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
마오는 왜 자기 당을 파괴하려 했고, 그 10년은 누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밀려난 마오는 1966년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를 치자며 학생 홍위병을 동원해 류사오치·덩샤오핑과 당 조직을 무너뜨렸다. 1967년 파벌 무장 충돌 뒤 군이 질서를 회복했고, 1971년 후계자 린뱌오의 죽음은 운동의 명분을 흔들었다. 1972년 닉슨 방중과 1976년 저우언라이·마오의 죽음, 4인방 체포로 10년이 끝났다.

기원: 대약진 이후의 두 노선
1962년 1월 11일부터 2월 7일까지 베이징에서 열린 확대 중앙공작회의에는 7,118명이 모여 「7천인 대회」라 불렸다. 마오쩌둥은 대약진의 잘못에 대해 “일차적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자기비판하면서도 사회주의 단계 내내 계급과 계급투쟁이 있으며 그것은 길고 복잡하며 때로 폭력적이라고 덧붙였다. 류사오치는 기근이 주로 천재가 아니라 “우리 일의 잘못”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회 뒤 마오는 경제 결정의 「2선」으로 물러났고 국가주석 류사오치와 총서기 덩샤오핑이 「조정·공고·충실·제고」의 8자 방침으로 도시 인구를 줄이고 건설을 늦추며 농업을 살렸다. 일부 지방에서는 농가가 생산을 책임지는 방식까지 나타났다. 마오는 1962년 7월 류사오치에게 “세 개의 붉은 깃발이 부정되고 땅이 나뉘는데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따졌다. 1 2
대외 정세가 이 불신을 키웠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뒤 중소 관계는 나빠졌고, 1963년부터 중국공산당은 「9평」으로 소련 지도부를 「수정주의」로 규정했다. 소련 방송은 마오와 그 「잘못된 노선」을 뒤엎는 「진정한 공산주의자」를 돕겠다고 중국을 향해 내보냈고, 미국과 북베트남의 전쟁이 커지면서 중국 지도부는 나라 안에 적의 협력자가 생길까 두려워했다. 마오는 자본주의 경향이 중국 안에서 자라고 있다고 보았다. 당과 정부와 군과 문화계에 「부르주아 대표 인물」이 숨어들었다는 그의 진단은 소련에 대한 비판을 그대로 국내로 돌린 것이었고, 문화대혁명은 그런 인물들을 대중의 손으로 몰아내는 「계속혁명」으로 정당화되었다. 1
마오와 류사오치의 갈등은 1963년 시작된 사회주의 교육운동(4청 운동)에서 드러났다. 류사오치는 공작대를 농촌에 보내 기층 간부의 부패를 조사하게 했고, 부인 왕광메이가 허베이 타오위안 대대에서 쓴 「도원 경험」 보고를 모범으로 퍼뜨렸다. 마오는 이것이 문제의 뿌리를 놓친다고 보았다. 1965년 1월 14일 중앙공작회의는 마오의 발언을 정리한 「농촌 사회주의 교육운동에서 현재 제기된 몇 가지 문제」, 이른바 「23조」를 내려보냈고, 운동의 표적은 「당내에서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로 옮겨졌다. 1970년 12월 마오는 에드거 스노에게 류사오치를 정치적으로 쓰러뜨려야겠다고 느낀 때가 언제냐는 질문에 “「23조」를 내렸을 때”라고 답했다. 3 4 5
마오에게는 당 기구 밖의 무기가 세 가지 있었다. 첫째는 린뱌오가 군에 들인 마오 숭배였다. 인민해방군 총정치부는 1964년 5월 『마오 주석 어록』을 내부용으로 펴냈고, 이 「붉은 보서」는 1966~1969년에만 공식판이 10억 부를 넘었다고 하며 1967년 12월까지 3억 5천만 부가 찍혔다는 집계도 있다. 둘째는 장칭·캉성·천보다처럼 문화·이론 분야에서 마오의 뜻을 대변하는 측근 그룹이었다. 셋째는 학생과 노동자를 당 조직을 거치지 않고 직접 움직이는 대중 동원이었다. 이 세 가지가 결합하면서 1966년의 운동은 당의 정풍이 아니라 당 자체를 겨눈 공격이 되었다. 1 6
서막: 『해서파관』에서 「5·16 통지」까지
명대사 연구자이자 베이징 부시장인 우한은 1959년부터 황제를 직언하다 파면된 명나라 관리 해서를 다룬 글을 썼고, 1961년 경극 『해서파관』을 완성해 1962년 초 무대에 올렸다. 1959년 4월 마오 자신이 간부들에게 해서처럼 진실을 말하라고 권했지만, 루산 회의에서 대약진을 비판한 펑더화이가 숙청된 뒤로 이 극은 마오를 황제로, 펑더화이를 해서로 빗댄 우의로 읽혔다. 1965년 2월 장칭은 상하이에서 장춘차오와 함께 야오원위안에게 비판문을 맡겼고, 마오가 직접 원고를 손보았다. 11월 10일 상하이 《문회보》에 실린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함」은 억울한 토지 판결을 바로잡는 줄거리가 인민공사를 허물고 지주·부농의 지배를 되살리려는 「부르주아 반대파」의 초점이라고 공격했다. 7 8 1
베이징 시장 펑전은 부하 우한을 감쌌다. 그는 3주 동안 다른 신문의 전재를 막았고 저우언라이가 개입한 뒤에야 전재를 허락하면서 논쟁을 학술 문제로 묶어 두려 했다. 그가 이끈 「문화혁명 5인 소조」가 1966년 2월 12일 낸 「2월 제강」은 논쟁에 현실 정치를 끌어들이지 말라며 「고집스러운 좌파」를 경고했다. 그사이 마오는 둘레를 정리했다. 총참모장 뤄루이칭은 1965년 12월 린뱌오의 고발로 실각했고, 당 중앙판공청 주임 양상쿤은 근거 없는 혐의로 해임되어 마오의 경호 책임자 왕둥싱으로 바뀌었으며, 펑전과 가까운 선전부장 루딩이도 밀려났다. 베이징에서 「삼가촌찰기」와 『연산야화』를 쓴 덩퉈는 비판이 몰아치자 1966년 5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9 1 10 11 12
1966년 5월 정치국 확대회의는 캉성·천보다를 앞세워 펑전·뤄루이칭·루딩이·양상쿤을 「반당 집단」으로 묶었고, 5월 16일 「통지」를 채택해 「2월 제강」을 폐기하고 5인 소조를 해산했다. 천보다가 초안을 쓰고 마오가 크게 고친 이 문서는 당·정부·군·문화계에 숨어든 부르주아 대표 인물들이 “조건이 무르익으면 정권을 빼앗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르주아 독재로 바꿀 것”이라 경고하고, 그 가운데 흐루쇼프 같은 인물이 “우리 곁에서 잠자고 있다”고 썼다. 「5·16 통지」는 당 고위층에만 돌다가 1967년 5월 17일 《인민일보》에 공개되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중앙문화혁명소조는 조장 천보다, 고문 캉성, 제1부조장 장칭, 부조장 장춘차오와 왕리·관펑·치번위·야오원위안 등으로 꾸려져 곧 정치국을 대신하는 운동의 지휘부가 되었다. 9 13 14 1
통지 직후 린뱌오는 5월 18일 연설에서 역대 정변의 사례를 늘어놓으며 통지의 목적이 반혁명 정변을 막고 마오 사상의 절대 권위를 세우는 데 있다고 말했다. 마오는 7월 장칭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 소책자에 그런 마력이 있다고는 생각한 적이 없다며 린뱌오의 과장을 “매우 불안하다”고 적었고, “높이 올려질수록 더 세게 떨어진다”고 썼다. 그러면서도 그는 린뱌오의 연설을 당 문건으로 돌리는 데 동의했다. 이 편지는 린뱌오가 죽은 뒤에야 공개되었고, 숭배를 키운 사람과 그것을 이용한 사람 사이의 긴장은 1970~1971년의 대결로 이어졌다. 9
1966년 여름: 대자보, 공작대, 「사령부를 포격하라」
펑전이 쓰러지자 베이징시 당위원회는 사실상 멈췄다. 5월 25일 캉성의 부인 차오이어우의 지도 아래 베이징대학 철학과 교원 녜위안쯔 등은 학교 당위원회와 총장 루핑을 공격하는 대자보를 붙였다. 마오는 이를 「전국 최초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자보」라 승인해 6월 1일 전국 방송에 내보내게 했고, 5월 31일에는 천보다가 마오의 승인을 받아 공작조를 이끌고 《인민일보》를 접수했다. 칭화대학 부속중학 학생들은 스스로를 「홍위병」이라 불렀다. 학생들은 각 학교의 당 조직에 맞서 일어났고, 6월 13일 대학 입시와 수업 중단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 15 16 2
일선을 맡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항저우의 마오에게 의견을 구한 뒤 6월 초 대학과 중학교에 공작대를 보내 때리지 말 것, 수업과 일을 방해하지 말 것 같은 「8조」로 운동을 당의 통제 아래 두려 했다. 그러나 이번 운동의 표적은 공작대를 이룬 바로 그 간부들이었다. 칭화대학에서는 국가계획위원회 부주임 예린의 공작대가 대학 당위원회를 접수하고 콰이다푸 같은 급진 학생을 비판했으며, 공작대에 참여한 왕광메이는 7월 콰이다푸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이른바 「50여 일」 동안 각지 공작대는 반발하는 학생들을 「우파」로 몰기도 했다. 1 2 17 18
7월 우한에서 창장을 헤엄쳐 건너며 건재를 과시한 마오는 베이징으로 돌아와 공작대가 학생 운동을 짓눌렀다고 비난했고, 7월 24일 공작대 철수를 결정했다. 8월 1일 제8기 중앙위원회 제11차 전체회의가 열렸고, 마오는 8월 5일 「사령부를 포격하라: 나의 대자보」를 썼다. 그는 지난 50여 일 동안 중앙에서 지방까지 일부 지도 동지들이 “반동적 부르주아 입장에 서서 부르주아 독재를 실행하고” 혁명파를 포위 토벌하며 “백색 테러”를 폈다고 썼고, 1962년의 우경과 1964년의 「형식은 좌, 실제는 우」인 경향을 함께 떠올리라고 했다. 이름은 없었지만 표적이 류사오치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회의 뒤 린뱌오가 유일한 부주석으로 서열 2위가 되었고 류사오치는 8위로 떨어져 후계자 지위를 잃었다. 1 5 19 20
8월 8일 전체회의는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 곧 「16조」를 채택했다. 결정은 문화대혁명을 “사람들의 영혼을 건드리는 대혁명”이자 사회주의 혁명의 새 단계로 규정하고, 지금의 목표가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와 싸워 쓰러뜨리고 「반동적 부르주아 학술 권위」를 비판하며 사회주의 경제 토대에 맞지 않는 교육·문예와 상부구조 전체를 개조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16조」는 학생 운동을 노동자·농민·병사와 하급 간부까지 끌어들이는 전국 운동으로 키웠다. 결정은 무력이 아니라 말로 싸우라고 했지만, 학교에 대한 당의 지도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1
홍위병과 「붉은 8월」, 그리고 「4구 타파」
마오는 8월 1일 칭화대학 부속중학 홍위병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의 「조반유리」를 지지했다. 8월 18일 톈안먼 광장에 모인 100만 명 앞에서 그는 홍위병 완장을 찼고, 완장을 채워 준 여학생 쑹빈빈에게 이름의 빈(彬)이 「문질빈빈」의 빈이냐고 묻고는 “무(武)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날의 집회는 영화로 만들어져 첫 달에 약 1억 명이 보았다. 11월까지 여덟 차례의 접견에 1,100만~1,200만 명이 모였고, 9월부터 이듬해 초까지 「대교류」 기간에는 홍위병이 공짜로 기차를 타고 숙식하며 전국을 오갔다. 대이동은 1966~1967년 유행성 뇌척수막염을 퍼뜨려 300만 명 넘게 감염되고 16만여 명이 죽었다. 16 21 1 2
폭력은 학교에서 먼저 터졌다. 8월 5일 베이징사범대학 부속여중 부교장 볜중윈이 대부분 자기 학생인 홍위병에게 맞아 죽어 베이징에서 홍위병에게 살해된 첫 교육자가 되었다. 8월 22일 마오는 경찰이 학생 운동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는 공안부 문서를 승인했고, 공안부장 셰푸즈는 「나쁜 사람」을 때려죽여도 상관없다며 홍위병을 체포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1980년 공식 통계로 8~9월 베이징에서 1,772명이 살해되고 33,695가구가 수색당했으며 85,196가구가 베이징에서 쫓겨났다. 1985년 11월의 공식 통계는 사망자를 10,275명으로 잡았다. 교외 다싱현에서는 8월 27일부터 9월 1일까지 80세 노인부터 생후 38일 된 아기까지 325명이 학살되었다. 작가 라오서는 8월 23일 공자묘 앞에서 구타당한 이튿날 타이핑후에 몸을 던졌고, 번역가 푸레이 부부는 9월 3일 상하이에서 목숨을 끊었다. 9월 상하이에서는 자살 704명, 살해 534명이 기록되었다. 21 22 23 24 1 2
린뱌오가 집회에서 외친 「4구 타파」, 곧 낡은 사상·문화·풍속·습관의 파괴는 거리와 사람의 이름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데서 시작해 가택 수색과 문화재 파괴로 번졌다. 홍위병은 취푸의 공자묘와 공림을 습격했고, 1958년 베이징시가 보호 대상으로 정한 문물 6,843곳 가운데 4,922곳이 훼손되거나 파괴되었으며, 베이징에서만 책 230만 권과 그림·공예품·가구 330만 점이 불탔다. 절과 교회와 모스크는 문을 닫거나 다른 용도로 바뀌었고, 티베트의 승려들은 총구 앞에서 자기 사원을 허무는 데 동원되었다. 수색으로 거둔 재물도 막대해 1966년 10월 중앙공작회의 문건은 전국의 홍위병이 거둔 황금만 110만 냥, 약 65톤이라고 했다. 25 1 21 2
첫 단계를 이끈 것은 간부 자녀가 많은 「노홍위병」이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영웅이면 아들은 호한, 아버지가 반동이면 아들은 개자식”이라는 「혈통론」을 내걸고 「지·부·반·괴·우」, 곧 지주·부농·반혁명분자·악질분자·우파의 집안을 공격했다. 베이징의 청년 노동자 위뤄커가 1966년 하반기에 쓰고 1967년 1월 《중학문혁보》에 실은 「출신론」은 출신에 따른 차별을 정면으로 반박해 전국에서 읽혔지만, 그는 1968년 체포되어 1970년 3월 5일 처형되었다. 1966년 가을 부모가 공격받기 시작하자 노홍위병은 힘을 잃었고, 당 조직 자체를 겨냥하는 「반란파」가 떠올랐다. 10월 중앙공작회의에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부르주아 반동 노선」을 집행했다며 자기비판을 해야 했고, 12월 콰이다푸는 5천여 명을 이끌고 톈안먼에서 처음으로 「류사오치 타도」를 외쳤다. 16 26 1 17
1967년: 1월 폭풍, 탈권, 「2월 역류」
중국 공업 생산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던 상하이에서 운동은 공장으로 번졌다. 1966년 11월 6일 방직공장 보위 간부 왕훙원이 이끄는 「상하이 노동자 혁명 조반 총사령부」(노총사)가 생겼고, 시 당위원회가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자 노동자들은 열차를 세운 채 안팅역에서 사흘을 버텼다. 중앙문혁소조가 보낸 장춘차오는 11월 11일 도착해 노총사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시 당국은 숙련 노동자 중심의 「적위대」를 꾸려 맞섰고, 12월 30일 캉핑로에서 두 조직이 처음으로 크게 충돌해 91명이 다쳤으며, 적위대의 총파업이 도시 경제를 마비시켰다. 1967년 1월 1일 《인민일보》 신년 사설은 그해가 “전면적 계급투쟁의 해”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27 28
1월 4~5일 반란파는 《문회보》와 《해방일보》를 접수했고, 6일 100만 명이 지켜본 비판 대회는 시장 차오디추를 파면하고 시 당위원회 제1서기 천피셴에게 「반혁명 죄행」을 해명하라고 결의했다. 마오는 8일 이것이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뒤엎는 대혁명”이라며 지지했고, 11일 중앙위원회·국무원·중앙군사위원회·중앙문혁소조가 함께 축전을 보냈다. 2월 5일 반란파는 파리 코뮌을 본뜬 「상하이 인민공사」를 세웠다. 그러나 마오는 지도부를 선거로 뽑는다는 코뮌 구상이 당과 국무원의 권위를 허문다며 물러섰고, 2월 23일 코뮌은 장춘차오를 주임, 야오원위안·왕훙원을 부주임으로 하는 상하이시 혁명위원회로 바뀌었다. 코뮌은 18일 만에 끝났다. 27 1
상하이의 「1월 혁명」은 전국 「탈권」의 모델이 되었다. 《홍기》는 1월 16일 상하이 노동계급이 「당권파」로부터 권력을 빼앗았다고 썼고, 이후 성급 정부와 당 기구가 잇달아 무너졌다. 헤이룽장에서는 성 당서기 판푸성이 스스로 반란파를 이끌고 자기 조직에서 권력을 빼앗았고, 베이징에서는 세 조직이 같은 날 탈권을 선언하기도 했다. 무너진 기구의 자리는 군인·혁명 간부·대중 조직 대표의 「삼결합」으로 꾸린 혁명위원회가 채웠다. 1월 해방군에 「좌파 지원」이 명령되었고 3월에는 좌파·공업·농업을 지원하고 군사 관제와 군사 훈련을 맡는 「3지 2군」으로 넓어졌다. 그러나 거의 모든 조직이 스스로 좌파라고 주장했고, 지방 당 조직과 가까운 지휘관들은 반란파를 누르는 일이 많았다. 중앙에서는 서열 4위였던 국무원 부총리 타오주가 1월 장칭·천보다의 공격으로 쓰러졌다. 27 1 29 30
2월 11일과 16일 저우언라이가 주재한 중앙 협의회에서 원로들이 폭발했다. 예젠잉과 쉬샹첸은 문혁소조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고 군을 흔든다고 비난했고, 부총리 탄전린은 당의 지도를 부정하고 출신으로 사람을 박해한다며 소조를 「반동」이라 불렀으며, 천이는 소조의 득세를 스탈린에서 흐루쇼프로의 이행에 빗댔다. 장춘차오·왕리·야오원위안이 그날 밤 마오에게 보고했고, 마오는 2월 18~19일 정치국에서 격노해 탄전린·천이·쉬샹첸에게 휴가를 내고 자기비판하라고 명령했다. 1981년 「역사결의」는 리푸춘·리셴녠·녜룽전도 함께 문화대혁명의 잘못을 비판했다가 「2월 역류」로 몰렸다고 적는다. 원로들은 숙청되지는 않았지만 정치국은 사실상 기능을 멈췄고, 중앙문혁소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31 32 33 1
군과 무장 투쟁: 우한 사건에서 노동자 선전대까지
우한에서는 숙련 노동자·국가 직원 중심의 「백만 웅사」와 홍위병·급진 노동자의 「공인 총부」가 각각 50만 명 안팎으로 맞섰다. 우한 군구 사령관 천짜이다오는 3월 공인 총부를 해산하고 지도자 500여 명을 가두었으며 백만 웅사를 뒷받침했다. 6월 23~24일 충돌에서만 70명 넘게 죽었다. 7월 16일 공안부장 셰푸즈와 중앙문혁소조의 왕리가 우한에 와서 공인 총부를 지지하라고 요구했고, 마오도 몰래 둥후 빈관에 머물렀다. 7월 20일 새벽 백만 웅사와 8201부대 일부가 도시의 교통 요지를 점거하고 빈관을 에워쌌으며 왕리를 끌어내 다리가 부러지도록 때렸다. 마오는 1959년 이후 금지되었던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로 빠져나갔고, 저우언라이가 직접 날아와 수습했다. 7월 우한에서 약 1천 명이 죽고 성 전체에서 18만 4천 명이 붙잡히거나 맞거나 다치거나 죽었다. 천짜이다오는 베이징에서 비판받고 해임되었다가 뒤에 복권되었다. 34 35 1
우한 사건 뒤 장칭은 허난의 홍위병들에게 「글로 공격하고 무력으로 지킨다」(문공무위)고 말했고, 반란파는 이를 무장 투쟁의 허가로 받아들였다. 「군내 한 줌」을 끌어내자는 구호 아래 군 무기고가 털려 1,877만 정의 총, 1만 4,828문의 포, 272만 개의 수류탄이 민간의 손에 들어갔고, 충칭·샤먼·창춘에서는 탱크와 장갑차, 군함까지 동원되었다. 군수 공장이 몰린 충칭의 파벌 전투는 1967년 5월부터 1968년 10월까지 이어졌다. 군의 반발을 두려워한 마오는 8월 군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고, 왕리와 관펑은 8월, 치번위는 1968년 1월 체포되었다. 1967~1968년 무장 투쟁의 사망자는 30만~50만 명으로 추산되며, 1967년 공업 생산은 전년보다 14% 줄었다. 34 1 36 37 2
가장 참혹한 곳은 광시였다. 자치구 제1서기이자 광저우 군구 제1정치위원인 웨이궈칭을 지지하는 「연지」와 이에 맞선 「4·22」가 싸우는 사이, 1967~1968년 지방 혁명위원회와 민병은 「지·부·반·괴·우」 가족과 반대파를 조직적으로 죽였다. 1983년 중앙 조사조는 이름과 주소가 확인된 비정상 사망자만 8만 9,810명, 실종자와 무명 사망자를 합치면 10만 명을 넘는다고 결론지었다. 우쉬안현 등에서는 기근이 없는데도 식인이 벌어져 처음 기록에 137명, 뒤에 공개된 문서에 302명이 먹혔다고 나오고, 독립 연구자들은 421명의 이름을 찾아냈다. 후난 다오현에서는 1967년 8~10월 7,696명이 살해되고 1,397명이 자살로 내몰렸다. 이 학살들은 대부분 홍위병이 아니라 지방 당·정 기구와 민병, 군이 이끌었다. 38 39 40 1
1968년 4월 23일부터 7월 27일까지 칭화대학에서는 콰이다푸의 「징강산 병단」과 반대파가 「백일 무투」를 벌여 18명이 죽었다. 7월 27일 마오의 뜻에 따라 노동자 수만 명이 「마오쩌둥 사상 선전대」로 교정에 들어갔고, 이에 맞선 사격과 투석으로 선전대원 5명이 죽었다. 이튿날 마오는 녜위안쯔·콰이다푸·한아이징·탄허우란·왕다빈 등 베이징 홍위병 지도자 다섯을 인민대회당으로 불렀다. 문화대혁명 동안 마오가 학생 지도자들을 직접 만난 유일한 자리였다. 노동자를 움직인 「검은손」이 있다는 콰이다푸의 항의에 마오는 “검은손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라고 답했고, 2년 동안 투쟁·비판·개조를 하랬더니 무장 투쟁만 하고 있다며 인민도 노동자도 학생도 불만이라고 꾸짖었다. 노동자·군 선전대가 학교를 접수했고 홍위병 운동은 끝났다. 8월 마오가 파키스탄 외무장관에게 받은 망고를 선전대에 보내자 전국에 「망고 열풍」이 일었다. 17 1
질서의 대가: 계급 대오 정리, 하방, 류사오치의 죽음
무장 투쟁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은 질서를 되찾는 과정이었다. 야오원위안이 올린 베이징 신화인쇄공장 군관회의 경험 보고를 마오가 전국에 돌리라고 지시하면서 1968년 5월 25일 「계급 대오 정리」 운동이 시작되었다. 군관회와 선전대가 「반역자·간첩·주자파·반혁명」과 앞 시기의 반란파를 가려냈고, 약 3천만 명이 박해받고 50만~15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된다. 앤드루 왈더는 “파벌 전쟁의 치료가 병보다 훨씬 나빴다”고 요약한다. 내몽골에서는 텅하이칭 군구 사령관이 이미 해산된 「내몽골 인민혁명당」이 되살아났다며 울란후의 「독소」를 파냈다. 1980년 최고인민검찰원 기소장은 34만 6천 명이 체포되고 1만 6,222명이 죽었으며 8만 1천여 명이 불구가 되었다고 적었고, 다른 추산은 사망자를 2만~10만 명으로 잡는다. 피해자 다수는 몽골족이었다. 41 1 42 43
최고 지도부의 희생자도 같은 길을 걸었다. 1967년 1월 콰이다푸는 류사오치의 딸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거짓말로 왕광메이를 꾀어내 칭화대학으로 끌고 갔고, 4월 10일에는 인도네시아 방문 때의 치파오와 탁구공 목걸이를 걸게 한 채 50만 명이 모인 비판 대회에 세웠다. 류사오치는 중난하이에서 비판 대회에 끌려 나갔다. 1968년 10월 13~31일 제8기 제12차 전체회의는 캉성의 전안조가 만든 자료로 그를 「반역자·내부 간첩·노동자의 배신자」로 규정해 영구 제명했다. 1969년 10월 17일 허난 카이펑으로 옮겨진 그는 치료를 받지 못한 채 11월 12일 숨졌고 비밀리에 화장되었다. 허룽은 1969년 6월, 타오주는 11월 허페이에서, 펑더화이는 1974년 11월 감옥에서 죽었다. 덩샤오핑은 1969년 10월 장시 신젠현 트랙터 공장으로 보내져 선반공으로 일했고, 맏아들 덩푸팡은 홍위병에게 갇혔다가 1968년 건물에서 떨어져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18 20 43 44 30 45 46 2
1968년 12월 22일 《인민일보》는 “지식청년이 농촌에 가서 빈농·하층 중농에게 재교육을 받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는 마오의 지시를 실었다. 이후 1978년까지 약 1,700만 명의 도시 청년이 산간과 농촌, 변경 농장으로 보내졌다. 실업 상태의 홍위병을 도시에서 내보내는 효과도 있었다. 대학 진학과 도시 취업의 기회를 잃은 이들은 스스로를 「잃어버린 세대」라 불렀고, 1978년 말 윈난 시솽반나 등지에서 귀향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인 뒤에야 1979년 초 돌아갈 수 있었다. 박해받은 간부와 지식인은 1968년부터 각지의 「5·7 간부학교」로 보내져 노동했다. 대학은 1970년까지 신입생을 받지 않았고 이후 시험 없이 추천받은 「노농병 학생」을 뽑았다. 반면 농촌에서는 생산대대마다 합작 의료소와 「맨발의 의사」가 생기고 초등·중등 교육이 넓어져, 초등교육 이수 비율이 절반 미만에서 거의 전부로 올랐다는 평가도 있다. 47 48 49 1
1970년 1월 31일과 2월 5일 중앙의 세 지시로 「1타3반」 운동이 시작되었다. 「1타」는 반혁명 파괴 활동의 타격, 「3반」은 횡령·투기·낭비 반대였다. 공식 통계로 이 운동에서 187만 명이 반역자·간첩·반혁명으로 박해받았고 1970년 2~11월에만 28만 4,800여 명이 체포되거나 살해되었으며, 문화대혁명 기간의 공식 사형 판결 1만 402건 대부분이 이때 나왔다. 「출신론」의 위뤄커는 1970년 3월 5일 베이징 공인체육장의 10만 명 공판 대회에서 다른 19명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고 곧바로 처형되었다. 같은 시기 「5·16 분자」 색출은 초기 반란파를 다시 쓸어 냈다. 50 26 2



린뱌오의 몰락과 미중 화해
1969년 4월 1~24일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제9차 당대회에는 당원 약 2,200만 명을 대표한다는 대표 1,512명이 모였지만, 그들은 당원의 선거가 아니라 혁명위원회의 선발로 왔다. 린뱌오가 정치 보고를 했고, 당 규약은 그를 「마오 주석의 가까운 전우이자 후계자」로 명시했다. 다른 어떤 공산당도 현직 지도자의 후계자를 규약에 적은 적이 없었다. 새 중앙위원회 정·후보위원 279명 가운데 제8기 출신은 53명뿐이었고 군인의 비중은 28%를 넘었다.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마오·린뱌오·천보다·저우언라이·캉성으로 꾸려졌다. 1981년 「역사결의」는 이 대회의 지도 방침이 “사상·정치·조직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판정했다. 51 1 33
대회 직전인 1969년 3월 2일 우수리강의 전바오섬에서 중국군이 소련 국경수비대를 매복 공격했고, 8월 신장 테레크티에서는 소련군이 반격했다. 소련이 핵 공격을 검토했다는 문서도 있다. 9월 11일 코시긴과 저우언라이의 베이징 공항 회담으로 위기는 가라앉았지만, 10월 지도부는 베이징을 떠나 분산했고 린뱌오는 10월 18일 마오를 거치지 않은 「1호 명령」으로 전군에 전쟁 준비를 지시했다. 전쟁 위협은 군과 린뱌오의 비중을 키웠고, 마오가 미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기운 데에는 군의 우위를 피하려는 계산도 있었다는 해석이 있다. 52 1
1970년 8월 루산의 제9기 제2차 전체회의에서 린뱌오 쪽은 마오가 폐지하려던 국가주석직의 부활과 마오의 「천재」론을 밀어붙였고, 천보다가 앞장섰다. 마오는 천보다를 「가짜 마르크스주의자」라 공격해 실각시키고 린뱌오의 장군들에게 자기비판을 요구했다. 공식 서술에 따르면 1971년 3월 공군사령부 판공실 부주임이던 아들 린리궈가 상하이에서 측근들과 정변 계획 「571 공정 기요」를 만들었는데, 571(우치이)은 「무장봉기」와 발음이 비슷했다. 린뱌오 자신이 계획에 관여했는지는 논란이다. 8~9월 남방 순시에서 마오가 린뱌오를 비판했다는 소식이 베이다이허에 닿자, 9월 12일 밤 딸 린리헝이 경호부대에 아버지가 끌려갈 수 있다고 알렸다. 9월 13일 0시 30분께 린뱌오·예췬·린리궈를 태운 트라이던트기가 산하이관 비행장을 떠났다. 마오는 격추하자는 물음에 “가게 두라”고 했다고 한다. 비행기는 오전 2시 30분께 몽골 운두르한 부근에 추락해 9명 전원이 죽었다. 53 54 55 56 57 1
소련 조사단은 1972년 유골 감식으로 린뱌오와 예췬을 확인했고 비행기에 이르쿠츠크나 치타까지 갈 연료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기록 상당수는 화궈펑 시기에 정치국 승인으로 폐기되어 사건의 전모는 지금도 불분명하다. 공군 사령관 우파셴, 총참모장 황융성 등 군 수뇌가 곧 정직되었고 한 달 사이 고위 장교 1천여 명이 숙청되었다. 10월 1일 국경절 행사는 취소되었고, 대중에게는 1972년 6월에야 알려졌다. 「가장 가까운 전우」의 배신은 문화대혁명의 수사와 마오의 무오류 신화를 안에서 무너뜨렸다. 대외적으로는 이미 화해가 진행 중이었다. 마오는 1970년 국경절에 에드거 스노를 톈안먼 성루에 세웠고, 1971년 4월 나고야 세계탁구선수권 뒤 미국 선수단을 초청했다. 7월 키신저가 비밀리에 베이징을 찾았고, 10월 25일 유엔 총회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 의석을 인정했으며, 1972년 2월 21~28일 닉슨이 방중해 상하이 공동성명을 냈다. 「반제·반수정주의」 구호 아래 중국은 소련에 맞서 미국과 손잡았다. 53 58 59 60
1972~1976년: 4인방, 정돈, 4·5 운동, 10월 6일
린뱌오 사건 뒤 마오는 1972년 1월 뇌졸중을 겪었고, 저우언라이가 일상 업무를 맡아 쫓겨난 간부들을 복권하고 「극좌 사조」 비판을 제안했다. 그러나 마오는 여전히 과제는 「극우」 반대라고 보았다. 1972년 9월 상하이에서 올라온 38세의 왕훙원은 1973년 8월 제10차 당대회에서 저우언라이 다음 서열의 부주석이 되었고, 장칭·장춘차오·야오원위안·왕훙원은 정치국 안에서 「4인방」을 이루었다. 1973년 3월 덩샤오핑이 부총리로 돌아왔다. 1973년 말~1974년 장칭 쪽은 「린뱌오 비판·공자 비판」 운동을 벌여 주공(周公)을 빗대 저우언라이를 겨냥했고, 마오는 그들이 권력을 노린다는 것을 알고 「4인방」을 만들지 말라고 경고했다. 1 53 61 33 62
1975년 1월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저우언라이는 「4개 현대화」를 다시 내걸었다. 병상의 저우언라이를 대신한 덩샤오핑은 부총리 겸 총참모장, 당 부주석이 되어 철도·철강·군의 「정돈」에 나섰고 생산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정돈이 문화대혁명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이자 마오는 1975년 말 「우경 번안풍 반격」 운동을 일으켰고, 4인방은 『수호전』 평론과 「경험주의 반대」로 덩샤오핑과 저우언라이를 공격했다.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가 죽었다. 1월 15일 추도식에서 덩샤오핑이 조사를 읽었지만, 마오는 4인방도 덩샤오핑도 아닌 화궈펑을 총리 대리로 골랐다. 3월 25일 《문회보》가 저우언라이를 「당내 주자파」로 빗대는 글을 싣자 3월 말 난징에서 항의가 터져 전국으로 번졌다. 1 61 2 63 64
청명절을 앞둔 4월 4일 톈안먼 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 아래에는 저우언라이를 추모하는 화환과 시와 플래카드가 쌓였고, 이날 최대 200만 명이 광장을 찾았다. 농민부터 고위 군인과 간부 자녀까지 모든 계층이 왔고, 시들은 장칭·장춘차오·야오원위안을 공격했으며 일부는 마오와 문화대혁명까지 겨냥했다. 정치국은 그날 밤 이를 「반혁명 사건」으로 규정하고 화환을 치웠다. 5일 아침 분노한 군중이 경찰차를 불태우고 주변 건물로 밀고 들어갔고, 밤에 민병과 경찰이 곤봉으로 광장을 비웠다. 많은 사람이 체포되어 징역이나 노동교양을 받았고, 정저우·쿤밍·타이위안·상하이·우한·광저우 등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4월 7일 덩샤오핑은 사건의 「배후」로 몰려 당 안팎의 모든 직무를 잃었고, 화궈펑이 당 제1부주석 겸 총리가 되었다. 65 1 66
7월 6일 주더가 죽고, 7월 28일 탕산 대지진이 공식 집계로 24만 2,469명, 역사가들의 추산으로 30만 명 이상, 일부 추산으로 65만 명 넘게 앗아 갔다. 9월 9일 마오쩌둥이 죽었다. 화궈펑은 마오가 남겼다는 “당신이 일을 맡으면 나는 안심한다”는 쪽지로 후계를 내세웠고, 4인방은 언론으로 「기정 방침」을 외치며 상하이 민병을 대기시켰다. 예젠잉과 중앙판공청 주임 왕둥싱이 화궈펑과 손잡았고 리셴녠·천윈도 뜻을 같이했다. 10월 6일 저녁 화궈펑은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소집한다며 왕훙원·장춘차오·야오원위안을 중난하이 화이런탕으로 불렀고, 8341부대가 그들을, 이어 장칭을 관저에서 체포했다. 마오의 조카 마오위안신도 붙잡혔고, 상하이에서는 「회의」에 불려 온 지지자들이 잡혔다. 피 한 방울 없이 끝난 이 정변 이튿날 화궈펑은 당 주석 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1977년 8월 제11차 당대회는 「제1차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승리적 종결을 선언했지만, 「계급투쟁을 중심 고리로」라는 노선은 그대로 두었다. 67 62 68 63 2
평가: 결의, 재판, 숫자, 해석
청산은 「혼란을 바로잡아 정상으로 돌린다」(발란반정)는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1978년 12월 제11기 제3차 전체회의는 1976년 톈안먼 사건을 「혁명적 사건」으로 뒤집었고, 1980년 2월 제5차 전체회의는 류사오치를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로 복권했으며, 5월 인민대회당 추도식에서 덩샤오핑이 조사를 읽었다. 몇 해 사이 300만 건이 넘는 「억울하고 거짓되고 잘못된 사건」이 바로잡혔다. 1980년 11월~1981년 1월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은 4인방과 린뱌오 집단의 생존자들을 재판해 장칭·장춘차오에게 사형 집행유예(뒤에 무기로 감형), 왕훙원에게 무기, 야오원위안에게 20년을 선고했다. 기소장이 든 박해 피해자와 사망자 수는 집계마다 다르게 전해져 72만 9,511명 박해·3만 4,800명 사망, 또는 약 75만 명 박해·3만 4,375명 사망으로 나온다. 1 20 62 65
1981년 6월 27일 제11기 제6차 전체회의는 후차오무가 15개월 동안 기초하고 덩샤오핑이 거듭 손본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했다. 결의는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까지의 문화대혁명이 “건국 이래 당과 국가와 인민이 겪은 가장 심각한 좌절과 손실”의 원인이었고 그것을 “발동하고 이끈” 것은 마오쩌둥이며, 그 “전면적이고 장기적인 좌경 오류”의 주된 책임이 그에게 있다고 밝혔다. 동시에 린뱌오·장칭·캉성 같은 「야심가」들이 그 오류를 이용하고 부풀렸다고 해 두 「반혁명 집단」의 범죄와 마오의 「오류」를 구분했고, 마오는 “공이 일차적이고 과오는 이차적”이라고 결론지었다. 흔히 말하는 「공칠과삼」은 결의에 그대로 적혀 있지 않지만 그 취지로 굳어졌다. 결의는 문화대혁명을 세 단계로 나누고, 계급투쟁을 중심 고리로 삼지 않은 1956년 제8차 당대회의 판단이 옳았다고 되돌아갔다. 69 33 70
사망자 수는 지금도 범위로만 말할 수 있다. 문서가 비밀이고 무엇을 문화대혁명의 죽음으로 셀지부터 어렵기 때문이다. 앤드루 왈더와 쑤양은 1987년 이후 공개된 현지 1,520종을 분석해 농촌에서만 75만~150만 명이 죽고 비슷한 수가 불구가 되었으며 3,600만 명이 박해받았다고 추산했다. 천융파는 최소 172만 명, 딩수는 약 200만 명, 장룽과 존 핼리데이는 최소 300만 명, 루돌프 러멀은 773만 명을 제시했다. 예젠잉이 1978년 12월 중앙공작회의에서 “2천만 명이 죽고 1억 명이 박해받았다”고 말했다는 전언도 있지만 2차 문헌에만 전한다. 학살로 적어도 30만 명, 무장 투쟁으로 30만~50만 명, 초기의 자살만 10만~20만 명이라는 부분 추산이 이 범위를 채운다. 경제는 1967년과 1968년 공업·농업 총생산이 각각 9.6%, 4.2% 줄었다가 회복해 1967~1976년 연평균 7.1% 늘었다는 공식 통계가 있고, 그사이 수소폭탄과 인공위성이 나왔다. 2 1
무엇이 이 10년을 움직였는지에 대한 해석도 갈린다. 관료화한 당을 대중이 감시하고 「계속혁명」으로 수정주의와 자본주의 부활을 막는다는 마오의 이념을 진지하게 보는 해석이 있고, 대약진 실패 뒤 권력을 되찾으려는 권력투쟁으로 보는 맥파쿼와 쇤할스의 『마오의 마지막 혁명』이 표준 서술로 꼽힌다. 출신 성분 차별, 임시공과 계약공의 처지, 하방 청년의 불만처럼 당 국가 아래 쌓인 사회 갈등이 마오의 호출을 계기로 터졌다고 보는 사회사 연구도 있다. 스튜어트 슈람은 문화대혁명의 참상을 토지개혁과 제1차 5개년 계획의 성과와 함께 저울질했고, 프랑크 디쾨터는 2016년 『문화대혁명』으로 「인민 3부작」을 마쳤으며, 양지성은 같은 해 『천지번복』을 냈다. 위뤄커와 1975년 처형된 장즈신처럼 운동 한가운데서 그 논리를 반박하다 죽은 사람들의 기록도 이 해석들에 무게를 더한다. 71 1 72
공식 역사는 문화대혁명을 「10년 동란」으로 규정하되 그 원인을 마오의 만년 오류와 린뱌오·4인방의 「이용」으로 한정하고, 당의 지도와 마오쩌둥 사상은 지켰다. 1980년대에는 「상흔문학」과 회고록, 「신계몽」 운동이 기억을 이어 갔지만, 1989년 이후 그 틀은 더 굳어졌고 2021년 세 번째 「역사결의」는 문화대혁명 서술을 줄였다. 대륙에서 체계적 연구와 추모는 여전히 제한되어 있다. 사회주의 운동에 이 10년이 남긴 물음은 무겁다. 대중이 당 관료제에 맞서 일어나라는 호소가 파리 코뮌을 본뜬 상하이 코뮌을 낳았다가 18일 만에 거두어졌고, 「조반」의 자유는 지도자 숭배와 출신에 따른 박해, 군이 이끈 학살로 끝났다. 관료화를 막는 길이 한 사람의 권위에 기댄 동원일 수 없다는 교훈은, 한 세대 전체의 교육 공백과 「홍위병 세대」의 경험과 함께 개혁기 중국 정치의 밑바닥에 남았다. 1 73 74 69
결과
수십만~수백만 명이 죽고 교육과 문화가 파괴되었으며 당·국가 기구는 군과 혁명위원회로 대체되었다가 재건되었다. 1981년 「역사결의」는 문화대혁명을 「당·국가·인민에게 가장 심각한 좌절과 손실」로 규정했고, 이 경험이 덩샤오핑 개혁의 정치적 출발점이 되었다.
연표와 지도
- 11962.01.11–
02.07 7천인 대회7,118명이 모인 확대 중앙공작회의에서 마오가 대약진의 책임을 인정하고 경제의 「2선」으로 물러났다.
- 21965.01.14「23조」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표적이 「당내에서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로 옮겨졌다.
- 31965.11.10야오원위안의 『해서파관』 비판
상하이 《문회보》의 비판문이 베이징의 펑전 그룹을 겨냥한 신호탄이었다.
- 41966.05.16「5·16 통지」
정치국 확대회의가 펑전을 실각시키고 중앙문화혁명소조를 세워 「당권파」 타도를 선언했다.
- 51966.05.25녜위안쯔의 대자보
베이징대학 당위원회를 공격한 대자보를 마오가 「전국 최초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자보」로 승인했다.
- 61966.08.05마오의 「사령부를 포격하라」
마오의 대자보가 류사오치를 겨냥했고 11중전회는 린뱌오를 2인자로 올렸다.
- 71966.08.08「16조」 채택
제8기 11중전회가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으로 운동을 공식화했다.
- 81966.08.18톈안먼의 홍위병 접견
마오가 100만 홍위병을 접견했다. 「붉은 8월」 베이징에서만 1,772명이 맞아 죽었다.
- 91967.01상하이 「1월 폭풍」
노동자 반란파가 상하이 시정부를 접수해 「탈권」의 모델이 되었다.
- 101967.02「2월 역류」
예젠잉·천이 등 원로들이 문혁소조에 항의했다가 비판받았다.
- 111967.02.05–
23 상하이 인민공사파리 코뮌을 본뜬 코뮌이 섰으나 마오가 물러서면서 18일 만에 혁명위원회로 바뀌었다.
- 121967.07우한 사건
우한 군구가 중앙 특사를 감금해 군의 이반 위기가 일어났다. 전국의 무장 충돌이 절정에 달했다.
- 131967.07–
1968.08 광시 학살파벌 투쟁 속에 지방 기구와 민병이 「흑5류」와 반대파를 죽였다. 1983년 조사는 이름이 확인된 사망자만 8만 9,810명으로 집계했다.
- 1968.05.25–
1969 계급 대오 정리군관회와 선전대가 이끈 숙청으로 약 3천만 명이 박해받고 50만~15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된다.
- 1968.07–
12 홍위병 해산과 상산하향노동자·군 선전대가 학교를 접수했고 12월 「지식청년은 농촌으로」 지시가 내려졌다.
- 141968.07.28마오와 홍위병 지도자 5인
노동자 선전대의 칭화대학 진입 이튿날 마오가 녜위안쯔·콰이다푸 등을 불러 무장 투쟁을 꾸짖었다.
- 151968.10류사오치 제명
12중전회가 류사오치를 「반역자·내부 간첩·노동자의 배신자」로 영구 제명했다. 그는 1969년 11월 카이펑에서 옥사했다.
- 161969.03전바오섬 충돌
우수리강에서 중소 국경 전투가 벌어져 소련과의 전쟁 공포가 커졌다.
- 171969.04제9차 당대회
린뱌오가 당 규약에 후계자로 명시되었고, 새 중앙위원회에서 군인의 비중이 28%를 넘었다.
- 181970.03.05위뤄커 처형
「1타3반」 운동 속에 「출신론」의 필자가 10만 명 공판 대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 191970.08–
09 루산 회의국가주석직 부활을 둘러싸고 마오와 린뱌오 쪽이 충돌했고 천보다가 실각했다.
- 201971.09.13린뱌오 사건
린뱌오 일가가 탄 비행기가 몽골에서 추락했다. 당은 그가 쿠데타를 꾀했다고 발표했다.
- 211972.02닉슨 방중
상하이 공동성명으로 미중 화해가 시작되었다.
- 221973.08제10차 당대회
왕훙원이 부주석이 되었고 정치국 안에 4인방이 자리 잡았다.
- 231976.01–
04 저우언라이 사망과 4·5 톈안먼 사건청명절 추모 집회가 진압되었고 덩샤오핑이 다시 실각했다.
- 241976.07.28탕산 대지진
공식 집계로 24만 2,469명이 죽었고, 역사가들은 30만 명 이상으로 본다.
- 251976.09.09마오쩌둥 사망
7월 탕산 대지진 두 달 뒤 마오가 죽었다. 10월 6일 4인방이 체포되었다.
- 261976.10.064인방 체포
화궈펑·예젠잉·왕둥싱의 지시로 8341부대가 화이런탕에서 왕훙원·장춘차오·야오원위안을, 이어 장칭을 체포했다.
- 271980.11–
1981.01 4인방과 린뱌오 집단 재판특별법정이 장칭·장춘차오에게 사형 집행유예, 왕훙원에게 무기, 야오원위안에게 20년을 선고했다.
- 281981.06.27「역사결의」
11기 6중전회가 문화대혁명을 건국 이래 가장 심각한 좌절로 규정하고 마오의 「공이 과보다 크다」고 결론지었다.
관련 인물 57명
집행 · 지휘11
군을 통해 문화대혁명을 뒷받침했고 1971년 9월 몽골에서 죽었다.
중앙문혁소조 부조장 · 4인방의 수장장칭1914–1991문예를 장악했고 1976년 10월 체포되었다.
문혁소조 고문, 조작 사건의 조사자캉성1898–1975류사오치·허룽 등에 대한 「전안(專案)」 조사를 주도했다.
중앙문혁소조 조장천보다1904–19891966~1970년 운동을 지휘하다 1970년 실각했다.
상하이 「1월 폭풍」의 지도자장춘차오1917–2005탈권의 모델을 만들었고 4인방으로 체포되었다.
상하이 노동자 반란파의 지도자왕훙원1935–19921967년 시정부를 접수했고 1973년 당 부주석이 되었다.
마오의 후계자, 4인방 체포화궈펑1921–20081976년 4월 제1부주석이 되었고 10월 4인방을 체포했다.
8341부대로 4인방 체포 집행왕둥싱1916–20151976년 10월 6일 중난하이에서 체포를 지휘했다.
첫 대자보를 쓴 베이징대학 홍위병 지도자녜위안쯔1921–20191966년 5월 25일의 대자보로 학생 운동을 열었고 1983년 징역 17년을 선고받았다.
칭화대학 징강산 병단의 반란파 지도자콰이다푸1945–2025공작대와 왕광메이에 맞섰고 「류사오치 타도」를 처음 외쳤으며 1968년 마오에게 질책받았다.
우한에서 구타당한 중앙문혁소조원왕리1922–19961967년 7월 우한에서 붙잡혀 구타당했고 8월 외교부 선동 연설 뒤 체포되었다.
참여9
1965년 11월의 글로 운동의 서막을 열었다.
국가 기구를 지킨 총리저우언라이1898–1976원로들을 보호하고 닉슨 방중을 성사시켰으며 1976년 1월 죽었다.
1972년 방중리처드 닉슨1913–1994상하이 공동성명으로 미중 화해를 열었다.
1971년 비밀 방문헨리 키신저1923–2023저우언라이와 닉슨 방중을 준비했다.
린뱌오 판공실 주임, 제9기 정치국원예췬1917–1971뤄루이칭 고발에 앞장섰고 1971년 9월 13일 린뱌오와 함께 추락사했다.
「571 공정」을 주도했다는 린뱌오의 아들린리궈1945–1971공군사령부 판공실 부주임으로 정변 계획을 꾸몄다고 공식 서술은 말한다.
4인방 체포를 지지한 원로천윈1905–19951976년 10월 화궈펑·예젠잉의 행동을 지지했고 「역사결의」 초안을 승인했다.
광시 학살 당시의 광시 최고 지도자웨이궈칭1913–1989그를 지지하는 「연지」 파가 「4·22」와 싸우는 동안 광시에서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다.
1969년 베이징 공항에서 저우언라이를 만난 소련 총리알렉세이 코시긴1904–19809월 11일의 회담으로 중소 국경 위기가 가라앉았다.
반대 · 저항5
1967년 문혁소조에 항의했고 1976년 10월 체포를 결정했다.
1969년 국경 충돌기의 소련 지도자레오니트 브레즈네프1906–1982전바오섬 충돌 뒤 대중 압박이 미중 화해를 재촉했다.
4인방 체포에 가담한 원로리셴녠1909–1992예젠잉과 함께 화궈펑을 설득해 1976년 10월 6일 4인방 체포를 이끌어 냈다.
우한 사건의 우한 군구 사령관천짜이다오1909–1993보수파 백만 웅사를 지원했고 1967년 7월 중앙 대표를 억류한 사건 뒤 해임되었다.
「5·16 통지」가 빗댄 「수정주의」의 상징니키타 흐루쇼프1894–1971통지는 「흐루쇼프 같은 인물」이 당 안에서 후계자로 길러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대상 · 피해25
1968년 제명되어 1969년 카이펑에서 옥사했다.
두 번 실각한 「제2의 당권파」덩샤오핑1904–19971966년과 1976년 실각했고 1973~1975년 복귀해 정돈을 이끌었다.
첫 표적이 된 베이징 시장펑전1902–19971966년 5월 「5·16 통지」로 실각했다.
박해 속에 죽은 전 국방부장펑더화이1898–19741966년 베이징으로 끌려와 비판당했고 1974년 옥중에서 죽었다.
박해 속에 죽은 원수허룽1896–1969린뱌오·캉성의 공격으로 감금되어 1969년 사망했다.
『해서파관』의 작가우한1909–1969운동의 첫 비판 대상이 되어 1969년 옥사했다.
『연산야화』의 작가, 첫 자살자덩퉈1912–1966「삼가촌」 비판 뒤 1966년 5월 자살했다.
전야에 실각한 총참모장뤄루이칭1906–19781965년 말 린뱌오의 고발로 실각했다.
「2월 역류」로 비판받은 외교부장천이1901–19721967년 비판받았고 1972년 죽었다.
문화대혁명 초기 박해 피해자리리싼1899–1967문화대혁명 초기에 박해를 받았다.
문화대혁명 때 박해받은 장군덩화1910–1980그는 문화대혁명 때 박해를 받았다.
문화대혁명 초 해임된 간부장쩌민1926–2022문화대혁명 초기에 직위에서 해임돼 5·7간부학교에 보내졌다.
문화대혁명 박해 피해자후야오방1915–1989문화대혁명에서 박해받았다.
문화대혁명 박해 피해자완리1916–2015문화대혁명 때 박해받았다.
문화대혁명기 자택 연금장원톈1900–1976문화대혁명기에 처음에는 자기 집에서 감호(연금)당했다.
문화대혁명기 감금·재교육 대상팡리즈1936–2012문화대혁명 시작 직후인 1966년 1년간 감금된 뒤 공동농장으로 보내져 재교육을 받았다.
61인 반도 사건으로 감금된 당사자보이보1908–2007문화대혁명 때 옛 전향서 사건이 되살아나 12년간 감금됐다.
서열 4위에서 쓰러진 중앙선전부장타오주1908–1969운동을 통제하려다 1967년 1월 실각했고 1969년 허페이에서 치료받지 못한 채 죽었다.
「2월 역류」를 이끈 부총리탄전린1902–19831967년 2월 중앙문혁소조를 「반동」이라 몰아붙였다가 비판받았다.
「붉은 8월」에 목숨을 잃은 작가라오서1899–19661966년 8월 23일 공자묘 앞에서 구타당한 이튿날 타이핑후에서 숨졌다.
「출신론」으로 혈통론을 반박하다 처형된 청년 노동자위뤄커1942–19701970년 3월 5일 「1타3반」 운동 속에 처형되었고 1979년 복권되었다.
「2월 역류」로 비판받은 원수쉬샹첸1901–19901967년 2월 예젠잉과 함께 문혁소조가 군을 흔든다고 비난했다가 자기비판을 명령받았다.
「2월 역류」에 이름이 오른 원수녜룽전1899–19921981년 「역사결의」는 그가 1967년 2월 문화대혁명의 잘못을 비판한 지도자였다고 적었다.
「5·16 통지」 직전에 실각한 선전부장루딩이1906–19961966년 5월 펑전·뤄루이칭·양상쿤과 함께 「반당 집단」으로 몰렸다.
「2월 역류」에 이름이 오른 부총리리푸춘1900–19751967년 2월 첫 협의회가 그의 집에서 열렸고, 1981년 「역사결의」는 그를 문화대혁명의 잘못을 비판한 지도자로 적었다.
목격 · 기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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