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기존 도덕의 계보를 캐물으며 가치의 전환을 외친 철학자
1844년 프로이센 작센주의 루터파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고전문헌학을 공부하다 쇼펜하우어를 읽고 철학에 눈떴고 바그너와 가까워졌다. 1869년 바젤 대학 교수가 되며 프로이센 국적을 버려 평생 무국적으로 살았고, 1879년 병으로 물러난 뒤 떠돌며 『즐거운 학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 등으로 신의 죽음과 허무주의, 권력의지, 영원회귀를 사유했다. 1889년 토리노에서 정신이 무너져 1900년 바이마르에서 죽었다. 누이가 엮은 『권력의지』와 니체 문서보관소를 거쳐 나치에 전유되었지만, 아나키스트와 일부 볼셰비키, 프랑크푸르트학파, 실존주의와 후기구조주의도 그를 읽었다. 콜리와 몬티나리의 비판 전집이 원고에 근거한 연구의 토대가 되었다.
다른 이름: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858–1864슐포르타 기숙학교
- 1864본 대학에서 신학·고전문헌학 공부
- 1865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쇼펜하우어 독서
- 1867–1868나움부르크 프로이센 포병대 1년 지원병
- 1868라이프치히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와 첫 만남
- 1869바젤 대학 교수, 프로이센 국적 포기
- 1870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위생병으로 종군
- 1872『비극의 탄생』
- 1873–1876『반시대적 고찰』 네 편
- 1876제1회 바이로이트 축제에 실망, 바그너와 멀어짐
- 1878『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1879건강 악화로 교수직 사임, 연금 생활
- 1881『아침놀』
- 1882『즐거운 학문』, 루 살로메와 만남
- 1883–1885『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1886『선악의 저편』 자비 출판
- 1887『도덕의 계보』
- 1888『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집필
- 1889토리노에서 정신 붕괴, 바젤·예나 정신병원
- 1890나움부르크 어머니 집으로
- 1897어머니 사망 뒤 바이마르 빌라 질버블리크로
- 1900바이마르에서 사망
목사의 아들은 어떻게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에게 이끌렸나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라이프치히 근처, 프로이센 작센주의 작은 마을 뢰켄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바로 그날 마흔아홉 살 생일을 맞은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서 땄다. 아버지 카를 루트비히 니체와 할아버지가 모두 루터파 성직자였으니, 그는 경건한 목사 집안의 맏아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1849년 뇌질환으로 오래 앓다 죽었고, 반년 뒤 두 살배기 남동생도 죽었다. 어머니 프란치스카는 두 살 아래 딸 엘리자베트와 니체를 데리고 나움부르크로 옮겨, 할머니와 두 고모가 사는 집에서 아이들을 키웠다. 집안의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이 어린 시절은 훗날 누이 엘리자베트와의 끈질긴 애증으로 이어진다.
목사의 아들이라는 신분 덕에 니체는 1858~1864년 이름난 기숙학교 슐포르타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했다. 이곳에서 그는 그리스어·라틴어·히브리어·프랑스어를 익혀 고전을 원전으로 읽는 기초를 쌓았고, 시와 작곡에도 손을 댔다. 당시 거의 잊혔던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을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라 부르는 글을 써서, 앞으로는 더 건전하고 더 ‘독일적인’ 작가를 다루라는 교사의 평을 받기도 했다.
1864년 그는 목사가 되려고 본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학기 만에 신학을 그만두고 신앙을 잃었다. 여기에는 독일 고전철학의 끝자락에서 나온 두 책이 영향을 주었다.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는 복음서를 역사 비판으로 해체했고,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은 신이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신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1865년 6월, 신앙이 깊던 누이에게 그는 이렇게 썼다. 영혼의 평안과 행복을 바란다면 믿으라, 진리의 사도가 되고 싶다면 탐구하라. 마르크스로 이어진 청년헤겔파의 종교 비판이 니체에게는 전혀 다른 길의 출발점이 된 셈이다.
1865년 그는 스승 프리드리히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겼다. 그해 헌책방에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집어 든 것이 철학으로 가는 결정적 계기였다. 세계의 밑바닥에는 맹목적 의지가 있고 삶은 고통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젊은 니체를 사로잡았다. 이듬해 읽은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랑게의 『유물론의 역사』는 칸트 철학과 다윈의 진화론, 근대 자연과학을 그에게 소개했다. 1867년 나움부르크의 프로이센 포병대에 1년 지원병으로 들어갔으나 이듬해 3월 말에 오르다 가슴을 크게 다쳐 몇 달을 앓았다. 그 뒤 학업으로 돌아온 1868년, 그는 라이프치히에서 쇼펜하우어를 숭배하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를 처음 만났다. 쇼펜하우어와 바그너, 이 두 사람이 이후 10년 동안 니체 사유의 두 기둥이 된다.
바젤의 젊은 교수는 왜 문헌학을 떠나 바그너와 결별했나
1869년 리츨의 추천으로 니체는 박사 학위도 교수 자격도 없이 스물네 살에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교수로 불려 갔다. 라이프치히 대학은 서둘러 명예 박사 학위를 주었다. 바젤로 떠나기 전 그는 스스로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했고, 1869년 4월 17일자 문서로 국적이 공식 말소된 뒤 평생 어느 나라 국민도 아닌 채로 살았다. 그런데도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터지자 위생병으로 독일 쪽에 종군했다가 이질과 디프테리아를 얻어 돌아왔다. 바젤로 돌아온 그는 독일 제국 수립과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정치를 바깥에서, 회의적인 눈으로 지켜보았다. 바젤에서는 평생의 친구가 된 신학자 프란츠 오버베크, 강의를 즐겨 들었던 역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와 가까이 지냈다.
이 시기 니체는 루체른 근처 트립셴의 바그너 집을 자주 찾아 바그너 부부의 가장 가까운 동아리에 들었다. 1872년 첫 책 『비극의 탄생』이 나왔다. 그리스 비극은 꿈과 형상의 질서를 상징하는 아폴론적인 것과 도취와 합일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맞서고 어울리며 태어났는데,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가 이 디오니소스적 힘을 죽였고, 이제 바그너의 음악극이 비극을 되살린다는 주장이었다. 책의 한 구절은 니체 사유의 첫 표어가 되었다.
“오직 미적 현상으로서만 세계와 존재는 영원히 정당화된다.”
denn nur als aesthetisches Phänomen ist das Dasein und die Welt ewig gerechtfertigt
문헌학계는 차갑게 반응했다. 리츨조차 시큰둥했고, 젊은 문헌학자 울리히 폰 빌라모비츠묄렌도르프는 소책자 『미래의 문헌학!』에서 이 책이 학문적 방법을 버린 공상이라고 공격했다. 친구 에르빈 로데와 바그너가 니체를 변호했지만, 니체는 문헌학 안에서 점점 고립되었고 1871년 바젤의 철학 교수 자리로 옮기려다 실패했다.
1873~1876년의 『반시대적 고찰』 네 편에서 그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편에 서서 당대 독일 문화를 비판했다. 첫 편은 『예수의 생애』로 그에게 신앙을 잃게 한 바로 그 슈트라우스의 만년작 『옛 신앙과 새 신앙』을 교양 속물의 책이라며 조롱했다. 그러나 1876년 제1회 바이로이트 축제가 전환점이 되었다. 공연의 진부함과 관객의 저속함에 넌더리를 낸 니체는, 바그너가 ‘독일 문화’를 내세우고 독일 대중 사이의 명성을 즐기는 모습에서도 멀어졌다. 그는 바그너의 반유대주의 글과 발언과도 분명히 선을 그었다. 같은 무렵 쇼펜하우어와도 결별했고, 1878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짧은 잠언으로 형이상학과 도덕과 종교를 해부하는 새 문체를 내놓았다. 어려서부터 그를 괴롭힌 지독한 근시와 편두통, 위장병은 1870년의 병으로 더 나빠졌고, 휴직이 길어지던 끝에 1879년 그는 서른넷의 나이로 교수직을 내려놓고 연금 생활에 들어갔다.
떠돌이 철학자는 어떻게 「신의 죽음」과 차라투스트라에 이르렀나
바젤의 연금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살아가게 된 니체는 몸에 맞는 기후를 찾아 끊임없이 옮겨 다녔다. 여름은 대개 스위스 엥가딘의 실스마리아에서, 겨울은 제노바·라팔로·토리노 같은 이탈리아 도시와 프랑스 니스에서 보냈다. 시력이 나빠져 타자기를 써 보기도 했고, 옛 제자 페터 가스트(본명 하인리히 쾨젤리츠)가 알아보기 힘든 그의 글씨를 옮겨 쓰고 교정을 보는 비서 노릇을 했다. 가스트와 오버베크는 끝까지 그의 곁에 남은 몇 안 되는 친구였다. 1878년부터 1888년까지 그는 거의 해마다 책을 한 권씩 냈다.
1881년 『아침놀』에 이어 1882년 『즐거운 학문』이 나왔다. 그 125절에서 대낮에 등불을 들고 시장에 뛰어든 ‘미친 사람’이 신을 찾는다고 외치자,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를 비웃는다. 미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였다!”
Gott ist todt! Gott bleibt todt! Und wir haben ihn getödtet!
이것은 무신론자의 승리 선언이 아니다. 신을 죽인 것은 근대인 자신, 곧 과학과 역사 비판이지만, 사람들은 그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모른다. 그리스도교의 신이 떠받치던 도덕과 의미의 질서 전체가 무너지면 위아래도 없는 ‘무한한 무’ 속을 헤매게 된다. 니체가 다가올 두 세기의 문제로 본 허무주의가 이것이다. 같은 책 341절에서 그는 지금 이 삶을 똑같이 무한히 되풀이해 살아야 한다면 그것을 견디고 긍정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이것이 영원회귀 사상이다.
1882년 봄 니체는 로마에서 말비다 폰 마이젠부크와 철학자 파울 레를 통해 스물한 살의 러시아 출신 여성 루 살로메를 만났다. 세 사람은 함께 공부하며 사는 공동체를 꿈꾸었고, 니체는 레를 통해, 이어 루체른에서 직접 그녀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그해 여름 튀링겐의 타우텐부르크에서 함께 지냈지만, 누이 엘리자베트가 살로메를 ‘부도덕한 여자’라 부르며 두 사람의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 계획을 방해했고, 11월 레와 살로메는 니체를 떠났다. 어머니·누이와도 사이가 틀어져 거의 완전히 고립된 니체는 자살 충동에 시달리다 라팔로로 달아나, 1883년 초 단 열흘 만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를 썼다.
산에서 내려온 예언자 차라투스트라는 시장에 모인 군중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Ich lehre euch den Übermenschen. Der Mensch ist Etwas, das überwunden werden soll.
신이 죽은 뒤 사람은 스스로 새 가치를 만들어 자신을 넘어서야 한다. 그러나 이 새 문체의 책은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예의 이상의 반응을 얻지 못했다. 책은 거의 팔리지 않았고, 1885년 제4부는 40부만 자비로 찍어 그중 일곱 부를 나눠 주었다. 1886년 그는 반유대주의자인 출판업자 에른스트 슈마이츠너와 결별하며, 자기 책이 ‘반유대주의의 쓰레기장’에 묻혀 있다고 혐오를 드러냈다. 같은 해 『선악의 저편』을 자비로 출판했고, 옛 책들의 판권을 되사서 새 서문을 붙인 재판을 냈다. 그해 누이는 반유대주의 선동가 베른하르트 푀르스터와 결혼해 파라과이에 ‘게르만’ 식민지 누에바 게르마니아를 세우러 떠났는데, 니체는 이 계획을 우스꽝스럽게 여겼다.
『도덕의 계보』에서 『이 사람을 보라』까지: 마지막 2년에 니체는 무엇을 썼나
1887년 니체는 짧은 기간에 논쟁서 『도덕의 계보』를 썼다. 선과 악이라는 우리의 도덕 가치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생겨났다는 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그는 고귀한 자들이 자기 자신을 ‘좋음’이라 긍정하는 주인 도덕과, 강자에 대한 원한, 곧 르상티망에서 출발해 강자를 ‘악’으로 규정하고 자기의 무력함을 ‘선’이라 부르는 노예 도덕을 대비했다.
“도덕에서 노예 반란은 르상티망 자체가 창조적이 되어 가치를 낳을 때 시작된다.”
Der Sklavenaufstand in der Moral beginnt damit, dass das Ressentiment selbst schöpferisch wird und Werthe gebiert
니체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는 이 노예 반란의 승리이고, 양심의 가책과 금욕주의적 이상은 그 산물이다. 가치가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역사적으로 캐는 이 방법은 20세기에 미셸 푸코의 ‘계보학’으로 이어진다. 같은 해 그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깊은 친근감을 느꼈고, 이폴리트 텐과 덴마크 비평가 게오르 브라네스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브라네스는 1888년 초 코펜하겐 대학에서 니체 철학에 관한 최초의 연속 강연을 열어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도덕의 계보』 끝에서 니체는 『권력의지: 모든 가치의 전환 시도』라는 새 책을 예고했지만, 그 구상을 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 초고 일부를 1888년 『우상의 황혼』과 『안티크리스트』에 썼다. 이 해에만 다섯 권을 쓸 만큼 그는 들떠 있었다. 『바그너의 경우』로 옛 스승을 공격했고, 『안티크리스트』에서는 그리스도교를 생에 적대적인 종교로 몰아세웠다. 마르크스주의 독자가 지나칠 수 없는 대목도 이 책에 있다. 니체는 평등의 요구 자체를 약자의 원한으로 보았고, 사회주의자를 이렇게 불렀다.
“오늘날의 천민 가운데 내가 누구를 가장 미워하는가? 사회주의자 천민, 찬달라의 사도들이다. 그들은 노동자의 본능과 즐거움, 그 작은 존재에 만족하는 감정을 허물어뜨린다.”
Wen hasse ich unter dem Gesindel von Heute am besten? Das Socialisten-Gesindel, die Tschandala-Apostel, die den Instinkt, die Lust, das Genügsamkeits-Gefühl des Arbeiters mit seinem kleinen Sein untergraben
바로 다음 문장에서 그는 “불의는 결코 불평등한 권리에 있지 않고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데 있다”고 덧붙인다. 노예제 찬양이나 연민에 맞선 투쟁 같은 이런 극단적 발언은 누이가 손댄 유고가 아니라 니체가 살아서 낸 책에 있다는 점을 도메니코 로수르도 같은 연구자들은 강조한다.
마흔네 번째 생일에 그는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를 쓰기로 했다. 서문은 독자에게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 무엇보다 나를 혼동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마지막 장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이 언젠가 지상에 없던 위기와 결부될 것이라며 이렇게 쓴다.
“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다이너마이트다.”
Ich bin kein Mensch, ich bin Dynamit.
1888년 가을부터 그의 편지와 글에는 자기 운명을 과대평가하는 기색이 짙어졌다. 12월에는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와 편지를 나누었고, 국제적 돌파를 눈앞에 두었다고 믿으며 옛 책들을 되사서 유럽 주요 언어로 번역할 계획을 세웠다.
토리노의 붕괴 뒤 니체의 원고는 누구 손에 들어갔나
1889년 1월 3일 니체는 토리노 거리에서 쓰러졌다. 채찍질당하는 말을 끌어안고 쓰러졌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그가 죽은 뒤에 퍼진 것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그 뒤 며칠 동안 그는 코지마 바그너와 부르크하르트 등에게 ‘디오니소스’ 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고 서명한 짧은 쪽지들을 보냈다. 쪽지를 받고 놀란 오버베크가 토리노로 가서 그를 바젤의 정신병원으로 데려왔고, 어머니는 그를 예나 대학 정신병원으로 옮겼다가 1890년 나움부르크의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당시 내려진 진단은 3기 매독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의문시되며, 뇌혈관 질환이나 유전성 질환 같은 다른 설명들이 제기되어 있다. 그는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그가 쓰러진 바로 그 무렵부터 그의 책은 읽히기 시작했다. 오버베크와 가스트는 남은 원고를 어떻게 할지 의논했고, 가스트는 첫 전집을 내기 시작했다. 1893년 남편이 자살한 뒤 파라과이에서 돌아온 누이 엘리자베트는 가스트판의 이미 인쇄된 책들을 폐기하게 하고, 니체 문서보관소를 세워 오빠와 유고와 출판의 통제권을 하나씩 손에 넣었다. 오버베크와는 틀어졌고 가스트는 결국 협력했다. 1897년 어머니가 죽자 그녀는 니체를 바이마르의 빌라 질버블리크로 옮겨 돌보면서, 골라 뽑은 방문객들에게 말 없는 철학자를 보여 주었다. 1898년과 1899년 두 차례 이상 뇌졸중을 겪어 말도 걸음도 잃은 니체는 1900년 8월 25일 폐렴과 또 한 번의 뇌졸중으로 죽었고, 뢰켄의 아버지 곁에 묻혔다.
누이는 오빠의 노트에서 단편들을 골라 『권력의지』라는 책으로 엮어 1901년에 내고, 1906년 크게 늘린 판을 냈다. 니체가 한때 구상했다가 버린 제목을 붙인 이 책은 니체가 쓴 책이 아니라 엘리자베트와 가스트가 유고를 고르고 배열한 편집본이다. 그녀는 여러 구상안을 제멋대로 합치고 자료를 자유롭게 다루었으며(예컨대 『안티크리스트』의 35절을 빼 버렸다), 학계는 오늘날 이 책이 니체의 의도를 반영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녀는 오빠의 편지까지 고쳐 써서 자기가 오빠와 가까웠던 것처럼 꾸몄다. 이런 위조는 1950년대 카를 슐레히타의 판본으로 널리 알려졌다.
원고에 근거한 니체를 되찾은 것은 두 이탈리아인이었다. 1960년대 초 니체 번역을 준비하던 조르조 콜리와 이탈리아 공산당원 마치노 몬티나리는 기존 판본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몬티나리는 1961년 동독 바이마르로 가서 원고를 살핀 뒤 완전히 새로운 비판 전집을 만들기로 했다. 1967년부터 독일어판 『비판 전집』이 나왔고, 몬티나리는 『권력의지』를 위조라고 불렀다. 다만 『권력의지』를 깎아내리다 보면 니체의 유고 전체를 하찮게 보기 쉬운데, 유고와 『권력의지』라는 편집본은 별개라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니체는 왜 아나키스트와 볼셰비키, 나치와 실존주의자에게 모두 읽혔나
니체는 살아 있는 동안 거의 읽히지 않았다. 1888년 브라네스의 코펜하겐 강연이 처음으로 그에 대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1900년 그가 죽은 뒤에야 그의 책은 널리 알려졌다. 처음 그를 반긴 쪽은 오히려 왼쪽이었다. 1890년대 독일 좌파 사이에 그의 추종자가 생겼고, 1894~1895년 독일 보수파는 그의 책을 체제 전복적이라며 금지하려 했다. 19세기 말 니체의 사상은 흔히 아나키즘 운동과 연결되었고, 독일의 아나키스트 구스타프 란다우어는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니체를 가장 깊이 평가하고 비판했다. 1888년부터 1890년대까지 니체의 책은 어느 나라보다 러시아에서 많이 출판되었다. 러시아 상징주의 시인들이 그를 읽었고, 볼셰비키 가운데서도 블라디미르 바자로프,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가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 낡은 신 대신 인류 자신을 새 신으로 섬기자는 루나차르스키와 막심 고리키의 신건설론에는 초인의 그림자가 어른거렸고,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 생각이 종교가 착취의 도구였다는 사실을 가리고 반동 세력과 타협하는 일이라며 격분해 비판했다.
같은 니체는 오른쪽에서도 읽혔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 병사들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선물로 받았고, 니체는 독일 군국주의의 영감이라는 평판과 좌파 정치의 영감이라는 평판을 동시에 얻었다. 결정적으로 그의 이름을 오른쪽으로 끌고 간 것은 누이의 니체 문서보관소였다. 독일 민족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였던 엘리자베트는 베니토 무솔리니를 숭배했고, 1932~1934년 아돌프 히틀러를 여러 차례 문서보관소에 맞았다. 히틀러는 니체를 얼마나 읽었는지 불분명하지만 바이마르의 니체 기념관을 자주 찾았고 『나의 투쟁』에 니체의 표현을 썼다. 나치는 니체를 골라 쓰듯 이용했는데, 그 대표자는 1931년 『철학자이자 정치가 니체』를 내고 제3제국 시기 니체 선집을 여러 차례 펴낸 알프레트 보임러였다. 반유대주의와 독일 민족주의를 경멸했던 니체가 이렇게 쓰인 것에 맞서, 프랑스의 조르주 바타유는 1937년 「니체와 파시스트들」로 그를 나치의 전유에서 구하려 했다.
마르크스주의 쪽의 가장 무거운 판결은 죄르지 루카치의 『이성의 파괴』(1954)였다. 루카치는 헤겔 이후 독일 부르주아 철학 전체를 계급투쟁에 대한 반동적이고 비합리주의적인 응답으로 읽었고, 그 계보가 만년의 셸링에서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니체와 생철학을 거쳐 파시즘의 정치적 힘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 전통 안에서도 높이 평가받는 한편 루카치의 오랜 경력에서 가장 낮은 지점이라는 평도 받았다. 반대로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어 W.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니체를 계몽이 지배로 뒤집히는 과정을 꿰뚫어 본 비판자로 받아들였다.
제2차 세계대전 뒤 니체는 다시 살아났다. 미국의 발터 카우프만과 영국의 R. J. 홀링데일이 번역과 해설로 나치의 니체 상을 벗겨 냈고, 마르틴 하이데거는 네 권짜리 니체 연구를 냈다. 마르틴 하이데거와 카를 야스퍼스의 실존철학, 장폴 사르트르와 알베르 카뮈의 실존주의가 신 없는 세계에서 사람이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는 니체의 물음을 이었고, 1960년대 프랑스에서는 질 들뢰즈,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가 니체를 새로 읽으며 후기구조주의의 길을 열었다. 철학자 폴 리쾨르는 니체를 카를 마르크스, 지크문트 프로이트와 함께 ‘의심의 학파’의 대가라고 불렀다. 그리고 콜리와 몬티나리의 비판 전집은 이 모든 해석이 누이의 편집본이 아니라 니체의 원고로 돌아가 다투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