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우크라이나

시민권 8 · 민족·국가 110 · 사건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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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 인물 8전체보기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

Михайло Грушевський
연구자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1866–1934 ○ 사망

우크라이나를 독자적 역사 주체로 서술한 역사학자이자 중앙라다 의장

1917년 3월 중앙라다는 모스크바에서 유배 중이던 그를 부재중 의장으로 선출했고, 그의 귀환이 민주 세력 통합의 희망으로 받아들여졌다.

『우크라이나-루스의 역사』로 우크라이나를 독자적 역사 주체로 서술한 역사학자로 1917~1918년 중앙라다 의장을 맡았다. 1924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로 돌아와 감시 속에서 1934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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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키이우대학교 졸업, 학위논문 금메달
  • 1894리비우대학교 역사학 교수
  • 1897셰우첸코 학술회 회장(1897~1913)
  • 1917중앙라다 의장(1917~1918), 부재중 선출
  • 1919빈에서 우크라이나 사회학연구소 설립
  • 1924소비에트 우크라이나 귀환, 전우크라이나과학원 회원
  • 192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31반혁명 혐의로 체포

파울로 페트로비치 스코로파츠키

Павло Петрович Скоропадський
반혁명 세력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1873–1945 ○ 사망

독일 점령 하 우크라이나국의 마지막 헤트만

1918년 4월 29일 키예프에서 전우크라이나 지주대회가 만장일치로 '헤트만 만세!'를 외치며 파울로 스코로파츠키를 우크라이나의 헤트만으로 추대했다.

코사크 헤트만 가문의 후예이자 제정 러시아 군단장으로 1차 세계대전을 치른 귀족 장군. 1918년 4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독일군의 후원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중앙라다의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우크라이나국의 헤트만으로 즉위했다. 8개월간의 집권기 동안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와 국립대학을 세우고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나, 대지주 중심의 토지 정책과 독일 점령군의 곡물 강제 징발이 농민의 광범한 저항을 불렀다. 1918년 11월 독일 패전과 함께 페틀류라가 이끈 반헤트만 봉기에 밀려 퇴위했고, 이후 독일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나치 협력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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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근위 기병연대 장교 임관
  • 1904–1905러일전쟁에서 코사크 부대 지휘, 훈장 수훈
  • 1912소장 승진, 니콜라이 2세의 시종무관
  • 1914–1916제1차 세계대전에서 기병사단 지휘, 중장 승진
  • 1917제34군단장, 우크라이나화하여 제1우크라이나군단으로 개편
  • 1917.10자유코사크 총사령관(오타만)으로 선출
  • 1918.04–12우크라이나국 헤트만
  • 1919–1945독일 망명, 헤트만 운동 지도

시몬 바실리요비치 페틀류라

Симон Васильович Петлюра
반혁명 세력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1879–1926 ✕ 암살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이끌었으나 유대인 학살의 책임 논쟁에 휩싸인 독립운동가

러시아의 운명에서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떼어놓지 말아야 합니다. 러시아가 패배하면 그 재앙은 우크라이나에도 미칠 것입니다.

폴타바 출신의 사회민주주의 언론인으로, 1917년 중앙라다 군사사무총서기를 시작으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군 총사령관과 집정내각(디렉토리야) 수반을 지냈다. 볼셰비키·백군·폴란드 사이에서 독립을 수호하려 싸웠으나 1920년 패퇴 후 폴란드, 이어 파리로 망명했다. 그의 군대 휘하에서 약 5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으며, 페틀류라가 이를 막지 못했는지 의도적으로 방치했는지는 오늘날까지 논쟁의 대상이다. 1926년 파리에서 유대인 아나키스트 숄롬 슈바르츠바르트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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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17우크라이나 혁명당(RUP)·우크라이나 사회민주노동당(USDRP) 활동, 언론인으로 우크라이나 민족운동 주도
  • 1917.5–1917.12중앙라다 군사사무총서기, 우크라이나 군 편성 주도
  • 1918.1–1918.3하이다마키 코쉬 지휘관, 키예프 아르세날 봉기 진압
  • 1918.11–1919.2우크라이나 집정내각(디렉토리야) 군사총책
  • 1919.2–1920.12집정내각 수반 겸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 총사령관
  • 1920.4폴란드와 바르샤바 조약 체결, 대볼셰비키 동맹
  • 1924–1926파리 망명정부에서 주간지 『트리주브(Тризуб)』 발행

볼로디미르 빈니첸코

Володимир Винниченко
비소련 혁명가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1880–1951 ○ 사망

중앙라다 총서기국과 디렉토리아를 이끈 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의 작가

당신들이 러시아에 노동자·농민 독재를 세웠듯,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우크라이나어의 독재를 세워야 한다.

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의 작가로 1917년 중앙라다 총서기국을 이끌고 1918년 디렉토리아 초대 의장으로 키예프를 되찾았다. 소비에트와의 협상을 주장하다 페틀류라와 갈라져 1919년 사임했고 프랑스에서 1951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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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우크라이나 사회민주노동당 창립
  • 1917중앙라다 부의장 겸 총서기국 초대 의장(내무 겸임)
  • 1918.01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총리, 곧 사임
  • 1918.12디렉토리아 의장으로 키예프 탈환
  • 1919-1920회고록 「민족의 재생」 집필
  • 1920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 부의장 겸 외무인민위원, 곧 재망명

민족·국가적 배경 인물 110전체보기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스테프냐크-크라프친스키

Сергей Михайлович Степняк-Кравчинский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우크라이나 1851–1895 ✕ 열차 사고사

차르 헌병대장을 단검으로 처단하고 펜으로 서구에 러시아 혁명을 소개한 나로드니키

1878년 메젠초프 암살 직전, 크라프친스키는 선언문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사랑을 충분히 설교했다 — 이제 증오를 불러낼 때가 왔다. 무자비한 피의 복수가 이제부터 너희 악행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러시아 나로드니키 혁명운동과 서구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 작가이자 혁명가. 차이콥스키 서클에서 활동하고 1878년 헌병대장 메젠초프를 단검으로 암살한 후 망명하여, 런던에서 『지하 러시아』(1883)를 출판하고 자유 러시아 출판 기금과 러시아 자유의 벗 협회를 창립해 망명 반체제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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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2–1873차이콥스키 서클(대선전회) 가입,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대상 사회주의 선전
  • 1873–1874‘민중 속으로’ 참여 — 트베리·툴라 농민 선전, 체포 후 탈출
  • 1875–1876헤르체고비나 반오스만 봉기 참전; 제네바 바쿠닌계 기관지 『라보트니크』 기고
  • 1877이탈리아 베네벤토 무장봉기 참가(말라테스타·카피에로와 함께), 체포 후 사면
  • 1878토지와 자유당 입당, 기관지 편집; 8월 4일 메젠초프 암살; 11월 해외 망명
  • 1883『지하 러시아』(Underground Russia) 출판 — 서구 최초의 러시아 혁명운동 종합 보고서
  • 1889소설 『니힐리스트의 생애』(안드레이 코주호프) 출판
  • 1890–1895러시아 자유의 벗 협회·자유 러시아 출판 기금 창립, 월간 『자유 러시아』 편집

미하일 블라디미로비치 로댠코

Михаил Владимирович Родзянко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우크라이나 1859–1924 ○ 자연사

차르에게 '뚱보'라 불린 의회주의자, 제국의 마지막 두마 의장

1917년 2월, 참수부에 보낸 전문에서: "수도는 무정부 상태. 정부는 마비되었다. 지체는 죽음이다. 왕조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시간이다." 니콜라이 2세는 읽고 나서 시종장에게 말했다. "이 뚱보 로댠코가 또 무슨 헛소리를 써 보냈군."

우크라이나계 귀족 출신으로, 1905년 10월당을 공동 창립하여 입헌군주제와 의회주의라는 두 축에서 차르 체제의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다. 1911년부터 1917년까지 제3·4대 국가두마 의장을 지내며 라스푸틴을 공개 비판하고 전시 정부의 무능에 맞섰다. 1917년 2월 혁명기에는 국가두마 임시위원회를 이끌며 니콜라이 2세 퇴위를 결정적으로 추동했으나, 미하일 대공이 즉위를 거부하며 입헌군주제 구상은 무너졌다. 1920년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하여 빈곤 속에서 회고록 『라스푸틴의 통치』를 남겼고, 망명 군주주의자들에게 배척당한 채 숨졌다. 혁명 이전 러시아 의회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한 몸에 체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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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0월당(옥탸브리스트) 공동 창립, 입헌군주제 노선
  • 1907–1911제3대 국가두마 의원, 부의장(1909~)
  • 1911–1912제3대 국가두마 의장(구치코프 후임)
  • 1912–1917제4대 국가두마 의장, 진보블록 참여
  • 1917.2–3국가두마 임시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2세 퇴위 협상 주도
  • 1917 여름구치코프와 자유공화당 창당
  • 1917.10–1920백군 지역(돈·크림)에서 반볼셰비키 활동
  • 1920–1924유고슬라비아 망명, 『라스푸틴의 통치: 제국의 붕괴』 집필

미하일 이바노비치 투간-바라놉스키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Туган-Барановский
이론가 러시아 제국 우크라이나 1865–1919 ○ 심장마비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윤리적 사회주의로: 공황주기론을 개척한 경제학자

1900년 4월 프스코프에서 열린 『이스크라』 창간 조직회의에서 그는 레닌, 마르토프, 스트루베와 함께 자리했으나, 정작 사회민주당 지하조직에는 끝내 가입하지 않았다.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 경제학자로, 1894년 『현대 영국의 공업위기』에서 자본주의 공황의 내생적 주기이론을 제시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표트르 스트루베와 함께 나로드니키에 맞서 마르크스주의 경제사 분석을 전개하고 1900년 『이스크라』 창간 회의에 참여했으나, 이후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 칸트 윤리학에 기초한 '윤리적 사회주의'로 전환, 협동조합 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정립했다. 1917년 2월혁명 후 우크라이나 중앙라다 재무장관과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창립 회원을 지냈으며, 그의 공황이론은 케인스 등 서구 거시경제학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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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하리코프 대학 졸업, 자연과학 후보학위 취득
  • 1894『현대 영국의 공업위기』 출간, 모스크바 대학 정치경제학 석사
  • 1895–1899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정치경제학 강사(사도첸트)
  • 1898『러시아 공장의 과거와 현재』 출간, 모스크바 대학 정치경제학 박사
  • 1900『이스크라』 창간 조직회의 참여 (프스코프)
  • 1901–1905폴타바 지역 젬스트보 활동, 『정치경제학 최근사 개요』 집필
  • 1906–1913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및 폴리테크니크 강사·교수
  • 1909–1917『협동조합 통보』(Вестник кооперации) 편집장
  • 1917.8–11우크라이나 중앙라다 재무장관(서기)
  • 191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창립 회원, 사회경제부문 책임자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

Михайло Грушевський
연구자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1866–1934 ○ 사망

우크라이나를 독자적 역사 주체로 서술한 역사학자이자 중앙라다 의장

1917년 3월 중앙라다는 모스크바에서 유배 중이던 그를 부재중 의장으로 선출했고, 그의 귀환이 민주 세력 통합의 희망으로 받아들여졌다.

『우크라이나-루스의 역사』로 우크라이나를 독자적 역사 주체로 서술한 역사학자로 1917~1918년 중앙라다 의장을 맡았다. 1924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로 돌아와 감시 속에서 1934년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0키이우대학교 졸업, 학위논문 금메달
  • 1894리비우대학교 역사학 교수
  • 1897셰우첸코 학술회 회장(1897~1913)
  • 1917중앙라다 의장(1917~1918), 부재중 선출
  • 1919빈에서 우크라이나 사회학연구소 설립
  • 1924소비에트 우크라이나 귀환, 전우크라이나과학원 회원
  • 192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31반혁명 혐의로 체포

직접 연루된 역사 사건 9전체보기

1917.12–1918.11

브레스트 강화와 독일의 동방 점령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는 군대가 사라진 소비에트 러시아가 독일과 맺은 강요된 평화였다. 1917년 12월 시작된 협상에서 혁명전쟁, 「전쟁도 강화도 아니다」, 즉시 강화의 세 노선이 당을 갈랐고, 1918년 2월 독일의 공세 뒤 레닌은 사임을 내걸고 3월 3일의 조약 수용을 관철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발트·핀란드에 대한 권한과 인구의 3분의 1을 내주었고, 독일은 우크라이나에 헤트만 정권을 세우고 핀란드 내전에 파병하며 발트에 자국 우산 아래의 공국들을 구상했다. 11월 독일의 패전으로 조약은 폐기되었지만, 정전협정 12조로 발트에 남은 독일군과 붉은 군대, 각국 민족정부, 백군이 마주한 공백은 이듬해 국경 지대 전쟁의 무대가 되었다.

1917–1921

우크라이나 혁명과 전쟁

1917년 3월 키예프에 세워진 중앙라다는 연방 러시아 안의 자치에서 출발해 1918년 1월 독립을 선언했지만, 그 뒤 4년 동안 키예프의 주인은 열 번 넘게 바뀌었다. 소비에트군, 독일 점령군과 헤트만 스코로파츠키, 빈니첸코와 페틀류라의 디렉토리아, 데니킨의 백군, 폴란드군이 차례로 도시를 차지했고, 그 사이에서 흐리호리우와 마흐노의 농민군은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자기 전쟁을 벌였다. 1,500건 안팎의 포그롬으로 유대인 수만 명이 살해되었다. 1920년 바르샤바 협정과 1921년 리가 조약으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독립전쟁은 끝났고,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형식적 국가 지위와 볼셰비키 중앙의 실질적 통제라는 모순이 남았다.

1919–1921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무너진 세 제국의 국경 지대에서 부활한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벌인 전쟁이다. 선전포고 없이 1919년 2월 벨로루시에서 시작된 충돌은, 1920년 4월 피우수트스키가 페틀류라와 손잡고 키예프로 진공하면서 전면전이 되었다. 부됸니의 기병과 투하쳅스키의 7월 공세로 전세를 뒤집은 붉은군대는 혁명의 수출을 내걸고 바르샤바까지 진격했으나, 8월 바르샤바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했다. 1921년 3월 리가 조약은 커즌선보다 훨씬 동쪽에 국경을 그어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를 분할했고, 이 국경은 1939년까지 유지되었다. 바르샤바 앞에서의 패배는 총검에 의한 혁명 수출 시도의 사실상 마지막이 되었고, 소비에트 국가를 일국에서의 건설이라는 길로 돌려세웠다.

1922.12

소련의 결성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야·자캅카스의 소비에트 공화국들이 대등한 자격으로 연방조약을 맺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탄생했다. 공화국들을 러시아 연방에 편입하려던 자치화안은 레닌의 개입으로 폐기되었고, 탈퇴권을 명시한 대등한 공화국들의 연방이라는 원칙이 채택되었다. 뒤이은 코레니자치야(토착화) 정책은 민족 언어와 민족 간부를 국가가 체계적으로 육성한, 당대 세계에 전례가 없는 민족정책이었다.

1932–1933

홀로도모르와 집단화 기근

홀로도모르는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인위적 기근으로, 약 390만 명이 아사한 재앙이다. 직접적 원인은 스탈린 지도부가 강제 집단화와 가속화된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우크라이나에 설정한 감당할 수 없는 곡물 공출 할당량이었다. 1931년 수확량이 급감했음에도 공출 목표는 오히려 유지되었고, 1932년 가을부터는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 같은 크렘린 특사들이 직접 파견되어 곡물을 샅샅이 수탈했다. 공출에 실패한 마을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경제 봉쇄를 당했고, 1933년 1월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우크라이나와 쿠반의 국경을 봉쇄해 굶주린 농민들이 식량을 찾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차단했다. 기근은 소련 전체 곡창지대를 덮쳤지만 우크라이나에서 희생이 가장 컸으며, 소비에트 당국은 1987년 말까지 기근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1986

체르노빌 참사

1986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의 4호기가 폭발해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유럽으로 퍼졌다. 초기에 사고를 축소·은폐한 관성은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한 새 지도부의 시험대가 됐다. 리시코프가 이끄는 정부위원회가 수습에 나섰고, 수십만 명의 「청산인」이 피폭을 무릅쓰고 동원됐다.

1988–1991

민족위기와 중앙권력의 붕괴

1988년 숨가이트 포그롬에서 1991년 빌뉴스 유혈사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은 페레스트로이카 아래에서 소련의 민족질서와 중앙권력이 함께 무너져 가는 과정이다. 네 사건의 성격은 같지 않다. 숨가이트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를 계기로 터진 반아르메니아 포그롬이자 국가의 치안 실패였고, 1989년 트빌리시는 비무장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군사적 진압이었으며, 1990년 바쿠는 민족폭력과 중앙권력 붕괴가 겹친 자리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군사개입이었고, 1991년 빌뉴스는 독립을 선언한 연방공화국의 주권기관에 대한 강제력 행사였다. 그러나 하나의 공통된 위기를 보여 준다. 중앙정부는 민족 간 폭력으로부터 주민을 지키지 못하면서도, 공화국의 정치적 이탈에는 반복해서 군사력을 썼다.

1991

노보오가료보 협상과 신연방조약

1991년 3월 국민투표에서 연방 유지가 76%의 찬성을 얻자, 고르바초프는 이를 마지막 정치적 자본으로 삼았다. 4월 23일 그는 모스크바 교외 노보오가료보 별장에서 러시아의 옐친을 포함한 9개 공화국 정상과 「9+1 성명」을 발표하고, 소련을 주권 공화국들의 자발적 연방으로 재편하는 신연방조약 협상을 시작했다. 발트 3국과 그루지야 등 6개 공화국은 처음부터 불참했다. 여름 내내 세금 징수권과 연방·공화국 권한을 놓고 밀고 당긴 끝에 조약안이 만들어졌고, 서명일은 8월 20일로 잡혔다. 7월 말 고르바초프·옐친·나자르바예프의 심야 회동은 서명 뒤 크류치코프·파블로프 등 강경파를 교체하기로 합의했는데, 이 대화는 KGB의 도청으로 당사자들에게 그대로 새어 들어갔다.

1991

8월 쿠데타와 소련의 해체

1991년 8월, 신연방조약 체결을 막으려는 보수 강경파가 고르바초프를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 크류치코프·야조프·파블로프 등이 주도한 이 쿠데타는 옐친이 전차 위에 올라 저항하고 시민이 결집하면서 사흘 만에 무너졌다. 쿠데타의 실패는 오히려 연방의 해체를 가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