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1923

1차 세계대전의 여파: 강화 조약과 혁명의 물결

1918년 가을의 휴전부터 1923년까지, 무너진 제국들의 자리에 어떤 국가와 국경이 세워졌고, 혁명의 물결과 승전국의 강화는 그 과정에서 어떻게 부딪쳤는가?

1918년 가을 불가리아·오스만·오스트리아-헝가리·독일이 차례로 휴전하면서 호엔촐레른·합스부르크 왕조가 무너지고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세르브-크로아트-슬로베니아 왕국 같은 신생국이 선포되었다.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바이에른에서는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일어났지만, 사회민주당의 통제와 진압, 고립 속에서 1919년 여름까지 대부분 꺾였다. 1919년 1월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는 4거두가 주도해 베르사유·생제르맹·뇌이·트리아농·세브르 조약과 국제연맹을 만들었고, 패전국은 협상에서 배제된 채 영토 상실과 군비 제한, 배상을 떠안았다. 동유럽의 국경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과 발트 독립전쟁으로, 터키의 국경은 독립전쟁 끝의 1923년 로잔 조약으로 정해졌다. 민족자결의 약속에 기대를 건 이집트·조선·인도·중국의 운동은 식민 체제를 건드리지 않은 강화에 실망했다. 1923년 루르 점령과 초인플레이션, 공산당의 「독일의 10월」과 히틀러의 맥주홀 폭동이 이어졌지만, 그해 말 통화 안정과 함께 전후 질서는 일단 굳어졌다.

휴전과 제국의 해체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가을 몇 주 사이에 차례로 끝났다. 불가리아가 먼저 휴전했고, 오스만 제국은 10월 30일 무드로스 휴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1월 3일 빌라 주스티 휴전으로 싸움을 멈추었다. 마지막 남은 독일은 11월 11일 콩피에뉴 숲의 열차 안에서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가 작성한 휴전 협정에 서명했고, 협정은 파리 시각 오전 11시에 발효되었다. 그날 하루에도 2,738명이 죽었다. 협정은 독일군의 라인강 서안 철수와 연합군의 라인란트 점령을 정했지만 독일에 대한 해상봉쇄는 풀지 않았다. 1 2 3)

합스부르크 제국은 휴전보다 먼저 안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카를 황제는 10월 16일 제국을 다섯 왕국의 연방으로 바꾸겠다는 「인민 선언」을 냈지만, 18일 미국 국무장관 랜싱은 연합국이 이미 체코인·슬로바키아인·남슬라브인의 대의를 지지하므로 자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답했다. 10월 28일 체코 정치인들이 프라하에서 권력을 넘겨받았고, 29일 남슬라브인들은 슬로베니아인·크로아티아인·세르비아인 국가를 선포했다. 31일 헝가리의 카로이 미하이 정부는 오스트리아와의 연합을 폐기했다. 카를은 11월 11일 오스트리아 국정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했으나 퇴위하지는 않았다. 이튿날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이, 16일에는 헝가리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4

폐허 위에서 새 나라들이 세워졌다. 폴란드에서는 섭정평의회가 10월 7일 독립 회복을 선언했고, 11월 10일 독일 마그데부르크의 감옥에서 풀려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바르샤바에 돌아왔다. 이튿날 그는 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14일에는 국가원수로서 모든 권한을 넘겨받았으며, 28일 그의 포고로 폴란드 여성은 투표권을 얻었다. 12월 1일 베오그라드에서는 세르비아 섭정 알렉산다르가 세르브·크로아트·슬로베니아 왕국을 선포했다. 오스만 왕조는 터키 독립전쟁 끝에 대국민의회가 군주제를 폐지하면서 막을 내렸다. 5 6 2

혁명의 물결, 1918~1919

제국들이 무너진 자리에는 혁명이 밀려들었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전쟁이 남긴 혼란에 자극받은 봉기와 파업, 병사 반란은 대부분 사회주의적이거나 반식민지적 성격을 띠었지만, 사회주의 봉기의 대다수는 오래가는 국가를 남기지 못했다. 볼셰비키는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임박했다고 믿었고, 1919년 3월 2~6일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창립해 이 물결을 조직하려 했다. 그 경위는 「코민테른의 창설」 항목이 다룬다. 7 8

독일에서는 1918년 10월 말 킬의 수병들이 영국 함대와의 마지막 출격 명령을 거부하면서 혁명이 시작되었다. 11월 초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거의 저항 없이 전국의 권력을 넘겨받았고, 9일 베를린에서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평의회는 대부분 사회민주당과 독립사회민주당 당원으로 채워졌고, 군 지휘부의 권한만 빼앗았을 뿐 재산 몰수나 공장 점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온건파가 평의회를 장악해 산업 국유화와 평의회 공화국을 바라던 좌파를 막았고, 1919년 1월 봉기가 진압되는 와중에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자유군단에게 살해되었으며, 봄에는 바이에른과 브레멘의 평의회 공화국도 진압되었다. 자세한 과정은 「독일 11월 혁명」 항목에 있다. 9

도나우 유역에서도 같은 갈림길이 나타났다. 독일-오스트리아에서는 사회민주당이 이끄는 연립정부가 카를 레너를 총리로, 빅토어 아들러를 외무 책임자로 세우고, 새로 생긴 병사·노동자 평의회를 정부 안으로 끌어들이며 노동조합을 통해 사회정책을 펴서 사회주의 혁명의 호소력을 무디게 했다. 헝가리에서는 1919년 3월 21일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합당해 평의회 공화국을 세웠다. 쿤 벨러가 이끈 이 공화국은 협상국의 봉쇄를 풀지 못했고 쿤이 약속한 붉은 군대의 지원도 오지 않은 채, 133일 만인 8월 1일 루마니아군에 패해 무너졌다.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항목이 이를 다룬다. 10 11 7

이탈리아의 「붉은 2년」(1919~1920)은 실업과 물가 폭등 속에서 일어났다. 이탈리아 사회당의 당원은 25만 명, 사회주의 노동총동맹의 조합원은 200만 명으로 불어났다. 토리노와 밀라노에서는 안토니오 그람시가 러시아 소비에트의 이탈리아판으로 본 공장평의회가 생겨났고, 1920년 8~9월 무장한 금속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면서 운동은 정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뒤에는 파시스트 검은셔츠단의 폭력적 반동이 이어졌고,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으로 귀결되었다. 12

파리 강화회의와 베르사유 조약

강화의 출발점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1918년 1월 8일 발표한 14개조였다. 약 150명의 전문가 조사단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14개조는 자유무역과 공개 외교, 군비 축소, 폴란드 국가 수립, 민족 경계에 따른 국경 재조정, 그리고 모든 국가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할 국제기구를 내세웠다. 독일 정부는 이 원칙을 바탕으로 휴전을 요청했다. 강화회의는 1919년 1월 18일 파리 케도르세의 프랑스 외무부에서 열렸다. 32개 나라와 민족의 대표가 모였지만 패전국은 발언권을 얻지 못했고, 러시아는 백군 측 대표만 참석했을 뿐 소비에트 정부는 초대받지 못했다. 13 14)

주요 결정은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윌슨, 이탈리아 총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의 「4거두」가 145차례의 비공개 회의에서 내렸다. 클레망소는 독일을 경제·군사·영토 면에서 약화시켜 프랑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고, 결국 영미의 동맹 약속과 라인란트 15년 점령을 얻었다. 로이드 조지는 프랑스의 패권을 막고 볼셰비키 러시아에 대한 방벽으로서 독일을 어느 정도 되살려 두려 했다. 오를란도는 참전 대가로 약속받은 영토를 요구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때 회의장을 떠났으며,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불구가 된 승리」라 불렀다. 13 14)

독일과의 조약은 독일에게서 영토 6만 5,000㎢와 인구 700만 명을 떼어 냈다. 알자스-로렌은 프랑스로 돌아갔고, 독일은 폴란드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으며, 일부 국경 지대의 귀속은 주민투표에 맡겨졌다. 단치히는 국제연맹이 관리하는 자유시가 되었다. 해외 식민지는 모두 연맹의 위임통치령이 되었고, 산둥의 독일 이권은 중국이 아니라 일본에 넘어갔다. 독일군은 10만 명 이하로 제한되고 징병제와 공군이 금지되었으며, 라인란트는 15년 동안 연합군이 점령하기로 했다. 오스트리아와의 합병도 국제연맹의 동의 없이는 금지되었다. 13

가장 큰 논란을 부른 것은 배상 조항의 첫머리인 231조였다. 독일과 그 동맹국의 침략으로 연합국이 입은 모든 손실과 피해에 대해 독일이 책임을 진다는 문구는 미국 외교관들이 영국·프랑스와 미국의 입장을 절충해 쓴 것으로, 「죄」라는 말 없이 배상의 법적 근거를 세우려는 것이었고 다른 패전국 조약에도 같은 조항이 들어갔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이를 「전쟁 책임 조항」으로 받아들였다. 배상 위원회는 1921년 5월 5일 런던 지불 일정에서 총액을 1,320억 금마르크로 정했지만, 실제로 독일에 요구된 것은 그중 500억 금마르크였다. 1931년 지불이 끝날 때까지 독일이 낸 금액은 배상 위원회 집계로 약 206억 금마르크, 니얼 퍼거슨의 추산으로는 190억 금마르크 이하였다. 15 13

독일 대표단은 협상에 참여하지 못한 채 조건을 통보받았다. 첫 민선 총리 필리프 샤이데만은 서명을 거부하고 사임했고, 후임 구스타프 바우어 정부는 몇몇 조항을 빼 달라고 했다가 전쟁 재개를 경고한 연합국의 최후통첩에 굴복했다. 조약은 사라예보 암살 5주년인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서명되었다. 1871년 독일 제국이 선포된 바로 그 방을 클레망소가 일부러 골랐다. 독일인들은 정파를 가리지 않고 이 조약을 「강요된 명령(Diktat)」이라 불렀다. 13

패전국들의 조약: 생제르맹·뇌이·트리아농·세브르에서 로잔까지

오스트리아의 카를 레너 총리는 1919년 5월 생제르맹에 도착했지만 협상에서 배제되었고, 연합국의 최후통첩에 따라 9월 10일 조약에 서명했다. 조약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해체를 확인했고, 옛 오스트리아 제국 영토의 60% 이상이 떨어져 나갔다. 88조는 국제연맹 이사회의 동의 없는 독일과의 통합을 금지했고, 이에 따라 「독일-오스트리아」라는 국호도 「오스트리아」로 바꾸어야 했다. 불가리아는 11월 27일 뇌이 조약으로 서트라키아를 잃어 에게해로 나가는 길이 막혔고, 군대를 2만 명으로 줄이고 1억 파운드의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불가리아에서는 이를 「제2의 민족적 파국」이라 부른다. 3) 16

헝가리와의 트리아농 조약은 1920년 6월 4일 베르사유의 그랑 트리아농에서 서명되었다. 헝가리는 옛 헝가리 왕국 영토의 28%, 인구의 36%만 남은 9만 3,073㎢, 760만 명의 내륙국이 되었고, 이웃 나라로 넘어간 땅에는 헝가리인 330만 명이 소수민족으로 남았다. 군대는 3만 5,000명으로 제한되었다. 연합국은 주민투표를 하지 않았고, 조약에 딸린 밀랑 서한은 투표를 해도 결과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설명했다. 헝가리 대표단은 항의 속에 서명했고 조약 개정 운동은 곧바로 시작되었다. 그 뒤의 헝가리 정치는 「호르티 체제: 백색테러에서 우경화까지」 항목으로 이어진다. 17

오스만 제국과의 세브르 조약은 1920년 8월 10일 세브르의 도자기 공장 전시실에서 서명되었다. 조약은 튀르크인이 살지 않는 영토 대부분을 내놓게 하고 아나톨리아에 넓은 점령 구역을 두었으며, 아랍 땅에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과 프랑스의 시리아·레바논 위임통치령이 들어섰다. 그러나 조약은 비준되지 않았다. 1919년 5월 15일 그리스군의 스미르나 상륙을 계기로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민족운동이 일어났고, 앙카라에 세워진 터키 대국민의회는 조약 서명자들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도 결정적이었다. 소련 문서에 따르면 1920~1922년 소총 3만 9,000정과 함께 전시 터키 예산의 20분의 1에 해당하는 1,070만 터키 리라가 건네졌다. 18 2

터키군은 사카리아에서 그리스군의 진격을 막고 대공세로 그들을 아나톨리아에서 몰아냈다. 1922년 10월 11일 무단야 휴전 뒤 11월 20일 로잔에서 회의가 열렸고, 이스메트 이뇌뉘와 영국 외무장관 커즌의 8개월에 걸친 협상 끝에 1923년 7월 24일 143개 조의 로잔 조약이 서명되었다. 조약은 터키의 독립을 인정하고 세브르보다 훨씬 유리한 국경을 주었다. 그에 앞서 1월 30일 체결된 협약에 따라 소아시아 등지의 그리스 정교도 약 122만 명과 그리스의 무슬림 35만~40만 명이 강제로 맞교환되었다. 터키 공화국은 10월 29일 선포되었다. 2 19 20

동쪽의 국경 전쟁과 신생국

파리의 강화는 동유럽의 국경을 다 정하지 못했다. 독일이 항복하자 소비에트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폐기하고(「브레스트 강화와 독일의 동방 점령」 참조) 독일군이 버리고 간 땅으로 군대를 보냈다. 레닌은 새로 독립한 폴란드를 유럽으로 혁명을 퍼뜨리는 길목으로 보았고, 피우수트스키는 1772년 이전의 국경을 되살리려 했다. 1918년 11월 1일 르부프에서는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사이의 전쟁이 터졌다. 혁명과 내전, 외국군 점령이 뒤엉킨 우크라이나의 사정은 「우크라이나 혁명과 전쟁」 항목이 다룬다. 21 5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1919년 2월 14일부터 1921년 3월 18일까지 이어졌다. 1920년 4월 피우수트스키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시몬 페틀류라와 손잡고 키예프 공세에 나서 5월 7일 키예프를 점령했지만, 6월 붉은 군대의 반격에 밀려 8월에는 바르샤바까지 물러났다. 8월 12~25일 바르샤바 전투에서 폴란드군이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두며 전세가 뒤집혔고, 1921년 3월 18일 리가 조약이 맺어졌다. 새 국경은 커즌선에서 동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곳에 그어져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일부가 폴란드에 들어갔다. 자세한 경과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항목에 있다. 21

발트 연안에서도 신생국들은 전쟁으로 국경을 얻었다. 에스토니아는 영국과 핀란드의 지원을 받아 소비에트 러시아의 서진과 친독일 발트 향토방위군을 물리치고 1920년 2월 2일 타르투 조약을 맺었다. 리투아니아는 볼셰비키군과 베르몬트 군, 폴란드와 차례로 싸웠고, 1920년 10월 피우수트스키가 꾸민 젤리고프스키 장군의 「반란」으로 빌뉴스를 잃었다. 이 전쟁들은 「발트 독립전쟁과 국경의 강화」 항목이 다룬다. 22 23

러시아 안에서는 연합국이 휴전 뒤에도 군대를 거두지 않았다. 처음에는 군수품이 독일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던 개입은 1918년 11월 이후 백군을 돕는 쪽으로 목표를 바꾸었고, 연합군은 아르한겔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하고 발트해와 캅카스, 남러시아에도 손을 뻗었다. 서방 연합국은 1920년에 북러시아와 시베리아에서 철수했지만,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은 1922년까지 이어졌고 북사할린 점령은 1925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전쟁은 「내전과 열강의 개입」 항목에서 다룬다. 24

국제연맹, 위임통치, 민족자결의 한계

국제연맹 규약은 영국의 로버트 세실과 남아프리카의 얀 스뮈츠가 주로 설계했다. 스뮈츠는 패전국 식민지를 위임통치하는 제도도 제안했다. 강화회의는 1919년 1월 25일 연맹 창설안을 승인했고, 규약은 베르사유 조약의 제1부로 들어가 1920년 1월 10일 조약과 함께 발효되었다. 그러나 미국 상원은 1920년 3월 19일 비준 표결에서 49 대 35로 3분의 2에 미치지 못했고, 윌슨이 만든 연맹에 미국은 끝내 가입하지 않았다. 25

규약 22조의 위임통치 제도는 병합하지 않는다는 원칙과 원주민의 복지를 위한 「문명의 신성한 위탁」을 내세웠다.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역은 영국과 프랑스가, 아프리카의 나머지 독일 식민지는 영국·프랑스·벨기에가, 남서아프리카와 태평양 섬들은 남아프리카·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와 적도 이북의 일본이 나누어 맡았다. 역사가 수전 피더슨은 위임통치령의 식민 행정이 다른 식민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본다. 일본이 연맹 규약에 넣으려 한 인종평등안은 이민 문제를 우려한 오스트레일리아의 반대에 부딪쳤고, 영국 대표단이 제국의 단합을 위해 이를 포기하면서 채택되지 못했다. 26 14)

역사가 에레즈 마넬라는 1918~1919년을 식민지 세계가 윌슨의 민족자결 언설에 기대를 건 「윌슨의 순간」이라 부른다. 그 기대는 베르사유 조약이 식민 체제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무너졌고, 실망은 각지의 저항으로 터져 나왔다. 이집트에서는 1919년 3월 8일 영국이 와프드당 지도자 사아드 자글룰을 체포해 몰타로 추방하자 전국적 봉기가 일어나 3월 15~31일에만 최소 800명이 죽었다. 조선에서는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 낭독으로 시작된 3·1 운동이 1,500~1,800건의 시위로 번졌고 참가자는 80만~200만 명으로 추산된다. 1920년 한국 측 추산으로는 7,509명이 죽고 4만 6,948명이 체포되었으며, 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27 28 29

인도 암리차르의 잘리안왈라 바그에서는 1919년 4월 13일 레지널드 다이어 준장의 군대가 출구를 막고 군중에게 발포해 379명에서 1,500명 이상이 죽었다. 중국에서는 산둥의 독일 이권을 일본에 넘긴 결정에 항의하는 5·4 운동이 일어났다. 그 뒤의 일은 「5·4 운동과 중국공산당의 창당」 항목에 있다. 파리에 있던 베트남인 애국자 단체는 민족자결 원칙을 들어 인도차이나 주민의 권리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클레망소와 윌슨에게 보냈으나 무시당했다. 청원의 얼굴이었던 응우옌아이꾸옥, 곧 뒷날의 호치민은 1920년 12월 투르 대회에서 제3인터내셔널 가입에 표를 던지고 프랑스 공산당의 창립 당원이 되었다. 30 13 31

1923년의 위기

배상은 곧 무력 충돌을 불렀다. 독일은 1921년 6월 런던 지불 일정의 첫 현금 10억 금마르크를 냈지만 그 뒤로는 적은 현금만 냈고, 1922년 12월 목재 인도 불이행에 이어 1923년 1월 9일 배상 위원회는 석탄 인도 불이행을 선언했다. 1월 11일 프랑스와 벨기에 군대가 루르 공업지대를 점령했다. 빌헬름 쿠노 정부는 「소극적 저항」을 호소했고 제국의회는 이를 283 대 12로 승인했다. 광부와 철도 노동자가 점령군의 지시를 거부하면서 생산이 멈추었다. 점령 기간에 민간인 약 137명이 죽었고, 프랑스 당국은 12만~15만 건의 처벌을 내렸는데 대부분은 점령지 밖으로의 추방이었다. 13 32

정부는 놀게 된 노동자와 기업을 지원하려고 지폐를 찍어 냈고, 이미 시작된 인플레이션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1922년 중반 1달러에 320마르크이던 환율은 1923년 11월에는 1달러에 4조 2,105억 마르크가 되었다.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새 정부는 9월 26일 소극적 저항을 끝냈고, 두 달 뒤 렌텐마르크를 도입해 통화를 안정시켰다. 1924년 도스안은 배상 지불을 다시 짜고 줄였으며, 프랑스와 벨기에는 1925년 8월까지 루르에서 철수했다. 33 32

모스크바는 1923년의 독일을 1917년 여름의 러시아와 비슷한 상황으로 보았다. 코민테른 의장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는 8월 15일 독일 공산당에 다가오는 혁명적 위기에 대비하라고 지시했고 트로츠키도 동의했으며, 카를 라데크는 서두르자고 주장했다. 당 의장 하인리히 브란들러는 25만 3,000명의 공산당원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장담했다. 공산당은 10월 10일 작센 정부에 입각했지만, 21일 켐니츠의 노동자 회의가 총파업 호소에 호응하지 않자 봉기 계획을 취소했다. 그러나 함부르크와 브레멘에서는 공산당 지역 조직이 독자적으로 봉기했다가 경찰에 진압되었다. 국방군은 작센의 사회민주당-공산당 정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34

위협은 오른쪽에서도 왔다.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에 고무된 나치당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는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함께 11월 8일 저녁 약 600명의 돌격대를 이끌고 뮌헨의 맥주홀 뷔르거브로이켈러를 덮쳐 「민족 혁명」을 선언했다. 이튿날 펠트헤른할레로 행진하던 약 2,000명은 경찰 저지선에 막혔고, 나치 당원 15명과 경찰 4명, 행인 1명이 죽었다. 히틀러는 반역죄로 5년형을 받았으나 9개월만 복역했고, 수감 중에 『나의 투쟁』을 구술했다. 이 사건으로 히틀러는 처음으로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35

1923년은 전후 질서가 일단 굳어진 해이기도 했다. 7월 로잔 조약으로 강화 조약의 연쇄가 끝났고, 가을의 통화 안정과 이듬해의 도스안으로 독일의 위기는 가라앉았다. 코민테른이 불을 지피려 한 혁명들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볼셰비키는 세계 혁명에서 「일국 사회주의」로 방향을 돌렸고, 그 사이 1922년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세워졌다. 14) 32 7

해석: 「카르타고식 강화」 논쟁과 베르사유 체제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평가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에게서 시작되었다. 파리 회의에 영국 재무부 대표로 참석했던 케인스는 1919년 말 『평화의 경제적 귀결』에서 이 조약을 패자를 완전히 짓밟으려는 「카르타고식 강화」라 부르고, 배상이 독일의 지불 능력을 훨씬 넘어 유럽 경제 전체를 흔들 것이라 경고했다. 책은 여섯 달 만에 전 세계에서 10만 부가 팔리고 12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그의 해석은 곧 학계의 정설이 되었다. 영국에서 독일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인식은 뒤에 히틀러에 대한 유화정책을 지지하는 여론의 바탕이 되었다. 반대편에서 프랑스의 포슈 원수는 조약이 독일에 너무 관대하다고 비판했다. 36 13

반론도 일찍부터 나왔다. 프랑스 경제학자 에티엔 망투는 1940년대에 쓴 『카르타고식 강화, 또는 케인스 씨의 경제적 귀결』에서 1927년 독일의 강철 생산이 1913년보다 30% 늘었다는 사실 등을 들어 케인스의 예측을 반박하고, 1933~1939년 독일의 재군비 지출이 해마다 배상 요구액의 일곱 배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샐리 마크스는 2013년, 외교사가들이 40년 가까이 조약이 평판보다 합리적이었다고 주장해 왔다고 썼다. 그는 일찍이 1978년에 231조가 전쟁의 「죄」를 말하지 않으며 배상의 법적 근거일 뿐이라고 했고, 루스 헤니그는 1995년 대부분의 연구자가 경제적으로 조약이 독일에 지나치게 가혹하지 않았다고 본다고 정리했다. 36 13 15

그렇다면 베르사유는 히틀러를 낳았는가. 캐나다 역사가 마거릿 맥밀런은 2001년 『피스메이커스』(미국판 『파리 1919』)에서 독일에 부과된 조건이 히틀러의 집권으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독일 역사가 데틀레프 포이케르트는 중요한 것은 조약의 「실제」가 아니라 그것이 불가능한 강화라는 독일인의 「인식」이었으며, 유럽 정복을 꿈꾸게 했던 전시의 기대 때문에 어떤 강화든 민족주의적 반발을 불렀을 것이라 보았다. 231조에 관한 연구의 합의도 조약 자체가 나치즘을 낳았다기보다 별개로 자라난 극단주의와 대공황이 나치당을 권력으로 이끌었다는 쪽이다. 37) 13 15

「베르사유 체제」라는 말로 묶이는 전후 질서의 약점은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 타협이었다는 데 있었다. 독일은 달래지지도, 화해하지도, 영구히 약해지지도 않았다. 미국은 조약을 비준하지 않고 따로 강화를 맺었으며, 패전한 독일은 1926년에야, 소비에트 러시아는 1934년에야 연맹에 들어갔다. 조약이 남긴 문제는 배상을 다시 짠 도스안과 영안, 독일과 서방의 관계를 개선한 로카르노 조약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그 질서는 이 시기에 시작된 두 흐름, 곧 패전국의 조약 개정 요구와 식민지 세계의 반제국주의 운동에 끊임없이 도전받았다. 13 25

결과

1923년까지 유럽과 중동의 지도는 새로 그려졌다.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불가리아·터키는 영토를 잃었고, 수많은 사람이 새 국경 너머의 소수민족이 되거나 강제 교환으로 고향을 떠났다. 혁명은 러시아 밖에서 뿌리내리지 못했고,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분열과 우익 준군사 조직의 성장은 전간기 유럽 정치에 오래 남았다. 국제연맹은 미국과 소비에트 러시아 없이 출발했고, 위임통치는 사실상 식민 지배를 이어 갔다. 베르사유 체제는 패전국의 조약 개정 요구와 식민지의 반제국주의 운동이라는 두 도전 속에서 출발했다.

연표와 지도

파리 베를린 바르샤바 에센 콩피에뉴 베르사유 빈 부다페스트 로잔 7 바르샤바 8 에센 2 콩피에뉴 숲 3 케도르세 6 베르사유 궁전 5 부다페스트 9 로잔 1 테살로니키 4 탑골공원
  1. 11918.09.29불가리아프랑스영국
    불가리아 휴전

    바르다르 공세에 무너진 불가리아가 테살로니키에서 휴전에 서명했다.

  2. 1918.10.28체코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체코 정치인들이 프라하에서 권력을 넘겨받고 독립 국가를 선포했다.

  3. 1918.10.30튀르키예영국
    무드로스 휴전

    오스만 제국이 렘노스섬 무드로스 항의 영국 군함에서 휴전에 서명했다.

  4. 21918.11.11독일프랑스영국미국오스트리아
    콩피에뉴 휴전

    독일이 휴전에 서명했고, 같은 날 카를 황제가 오스트리아 국정에서 물러났다.

  5. 1918.11.14폴란드
    피우수트스키, 국가원수가 되다

    섭정평의회가 해산하며 모든 권한을 피우수트스키에게 넘겼다.

  6. 1918.12.01유고슬라비아세르비아
    세르브·크로아트·슬로베니아 왕국

    섭정 알렉산다르가 베오그라드에서 남슬라브 통일 왕국을 선포했다.

  7. 31919.01.18프랑스영국미국이탈리아일본
    파리 강화회의 개막

    케도르세의 프랑스 외무부에서 승전국들의 강화회의가 열렸다.

  8. 41919.03.01조선일본
    3·1 운동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일제 지배에 맞선 시위가 전국으로 번졌다.

  9. 51919.03.21헝가리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합당해 평의회 공화국을 선포했다.

  10. 1919.05.04중국일본
    5·4 운동

    베이징 학생들이 산둥 결정에 항의해 시위를 벌였다.

  11. 61919.06.28독일프랑스영국미국이탈리아
    베르사유 조약

    거울의 방에서 독일과의 강화 조약이 서명되었다.

  12. 1919.09.10오스트리아프랑스영국이탈리아
    생제르맹 조약

    오스트리아가 서명했고, 독일과의 통합이 금지되었다.

  13. 1920.01.10프랑스영국이탈리아일본
    국제연맹 출범

    베르사유 조약 발효와 함께 연맹 규약이 효력을 얻었다.

  14. 1920.06.04헝가리프랑스
    트리아농 조약

    헝가리는 옛 왕국 영토의 28%만 남았다.

  15. 1920.08.10튀르키예영국프랑스그리스이탈리아
    세브르 조약

    오스만 정부가 서명했지만 앙카라의 민족운동이 이를 거부했다.

  16. 71920.08.12폴란드소련
    바르샤바 전투

    25일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폴란드군이 붉은 군대를 물리쳤다.

  17. 1921.05.05독일프랑스영국벨기에
    런던 지불 일정

    배상 총액이 1,320억 금마르크로 정해졌다.

  18. 81923.01.11독일프랑스벨기에
    루르 점령

    배상 불이행을 이유로 프랑스·벨기에군이 루르에 진주했다.

  19. 91923.07.24튀르키예그리스영국프랑스이탈리아
    로잔 조약

    세브르 조약을 대신해 터키의 독립과 국경을 확정했다.

  20. 1923.11.08독일
    맥주홀 폭동

    히틀러가 뮌헨에서 일으킨 쿠데타가 이튿날 경찰에 저지되었다.

관련 인물 34명

지도부15

프랑스 총리, 강화회의 의장조르주 클레망소1841–1929

독일의 약화와 라인란트 점령을 관철했고 거울의 방을 서명 장소로 골랐다.

독일 인민대표평의회 의장, 뒤에 대통령프리드리히 에베르트1871–1925

평의회를 국민의회로 이끌었고, 1923년 가을 전국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헝가리 총리, 임시 국가원수카로이 미하이1875–1955

오스트리아와의 연합을 폐기하고 헝가리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의 실권자쿤 벨러1886–1938

133일 동안 존속한 평의회 공화국을 이끌었다.

폴란드 국가원수유제프 피우수트스키1867–1935

1918년 11월 권력을 넘겨받았고 키예프 공세와 바르샤바 전투를 지휘했다.

소비에트 정부 수반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

폴란드를 유럽 혁명의 길목으로 보았고 코민테른 창립을 이끌었다.

코민테른 의장그리고리 지노비예프1883–1936

1923년 8월 독일 공산당에 혁명적 위기에 대비하라고 지시했다.

미국 대통령, 「4거두」우드로 윌슨1856–1924

14개조로 강화의 출발점을 놓고 국제연맹 창설을 이끌었지만, 미국 상원이 조약 비준을 거부했다.

영국 총리, 「4거두」데이비드 로이드 조지1863–1945

프랑스의 패권을 막고 볼셰비키 러시아에 대한 방벽으로 독일을 어느 정도 되살려 두려 했다.

이탈리아 총리, 「4거두」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1860–1952

참전 대가로 약속받은 영토를 요구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한때 회의를 떠났다.

튀르키예 민족운동 지도자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

1919년 그리스군의 스미르나 상륙 뒤 민족운동을 이끌었고, 앙카라의 대국민의회는 세브르 조약 서명자들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독일-오스트리아 총리카를 레너1870–1950

사회민주당이 이끈 연립정부의 총리로, 1919년 9월 10일 연합국의 최후통첩 아래 생제르맹 조약에 서명했다.

독일 총리구스타프 슈트레제만1878–1929

1923년 9월 26일 소극적 저항을 끝냈고, 두 달 뒤 렌텐마르크를 도입해 통화를 안정시켰다.

독일 총리구스타프 바우어1870–1944

샤이데만의 뒤를 이어 연합국의 최후통첩에 굴복해 베르사유 조약을 받아들였다.

독일 총리빌헬름 쿠노1876–1933

1923년 루르 점령에 맞서 「소극적 저항」을 호소했다.

참여16

남아프리카 대표얀 스뮈츠1870–1950

국제연맹 규약을 설계하고 위임통치 제도를 제안했다.

독일 총리필리프 샤이데만1865–1939

베르사유 조약 서명을 거부하고 사임했다.

마지막 오스트리아 황제카를 1세1887–1922

연방화 선언을 냈으나 1918년 11월 퇴위 없이 국정에서 물러났다.

독일-오스트리아 외무 책임자빅토어 아들러1852–1918

사회민주당이 이끈 첫 공화국 정부에 들어갔다.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지도자시몬 페틀류라1879–1926

1920년 피우수트스키와 동맹해 키예프 공세에 참여했다.

코민테른의 독일 전문가카를 라데크1885–1939

1923년 독일에서의 조기 봉기를 주장했다.

독일 공산당 의장하인리히 브란들러1881–1967

작센 정부에 들어갔으나 켐니츠 회의 뒤 봉기를 취소했다.

토리노 공장평의회 운동의 이론가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

공장평의회를 이탈리아의 소비에트로 보았다.

파시스트 지도자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

붉은 2년 뒤의 반동을 이끌고 1922년 로마 진군으로 집권했다.

베트남 애국자 단체의 청원 대표호치민1890–1969

강화회의에 인도차이나 주민의 권리를 청원했으나 무시당했다.

나치당 지도자아돌프 히틀러1889–1945

1923년 11월 뮌헨에서 맥주홀 폭동을 일으켰다.

연합군 총사령관페르디낭 포슈1851–1929

독일에 대한 휴전 조건을 작성했고,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 너무 관대하다고 비판했다.

맥주홀 폭동의 공동 지도자에리히 루덴도르프1865–1937

1923년 11월 히틀러와 함께 뮌헨 맥주홀 폭동을 이끌었다.

영국 외무장관조지 커즌1859–1925

로잔 회의에서 이뇌뉘와 8개월 동안 협상했다.

튀르키예 대표이스메트 이뇌뉘1884–1973

로잔 회의의 협상 대표로 1923년 로잔 조약을 이끌어 냈다.

폴란드 장군루치안 젤리고프스키1865–1947

1920년 10월 피우수트스키가 꾸민 「반란」으로 빌뉴스를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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