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1848년 혁명과 제2공화국
1848년 2월 파리의 바리케이드는 어떻게 사흘 만에 7월 왕정을 무너뜨리고 「노동권」과 남성 보통선거를 내건 공화국을 세웠으며, 왜 그 공화국은 넉 달 만에 자신을 세운 노동자들에게 총을 겨누고 끝내 그 보통선거로 뽑힌 대통령의 쿠데타로 사라졌나?
재산 자격 선거로 인구의 1%만 투표하던 7월 왕정은 1846~1847년 흉작과 공황, 부패 추문 속에서 선거 개혁을 요구한 연회 운동을 금지했고, 1848년 2월 22~24일 파리 봉기로 무너졌다. 라마르틴의 온건 공화파와 르드뤼롤랭·루이 블랑·노동자 알베르의 급진파가 함께 든 임시정부는 노동권 법령, 뤽상부르 위원회, 국립 작업장, 남성 보통선거, 노예제 폐지를 내놓았다. 그러나 4월 선거는 보수적인 농촌 다수를 의회로 보냈고, 5월 15일 시위의 실패로 블랑키·바르베스·라스파유가 투옥되었으며, 국립 작업장 폐쇄에 맞선 6월 봉기는 카베냐크에게 수천 명이 죽고 2만 5천 명이 체포되며 진압되었다. 1848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74%로 이겼고, 질서당 의회는 로마 원정과 6월 13일 시위 진압, 1850년 선거법으로 공화파를 몰아냈으며, 1851년 12월 2일 쿠데타가 공화국을 끝냈다.
「은행가의 왕정」: 7월 왕정과 그 위기 (1830~1847)
1830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물러나자 오를레앙 가의 루이 필리프가 「프랑스의 왕」이 아닌 「프랑스인의 왕」으로 즉위했다. 그를 왕좌에 올린 은행가이자 자유주의 정치가 자크 라피트는 「이제부터는 은행가들이 다스릴 것」이라고 말했다. 「부르주아 왕」이라 불린 루이 필리프의 체제는 은행가, 증권 거래소의 거물, 철도 재벌, 탄광·철광·삼림 소유자 같은 「금융 귀족」에 기대었고, 산업 부르주아지는 오히려 하원에서 중간계급·노동계급과 함께 야당 쪽에 섰다. 선거권은 직접세 200프랑 이상을 내는 사람에게만 있어서 유권자는 샤를 10세 때 약 9만 4천 명에서 1848년 20만 명 남짓으로 늘었을 뿐이고, 이는 인구의 약 1%였다. 1840년부터 실권을 쥔 기조는 선거권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부자가 되시오」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1 2 3 4
체제는 처음부터 좌우 양쪽의 도전을 받았다. 오른쪽에는 부르봉 직계의 복귀를 바라는 정통왕조파가, 왼쪽에는 공화파와 뒤이어 사회주의자가 있었다. 1831년 11월 리옹의 견직공(카뉘)이 도시를 장악했다가 2만 명의 군대에 진압되었고, 1834년 4월 두 번째 카뉘 봉기와 파리 봉기 뒤에는 2,0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정부는 1834년 공화파 결사인 인권협회를 겨냥한 결사 금지법을 만들었고, 1835년 「9월 법」으로 언론을 묶었다. 공화파 혁명가들은 지하로 들어가 블랑키와 바르베스가 비밀 결사 계절결사를 만들었고, 1839년 5월 12일 약 900명의 결사원 가운데 400명이 파리 시청과 법원을 몇 시간 점거했으나 곧 진압되었다. 이 실패의 책임을 둘러싼 두 사람의 반목은 1848년 극좌파를 갈라놓는 원인이 되었다. 2 5 6
1840년대 후반의 경제 위기가 체제를 흔들었다. 1845~1846년 흉작으로 1847년 밀값이 두 해 전의 두 배로 뛰었고, 국내 소비가 줄며 산업 과잉생산 공황이 이어졌다. 1847년 말 금속·철도 건설 부문의 파산으로 약 7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북부 공업 도시 루베에서는 노동자의 60%가 실업 상태였다. 1847년 뷔장세의 식량 폭동에서는 세 명이 사형을 선고받았고, 파리 인구의 3분의 1가량이 구호에 기대어 살았다는 추산도 있다. 같은 해 전직 장관이 연루된 테스트·퀴비에르 뇌물 사건과 아내를 살해한 프랄랭 공작의 자살이 귀족과 관료의 부패를 드러냈다. 루이 블랑의 「노동권」과 프루동의 「재산은 도둑질이다」 같은 구호가 퍼진 것도 이 무렵이다. 2 3 1
정치 집회가 금지되자 선거 개혁을 바라는 반대파는 「연회」의 형식을 빌렸다. 1847년 7월 9일 파리 샤토루주에서 1,200명이 모인 첫 연회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약 70차례의 연회에 1만 7천 명이 참석했다. 처음에는 선거세를 낮추자는 오딜롱 바로의 「왕조 반대파」가 주도했으나, 점점 『르 나시오날』의 온건 공화파와 『라 레포름』의 급진 민주파가 연단을 차지했고, 르드뤼롤랭과 루이 블랑은 릴·디종·샬롱의 노동자 연회에서 사회 문제를 꺼냈다. 1847년 10월부터 파리에 머문 엥겔스는 이 연회들을 『라 레포름』과 『노던 스타』, 『독일-브뤼셀 신문』에 연이어 보도했다. 1848년 1월 14일 기조 정부는 다음 파리 연회를 금지했고, 주최 측은 이를 2월 22일 시위와 함께 열기로 했다. 토크빌은 「우리는 화산 위에서 함께 잠자고 있다」고 경고했다. 3 1 7
1848년 2월의 사흘: 기조의 사임에서 루이 필리프의 퇴위까지
정부가 2월 21일 연회를 다시 금지하자 조직위원회는 행사를 취소했지만, 며칠 전부터 움직이던 노동자와 학생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2월 22일 정오 무렵 동부 교외와 라탱 구역에서 몰려나온 군중이 콩코르드 광장과 마들렌 광장을 메웠고, 하원이 있는 부르봉 궁에 거의 들이닥칠 뻔했다. 오후에 증원 부대가 광장을 비웠지만 군중은 샹젤리제와 파리 남동부로 흩어져 첫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23일 정부가 국민위병을 동원하자 위병들은 군중을 막기는커녕 「기조 타도」와 「개혁 만세」를 함께 외쳤다. 오후에 루이 필리프는 기조를 튈르리 궁으로 불러 사임을 요구했고, 몰레에게 새 내각을 맡겼다. 왕조 반대파의 티에르와 바로는 군주정을 지키며 내각을 바꾼 것을 자축했다. 1 8
그날 밤 9시 반쯤 카퓌신 대로의 외무부 앞에서 정규군 제14연대가 600명이 넘는 군중에게 일제 사격을 가했다. 사망자 수는 출처마다 다르다. 영어 위키백과의 2월 혁명 문서는 52명 사망과 74명 부상을, 티에르 문서는 16명 사망을 적는다. 노동자들은 시신을 수레에 싣고 복수를 외치며 거리를 돌았고, 23일 밤부터 24일 새벽 사이 파리에는 1,500개가 넘는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24일 아침 국왕은 바로에게 내각을 맡기는 한편 진압으로 악명 높은 뷔조 원수에게 파리 군대를 맡겼으나, 봉기한 국민위병이 시청을 점령했고 샤토도 초소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티에르는 군대를 파리 밖으로 물려 외부에서 혁명을 짓밟자고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 9
정오 무렵 더는 방어할 수 없음을 깨달은 루이 필리프는 저항을 중지시키고 아홉 살 손자 파리 백작에게 양위한 뒤 왕비와 함께 마차로 파리를 떠나 영국으로 도망쳤다. 혁명가들은 텅 빈 튈르리 궁에 들어가 옥좌에 「파리 인민이 전 유럽에: 자유, 평등, 우애」라고 써 붙였고, 옥좌는 이튿날 바스티유 광장에서 불태워졌다. 오를레앙 공작부인이 아들을 데리고 하원에 나와 섭정을 꾀했으나 의사당에 밀려든 군중이 공화국을 외쳐 무산되었고, 라마르틴이 임시정부 명단을 읽었다. 라마르틴과 르드뤼롤랭은 「시청으로!」라는 외침을 따라 시청으로 갔고, 그곳에서 『르 나시오날』과 『라 레포름』 사이의 타협으로 11인의 임시정부가 확정되었다. 25일 라스파유가 이끈 대표단이 두 시간 안에 공화국을 선포하라고 요구했고, 그날 라마르틴이 시청 발코니에서 공화국을 선포했다. 1 10 11
임시정부와 「사회적 공화국」의 약속 (1848년 2~4월)
임시정부는 서로 다른 두 공화파의 연합이었다. 혁명 시대의 원로 뒤퐁 드 뢰르가 의장이었고, 라마르틴(외무), 크레미외(법무), 아라고(해군), 마리(공공사업), 가르니에파제스(파리 시장, 3월부터 재무), 마라스트 등 『르 나시오날』 계열의 온건 공화파가 다수였다. 이들은 무엇보다 정치 혁명을 원했다. 소수파는 『라 레포름』 계열로, 급진 민주파 르드뤼롤랭(내무)과 사회주의 이론가 루이 블랑, 『라 레포름』 편집장 플로콩, 그리고 정부의 유일한 노동자인 기계공 알베르(알렉상드르 마르탱)였다. 알베르는 산업 노동계급 출신으로 프랑스 정부에 들어간 첫 인물이었다. 2월 25일 라마르틴은 붉은 깃발을 국기로 삼자는 군중 앞에서 「붉은 깃발은 인민의 피에 젖어 샹드마르스를 돌았을 뿐」이라며 삼색기를 지켜 냈고, 그 대가로 삼색기에 붉은 장미 매듭을 달았다. 11 8 12 13
같은 날 무장 노동자들이 정부 회의에 들이닥쳐 「노동의 조직」과 「노동권」을 요구하자, 루이 블랑의 발의로 임시정부는 「노동으로 노동자의 생존을 보장하고 모든 시민에게 일자리를 보장한다」는 법령을 냈다. 블랑은 이를 집행할 노동부를 요구했으나 거부되었고, 타협으로 2월 28일 블랑이 위원장, 알베르가 부위원장을 맡는 「노동자를 위한 정부위원회」가 뤽상부르 궁에 세워졌다. 예산도 집행권도 없는 이 「노동 의회」는 하청 중간착취(마르샹다주)를 금지하고 노동시간을 파리 10시간, 지방 11시간으로 한 시간씩 줄였다. 한편 정부는 2월 26~27일 공공사업장관 마리 아래 국립 작업장을 열었는데, 이것은 블랑이 구상한 노동자 자주관리의 「사회 작업장」이 아니라 구체제의 자선 작업장을 본뜬 실업 구제 사업이었다. 14 15 16 17
정치 개혁은 빠르고 넓었다. 정치범 사형이 폐지되고(2월 26일),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선포되었으며(3월 4일), 3월 5일 남성 보통선거가 도입되어 유권자가 약 25만 명에서 900만 명으로 늘었다. 3월 8일 국민위병의 재산 자격이 폐지되어 노동자들도 무장했고, 3월 4일 설치된 위원회의 작업으로 4월 27일 식민지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예금 인출 사태로 은행과 기업이 잇달아 쓰러지자, 재무장관 가르니에파제스는 3월 16일 직접세에 45%를 덧붙이는 「45상팀 세」를 매겼다. 마르크스는 1789년이 농민 해방으로 시작했다면 1848년은 농민에게 새 세금을 매기는 것으로 시작했다고 썼고, 이 세금은 농촌을 파리의 공화국에서 멀어지게 했다. 같은 시기 공업 도시에서는 임금 인상 시위가, 루앙 주변에서는 기계 파괴가 일어났고, 유산자들은 「분배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11 8 18
파리에는 250개가 넘는 정치 클럽이 생겼다. 블랑키의 중앙공화협회, 카베의 중앙우애협회, 라스파유의 「인민의 벗」 클럽, 바르베스의 「혁명 클럽」이 대표적이었고, 신문도 450종 가까이 새로 나왔다. 출옥한 블랑키는 붉은 깃발과 선거의 무기한 연기를 요구했다. 3월 17일 대규모 노동자 시위가 선거를 4월 9일에서 23일로 미루게 했지만, 4월 16일 두 번째 연기를 요구한 시위는 르드뤼롤랭이 부른 국민위병에게 막혔고, 이때 바르베스는 국민위병 대령으로 시위대를 막는 편에 섰다. 같은 시기 「타슈로 문서」가 신문에 실려 블랑키가 1839년 동지들을 배신했다고 암시했고, 이 문서를 믿은 바르베스와 블랑키의 결별은 좌파를 깊이 갈라놓았다. 대외적으로는 라마르틴이 3월 4일 혁명 수출을 배제하는 평화 선언을 냈고, 벨기에와 사보이아로 건너간 의용 군단은 실패했다. 이 무렵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브뤼셀에서 파리로 왔다가 독일로 떠났고, 바쿠닌과 게르첸도 혁명의 파리로 달려왔다. 11 19 6 5 20 21 22
4월 선거와 5월 15일: 보통선거가 파리를 고립시키다
1848년 4월 23~24일 프랑스는 1792년 이래 처음으로 남성 보통선거를 치렀다. 유권자는 제한 선거 때의 40배였고 투표율은 약 81~84%에 이르렀다. 데파르트망 단위 연기명 투표에서 여러 명단에 오른 온건한 후보들이 유리했고, 농촌에서는 지방 유력자의 영향이 컸다. 900석의 구성은 해석이 엇갈린다. 아귈롱은 온건 공화파 약 500석, 보수파 약 250석, 급진 공화파 약 150석으로, 위아르는 온건 공화파 280석, 오를레앙파 250석, 정통왕조파 60석, 민주·사회주의 공화파 80석, 경력 없는 의원 200석으로, 아프릴은 온건 공화파 450석, 오를레앙파 200석, 정통왕조파 50석, 급진파 200석으로 센다. 어느 쪽이든 「어제의 공화파」 급진파는 크게 졌고, 혁명 전에는 군주파였던 「내일의 공화파」가 의회를 채웠다. 라마르틴은 17개 데파르트망에서 당선되었다. 23 11 24 25
5월 4일 모인 제헌의회는 공화국을 다시 선포하고 임시정부를 해산한 뒤, 5월 9~10일 아라고·가르니에파제스·마리·라마르틴·르드뤼롤랭의 5인 행정위원회에 권력을 맡겼다. 루이 블랑과 알베르는 빠졌다. 의회는 5월 10일 블랑의 「노동·진보부」 설치안을 부결하고 12일 클럽이 대표단을 보내 청원을 낭독하는 관행을 금지했다. 파리의 급진파는 프로이센군에게 짓밟히는 포즈난의 폴란드 봉기를 외면하는 외교에도 분노했다. 5월 15일 바스티유에서 출발한 폴란드 지원 시위대가 부르봉 궁에 들어가 청원을 읽었고, 라스파유가 연단에서 청원을 낭독했다. 혼란 속에서 「의회는 해산되었다」는 외침이 나왔고 군중은 시청으로 가 블랑키·알베르·루이 블랑·라스파유·카베 등을 넣은 봉기 정부 명단을 만들었다. 블랑키와 바르베스는 애초에 시위에 소극적이었으나 휩쓸렸다. 26 8 27 6
라마르틴과 르드뤼롤랭이 모은 국민위병이 시청을 포위해 시위대를 몰아냈고, 바르베스와 알베르는 시청에서 체포되었다. 블랑키와 라스파유도 곧 붙잡혔다. 경찰청장 코시디에르는 물러났고, 국민위병 사령관 쿠르테 장군도 체포되었다. 지도자들은 1849년 3월 7일~4월 3일 부르주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아 바르베스와 알베르는 유형(바르베스는 종신형), 블랑키는 10년, 라스파유는 6년 형을 받았다. 다음 날 5월 16일 뤽상부르 위원회가 폐지되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서 이날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영향력을 되찾으려다 가장 정력적인 지도자들을 부르주아지의 간수에게 넘겨주었을 뿐이라고 평가했고, 역사가 뒤보는 이를 처음부터 승산 없던 「비극적이고 부조리한 소극」이라 불렀다. 지도자를 잃은 파리 좌파는 보수파의 공세 앞에 무방비로 남았다. 26 28 5 12 16
1848년 6월 봉기: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대전투」
국립 작업장의 등록자는 3월 15일 6천 명에서 3월 30일 3만 명, 4월 16일 6만 4천 명으로 불어나 4월 30일 11만 7천 명에 이르렀고, 여성 노동자도 2만 명 넘게 일했다. 작업장은 11명 분대에서 901명 중대까지 군대식으로 편성되었으나 일감이 모자라 노동자들은 나흘에 하루꼴로 일했고, 나머지 날에는 하루 1.5프랑의 대기 수당을 받았다. 실제 비용은 정부 예산의 약 1%였지만, 팔루 백작은 이를 「하루 17만 프랑짜리 조직된 파업」이자 영구적인 소요의 온상이라고 공격했다. 5월 24일 공공사업장관 트렐라가 폐쇄를 요구했고, 26일 작업장 책임자 에밀 토마를 해임했으며, 30일 의회는 파리 거주 3개월 미만의 노동자를 지방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6월 20일 의회가 폐쇄를 의결했고, 21일 행정위원회는 18~25세는 군대에 입대하고 나머지는 솔로뉴의 운하 공사 등 지방으로 떠나라는 법령을 냈다. 15 19 8
법령이 22일 『모니퇴르』에 실리고 노동자 대표단이 마리에게 쫓겨나자, 23일 아침 바스티유 광장에서 노동자 루이 퓌졸의 연설을 신호로 바리케이드가 올라갔다. 국립 작업장 노동자가 봉기 참가자의 약 절반이었다. 엥겔스는 몽마르트르에서 생드니 문, 생드니 거리, 시테섬, 생자크 거리를 따라 그은 선의 동쪽을 노동자가 차지했고 서쪽에서 부르주아지가 공격했다고 썼다. 행정위원회는 23일 육군장관 카베냐크에게 진압을 맡겼고, 24일 의회는 그에게 독재권을 주며 행정위원회를 해산했다. 정부군은 정규군 2만 5천, 국민위병 1만 7천(지방에서 올라온 부대 포함), 가난한 파리 청년으로 모집한 기동위병 1만 5천, 공화국 위병 2,500명이었다. 카베냐크는 대포로 바리케이드를 부수며 세 갈래로 진격했다. 24일 판테온이 탈환되었고, 25일 아프르 대주교가 중재하러 나섰다가 생탕투안 문밖 바리케이드에서 총에 맞았으며, 브레아 장군은 이탈리아 문에서 봉기군에게 죽었다. 26일 생탕투안 문밖의 마지막 바리케이드가 무너졌다. 19 29 30
사상자 수는 출처에 따라 크게 다르다. 영어 위키백과는 군대 쪽 사상자 약 1,500명과 봉기 측 약 3,000명, 합쳐 4,500명 이상의 사상자를 적고 4,000명 이상이 알제리로 유형되었다고 한다. 프랑스 위키백과는 정부군 사망 약 1,600명(경찰청장 뒤쿠의 10월 8일 보고는 1,460명), 봉기 측 전사 3,000~5,000명에 재판 없이 총살된 약 1,500명, 체포 약 2만 5천 명, 징역이나 알제리 유형 판결 1만 1천 명을 든다. 카베냐크는 7월 3일 정부군 사상자를 703명이라 했고, 라비스와 사냐크는 군대의 사망 800명·부상 1,500명을, 바우어와 술레는 사상자 1만 5천 명 가운데 진압군 사망 1,800명과 봉기 측 사망 4,000명을 든다. 피고 1만 1천 명 가운데 여성이 약 250명이었다. 이 차이는 전사자와 처형자, 병원 밖에서 치료받은 부상자를 어떻게 세느냐에 달려 있다. 30 19
6월 28일 카베냐크는 독재권을 반납했고 의회는 그를 「행정권 수반」으로 추인했다. 그는 7월에 국립 작업장을 완전히 닫고 클럽을 통제했으며 『페르 뒤셴』을 비롯한 좌파 신문 11종을 정간했다. 7월 27~28일 클럽법은 클럽 활동을 제한하고 여성과 아이의 참여를 금지했다. 의회는 루이 블랑을 기소하기로 했고, 블랑은 벨기에를 거쳐 런던으로 망명했다. 프랑스 위키백과는 이 봉기가 「민주적·사회적 공화국」의 희망을 끝냈다고 쓰고, 영어 위키백과는 급진 공화파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승리라고 쓴다. 토크빌은 이를 「우리 역사에서, 아니 어느 역사에서도 가장 크고 기이한 봉기」라고 불렀다. 파리의 민중은 자신에게 총을 쏜 공화국에 등을 돌렸고, 농민은 45상팀 세로, 부르주아지는 클럽에 대한 공포와 경기 침체로 공화국에서 멀어졌다. 29 19 30 17 8
1848년 헌법과 루이 나폴레옹의 당선
헌법 기초 위원회는 5월 17~18일 토크빌·마라스트·라므네·콩시데랑 등 18명으로 꾸려졌다. 6월 봉기 뒤 논의는 보수 쪽으로 기울었다. 공화파와 사회주의자는 1793년 헌법 제21조를 근거로 노동권을 넣자고 했지만, 티에르는 언제나 일자리를 약속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반대했고 토크빌은 그것을 프랑스에 공산주의를 들이는 「새로운 형태의 예속」이라 불렀다. 결국 노동권은 막연한 「구호받을 권리」로 바뀌었고, 전문은 「자유, 평등, 우애」에 「가족, 노동, 재산, 공공질서」를 공화국의 기초로 덧붙였다. 11월 4일 헌법은 반대 30표라는 큰 표차로 통과되었다. 반대한 30명 가운데 한 사람인 프루동은 「헌법이기 때문에 반대했다」고 설명했다. 31 32
헌법은 750명 단원제 의회(임기 3년)와 남성 보통선거로 직접 뽑는 4년 임기 대통령을 두었고, 대통령의 재선을 금지했으며, 개정은 특별 의회에서 4분의 3 찬성을 세 번 얻어야 할 만큼 어렵게 했다. 쥘 그레비는 대통령이 왕보다 강한 군주가 될 위험을 경고하며 해임 가능한 각료회의 의장만 두자고 제안했으나 648 대 158로 부결되었다. 보통선거로 자신이 뽑히리라 믿은 라마르틴이 직선제를 밀었고, 의회는 옛 왕가 구성원의 출마를 막는 조항조차 두지 않았다.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의회가 대통령을 고르도록 한 규정은 의회 다수의 지지를 받던 카베냐크에게 유리해 보였다. 8 24 25
나폴레옹 1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36년 스트라스부르와 1840년 불로뉴에서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해 앙 요새에 종신 수감되었다가 탈출한 인물이었다. 1844년 『빈곤의 근절』이라는 사회적 색채의 소책자를 썼고, 1848년 6월 보궐선거에서 파리를 포함한 네 데파르트망(일부 출처는 다섯)에서 당선되었으나 논란 끝에 사퇴해 6월 봉기 진압에 손을 묻히지 않았다. 9월 보궐선거에서 다섯 데파르트망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대통령 후보로는 그와 카베냐크, 르드뤼롤랭, 옥중의 라스파유, 라마르틴, 출마를 철회한 샹가르니에가 있었다. 질서당은 공식 지지를 하지 않았지만 티에르는 그를 「후보들 가운데 가장 덜 나쁜」 인물이라 했다. 그의 선언문은 「종교, 가족, 재산」을 내세우면서 「일 없는 이에게 일을 주고 노동자의 노후를 돌보겠다」고 약속했다. 33 23 19 15 24 25
12월 10~11일 투표 결과는 모두를 놀라게 했다. 루이 나폴레옹은 557만 2,834표(유효표의 74.2%, 등록 유권자의 55.5~55.6%)를 얻었고, 카베냐크 146만 9,156표(약 19.5%), 르드뤼롤랭 37만 6,834표, 라스파유 3만 7,106표, 라마르틴은 약 1만 7천 표(다른 출처는 「1만 9천 표 미만」)에 그쳤다. 카베냐크는 브르타뉴의 피니스테르·모르비앙과 프로방스의 부슈뒤론·바르 네 곳에서만 이겼고, 루이 나폴레옹은 파리에서도 58%를 얻었다. 투표율은 4월보다 낮은 약 75%였다. 사회주의 노동자 조직의 지지로 옥중에서 나선 라스파유의 출마는 프랑스에서 노동자의 사회주의 공화국을 내건 첫 전국 단위 후보였다. 영어 위키백과는 그의 승리가 무엇보다 보나파르트라는 이름이 의미를 지닌 비정치화된 농촌 대중의 지지 덕분이라고 쓴다. 카베냐크는 측근이 권한 친위 쿠데타를 거부하고 12월 20일 평화롭게 권력을 넘겼다. 33 24 25 29 27

질서당의 공화국: 로마 원정, 1849년 6월 13일, 1850년 선거법
대통령은 오를레앙파 오딜롱 바로에게 내각을 맡겼고, 정통왕조파와 오를레앙파 군주주의자, 보수 공화파가 「질서, 재산, 종교」를 내걸고 푸아티에 거리 위원회를 중심으로 뭉친 질서당이 정국을 주도했다. 1849년 1월 29일 제헌의회는 압력에 밀려 스스로의 해산을 의결했고, 3월 24일에는 클럽이 금지되었다. 5월 13~14일 총선의 투표율은 약 68%로 떨어졌다. 질서당은 득표 약 59%(영어 위키백과는 53%), 713석 가운데 64%인 약 450석을 차지했고, 르드뤼롤랭이 이끈 산악파(민주사회파)는 득표 약 25%와 180~210석을 얻은 반면, 온건 공화파는 약 75~100석으로 몰락했고 라마르틴도 낙선했다. 민주사회파는 중부 산지와 남프랑스의 소농·장인에게서 표를 얻어 그 뒤 한 세기 동안 이어질 프랑스 선거 지도의 좌우 구도를 처음 보여 주었다. 34 28 35 36
1848년 11월 로시 암살 뒤 교황 비오 9세가 가에타로 피신하고 1849년 2월 로마 공화국이 선포되자, 가톨릭 여론과 오스트리아 견제를 함께 노린 루이 나폴레옹 정부는 원정을 결정했다. 우디노 장군의 원정군 약 7,000명(영어 위키백과는 8,000~1만 명)이 4월 22일 출항해 24~25일 치비타베키아에 상륙했다. 처음에는 오스트리아의 개입으로부터 로마를 지킨다는 명분이었으나, 4월 30일 로마를 기습했다가 가리발디가 이끈 공화국군에게 격퇴되었다. 제헌의회는 5월 7일 정부가 원정의 목적을 속였다며 328 대 241로 문책 결의를 했지만, 대통령은 우디노에게 지지 서한과 1만 2천 명의 증원군을 보냈다. 외교관 레셉스가 마치니와 5월 31일 협정을 맺었으나 우디노는 이를 무시하고 3만 명으로 6월 초 포위를 재개했다. 프랑스군은 7월 3일 로마에 들어가 교황의 세속 권력을 되살렸다. 헌법 전문은 「어떤 인민의 자유에도 무력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37 38 28 39
6월 11일 르드뤼롤랭은 원정이 헌법 위반이라며 대통령과 장관들의 탄핵을 발의했으나 부결되었다. 산악파는 13일 정오 샤토도에서 약 6,000명(국민위병 600명 포함)의 「헌법 만세」 시위를 벌였지만, 샹가르니에 장군의 기병이 뤼 드 라 페에서 이들을 쉽게 흩었다. 르드뤼롤랭과 의원 30여 명은 공예원(콩세르바투아르 데 자르 에 메티에)에 모여 임시정부를 선언하는 포고문을 썼으나 바리케이드 몇 개가 곧 치워지자 정원으로 달아났다. 르드뤼롤랭은 런던으로 20년 넘는 망명을 떠났고, 펠릭스 피아와 콩시데랑도 뒤를 따랐다. 이후 신문 6종이 폐간되고, 6월 19일 클럽법으로 결사의 자유가 1년간 정지되었으며, 8월 9일 법은 계엄 선포 절차를 간소화했다. 베르사유 고등법원은 피고 67명 가운데 출석자 31명을 재판해 궐석자 36명과 출석자 17명에게 유형을 선고했고, 산악파 의원 34명이 의원직을 잃었다. 39 35 7
1850년 3월 10일과 4월 28일 보궐선거에서 소설가 외젠 쉬 등 좌파가 이기자 질서당은 보통선거 자체를 손보았다. 내무장관 바로슈가 소집한 17인 위원회(티에르·몰레·몽탈랑베르·베리에 등 「뷔르그라브」)가 만든 1850년 5월 31일 법은 같은 코뮌이나 캉통에 3년 이상 거주했음을 직접세 대장으로 증명해야 투표할 수 있게 해, 일자리를 따라 옮겨 다니는 노동자와 장인을 명부에서 지웠다. 배제된 유권자는 약 3분의 1(프랑스 위키백과), 900만 명 가운데 350만 명(영어 위키백과의 나폴레옹 3세 문서), 약 300만 명(위고의 의회 연설)으로 출처마다 다르다. 위고는 이 법이 「600만의 특권자가 300만의 배제된 이들을 봉건적으로 다스리게 한다」고 비판했다. 같은 해 3월 15일 팔루 법은 교회의 교육 통제를 되살렸고, 7월 16일 법은 신문 보증금을 부활시켰다. 루이 나폴레옹은 이 선거법을 비판하며 보통선거의 보호자를 자처했고, 1851년 1월 샹가르니에를 해임했다. 40 33 8 24
1851년 12월 2일: 쿠데타와 공화파의 저항
헌법은 루이 나폴레옹의 임기를 1852년 5월에 끝내도록 했다. 그는 지방을 돌며 개헌 청원을 모았고, 1851년 7월 의회 표결은 446 대 278로 재선 허용 개헌에 찬성했으나 개정에 필요한 가중 다수에 미치지 못했다. 이복동생 모르니, 페르시니, 알제리에서 데려온 생타르노 장군이 8월부터 쿠데타를 준비했다. 10월과 11월 그가 보통선거 복원과 개헌 재심을 요구했다가 거부되자, 의회의 질서당 다수는 의장이 군대를 직접 부를 수 있게 하는 법안을 냈는데, 왕정 복고를 두려워한 산악파가 보나파르트파와 함께 이를 부결해 의회는 스스로를 무장 해제했다.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과 아우스터리츠 승전 기념일인 12월 2일이 「루비콘 작전」의 날로 정해졌다. 33 41 8 24
12월 2일 새벽 생타르노의 군대가 부르봉 궁과 국립 인쇄소, 신문사를 점령했고, 경찰청장 모파는 티에르, 카베냐크, 샹가르니에, 라모리시에르와 산악파 의원 마르탱 나도 등 78명을 먼저 체포했다. 벽보는 의회 해산, 보통선거 복원, 새 선거와 계엄을 알렸다. 10구 구청에 모인 의원 약 220명이 대통령 해임을 의결했으나 곧 연행되었다. 위고·쇨셰르·카르노 등 60명가량의 공화파 의원이 저항위원회를 만들어 대통령이 헌법을 어겨 「스스로 법 밖에 섰다」고 선언했고, 3일 의원 보댕이 바리케이드에서 죽었다. 봉기군은 1,000~1,500명을 넘지 않았는데 군대 3만 명이 투입되었고, 4일 오후 몽마르트르·푸아소니에르 대로에서 카로베르 사단이 군중에게 발포했다. 파리의 사망자는 300~400명으로 추산되며, 위고는 근거를 밝히지 않은 채 1,200명이라 했다. 42 41 33 8
지방의 저항은 파리보다 컸다. 몇몇 시의회가 헌법 제68조에 따라 대통령의 해임을 선포했고, 남동부·중부·남서부의 소읍과 농촌에서 전국적으로 10만 명가량이 일어났다. 이는 「신산악파」 비밀 결사와 마을 모임(샹브레)이 조직한 것으로, 19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넓은 민중 봉기였다. 디뉴에서는 12월 7일 공화파가 도청을 장악했고 바스잘프 데파르트망은 「저항위원회」가 다스렸으나, 32개 데파르트망에 계엄이 선포되고 군대가 며칠 안에 진압했다. 바르에서만 60~90명이 죽었고, 약식 총살은 127명이라는 추산이 있다. 약 2만 6,884명이 체포되었고, 도지사·장군·판사로 이루어진 혼성위원회가 2만 1천 명에게 판결을 내려 9,530명을 알제리로, 239명(영어 위키백과는 250명)을 카옌 형무소로 보냈다. 위고와 에드가르 키네 등 적어도 1만 명이 망명했다. 42 41 35 36
루이 나폴레옹은 보통선거를 헌법 위에 놓고 12월 20~21일 국민투표를 열었다. 국토의 3분의 1이 아직 계엄 아래 있었고 찬성 쪽 신문만 발행이 허용되었다. 결과는 찬성 743만 9,216표 대 반대 64만 737표(12월 31일 잠정)였고, 1852년 1월 14일 확정치는 찬성 748만 1,231표 대 반대 64만 7,292표였다. 영어 위키백과의 쿠데타 문서는 714만 5천 대 60만이라는 다른 수치를 적는다. 1852년 1월 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10년으로 늘리고 입법 발의권을 주었고, 1852년 11월 7일의 또 다른 국민투표를 거쳐 12월 2일 그는 「프랑스인의 황제 나폴레옹 3세」가 되었다. 1859년 사면 때도 르드뤼롤랭은 제외되었다. 42 41 33
평가: 「첫 대전투」, 보나파르티즘, 그리고 1871년으로
마르크스는 1850년 『신라인 신문-정치경제 평론』에 연재하고 1895년 엥겔스가 묶어 낸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서 이 혁명을 계급 분석으로 풀었다. 그에게 7월 왕정은 금융 귀족이 국가를 나라의 부를 나눠 먹는 「주식회사」로 쓴 체제였고, 2월 혁명은 1845~1846년 감자병과 흉작, 1847년 영국에서 시작된 상공업 공황이 낳은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노동자와 여러 부르주아 분파의 타협이었으며, 「우애」는 계급 관계를 상상 속에서만 없앴다. 그는 국립 작업장이 노동자를 서로 싸우게 하려던 「예비군」 구상이었다가 오히려 반란의 군대가 되었다고 보았고, 6월 봉기를 근대 사회를 가르는 두 계급 사이의 「첫 대전투」, 부르주아 공화국의 진짜 탄생이라 불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봉기를 노동운동의 독립을 알리는 출생증명서로 읽었고, 6월의 진압은 「룸펜프롤레타리아트」 개념에 영감을 준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1848년 12월 10일의 투표는 「농민의 2월」이었다. 18 43 19
1851년 12월부터 1852년 3월 사이에 쓴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는 「모든 세계사적 사건과 인물은 두 번 나타난다. 처음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으로」라는 구절로 나폴레옹 1세와 조카, 1793년과 1848~1851년의 산악파를 견주었다. 그는 부르주아지·소부르주아지·농민·혁명가·사회민주파 사이의 분열과 동맹을 그렸고, 어느 계급도 지배하지 못하는 교착 속에서 국가가 사회로부터 자립한 듯 보이는 체제, 곧 보나파르티즘이 나왔다고 보았다. 그 사회적 기반은 「감자 자루」처럼 흩어진 분할지 농민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스스로 고른 조건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 아래서 만든다」는 구절도 이 책에 있다. 정치학자 로버트 터커는 이 분석을 파시즘에 관한 훗날 마르크스주의 사유의 서곡이라 불렀다. 44 45
1848년의 경험은 1871년 파리 코뮌으로 이어진다. 마르크스는 블랑키를 「혁명적 공산주의의 고결한 순교자」라 부르며 혁명적 사회주의를 「부르주아지가 블랑키의 이름을 붙인 공산주의」와 동일시했다. 그러나 뒤에 엥겔스는 소수의 자각한 음모가가 대중에게 의지를 강요하는 모델로 블랑키즘을 비판했고, 이 해석이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굳어졌다. 블랑키 자신은 1848년 5월 이후 10년을 감옥에서 보냈고 코뮌 직전에 다시 체포되었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코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48년 『민주적·사회적 혁명』을 창간하고 「공화주의 연대」를 세우고 「신산악파」를 후원한 들레클뤼즈는 투옥과 프랑스령 기아나 유형을 거쳐 코뮌의 군사 지휘자가 되었고 1871년 5월 바리케이드에서 죽었다. 1848년 6월의 진압군 쪽에 섰던 티에르는 1871년 코뮌을 진압한 정부 수반이었고, 망명에서 돌아온 루이 블랑은 코뮌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1879년 코뮌 가담자 사면을 이끌어 냈다. 6 46 35 17 9
자유주의 쪽의 서술은 다르다. 2월 혁명 전에 「화산 위에서 잠자고 있다」고 경고한 토크빌은 카베냐크와 질서당을 지지했고 1849년 6~10월 바로 내각의 외무장관으로 6월 13일 뒤 파리의 계엄 재선포를 요구했다. 그는 6월 봉기를 「우리 역사에서, 아니 어느 역사에서도 가장 크고 기이한 봉기」라 불렀고, 노동권을 「새로운 형태의 예속」이라 불렀으며, 1848년의 사적인 일지는 사후 『회상록』으로 나왔다. 올리버 커슨은 1990년대 문화사의 부상이 혁명적 변화의 필연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인식을 민중 봉기는 독재자만 낳는다는 토크빌식 비관으로 대체했다고 지적한다. 공화주의 역사가 아귈롱은 6월 봉기를 「순수한 상태의 계급 전투」로, 퓌레는 빈곤과 실업에 혁명 전통이 더해진 것으로 보았으나, 사뮈엘 아야는 국립 작업장 노동자들이 지키려 한 것이 굶주림의 요구가 아니라 「사회적이면서 정치적인 공화국」이었다고 반박한다. 이 혁명은 노동권·보통선거·노예제 폐지를 남겼지만, 보통선거가 농촌 다수를 통해 반동과 「국민투표 독재」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교훈도 남겼고, 그래서 1875년 공화파는 대통령 직선제를 거부했다. 47 19 44 24 31 1
결과
제2공화국은 남성 보통선거와 노예제 폐지를 프랑스에 남겼지만, 노동권과 「민주적·사회적 공화국」의 약속은 6월 봉기의 진압으로 끝났다. 1851년 쿠데타 뒤 약 2만 6천 명이 체포되고 9,530명이 알제리로 보내졌으며, 1852년 12월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이 섰다. 마르크스는 이 경험에서 부르주아 공화국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립, 보나파르티즘이라는 국가 형태를 읽어 냈고, 1848년의 투사들 가운데 블랑키파와 들레클뤼즈는 1871년 파리 코뮌으로, 그들을 진압한 쪽의 티에르는 코뮌을 짓밟은 정부로 다시 만났다.
연표와 지도
- 11830-08-097월 왕정 성립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물러나고 오를레앙 가의 루이 필리프가 「프랑스인의 왕」으로 즉위했다.
- 21834-04-09제2차 리옹 견직공 봉기
공화파 결사를 겨냥한 결사법 표결일에 리옹 견직공이 봉기했고, 4월 13일 탈환 때 양측에서 100~200명이 죽었다. 이어진 파리 봉기 뒤 2,0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 31839-05-12계절결사 봉기
블랑키와 바르베스의 계절결사 약 400명이 파리 시청과 법원을 몇 시간 점거했다가 진압되었다.
- 1847-07-09첫 개혁 연회
파리 샤토루주에서 1,200명이 모인 첫 연회가 열려 선거 개혁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후 약 70차례 연회에 1만 7천 명이 참석했다.
- 41848-02-22연회 금지와 시위
정부가 파리 연회를 두 번째로 금지했으나 노동자와 학생이 콩코르드 광장으로 몰려나와 첫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 51848-02-23기조 사임과 카퓌신 대로 발포
국민위병이 시위대 편에 서자 국왕이 기조를 해임했다. 밤에 외무부 앞에서 군대가 군중에게 발포해 16~52명이 죽었고 1,500개가 넘는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 61848-02-24루이 필리프 퇴위와 임시정부
루이 필리프가 손자에게 양위하고 영국으로 도망쳤다. 섭정안은 의사당에 밀려든 군중에게 무산되었고 시청에서 11인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 71848-02-25공화국 선포와 노동권 법령
라마르틴이 시청 발코니에서 공화국을 선포하고 삼색기를 지켰다. 루이 블랑의 발의로 노동으로 생존을 보장한다는 법령이 나왔다.
- 1848-02-27국립 작업장 개설
공공사업장관 마리 아래 파리 실업자를 위한 국립 작업장이 열렸다. 등록자는 4월 말 11만 7천 명에 이르렀다.
- 81848-02-28뤽상부르 위원회
루이 블랑을 위원장, 알베르를 부위원장으로 하는 노동자를 위한 정부위원회가 뤽상부르 궁에 세워졌다.
- 1848-03-05남성 보통선거
임시정부가 남성 보통선거를 도입해 유권자가 약 25만 명에서 900만 명으로 늘었다.
- 1848-03-1645상팀 세
재무장관 가르니에파제스가 직접세에 45%를 덧붙이는 세금을 매겨 농민을 공화국에서 멀어지게 했다.
- 91848-04-16두 번째 선거 연기 시위 저지
선거의 재연기를 요구한 노동자 시위가 르드뤼롤랭이 부른 국민위병에게 막혔다.
- 1848-04-23제헌의회 선거
1792년 이래 첫 남성 보통선거에서 온건 공화파와 군주파 출신 「내일의 공화파」가 이기고 급진파가 크게 졌다.
- 1848-04-27식민지 노예제 폐지
3월 4일 설치된 위원회의 작업으로 프랑스 식민지의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 101848-05-155월 15일 의회 난입
폴란드 지원 시위대가 의회에 들어가고 시청에서 봉기 정부를 선포했으나, 국민위병에게 쫓겨나 바르베스·알베르·블랑키·라스파유가 체포되었다.
- 1848-06-21국립 작업장 폐쇄 법령
행정위원회가 18~25세 노동자는 군대에 입대하고 나머지는 지방으로 떠나라는 폐쇄 법령을 냈다.
- 111848-06-236월 봉기 시작
바스티유 광장의 퓌졸 연설을 신호로 동부 파리에 바리케이드가 올라갔다. 24일 의회는 카베냐크에게 독재권을 주었다.
- 121848-06-266월 봉기 진압
생탕투안 문밖의 마지막 바리케이드가 무너졌다. 봉기 측 사망 3,000~5,000명과 약식 총살 약 1,500명, 체포 약 2만 5천 명으로 추산된다.
- 1848-06-28카베냐크, 행정권 수반
독재권을 반납한 카베냐크를 의회가 행정권 수반으로 추인했다.
- 1848-11-041848년 헌법
노동권을 뺀 헌법이 반대 30표로 통과되었다. 직선 대통령은 임기 4년에 재선이 금지되었다.
- 1848-12-10대통령 선거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557만여 표(74.2%)로 카베냐크(146만여 표)를 크게 이겼다.
- 1849-04-30프랑스군의 로마 공격 실패
치비타베키아에 상륙한 우디노 원정군이 로마를 공격했다가 가리발디의 공화국군에게 격퇴되었다.
- 1849-05-13입법의회 선거
질서당이 의석 약 64%를, 르드뤼롤랭의 산악파(민주사회파)가 득표 약 25%를 얻고 온건 공화파는 몰락했다.
- 131849-06-136월 13일 시위
로마 원정에 항의한 산악파의 시위가 흩어지고 공예원에서 선포한 임시정부도 무너져 르드뤼롤랭이 런던으로 망명했다.
- 1849-07-03프랑스군의 로마 입성
한 달간의 포위 끝에 프랑스군이 로마에 들어가 교황의 세속 권력을 되살렸다.
- 1850-05-315월 31일 선거법
3년 거주 요건으로 유권자의 약 3분의 1(출처에 따라 300만~350만 명)을 명부에서 지웠다.
- 141851-12-02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
군대가 의사당을 점령하고 반대파 지도자들을 체포했으며, 대통령은 의회 해산과 보통선거 복원을 선포했다.
- 151851-12-04대로의 학살
파리의 바리케이드가 진압되고 대로에서 군대가 군중에게 발포했다. 파리의 사망자는 300~400명으로 추산된다.
- 161851-12-07디뉴의 저항
바스잘프에서 공화파가 도청을 장악했다. 전국 약 10만 명이 봉기했으나 며칠 안에 진압되었다.
- 1851-12-20쿠데타 추인 국민투표
계엄 아래 국민투표에서 약 744만 표 대 64만 표로 쿠데타가 추인되었다.
- 171852-12-02제2제정 선포
루이 나폴레옹이 「프랑스인의 황제 나폴레옹 3세」가 되었다.
관련 인물 37명
파리 노동자와 사회민주파 (블랑·블랑키·르드뤼롤랭)14명
지도부4
「노동권」 법령을 발의하고 뤽상부르 위원회를 이끌었으며, 6월 봉기 뒤 기소되어 런던으로 망명했다.
중앙공화협회의 지도자루이 오귀스트 블랑키1805–1881붉은 깃발과 선거 연기를 요구했고 5월 15일 시위를 이끈 뒤 체포되어 10년 형을 받았다.
내무장관, 1849년 산악파(민주사회파)의 지도자알렉상드르 오귀스트 르드뤼롤랭1807–1874임시정부와 행정위원회에서 보통선거를 시행했고, 1849년 산악파를 이끌다 6월 13일 시위 실패 뒤 망명했다.
국립 작업장 노동자 대표단 대변인루이 퓌졸1822–18666월 22일 대표단을 이끌고 마리 장관과 맞섰고, 23일 아침 바스티유 광장 연설로 6월 봉기의 신호를 올렸다
참여10
뤽상부르 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5월 15일 시청에서 체포되어 부르주에서 유형 판결을 받았다.
「혁명 클럽」의 지도자, 제헌의회 의원아르망 바르베스1809–1870국민위병 대령으로 4월 16일 시위를 막았으나, 5월 15일 시청의 봉기 정부 선포에 가담해 종신형을 받았다.
「인민의 벗」 클럽의 지도자, 사회주의 대통령 후보프랑수아뱅상 라스파유1794–18785월 15일 의회에서 폴란드 청원을 낭독하고 체포되었으며, 옥중에서 의원에 당선되고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제헌의회 의원, 『인민의 대표』 발행인피에르조제프 프루동1809–18656월 보궐선거로 의원이 되어 재산 소득 3분의 1 징수안을 냈고 헌법에 반대했다. 1849년 3년 형을 받았다.
중앙우애협회의 지도자에티엔 카베1788–1856이카리아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1848년 클럽을 이끌었고, 5월 15일 봉기 정부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노르 데파르트망 정부위원, 『민주적·사회적 혁명』 발행인샤를 들레클뤼즈1809–1871임시정부의 정부위원을 지냈고 「공화주의 연대」를 세웠으며, 거듭 투옥된 뒤 망명했다. 1871년 코뮌에서 죽었다.
임시정부 위원, 농업·상업장관페르디낭 플로콩1800–1866『라 레포름』 편집장으로 임시정부 소수파에 들었으나, 6월 봉기에는 적대해 카베냐크의 독재 권한을 지지했다
파리 경찰청장마르크 코시디에르1807–18612월 바리케이드에서 경찰청을 장악해 「인민 경비대」를 만들었으나, 5월 15일 사건 뒤 해임되고 6월 봉기 뒤 런던으로 피했다
푸리에파 지도자, 산악파 의원빅토르 콩시데랑1808–1893「노동권」을 정식화하고 헌법 기초 위원회에 들었으며, 1849년 6월 13일 봉기 뒤 벨기에로 망명했다
산악파 의원알퐁스 보댕1811–18511851년 12월 3일 생탕투안 변두리에서 쿠데타에 맞선 바리케이드에 올랐다가 군대의 사격에 죽었다
온건 공화파 임시정부·행정위원회·카베냐크 정부7명
지도부2
집행 · 지휘2
질서당과 보나파르트 세력9명
지도부3
1848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되어 로마 원정을 보냈고, 1851년 12월 2일 쿠데타로 공화국을 끝내고 이듬해 황제가 되었다.
질서당의 지도자아돌프 티에르1797–18771848년 2월 국왕에게 파리 철수를 건의했고, 질서당을 이끌며 루이 나폴레옹을 지지했다가 대립했다. 1851년 쿠데타 때 체포되었다.
왕조 반대파 지도자, 1848~1849년 내각 수반오딜롱 바로1791–1873개혁 연회를 이끌었으나 2월 24일 섭정을 지키려다 실패했고, 루이 나폴레옹 아래 질서당 내각을 이끌다 1849년 10월 해임되었다
집행 · 지휘4
1848년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가 미미한 표를 얻었다. 질서당의 무력으로 1849년 6월 13일 산악파의 「헌법 만세」 시위를 기병으로 흩었고, 1851년 1월 대통령에게 해임되었으며 12월 쿠데타 때 체포되었다.
로마 원정군 사령관샤를 우디노1791–18631849년 4월 루이 나폴레옹 정부의 원정군을 이끌고 상륙했다. 의회의 문책 뒤에도 증원을 받았고, 레셉스의 협정을 무시하고 6월 로마를 포위해 7월 3일 점령했다. 이 원정에 맞선 6월 13일 시위가 산악파의 몰락을 불렀다.
쿠데타 기획자, 내무장관샤를 드 모르니1811–1865루이 나폴레옹의 이부동생으로 1851년 8월부터 쿠데타를 준비했고, 12월 2일 쿠데타 이튿날 내무장관이 되었다
전쟁장관, 쿠데타 군사 지휘관아르망자크 르루아 드 생타르노1798–1854알제리에서 불려 와 10월 전쟁장관이 되었고, 12월 2일 새벽 군대로 의사당과 신문사를 점령해 쿠데타를 집행했다
참여2
7월 왕정2명
진영 밖
목격 · 기록4
1848년 3월 브뤼셀에서 파리로 왔다가 쾰른으로 갔고, 6월 봉기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대전투로, 쿠데타를 보나파르티즘으로 분석했다.
개혁 연회와 6월 봉기의 보도자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1847년 파리에서 연회 운동을 취재했고, 6월 봉기의 파리를 노동자의 동부와 부르주아지의 서부로 나뉜 전선으로 묘사했다.
1848년 파리의 목격자알렉산드르 게르첸1812–1870이탈리아에서 혁명 소식을 듣고 파리로 달려왔으며, 혁명의 실패 뒤 유럽 사회주의 운동에 깊이 환멸했다.
2월 혁명기 파리의 망명 혁명가미하일 바쿠닌1814–1876루이 필리프 퇴위 뒤 파리로 돌아와 혁명의 분위기에 젖었고,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 봉기를 선동하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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