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3월 7일, 68번째 생일을 맞은 마사리크는 시베리아 횡단이 가능하다는 것을 군단에 직접 보여주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열차에 올랐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의회 의원이었던 마사리크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망명하여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1917년 러시아로 건너가 체코·슬로바키아 포로병들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편성하고 볼셰비키와 펜자 협정을 체결, 군단의 블라디보스토크 경유 프랑스 이송을 확보했다. 1918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17년간 중부 유럽에서 가장 안정된 민주국가를 이끌었고, 그의 성공은 러시아 내전에 군단이 휘말리는 모순 위에 세워졌다.
필리프 페탱은 제1차 세계대전의 장군으로, 베르됭 전투의 승리와 병사들의 사기를 회복한 지휘로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1940년 독일의 침공 앞에서 전쟁 지속을 반대하고 휴전을 요청했으며, 의회가 헌법 제정 권한을 넘긴 뒤 비시 프랑스의 국가수반으로 공화국을 권위주의 체제로 대체했다. 그의 정부는 독일과 협력하고 반유대주의 법령을 시행해 점령 질서에 프랑스 국가기구를 결합시켰다. 해방 뒤 고등법원은 그를 적과의 내통과 반역으로 사형 선고했으며, 드골은 이를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1932년 드네프로스트로이 준공식에서: "이렇게 얻은 미국식 기술 경험이 이 나라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 지렛대가 될 것입니다."
무학으로 댐 공학을 익힌 휴 링컨 쿠퍼는 나이아가라 급류(1907)와 미시시피 키오콕 댐(1913)을 성공시키며 자력으로 미국 최고의 수력 기술자가 되었다. 1926년 소련의 초청으로 드네프로스트로이 건설 수석 컨설턴트를 맡아 GE 터빈을 공급하고 공정을 총지휘, 1932년 유럽 최대 발전소를 예정보다 8개월 앞당겨 완공했다. 같은 해 소련은 쿠퍼와 미국인 기술자 5명에게 노동적기훈장을 수여했는데,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 평생 반공주의자로 남았으나, 그의 댐이 없었다면 1차 5개년 계획의 상징적 성취도 없었다.
1945년 8월 10일, 그는 교착한 회의에서 “이제 제가 어전에 나아가 성의를 여쭙고, 그 뜻으로 회의의 결정을 삼고자 합니다”라고 제안했다.
스즈키 간타로는 일본 해군 대장 출신 정치가로, 천황의 시종장과 추밀원 의장을 거쳐 전쟁 말기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공개적으로는 군부의 전쟁 수행 노선을 받들었지만, 1945년 내각과 최고전쟁지도회의의 대립을 관리하며 전쟁을 끝낼 통로를 열었다. 원폭 투하와 소련의 대일 참전 뒤에도 이른바 ‘Big Six’의 교착은 계속되었고, 스즈키는 천황 주재 회의에서 결정을 천황의 재가에 맡기는 절차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했지만, 그 과정은 침략전쟁의 책임과 군부의 저항을 지운 것이 아니었다.
네빌 체임벌린은 전간기 영국의 보수 정치가로, 국내 행정 개혁과 재무 정책을 거쳐 총리가 되었다. 그는 독일과의 전쟁을 피하고 재무장을 위한 시간을 벌려 했지만, 그 전략은 나치 독일의 팽창을 억제하지 못했다. 1938년 뮌헨 협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양도를 받아들인 그의 정부는 소련이 제안한 집단안보 구상에도 충분히 호응하지 않았고, 이 선택은 1939년 외교 위기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이어진 국제적 조건의 일부가 되었다. 폴란드 침공 뒤 전쟁을 선포했으나 1940년 노르웨이 전투 논쟁 속에서 사임했다.
배이뇌 보이온마는 핀란드의 역사학자이자 교수, 사회민주당 정치가로 독립 초기 공화국의 형성에 관여했다. 그는 노동자 교육기관을 세우고 의회에서 외교와 사회정책을 다루며 학문을 대중적 정치 활동과 결합했다. 1940년 겨울전쟁을 끝낸 모스크바 강화조약 협상에서 핀란드 대표단의 사회민주당계 인사로 서명에 참여했으며, 전쟁과 강대국 사이에서 타협해야 하는 핀란드의 조건을 드러냈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시작이다: 스탈린에게서 빌려와 평생의 외교 원칙으로 삼은 말.
러시아 제국의 대공국 시절부터 시작해 핀란드 독립·내전·겨울전쟁·계속전쟁·냉전을 모두 통과한 정치가다. 독립 직후인 1918년 첫 총리를 지내며 친독일·군주제 노선을 밀었고, 1920년 타르투 조약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와 국경을 확정했다. 1939년 가을 스톡홀름 주재 공사에서 소환되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몰로토프와 직접 협상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전쟁이 터지자 무임소장관으로 평화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1946년 대통령에 오른 뒤로는 '현실 인정이 지혜의 시작'이라며 소련과의 지정학적 공존을 추구했고, 이 파시키비 독트린은 냉전기 핀란드 외교의 근간이 되었다.
리가 협상에서 민스크를 포기한 선택은 폴란드의 동방정책을 연방국가 구상에서 민족국가 구상으로 돌렸다.
스타니스와프 그랍스키는 경제학자이자 정치가로, 젊은 시절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나 국가민주주의 진영의 핵심 이론가가 되었다. 그는 폴란드의 독립과 국가 통합을 민족적 동질성에 강하게 결부했고, 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 등 소수민족을 포괄하는 연방 구상에 비판적이었다. 1920년 민스크와 리가 협상에서 그는 민스크를 요구하지 않는 노선을 지지해 피우수트스키의 동방 연방 구상을 약화시키고 리가 국경의 민족국가적 틀을 굳혔다. 이후 교육장관과 망명 정부·전후 국가기구의 지도자로 활동했지만, 1926년 이후 엔데치아와 거리를 두며 정치적 입장을 조정했다.
1940년 7월 10일, 그는 사임하지 않은 채 헌법법을 공포했고 다음 날 대통령직은 페탱에게 넘어갔다.
알베르 르브룅은 광산공학 교육을 받은 프랑스의 중도우파 공화주의 정치가로, 오랜 의회·각료 경력을 거쳐 제3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으로서 제3공화국의 제한된 국가원수 관행 속에서 내각 불안정과 좌우 세력의 충돌을 조정했지만, 행정부를 직접 이끌 권한은 좁았다. 1940년 패전 국면에서 그는 북아프리카에서 항전을 계속하려 했으나 필리프 페탱을 정부 수반으로 지명했고, 7월 10일 헌법법에 서명했다. 그는 사임하지 않았지만 그 서명과 권력 이양은 비시 체제로 이어진 헌정적 단절의 핵심 장면이 되었다.
1941년 11월 26일, 그는 일본 대사에게 「미일 간 합의의 기초로 제안된 개요」를 전달했다.
코델 헐은 미국의 자유무역과 다자적 국제질서를 설계한 민주당 정치가이자 외교가였다. 그는 1930년대 무역장벽 완화와 선린정책을 추진했지만, 외교정책의 최종 결정권을 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자주 긴장했다. 1941년 일본과의 협상에서 미국의 요구를 정리한 11월 26일 합의안 개요를 전달했으며, 이는 전쟁 직전 외교의 마지막 문서가 되었다. 전후에는 국제연합 창설을 이끈 공로로 1945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집권하는 동안 나는 집무실을 거의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밖에 나가 파리 교외를 지나며 고물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2인승 자전거의 행렬을, 맞춰 입은 스웨터 차림의 노동자 부부들을 보았을 때, 그래도 내가 어렵고 어두운 삶들에 일종의 갠 하늘을, 한 줄기 트임을 들여놓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리옴 재판 진술, 1942년 3월
드레퓌스 사건으로 정치에 들어와 1920년 투르 대회에서 다수파의 코민테른 가입에 맞서 사회당(SFIO)의 「낡은 집」을 지킨 지도자. 1936년 인민전선 정부의 총리로 마티뇽 협정을 중재하고 2주 유급휴가와 주 40시간제를 입법했으며,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자 총리이자 최초의 유대인 총리로서 극우의 표적이 되었다. 1940년 페탱 전권 위임에 반대한 80인 중 한 명으로 비시 정권의 리옴 재판에서 피고석을 인민전선 변호의 연단으로 바꾸었고, 부헨발트 억류에서 살아 돌아와 1946년 말 과도정부 총리를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1894–1906국사원 법관이자 문예비평가,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조레스를 따라 사회주의 운동에 입문
모리스 가믈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모 경험과 공화국 군부의 조정자로서의 명성을 바탕으로 프랑스군 최고지휘부에 오른 장군이었다. 그는 독일과의 장기전을 예상하며 마지노선에 기대는 방어 구상을 세웠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사르 공세를 제한하고 독일의 벨기에 침공에 대비해 주력을 딜강과 벨기에 국경으로 전진시키는 선택을 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의 아르덴 돌파와 세당의 붕괴 뒤 해임되었고, 프랑스 패전의 책임을 둘러싼 재판과 독일 억류를 겪었다.
퀴외스티 칼리오는 핀란드 농민정당의 지도자로서 토지개혁과 의회정치를 추진한 정치가였다. 그는 네 차례 총리와 여러 차례 의회 의장을 지냈고, 1922년 토지 없는 농민의 정착을 지원한 이른바 칼리오 법을 이끌었다. 대통령으로서 겨울전쟁을 이끌며 영토 양보에 저항했지만, 1940년 3월 모스크바 평화조약을 받아들여야 했다. 조약 서명을 두고 남긴 저주는 그해 여름 오른팔 마비로 현실의 아이러니가 되었고, 건강 악화로 사임한 뒤 같은 해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04–1906핀란드 의회 신분제 의회 농민계급 대표
1907–1937핀란드 의회 의원, 농민연합 지도자
1917–1922농업 담당 장관, 독립 상원과 정부에서 재임
1922칼리오 법으로 불린 토지 정착 개혁 추진
1922–1924, 1925–1926, 1929–1930, 1936–1937핀란드 총리 네 차례
「이천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 그들이 어떤 정치를 하든, 먹여야 한다!」 볼셰비키 구제를 두고 공격받자 후버가 남긴 응답이었다.
후버는 광산기사로 막대한 부를 이룬 뒤 두 차례 세계대전의 구호활동으로 명성을 쌓은 인물로, 1929년 미국 제31대 대통령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벨기에 구제위원회와 미국 식량청을 이끌며 수백만 명을 먹여 살렸고, 전후 미국구제청(ARA)을 사적 조직으로 개편해 동유럽과 러시아 구제를 주도했다. 1921년 볼가 기근에 맞서 고리키의 호소에 즉각 응답하고 리가 협정을 직접 주도해 식량 분배의 자율성과 소련의 금 보유분 지출을 관철, 하루 천만 명 이상을 먹였다. 대공황 속 대통령직에서는 고전했으나 은퇴 후에도 트루먼·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개혁위원회를 이끌며 활동을 이어갔다.
나는 반쪽짜리 종이에 백분율을 적었다—루마니아는 러시아 90%, 그리스는 영국 90%, 유고슬라비아는 50대 50… 스탈린은 푸른 연필로 체크 표시를 하고 종이를 다시 밀어 보냈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전시 총리로서 나치 독일에 맞선 연합국의 승리를 이끌었고,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재집권했다. 1944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발칸반도 영향권을 백분율로 나눈 비밀 합의를 주고받았으며, 얄타회담에서는 폴란드의 자유선거를 확보하려 애썼으나 소련의 동유럽 지배를 막지 못했다. 제국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로서, 1946년 퓰턴 연설에서 '철의 장막'을 경고하며 냉전의 수사학을 제공했다. 전쟁 지도력으로 20세기 가장 위대한 영국인으로 평가받지만, 식민지 정책과 벵골 기근 대응에는 비판이 따른다.
장쭤린은 청 말의 군인에서 출발해 중국 군벌시대 동북 지역의 독자적 권력자로 성장한 중국 정치가였다. 그는 봉천군벌을 이끌며 만주를 사실상 자치적으로 통치했고, 군사력과 산업·재정 정비를 결합해 자신의 기반을 강화했다. 일본의 지원과 만주 이권을 둘러싼 협력은 그의 권력을 키웠지만, 동시에 일본군과 충돌할 여지도 남겼다. 국민당의 북벌로 베이징에서 철수하던 중 관동군 장교들이 설치한 폭탄에 중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이 황고둔 사건은 일본군의 독단적 만주 개입이 심화되는 전조가 되었다.
리히가 루스벨트에게 말했다. '이 합의는 소련이 얄타에서 워싱턴까지 늘여도 기술적으로 위반이 아닙니다.' 루스벨트가 답했다. '나도 아네, 빌.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윌리엄 리히는 미 해군 원수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루스벨트와 트루먼 두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사실상의 첫 합동참모의장이었다. 해군작전부장과 푸에르토리코 총독, 비시 프랑스 대사를 지낸 뒤 1942년 현역으로 복귀해 전쟁 내내 연합국 전략을 조율했다. 1945년 얄타 회담에서 그는 폴란드 합의문을 읽고 루스벨트에게 '소련이 얄타에서 워싱턴까지 늘여도 기술적으로 위반이 아닙니다'라고 말했고, 루스벨트는 '나도 아네, 빌.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라고 답했다. 원자폭탄 투하를 훗날 비판했지만 당시 공개 반대는 하지 않았고, 전후에는 핵 선제사용 전쟁계획을 거부했다.
의회평의회 의장 아데나워는 분단된 독일의 기본법을 최종 헌법이 아닌 잠정적 합의로 제시하는 데 앞장섰다.
콘라트 아데나워는 나치즘의 붕괴와 독일 분단 뒤 연방공화국의 틀을 세운 가톨릭 보수 정치가였다. 의회평의회 의장으로서 영구 헌법 대신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 둔 잠정적 기본법을 지지하면서 서부 점령지에 민주 제도를 마련했다. 초대 연방총리로는 서방 결속과 유럽 통합,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진했지만 반공 노선으로 냉전의 분단도 굳혔다. 그의 정치적 유산은 잠정성을 내세운 국가 건설이 장기적 질서로 정착한 데 있다.
루돌프 발덴은 핀란드의 제지산업을 키운 기업가이자 군사·국가 조직가였다. 1918년 내전에서 백군의 후방과 보급을 정비한 경험은 만네르헤임과의 긴 협력으로 이어졌고, 겨울전쟁에는 본부 대표로 내각에 참여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국방장관이 되어 모스크바 강화조약에 핀란드 측 서명자로 이름을 올렸으며, 영토를 잃고 독립을 지켜야 했던 국가의 전환을 맡았다. 노동운동에 보수적이었던 그의 태도는 겨울전쟁의 공동방위 속에서 노동조합을 협상 상대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1945년 6월, 그는 말리크에게 다가갔지만 소련은 회담을 늦추며 대일전 준비 시간을 벌었다.
히로타 고키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 출신 정치가로, 국제협조를 표방하면서도 중국 침략과 군부의 대외정책에 제동을 걸지 못한 인물이다. 외무상과 총리를 거치며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되살리고 방공협정을 추진해 민간정부의 자율성을 약화시키는 데 관여했다. 1945년 6월에는 소련의 야코프 말리크 대사와 접촉해 전쟁 종결을 위한 중재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소련은 이미 대일 참전을 준비하며 회담을 지연시켰다. 도쿄 재판에서 전쟁범죄 유죄 판결을 받아 1948년 문관으로는 유일하게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 책임과 형량은 지금도 논쟁적이다.
윌리엄 N. 해스켈은 미 육군 장교로서 전후 국제 구호 행정과 군사 지휘를 결합한 인물이었다. 허버트 후버의 임명으로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소련 러시아에서 미국구호행정의 작전을 이끌며, 기근 속 식량·의료품의 대규모 배급을 조직했다. 그의 임무는 볼셰비키 관료의 통제와 협조를 동시에 상대하면서 구호의 속도와 행정적 책임을 조정하는 일이었다. 이후 뉴욕 주방위군과 미국 민방위 조직을 지휘하며 군과 국가 행정에서 긴 경력을 이어 갔다.
로베르 투숑은 산악전과 보병 교육으로 명성을 쌓은 프랑스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경험과 알프스 부대 지휘를 바탕으로 승진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의 돌파 뒤 제6군을 지휘하며 마지노선에서 이동한 부대들을 아isne 방어선에 급히 배치했고, 샤를 드골의 제4기갑사단도 몽코르네 반격에 투입했다. 그러나 전차부대는 충분히 통합되거나 지원되지 못했고, 그의 군은 전선의 틈을 막은 뒤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휴전 뒤 퇴역한 그는 비시의 국가평의회와 리옹 국가재판소에 참여해 군인으로서의 경력과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협력이 겹치는 유산을 남겼다.
폴 레노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공화국 정치가로, 경제·식민지·국방 문제에서 독자적인 노선을 보였다. 그는 나치 독일의 위협에 맞서 재무를 전시 체제로 돌리고 기갑·공군 중심의 현대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0년 프랑스가 붕괴하자 영국과의 동맹을 유지하고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계속하려 했지만, 정전파에 밀려 총리직을 사임했고 이후 비시 정권과 독일에 억류되었다. 해방 뒤에도 의원과 헌법 논의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며 강한 의회주의를 지켰다.
“모델 카얀데르”라는 이름은 겨울전쟁 당시 예비병이 개인 외투와 소총, 허리띠에 의존해야 했던 현실을 가리켰다.
아이모 카얀데르는 산림 유형론을 발전시킨 식물학자이자 산림행정가였으며, 학문과 국가 산림정책을 연결했다. 그는 세 차례 총리를 지낸 자유주의 정치가로서 사회민주당과 농민당의 연립을 중재했다. 1939년 소련의 요구와 전쟁 위협을 과소평가하고 국방 투자를 늦춘 내각의 책임은 그의 정치적 유산을 규정했으며, 겨울전쟁 발발 뒤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얀 돔프스키는 폴란드 농민운동에서 성장한 정치가이자 언론인으로, 독립 이후 의회 정치와 외교를 연결했다. 폴란드-소련 전쟁의 종결 국면에서 그는 폴란드 대표단을 이끌며 전쟁 수행의 성과와 동부 국경의 현실 사이에서 타협을 모색했다. 리가에서 아돌프 이오페와 비공개 교섭을 벌여 1920년 10월 12일 예비조약을 성사시켰고, 이듬해 최종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이후에도 농민정당과 의회 민주주의를 지켰지만, 리가 체제가 남긴 우크라이나·벨라루스 분할의 문제는 그의 외교가 감당해야 할 역사적 유산으로 남았다.
「평화, 자비, 용서입니다.」 1938년 7월 18일, 내전 2주년에 바르셀로나 시청에서 아사냐는 74분 동안 유혈 중단과 화해를 호소했으나, 프랑코도 공화국 강경파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스페인 제2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자 내전기 공화파의 상징적 구심점. 1931년 전쟁장관·총리로 군 개혁과 반교권 정책·농지개혁을 주도했고, 1934년 인민전선을 조직해 1936년 대통령에 올랐으나 내전 내내 실권은 총리들에게 넘어갔다. 1938년 바르셀로나에서 「평화, 자비, 용서」를 외쳤지만 프랑코 진영은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했고, 1939년 카탈루냐 함락 뒤 아내와 함께 피레네 산길을 걸어 프랑스로 건너가 사임했다. 공화파 안에서조차 '도주'라는 비난을 받은 이 결정은 공화국의 잔존 정통성을 무너뜨렸고, 그는 망명 1년 만에 점령된 프랑스에서 숨졌다.
샤를 욍치제르는 프랑스 식민보병 출신의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발칸 전선과 전간기 해외 지휘·협상에서 경력을 쌓았다. 1940년 세당 방면 제2군을 지휘하며 독일군의 돌파를 막지 못했고, 그 판단은 프랑스 패전의 책임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비판받았다. 그는 전투를 계속할 수 있는 한계가 임박했다고 보았으며, 페탱 정부의 전권대표단 의장으로 6월 22일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이후 비시의 국방장관이 되어 협력국가의 군사 재편을 맡았고, 1941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마쓰오카 요스케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대륙 진출과 국제적 고립을 함께 상징한 인물이다. 그는 국제연맹에서 만주국을 옹호하며 일본의 탈퇴를 이끌었고, 만철 총재를 거쳐 외무상이 되었다. 1941년에는 독일·이탈리아와의 동맹을 추진하는 한편 몰로토프와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했지만, 독소전쟁 뒤 대소전쟁을 주장하다 실각했다. 전후 전범으로 구금되었으나 재판 중 병사해 판결을 받지 못했다.
1939년 8월 모스크바에서 그는 소련과의 군사협력을 협상했지만, 대표단의 권한과 서방의 결단은 이미 제한돼 있었다.
프랑스 육군 장성 에메 두멩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자동차 수송과 전간기의 기계화 구상을 통해 현대적 제병협동을 밀어붙인 군인이다. 1939년 8월 모스크바에서 프랑스 군사대표단을 이끌며 소련과의 군사협력을 모색했지만, 영국의 소극적 협상과 서방의 상충한 계산 속에서 회담은 독일과 소련의 협정으로 끝났다. 1940년 프랑스군 최고사령부에서 아르덴 방어와 제9군 붕괴를 마주한 뒤에도 재건과 군사사 저술에 관여했다.
월터 라이먼 브라운은 제1차 세계대전 뒤 미국 구호 행정을 이끈 실무 외교가로, 허버트 후버의 미국구호행정에서 유럽 업무를 맡았다. 1921년 러시아 기근이 심화되자 그는 리가에서 막심 리트비노프와 협상해 미국구호행정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닌 당시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기아 지역에 들어갈 조건을 마련했다. 이 합의는 인도주의적 구호를 표방했지만 미국의 반볼셰비즘과 소비에트 정부의 통제·주권이 맞물린 절충이기도 했다.
유럽 부흥을 설계하고 미군을 40배로 키운, 육군·국무·국방 3직을 모두 지낸 유일한 미국인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마셜은 1947년 6월 5일, 준비된 원고도 없이 1,200단어의 연설을 통해 '굶주림, 빈곤, 절망, 혼란에 반대하는' 유럽 원조의 청사진을 내놓았다.
마셜은 육군참모총장(1939~45)·국무장관(1947~49)·국방장관(1950~51)을 두루 지낸 유일한 미국인으로, 처칠이 '승리의 조직자'라 부른 연합군 팽창의 총설계자였다. 1947년 6월 5일 하버드대 연설에서 전후 유럽의 경제 붕괴와 소련 팽창에 맞선 대규모 원조 구상을 제안했고, 이 '마셜 플랜'은 4년간 130억 달러로 서유럽 산업 기반과 통화를 안정시키며 냉전기 미국 대외정책의 틀을 재편했다. 국무장관 시절 이스라엘 승인을 두고 트루먼과 정면 충돌했으며, 국방장관으로 복귀해 한국전쟁 중 맥아더 해임을 승인함으로써 민간의 군대 통제 원칙을 재확인했다. 195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군인 출신 수상자는 그가 유일하다.
상세 이력 보기
1880펜실베이니아주 유니언타운에서 석탄·코크스 사업가의 막내로 출생
1902버지니아 군사학교 졸업, 육군 소위 임관 후 필리핀 배치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제1사단 작전참모로 칸티니·뫼즈-아르곤 공세 기획
1939–1945육군참모총장, 미군을 18만9천에서 800만으로 팽창시키고 연합군 전략 총괄
헨리 뵈우커스는 미국의 의사이자 공중보건 행정가로, 국제 구호를 임상과 위생의 조직 문제로 다룬 인물이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미국구호행정의 러시아 의료국장으로 일하며 식량 배급과 병행되는 병원 지원, 의약품 공급, 예방접종과 전염병 대응을 조정했다. 그는 이 경험을 1926년 저서에 정리해 기근 구호가 급식소를 넘어 의료·위생 체계의 복구였음을 기록했다. 이후 황열병 연구와 군 의료 행정에도 참여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고, 일본 점령을 사실상 통치한 미국의 5성 원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합동참모본부의 만장일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밀어붙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러나 중공군 개입 이후 만주 폭격과 확전을 주장하며 트루먼 행정부와 충돌했고, 1951년 4월 해임되었다. 그의 해임은 민간 통제와 군부의 관계를 둘러싼 냉전기 가장 첨예한 헌정적 논쟁으로 남았다.
세계 최대 면화상을 일군 자유무역론자, 유럽 붕괴를 경고한 메모로 마셜 플랜을 촉발한 국무차관
1947년 5월 27일 마셜 국무장관에게 보낸 메모에서 클레이턴은 이렇게 썼다: '즉각적이고 대규모인 미국의 원조 없이는 경제·사회·정치적 붕괴가 유럽을 뒤덮을 것입니다.'
클레이턴은 13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속기사로 출발해 앤더슨·클레이턴 사를 세계 최대 면화 무역회사로 키운 사업가였다. 자유무역을 신봉한 민주당원으로서 1944년 국무부 경제담당 차관보, 1946년 경제담당 차관에 임명되었고, 1947년 5월 전후 유럽의 참상을 목격한 후 조지 마셜에게 보낸 「유럽의 위기」 메모에서 '즉각적이고 대규모인 미국의 원조 없이는 경제·사회·정치적 붕괴가 유럽을 뒤덮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메모는 마셜 플랜 발표의 직접적 촉매가 되었고, 찰스 볼런은 연설문 초안을 쓸 때 클레이턴의 문장을 대거 인용했다. 퇴임 후에도 자유무역과 대서양 동맹을 옹호하며 1961년 크리스천 허터와 애틀랜틱 카운슬을 공동 설립했다.
소련 측이 협상 권한을 묻자, 드랙스의 사절단은 정부 승인 없이는 아무 결정도 할 수 없었다.
레지널드 드랙스는 영국 해군의 전술과 지휘 개혁을 주장한 제독으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 주요 지휘직과 참모직을 맡았다. 1939년 8월 그는 프랑스 대표단과 함께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소련과의 군사협력을 논의했지만, 영국 정부의 서면 협상 권한을 받지 못했다. 낡은 상선으로 늦게 도착한 대표단의 무력함은 독일과의 전쟁을 막기 위한 영국·프랑스 외교의 제한과 불신을 드러냈고,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1946년 모스크바 회담에서 몰로토프의 공세가 이어지자 그는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니스트 베빈은 가난한 노동자에서 영국 최대 노동조합의 지도자로 성장한 노동운동가이자 노동당 정치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노동력 동원을 조직한 경험은 전후 영국의 외교와 유럽 재건을 노동과 국가 역량의 문제로 보게 했다. 외무장관으로서 그는 조르주 비도와 함께 마셜의 하버드 연설에 대한 유럽의 대응을 조직하고, 영국의 안보와 서유럽 협력을 미국의 원조 및 대서양 동맹과 결합했다. 동시에 그의 강한 반공주의와 제국적 이해관계는 전후 질서의 국제주의가 해방과 지배를 함께 품었음을 보여 준다.
협동조합 운동에서 시작해 겨울전쟁 외무장관으로 스탈린과 마주한 핀란드 사민당의 현실주의 지도자
1939년 11월 9일, 핀란드가 축소된 요구를 거부하자 '맞은편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탈린이 물었다: '이노마저도 내주지 않겠다는 말인가?'
핀란드 사회민주당을 1918년 내전의 잿더미에서 의회 민주주의 정당으로 재건한 정치가다. 1926년 핀란드 최초의 좌파 정부 수반이 되었고, 겨울전쟁 직전 모스크바 협상에서는 파시키비와 함께 실무 대표로 나서 영토 교환에 응하라고 헬싱키를 설득했다. 1939년 11월 9일 마지막 회담에서 핀란드가 축소된 요구마저 거부하자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고 훗날 기록한 이도 탄네르였다. 전후 소련의 압력으로 5년 6개월의 실형을 살았으나, 출옥 뒤 의회로 돌아와 1960년대 초까지 당을 이끌었다.
얄타에서 돌아온 루스벨트는 1945년 3월 1일 의회 연설에 앉아서 임했다. 걸을 수 없는 대통령이 평생 숨겨온 장애를 처음으로 공개한 순간이었다.
루스벨트는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관통한 미국의 32대 대통령으로, 4선에 오른 유일한 대통령이다. 뉴딜로 연방정부의 역할을 재정의했고 진주만 공격 이후 연합국을 이끌며 독일 우선 전략을 관철했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그는 소련의 대일 참전과 유엔 창설이라는 두 가지 목표에 외교력을 집중했고 스탈린과의 개인적 관계에 신뢰를 걸었으나, 이미 심부전과 고혈압으로 쇠약해져 있었다. 회담 두 달 뒤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얄타 합의는 유엔을 낳고도 동유럽을 넘겨주었다는 비판 속에 냉전기 내내 논쟁의 중심에 섰다.
1945년 7월, 그는 포츠담 선언을 평화의 기초로 삼되 소련과 먼저 교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고 시게노리는 일본 제국의 직업 외교관으로, 태평양전쟁의 개전과 종결 때 외상을 맡았다. 그는 전쟁을 피하려는 대미 협상에 참여했지만 개전을 막지 못했고, 전쟁 뒤에는 그 외교적 책임을 두고 재판을 받았다. 1945년에는 소련을 중재자로 삼아 조건부 종전을 모색하는 한편 포츠담 선언 수락을 주장했으며, 이 선택은 종전을 앞당기려는 현실 감각과 소련의 의도를 오판한 한계를 함께 드러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은 그에게 금고 20년을 선고했다.
두샨 시모비치는 왕국 유고슬라비아의 장군이자 공군·총참모부를 이끈 군인이었다. 1941년 3월 27일 쿠데타로 정권을 무너뜨리고 총리가 되었지만, 삼국동맹을 공식 폐기하지 않은 채 독일의 침공을 막으려 했다. 독일 침공 뒤 망명정부를 이끌었고, 연립 내부의 갈등으로 1942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전후에는 티토의 파르티잔을 지지했으며 미하일로비치 재판에서 증언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00베오그라드 육군사관학교 졸업, 포병 소위
1912–1918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살로니카 전선 제7보병연대 지휘
1918자그레브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 국민평의회 주재 세르비아 정부·최고사령부 대표
과거의 타성으로 저항을 이어가고 있는 현실을 속히 끝내고, 국가 멸망의 한 걸음 앞에서 그것을 멈추게 해야 한다.
일본의 외교관이자 정치가. 벨기에·프랑스·이탈리아 대사를 거쳐 1937년 외무대신이 되었으나 평화협조 노선을 고수하여 군부와 충돌, 석 달 만에 사임했다. 1942년 주소 대사로 부임해 종전 시까지 모스크바에 주재하며, 소련의 중재는 불가능하고 조속한 무조건 항복만이 나라를 구할 길이라고 도쿄에 거듭 경고했다. 1945년 8월 8일 크렘린에서 몰로토프로부터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를 통보받았다. 전후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1949년부터 1953년까지 참의원 의장을 지냈다.
번스의 국무장관 취임 선서 직후, 트루먼이 말했다. "지미, 성경에 입 맞춰." 번스가 그러고 나서 성경을 트루먼에게 건네며 말했다. "대통령님도 입 맞추시죠." 트루먼이 그렇게 하자 자리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제임스 F. 번스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민주당 정치인으로, 뉴딜 입법을 주도한 상원의원, 전시 동원을 총괄하며 '보조 대통령'으로 불린 루스벨트의 오른팔,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포츠담 회담에서 독일 배상의 틀을 설계한 인물이다. 포츠담에서 번스는 각 점령국이 자국 점령지역에서 배상을 취하되 소련에는 서방 지역 산업설비의 15%를 식량·원자재와 교환하고 10%를 무상 제공하는 절충안을 몰로토프와 협상해 타결시켰다. 루스벨트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뒤 트루먼과의 관계도 점차 냉각되었으나,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로 당선되어 인종 분리 교육 체제를 고수하며 '분리하되 평등하게' 노선을 추진했다.
윌리엄 시즈는 영국 외교관으로, 여러 유럽·아메리카 공관을 거쳐 1939년 모스크바 대사로 부임했다. 그는 영불소 상호원조 조약을 만들려는 협상에서 영국을 대표했지만, 서방의 지연과 소련의 안보 요구가 충돌하는 과정을 냉정하게 읽어 내지는 못했다. 리트비노프의 교체 뒤 몰로토프를 경멸적으로 평가한 그의 보고는 협상 실패를 바라본 당대 영국 외교의 시야와 한계를 함께 보여 준다.
피에르 라발은 변호사와 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출발했지만 전후 우파로 이동해 제3공화국의 핵심 각료와 총리를 지냈다. 1940년 패전 뒤 그는 페탱이 국민의회에서 전권을 얻고 헌정 질서를 폐기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비시 체제의 중심에 섰다. 라발은 독일과의 협력이 프랑스의 지위를 보전할 수 있다고 믿었고, 1942년 복귀한 뒤 노동력 제공과 경찰 협력을 확대했다. 해방 후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1945년 처형되었다.
앨런 브룩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 육군의 전문적 지휘와 연합국의 대전략을 조율한 야전원수였다. 그는 1943년 병력·상륙정·공중우세가 부족한 상태의 해협 횡단 침공을 위험하다고 보았고,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작전으로 이탈리아를 전쟁에서 이탈시키는 노선을 지지했다. 이 신중함은 노르망디 상륙을 반대한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더 큰 병참과 제공권을 갖춘 뒤 작전을 수행하려는 판단이었다. 전후 공개된 전쟁일기는 윈스턴 처칠과 연합국 지휘관들에 대한 날카로운 평가를 남겼다.
1945년 선거 승리 후 버킹엄궁에서 조지 6세를 만난 애틀리는 침묵을 깨며 "제가 선거에서 이겼습니다"라고 말했고, 왕은 "압니다. 6시 뉴스에서 들었습니다"라고 답했다.
클레멘트 애틀리는 1945년 포츠담 회담 도중 노동당의 압승으로 윈스턴 처칠을 대신해 영국 총리가 된 인물이다. 전시 연립내각에서 부총리로 처칠을 보좌했으나, 유권자들은 전쟁 영웅 대신 복지국가를 약속한 무채색의 그를 선택했다. 그의 정부는 국민보건서비스(NHS)를 창설하고 주요 산업을 국유화했으며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을 단행해 대영제국의 해체를 시작했다. 대외적으로는 마셜 플랜과 나토 창설을 주도하며 미국 편에 서서 냉전의 초기 윤곽을 그렸다.
1948년 2월 25일, 베네시는 공산당 민병대가 프라하 거리를 장악하고 내전이 임박한 가운데 비공산당 장관 12명의 사직서를 수리했다.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로, 1차 대전 중 마사리크·슈테파니크와 함께 민족평의회를 창설했다. 1918년부터 17년간 외무장관으로서 국제연맹과 소협상을 주도하며 프랑스·소련과의 동맹 체계를 구축했다. 뮌헨 협정으로 사임 후 런던 망명정부를 이끌었고, 전후 귀환해 대통령에 복귀했다. 1948년 2월 쿠데타에서 비공산당 장관들의 사직서를 수리하고 고트발트의 공산당 정부를 승인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의 소비에트 블록 편입을 결정지었다.
「바보들 같으니. 저들이 무엇에 환호하는지 안다면」, 뮌헨 협정에서 돌아와 부르제 공항의 환호 인파를 보고 측근에게 (동승자들의 증언으로 전하는 말), 1938년 9월 30일
빵집 아들 출신의 역사 교사로 급진당을 이끈 정치인. 1934년 2월 6일 폭동 이튿날 총리에서 물러났고, 급진당을 이끌고 인민전선에 참여해 블룸 내각의 국방장관을 지냈다. 1938년 4월 총리로 돌아와 9월 뮌헨 협정에 서명했고, 11월 법령으로 주 40시간제를 해체하고 항의 총파업을 꺾어 인민전선을 끝냈다. 1939년 9월 대독 선전포고를 했고 독소 불가침조약 뒤 공산당을 불법화했으며, 1940년 3월 핀란드 지원 실기의 책임을 지고 실각했다. 비시 정권의 리옴 재판에서 블룸과 나란히 피고석에 섰다가 부헨발트에 억류되었고, 전후 하원에 복귀해 1958년까지 활동했다.
트루먼의 집무실 책상에는 '책임은 여기서 끝난다(The buck stops here)'라는 문구가 놓여 있었고, 원자폭탄에서 맥아더 해임까지 그는 그대로 살았다.
트루먼은 루스벨트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명령한 미국의 33대 대통령이다. 1947년 3월 '무장 소수파나 외부 압력에 저항하는 자유민을 지원한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했고, 1948년 4월 마셜 플랜에 서명해 서유럽 재건과 소련 봉쇄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 파병을 주도했고 중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해 맥아더를 해임함으로써 민간 통제 원칙을 재확인했다. 퇴임 당시 역대 최저 지지율로 떠났으나 냉전 승리와 함께 '위대에 가까운' 대통령으로 사후 재평가되었다.
1944년 포티튜드 사우스에서 패튼은 실재하지 않는 제1미군집단의 얼굴이 되어 칼레를 향한 위협을 연출했다.
조지 S. 패튼은 기갑부대의 기동성과 공격적 작전 운용을 중시한 미국 육군 장군이었다. 그는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에서 전투 지휘 능력을 보였지만, 병사 폭행과 거친 발언으로 지휘권과 명성에 반복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1944년 포티튜드 사우스에서는 허구의 제1미군집단을 지휘하는 인물로 내세워 독일군이 칼레 방면의 상륙을 믿도록 만들었고, 실제 노르망디 상륙 뒤에도 독일 예비전력을 묶어 두는 데 기여했다. 이후 제3군을 이끌고 프랑스를 가로질러 독일로 진격했으나, 전후에는 반소련 발언과 탈나치화 비판으로 바이에른 군정에서 해임되었다.
1939년 11월 26일 저녁, 그는 몰로토프의 마이닐라 포격 항의각서를 받고 즉시 헬싱키에 사실 확인을 요청했다.
아르노 위리외코스키넨은 독립 핀란드의 법률가이자 외교관으로, 외무부의 정치 업무와 대외 협상을 맡았다. 모스크바 공사로서 그는 1939년 11월 마이닐라 포격을 둘러싼 몰로토프의 항의와 핀란드의 회답을 전달하며 전쟁 직전 외교의 최전선에 섰다. 그는 소련과의 불가침조약 체결에도 참여했지만, 협상으로 안보 갈등을 봉합하려던 외교는 겨울전쟁을 막지 못했다.
체스터 W. 니미츠는 미국 해군의 잠수함·군수 전문가에서 태평양 전쟁의 연합군 해상 지휘관으로 올라선 제독이다. 1941년 진주만 공습 직후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된 그는 일본군 통신정보를 작전 판단에 결합해 미드웨이에 가용 전력을 집중했고, 과달카날 공세를 승인하며 반격의 지휘 체계를 세웠다. 그의 지휘는 압도적 물자와 정보 우위를 작전 기동으로 전환했지만, 섬 전투와 봉쇄가 낳은 막대한 희생이라는 전쟁의 대가를 지우지는 못했다. 전후에는 해군참모총장으로 감군과 핵추진 잠수함 건설을 함께 추진했다.
메헬렌 문서를 검토한 뒤, 독일의 공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경보를 방어 준비로 전환했다.
라울 판 오버스트라텐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 복무한 벨기에 장군으로, 군사사와 작전 분석에도 힘을 쏟았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레오폴드 3세의 군사고문으로서 메헬렌에서 확보한 독일 공격계획을 검토하고 경보를 현실적인 방어 조치로 바꾸는 데 관여했다. 그의 신중함은 정보의 진위를 따지면서도 독일의 공격 가능성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실무적 판단으로 나타났다. 전후에는 왕실과 군의 기록을 바탕으로 벨기에의 전쟁정책을 저술했다.
고트발트 정부에 남아 '합법성'을 부여하고 쿠데타 2주 만에 체르닌 궁전 아래에서 죽은 비공산당 외무장관
1947년 7월 모스크바에서 마셜 플랜 거부를 강요받고 돌아온 마사리크는 '나는 주권국의 장관으로 떠났다가 스탈린의 하인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토마시 마사리크의 아들로, 1925년부터 13년간 주영 공사를 지내고 2차 대전 중 런던 망명정부 외무장관으로 BBC 방송을 통해 점령지 조국과 매주 연결된 상징이 되었다. 1947년 7월 스탈린에게 마셜 플랜 참여 거부를 강요받은 뒤 '나는 스탈린의 하인으로 돌아왔다'고 토로했으며, 1948년 2월 공산당 쿠데타 때 사임하지 않고 고트발트 정부의 유일한 비공산당 장관으로 남아 체제 이행에 형식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쿠데타 2주 후 체르닌 궁전에서 투신 또는 피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자살인지 타살인지 반세기 넘게 결론이 나지 않은 그의 죽음은 서방에 충격을 주어 마셜 플랜 의회 통과를 촉발시켰다.
1945년 9월 2일, 그는 미주리호 갑판에서 천황과 일본 정부를 대표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마모루 시게미쓰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군부의 팽창을 경계하면서도 제국 국가의 외교를 수행했다. 그는 1932년 상하이에서 폭탄 공격으로 오른쪽 다리를 잃었고, 1945년에는 외무대신으로서 천황과 일본 정부를 대표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도쿄재판에서 침략전쟁과 포로 보호 의무와 관련해 금고 7년을 선고받았지만 1950년 가석방되었고, 전후 외무대신과 부총리로 복귀해 일본의 국제사회 재편입을 추진했다.
1937년 소련과 조약을 맺은 뒤에도 그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일본과 공산당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의 군사·정치 지도자로서 1920년대 북벌을 이끌어 난립한 중국을 국민정부 아래 통합했다. 그는 공산당과의 내전을 우선시했지만, 1936년 서안사변 뒤 일본에 맞선 제2차 국공합작을 받아들였고 1937년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바탕으로 무기와 항공기 지원을 확보했다. 항일전쟁에서 중국의 저항을 지휘한 뒤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대만으로 정부를 옮겼으며, 그곳에서 장기간의 계엄과 권위주의 통치를 구축했다.
1944년 6월 12일 노르망디에서 병사들에게 말했다. “여러분과 나는 곧 함께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버나드 몽고메리는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과 병사 훈련에 대한 집착을 바탕으로 지휘관이 된 영국 육군 원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엘알라메인에서 제8군을 재건해 승리를 이끌었고, 이후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전선을 지휘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을 앞두고 제21군집단을 맡아 초기 연합군 지상군을 통솔했으며, 상륙 규모를 확대하고 해안 교두보를 넓히는 구상을 추진했다. 그의 신중하고 통제적인 작전 방식은 병력 손실을 줄이는 장점과 전쟁을 느리게 한다는 비판을 함께 남겼다.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자유선거 없는 전독일 정부 구상을 거부하고 서방의 선거 절차를 내세웠다.
존 포스터 덜레스는 변호사 출신의 미국 외교가로, 전후 국제질서를 동맹과 군사적 억지의 틀로 재편하려 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대소 봉쇄를 넘어 공산주의 세력의 후퇴를 압박하는 노선을 폈고, NATO를 중심으로 서방의 결속을 강화했다.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몰로토프의 집단안보 구상과 전독일 정부 제안에 맞서 자유선거를 거친 통일을 주장했으며, 그해 서독의 NATO 가입을 관철해 유럽 분단의 제도화를 선택했다. 이 노선은 서방 진영의 안정과 미국의 영향력을 넓혔지만, 이란·과테말라 정권 전복 지원과 핵 위협을 포함한 개입주의라는 책임도 남겼다.
에른스트 로이터는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오가며 20세기 유럽의 격변을 직접 겪은 독일 정치가였다. 나치의 박해와 터키 망명을 거친 뒤 베를린으로 돌아와 도시 행정과 사회민주주의를 결합한 지도력을 보여 주었다. 베를린 봉쇄 때 그는 서베를린 시민의 결의를 국제사회에 호소했고, 분단된 도시를 자유와 자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의 경력은 혁명적 급진주의에서 민주적 지방정치로 이동한 한 세대의 긴장도 드러낸다.
이 재판은 익살극이다. 실제 기소자는 핀란드 국가가 아니라 한 초강대국의 정부이며, 실제 피고는 핀란드 국민이다.
겨울전쟁 발발 직후 핀란드 총리가 되어 소련이 인정을 거부한 합법 정부를 이끌었고, 1940년 3월 모스크바 평화 조약을 협상했다. 핀란드은행 총재 출신의 경제 전문가로 대통령에 올랐으며, 계속전쟁에서 독일과 협력했으나 1944년 뤼티-리벤트로프 협정을 개인 자격으로 맺고 사임해 만네르헤임의 대소 강화를 열었다. 전후 전쟁 책임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49년 사면되었고, 오늘날 핀란드에서는 조국을 위해 희생한 지도자로 기억된다.
1956년 11월 1일 기자회견에서 소련의 재침공 가능성을 묻자 "그런 비극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개혁교회 목사에서 독립소지주당 창립자·지도자로 헝가리 전후 민주화의 얼굴이 된 정치인. 1945년 총선 승리로 총리에 오르고 이듬해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공산당의 살라미 전술로 1948년 사위의 조작된 반역 혐의를 빌미로 사임당하고 8년간 연금되었다. 1956년 10월 너지 임레의 혁명 정부에 합류해 11월 1일 바르샤바조약 탈퇴와 중립 선언에 동참했고, 봉기 진압 후 6년형을 받았다. 1989년 대법원이 형을 무효화하며 복권되었다.
「오랜 세월 전 우리는 운명과의 약속을 맺었고, 이제 그 서약을 실현할 시간이 왔습니다. 한밤중, 세계가 잠든 그 시간에 인도는 생명과 자유를 향해 깨어날 것입니다.」(1947년 8월 14일 독립 전야 연설)
인도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1947년 독립과 함께 초대 총리에 취임하여 1964년 사망할 때까지 인도를 이끌었다. 의회민주주의와 세속주의, 계획경제를 인도 국가의 기초로 삼았으며, 대외적으로는 냉전의 두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비동맹 노선을 개척했다. 1954년 티토와의 공동성명에서 '비동맹'을 국제정치 용어로 처음 규정했고, 1956년 브리유니 선언과 1961년 베오그라드 회의를 통해 비동맹운동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했다. 1962년 중·인도 국경전쟁의 패배로 국내적 위신이 흔들렸으나, 사후에도 인도 공화국의 설계자로 추앙받았다.
릴 시장 출신의 사회당 정치인으로 블룸 내각의 내무장관. 1936년 6월 파업 국면에서 점거 공장에 대한 강제 해산을 거부했고, 인민전선 강령의 첫 항목이던 극우 동맹 해산을 집행했다. 극우 주간지 『그랭구아르』가 1차 대전 중 탈영했다는 날조 기사를 퍼붓자 군 명예심사와 하원의 압도적 표결이 거듭 무고를 확인했지만 캠페인은 멈추지 않았고, 그는 11월 17일 릴의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례에는 수십만이 모였고, 그의 죽음은 언론의 명예훼손을 규제하는 입법 논의를 촉발했다.
상세 이력 보기
1890–1914릴의 사회주의 학생운동, 당 기관지 기자
1914–1918전우의 시신을 수습하러 나갔다 포로가 되어 독일 수용소 억류
1925–1936릴 시장
1928–1936하원의원, 사회당 노르 연맹 지도자
1936.06내무장관, 점거 공장 강제 해산 거부와 극우 동맹 해산 집행
1936.07–11『그랭구아르』의 탈영 날조 캠페인, 군 심사와 하원 표결로 거듭 무고 확인
1945년 5월 모스크바에서 그는 스탈린에게 소련군의 대일전 준비 시점을 물었고, 스탈린은 8월 8일을 제시했다.
해리 홉킨스는 대공황기 미국의 공공구호를 유급 일자리 정책으로 조직한 행정가이자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가장 가까운 참모였다. 그는 연방구호와 공공사업을 대규모로 운영한 뒤 상무장관을 지냈고, 전쟁기에는 무기대여법과 연합국 협력을 조율했다. 건강 악화에도 루스벨트와 트루먼의 특사로 소련과 협상했으며, 1945년 5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에게 대일전 참전 시점과 일본 점령 구역을 물어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쟁점을 드러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5성 장군 출신의 제34대 미국 대통령이다. 재임 중 냉전 봉쇄정책을 추진하며 이란·과테말라 쿠데타를 지원했고, 1960년 3월 카스트로 전복을 위한 CIA 비밀공작을 승인했다. 피그스만 침공 실패 후 케네디에게 '이런 일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조언했으며, 소련의 대응을 두려워해 개입을 숨기려는 발상은 오히려 상대를 대담하게 만들 뿐이라고 경고했다. 퇴임사에서는 '군산복합체'의 위험을 경고하며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을 남겼다.
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군인·저항 지도자·정치가로, 1940년 패전 뒤에도 전쟁을 계속할 프랑스의 대표성을 자임했다.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를 조직해 비시 정권의 정통성 주장에 맞섰고, 해방 뒤에는 임시정부를 이끌며 국가 재건의 방향을 둘러싼 갈등을 드러냈다. 그는 강한 행정부와 국가적 자율성을 중시해 제5공화국을 세웠지만, 개인 권력과 식민지 전쟁을 둘러싼 긴장도 남겼다.
1941년 10월, 그는 전쟁을 자신할 수 없다며 외교를 택할 사람에게 정권을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고노에 후미마로는 일본의 귀족 정치가이자 제국의 전시 동원을 이끈 총리였다. 사회주의 사상과 반제국주의적 인종평등론에 관심을 보였지만, 서구 제국주의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과 동아시아 지배 구상을 추진했다. 1940년 삼국동맹과 대정익찬회를 주도한 뒤 미국과의 협상을 시도했으나 군부의 확장 노선을 꺾지 못했고, 1941년 도조 히데키에게 정권을 넘겼다. 전후 전범 용의자로 체포될 예정이던 그는 1945년 청산가리로 자살했다.
트래퍼드 리말로리는 제1차 세계대전의 항공 정찰과 육군 협동 경험을 바탕으로 왕립공군의 작전 지휘관이 된 영국 공군 원수였다. 영국 전투에서는 대편대 운용을 둘러싸고 휴 다우딩과 키스 파크의 방어적 운용에 맞섰으며, 그 갈등은 지휘부 교체와도 얽혔다. 그는 오버로드에서 연합원정공군을 조정해 독일군 증원과 수송망을 차단하는 항공계획을 추진했지만, 프랑스 민간인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판단도 함께 남겼다. 노르망디 전투 뒤 동남아시아 공군 사령관으로 이동하던 중 프랑스 알프스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그는 1944년 11월 베오그라드 협상에서 연립정부와 섭정을 받아들이면서도 군주제 문제를 전후로 넘겼다.
이반 슈바시치는 크로아티아계 유고슬라비아 정치가이자 변호사로, 전쟁 전 크로아티아 바노비나의 초대 수반을 지냈다. 망명 왕정과 티토가 이끄는 민족해방운동의 세력 균형이 바뀌자 그는 양측을 잇는 비공산주의 협상 대표가 되었다. 그는 1944년 티토와 협상해 아브노이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연립정부와 섭정을 구상했지만, 군주제의 존속 여부는 전후 결정으로 남겼다.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는 알렉산다르 1세 암살 뒤 미성년 페타르 2세를 대신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통치한 섭정공이었다. 그는 중앙집권 체제의 유산을 완화하고 크로아티아 민족운동과 타협하려 했으며, 1939년 크베트코비치-마체크 협정으로 크로아티아 바노비나를 성립시켰다. 그러나 유럽 전쟁이 확대되고 영국과 프랑스의 실질적 보장이 약해지자 중립을 지키려던 외교는 독일 압력에 대한 양보로 기울었고, 1941년 삼국동맹 가입은 군부 쿠데타와 그의 실각을 불렀다. 그는 전후 망명 생활을 하다 1976년 사망했고, 2011년 세르비아 법원에서 복권되었다.
오마르 브래들리는 제2차 세계대전의 미국 육군 고위 지휘관으로,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를 거쳐 노르망디 상륙과 서유럽 공세를 지휘했다. 그는 기존의 제1미군집단 본부가 연합군의 기만작전에서 허구의 지휘부로 활용되는 과정을 거쳤고, 실제 전선에서는 제1군과 제12군집단을 이끌었다. 전후에는 육군참모총장과 초대 합동참모의장을 지내며 한국전쟁 초기 미국의 군사정책을 조정했다.
스테티니어스·그로미코와 함께 긴급소위원회를 구성한 에바트는 '화해적 태도'로 초안을 제시했고, 6월 20일 총회 토론권 교착이 해소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정치인이자 법률가로, 36세에 고등법원 최연소 판사가 되었고 이후 커틴·치플리 정부에서 검찰총장 겸 외무장관을 지냈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5대 강국의 안보리 거부권에 맞서 중소국 대표로 38건의 수정안을 제출했고, 스테티니어스·그로미코와 함께 긴급소위원회를 구성해 총회 토론권을 둘러싼 교착을 해소했다. 1948년 유엔 총회 의장으로 세계인권선언 초안을 주도했으며, 이스라엘 건국을 심의한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 의장도 맡았다. 1951년 노동당 대표가 되었으나 반공 이슈를 둘러싼 당내 분열과 세 차례 연속 총선 패배 끝에 1960년 정계에서 물러났다.
쑹쯔원은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재정가이자 외교관으로, 국가 재정과 대외 원조를 연결해 전쟁기 국민당 국가의 운영을 뒷받침했다. 그는 재정 통합과 관세 자주권을 추진했지만, 중앙집권적 전쟁 재정과 가족·금융 네트워크의 결합이라는 긴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1945년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중소조약을 협상하며 만주 철도와 뤼순의 처리, 외몽골의 지위를 둘러싼 중국의 양보를 조율했고, 그 합의는 일본 패전 뒤 동북아 질서를 규정했다. 전후 행정원장으로서 인플레이션과 내전 재정 위기를 수습하지 못한 뒤 미국으로 이주했다.
소콜롭스키가 회의장을 떠난 직후, 머피는 소련이 서방을 베를린에서 몰아내려는 3단계 계획에 착수했다고 보고했다.
로버트 대니얼 머피는 전쟁과 점령의 현장에서 협상과 정보 판단을 결합한 미국 외교관이었다. 1948년 독일 주재 미국 정치고문으로서 그는 소련이 서방을 베를린에서 몰아내려는 단계적 압박에 들어갔다고 분석해 워싱턴에 보고했고, 그 판단은 봉쇄와 공수작전을 둘러싼 미국의 인식 형성에 기여했다. 그의 경력은 북아프리카 상륙 준비와 전후 독일 행정, 벨기에·일본 대사직, 국무부 고위직을 거쳤으며, 외교관의 현장 보고가 군사·정치 결정을 움직이는 과정을 보여 준다.
1941년 6월 25일 저녁 의회에서 "핀란드는 소련의 공격 대상이 되었으며, 소련은 핀란드를 상대로 전쟁 행위를 시작했다"고 선언했다.
핀란드은행 간부로 리스토 뤼티의 측근이 된 그는, 뤼티가 1940년 대통령에 오르자 총리로 발탁되었다. 재임 중 핀란드는 독일과 함께 계속전쟁을 치르며 동카렐리야를 점령했고, 경제 문제보다 외교·군사 권한은 만네르헤임과 뤼티, 비팅 외무장관이 쥐고 있었다. 1942년 힘러 방문 때 "우리에게 유대인 문제란 없다"는 말로 핀란드 유대인 논의를 차단한 것으로 유명하다. 1946년 전쟁책임 재판에서 6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49년 사면되었고, 이후 정치에 복귀하지 않고 IOC 위원으로 여생을 보냈다.
스탈린의 요구를 허세로 간주하고 만네르헤임의 타협론을 묵살한 겨울전쟁 직전의 핀란드 외무장관
"소련이 강대국이라는 사실을 잊어라": 파시키비가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 에르코가 남긴 훈시.
헬싱긴 사노마트를 북유럽 최대 일간지로 키운 언론 재벌로, 1938년 12월 외무장관에 취임하여 소련과의 협상 전권을 장악했다. 모스크바로 떠나는 파시키비에게 "소련이 강대국이라는 사실을 잊어라"고 훈시할 만큼 확신에 찬 강경파였으며, 스탈린의 영토 요구를 허세로 간주하고 만네르헤임 원수의 타협 권고를 묵살했다. 그가 소유한 헬싱긴 사노마트가 여론을 타협 불가 방향으로 이끈 가운데 협상은 결렬되었고, 겨울전쟁 발발 후 파시키비는 이를 "에르코의 전쟁"이라 불렀다.
1950년 1월, 의장석에 앉은 장팅푸를 향해 말리크가 '이것은 회의가 아니라 회의의 패러디'라고 외치고 퇴장했다.
청나라 외교문서를 실증적으로 연구한 역사가에서 중화민국 외교관으로 전환한 인물이다. 컬럼비아대에서 박사를 마치고 난카이·칭화대에서 중국 근대외교사 연구를 개척했으며, 1935년 학계를 떠나 국민정부에 합류해 주소대사와 상임 유엔대표를 지냈다. 1950년 1월 안보리 의장으로 회의를 주재할 때 소련 대표 말리크가 중공이 아닌 국민당 대표와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다며 퇴장했고, 이 공백은 6월 한국전쟁 유엔군 결의가 거부권 없이 통과되는 결정적 조건이 되었다.
1952년 6월, 회담이 성과 없이 끝날 것이 분명하자 해리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을 나갔고, 남일 장군은 어안이 벙벙한 채 남겨졌다.
서부전선과 벌지 전투에서 무공을 세운 기병 장교 출신으로, 1952년 5월 유엔군 정전대표단 수석대표가 되어 1년 넘게 판문점 회담을 이끌었다. 1953년 7월 27일, 남일 장군과 서로 눈길 한 번 마주치지 않고 18부의 정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3년간의 한국전쟁 교전을 멈추었다. 독실한 복음주의 신자이자 장교기독교친목회 회장을 지낸 그는, 퇴역 후에도 '명령 아래 사는 사람'이라는 신앙의 규율을 평생 지켰다.
존 J. 매클로이는 법률가 출신의 미국 외교·안보 관료이자 금융가로, 전쟁 수행과 전후 국제질서 구축을 잇는 통로였다. 그는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과 독일 전범 사면·감형 같은 결정에 관여하며 미국 권력의 폭넓은 책임과 그 모순을 드러냈다. 1961년 존 F. 케네디의 군비축소 고문으로서 소련과 시험금지 및 군비축소를 협상했고, 7월 모스크바 회담에서 베를린 위기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을 직접 다뤘다.
1948년 6월 21일, 그는 라디오를 통해 일부 공산품의 가격 통제와 강제 배급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는 전후 서독의 경제 질서를 자유로운 경쟁과 사회적 안전의 결합으로 구상한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였다. 1948년 비조네 경제행정 책임자로서 통화 개혁을 준비하고 독일마르크 도입과 맞물려 가격·생산 통제를 단계적으로 풀어 서독 경제 회복의 제도적 출발을 열었다. 그의 역할은 흔히 ‘경제 기적’의 단독 설계자로 신화화되지만, 연합국의 개혁과 국제 경기, 노동자와 기업의 생산 회복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으며 가격 자유화는 초기 생활비 상승과 노동계급의 저항도 낳았다. 이후 경제부 장관과 수상으로서 그 질서를 서독의 국가 정체성으로 굳혔으나, 경기 침체와 연정 붕괴 속에서 1966년 사임했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네 연합국 외무장관이 본회의 의장을 교대로 맡았고, 이든도 그 의장단에 포함됐다.
앤서니 이든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연맹과 집단안보를 중시한 영국 보수 정치가였다. 그는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부상 속에서 세 차례 외무장관을 지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윈스턴 처칠의 핵심 외교 보좌역으로 소련 및 연합국과의 전후 질서를 협상했다. 1945년 얄타 회담과 샌프란시스코 국제기구회의에서 영국을 대표하며 전후 국제기구 형성에 참여했지만, 총리 재임 중 수에즈 침공을 추진해 영국 제국의 한계와 미국 의존을 드러냈다.
봉쇄 하루 만인 1948년 6월 25일, 클레이는 트루먼의 공식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공수 작전을 스스로 명령했고, 살아남은 베를린 시민들은 그를 '도시의 아버지'라 부르며 무덤에 '우리 자유의 수호자'라는 감사 비문을 새겼다.
그루지야 출신의 공병 장교로, 전시 보급 지휘로 두각을 나타낸 뒤 1947년 점령 독일 미군 지구 군정장관이 되었다. 1948년 소련이 서베를린을 봉쇄하자 무력 호송대 대신 공수를 택해 직접 명령을 내렸고, 베를린 방위가 곧 미국의 명예이자 서유럽의 운명이라고 주장하며 324일의 공수를 끝까지 이끌었다. 1949년 퇴역한 뒤 사업가와 역대 대통령의 고문을 지냈고, 1961년 베를린 장벽 위기 때 케네디의 특사로 돌아와 체크포인트 찰리의 미군 전차를 소련 전차와 대치시켰다.
레지스탕스 의장에서 마셜 플랜의 설계자까지, 몰로토프에게 유럽 분열이 소련 탓이라고 응수한 외무장관
1947년 7월 2일 파리 3국 회담 마지막 세션, 몰로토프가 마셜 플랜을 '유럽을 둘로 가르는 음모'라고 비난하자 비도는 '유럽을 분열시키는 것은 바로 소련의 행동'이라고 조용히 응수했고, 이튿날 베빈과 함께 16개국 초청장을 발송했다.
1943년 장 물랭 체포 후 국민저항위원회(CNR) 의장직을 이어받아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이끌었고, 해방 후 기독교민주주의 정당 인민공화운동(MRP)을 창당했다. 외무장관으로서 1947년 파리 3국 회담에서 몰로토프의 '유럽 분열' 비난에 맞서 소련의 행동이야말로 유럽을 가르고 있다고 정면 반박했고, 소련 이탈 후 영국과 함께 서유럽 16개국을 규합해 마셜 플랜 수용을 주도했다. 1946년과 1949년 두 차례 총리를 지냈으며 디엔비엔푸 포위 당시 미국에 원자폭탄 지원을 요청할 만큼 식민지 전쟁에 매달렸다. 알제리 독립에 반대하며 1962년 비밀리에 '제2의 CNR'을 조직했다가 면책특권을 박탈당하고 브라질로 망명, 1968년 사면으로 귀국했으나 영향력은 회복하지 못했다.
「우리의 단순하고 인간적인 목표는 프랑스의 청년 대중이 스포츠에서 기쁨과 건강을 찾게 하고, 노동자들의 여가를 조직해 그들이 되찾은 삶의 기쁨과 존엄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차관 취임 라디오 연설, 1936년 6월 10일
변호사 출신의 사회당 하원의원으로, 블룸 정부가 세계 최초로 만든 여가·스포츠 담당 차관직을 맡았다. 국철 40% 할인 「인민 티켓」과 유스호스텔 확충, 대중 스포츠 자격증으로 1936년 여름 60만 명의 생애 첫 유급휴가를 조직했고, 여가 정책을 노동자에게 존엄을 돌려주는 일로 정의했다. 1939년 동원을 자원해 1940년 6월 9일 엔 강 전선에서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오늘날 프랑스 전역의 수천 개 경기장과 체육관이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는 대기업 경영과 국가 동원 행정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 말 미국 외교의 중심에 선 정치가였다. 무기대여 원조를 관리하며 동맹국의 전쟁 수행을 뒷받침했고, 얄타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함께 전후 유럽과 국제기구의 틀을 협의했다. 그는 얄타 의정서에 미국 대표로 서명한 뒤 유엔 창설회의를 이끌었지만, 소련과의 긴장을 유엔을 통한 협력으로 풀려 한 구상은 트루먼 행정부와 충돌했다. 이 경력은 기업과 국가의 전시 동원이 전후 다자주의로 이어지는 동시에 냉전의 문턱에서 제약받은 과정을 보여 준다.
애들레이 스티븐슨은 1952년과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두 차례 패했지만, 냉전 시대 미국 자유주의의 지적 양심으로 남은 정치가다. 일리노이 주지사 시절 매카시즘의 충성서약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고, 케네디 행정부 유엔 대사로 피그만 침공의 외교적 후폭풍을 감당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안보리에서 소련 대표 발레리안 조린에게 "지옥이 얼어붙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항공사진을 공개했고, 백악관에서는 튀르키예 미사일 철수 교환을 제안해 매파의 맹비난을 받았으나 이는 위기 해소의 실제 합의였다. 죽기 직전까지 유엔 대사로 재임하며 대화를 통한 냉전 관리라는 신념을 지켰다.
그는 당국이 노동자들을 ‘훌리건’으로 갈라 부르는 논리를 거부하고, 국가의 폭력이 폭발의 조건을 만들었다고 법정에서 지적했다.
스타니스와프 헤이모프스키는 전후 폴란드에서 정치적 피고인과 사회적 약자를 변호한 법률가였다. 1956년 포즈난 노동자 봉기 뒤 그는 참가자들의 변호를 맡아, 사건을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국가 정책과 보안기관의 폭력이 낳은 사회적 충돌로 심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변론은 강압 수사와 당국의 ‘훌리건’ 낙인을 법정에서 다투며 노동자들의 존엄과 법적 권리를 지켰다. 이후 그는 감시와 언론 공세, 거액의 벌금, 변호사 업무 정지로 보복을 받았다.
우르호 케코넨은 전후 핀란드의 국가 운영과 대외관계를 규정한 정치가로, 1956년부터 1981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그는 소련과의 긴장을 관리하면서도 핀란드의 서방 경제·정치적 연결을 유지하는 중립 외교를 발전시켰다. 1972년 11월 디폴리 예비협의를 핀란드에 유치하고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한 유럽안보협력회의의 틀을 다듬은 일은 그 외교의 절정이었다. 그의 통치는 안정과 국제적 중개의 성과를 남겼지만, 대통령 권한과 동방관계에 의존한 정치가 민주적 경쟁을 좁혔다는 논쟁도 낳았다.
스테판 비신스키는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수장이자 사회적 권위를 지닌 종교 지도자로,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 교회와 민족 정체성의 자율성을 지켰다. 그는 국가와의 공개 대립만이 아니라 1950년 협정과 이후의 협상을 통해 신자 공동체와 교회 제도의 활동 공간을 보존하려 했다. 1953년 체포되어 1956년까지 억류되었지만, 석방 뒤에는 교회의 장기적 조직력과 도덕적 권위를 재건했고, 기에레크 시기에는 국가와 공존하면서도 독립된 사회 세력으로 남았다. 1980년 연대노조가 출범하자 정부와 파업 노동자 모두에게 책임 있는 행동을 촉구했다.
맥스웰 테일러는 제2차 세계대전의 공수부대 지휘관에서 냉전기의 미국 군사·외교 정책가로 변모한 장교였다. 그는 핵무기에 과도하게 의존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뉴 룩’을 비판하고 재래식 전력과 유연한 대응을 강조했다. 케네디의 신임을 얻어 합동참모본부 의장과 대통령 군사대표를 지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EXCOMM에 참여해 군사 선택지를 제시하는 동시에 대통령의 봉쇄 결정을 군에 전달했다. 이후 베트남 개입 확대를 지지하며 냉전 군사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드러냈다.
히로히토는 1926년부터 1989년까지 재위한 일본의 제124대 천황으로, 제국 헌법의 군주와 전후 헌법의 상징천황을 모두 경험했다. 그는 일본의 대외 침략과 태평양전쟁을 승인한 국가 체제의 정점에 있었으며, 전쟁 수행과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의 범위는 지금도 논쟁적이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소련의 대일 참전 뒤 교착된 최고전쟁지도회의에 개입해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하고 항복 방송을 했다. 전후에는 천황의 신격화를 부정하고 상징적 국가원수로 남았으며, 해양생물학 연구도 계속했다.
1941년 쿠프라에서 그는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프랑스 국기가 휘날릴 때까지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고 서약하게 했다.
필리프 르클레르 드 오트클로크는 1940년 패전 뒤 드골의 자유 프랑스에 합류해 식민지 군대와 망명군을 하나의 전투력으로 묶은 프랑스 장군이다. 그는 쿠프라에서 스트라스부르까지 이어지는 목표를 제시했고, 아프리카 전역에서 단련한 기동전을 제2기갑사단에 이식했다. 1944년 8월에는 연합군의 파리 우회 구상에 맞서 수도로 진격해 프랑스군과 레지스탕스가 주도하는 해방을 실현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는 군사적 승리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식했지만, 194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해 그 판단을 끝까지 펼치지 못했다.
뱅상 바디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급진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지방 행정과 의회에서 활동하며 참전군인과 공화국의 권리를 옹호했다. 1940년 7월 그는 헌법 개정 자체에는 열려 있었지만 페탱에게 권력을 넘겨 공화국을 없애는 데는 반대했고, 이를 밝힌 27인 동의안의 발의를 시도한 뒤 전권 부여에 반대표를 던졌다. 비시 당국의 시장직 정지 뒤 레지스탕스에 참여했으며 체포되어 다하우로 deport되었다. 전후에는 다시 의원과 참전군인 담당 장관을 지냈지만 식민 지배와 프랑스의 해외 주둔을 옹호하는 한계도 보였다.
기습 공격은 미국에 '진주만 오명'을 남길 것이라고 경고하며, 공습 전 카스트로와 흐루쇼프에게 24시간의 사전 경고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사업가이자 공화당원으로, 피그만 침공 실패 후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CIA 국장에 임명되었다. 1962년 여름과 가을,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반입할 것이라고 거듭 경고했으나 정보기관 내부에서 기각당했고, 9월 20일 신혼여행 중 보낸 전문에서 '상상력 있는 분석'을 촉구한 끝에 10월 14일 U-2 정찰기를 명령해 미사일 기지를 발견했다. 케네디 암살 후 존슨 행정부에서도 재임했으나 베트남 확전을 둘러싼 불화로 1965년 사임했다.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흐루쇼프의 마음을 읽고 해법을 제시한 인물
「흐루쇼프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쿠바를 구했다, 나는 침공을 막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 ExComm 회의에서.
미국 외교관으로, 1957년부터 1962년까지 모스크바 주재 대사를 역임하며 흐루쇼프와 독자적인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의 국가안전보장회의 집행위원회(ExComm)에서, 10월 27일 도착한 두 통의 흐루쇼프 서한 중 강경한 두 번째 서한을 무시하고 26일의 첫 번째 서한에 응답하라고 권고했으며, 이 전략이 위기 해소의 핵심이 되었다. 이후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다시 모스크바 대사를 지내며 SALT 협상과 핵비확산 정책 수립에도 기여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28미국 외교관으로 임용
1941주소 미국대사관 2등서기관, 독소전 발발 후 모스크바 잔류
1952–1957주오스트리아 고등판무관·대사, 오스트리아 국가조약 및 트리에스테 협상
1957–1962주소 미국 대사 (1차), 캠프 데이비드·빈 정상회담, U-2 사건, 부엌 논쟁
「포츠담 이후, 소련이 세계 공동체의 합리적이고 협력적인 구성원이 되도록 유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회고록 『역사의 증인』에서.
미국 외교관이자 소련 전문가로, 1934년 주소 미국대사관 개설부터 냉전기까지 미소관계의 거의 모든 중대한 장면에 입회했다. 루스벨트와 트루먼의 통역으로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배석했으며, 1947년 마셜 국무장관의 요청으로 케넌과 클레이턴의 정책 메모를 하버드 졸업식 연설문으로 작성해 마셜 플랜의 공개적 출발을 이끌었다. 1953년 주소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매카시의 공격을 받으며 인준 청문회를 겪었고, 이후 프랑스 대사까지 지내며 '현자들'로 불린 초당파 외교 고문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윌리엄 H. 터너는 제2차 세계대전의 히말라야 공수와 베를린 공수에서 대규모 항공수송을 정교한 체계로 바꾼 미국 공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베를린 봉쇄 때 연합 공수임무부대를 이끌며 항공기를 일방통행 회랑과 엄격한 시간표에 배치해 임시 작전을 지속 가능한 공급망으로 전환했다. 블랙 프라이데이의 사고 뒤에는 악천후에도 계기비행을 의무화하고 착륙 실패 항공기를 되돌리는 규칙을 세워 안전과 처리량을 함께 높였다. 이후 한국전쟁 공수와 군사항공수송 근무를 지휘하며 현대 전략공수의 조직 원리를 남겼다.
아폴로 1호 화재 뒤 그는 NASA가 조사와 수습을 맡아야 한다고 존슨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제임스 웨브는 과학자나 기술자가 아니라 대규모 공공사업을 조직한 미국의 행정가였다. NASA 국장으로서 아폴로 계획에 안정적인 예산과 정치적 지지를 결합하고, 연구센터와 산업·대학을 조정하는 중앙집중적 운영 체계를 세웠다. 그는 유인 달 착륙을 추진하면서도 마리너와 파이어니어 같은 행성과학 및 우주망원경 연구를 지지했다. 아폴로 1호 화재 뒤에는 조사를 이끌고 NASA의 책임을 의회에 설명하며 계획의 연속성을 지켰다.
1950년 6월 25일, 그는 한국의 상황을 보고하고 결의안 표결을 위한 안전보장이사회 절차를 이끌었다.
어니스트 그로스는 국제법률가이자 미국 외교관으로, 법률 자문과 전후 점령지 행정을 거쳐 유엔에서 미국의 정책을 대표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미국 대표단을 이끌며 안전보장이사회가 결의 82를 채택하도록 절차와 표결을 조율했다. 이 과정은 소련 대표의 불참이라는 조건을 활용한 미국 외교의 성과였지만, 유엔의 집단안보가 강대국 경쟁 속에서 작동한 방식이라는 긴장도 남겼다. 이후 그는 국제변호사로서 티베트 문제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다뤘다.
폴 니츠는 미국의 냉전 전략과 핵무기 정책을 형성한 외교·안보 관료였다. 그는 NSC-68에서 소련과의 장기 대결을 군사력 증강의 문제로 정식화했지만, 핵무기의 위험을 관리하려면 정교한 협상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SALT에 참여하고 레이건 행정부의 INF 협상을 이끌면서, 강한 억지력과 군비 감축을 서로 배타적인 선택으로 보지 않는 실무 노선을 추구했다. 이 때문에 그는 군비경쟁의 설계자이자 협상 가능한 질서를 찾은 인물이라는 상반된 유산을 남겼다.
린든 B. 존슨은 의회에서 다져진 협상력으로 미국의 국내 개혁과 냉전 전략을 함께 밀어붙인 대통령이었다. 그는 민권법과 투표권법, 메디케어를 포함한 ‘위대한 사회’를 확장했지만, 베트남전의 확대는 그 성과를 압도하는 역사적 책임이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경쟁을 지속하면서도 소련과 전략무기 제한을 모색해 1967년 글래스버러 정상회담과 1968년 전략무기 협상 합의로 훗날 SALT로 이어질 길을 열었다. 선거에서 물러난 마지막 해에도 베트남 평화협상과 군비통제를 병행하려 했으나, 합의의 결실은 후임 정부가 거두었다.
보충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자유도시' 형성이 곧 브란덴부르크 문에 국경이 세워진다는 뜻입니까?
함부르크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학위를 마치지 못하고 언론에 들어간 독일 기자다. 전후에는 소련이 통제하는 베를린 방송에서 일하다 1949년 서베를린으로 옮겨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특파원이 되었고, 1961년 6월 15일 기자회견에서 '국경이 브란덴부르크 문에 세워지는가'를 물어 울브리히트로부터 '아무도 장벽을 세울 의도가 없다'는 유명한 답을 끌어냈다.
“어떤 역사라도 살아남는다면, 인류 문명의 종말을 함께 초래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 딴은 버마의 교사와 관료 출신 외교관으로, 탈식민화와 국제 협상이 중심이 된 냉전기의 유엔을 이끈 제3대 사무총장이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그는 존 F. 케네디와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호소와 제안을 보내 소련 선박의 항로 전환과 쿠바 미사일 철수를 연결하는 출구를 제시했고, 이후 쿠바를 방문해 피델 카스트로와 검증 문제를 논의했다. 그의 중재는 핵전쟁의 위험을 낮췄지만, 유엔의 조용한 외교는 초강대국 중심의 위기 서술에서 오래도록 과소평가되었다. 그는 콩고 평화유지 작전과 베트남전 종식을 위한 협상도 추진하며 국제기구의 도덕적 책임과 강대국 정치 사이의 긴장을 드러냈다.
사촌 왕을 몰아내고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5년 뒤 같은 궁정에서 공산 쿠데타에 살해된 아프가니스탄 초대 대통령
1977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브레즈네프에게 '우리는 당신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어떻게 운영할지 지시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바락자이 왕조 출신의 아프간 왕족으로, 1953년 사촌 자히르 샤에 의해 총리로 임명되어 10년간 소련 편향의 근대화를 추진하며 '붉은 왕자'로 불렸고, 파슈투니스탄 문제로 파키스탄과 국경 분쟁을 벌였다. 1973년 좌파 장교들의 지원을 받아 무혈 쿠데타로 왕정을 전복하고 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올랐으나, 집권 후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고 일당제를 도입했으며 대외정책을 이란·사우디·서방으로 급선회했다. 1978년 4월 혁명 당시 대통령궁에서 PDPA 칼크파 장교들에게 가족 18명과 함께 사살되었고, 이는 소련-아프간 전쟁의 직접적 전사가 되었다.
“유엔에서는 미사일 위협 제거를, 미주기구에서는 리우 조약에 따른 공동행동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딘 러스크는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국무부를 거쳐 미국 외교의 중심에 선 국제주의자였다.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군사적 충돌을 통제하면서도 봉쇄를 선택했고, 미주기구와 유엔을 통해 그 조치를 국제적으로 방어하려 했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는 점차 개입을 강하게 옹호해, 국제법과 동맹 외교를 중시한 인물이 전쟁의 정당화에도 관여한 긴장을 남겼다. 퇴임 뒤에는 그루지야대학교에서 국제법과 외교를 가르쳤다.
기습으로 쿠바를 치는 건 진주만과 똑같은 짓이다. 그게 어디로 갈지 생각하면 정말 소름이 끼친다... 미사일을 다 제거해도 그게 끝이 아니야. 그게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국무차관(1961–1966)으로 존 F. 케네디와 린든 B. 존슨 두 행정부에서 복무하며, 쿠바 미사일 위기와 베트남전이라는 냉전의 두 결정적 순간에 확전을 반대한 예외적 인물이었다. 1962년 10월 EXCOMM에서 기습 공습을 '또 하나의 진주만'이라 규정하며 로버트 케네디를 비롯한 다수를 봉쇄 쪽으로 돌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후 1965년까지 베트남 파병 확대에 홀로 반대하는 각료 내 유일한 반대자가 되었다. 퇴임 후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편향된 중동 정책을 비판했고, 유럽 통합의 초기 설계자 중 한 명으로 장 모네와 함께 슈만 계획과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조약의 초안을 작성했다.
1986년 10월 12일 오후,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모든 핵무기를 2000년까지 폐기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40분 뒤, SDI 연구를 실험실에 가두라는 고르바초프의 조건을 레이건이 거부하면서 협상은 무너졌다.
로널드 레이건은 배우에서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거쳐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이 된 인물로, 레이거노믹스와 대규모 군비 증강으로 1980년대를 열었다. 취임 초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며 대결을 고조시켰으나, 핵무기 없는 세상을 진심으로 염원하여 고르바초프와 네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1986년 레이캬비크에서 전면 핵폐기 합의 직전까지 갔지만, 전략방위구상(SDI)을 양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협상은 막판에 결렬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 서명하여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을 통째로 폐기했고, 냉전은 그가 퇴임한 지 몇 달 만에 막을 내렸다.
미국민은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데탕트', 곧 사람과 사상의 자유로운 이동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이민자의 아들로 워싱턴주에서 태어나 40년 넘게 의회에서 활동한 냉전 자유주의자였다. 민권과 환경 정책에는 앞장섰지만 데탕트에는 회의적이어서, 소련의 유대인 이민을 통상 지위와 연결한 잭슨-배닉 수정안을 주도했다. 1974년 키신저·도브리닌과의 비공식 협상이 소련의 거부로 무산되며 잭슨은 1972년 통상협정을 사실상 좌초시킨 인물로 남았다. 그의 매파 보좌관들은 훗날 신보수주의의 핵심을 이루었다.
장벽이 세워진 뒤 그는 말했다. “장벽은 무너져야 하지만, 무너지기 전까지 도시는 살아가야 합니다.”
빌리 브란트는 나치 독재에 맞서 망명과 저항을 거친 독일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였다.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장벽 건설 뒤 흔들린 도시의 사기를 지키고 서방의 책임을 촉구했으며, 장벽을 ‘수치의 장벽’이라 부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방총리로서는 동방정책과 ‘접근을 통한 변화’를 추진해 냉전의 대립을 완화했고 197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59년 모스크바 미국 박람회의 모형 주방 앞에서, 닉슨은 흐루쇼프를 향해 "우리도 색채 텔레비전에서는 앞서 있다"고 응수하며 즉흥적인 체제 논쟁을 벌였다.
반공 조사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하원의원에서 부통령을 거쳐, 두 차례의 낙선을 딛고 1968년 대통령에 오른 집요한 정치인이었다. 냉전의 대표적 반공 인사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소련 및 중국과의 데탕트를 주도하여, 1972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브레즈네프와 ABM 조약 및 SALT I 잠정협정에 서명했다. 초강대국 간 핵무기 제한의 첫 국제법적 틀이었다. 베트남전을 '명예로운 평화'로 종결시키고 중국 방문으로 미중 관계의 문을 열었으나,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1974년 8월 9일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사임한 대통령이 되었다. 퇴임 후 외교 원로로서 이미지를 회복했으나, 그의 유산은 데탕트의 성취와 대통령직을 무너뜨린 불법 사이에 영원히 걸려 있다.
상세 이력 보기
1946–1950캘리포니아 12구 연방 하원의원; 반미활동위원회에서 앨저 히스 사건으로 전국적 명성
1950–1953캘리포니아주 연방 상원의원
1953–1961미국 부통령 (아이젠하워 행정부), 1959년 모스크바 '주방 논쟁'
1961–1968변호사 개업, 저술, 1962년 주지사 선거 낙선 후 정치적 재기
1969–1974제37대 미국 대통령; 1972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SALT I·ABM 조약 서명, 베트남전 종결, 중국 방문; 1974년 워터게이트로 사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기차에서 워싱턴의 눈 치우기가 힘들다는 포드의 말에 브레즈네프가 '우리의 첫 거래는 죽 드리죠, 소련 제설차'라고 받았다.
하원의원 25년과 부통령을 거쳐 1974년 닉슨의 사임으로 대통령이 된 공화당 정치가로, 한 번도 선거로 뽑히지 않고 백악관에 오른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다. 닉슨이 연 데탕트를 계승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브레즈네프를 만나 SALT II의 틀, 운반수단 2,400기와 MIRV 1,320기의 상한을 잡았고, 이듬해 헬싱키 최종의정서에 서명하며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법으로 만들었다. 닉슨에 대한 사면이 최대 논란이 되었고, 1976년 카터에게 패배했다.
1974년 그는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하원에 제출해 이민의 자유를 무역 조건으로 만들었다.
찰스 배닉은 클리블랜드 동부의 노동자와 동유럽계 주민을 기반으로 활동한 민주당 하원의원이었다. 그는 조세 형평, 사회보장, 메디케어, 오대호 환경 문제를 다루며 국내 개혁 의제를 외교정책과 연결했다. 1974년 헨리 잭슨과 함께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발의해, 이민을 제한하는 비시장경제 국가에 대한 정상 무역관계 부여를 조건부로 묶었다. 이 법은 소련계 유대인을 비롯한 종교적 소수자의 이주를 압박하는 수단이 되었지만, 데탕트와 무역을 인권 조건에 연계한 미국 의회의 개입이기도 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38–1939클리블랜드 시의회 의원
1940–1942오하이오주 상원의원
1942–1945미 해군 예비역 장교, 대서양·태평양 전선 복무
1947–1954클리블랜드 시 법원 판사
1955–1969미국 하원의원, 오하이오 제21선거구
1969–1981미국 하원의원, 오하이오 제22선거구
1973–1981하원 세입위원회 무역소위원회 위원장
1985–1995Squire Sanders & Dempsey 워싱턴 사무소 변호사, 동유럽 무역 담당
1944년 6월 9일, 그는 노르망디 상륙을 양동으로 보이게 하는 보고를 독일군 수뇌부에 보냈다.
후안 푸홀 가르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기에 독일 정보기관에 침투한 뒤 영국에 충성한 스페인계 이중간첩이었다. 그는 리스본에서 공개 자료만으로 영국에 존재하지 않는 요원망을 꾸며 독일 지휘부의 신뢰를 얻었다. 영국 정보기관과 협력한 뒤에는 가공의 요원들과 제한된 진짜 정보를 엮어 독일의 판단을 유도했다. 특히 포티튜드 작전에서 노르망디 상륙이 양동이고 주공이 파드칼레에 온다는 이야기를 강화해 연합군의 기만을 뒷받침했다.
제라드 C. 스미스는 미국의 변호사이자 핵정책 전문가로, 군비통제와 비확산을 국가정책의 문제로 다룬 외교관이었다. 그는 SALT I에서 미국 대표단을 이끌며 경쟁하는 핵전략 속에서 제한 협상의 실무를 조직했고, 회고록 Doubletalk에 그 과정의 긴장과 판단을 기록했다. 이후에도 핵물질 전용 방지와 탄도탄요격미사일 조약의 보존을 주장하며 군비경쟁의 관리와 한계를 함께 보여 주었다.
"내 생애 이보다 옳았으면 싶었던 적은 없다": 1962년 10월 15일, 쿠바 상공 U-2 사진에서 소련 미사일을 확인하며
시카고 출신의 지질학자로 제2차 세계대전 중 해군 사진판독 장교로 경력을 시작했다. 1953년 CIA에 합류해 사진판독부를 이끌었고, 1961년 국가사진판독센터(NPIC)의 초대 소장이 되어 U-2 정찰기와 초기 정찰위성의 영상 분석을 총괄했다. 1962년 10월 15일, NPIC 분석관들이 쿠바 상공 U-2 사진에서 소련 SS-4 중거리탄도미사일 기지를 식별했을 때 룬달이 직접 확인하고 '내 생애 이보다 옳았으면 싶었던 적은 없다'는 말과 함께 CIA 본부에 보고했으며, 다음 날 백악관에서 케네디 대통령에게 이를 브리핑했다. 1973년 퇴임까지 NPIC를 이끌며 냉전기 미국의 영상정보 역량을 구축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토머스 브리멜로는 영국 외교관이자 소련 문제 전문가로, 냉전의 동맹정치와 군비외교 사이에서 활동했다. 그는 1973년 핵전쟁 방지 협정 협상에서 헨리 키신저와 초안을 함께 다듬어, 소련의 무조건적 핵무기 선제사용 포기 구상을 동맹 의무와 제3국을 포함한 보다 제한적인 문안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 이 역할은 영국 외무부 전문성이 미국의 대소 전략에 직접 결합한 사례였지만, 동시에 긴장 완화의 언어가 핵억지와 세력정치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작동했음을 보여 준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가장 큰 교훈: 인간의 오류 가능성과 핵무기의 무기한 결합은 국가들을 파괴할 것이다.
미국 제8대 국방장관(1961–1968)으로, 케네디와 존슨 두 행정부에서 7년 이상 국방을 이끈 최장수 재임자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EXCOMM 내 공습 대신 해상 '격리' 봉쇄를 처음 제시하고 강력히 밀어붙여, 흐루쇼프에게 결의를 보여주면서도 군사 충돌로 번지지 않을 통제된 선택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는 계량적 분석과 병력 증강을 주도하다 점차 회의에 빠졌고, 퇴임 27년 뒤 회고록에서 그 전쟁이 '잘못됐다'고 고백했다. 이후 세계은행 총재(1968–1981)로 빈곤 퇴치로 은행의 방향을 전환했다.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으라.
미국 제35대 대통령(1961–1963)으로, 43세의 최연소 당선자이자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이었다. 1961년 피그만 침공을 승인했으나 실패로 끝났고, 같은 해 흐루쇼프와의 빈 정상회담에서 위협을 느낀 소련은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했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해상 '격리' 봉쇄를 선택하고, 로버트 케네디를 통해 튀르키예의 주피터 미사일 철수라는 비밀 양보로 핵전쟁을 막았다. 1963년 11월 22일 댈러스에서 암살당했으며, 그의 죽음 이후 민권법과 세제 개혁 등 의제가 의회를 통과했다.
레이 클라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가 걱정해온 그것들, 정말 있는 것 같습니다.' 번디가 물었다. '확실한가?'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1961–1966)으로,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에서 베트남전 확전의 핵심 설계자였다. 1962년 10월 15일 저녁 CIA로부터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 증거를 보고받았으나, 비밀 유지와 준비 부족을 이유로 다음 날 아침까지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1966년 퇴임 후 포드재단 회장을 지냈고, 말년에는 핵무기 선제사용 포기를 주창하며 핵군축 논의에 기여했다.
발터 슈텔레는 냉전기 미국 외교관으로, 소련과 유럽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룬 직업 외교관이었다. 그는 1974년부터 1976년까지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로서 데탕트 국면의 미소 협상을 현장에서 지켜봤고, 헬싱키 협정으로 이어진 외교 과정과도 맞닿아 있었다. 이후 서독 대사와 국무부 부장관을 지냈다.
카롤 요제프 보이티와는 폴란드의 사제이자 철학자였으며, 1978년 요한 바오로 2세로 선출되어 가톨릭교회를 이끌었다. 나치 점령과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겪은 경험은 인간의 존엄, 종교의 자유, 민족적 기억을 강조하는 그의 목회와 정치적 언어를 형성했다. 1979년 폴란드 방문에서 약 1,100만 명이 그를 만났고, 그의 존재는 정권 아래 흩어져 있던 사회가 자신을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도록 도왔다. 그는 연대가 결성될 조건을 만든 여러 요인 가운데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그 운동의 노동자 조직과 정치적 행위자들을 대신한 사람은 아니었다.
슐츠는 레이건 부부와의 저녁 식사에서 소련 지도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듣고 깨달았다. '이 사람은 공산당 지도자와 대화를 해본 적이 없고, 몹시 하고 싶어 하는구나.'
조지 슐츠는 노동·예산·재무·국무의 4개 부처 장관을 모두 지낸 두 미국인 중 하나로, 레이건 행정부에서 6년 반 동안 국무장관을 맡아 대소 외교의 방향을 다시 썼다. 국방장관 와인버거와 CIA 국장 케이시가 협상을 반대하는 가운데서도 슐츠는 레이건이 고르바초프와 직접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제네바(1985)와 레이캬비크(1986) 정상회담의 외교적 토대를 놓았다. 그 결과 1987년 INF 조약으로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 전체가 폐기되었고, 슐츠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동유럽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냉전의 종식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의 회고록 『격랑과 승리』는 1980년대 외교사의 핵심 사료로 남아 있다.
게일 할보르센은 미국 공군 조종사로, 1948년 베를린 공수작전에 참여해 서베를린의 생존을 뒷받침한 수송 임무를 수행했다. 템펠호프 공항 철책가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껌을 건넨 뒤 손수건 낙하산으로 사탕을 떨어뜨린 일은 Operation Little Vittles로 확대되어 공수작전의 물자 수송에 인간적 얼굴을 더했다. 이 자발적 행동은 미군의 규정과 냉전 선전의 경계에 놓였지만, 베를린 주민과 미국 어린이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며 서방의 정치적 호소력을 키웠다. 그는 이후에도 공군의 항공·우주 개발과 베를린 템펠호프 지휘를 맡았고 1974년 대령으로 퇴역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42미 육군항공대 입대, 조종사 훈련
1948–1949베를린 공수작전 C-54 조종사, Operation Little Vittles 창시
1941년 3월 27일, 두산 시모비치가 그에게 말한 순간이었다. "폐하, 이제부터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십니다."
페타르 2세는 아버지 알렉산다르 1세의 암살 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다. 1941년 3월 27일 쿠데타로 섭정 체제가 무너지고 즉시 성년으로 선포되었지만, 곧 추축국 침공으로 런던의 망명정부를 이끌어야 했다. 그의 왕권은 점령에 맞선 국가적 연속성을 상징했으나, 망명정부의 분열과 파르티잔의 군사적·정치적 승리 속에서 실제 통치 기반을 잃었다. 1945년 왕정이 폐지된 뒤에도 귀환하지 못한 그는 전후 유고슬라비아의 정통성을 둘러싼 미해결 긴장을 남겼다.
1972년 파판치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은 마차 대열을 홀로 앞서 달리는 카우보이를 좋아합니다. 이 낭만적인 캐릭터는 제게 꼭 맞습니다"라고 말해 닉슨을 격노시켰다.
나치 독일을 피해 15세에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난민 출신으로, 하버드대에서 현실주의 외교 이론을 정립하고 닉슨·포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냈다. 소련과의 데탕트를 주도하며 '연계' 전략을 고안, 도브리닌 주미 소련대사와의 비밀 배후채널을 통해 1972년 SALT I과 ABM 조약을 성사시키는 결정적 외교를 펼쳤다. 중국 비밀 방문으로 미중 화해의 문을 열고 파리 평화협정을 중재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나, 캄보디아 폭격과 제3세계 개입으로 전쟁범죄 논란 역시 끌어안은 복합적 유산을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1938–1943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 시티칼리지에서 회계학 수학 후 미군 입대
1943–194984보병사단 정보장교로 유럽 전선 참전, 방첩대 요원으로 게슈타포 색출 및 탈나치화 임무
1950–1969하버드대 정치학 교수, 국방연구프로그램 소장; 록펠러·닉슨 캠페인 외교 고문
1969–1975국가안보보좌관: 데탕트·대중국 개방·SALT I 협상 주도, 도브리닌과의 배후채널 운영
1971–1972중국 비밀 방문으로 마오쩌둥·저우언라이와 회담, 닉슨 방중 길을 열다
1973–1977국무장관: 파리 평화협정, 노벨 평화상(1973), 중동 셔틀 외교; 칠레 쿠데타 연루
몰타에서 고르바초프와 냉전 종식을 선언했지만, 신중함이 거의 역사를 놓칠 뻔했던 미국 대통령
몰타 공동 기자회견에서 부시는 말했다. '우리는 항구적 평화를 실현할 수 있으며 동서 관계를 지속적 협력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고르바초프 의장과 제가 바로 이곳 몰타에서 시작한 미래입니다.'
조지 H. W. 부시는 제2차 세계대전의 해군 조종사에서 석유 사업가를 거쳐 미국 제41대 대통령이 된 인물로, CIA 국장·유엔 대사·중국 주재 대표를 두루 지낸 외교 경험을 바탕으로 냉전의 마지막 4년을 이끌었다. 1989년 취임 직후 대소 정책 재검토라는 '부시 휴지기'로 고르바초프를 조바심나게 했으나, 그해 12월 몰타 회담에서 두 정상은 냉전의 종식을 공동으로 확인했고, 이듬해 독일 통일을 지지하며 유럽의 새 질서를 다졌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는 다국적군을 조직해 걸프전으로 응수했으나, 불황 속에 '새로운 세금은 없다'는 공약을 깨면서 1992년 재선에 실패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후, 카터는 1980년 1월 국정연설에서 '페르시아만 지역에 대한 외부 세력의 지배 시도는 미합중국의 중대한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루지야 땅콩 농장에서 자란 침례교도로, 해군 핵잠수함 장교를 거쳐 남부의 인종차별 철폐를 공약한 '뉴사우스' 주지사가 되었다. 1976년 워싱턴 아웃사이더를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파나마 운하 반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성사시켰다. 1979년 6월 빈에서 브레즈네프와 SALT II에 서명하며 데탕트를 정점으로 이끌었으나, 같은 해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조약 비준을 철회하고 카터 독트린을 선언하며 데탕트의 종막을 알렸다. 퇴임 후 카터 센터를 설립해 인권과 공중보건, 분쟁 중재에 헌신했으며,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훗날 이렇게 적었다. 〈전면 기습 공격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그것이 역(逆)진주만이 되어 전 세계의 눈에 미국의 이름을 더럽히리라는 점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남동생이자 가장 신임받는 정치 고문으로, 35세에 법무장관이 되어 조직범죄 소탕과 시민권 보호에 앞장섰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초기에는 침공을 선호했으나, 해상 봉쇄 측으로 전환한 뒤 위기 후반 도브리닌 소련 대사와의 비밀 회담에서 튀르키예 미사일 철수 약속을 전하며 타결의 열쇠가 되었다. 형의 암살 후 상원의원으로 베트남 전쟁 반대와 빈곤 퇴치에 나섰고, 1968년 대선 경선 중 암살당했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는 미국 공군 장교 출신의 국가안보 관료로, 대통령과 외교·군사 관료 사이의 정책 조정을 중시한 현실주의적 전략가였다. 그는 제럴드 포드와 조지 H. W. 부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내며 냉전 말기의 군비·유럽 외교를 조율했다. 1989년 몰타 회담에는 성급한 정상회담이 기대만 키울 수 있다며 처음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지만, 회담이 열리자 미소 관계의 전환을 관리하는 핵심 참모로 참여했다. 이후에도 동맹과 국제기구를 중시하며 이라크 침공과 일방주의를 비판했다.
「나는 내가 이 모든 일을 시작한 사람으로 기억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평판을 원하지 않았다.」, 2005년 AP 통신 인터뷰에서
플로리다주 아팔라치콜라 출신으로 17세에 육군항공대에 입대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전투 임무를 수행한 미 공군 조종사였다. 1962년 10월 14일 일요일 아침 쿠바 상공을 6분 동안 비행하며 촬영한 928장의 사진에서 소련의 SS-4 중거리탄도미사일이 확인되었고, 이 사진이 케네디 대통령의 책상에 올라가며 13일간의 핵전쟁 위기가 시작되었다.
'그 유명한 구절을 당신이 썼습니까?'라는 질문에 소렌슨의 평생 대답은 '묻지 마시라(Ask not)'였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수석 연설문 작성자이자 측근 보좌관으로, 케네디는 그를 '나의 지적 혈액은행'이라 불렀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합동참모본부의 공습 주장에 맞서 해상 봉쇄를 지지했고, 10월 22일 대국민 TV 연설을 초안하며 '봉쇄(blockade)' 대신 '격리(quarantine)'라는 용어를 선택해 전쟁 선포의 법적 함정을 피했다. 후일 이 연설을 '지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케네디의 연설'이라고 평했으며, 흐루쇼프와의 비밀 서한 초안도 작성했다. 케네디 암살 후 린든 존슨의 '계속 나아갑시다' 연설을 기초하고 1964년 사임, 이후 변호사와 저술가로 활동하며 2008년 버락 오바마를 지지했다.
그 비밀 작전은 탁월한 발상이었다. 그것은 러시아인들을 아프간 덫으로 끌어들였다… 소련이 국경을 넘던 날 나는 카터 대통령에게 썼다: 우리는 지금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를 가졌다.
폴란드 출신의 미국 정치학자이자 외교 전략가로, 카터 행정부(1977–1981)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다. 소련 견제를 위한 인권 외교와 대중국 관계 정규화,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주도했으며, 카터 독트린으로 페르시아만 군사 개입 의지를 천명했다. 1979년 7월 3일, 소련 개입을 유발할 위험을 알리는 메모를 대통령에게 보내면서도 무자헤딘 비밀 원조 지시에 서명했으며, 훗날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라 평했다. 냉전 후에는 《거대한 체스판》(1997)으로 유라시아 지정학과 NATO 확장을 주창하며 미국 외교에 지속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1989년 11월 28일, 콜은 동맹국은 물론 자신의 외무장관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연방의회 연단에 섰다. 부시가 그의 10개항 계획 요약 편지를 받은 것은 콜이 이미 연설을 시작한 직후였다.
16년간 서독과 통일 독일의 총리를 지내며 유럽 통합과 독일 재통일을 이끈 기독교민주연합(CDU) 정치인. 1989년 11월 28일, 동맹국과도 협의 없이 독일 통일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연방의회에서 발표해 불과 며칠 후 열린 몰타 회담에서 독일 문제의 틀을 결정지었다. 이듬해 10월 3일 독일을 재통일시켰고,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마스트리흐트 조약과 유로화 도입을 주도했다. 서독 체제의 동독 확장이라는 방식으로 통일을 완수했으며, 16년 장기 집권 끝에 1998년 선거에서 패배한 뒤 CDU 비자금 스캔들로 당 명예의장직에서 물러났다.
비톨트 포킨은 광산 기술자 출신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경제관료로, 계획경제의 운영과 국가 전환을 함께 경험했다. 그는 독립 직전과 직후 우크라이나 정부를 이끌며 경제 위기와 연방 해체의 압력을 조정해야 했다. 1991년 12월 레오니드 크라프추크와 함께 우크라이나 대표로 벨로베시 협정에 서명해 소련 이후 질서의 출범에 참여했다. 말년에는 돈바스 협상에서 논쟁적인 입장을 보여 공적 역할에서 물러났다.
1989년 6월 27일, 모크와 줄러 호른이 쇼프론 인근 철조망을 절단하며 국경 개방을 세계에 알렸다.
알로이스 모크는 오스트리아 국민당의 정치가로, 유럽 통합을 오스트리아 외교의 중심 과제로 삼았다. 외무장관으로서 헝가리의 국경 개방과 오스트리아의 유럽공동체 가입을 추진하며 냉전 종식기의 중부 유럽 재편에 관여했다. 1989년 6월 27일 줄러 호른과 국경 철조망을 상징적으로 절단한 장면은 동독 주민들의 탈출과 동구권 붕괴로 이어진 국경 개방의 국제적 상징이 되었다.
고르바초프가 철수 의사를 굳힌 것은 스팅어 미사일이 아니라 '페레스트로이카와 외교 덕분'이라고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단언했다.
코르도베스는 에콰도르의 외교관이자 유엔 사무차장으로, 1982년부터 6년간 데 쿠엘랴르 사무총장의 개인대표로서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간 제네바 협상을 중재했다. 라울 프레비시와 함께 UNCTAD 창설에 참여했고, 유엔 내에서 특별정무담당 사무차장까지 오르며 이란 인질 위기, 이란-이라크 전쟁, 키프로스 분쟁 등 굵직한 현안을 두루 다뤘다. 1988년 4월 제네바 합의 서명을 이끌어내 소련군 철수의 외교적 틀을 완성했으며, 이후 에콰도르 외무장관과 유엔 대사를 지냈다.
1969년 2월, 하벨은 잡지 『트바르시』에 실은 「체코의 운명?」에서 쿤데라의 낙관적 민족 서사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우리 운명의 주인은 무엇보다 바로 우리 자신이며, 지리적 위치나 수백 년의 숙명 뒤에 숨는다고 우리가 해방되지는 않는다."
체코의 극작가이자 반체제 운동가, 정치가. 부조리극 『가든 파티』(1963)와 『비망록』(1965)으로 체제를 풍자하며 명성을 얻었고, 1968년 프라하의 봄 진압 후 밀란 쿤데라의 「체코의 운명」에 「체코의 운명?」으로 응답하며 반체제로 전환했다. 1977년 헌장 77을 공동 창립하고 투옥을 거듭했으며, 1989년 벨벳 혁명을 이끌어 체코슬로바키아 마지막 대통령과 체코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1991년 연방 존속 국민투표에서 우즈베키스탄은 잔류를 택했지만, 그는 같은 해 독립을 선언했다.
이슬람 카리모프는 소비에트 체제의 경제관료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으로 전환한 정치가였다. 그는 독립 직전 연방의 틀을 둘러싼 협상에 참여하면서도 우즈베키스탄의 주권과 국가적 선택권을 우선했고, 1991년 독립 뒤에는 이를 국가 건설의 중심 원리로 삼았다. 그의 통치는 산업 기반과 국가 통합을 지키려는 정책을 추진했지만, 야당과 언론을 억누르고 이슬람주의와 대중 시위를 강경하게 통제하는 권위주의로 굳어졌다. 따라서 카리모프는 탈소비에트 중앙아시아에서 주권 국가를 세운 지도자인 동시에 정치적 다원주의를 희생시킨 통치자로 기억된다.
1991년 9+1 회의에서 연방의 재편을 논의하면서도 투르크메니스탄의 독자성을 끝까지 저울질했다.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는 소련 말기 투르멘 공화국의 당·정부 지도자에서 독립 투르크메니스탄의 초대 대통령으로 전환한 정치가였다. 그는 1991년 신연방조약을 둘러싼 9+1 회의에 투르크메니스탄 대표단을 이끌고 참여했지만, 공화국의 독자 노선을 지키려는 계산 속에서 협상 자체에는 제한적으로 관여했다. 독립 뒤에는 중립과 국가 주권을 내세우면서 권력을 대통령 개인에게 집중하고, 루흐나마와 광범한 개인숭배를 통해 사회를 통제했다. 그의 통치는 탈소비에트 국가 건설과 권위주의적 고착이 결합한 사례로 남았다.
1981년 3월 19일 비드고슈치에서 농민 연대의 합법화를 요구하던 그는 진압대에 의해 구타당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로만 바르토슈체는 폴란드의 농민이자 반체제 정치인으로, 독립 농민노조의 조직화와 민주화 이후 농민정치의 재편을 잇는 인물이었다. 1981년 비드고슈치 점거를 이끌며 농민 연대의 합법화를 요구했고, 3월 19일 공권력의 진압으로 구타당했다. 계엄 시기에는 구금되었으며, 이후 의회와 폴란드 농민당을 통해 농촌 기반의 반공 야권을 제도정치로 옮겼다.
에스토니아의 정치가이자 에스토니아 인민전선의 공동 창립자로, 개혁 요구를 대중 정치로 조직한 인물이다. 1988년 4월 13일 생방송에서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는 인민전선 구상을 제안했고, 이 운동은 곧 민주주의와 에스토니아 독립 회복을 요구하는 대중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는 독립 이행기의 첫 총리를 지냈지만, 경제적 곤란과 정치적 논란 속에서 권력의 한계도 드러냈다.
상세 이력 보기
1973타르투대학교에서 역사학 학위 취득
1980–1988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기관에서 경제계획 업무
1988–1989마이노르 컨설팅 회사 학술 책임자, 에스토니아 인민전선 공동 창립
1989–1990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절젠스키 게저는 1956년 혁명을 경험한 역사학자이자 헝가리의 체제전환기 외교를 이끈 정치가다. 그는 혁명 뒤 처형된 사람을 약 350명으로 추산해 진압의 규모를 기억하는 데 기여했다. 학자로서 국제관계사와 헝가리의 대외 이미지를 연구했고, 민주 헝가리 포럼 창립 세대로서 서방과의 새로운 관계를 추진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주소 대사에서 『아프간츠이』의 저자까지, 소련을 가장 깊이 이해한 영국 외교관
「우리가 여전히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고 민스 파이를 먹고 있을 때, 고르바초프가 텔레비전에 나와 자신이 소련 대통령직을 사임했다고 세계에 알렸다」, 1991년 크리스마스 모스크바에서.
영국 외교관이자 작가로,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 붕괴의 결정적 시기인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주소 영국 대사를 지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개인적 신뢰를 쌓으며 1991년 8월 쿠데타와 옐친의 부상, 소련 해체를 현장에서 목격했고, 이후 존 메이저 총리의 외교정책 보좌관과 합동정보위원회 의장을 역임했다. 2011년 출간한 『아프간츠이』(Afgantsy)는 소련군이 전장에서 패배하지 않고 질서 있게 철수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군사적 실패가 아니라 정치적·정보적 실패였다고 주장해 '소련판 베트남'이라는 서방의 통념을 근본적으로 뒤흔든 대표적 수정주의 저작이다.
바츨라프 클라우스는 체코의 경제학자이자 정치가로, 1989년 이후 국가사회주의 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급진적 경로를 대표했다. 그는 시민민주당을 세우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분리를 이끈 뒤 체코 총리와 대통령을 지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 내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정치적 자유에는 공감했지만 경제적 제3의 길은 거부했으며, 이 입장은 전환기의 ‘수식어 없는 시장경제’와 이후 체코 보수주의의 핵심 구호가 되었다. 대통령으로서는 유럽 통합과 기후변화 정책을 비판하며 주권과 시장의 우위를 강조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소련 국가보안기관 출신의 러시아 정치가로, 1990년대 국가 위기 속에서 권력의 중심에 올라섰다. 그는 대통령과 총리를 번갈아 맡으며 연방 권력과 대통령 행정부를 강화했고, 러시아의 국제적 영향력 회복을 통치의 핵심 서사로 삼았다. 2005년 소련 해체를 ‘20세기의 가장 큰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말한 발언은 해체를 러시아 사회의 상실과 혼란으로 기억하는 그의 역사 인식을 압축한다. 동시에 그의 집권은 정치적 경쟁과 독립 언론의 공간을 좁히고, 대외 군사행동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재편했다.
우리가 충분히 단호하다면, 집권당이 자유선거에 복종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56년의 정신을 놓지 않는다면, 러시아 군대의 철수 협상을 즉시 시작할 정부를 선출할 수 있다.
빅토르 오르반은 1989년 너지 임레 재매장식에서 소련군 철수와 자유선거를 요구한 연설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반공청년 지도자였다. 1998년 총선 승리로 헝가리 최연소 총리가 되어 NATO 가입을 이끌었고, 2010년 재집권 후 개헌·사법·언론을 장악하며 스스로 '비자유민주주의'라 부르는 체제를 구축했다. 2014년 바일레 투슈나드 연설에서 자유민주주의와의 결별을 공개 선언했으며, 2020년 헝가리 역사상 최장기 총리가 되었다. 반공 저항으로 출발한 그의 정치 여정은 21세기 권위주의 포퓰리즘의 대표적 모델이 되었다.
1991년 8월 26일 최고회의에서 아카예프는 신연방조약 초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하고 국가연합을 요구했다.
물리학자이자 키르기스 공화국 과학아카데미 출신의 정치가인 아카예프는 당 관료가 아니었던 인물로서 1990년 공화국의 첫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는 소련 말기의 민족 갈등과 주권 요구 속에서 다당제와 시장 개혁을 내세웠고, 1991년 쿠데타를 신속히 비판하며 키르기스스탄의 독립을 이끌었다.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도 공화국의 주권을 중시해 8월 조약 초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고 국가연합에 가까운 수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재임 후반에는 대통령 권한의 연장과 가족·측근 중심의 통치, 부패 의혹이 커졌고 2005년 대중 봉기로 실각했다.
1980년 8월 16일, 엘모르 파업을 시작한 그는 그단스크 조선소로 향해 기업간파업위원회에 합류했다.
안제이 그비아즈다는 전자공학자이자 노동조합 활동가로, 1970년대 후반 그단스크의 독립 노동운동을 조직한 인물이다. 그는 해안 자유노조를 공동 창립하고 지하 출판을 이끌며 국가 통제 밖의 노동자 조직을 준비했다. 1980년 8월 16일 엘모르 파업에서 그단스크 조선소로 온 그는 기업간파업위원회 지도부에 합류해 21개 요구안을 공동 작성하고 연대의 초기 지도자가 되었다. 계엄령 뒤 투옥과 탄압을 겪은 그는 레흐 바웬사의 협상 노선과 결별하고 원탁회의 타협에 반대한 경쟁적 야당 흐름을 대표했다.
알베르타스 시메나스는 경제학자로 활동하다 리투아니아 독립 회복 운동에 참여한 정치가이자 3월 11일 독립 회복 법률의 서명자였다. 그는 1991년 1월 소련군이 빌뉴스의 핵심 시설을 포위한 시기에 정부를 이끌었고, 3일 뒤 실종 상태에서 게디미나스 바그노리우스에게 총리직이 넘어갔다. 이후 경제장관과 국회의원으로 일하며 독립국가의 경제 개혁과 제도 정비에 관여했다.
1991년 1월 20일 밤, 소련 특수부대가 라트비아 내무부 청사를 습격해 다섯 명이 사망했다. 고드마니스는 즉시 소련 내무장관 보리스 푸고에게 전화를 걸었고, 푸고는 '나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라트비아의 물리학자 출신 정치인으로, 고체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라트비아대학교에서 강의했다. 1987년 라트비아 인민전선에 합류해 1990년 라트비아 최고회의 선거 승리 후 초대 총리에 취임, 독립 회복을 선언한 정부를 이끌며 1991년 1월 바리케이드 당시 전략 거점 방어를 지휘하고 소련 내무장관 푸고에게 직접 전화해 공격 개입을 추궁했다. 2007년 다시 총리가 되어 금융위기 속에서 사임할 때까지 라트비아의 시장경제 전환과 유럽 통합을 추진했다.
매트록은 회고했다. "나는 로널드 레이건보다 더 나은 학생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는 자기가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을 알았고,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잭 매트록은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러시아에 매료되어 외교관이 된 미국의 대소 전문가로, 1961년 첫 모스크바 근무 시절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와 흐루쇼프 사이의 외교문을 번역했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NSC 유럽·소련 담당 선임국장으로서 CIA와 국무부 분석관들을 동원해 '소비에트 101'이라는 24편의 브리핑 문건을 편성하고 모의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 역을 맡아 레이건을 훈련시켰다. 1987년 소련 주재 대사로 부임하여 소련의 마지막 4년을 목격했고, 은퇴 후 고르바초프가 제네바에서 SDI 공유 약속을 서면화하지 않은 것을 '전략적 실수'라고 평가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29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 출생, 듀크대·컬럼비아대 수학
1956–1971외교관 임관, 빈·모스크바·서아프리카·동아프리카 근무, 쿠바 미사일 위기 시 케네디-흐루쇼프 서신 번역
1971–1974국무부 소련 담당 국장
1974–1978주소 미국대사관 공사 겸 부대사
1981–1983체코슬로바키아 주재 미국 대사
1983–1986NSC 유럽·소련 담당 선임국장, '소비에트 101' 편성, 제네바·레이캬비크 정상회담 준비
1987–1991소련 주재 미국 대사, 소련 마지막 4년 목격
1991–컬럼비아대·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 『제국의 부검』·『레이건과 고르바초프』 저술
1989년 11월 29일 몰타 회담 메모에서 베이커는 부시가 고르바초프보다도 "새로운 속도와 목적"을 이끌어야 한다고 썼다.
제임스 베이커는 변호사 출신의 공화당 정치가로, 조지 H. W. 부시와의 오랜 동맹을 바탕으로 미국 보수정치의 핵심 실무자가 되었다. 재무장관으로 환율과 국제 금융을 다룬 뒤 국무장관이 되어 냉전 말기의 외교, 독일 통일, 걸프 위기를 조정했다. 그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무조건 신뢰하기보다 미국의 이익과 동맹의 안정을 계산했지만, 부시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손을 내밀도록 설득하고 1989년 몰타 회담의 의제와 운영을 구체화했다. 그 신중한 현실주의는 대결의 관성을 늦추면서도 변화의 방향을 미국 외교가 관리할 수 있는 협상으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