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조프 문서집 (1923~1939)
인물니콜라이 예조프, 이오시프 스탈린, 겐리흐 야고다, 레프 트로츠키, 라브렌티 베리야, 미하일 톰스키, 게오르기 몰차노프, 미하일 프리놉스키, 세르게이 키로프,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 알렉세이 리코프, 니콜라이 부하린,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게오르기 말렌코프, 안드레이 비신스키, 카를 파우케르, 바실리 울리히, 니콜라이 리치코프, 시몬 페틀류라, 네스토르 마흐노, 세묜 피린, 막심 고리키, 안드레이 안드레예프, 게오르기 퍄타코프, 그리고리 소콜니코프, 카를 라데크, 레오니트 세레브랴코프, 알렉산드르 우스펜스키, 아르투르 아르투조프, 미하일 투하쳅스키, 얀 가마르니크, 이오나 야키르, 이에로님 우보레비치, 아우구스트 코르크, 로베르트 에이데만, 보리스 펠트만, 비토프트 푸트나, 아벨 예누키제, 프세볼로트 발리츠키, 그리고리 오르조니키제, 겐리흐 류시코프,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파벨 포스티셰프, 알렉산드르 포스크료비셰프, 블라디미르 레닌, 스타니슬라프 레덴스, 레오니트 자콥스키, 야코프 아그라노프, 안드레이 즈다노프, 아나스타스 미코얀, 마트베이 시키랴토프, 세르게이 므라치콥스키, 이반 스미르노프, 니콜라이 우글라노프, 바실리 시미트, 레본 미르조얀, 레프 카라한, 피에르 라발, 앤서니 이든, 니콜라이 블라시크, 마르테먄 류틴, 이즈라일 다긴, 블라디미르 쿠르스키, 세르게이 미로노프, 빅토르 주라블료프, 미하일 리트빈, 레프 벨스키, 레오니트 니콜라예프, 야코프 리프시츠, 마트베이 베르만, 스타니스와프 코시오르, 블라디미르 체사르스키, 세라피마 리조바, 게오르기 프로코피예프, 그리고리 예브도키모프, 레오폴트 아베르바흐, 이오시프 운쉴리흐트, 글레프 보키, 보리스 셰볼다예프, 니키타 피보바로프, 알렉산드르 벨로보로도프, 알렉산드르 슬렙코프, 니콜라이 골로데트, 알렉산드르 체르뱌코프, 로베르트 에이헤, 블라스 추바리, 세르고 고글리제, 그리고리 그린코, 폴리카르프 므디바니, 빌헬름 크노린, 오시프 퍄트니츠키, 예브헨 코노발레츠,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이그나티 소스놉스키, 알렉산드르 콜차크, 안톤 데니킨, 니키타 흐루쇼프, 미르 자파르 바기로프, 파벨 불라노프, 블라디미르 넵스키, 게오르기 블라고느라보프 용어내무인민위원부(NKVD), 대숙청, 예조프시나, NKVD 작전명령 제00447호, 민족 작전, 폴란드 작전, 트로이카, 제1범주 / 제2범주 사건대숙청
바르뷔스의 사망 경위를 조사할 필요에 관해 스탈린에게 보낸 메모 (1938년 3월 20일)
1938년 3월 20일
제102110호
스탈린 동지
몰로토프 동지
A. 쿠렐라의 편지 사본을 보낸다.
소련 내무인민위원
국가안전 총위원
예조프
독일어에서 번역
앙리 바르뷔스의 죽음 문제에 관하여
부하린·리코프 재판에 비추어 앙리 바르뷔스의 죽음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난 몇 해 동안 바르뷔스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이자 친구로서 알게 된 몇 가지 정황을 지적해야 한다고 본다. 이 정황들은 바르뷔스도 범죄의 희생자가 되었을 가능성을 짐작할 권리를 준다.
1. 바르뷔스가 죽을 때의 겉으로 드러난 정황은 고리키가 죽을 때의 정황과 일치한다. 바르뷔스는 그때 건강 상태가 특히 좋은 가운데 모스크바로 떠났다. 1935년에 앓은 폐렴도 그때 가볍게 넘겼다. 내가 거의 날마다 그와 함께 있던 그 무렵 그는 유달리 원기가 넘쳤다.
2. 트로츠키파와 트로츠키 자신이 고리키에게 품은 적대감에 관해 공소장에 적힌 내용은 바르뷔스에게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그리고,
a) 암스테르담 대회 뒤 트로츠키와 그의 언론은 바르뷔스 개인을 겨냥해 유달리 악랄한 공격을 퍼부었다.
b) 퍄트니츠키의 첩자 카롤스키는 코펜하겐 반파시스트 세계 대회(1933년)를 준비하는 동안 바르뷔스에 대해 추악한 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c) 프랑스 트로츠키파는 바르뷔스에게 유달리 원한이 깊었다. 바르뷔스가 1933년 9월 내게 《몽드》 편집부에서 트로츠키파와 반(半)트로츠키파를 숙청하라고 맡겼기 때문이다(내가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자들이 암스테르담 대회 전까지 오랫동안 바르뷔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기 때문에 그들의 증오는 더욱 커졌다.
3. 1933년 여름과 가을 퍄트니츠키와 크노린에게 바르뷔스에 대한 유달리 강한 증오가 나타났다. 나는 그 모든 원인을 세세한 데까지 자세히 알고 있으나, 코민테른의 극비 사안에 관한 것이고 그 범위마저 넘어서므로 특별 허가가 있어야만 말할 수 있다.
또 크렘린 의사들 가운데 누가 바르뷔스를 치료했는지도 밝혀야 한다.
알프레트 쿠렐라
1938년 3월 8일
「조국 반역자의 아내」 체포에 관해 예조프와 베리야가 스탈린에게 올린 특별보고 (1938년 10월 15일)
1938년 10월 15일
제109173호
일급비밀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서기 스탈린 동지 앞
소련 NKVD의 제안에 따라 1937년 7월 5일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죄상이 드러난 조국 반역자, 우익·트로츠키파 간첩의 아내들을 탄압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을 바탕으로 소련 NKVD는 1937년 8월 15일 자 명령 제00486호를 발령했다. 이 명령은 1936년 8월 1일 이후 군사 참사회와 군사 재판소에서 제1·제2 범주로 판결받은 조국 반역자, 우익·트로츠키파 간첩·파괴 공작 조직 성원의 아내들을 체포하도록 규정했다. 이후로는 조국 반역자의 아내를 마련된 절차에 따라 남편과 동시에 체포하도록 했다. 체포된 아내들은 그 뒤 교정노동수용소에 수감되거나 5년에서 8년 기한으로 추방되는 등의 처분을 받았다.
지난 기간에 불완전한 자료에 따르면 체포된 배신자의 아내 18,000명 이상이 탄압받았다. 그 가운데 모스크바에서 3,000명 이상, 레닌그라드에서 약 1,500명이다.
앞으로는 판결받은 조국 반역자, 우익·트로츠키파 간첩의 아내를 모두 탄압하지 말고, 그 가운데 다음에 해당하는 자들만 탄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a) 남편의 반혁명 활동을 알고 있었거나 그 활동을 도운 자.
b) NKVD 기관이 그 반소비에트적 기분과 발언에 관한 자료를 가지고 있으며, 정치적으로 의심스럽고 사회적으로 위험한 분자로 볼 수 있는 자.
우리는 탄압받은 인민의 적들의 아내와 그 밖의 가족 구성원의 기분, 연계 등에 대한 첩보 감시를 강화하는 조치를 계획하고 있다. 귀하의 지시를 요청한다.[1]
소련 내무인민위원 예조프
국가안전총국장 베리야
주석
- 둘째 장에 자필 메모가 있다. “예조프 동지와 베리야 동지에게. 옳다. I. 스탈린.” ↩
정치국과 스탈린에게 낸 사임 청원서 (1938년 11월 23일)
[1938년 11월 23일]
일급비밀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정치국 스탈린 동지 앞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저를 소련 내무인민위원 직에서 해임해 주실 것을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요청합니다.
1. 1938년 11월 19일[1] 정치국에서 이바노보주 내무인민위원부 지방국(УНКВД) 국장 주라블료프 동지의 진정서를 논의했을 때, 거기 적힌 사실들이 모두 확인되었습니다. 제가 책임져야 할 핵심은 이것입니다. 진정서에서 드러나듯, 주라블료프 동지는 리트빈, 라드지빌롭스키를 비롯한 NKVD 책임 일꾼들의 수상한 행동을 제게 알렸습니다. 이들은 음모적 반소비에트 활동으로 자기들과 연결된 일부 인민의 적들의 사건을 덮으려 했습니다.
특히 심각했던 것은 리트빈의 수상한 행동에 관한 주라블료프 동지의 메모였습니다. 리트빈은 음모 활동으로 자신과 연결되어 있던 포스티셰프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온갖 수단으로 가로막았습니다.
제가 주라블료프 동지의 신호에 마땅한 볼셰비키적 주의와 예리함을 기울였더라면, 인민의 적 리트빈과 다른 비열한 놈들은 진작에 정체가 드러났을 것이고 NKVD의 가장 책임 있는 자리들을 차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는 분명합니다.
2. 정치국 회의에서 주라블료프 동지의 메모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NKVD 기관들의 작전 업무에 있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다른 결함들도 드러났습니다.
정보 활동의 주된 지렛대인 첩보·정보원 사업은 형편없는 상태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해외 정보 활동은 사실상 처음부터 새로 세워야 합니다. 해외정보부(ИНО)가 간첩들로 들끓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많은 자가 해외 주재관으로 있으면서 외국 주재관들이 심어 놓은 첩자들과 일해 왔습니다.
수사 업무에도 매우 큰 결함이 여럿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가장 중요한 피체포자들을 수사한 사람이 많은 경우 아직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NKVD 안의 음모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사건이 커지지 못하게 막고 초기에 꺼 버렸으며, 무엇보다 체카 일꾼들 가운데 있는 음모 공범들을 숨길 수 있었습니다.
NKVD에서 가장 방치된 부문은 간부 문제였습니다. NKVD 안의 음모자들과 그들과 연결된 외국 정보기관들은 적어도 십여 년에 걸쳐 체카의 수뇌부뿐 아니라 중간층까지, 또 흔히 말단 일꾼들까지 포섭했습니다. 이 점을 헤아렸어야 하는데도 저는 수뇌부와 가장 혐의가 짙은 중간층 일부를 분쇄한 것으로 안심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드러나는 바로는, 새로 발탁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수도 끄나풀이고 음모자입니다.
이 모든 일에 제가 책임을 져야 함은 분명합니다.
3. 저의 가장 심각한 과오는 중앙위원회와 정치국 위원 경호부에서 드러난 상황입니다.
첫째, 그곳에는 파우케르 때부터 있던,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음모자들과 그저 더러운 자들이 상당수 남아 있었습니다.
둘째, 파우케르의 후임으로 뒤에 권총 자살한 쿠르스키와 지금 체포되어 있는 다긴도 음모자로 드러났으며, 이들은 경호부에 자기 사람들을 적잖이 심어 놓았습니다. 저는 뒤의 두 경호 책임자를 정직한 사람으로 믿었습니다. 제가 잘못 보았고,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다른 여러 결함은 건드리지 않더라도, 인민위원부의 체카 작전 업무 전반의 상태는 이와 같습니다.
잘해야 부실한 업무를 조금 설명해 줄 뿐인 여러 객관적 사실은 건드리지 않고, 인민위원부 책임자로서 제가 개인적으로 지은 잘못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제가 이토록 거대하고 책임이 막중한 인민위원부 업무를 감당하지 못했고, 지극히 복잡한 정보 활동 전체를 장악하지 못했음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제 잘못은 이 문제를 제때 그 심각성 그대로, 볼셰비키답게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제기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둘째, 제 잘못은 업무에서 매우 큰 결함을 여럿 보았고, 더구나 제 인민위원부 안에서는 그 결함을 비판까지 하면서도, 동시에 이 문제들을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제기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몇몇 성과에 만족하고 결함을 덮어 가며 혼자 허우적거리면서 일을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바로잡는 일이 더뎠고, 그러면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셋째, 제 잘못은 간부를 배치할 때 흔히 실무에만 매달려 접근한 데 있습니다. 많은 경우 어떤 일꾼을 정치적으로 믿지 못하면서도 체포를 미루고, 다른 사람을 구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같은 실무적 이유로 많은 일꾼을 잘못 보아 책임 있는 자리에 추천했고, 그들은 이제 간첩으로 드러났습니다.
넷째, 제 잘못은 중앙위원회와 정치국 위원 경호부를 단호히 숙청하는 일에서 체키스트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안일함을 보인 데 있습니다. 이 안일함은 특히 크렘린 음모자들(브류하노프 등)의 체포를 질질 끈 일에서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다섯째, 제 잘못은 전 극동변강 내무인민위원부 지방국장인 배신자 류시코프와 최근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무인민위원인 배신자 우스펜스키 같은 자들의 정치적 정직성을 의심하면서도 체키스트로서 충분한 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그래서 류시코프가 일본으로 달아나게 했고, 우스펜스키가 아직 어딘지 모를 곳으로 달아나게 했습니다. 우스펜스키 수색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합치면 제가 NKVD에서 계속 일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다시 한 번 저를 소련 내무인민위원 직에서 해임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제 업무에 이 모든 큰 결함과 실책이 있었지만, 그래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중앙위원회의 일상적 지도 아래 NKVD는 적들을 제대로 쳐부쉈습니다.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와 스탈린 동지 앞에 볼셰비키로서 약속하고 다짐합니다. 앞으로의 일에서 이 모든 교훈과 제 잘못을 헤아려 바로잡고, 중앙위원회가 저를 쓰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어느 부문에서든 중앙위원회의 신임에 보답하겠습니다.
예조프
주석
- “1938년 11월 19일”: 이 날짜는 사료에 표기된 그대로이다. ↩
스탈린에게 쓴 편지: 자기 심정과 잘못에 관하여 (1938년 11월 23일 이후)
1938년 11월 23일 이후[1]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
11월 23일 동지와, 또 몰로토프 동지와 보로실로프 동지와 이야기를 나눈 뒤 저는 더욱 울적한 마음으로 물러났습니다. 제 심정도, 중앙위원회와 동지 앞에 지은 제 죄도 조금이라도 조리 있게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말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마음이 가벼워지기는커녕, 다 말하지 못하고 끝내지 못한 것이 더 무거운 앙금으로 남았습니다. 동지께서 제게 품으신 지극히 정당한 불신이 걷히지 않았고, 어쩌면 더 커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글로 쓰기로 했습니다. 글로 쓰면 더 깊이 생각하고 더 체계적으로 말하게 됩니다.
1. 심정에 관하여. 제 심정은 주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a). 1938년 4월 제가 수운인민위원에 임명된 뒤 저는 그 인민위원부 일에 완전히 빠져들었습니다. 겨울철 선박 수리가 완전히 실패한 가운데 항행철이 시작되었고(항행철이 시작될 때 나온 선박은 40%를 넘지 못했으며, 그 가운데 많은 수가 다시 수리에 들어갔습니다), 이 모든 일 때문에 저는 거의 모든 시간을 수운인민위원부에 쏟아야 했습니다. 어쨌든 4월 13일부터 꼭 두 달 동안 저는 NKVD에 거의 나가지 않았습니다. 한 달이 지나자 벌써 NKVD 업무가 삐걱거리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모든 것이 되는대로 흘러갔고, 특히 수사가 그랬습니다. 프리놉스키는 한 번도 제대로 된 부인민위원이었던 적이 없는데, 그때 그 점이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저는 그에게도 그것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면전에서 말했습니다. 국가안전총국(ГУГБ)만이 아니라 인민위원부의 모든 일을 맡아 보라고 다그쳤습니다. 실제로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 문제를 몰로토프와 이야기했고, 언젠가 동지께서 늘 하시던 대로 제 집무실로 전화하셨을 때 동지께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특히 그때 강하게 느낀 것은 NKVD 기구가 아직 다 숙청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또한 프리놉스키에게 여러 번 말했습니다. 숙청에 나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말렌코프에게는 간부 담당자를 보내 달라고 끝없이 부탁했습니다. 프리놉스키도 검증된 간부 담당자가 없다는 핑계로 숙청을 미루며 그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한번은 프리놉스키를 비롯해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화를 내며, 제가 직접 처리하겠다고 당시 제4부 직원들의 인사 기록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물론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또다시 산더미 같은 당면 업무에 파묻혔고, 직원들의 인사 기록은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공정하게 말씀드리자면 그 시기에도 저는 얼마간 숙청을 했고, 그것도 적지 않게 했습니다. 그러나 수사는 살피지 않았고, 수사는 배신자들의 손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안 그래도 과부하가 걸린 제 신경계에 더 큰 짐을 지웠습니다. 신경이 곤두서서 이것저것 붙잡았지만 무엇 하나 끝까지 해내지 못했습니다. 동지께서 인민위원부 업무를 못마땅해하신다고 느꼈습니다. 그것이 심정을 더 나쁘게 했습니다.
중앙위원회에 가서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할 볼셰비키적 용기가 제게는 없었습니다. 혼자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b). 결정적인 것은 류시코프의 도주였습니다. 저는 말 그대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프리놉스키를 불러 함께 동지께 보고하러 가자고 했습니다. 혼자서는 그럴 힘이 없었습니다. 그때 프리놉스키에게 말했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호되게 벌을 받을 거라고.
이것은 너무나 명백하고 큰 정보 실패였으니, 이런 일에 칭찬이 돌아올 리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것은 동시에 NKVD 기구에 배신자들이 계속 앉아 있다는 사실도 말해 주었습니다. 동지께서 NKVD 업무를 경계하는 눈으로 보시게 되리라는 것을 저는 알았습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저는 내내 그것을 느꼈습니다. 당연히 그것이 심정을 더욱 나쁘게 했습니다. 저는 이따금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을 빌미로 수은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몸 상태에 더 나쁘게 작용했습니다.
동지께 가서 모든 것을 정직하게 말씀드리고, 일을 해낼 수 없으니 도움이 필요하다고 볼셰비키답게 문제를 제기했어야 합니다. 그러는 대신 저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고, 그 때문에 일이 해를 입었습니다.
c). 그다음에 제 비서실 사람들의 일(체사르스키, 리조바 등)이 벌어졌고, 끝으로 가정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양심껏 말씀드립니다, 스탈린 동지. 체사르스키와 리조바의 일을 저는 그때 정직하지 못한 자들의 농간이라고 여겼습니다. 저를 치기 위해서 저와 함께 체카에 들어온 사람들을 치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제가 체카 안팎의 적대적 간부들에게 잘했든 못했든 가한 분쇄에 복수하려 한다고 여겼습니다.
개별 사실들을 곱씹으며 일반화해, 제가 믿는 사람들을 이런저런 식으로 깎아내려 저를 실추시키려는 어떤 조직적 노선이 진행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거기에 더해 제 친척들을 통해 저를 실추시키려는 시도라고 대놓고 의심한 사실도 여럿 보태졌습니다[원문대로]. 예를 들어 몇 달 전 저는 우연히 제 조카가 외부 감시 부서에서 일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재단사이고, 그전에는 공장에서 일했으며, 글을 모르고, 그 일에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저는 그를 일에서 쫓아내라고 지시했습니다. 얼마 전 그가 체카에서 아파트를 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듣자 하니 자콥스키가 일부러 그를 불러 온갖 편의를 봐 주었다고 합니다. 얼마 전까지 저희 시설 가운데 한 곳의 관리 책임자로 제 형이 일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동지께서도 아십니다. 볼로비치 체포와 관련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과거에 준범죄자였던 자입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그와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고 있습니다. 프리놉스키에게 그를 일에서 내쫓으라고 여러 번 부탁했고 이 사람이 어떤 자인지도 알려 주었습니다. 프리놉스키는 계속 시간을 끌며, 불러서 이야기해 보겠다, 서두르지 말자고 했습니다. 얼마 전 알고 보니 이자도 벌써 아파트를 받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단순한 아첨이 아니라고 의심했습니다. 더구나 이 “아첨꾼들” 가운데 많은 수가 이런 일에 대한 제 태도를 알고 있었으니까요. 끝으로 가정 문제입니다. 이것은 동지께서 아십니다.
이 모든 일에서 제가 틀렸습니다. 저는 몹시도, 몹시도 괴로웠습니다. 저는 사람을 알고 느낀다고 늘 생각해 왔습니다. 제가 사람을 잘 몰랐다는 것, 이것이 아마 제게 가장 괴로운 결론일 것입니다. 저 모든 자가 어떤 깊이의 비열함까지 갈 수 있는지 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괴롭습니다. 저와 친하게 지냈고 저를 나쁘지 않게 대한다고 여겼던 동지들이 갑자기 모두 흑사병 환자 대하듯 등을 돌렸고, 말조차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심정에 영향을 주었고, 지금은 다른 형태지만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d) 베리야 동지가 부인민위원으로 임명된 일로도 괴로웠습니다. 거기서 저에 대한 불신의 요소를 보았지만, 다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를 큰 일꾼으로 진심으로 여겼고 지금도 그렇게 여기며, 인민위원 자리를 맡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임명이 제 해임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 끝으로(제 생각에는) 이 모든 일에서 제 몸 상태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습니다. 지난 2년의 긴장되고 신경을 쓰는 일이 신경계 전체를 몹시 긴장시켰습니다. 모든 감각이 날카로워졌고 의심이 많아졌습니다.
심정의 이유는 아마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 모든 것은 저의, 오직 저만의 잘못입니다.
2.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와 스탈린 동지 앞에 지은 제 죄에 관하여. a) 이미 말씀드렸듯이, 베리야 동지가 임명되기 훨씬 전부터 기구 안의 몇몇 사람, 주로 프리놉스키는 체카 계통의 그루지야 사건들에 편견을 품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실을 다 떠올리기는 어렵지만(많습니다), 저는 그것을 아주 자주 느꼈습니다. 프리놉스키에게서 이것이 심해진 때는 그가 바기로프에게서 알게 된 그 세프의 진술 이후라고 해도 아마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에 저는 이것이 그저 흔한 부처 간의 질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루지야 체카가 직무상 상하 관계를 늘 지킨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다음에는 프리놉스키가 그루지야에 있던 시절 고글리제와 개인적 관계가 나빴던 것은 아닌지 생각했고, 프리놉스키에게 물어보기까지 했습니다. 그 가능성도 사라진 듯했습니다. 그러나 비판적 태도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프리놉스키는 제게 아주 자주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캅카스에서 한 번이라도 일한 자는 모두 그루지야에서 어떤 진술에든 반드시 오를 겁니다. 거기서는 사건을 줄 치듯 만들어요” 등등.
베리야 동지가 임명되자 프리놉스키의 이런 기분은 제 기분과 더없이 맞아떨어졌습니다. 그가 극동변강에서 돌아온 바로 첫날 우리는 곧바로 베리야 이야기를 꺼냈습니다(그는 그때 아직 임명 사실을 몰랐습니다). 제가 임명을 울적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자, 그는 앞으로 제가 베리야 때문에 어려운 생활을 할 것이라고 꽤 터놓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뒤 이런 이야기는 때때로 사이를 두고 최근까지 계속되었습니다(프리놉스키와의 마지막 만남은 11월 명절 때였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런 이야기는 베리야 동지에 맞선 시위라는 용납할 수 없는 형태를 띠었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을 간추려(모두 합쳐)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저는 베리야와 함께 일할 수 없을 것이다. 2) 두 개의 지휘 계통이 생길 것이다. 3) 중앙위원회와 스탈린 동지에게 객관적이지 않은 정보가 올라갈 것이다. 4) 결함이 하나의 체계로 부풀려질 것이다. 5) 그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유로 이런 예들을 들었습니다. 베리야 동지는 성격이 권위적이다. 남의 밑에 있는 것을 참지 못할 것이다. 부두 므디바니를 트빌리시가 아니라 모스크바에서 “불게” 한 일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아르메니아 분쇄가 그의 주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그것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마가벨리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고랴초프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제게 고삐를 단단히 쥐라고 충고했습니다.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지 못하게 하라, 울적해하지 말고 기구를 단단히 장악해 베리야 동지와 저 사이에서 이중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라, 베리야 동지의 사람들을 기구에 들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쓰레기 같은 소리를 모두 공감하며 들었습니다. 어떻게 할지 상의했습니다. 특히 베리야 동지에 관해 이미 알려진 그 문서고 문서들을 동지께 보여 드릴지 상의했습니다.
그루지야 사건들을 두고 그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자기 말을 듣지 않고 제때 그루지야를 통제하지 않은 것이 실수다. 그루지야에 너무 많은 자유를 허용했다. 베리야 동지가 그루지야에서 일한 적 있는 체키스트를 모조리 없애려 하는 것이 수상하다. 그는 또 베리야 동지가 자기의 가장 가까운 측근을 모두 쏴 죽였다고 했습니다. 베리야는 그 측근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저를 단단히 부추겼습니다. 저는 저대로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많은 점에서 동의했고, 베리야 동지가 프리놉스키를 나쁘게 대한다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 모든 개 같은 행동의 결과로 저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어리석은 짓을 숱하게 저질렀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나타났습니다. a) 기구의 업무에 대한 베리야 동지의 정당한 비판을 저는 모두 객관적이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b) 베리야 동지가 제가 일해야 했던 상황을 충분히 헤아리지 않고, 그래도 큰일을 해냈다는 점을 충분히 헤아리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c) 베리야 동지가 저를 국가안전총국 업무에서 밀어낸다고 여겨졌습니다. d) 베리야 동지가 중앙위원회에 올리는 정보가 충분히 객관적이지 않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e) 이 모든 것이 저 개인을 겨냥한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