주 통 속에 사회혁명의 포도주를 준비하십시오!」 — 1905년 5월 1일, 마로생의 포도 재배 협동조합을 방문한 자리에서
장 조레스는 프랑스 사회주의 통합의 중심 인물로, 1902년 프랑스 사회당을 이끌고 1905년 쥘 게드의 혁명적 사회당과 통합해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를 출범시켰다. 1904년 창간한 《뤼마니테》를 통해 개혁적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고,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반유대주의와 군국주의에 맞서 공화국의 양심을 대변했다. 마르크스주의 계급 분석에 기초한 《프랑스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사》(1900~1903)를 저술해 프랑스 혁명사학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14년 7월, 독일 사민당과의 국제적 총파업으로 세계대전을 막으려 했으나 개전 사흘 전 민족주의자 라울 비용의 총탄에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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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5타른주 공화파 의원으로 국민의회 진출
- 1892–1893카르모 광부 총파업 지지, 독립 사회당 의원으로 재선
- 1898–1902드레퓌스 사건에서 진보 진영의 양심으로 활동, 《라 프티트 레퓌블리크》 편집
- 1902프랑스 사회당 창당 및 지도
- 1904《뤼마니테》 창간
- 1905SFIO 출범 — 프랑스 사회주의 정당 통합 주도
- 1900–1903《프랑스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사》 저술
- 1914반전 총파업 운동 전개 중 암살당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