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1937

5개년 계획과 소련의 대전환

농민의 나라는 어떻게 10년 만에 산업 강국이 되었고, 그 대가는 무엇이었는가?

1928년부터 1937년까지 두 차례의 5개년 계획은 농민의 나라를 산업 강국으로 바꾼 세계사적 전환이었다. 곡물 조달 위기에서 출발한 집단화와 초고속 공업화는 마그니토고르스크와 드네프로스트로이 같은 거대 건설, 대중 문맹 퇴치 운동, 여성의 공장과 대학 진출을 낳았다. 그러나 강제 집단화는 농촌에 격변을 불러왔고, 1932–1933년에는 과도한 조달과 흉작이 겹친 기근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시기의 성취와 희생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역사로 남았다.

농민의 나라, 포위된 요새

1927년 말, 소련은 두 개의 시간 속에서 살고 있었다. 하나는 회복의 시간이었다. 네프(신경제정책) 아래 공업과 농업은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 이전 수준을 거의 되찾았다. 1926/27년 곡물 수확량은 7,680만 톤으로 혁명 후 최고치였고, 국가 조달량도 1,060만 톤에 달했다. 곡물은 시장에서 돈으로 샀고, 농민은 남는 곡물을 팔아 공산품을 살 수 있었다. 도시에는 빵이 돌았고, 당은 "네프는 진지하게, 그리고 오래"라는 니콜라이 부하린의 구호를 반복했다.

그러나 다른 시간은 점점 더 큰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1927년 5월, 영국이 아르코스(전소협동조합) 사무실을 급습한 뒤 소련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바르샤바에서는 피우수트스키가 정권을 잡았고, 일본은 동쪽에서 군비를 늘리고 있었다. 당 지도부는 이것을 포위망의 조임으로 읽었다. 1927년 12월 제15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5개년 계획 작성 지침은 "경제봉쇄의 경우에도 발전 가능성을 보장하는" 산업 부문에 가장 빠른 속도를 부여하라고 명시했다. 방어가 계획의 논리 안에 처음부터 박혀 있었다.

내부에는 다른 균열이 있었다. 네프는 농업을 살렸지만, 공업화에 필요한 자본을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했다.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는 1926년 『새로운 경제학』에서 농민 부문의 잉여를 공업으로 이전하는 '사회주의적 원시축적'을 주장했다. 반면 부하린, 알렉세이 리코프, 미하일 톰스키가 이끄는 당 우파는 농민의 구매력을 키워 점진적으로 공업 시장을 넓히는 '달팽이 걸음'의 길을 고수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1927년까지 부하린 편에 서 있었다. 그러나 1927년 가을, 무언가가 깨졌다.

10월부터 곡물 조달량이 급감하기 시작했다. 1927년 7~9월 1분기 조달량은 1억 4,890만 푸드로 전년 동기와 비슷했지만, 10월 들어 하락이 뚜렷해졌다. 국가조달위원회(НКТорг)의 10월 24일 보고서는 10월 조달량이 계획의 114만 푸드에 크게 못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농민은 수확한 곡물을 시장에 내놓지 않았다.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공산품 부족으로 농민이 곡물을 팔아도 살 물건이 없었고, 국가 조달 가격은 시장 가격보다 낮았다. 1926/27년의 풍작으로 가격이 하락하자, 농민들은 가격이 오를 때까지 곡물을 쥐고 있기로 했다.

스탈린은 이것을 쿨라크의 '사보타주'로 규정했다. 부하린은 흉작과 불충분한 공산품 공급이 원인이라고 반박했다. 1928년 1월, 스탈린은 시베리아로 직접 내려가 형법 제107조를 동원한 강제 징발(이른바 '우랄-시베리아 방식')을 지시했다. 네프의 시장 논리는 이때 사실상 끝났다. 한 나라의 10년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곡물이 끊기자 계획이 시작됐다

1927년 가을, 소련의 곡물 조달이 급격히 무너졌다. 1926/27년의 풍작으로 국가가 매입한 곡물은 사상 최대인 1,060만 톤에 달했으나, 1927년 10월부터 조달량이 급감하기 시작했다. 1분기 계획치 700만 톤에 210만 톤이 모자랐다. 도시와 붉은 군대를 먹일 곡물조차 확보하지 못할 위기였다.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전년 풍작으로 곡가가 낮아지자 농민들은 파종을 줄였고, 1927년 가을 수확은 줄어들었다. 여기에 공산품 부족으로 농민이 곡물을 팔아도 살 물건이 없는 '상품 기근'이 겹쳤다. 국가 수매가격과 시장가격의 격차는 부유한 농민(쿨라크)에게 곡물을 쥐고 가격 인상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스탈린에게 이것은 경제 문제가 아니라 정치 위기였다. 1928년 1월 15일, 그는 시베리아로 직접 내려갔다. 노보시비르스크, 바르나울, 옴스크를 돌며 당 간부들을 몰아세운 스탈린의 지시는 단호했다: 「곡물 투기자들에게 RSFSR 형법 제107조를 적용하라」. 농민이 곡물을 감추면 최고 3년 징역과 재산 몰수에 처할 수 있는 이 조항은 1926년에 제정됐으나 지금까지 거의 쓰이지 않았다. 스탈린은 나아가 압수한 곡물의 25%를 빈농에게 낮은 가격으로 나누어 주라고 명령했다. 이른바 '우랄-시베리아 방식'의 탄생이었다. 마을 총회에서 쿨라크에게 할당량을 배정하고, 거부하면 할당량의 5배까지 벌금을 물렸으며, 그래도 거부하면 형법 107조를 적용했다. 이 방식은 1928년 봄까지 전국 곡창지대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이 조치는 당 내부를 갈랐다. 니콜라이 부하린은 1928년 9월 30일 프라우다「한 경제학자의 노트」를 발표하여 스탈린의 노선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부하린은 초고속 공업화가 공업 부문 간 불균형을 낳아 계획 자체를 붕괴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건설해야 한다'는 그의 논리는 네프 아래서 농민과의 사회적 평화를 유지하며 점진적으로 공업화하자는 입장이었다. 그에게 곡물 위기의 원인은 쿨라크의 사보타주가 아니라 수매가격이 너무 낮고 공산품 공급이 부족한 데 있었다. 스탈린은 부하린의 주장을 '동화'라 일축했고, 11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부하린·리코프·톰스키는 '우경 일탈'로 규정됐다.

바로 이 격렬한 논쟁 속에서 고스플란은 두 가지 5개년 계획안을 작성했다. '출발 변종(отправной вариант)'은 투자 151% 증가, 생산재 161% 증가, 전력 236% 증가를 제시했고, '최적 변종(оптимальный вариант)'은 투자 228%, 생산재 204%, 전력 335% 증가를 목표로 삼았다. 1929년 4월 23일부터 29일까지 열린 제16차 당협의회에서 미코얀과 쿠이비셰프는 출발 변종을 비현실적이라며 폐기하고 최적 변종만을 단일 계획으로 채택할 것을 주장했다. 협의회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고, 5월 제5차 소비에트 대회가 이를 최종 승인했다. 계획의 시작일은 1928년 10월 1일로 소급 적용되어, 소련은 이미 6개월째 계획 속에 살고 있는 셈이 됐다. 부하린이 경고한 균형의 논리는 폐기되고, 스탈린이 '대전환'이라 부르게 될 시대의 제도적 틀이 이렇게 완성됐다.

대전환이라는 선전포고, 그리고 83일 간의 결정들

1929년 11월 7일, 혁명 12주년 기념일자 《프라우다》에 실린 스탈린의 논설 「대전환의 해」는 8개월 전 시베리아에서 시작된 임시 조치들이 이제 국가의 항구적 노선임을 대내외에 선언한 글이었다. 스탈린은 세 가지 '결정적 전환'을 열거했다. 첫째, 노동 생산성 영역에서 '수백만 노동자 대중의 창조적 주도권과 강력한 노동 열의'가 분출했다. 둘째, 중공업 건설을 위한 자본 축적 문제가 '기본적으로 해결'되어 소련을 '금속의 나라'로 만들 토대가 놓였다. 셋째, 이것이 논설의 진짜 무게중심이었는데, 농업이 '소규모·후진적 개인 경영에서 대규모·선진적 집단 경영으로' 전환하고 있으며, 중농이 '스스로' 콜호스에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1929년 10월 기준 집단화율이 7.5%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가입은 빈농에 의해, 그리고 상당한 강압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수사는 '이미 일어난 전환'을 묘사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그 전환을 완수하기 위한 향후의 모든 조치를 사후승인으로 정당화하는 논리적 장치였다.

논설이 실린 지 사흘 뒤인 11월 10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소집되었다(10일-17일). 몰로토프는 연설에서 "속도가 무서울 정도"라고 말하면서도, 북카프카스의 경우 1년 만에 집단화율이 8%에서 25-30%로 뛰었다는 안드레예프의 보고를 근거로 "1930년 여름이면 북카프카스의 집단화를 기본적으로 완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몰로토프의 핵심 문장은 이랬다. "남은 것은 11월, 12월, 1월, 2월, 3월, 4개월 반입니다. 이 기간 동안 제국주의자들이 우리를 직접 공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정적 돌파를 이룰 수 있습니다." 전원회의는 전면 집단화로의 이행과 함께 '계급으로서의 쿨라크 청산'으로 정책을 전환하기로 결정했으며, 2만 5천 명의 도시 산업노동자를 농촌으로 파견하여 집단화를 조직하도록 하는 계획을 승인했다. 이른바 '2만5천인대'(двадцатипятитысячники)는 1929년 말부터 1930년 초에 걸쳐 선발되어 곡창지대로 투입되었다. 이들은 대개 콜호스 운영에 필요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였으나, 당 중앙이 직접 보낸 '전위'로서 지역 간부들을 압박하는 지렛대 역할을 했다.

12월 27일,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 농업문제 학술회의에서 "이제 우리는 쿨라크에 대한 결정적 공세를 수행하고, 그 저항을 분쇄하며, 그들을 계급으로서 제거하고 그들의 생산을 콜호스와 솝호스의 생산으로 대체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연설했다. 이튿날인 12월 28일, 농업인민위원 야코블레프를 위원장으로 하는 정치국 위원회가 소집되어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로 1930년 1월 5일 중앙위원회 결정 「집단화의 속도와 국가 지원 대책에 대하여」가 채택되었다. 이 결정은 전례 없는 구체적 시간표를 제시했다. 북캅카스와 볼가 중·하류는 1930년 가을 또는 늦어도 1931년 봄까지, 나머지 곡창지대는 1931년 가을 또는 1932년 봄까지 집단화를 완료한다는 것이었다. 또 콜호스의 표준 형태로 토지뿐 아니라 주요 생산수단(가축, 기계, 건물)을 공동화하는 농업 아르텔을 지정하고, 쿨라크의 콜호스 가입을 금지했다.

그리고 1930년 1월 30일, 정치국은 '일급비밀' 결정 「전면 집단화 지역에서의 쿨라크 경영 청산 조치에 대하여」를 채택했다. 1930년 봄 파종기를 앞둔 긴박함 속에서 작성된 이 결정은 쿨라크를 세 부류로 분류했다. 제1범주는 '반혁명적 쿨라크 활성분자'로서, 토지·가축·건물·종자를 전면 몰수하고 가장을 강제수용소에 보내거나 '테러 행위와 반란 조직'의 경우 사형에 처한다. 제2범주는 '덜 활동적인 착취자들'로서,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 전체를 북부·시베리아·우랄·카자흐스탄 등 원격지로 추방한다. 제3범주는 비교적 '신뢰할 만한' 쿨라크로, 콜호스 경작지 밖으로 재정착시키되 같은 행정구역 내에 둔다. OGPU는 제1범주 약 6만 명을 수용소로, 제2범주 약 15만 가구를 추방한다는 수치적 할당량을 배정받았고, 지역별로 우크라이나 1만 5천 명 구금·3만-3만 5천 가구 추방, 북캅카스 6천-8천 명 구금·2만 가구 추방 등 세부 쿼터가 통보되었다. 이 쿼터들은 결정문 자체에서 '대략적'(ориентировочно)이라고 못박았음에도, 실무에서는 곧 하한선으로 작동했다. 판결은 정식 재판 없이 당·검찰·OGPU 대표로 구성된 트로이카가 현장에서 내렸다.

이 83일, 11월 7일 논설에서 1월 30일 정치국 결정까지, 이 기간은 말이 행정이 되고 행정이 폭력이 되는 속도를 압축해 보여준다. 1월 30일 결정의 제1범주 쿼터는 불과 8개월 만에 실제 체포자가 28만 4천 명으로 폭증했다. 결정문 제4조는 '전체 청산 대상 가구가 지역 쿨라크의 3-5%를 넘지 않도록' 하여 중농으로의 확대를 경계했지만, 현장에서 '쿨라크'의 정의는 소 두 마리나 이웃보다 몇 아르 넓은 땅을 가진 농가로까지 늘어났고, 1930년 OGPU 자체 보고도 한 지역에서 '쿨라크'로 분류된 자의 45%가 명목상의 경제 기준조차 충족하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스탈린이 논설에서 선언한 '중농의 자발적 콜호스 진입'이 있던 자리에는, 국가가 정의하고 국가가 집행하는 계급 청산의 기계장치가 놓였다.

후퇴와 재돌격, 그리고 초원 위의 철의 도시

1930년 3월 2일 스탈린이 「성공에 취하여」를 발표하자 집단화는 순간적으로 풀렸다. 2월 20일까지 전 농가의 50%가 콜호스에 들어갔으나, 7월 1일에는 21%만 남았다. 스탈린은 "동지들 가운데 일부가 성공에 취해 정신의 맑음과 시야의 냉정함을 잃었다"며 모든 과오를 지방 간부에게 돌렸다. 실제로 이 기사는 집단화의 방향 자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의무 조달과 곡물 수출, 중공업 우선 투자라는 기본 노선은 손대지 않은 채, '과잉'만을 교정 대상으로 삼았다. 이는 후퇴가 아니라 발을 바꾼 것뿐이었다.

그해 가을, 수확이 끝나자 집단화는 다시 가속되었다. 1930년 한 해 약 250만 명의 농민이 1만 4천 건의 봉기에 참여했지만, 국가의 대응은 무력했다기보다 체계적이었다. 1931년 3월 「솝호스 건설에 관하여」와 「콜호스 건설에 관하여」라는 두 개의 포고령은 농민의 콜호스 탈퇴를 원천적으로 금지했다. 봄까지 52%가 재차 콜호스에 편입되었고, 탈쿨라크화도 다시 전면화되었다. 1931년 한 해에만 약 30만 가구가 특별이주민으로 분류되어 북부·우랄·시베리아로 실려 갔다.

이 특별이주민들이 향한 곳 중 하나가 바로 마그니토고르스크였다. 우랄 초원의 마그니트나야 산 기슭에 세계 최대 제철소를 건설한다는 계획은 1929년 6월 착공되었으나, 1930년 여름 이미 노동력의 55%가 부족했다. 영하 40도에 이르는 겨울, 진흙탕이 되는 여름, 천막과 흙집에서 자는 노동자들은 수만 명씩 도망쳤다. 1931년 4월 25일 정치국은 「마그니토고르스크 및 쿠즈네츠크 공장의 시운전을 위한 인력 확보에 관하여」라는 특별 결정을 내렸고, 5월부터 첫 번째 특별이주민 화차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1932년 가을까지 인구 25만의 도시에서 약 4만 가구의 탈쿨라크 이주민과 2만 6천 명 이상의 일반 수형자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특별정착촌에 수용되어 공장과 기반 시설을 지었다. 첫 5년간 아사·동사·전염병으로 약 1만 명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이 건설은 단순한 강제노동으로 환원되지 않는 열정을 품고 있었다. 콤소몰 지원자들, 노동조합이 '동원'한 숙련공들, 미국·독일에서 온 외국 기술자와 공산주의자들이 뒤섞였다. 작업반 간 '사회주의 경쟁'이 일상이었고, 1930년에는 좌안과 우안 작업반이 댐 건설 속도를 겨루었다. 발렌틴 카타예프는 1932년 소설 『시간이여 전진하라!』에서 이 현장의 숨 가쁜 박자를 "다시는 우리가 아시아가 아니리라! 결코! 결코! 결코!"라는 마지막 문장으로 압축했다. '상하이'라 불린 판잣집 지구와 당 간부·외국 기술자들이 살던 '베료스카(자작나무)' 지구의 대비는 건설의 이중성을 말해 주었다.

1932년 1월 31일, 영하 20도의 날씨 속에 첫 고로가 마침내 선철을 쏟아냈다. 취입식은 성대했으나 고로는 이듬해 완전히 재건축되어야 했다. 급조된 기초가 생산 열기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그해 1분기 계획 달성률은 44.9%, 주택 건설 계획은 사실상 0%였다. 그럼에도 마그니토고르스크는 가동을 시작했고, 2년 뒤에는 완전 일관제철소가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하나의 역설을 남겼다: 농민을 뿌리 뽑아 만든 도시가, 그 농민이 키운 곡물을 수출해 산 기계로 세워졌다는 것. '성공에 취하여'는 그 역설을 덮는 말이었다.

강이 빛을 켜던 날, 마을은 어둠 속으로

1932년 10월 10일, 드네프르강을 가로지른 760미터의 콘크리트 댐에서 첫 터빈이 돌기 시작했다. 드네프로스트로이, 즉 드네프로게스는 당시 유럽 최대, 세계에서는 후버 댐과 윌슨 댐에 이은 세 번째 규모의 수력발전소였다. 1927년 착공해 5년 만에 완공된 이 건설은 미국 육군 공병대 대령 휴 쿠퍼가 현장 감독을 맡고, 제너럴일렉트릭이 첫 발전기 5기를 납품했으며, 뉴포트뉴스 조선소가 터빈을 공급한 국제적 작업이었다. 1932년 9월 소련 정부는 쿠퍼를 포함한 6명의 미국 기술자에게 노동적기훈장을 수여했다. 드네프르의 전력은 드네프로페트롭스크 알루미늄 공장으로 직송되었고, 이는 소련 항공산업의 근간이 되었다. '사회주의 건설'의 대표적 성취였다.

그러나 발전소 가동의 축포가 울리던 바로 그 시기, 발전소에서 불과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우크라이나와 북캅카스의 마을들에서는 굶주림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1931년 가을 소련은 평년 이하의 수확(약 6,900만 톤)에서 기록적인 2,300만 톤 가까이를 국가 조달로 거둬들였고, 그중 500만 톤을 수출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총수확의 42% 이상이 징발되어 이듬해 파종할 종자 곡식마저 부족해졌다. 1932년 봄, 오게페우(OGPU) 비밀정치부의 보고들은 '고립된 식량난 지점들'을 언급하기 시작했고,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 스타니스와프 코시오르는 4월 26일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를 '지방 간부들이 지난 조달에서 다소 지나친 탓'이라고 설명하면서도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있다는 주장은 단호히 거부한다'고 덧붙였다.

6월이 되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었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그리고리 페트롭스키와 정부 수반 블라스 추바리는 각각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추바리는 '최소한 100개 군에서 긴급 식량 원조가 필요하다'고 썼고, 직접 마을들을 방문한 소감을 기록했다: '도처에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었다. 여성들은 울고 있었고, 남자들조차 때때로 울었다.' 농민들은 이렇게 항의했다: '수확이 있었는데 왜 전부 빼앗아 갔습니까? 옛 체제에서도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추바리는 100만 푸드(약 1만 6천 톤)의 긴급 구호를 요청했고, 페트롭스키는 150만 푸드를 요청했다.

답변은 없었다. 6월 12일 몰로토프는 당 간부들에게 '오늘 우리가 기근의 망령과 마주하고 있더라도, 조달 계획은 반드시 완수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6월 18일 스탈린은 카가노비치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크라이나 상황을 '기계적 접근' 탓으로 돌리면서도, 1932년 계획의 완화는 절대 불가하다고 못 박았다. 6월 21일에는 코시오르에게 '콜호즈와 솝호즈의 납부량 감축은 일체 용납하지 않으며 기한 연장도 없다'는 전보를 보냈다. 7월 초 하리코프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당 회의에서 지방 간부들은 모스크바가 정한 조달 계획을 '달성 불가능'하다고 호소했지만, 현장에 파견된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는 '계획을 완화하려는 모든 시도는 반당적, 반볼셰비키적'이라고 규정했다.

가을이 되자 조달 기계는 마을을 짓이겼다. 10월 22일 정치국은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가 이끄는 두 개의 전권위원회를 각각 우크라이나와 북캅카스에 파견했다. 계획을 채우지 못한 마을들은 '흑색 명부(чёрная доска)'에 올려져 상점의 모든 상품 공급이 차단됐고, 식량과 종자까지 전면 몰수당했다. 11월 한 달 우크라이나와 북캅카스에서 '조달 방해'와 '사회주의 재산 절도'(8월 7일 법에 따라 사형 또는 10년형)로 체포된 사람은 5만 명을 넘었고, 12월에는 7만 2천 명으로 급증했다. 드네프로페트롭스크 지역 당 서기 멘델 하타예비치는 몰로토프에게 '국가의 최소한의 필요를 먼저 따지다 보면 곧 씨를 뿌리고 수확할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호소했으나, 몰로토프의 답장은 단호했다: '당신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틀렸으며, 비볼셰비키적이다. 우리 볼셰비키는 콜호즈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국가의 필요를 두 번째, 열 번째 자리에 놓을 수 없다.' 12월 29일에는 콜호즈의 종자 기금마저도 조달 목표에 포함되었다. 빛을 밝힌 드네프르가 있었지만, 그 빛은 같은 강 유역의 마을에 닿지 않았다.

기계를 세우기 전에 사람부터 다시 만들었다

5개년 계획은 공장 굴뚝과 고로만 세운 것이 아니었다. 트랙터를 몰고 터빈을 돌릴 사람이 없으면 철강도 전기도 무용지물이었다. 그래서 계획의 첫 10년 동안 소련은 두 개의 평행한 변혁을 동시에 밀어붙였다. 읽을 줄 모르는 성인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일, 그리고 집 안에만 있던 여성을 공장과 대학으로 불러내는 일이었다.

1928년 9월, 콤소몰은 전연방 문화원정대를 출범시켰다. 이 이름은 ‘문화 전선으로의 진군’이라는 선전어에서 왔지만, 실상은 전국의 마을과 공장 구석으로 젊은 교사들을 들이밀어 글자를 가르치는 대규모 자원봉사 작전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문화 병사’라 불렀고, 1930년 중반까지 그 수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 이들이 가르친 성인은 1,000만 명을 넘었다. 1919년 레닌이 서명한 문맹 퇴치 법령은 1920년대 내내 자금 부족과 교사 부족에 시달렸지만, 5개년 계획이 시작되자 달라졌다. 1930년 전면 의무 초등교육 도입과 함께 문맹 퇴치 사업은 지방 소비에트의 공식 책임이 됐고, 성인 학교의 교육 과정은 330시간으로 체계화됐다. 이전까지는 ‘반(半)문맹’ 상태로 배움을 마친 사람이 많았지만, 이제는 이것마저 퇴치 대상이 됐다. 결과는 극적이었다. 1926년 인구조사에서 9세 이상 문해율은 51%였고, 여성의 경우 37%에 불과했다. 1939년 인구조사에서는 9~49세 문해율이 90%에 육박했다. 이 시기에 약 4,000만 명이 글을 배웠고, 40여 개 민족 언어로 교과서가 발행됐다. 크룹스카야루나차르스키가 닦은 제도적 토대 위에서, 1929년 계몽 인민위원이 된 안드레이 부브노프는 이 거대한 규모 확대의 행정을 떠맡았다.

여성의 공장 진출은 이보다 더 극적인 속도로 진행됐다. 1928년 산업 노동자 중 여성 비율은 28.6%였다. 그러나 제1차 5개년 계획이 개시되자 공장 문은 한꺼번에 열렸다. 웬디 골드먼의 기록보관소 연구에 따르면,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약 400만 명의 여성이 임금 노동에 진입했고, 그중 170만 명이 공업 부문이었다. 1935년 여성은 전체 산업 노동자의 42%를 차지했다. 이는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속도였다.

역설적인 것은 정작 여성 동원을 전담하던 조직이 이 대진입의 문턱에서 해체됐다는 사실이다. 당의 여성부 제노트델은 1919년 창설 이래 문맹 퇴치, 탁아소 건설, 여성 직업 훈련을 조직해 왔으나, 1930년 1월 ‘여성 문제는 이미 해결됐다’는 논리로 폐지됐다. 현장에서는 당과 노조, 공장 관리부 어느 쪽도 여성 노동자의 대규모 유입을 계획적으로 관리하지 못했고, 여성들은 차별과 적대 속에서 스스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

대학 진입은 더욱 의도적인 정책 개입이 필요했다. 1928년 고등교육기관 여학생 비율은 28%였다. 1929년 당 중앙위원회는 기술대학의 노동자학부에 여성 25% 쿼터를 도입했고, 공장에서는 목표 할당제로 여성을 진학시켰다. 노동자학부(라브파크)는 정규 중등교육을 받지 못한 노동자·농민에게 대학 진학의 지름길을 제공하는 예비 교육기관이었고, 여성에게 이 길을 열어준 쿼터 제도는 결정적이었다. 1938년까지 고등교육 여학생 비율은 43%로 올랐다. 같은 기간 여성 취업자 수는 300만 명에서 1,300만 명으로 늘었고, 탁아소·공동식당·공동세탁소가 도시와 공장 지구에 확충됐다. 다만 이 모든 ‘사회화된 가사’는 약속된 규모에 훨씬 못 미쳤고, 시간 조사에 따르면 여성은 전일제 노동 외에 하루 4~6시간의 가사 노동을 더 감당해야 했다. 남성의 하루 1시간과 대비되는 이중 부담은 계획이 끝까지 해결하지 못한 숙제로 남았다.

석탄에서 헌법으로: 기록이 권리가 되기까지

1935년 8월 31일 새벽, 돈바스의 첸트랄나야-이르미노 갱에서 알렉세이 스타하노프는 5시간 45분 동안 102톤의 석탄을 캤다. 한 교대 기준량 7톤의 14배였다. 이 '기록'의 실체는 개인의 초인적 능력이 아니라 노동 조직의 재편에 있었다: 스타하노프는 공기 드릴로 채탄에만 전념하고, 갱목 설치와 운반은 별도의 보조 인력이 맡는 분업 체계였다. 세르고 오르조니키제 중공업 인민위원 자신도 11월 전연맹 스타하노프 대회에서 "102톤은 한 사람이 아니라 한 작업조 전체가 생산한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이 '정직한' 수정은 운동의 동력을 꺾지 못했다. 프라우다는 기록을 세계사적 성취로 보도했고, 한 달 안에 자동차 공장의 알렉산드르 부시긴(포드 공장 숙련공의 생산성을 넘어섰다고 선전되었다), 방직공장의 비노그라도바 자매, 철도의 표트르 크리보노스, 농업의 파샤 안겔리나 등이 각 부문의 '스타하노프 운동가'로 지명되었다. 11월 14일부터 17일까지 크렘린에서 열린 제1차 전연맹 스타하노프 대회에서 스탈린은 "생활이 더 나아졌고, 더 즐거워졌다"는 문구를 운동의 모토로 선언했고, 이는 곧 노래가 되어 전국에 울려 퍼졌다.

운동의 핵심 기제는 생산 규범의 상향이었다. 기록이 특정 작업에서 무엇이 '가능한지'를 입증하면, 그 수치를 전 부문의 새 기준으로 삼는 방식이었다. 1936년 초 실시된 규범 개정으로 다수 노동자의 실질 임금이 압박을 받았다. 성과급 체계에서 초과분에는 높은 누진율이 적용되어 스타하노프 운동가들은 평균 노동자의 몇 배 소득을 올렸지만, 규범을 따라가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은 떨어졌다. 현장에서는 스타하노프 운동가에 대한 구타와 협박이 빈발했고, 관리자들도 기록 지원을 위한 자원 집중이 다른 작업 구역의 자재 부족을 초래하자 소극적 저항에 나섰다. NKVD는 이런 저항을 '사보타주'로 분류해 1935년 12월까지 돈바스에서만 110건의 수사 사건을 개시했다.

이 격렬한 생산 전쟁이 한창이던 1936년, 소련은 새 헌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1935년 2월 제7차 전연맹 소비에트 대회가 스탈린을 위원장으로 하는 31인 헌법위원회를 구성했고, 안드레이 비신스키, 안드레이 즈다노프, 니콜라이 부하린, 카를 라데크 등이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1년간의 작업 끝에 나온 초안은 전국적 '토론'에 회부되었고, 공식 발표에 따르면 62만 회 이상의 집회에서 4200만 명이 참여해 17만 건에 가까운 수정 제안을 냈다고 한다. 실제로는 참석이 강제된 경우가 많았고 당 중앙위원회가 초안을 '대체로' 승인한 뒤에 토론이 시작되었지만, 시민들이 재산 상속권, 종교의 자유, 집단농장 시장 거래권 같은 민감한 조항에 실제 의견을 개진한 드문 창구이기도 했다.

1936년 12월 5일 제8차 임시 소비에트 대회가 채택한 헌법은 이전의 계급적 차별을 폐지했다. 과거 '리셰네츠'(선거권 박탈자)로 분류되었던 옛 착취 계급, 쿨라크, 성직자들도 평등한 시민권을 회복했다. 보통·직접·평등·비밀 선거가 도입되었고, 노동권(제118조), 휴식권(제119조), 노후·질병·노동능력 상실 시 물질적 보장을 받을 권리(제120조), 무상 교육권(제121조), 여성의 완전한 평등권(제122조)이 명문화되었다. 이 권리들은 서구 헌법에는 없는 사회경제적 권리였고, 소련은 이를 '건설된 사회주의'의 증거로 제시했다. 프라우다는 스탈린을 "새 세계의 천재, 시대의 가장 지혜로운 인간, 위대한 공산주의 지도자"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헌법 채택 직후인 1937년부터 대숙청이 시작되어, 헌법 초안을 쓴 부하린, 라데크, 야코블레프, 스테츠키, 추바리 등이 체포되고 처형되었다. 이삭 도이처는 헌법을 "단두대 뒤에 드리운 자유주의적 구호의 베일"이라고 불렀다. 동시에 이 헌법의 사회적 권리 조항들은 이후 수십 년간 소련 시민들이 국가의 자의성에 항의할 때 가장 먼저 인용하는 근거가 되었고, 1977년 헌법으로 계승되었다. 스타하노프의 기록이 증명하려 했던 것, 즉 노동이 더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은 결국 노동하는 자에게 무엇을 돌려주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1936년 헌법은 그 물음에 대한 국가의 답변이었다. 그 답변의 진정성은 곧 역사의 심판대에 서게 되었다.

10년이 빚은 강철, 1941년의 시험대

제2차 5개년 계획이 끝난 1937년, 소련의 공업 지도는 10년 전과 전혀 달랐다. 선철 1,450만 톤, 강철 1,770만 톤, 석탄 1억 2,800만 톤. 1928년의 4배에서 14배에 이르는 숫자들이었다. 그러나 이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산업의 지리였다. 1차 5개년 계획기부터 우랄·서시베리아·카자흐스탄에 투입된 자본은 소련 전체 공업 투자의 3분의 1에 달했고, 제2차 계획은 이 '제2의 석탄·야금 기지' 건설을 의식적 목표로 삼았다. 독일군 폭격기의 항속거리 밖에 있던 이 동부 산업 벨트는 1937년 시점에서는 아직 반쯤 완성된 상태였지만, 그 존재 자체가 소련 방위 계획의 근본 전제로 자리 잡았다.

1938년 시작된 제3차 5개년 계획은 애초 소비재 확대를 내걸었으나, 현실은 달랐다. 국방비가 국가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37년 17%에서 1940년 33%로 두 배 가까이 뛰었다. 1939년 한 해에만 소련은 전차 3,000대와 항공기 1만 대를 생산했고, 이는 당시 미국과 영국의 군비 지출을 합친 것과 맞먹는 규모였다. 계획은 우랄 너머에 중복 공장, 즉 서부의 핵심 군수 공장을 복제한 '그림자 공장'을 건설하는 조항을 포함했고, 1940년 말부터는 모스크바 지역의 공작기계와 숙련 노동자 일부가 이미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이 국경을 넘었다. 개전 사흘 만에 설치된 소개위원회는 '옮길 수 있는 것은 옮기고, 옮길 수 없는 것은 파괴하라'는 명령 아래 가동되었다. 전쟁 전 소련 항공기 공장의 85%, 전차 공장 9곳, 석탄의 70%, 철강의 50%가 배치된 서부 지역을 독일군이 석 달 만에 유린하는 동안, 1,500개가 넘는 대형 공장이 해체되어 동쪽으로 실려 갔다. 하리코프의 T-34 공장은 3만 명의 노동자·가족과 1만 대의 공작기계를 싣고 2,000km 떨어진 니즈니타길로 옮겨졌다. 레닌그라드의 키로프 공장은 통째로 첼랴빈스크에 도착했고, 노동자들은 얼어붙은 땅 위에서 56일 만에 18개 작업장을 재가동했다. 이 도시는 '탱코그라드', 세계 최대 전차 공장이 되었다.

생산의 역전은 1942년에 나타났다. 1941년 하반기 우랄 지역의 전차 생산이 4,177대였던 것이, 1942년 상반기에는 11,021대로 뛰었다. 1942년 한 해 소련의 전차 생산량 약 24,300대는 같은 기간 독일의 6,200대를 압도했다. 항공기에서도, 스베르들롭스크의 제18공장 하나가 전쟁 기간 15,000대의 일류신 전투기를 생산해 독일 전체 항공기 생산을 웃돌았다. 종전까지 소련은 전차·자주포 10만 대, 항공기 8만 2천 대, 각종 포 32만 4천 문을 쏟아냈다.

이 역전은 즉흥적 기적이 아니었다. 1930년대에 우랄 너머에 건설된 발전소, 철도, 제철소, 그리고 그곳에서 훈련된 수십만의 기술자와 숙련 노동자. 5개년 계획이 남긴 이 유산이 있었기에, 서쪽에서 뜯어 온 공장들은 맨땅이 아니라 기존 전력망과 철로와 주조 공장에 접속될 수 있었다. 마그니토고르스크의 강철은 첼랴빈스크의 전차가 되었고, 드네프로스트로이에서 배운 기술은 시베리아 수력 발전소의 터빈을 돌렸다. 1941년의 시험은 10년의 공업화가 없었다면 통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대가는 이미 치러져 있었고, 그 토대 위에서 전쟁의 승패가 갈렸다.

무엇이 해결됐고, 무엇은 아직도 논쟁 속인가

5개년 계획이 소련을 농업국에서 산업국으로 바꿨다는 사실 자체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1928년 선철 330만 톤이 1937년 1450만 톤이 되고, 트랙터·자동차·항공기 산업이 통째로 생겨났으며, 1926년 57%였던 문해율이 1939년 87%로 올랐다는 숫자는 어떤 학파도 부정하지 않는다. 1941년 독일의 침공 이후 우랄과 시베리아의 공장들이 감당한 역할 역시, 이 10년이 없었다면 소련이 나치 국방군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연구자들의 견해는 수렴한다.

갈등은 '얼마의 대가로, 그리고 다른 길은 없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 질문은 냉전기의 '전체주의 학파'와 1970–80년대의 '수정주의' 사이의 대립을 거쳐, 1991년 기록보관소 개방 이후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전체주의 학파의 대표적 저작인 로버트 콘퀘스트의 『슬픔의 수확』(1986)은 1932–1933년 기근을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민족을 겨냥해 의도적으로 자행한 제노사이드로 그렸다. 수정주의자들은 여기에 맞서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강조하며, 농민의 저항과 사회적 혼란, 지방 간부들의 자의적 집행 같은 현장의 동학이 정책 결과를 결정했다고 주장했다.

기록보관소 개방은 이 논쟁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로버트 데이비스와 스티븐 휘트크로프트는 방대한 중앙·지방 기록에 기초해 2004년 『기아의 세월』을 출간했고, 소련 전역의 초과 사망을 약 550만에서 650만 명으로 추산했다. 그러나 그들의 결론은 단순하지 않았다: 기근을 계획된 학살로 본 콘퀘스트의 주장을 지지할 문서적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기록들은 지도부가 과도한 조달 목표를 고수하다가 1933년 봄에야 뒤늦고 불충분한 구호로 대응했음을 보여 준다. 콘퀘스트 자신도 이 책을 읽은 뒤 기근이 의도적이지 않았다고 입장을 바꿨다.

로버트 앨런은 2003년 『농장에서 공장으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에 따르면 1928년에서 1937년 사이 1인당 소비는 약 30% 증가했고, 소련의 공업화는 20세기 개발도상국 중 가장 성공적인 사례 중 하나였다. 동시에 앨런은 집단화 없는 네프 지속 노선이 실제 역사보다 더 나은 결과를 냈으리라는 반사실적 시뮬레이션을 제시했다. 반면 세르게이 구리예프를 비롯한 경제학자들은 2017년 신고전파 성장 모형에 기초한 연구에서, 스탈린식 공업화가 노동력을 농업에서 공업으로 대규모 이동시켰음에도 생산성 자체를 크게 개선하지는 못해 차르 시대의 추세선을 약간 웃도는 정도였다고 평가했다.

오늘날 연구자들 사이에서 가장 첨예하게 남은 쟁점은 세 가지다. 첫째, 기근이 민족적 제노사이드였는가 하는 문제는 학문적으로는 대체로 부정되는 쪽으로 기울었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둘째, 소비자 후생이 실제로 개선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앨런의 낙관적 추계와 휘트크로프트의 보수적 추계 사이에서 결론이 나지 않았다. 셋째, 5개년 계획을 낳은 볼셰비키의 발전 모형이 당시의 다른 농업국에 적용 가능한 일반적 교훈을 가졌는지, 아니면 소련의 특수한 조건과 무제한적 강제에 의존한 예외적 사례였는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이 마지막 질문은 오늘날에도 개발경제학의 오래된 화두로 살아 있다.

결과

1937년까지 소련의 공업 생산은 몇 배로 늘었고, 우랄과 시베리아에 새로운 산업 기지가 세워졌으며, 보편 교육과 보건 체계의 골격이 갖추어졌다. 기록보관소 연구는 집단화와 기근의 대가를 숨김없이 보여 준다. 동시에 이 10년이 만든 산업적 토대는 1941년 이후 소련이 국방산업을 동부로 소개하고 독일보다 많은 전차와 항공기를 생산하며 나치 국방군을 꺾는 물질적 기반이 되었다.

연표

  1. 1928.01
    곡물 조달 위기와 시베리아 출장

    1927년 말 국가 곡물 조달량이 급감하자 스탈린은 1928년 1월 시베리아로 직접 내려가 형법 제107조를 동원한 비상 징발을 지시했다. 이른바 ‘우랄-시베리아 방식’은 네프의 시장 관계가 끝나 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2. 1929.04
    제1차 5개년 계획 채택

    제16차 당협의회와 소비에트 대회가 5개년 계획을 승인했고, 계획은 1928년 10월로 소급 적용됐다. 중공업 우선의 초고속 공업화가 국가의 공식 노선이 되었다.

  3. 1929.11.07
    ‘대전환의 해’

    혁명 12주년에 발표된 스탈린의 프라우다 논설은 농업 집단화와 공업화의 전면 가속을 선언했다. 이해 가을부터 전면 집단화 운동이 곡창지대를 휩쓸기 시작했다.

  4. 1930.01.30
    전면 집단화와 탈쿨라크화

    정치국은 전면 집단화 지구에서 ‘계급으로서의 쿨라크 청산’을 결정했다. 1930–1931년에 약 180만 명이 특별이주민으로 북부와 시베리아 등지에 강제 이주됐고, 이 과정의 폭력과 혼란은 기록보관소 문서에 상세히 남아 있다.

  5. 1930.03.02
    ‘성공에 취하여’

    스탈린은 프라우다 논설에서 집단화의 과열과 강압을 지방 간부의 탓으로 돌리며 시정을 지시했고, 수백만 농가가 일시적으로 콜호스에서 탈퇴했다. 그러나 그해 가을부터 집단화는 다시 추진되어 1937년에는 농가의 90% 이상이 콜호스에 속하게 됐다.

  6. 1932.02.01
    마그니토고르스크의 첫 선철

    우랄의 초원에 맨손으로 세워진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의 첫 고로가 선철을 쏟아냈다. 수만 명의 노동자가 천막과 흙집에서 겨울을 나며 세계 최대급 철강 도시를 건설했고, 이 현장은 새 문명을 짓는다는 열망과 극심한 결핍이 공존한 대건설의 상징이 되었다.

  7. 1932.10.10
    드네프로스트로이 발전소 가동

    드네프르강의 드네프로스트로이(드네프로게스) 수력발전소가 가동을 시작했다. 당시 유럽 최대의 발전소로, 레닌의 고엘로 전력화 구상을 잇는 공업화의 상징이었다.

  8. 1932–1933
    곡창지대의 기근

    과도한 곡물 조달, 집단화가 초래한 농업 혼란, 연이은 흉작이 겹치면서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볼가, 북캅카스 등 곡창지대 전역에서 기근이 발생했다. 기록보관소에 근거한 데이비스와 휘트크로프트의 연구는 소련 전역의 초과 사망을 약 550만에서 650만 명으로 추산하며, 기근을 계획된 학살이 아니라 조달 우선 정책과 흉작, 지도부의 뒤늦고 불충분한 대응이 결합된 결과로 설명한다. 1933년 봄 정부는 종자와 식량 대여로 대응했으나 재난의 규모에 비해 늦고 부족했다.

  9. 1928–1939
    리크베즈, 문맹과의 전쟁

    문화 원정대와 야학, 성인 학교가 전국의 마을과 공장으로 퍼져 나갔다. 1926년 인구조사에서 약 57%였던 문해율은 1939년 인구조사에서 87%를 넘어섰고, 무상 보편 교육과 보건 체계가 같은 시기에 뼈대를 갖추었다.

  10. 1928–1937
    공장과 대학으로 간 여성들

    공업화는 여성 노동력을 대규모로 산업과 교육으로 불러들였다. 여성 취업자는 1928년 약 300만 명에서 1940년 1300만 명 이상으로 늘었고, 탁아소와 공동식당이 확충되는 가운데 여성 기사, 의사, 교사가 대량으로 배출됐다.

  11. 1935.08.31
    스타하노프의 교대 근무

    돈바스의 광부 알렉세이 스타하노프가 한 교대에 기준량의 14배인 102톤의 석탄을 캤다. 노동 조직의 재편과 결합된 이 기록은 전국적인 스타하노프 운동으로 번져 생산성 경쟁과 노동 영웅의 문화를 낳았다.

  12. 1936.12.05
    1936년 소련 헌법

    제8차 소비에트 대회가 새 헌법을 채택했다. 보통·직접·평등 선거와 함께 노동권, 휴식권, 교육권, 의료를 포함한 사회적 권리를 명문화하여, 건설된 사회주의의 사회적 성취를 법의 언어로 선언했다.

  13. 1937
    제2차 5개년 계획의 결산

    1937년까지 선철 생산은 1928년의 330만 톤에서 1450만 톤으로, 석탄은 3600만 톤에서 1억 2800만 톤으로 늘었고, 트랙터·자동차·항공기·공작기계 등 이전에 없던 산업 부문이 통째로 만들어졌다. 소련은 한 세대 안에 공업 생산 기준 유럽 1위, 세계 2위권의 산업국이 되었다.

  14. 1941.06
    1941년의 시험대

    독일의 침공이 시작되자 5개년 계획이 세운 우랄과 시베리아의 산업 기지가 결정적 의미를 드러냈다. 1941년 하반기에만 1500개가 넘는 공장이 동부로 소개되어 기존 기지에 접속됐고, 소련은 1942년부터 독일보다 많은 전차와 항공기를 생산했다. 10년의 공업화가 없었다면 이 전쟁의 물질적 토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관련 인물 153명

주도 · 집행44

조달 전권위원라자르 카가노비치1893–1991

1932년 북캅카스 등지에 파견된 전권위원회를 이끌며 곡물 조달을 강제하고 저항하는 마을에 제재를 가했다.

우크라이나 제1서기스타니스와프 코시오르1889–1939

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로 집단화와 곡물 조달의 현지 집행을 책임졌으며, 기근이 가장 참혹했던 시기의 공화국 최고 책임자였다.

우크라이나 제2서기파벨 포스티셰프1887–1939

1933년 초 모스크바의 전권을 안고 우크라이나에 파견되어 조달 집행과 당 조직 정비를 지휘했다.

벨로모르 건설 책임자라자리 코간1889–1939

굴라크의 초대 수장으로 1931년부터 백해-발트 운하 건설을 지휘했다. 약 십칠만 명의 죄수가 이 년이 못 되어 227킬로미터 수로를 뚫었고 사망자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 강제노동으로 기반시설을 지을 수 있음을 보여 주려 한 체제의 전시 사업이었다.

굴라크를 경제의 도구로마트베이 베르만1898–1939

1932년부터 1937년까지 굴라크를 이끌며 수용소 체계를 교정노동 실험에서 소비에트 경제의 핵심 도구로 확장했고, 백해-발트 운하에 이어 모스크바-볼가 운하를 죄수 노동으로 건설했다.

배급을 생산량에 묶은 행정가나프탈리 프렌켈1883–1960

솔로프키의 죄수에서 행정가가 된 뒤 벨로모르 공사 책임자를 거쳐 1937년부터 NKVD 철도건설총국 전체를 이끌었다. 죄수의 배급을 생산량에 연동한 체계와 결부되는 인물로, 약한 수감자부터 죽어 나갔다.

「개조」 선전의 연출자세묜 피린1898–1937

모스크바-볼가 운하를 파던 드미트라크 수용소를 「개조」 선전의 전시장으로 만들었고, 1934년 고리키와 함께 운하를 찬양한 문집 『벨로모르』를 공동 편집했다. 드미트라크에서 그는 생산성이 낮다고 판정된 죄수의 배급을 깎았다.

카자흐스탄 '소(小) 10월'의 집행자필리프 골로쇼킨1876–1941

1925년부터 1933년까지 카자흐스탄 당 제1서기로 재임하며 '소 10월' 기치 아래 바이(бай) 재산 몰수, 유목민 강제 정착화, 급진적 집단화를 추진했다. 그의 정책은 1932~1933년 카자흐 기근의 주요 원인이었으며, 이로 인해 15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십만 명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탈출했다.

집단화 강제 집행안드레이 안드레예프1895–1971

시베리아 집단화 및 쿨라크 숙청 집행로베르트 에이헤1890–1940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프세볼로트 발리츠키1892–1937

대숙청기 처형 집행자바실리 블로힌1895–1955

그루지야 NKVD 차석보그단 코불로프1904–1953

벨라루스 내무인민위원보리스 베르만1901–1939

달스트로이 총책임자에두아르트 베르진1894–1938

OGPU 비밀작전총국장예핌 예브도키모프1891–1940

내무인민위원 제1부관미하일 프리놉스키1898–1940

OGPU 부의장게오르기 프로코피예프1895–1937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세르고 고글리제1901–1953

북캅카스 NKVD 국장이즈라일 다긴1895–1940

글라블리트 책임자파벨 레베데프-폴랸스키1881–1948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이즈라일 레플렙스키1896–1938

NKVD 인사국장미하일 리트빈1892–1938

극동 NKVD 국장겐리흐 류시코프1900–1945

중앙통제위원회 위원마트베이 시키랴토프1883–1954

내무 제1부인민위원브세볼로드 메르쿨로프1895–1953

중앙통제위원회 위원미하일 블라디미르스키1874–1951

비밀정치국장게오르기 몰차노프1897–1937

NKVD 트로이카 위원니콜라이 오르가노프1901–1982

GUGB 방첩부장니콜라이 니콜라예프-주리드1897–1940

모스크바주 NKVD 관리국장스타니슬라프 레덴스1892–1940

NKVD 해외공작 책임자세르게이 시피겔글라스1897–1940

벨로모르스트로이 수석기사세르게이 주크1892–1957

NKVD 트로이카 위원샬바 체레텔리1894–1955

대외정보국장아브람 슬루츠키1898–1938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알렉산드르 우스펜스키1902–1940

NKVD 부인민위원바실리 체르니셰프1896–1952

최고재판소 부의장바실리 울리히1889–1951

NKVD 내무인민위원겐리흐 야고다1891–1938

내무인민위원니콜라이 예조프1895–1940

레닌그라드 NKVD 국장레오니트 자콥스키1894–1938

NKVD 특별부서잘만 파소프1905–1940

NKVD 행정경제국장세묜 주콥스키1896–1940

NKVD 심문관지노비 우샤코프1895–1940

지도부15

대전환의 지도자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

집단화와 초고속 공업화 노선을 최종 결정하고 두 차례의 5개년 계획 전 과정을 지휘했다.

인민위원회 의장뱌체슬라프 몰로토프1890–1986

1930년부터 정부 수반으로 계획 집행을 총괄했고, 1932년 우크라이나 곡물 조달 위원회를 이끌었다.

계획의 설계자발레리안 쿠이비셰프1888–1935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과 고스플란 의장으로 5개년 계획의 목표 수치를 입안하고 조정했다.

중공업 인민위원세르고 오르조니키제1886–1937

중공업 인민위원으로 마그니토고르스크를 비롯한 대건설 현장을 지휘하며 소련 중공업 체계를 세웠다.

재무인민위원그리고리 그린코1890–1938

1930년부터 1937년까지 소련 재무인민위원으로 제1·2차 5개년계획의 투자 배분, 재정 동원, 통화 발행을 관장하며 공업화의 재정적 기반을 구축했다.

우즈베크 공산당 제1서기 · 집단화와 목화 단작의 현지 총괄아크말 이크라모프1898–1938

1929년부터 1937년까지 우즈베크 공산당 제1서기로 강제 집단화를 주도하고, 우즈베키스탄을 소련의 주요 목화 공급지로 전환하는 결정을 집행했다. 제1·2차 5개년 계획 기간 내내 공화국을 목화 단작 경제로 재편했으며, 1935년 이 공로로 레닌 훈장을 받았다.

러시아 공화국 수반다닐 술리모프1890–1937

모스크바 당 제1서기 · 지하철 건설니키타 흐루쇼프1894–1971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세르게이 키로프1886–1934

농업인민위원미하일 체르노프1891–1938

중공업 부인민위원미하일 카가노비치1888–1941

교통인민위원얀 루주타크1887–1938

스베르들롭스크 주당 제1서기바실리 안드리아노프1902–1978

아제르바이잔 당 제1서기블라디미르 폴론스키1893–1937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안드레이 즈다노프1896–1948

참여79

공급 인민위원아나스타스 미코얀1895–1978

식량공업과 공급을 맡은 인민위원으로 조달, 배급, 식품산업 건설을 운영했다.

농업 인민위원야코프 야코블레프1896–1938

농업 인민위원으로 전면 집단화 정책의 실무 입안과 콜호스 제도 설계를 맡았다.

공업 관리자게오르기 퍄타코프1890–1937

중공업 인민위원부 제1부위원으로 신규 공장 건설과 기술 도입 사업을 관리했다.

고스플란 초대 의장글렙 크르지자놉스키1872–1959

고엘로 전력화 계획의 설계자이자 고스플란 초대 의장으로 5개년 계획 작업의 기초를 놓았다.

문맹 퇴치 조직자나데즈다 크룹스카야1869–1939

교육 인민위원부에서 성인 교육과 문맹 퇴치 운동의 조직을 이끌었다.

계몽 인민위원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1875–1933

1929년까지 교육 인민위원으로 재직하며 리크베즈와 보편 교육 체계의 기초를 놓았다.

일반계획 모형 설계자그리고리 펠트만1884–1958

1928년 고스플란 장기계획부장으로서 자본재·소비재 2부문 성장 모형을 정식화했고, 이 모형은 소비에트 일반계획(1930–45)의 작업 가설로 채택되어 5개년 계획 수립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농업 5개년 계획의 설계자이자 비판자니콜라이 콘드라티예프1892–1938

농업인민위원부와 고스플란에서 최초의 농업 5개년 계획(1923–1928) 작성을 주도했으나, 1927년 『인민경제 발전 계획에 관한 비판적 노트』에서 1차 5개년 계획의 불균형을 지적하고 식량 부족을 예측했다. 이 비판으로 '콘드라티예프시나'라는 낙인이 찍혀 1928년 해임되고 1930년 체포되었다.

스타하노프 운동의 상징적 발단자알렉세이 스타하노프1906–1977

1935년 8월 31일, 노동 분업을 재편성하여 5시간 45분 만에 석탄 102톤(기준치의 14배)을 채굴했다. 이 기록은 즉시 전 연방적 스타하노프 운동으로 증폭되어 제2차 5개년 계획의 상징적인 대중 생산성 캠페인이 되었고, 타임지 표지를 장식하며 소비에트 산업문화의 국제적 아이콘이 되었다.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 콤비나트 소장아브라아미 자베냐긴1901–1956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제1차 5개년 계획의 최대 상징인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 콤비나트의 소장을 맡아, 용광로 가동과 완전한 제철 사이클 구축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계획 경제학자스타니슬라프 스트루밀린1877–1974

5개년계획의 성장 목표를 숫자로 설계한 고스플란 경제학자였다.

통제숫자의 설계자블라디미르 그로만1874–1940

고스플란 초기의 통제숫자와 균형법을 설계한 멘셰비키 출신 통계학자였다.

최고경제회의 초대 의장니콜라이 오신스키1887–1938

최고경제회의(VSNKh)를 처음 이끈 경제 행정가로 계획 논쟁에 참여했다.

금속공업 관료이반 테보샨1902–1958

스탈린 공업화의 금속공업을 맡은 생산 관료였다.

여성 산업노동 동원의 조직자알렉산드라 아르튜히나1889–1969

제노트델(여성노동부)을 이끌며 여성의 공장·대학 진출을 추진했고, 1927년 국제보고서에서 여성 노동을 덜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는 편견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1930년 1월 제노트델 해체와 함께 그 기능은 일반 당·노조 기구로 이관되었다.

노동 생산성 훈련알렉세이 가스테프1882–1939

문맹 퇴치 주도안드레이 부브노프1884–1938

5개년 계획 초안 작성 참여레오니트 가톱스키1903–1997

가속 공업화 청사진 제공레오니트 삽소비치?–1938

제2차 5개년 계획 지표 관리발레리 메즐라우크1893–1938

생산성 운동 촉발 (이조토프 운동)니키타 이조토프1902–1951

보건 체계 구축니콜라이 세마슈코1874–1949

우크라이나 공업화·집단화 행정 책임블라스 추바리1891–1939

5개년 계획의 다큐멘터리 기록자지가 베르토프1896–1954

1930년 돈바스의 산업화 현장을 담은 소련 최초의 사운드 다큐멘터리 〈열광〉을 제작했고, 1934년에는 집단화와 공업화로 변모한 소비에트 연방을 찬양한 〈레닌에 관한 세 편의 노래〉를 발표했다. 그의 카메라는 5개년 계획이 만들어낸 새로운 산업 풍경과 노동의 리듬을 영화적 언어로 번역했다.

북극해 항로 총국장, 북극 개척의 상징오토 슈미트1891–1956

1932년 시비랴코프호로 북극해 항로 최초 단일 계절 통과를 성공시킨 직후 신설된 북극해 항로 총국(Glavsevmorput)의 초대 국장으로 임명되어, 제2차 5개년 계획 기간(1933–1937) 동안 2억 5천만 루블의 예산으로 북극 연안의 항만·기상·무선·과학 기지를 통합 구축했다. 1934년 첼류스킨호 구조와 1937년 표류관측소 '북극-1' 설립은 소비에트 공업화의 선전적 성취로 전국에 선전되었다.

ZIS 디렉터, 첫 소련 컨베이어 도입이반 리하초프1896–1956

1926년부터 AMO(후일 ZIS) 디렉터로 재임하며 제1·2차 5개년 계획 기간 내내 소련 자동차 대량생산 체제를 구축했다. 1931년 소련 최초의 컨베이어 조립 라인을 가동했고, 공장을 유럽 최대 자동차 생산기지로 키웠다.

식품공업 부인민위원알렉세이 바다예프1883–1951

문화선전부장알렉세이 스테츠키1896–1938

모스크바 운하 건설 기술자알렉산드르 코마롭스키1906–1973

전차 설계 기사알렉산드르 모로조프1904–1979

항공기 설계국 창설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항공기 설계자)1906–1989

탄광 기사장알렉산드르 자샤트코1910–1963

항공기 설계안드레이 투폴레프1888–1972

노동코뮌 지도자안톤 마카렌코1888–1939

대외무역인민위원아르카디 로젠골츠1889–1938

그루지야 당 제1서기라브렌티 베리야1899–1953

영화산업 총괄보리스 슈먀츠키1886–1938

고스플란 자본건설부문장겐나디 스미르노프1903–1938

아르메니아 당 제1서기그리고리 아루티노프1900–1957

보건인민위원그리고리 카민스키1895–1938

지역당 제1서기이오시프 바레이키스1894–1938

공장 기술자이사크 잘츠만1905–1988

쿠즈네츠크 제철 수석 엔지니어이반 바르딘1883–1960

TSUNKHU 국장이반 크라발1897–1937

도네츠크 주당 간부레오니트 멜니코프1906–1981

고스방크 총재레프 마랴신1894–1938

T-34 전차 설계미하일 코시킨1898–1940

중공업인민위원부 제1부인민위원미하일 페르부힌1904–1978

아제르바이잔 당 제1서기미르 자파르 바기로프1895–1956

국영농장인민위원모이세이 칼마노비치1888–1937

중공업 부인민위원모이세이 루히모비치1889–1938

체신인민위원니콜라이 안티포프1894–1938

재무인민위원니콜라이 브류하노프1878–1938

중전차 설계자니콜라이 두호프1904–1964

재무인민위원니콜라이 밀류틴1889–1942

전투기 설계자니콜라이 폴리카르포프1892–1944

국영농장 정치부장니콜라이 샤탈린1904–1984

식물재배연구소 소장니콜라이 바빌로프1887–1943

항공기 설계자파벨 수호이1895–1975

식품공업 부인민위원폴리나 젬추지나1897–1970

중공업인민위원부 건설총국장세묜 긴즈부르크1897–1993

육종연구소 소장트로핌 리센코1898–1976

화기 설계자바실리 데그탸료프1880–1949

포병 설계자바실리 그라빈1900–1980

고스플란 통계바실리 넴치노프1894–1964

방위산업 총국장바실리 예멜랴노프1901–1988

수감 중 항공기 설계블라디미르 페틀랴코프1891–1942

고스플란 부의장야코프 차다예프1904–1985

산업 계획 경제학자옙세이 리베르만1897–1981

고스플란 간부유리 라린 (미하일 잘마노비치 루리예)1882–1932

전차 설계자조제프 코틴1908–1979

산업소설의 개척자표도르 글라드코프1883–1958

『시멘트』(1925)로 소비에트 산업 재건 소설의 장르를 열었고, 『에네르기야』(1932~38)에서는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건설을 그렸다.

전시 고스플란 의장니콜라이 보즈네센스키1903–1950

1942년부터 고스플란 의장으로 전시 생산 계획과 산업 소개의 착지를 총괄했으며, 5개년 계획이 구축한 동부 산업 기지 위에서 군수 생산 체제를 운영했다.

전차공업 인민위원뱌체슬라프 말리셰프1902–1957

1941년 9월 신설된 전차공업 인민위원으로 T-34 생산 공장의 동부 이전과 재가동을 지휘했으며, 첼랴빈스크에서 세계 최대 전차 공장 '탱코그라드'를 세웠다.

드네프로게스 건설 고문휴 쿠퍼1865–1937

휴 쿠퍼는 드네프로게스의 수석 고문으로서 제너럴 일렉트릭 터빈을 도입하고 건설을 감독했으며, 1932년 9월 다른 미국인 기술자 5명과 함께 노동적기훈장을 받았다.

드니프로게스 댐 설계 책임자이반 알렉산드로프1875–1936

GOELRO 수석 엔지니어이자 드니프로게스 댐 설계를 주도했고, 이후 러시아 계획위원장이 되었다.

여성 트랙터 운전수 대표파샤 안겔리나1912–1959

1935년 전연맹 스타하노프 대회에서 발언하여 여성 노동의 상징이 되었다.

스타하노프 운동의 상징적 대장장이알렉산드르 부시긴1907–1985

고리키 자동차 공장에서 포드 공장의 생산성을 넘어선 성과를 냈다.

철도 부문 스타하노프 운동의 선구자표트르 크리보노스1910–1980

1935년 7월, 스타하노프보다 두 달 앞서 운전 기록을 세워 운동의 철도 확산을 이끌었다.

반대 · 저항9

우파 반대파 지도자니콜라이 부하린1888–1938

네프의 지속과 점진적 공업화를 주장하며 강제 집단화 노선에 반대하다 1929년 지도부에서 밀려났다.

정부 수반, 반대자알렉세이 리코프1881–1938

인민위원회 의장으로서 초고속 노선의 무리함을 경고하다 1930년 해임됐다.

노조 지도자, 반대자미하일 톰스키1880–1936

노동조합 지도자로서 부하린, 리코프와 함께 강행 노선에 반대하다 1929년 노조 지도부에서 물러났다.

농민경제학파의 공동 지도자, 협동조합적 대안의 주창자알렉산드르 차야노프1888–1937

콘드라티예프와 함께 조직-생산학파를 이끌며 협동조합에 기초한 점진적 농업 발전을 주장했다. 1929년 12월 마르크스주의 농업학자 회의에서 스탈린이 '차야노프시나'를 제국주의의 대리인으로 공개 비난했고, 1930년 7월 조작된 '노동농민당'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우파 반대파의 조직적 중추니콜라이 우글라노프1886–1937

모스크바 당 제1서기로서 우파 반대파에 제도적 기반을 제공했고, 1928년 곡물 위기에서 비상조치에 반대하며 부하린·리코프와 함께 초고속 공업화와 강제 집단화 노선에 맞섰다.

시르초프-로미나제 반대파의 공동 지도자세르게이 시르초프1893–1937

RSFSR 인민위원회 의장이자 정치국 후보위원으로서 강제 집단화의 참상을 목격하고, 1930년 로미나제와 함께 '무언가 해야 한다'는 제목의 전당적 서한을 통해 스탈린의 권력 집중과 집단화 속도를 공개 비판했다. 좌익과 우익 반대파가 모두 패배한 후 지도부 내부에서 조직된 최초의 반대파였으며, 1930년 11월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류틴 강령」의 저자, 우파 반대파마르테먄 류틴1890–1937

1932년 '스탈린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위기'에서 강제 집단화와 초고속 공업화를 '모험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며 스탈린 해임과 당내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했다. 당내 마지막 조직적 반스탈린 저항으로 평가된다.

시르초프-로미나제 반대파의 공동 지도자비사리온 로미나제 (베소)1897–1935

1930년 제16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와 권력 집중을 공개 비판한 후, RSFSR 인민위원회 의장 시르초프와 함께 '좌우 블록'을 결성했다. 이는 좌익과 우익 반대파가 모두 패배한 이후 당 기구 내부에서 조직된 최초의 반대파였으며, 1930년 12월 중앙위원에서 해임되었다. 1933년 마그니토고르스크 당서기로 좌천되어 제1차 5개년 계획의 최대 상징인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 콤비나트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민족공산주의 저항미콜라 스크리프니크1872–1933

우크라이나화를 설계했으나 집단화기 압박 속에 1933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목격 · 증언6

증언자미하일 숄로호프1905–1984

1933년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돈 지역 곡물 조달의 폭력적 실태를 고발했고, 스탈린은 일부 구호를 승인하면서도 조달 노선을 옹호했다.

문학적 증언자안드레이 플라토노프1899–1951

소설 「코틀로반」에서 대전환기의 고통과 유토피아적 열망을 함께 기록했다.

소련 곡물 통계와 초과 사망을 재구성한 경제사가스티븐 G. 휘트크로프트1947–

휘트크로프트는 소련 곡물 통계와 초과 사망에 관한 기록보관소 연구로 기근이 집단학살이 아니라 정책 실패의 결과라는 수정주의적 해석의 근거를 마련했다.

산업화 성공론의 대표적 경제사학자로버트 앨런1947–

그는 2003년 저서 《농장에서 공장으로》에서 소련 산업화를 20세기 가장 성공적인 개발 사례 중 하나로 평가하고 1928년부터 1937년까지 1인당 소비가 약 30% 증가했다고 주장했다.

기근 사망자 재평가의 공동 저자로버트 W. 데이비스1925–2021

휘트크로프트와 함께 소련 기록을 분석해 기근 사망자를 550만~650만 명으로 확정했으며, 대량 기아가 계획된 집단학살이 아니라 조달 우선 정책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지역당 제1서기멘델 하타예비치1893–1937

1932년 11월 콜호스 비축 곡물을 압수하면 '곧 씨 뿌리고 수확할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몰로토프에게 경고했지만, 몰로토프는 국가의 필요를 앞세워야 한다고 답했다.

관련 용어

출처: R. W. Davies and Stephen G. Wheatcroft, The Years of Hunger: Soviet Agriculture, 1931–1933 (Palgrave Macmillan, 2004)Stephen Kotkin, Magnetic Mountain: Stalinism as a Civilizati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5)Sheila Fitzpatrick, Stalin's Peasants: Resistance and Survival in the Russian Village after Collectiviz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1994)Lynne Viola, The Unknown Gulag: The Lost World of Stalin's Special Settlements (Oxford University Press, 2007)Lewis H. Siegelbaum, Stakhanovism and the Politics of Productivity in the USSR, 1935–1941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자료 6자료 7자료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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