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

미국

145 명

해당 인물

유진 V. 뎁스

Eugene V. Debs
비소련 혁명가 미국 미국 1855–1926 ○ 심장마비 사망

5선 미국 사회당 대통령 후보이자 철도노동자 산업별조합의 선구자

1918년 법정 최후진술에서 "하층 계급이 존재하는 한 나는 그 안에 있고, 범죄자가 존재하는 한 나는 그 일부이며, 감옥에 갇힌 영혼이 있는 한 나는 자유롭지 않다"고 선언했다.

미국 사회주의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로, 산업별 노동조합주의의 선구자였다. 미국철도연합(ARU)을 이끌어 1894년 풀먼 파업을 조직하고 투옥 중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했으며, 미국 사회당(1901)과 IWW(1905) 창립에 참여했다. 다섯 차례 대선에 출마해 1912년 90만 표(6.0%)를 얻었고, 1차 대전 반대 연설로 수감된 1920년에도 91만 표를 득표해 미국 사회주의 선거운동의 정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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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5기관화부형제단(BLF) 가입
  • 1880–1893BLF 사무총장 겸 기관지 편집장
  • 1885인디애나 주의회 의원 (민주당)
  • 1893–1897미국철도연합(ARU) 창립·위원장
  • 1901미국 사회당 공동 창립
  • 1905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창립 멤버
  • 1900–1920사회당 대통령 후보 (5회 출마)
  • 1919–1921애틀랜타 연방교도소 수감

휴 쿠퍼

Hugh Lincoln Cooper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865–1937 ○ 노환으로 사망

세계 최대 댐 기술을 사회주의 건설 현장에 옮긴 미국인 공병 대령

1932년 드네프로스트로이 준공식에서: "이렇게 얻은 미국식 기술 경험이 이 나라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 지렛대가 될 것입니다."

무학으로 댐 공학을 익힌 휴 링컨 쿠퍼는 나이아가라 급류(1907)와 미시시피 키오콕 댐(1913)을 성공시키며 자력으로 미국 최고의 수력 기술자가 되었다. 1926년 소련의 초청으로 드네프로스트로이 건설 수석 컨설턴트를 맡아 GE 터빈을 공급하고 공정을 총지휘, 1932년 유럽 최대 발전소를 예정보다 8개월 앞당겨 완공했다. 같은 해 소련은 쿠퍼와 미국인 기술자 5명에게 노동적기훈장을 수여했는데,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 평생 반공주의자로 남았으나, 그의 댐이 없었다면 1차 5개년 계획의 상징적 성취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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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토론토 발전소(나이아가라 호스슈 급류) 완공
  • 1913미시시피강 키오콕 댐 및 발전소 완공
  • 1914아스완 댐 전력화 사업 컨설턴트(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
  • 1917–1918미 육군 공병대 감독 공병 장교, 대령
  • 1919레이크 줌브로 수력발전소(미네소타) 완공
  • 1924윌슨 댐(앨라배마, 후일 TVA 편입) 완공
  • 1927–1932드네프로스트로이(드네프로게스) 수석 컨설턴트, 소련
  • 1932노동적기훈장 수훈(외국인 최초)

버논 켈로그

Vernon Lyman Kellogg
연구자 미국 미국인 1867–1937 ○ 자연사

과학과 국제구호를 잇고 성인 급식을 확장한 조사관

“부모가 죽도록 내버려 두면서 아이들만 먹이는 것으로 그칠 수 있는가?”

버논 켈로그는 곤충학자이자 과학 행정가로, 스탠퍼드에서 동물학과 곤충 분류를 연구하고 미국 과학 연구의 제도화에 기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허버트 후버의 벨기에 구호 활동을 도운 인연은 그를 전후 국제구호의 현장으로 이끌었다. 1921년 볼가 유역을 직접 시찰한 그는 아동만이 아니라 부모와 성인도 구호해야 한다고 워싱턴에 보고했고, 이는 미국구호행정의 사업 확대를 뒷받침했다. 그의 경력은 전문 과학자가 기근 앞에서 행정과 윤리적 판단의 주체가 된 사례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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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7–1894캔자스에서 성장하고 캔자스대학교·스탠퍼드대학교·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생물학과 곤충학을 공부했다.
  • 1894–1920스탠퍼드대학교 동물학 교수로 재직하며 동물학과를 세우고 곤충 분류와 진화를 연구했다.
  • 1915–1916벨기에 미국구호위원회 책임자로 전쟁 난민과 민간인 구호를 조직했다.
  • 1917–1920구호와 전쟁 경험을 저술하고 후버의 식량·국제구호 활동을 지원했다.
  • 1921년 9월미국구호행정 특수 조사관으로 첫 구호 열차를 타고 볼가 유역을 조사했다.
  • 1921년 말워싱턴에서 후버에게 성인까지 포함하는 구호 확대의 필요성을 보고했다.
  • 1921–1933국가연구위원회 초대 상임 서기로 일하고 과학연구 제도와 대중 과학을 조직했다.

W. E. B. 듀보이스

W. E. B. Du Bois
비소련 혁명가 미국 아프리카계 미국인 1868–1963 ○ 자연사

「자본주의는 스스로 개혁할 수 없다」: 93세에 미국 공산당에 입당한 흑인 해방운동의 아버지

「공산주의는 승리할 것이다. 나는 그 날을 앞당기는 데 일조하고 싶다.」 — 1961년 93세의 나이로 미국 공산당에 제출한 입당 신청서에서

미국의 사회학자, 역사가, 범아프리카주의자이자 20세기 가장 중요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식인이다. NAACP 공동 창립자로서 기관지 『더 크라이시스』를 24년간 편집하며 흑인 민권운동의 방향을 이끌었고, 『흑인의 영혼』과 『미국의 흑인 재건』을 통해 미국 사회학과 역사학의 지형을 바꾸었다. 자본주의를 인종차별의 근본 원인으로 보았으며, 마르크스주의와 범아프리카주의의 결합을 추구했다. 1961년 93세의 나이로 미국 공산당에 입당했고, 콰메 은크루마의 초청으로 가나에 정착해 『아프리카나 백과사전』 편찬에 착수하던 중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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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897윌버포스대·펜실베이니아대 연구원, 『필라델피아 니그로』(1899) 출간
  • 1897–1910애틀랜타대 교수, 『흑인의 영혼』(1903) 출간, 나이아가라 운동 창립(1905)
  • 1910–1934NAACP 공동 창립, 기관지 『더 크라이시스』 편집장; 범아프리카회의 조직
  • 1934–1944애틀랜타대 교수, 『미국의 흑인 재건』(1935) 출간
  • 1944–1948NAACP 특별연구국장; 유엔 창설 회의 참석
  • 1950–1951평화정보센터 의장; 외국대리인등록법 위반 기소, 무죄
  • 1961–1963미국 공산당 입당; 가나로 이주, 『아프리카나 백과사전』 편찬 착수

에마 골드만

Эмма Гольдман
비소련 혁명가 미국 러시아 1869–1940 ○ 망명 중 사망

아나키즘을 국제적 정치운동으로 만든 망명 혁명가

크론시타트 봉기 진압을 목격한 뒤 골드만은 이렇게 썼다. '크론시타트는 나를 볼셰비키에 묶어둔 마지막 실을 끊어놓았다' — 그녀는 1921년 12월 소비에트 러시아를 떠났다.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아나키스트 혁명가, 작가, 연설가. 헤이마켓 사건을 계기로 정치에 눈떠 북미와 유럽에서 아나키즘 정치철학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피임·자유연애·반군국주의를 주제로 수천 명을 끌어모은 연설로 '붉은 에마'라 불렸으며, 1919년 소비에트 러시아로 추방되었다. 크론시타트 반란 진압 이후 볼셰비키의 권위주의를 비판하는 전향적인 목소리를 냈고, 《러시아에서의 환멸》(1923)에 그 경험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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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뉴욕으로 이주, 요한 모스트의 지도 아래 아나키스트 활동 시작
  • 1892버크먼의 프릭 암살 미수 사건 연루, 체포·심문
  • 1893첫 수감 — 유니언스퀘어 연설로 폭동선동죄 1년형
  • 1906아나키스트 잡지 『마더 어스』 창간
  • 1917징병 반대 조직으로 2년 수감
  • 1919소비에트 러시아로 강제 추방 — '소비에트 방주' 편
  • 1923《러시아에서의 환멸》 출간, 볼셰비키 비판
  • 1936스페인 내전에서 아나키스트 혁명 지지 활동

코델 헐

Cordell Hull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인 1871–1955 ○ 자연사

자유무역과 국제기구를 밀어붙인 미국 외교가

1941년 11월 26일, 그는 일본 대사에게 「미일 간 합의의 기초로 제안된 개요」를 전달했다.

코델 헐은 미국의 자유무역과 다자적 국제질서를 설계한 민주당 정치가이자 외교가였다. 그는 1930년대 무역장벽 완화와 선린정책을 추진했지만, 외교정책의 최종 결정권을 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자주 긴장했다. 1941년 일본과의 협상에서 미국의 요구를 정리한 11월 26일 합의안 개요를 전달했으며, 이는 전쟁 직전 외교의 마지막 문서가 되었다. 전후에는 국제연합 창설을 이끈 공로로 1945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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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1897테네시주 하원의원
  • 1907–1921미국 연방 하원의원
  • 1921–1924민주당 전국위원회 의장
  • 1923–1931미국 연방 하원의원
  • 1931–1933테네시주 연방 상원의원
  • 1933–1944미국 국무장관
  • 1945국제연합 샌프란시스코 회의 대표

허버트 C. 후버

Herbert Hoover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874–1964 ○ 병사 · 90세

기근 구제의 거장이자 대공황으로 무너진 미국의 제31대 대통령

「이천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 그들이 어떤 정치를 하든, 먹여야 한다!」 볼셰비키 구제를 두고 공격받자 후버가 남긴 응답이었다.

후버는 광산기사로 막대한 부를 이룬 뒤 두 차례 세계대전의 구호활동으로 명성을 쌓은 인물로, 1929년 미국 제31대 대통령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벨기에 구제위원회와 미국 식량청을 이끌며 수백만 명을 먹여 살렸고, 전후 미국구제청(ARA)을 사적 조직으로 개편해 동유럽과 러시아 구제를 주도했다. 1921년 볼가 기근에 맞서 고리키의 호소에 즉각 응답하고 리가 협정을 직접 주도해 식량 분배의 자율성과 소련의 금 보유분 지출을 관철, 하루 천만 명 이상을 먹였다. 대공황 속 대통령직에서는 고전했으나 은퇴 후에도 트루먼·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개혁위원회를 이끌며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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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4아이오와주 웨스트브랜치의 퀘이커 가정에서 출생
  • 1895스탠퍼드대 졸업, 광산기사로 중국·호주 등에서 부 축적
  • 1914–1919벨기에 구제위원회(CRB) 위원장, 점령지 벨기에에 식량 지원
  • 1917–1919미국 식량청장, '식량 독재자'로 전시 식량 통제
  • 1919–1923미국구제청(ARA) 국장, 동유럽·러시아 구제 주도
  • 1921.08.20리가 협정 조인, 볼가 기근 구제의 자율성·비용 조건 확정
  • 1921–1928상무장관
  • 1929–1933제31대 대통령, 대공황 속 재선 실패

윌리엄 D. 리히

William D. Leahy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875–1959 ○ 자연사 · 84세

얄타 합의의 치명적 모호함을 루스벨트에게 직고한 원수급 비서실장

리히가 루스벨트에게 말했다. '이 합의는 소련이 얄타에서 워싱턴까지 늘여도 기술적으로 위반이 아닙니다.' 루스벨트가 답했다. '나도 아네, 빌.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윌리엄 리히는 미 해군 원수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루스벨트와 트루먼 두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사실상의 첫 합동참모의장이었다. 해군작전부장과 푸에르토리코 총독, 비시 프랑스 대사를 지낸 뒤 1942년 현역으로 복귀해 전쟁 내내 연합국 전략을 조율했다. 1945년 얄타 회담에서 그는 폴란드 합의문을 읽고 루스벨트에게 '소련이 얄타에서 워싱턴까지 늘여도 기술적으로 위반이 아닙니다'라고 말했고, 루스벨트는 '나도 아네, 빌.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라고 답했다. 원자폭탄 투하를 훗날 비판했지만 당시 공개 반대는 하지 않았고, 전후에는 핵 선제사용 전쟁계획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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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5아이오와주 햄프턴에서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아들로 출생
  • 1897해군사관학교 졸업, USS 오리건에서 스페인-미국 전쟁 참전
  • 1927–1931해군 병기국장, 동기생 중 첫 제독 진급
  • 1937–1939해군작전부장, 함대 확장과 전쟁 준비 주도
  • 1939–1940푸에르토리코 총독, 기지 건설과 뉴딜 공공사업 집행
  • 1940–1942비시 프랑스 주재 대사, 페탱 정권의 대독 협력 억제 실패
  • 1942–1949대통령 비서실장 겸 합동참모의장, 얄타·포츠담 회담 배석
  • 1950회고록 『나는 거기에 있었다』 출간

윌리엄 N. 해스켈

William N. Haskell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인 1878–1952 ○ 자연사

기근 한복판의 국제 구호 지휘관

윌리엄 N. 해스켈은 미 육군 장교로서 전후 국제 구호 행정과 군사 지휘를 결합한 인물이었다. 허버트 후버의 임명으로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소련 러시아에서 미국구호행정의 작전을 이끌며, 기근 속 식량·의료품의 대규모 배급을 조직했다. 그의 임무는 볼셰비키 관료의 통제와 협조를 동시에 상대하면서 구호의 속도와 행정적 책임을 조정하는 일이었다. 이후 뉴욕 주방위군과 미국 민방위 조직을 지휘하며 군과 국가 행정에서 긴 경력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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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미 육군사관학교 졸업, 기병 장교
  • 1905육군참모대학 졸업
  • 1906–1907필리핀에서 미군 작전 복무
  • 1916–1917뉴욕 주방위군 제69보병연대 임시 대령
  • 1918–1919미 원정군 포병 복무, 임시 대령 및 공로훈장 수훈
  • 1919–1921ARA 아르메니아 사절단장
  • 1921–1923ARA 소련 러시아 지부장, 러시아 기근 구호 지휘
  • 1926–1940뉴욕 주방위군 사령관, 소장
  • 1944–1945미국 민방위국장

월터 라이먼 브라운

Walter Lyman Brown
외국 정치가 미국인 미국계 1880–1955

구호를 외교 협상으로 바꾼 실무자

1921년 8월 20일 리가 합의문에 미국구호행정의 유럽 담당 이사로 서명했다.

월터 라이먼 브라운은 제1차 세계대전 뒤 미국 구호 행정을 이끈 실무 외교가로, 허버트 후버의 미국구호행정에서 유럽 업무를 맡았다. 1921년 러시아 기근이 심화되자 그는 리가에서 막심 리트비노프와 협상해 미국구호행정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닌 당시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기아 지역에 들어갈 조건을 마련했다. 이 합의는 인도주의적 구호를 표방했지만 미국의 반볼셰비즘과 소비에트 정부의 통제·주권이 맞물린 절충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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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1미국구호행정 유럽 업무 담당
  • 1921.08리가 협정 미국 측 서명자
  • 1921–1923러시아 구호 작전 유럽 조정
  • 1921.12리가 이행 협정 미국 측 서명
  • 1923미국구호행정 러시아 사업 종료 과정 참여

조지 C. 캐틀릿 마셜

George C. Marshall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880–1959 ○ 노환 · 78세

유럽 부흥을 설계하고 미군을 40배로 키운, 육군·국무·국방 3직을 모두 지낸 유일한 미국인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마셜은 1947년 6월 5일, 준비된 원고도 없이 1,200단어의 연설을 통해 '굶주림, 빈곤, 절망, 혼란에 반대하는' 유럽 원조의 청사진을 내놓았다.

마셜은 육군참모총장(1939~45)·국무장관(1947~49)·국방장관(1950~51)을 두루 지낸 유일한 미국인으로, 처칠이 '승리의 조직자'라 부른 연합군 팽창의 총설계자였다. 1947년 6월 5일 하버드대 연설에서 전후 유럽의 경제 붕괴와 소련 팽창에 맞선 대규모 원조 구상을 제안했고, 이 '마셜 플랜'은 4년간 130억 달러로 서유럽 산업 기반과 통화를 안정시키며 냉전기 미국 대외정책의 틀을 재편했다. 국무장관 시절 이스라엘 승인을 두고 트루먼과 정면 충돌했으며, 국방장관으로 복귀해 한국전쟁 중 맥아더 해임을 승인함으로써 민간의 군대 통제 원칙을 재확인했다. 195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군인 출신 수상자는 그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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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0펜실베이니아주 유니언타운에서 석탄·코크스 사업가의 막내로 출생
  • 1902버지니아 군사학교 졸업, 육군 소위 임관 후 필리핀 배치
  •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제1사단 작전참모로 칸티니·뫼즈-아르곤 공세 기획
  • 1939–1945육군참모총장, 미군을 18만9천에서 800만으로 팽창시키고 연합군 전략 총괄
  • 1945.12–1947.01중국 특사, 국민당-공산당 연립정부 중재 실패
  • 1947–1949국무장관, 마셜 플랜 제안 및 NATO 창설 추진
  • 1950–1951국방장관, 한국전쟁 중 맥아더 해임 및 군부 재건
  • 1953노벨평화상 수상

헨리 뵈우커스

Henry Beeuwkes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계 1880–1959 ○ 자연사

기근 현장에서 의료 구호를 조직한 의사

뵈우커스는 기근 구호를 급식소의 수가 아니라 병원과 위생망의 회복으로 기록했다.

헨리 뵈우커스는 미국의 의사이자 공중보건 행정가로, 국제 구호를 임상과 위생의 조직 문제로 다룬 인물이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미국구호행정의 러시아 의료국장으로 일하며 식량 배급과 병행되는 병원 지원, 의약품 공급, 예방접종과 전염병 대응을 조정했다. 그는 이 경험을 1926년 저서에 정리해 기근 구호가 급식소를 넘어 의료·위생 체계의 복구였음을 기록했다. 이후 황열병 연구와 군 의료 행정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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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미 육군 의무대 입대
  •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 전선에서 군의관 복무
  • 1921–1923미국구호행정 러시아 의료국장
  • 1925–1927록펠러재단 서아프리카 황열병 조사단장
  • 1926『러시아 기근의 미국 의료·위생 구호』 출간
  • 1942–1945밸리포지 종합병원 지휘관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880–1964 ○ 자연사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고 합참의 만장일치 반대를 꺾은 유엔군 사령관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할 것은 없다.」 1951년 4월 19일 의회 고별연설에서 한 말.

더글러스 맥아더는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고, 일본 점령을 사실상 통치한 미국의 5성 원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합동참모본부의 만장일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밀어붙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러나 중공군 개입 이후 만주 폭격과 확전을 주장하며 트루먼 행정부와 충돌했고, 1951년 4월 해임되었다. 그의 해임은 민간 통제와 군부의 관계를 둘러싼 냉전기 가장 첨예한 헌정적 논쟁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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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5미국 육군 참모총장
  • 1935–1941필리핀군 원수 겸 군사고문
  • 1941–1945미 극동군 사령관 / 남서태평양방면 연합군 최고사령관
  • 1945–1951연합군 최고사령관, 일본 점령통치
  • 1950–1951유엔군 사령관, 한국전쟁
  • 1952–1964레밍턴 랜드 이사회 의장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880–1966 ○ 노환 · 86세

세계 최대 면화상을 일군 자유무역론자, 유럽 붕괴를 경고한 메모로 마셜 플랜을 촉발한 국무차관

1947년 5월 27일 마셜 국무장관에게 보낸 메모에서 클레이턴은 이렇게 썼다: '즉각적이고 대규모인 미국의 원조 없이는 경제·사회·정치적 붕괴가 유럽을 뒤덮을 것입니다.'

클레이턴은 13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속기사로 출발해 앤더슨·클레이턴 사를 세계 최대 면화 무역회사로 키운 사업가였다. 자유무역을 신봉한 민주당원으로서 1944년 국무부 경제담당 차관보, 1946년 경제담당 차관에 임명되었고, 1947년 5월 전후 유럽의 참상을 목격한 후 조지 마셜에게 보낸 「유럽의 위기」 메모에서 '즉각적이고 대규모인 미국의 원조 없이는 경제·사회·정치적 붕괴가 유럽을 뒤덮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메모는 마셜 플랜 발표의 직접적 촉매가 되었고, 찰스 볼런은 연설문 초안을 쓸 때 클레이턴의 문장을 대거 인용했다. 퇴임 후에도 자유무역과 대서양 동맹을 옹호하며 1961년 크리스천 허터와 애틀랜틱 카운슬을 공동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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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0미시시피주 투펄로 인근 면화 농장에서 출생
  • 1904앤더슨·클레이턴 사 공동 창업,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면화 중개 시작
  • 1916본사를 휴스턴으로 이전, 이후 세계 최대 면화 무역회사로 성장
  • 1918전시산업위원회 면화분배위원으로 제1차 세계대전 정부 봉사
  • 1940–1944재건금융공사·수출입은행·잉여전쟁자산청에서 연이어 근무
  • 1944–1946국무부 경제담당 차관보, 포츠담 회담 경제 고문
  • 1946–1947국무부 경제담당 차관, 「유럽의 위기」 메모로 마셜 플랜 촉발
  • 1961크리스천 허터와 애틀랜틱 카운슬 공동 설립

윌리엄 Z. 제불론 포스터

William Zebulon Foster
비소련 혁명가 미국 미국 1881–1961 ○ 자연사

1919년 대철강파업 지도자에서 미국 공산당의 최장기 지도자로

“노동자의 이익을 진정으로 대변하는 정당은 혁명적 정당뿐이다.” — 『노동자 생활의 페이지들』(1939)

1919년 대철강파업을 지휘한 노동운동 전략가에서 CPUSA 최장기 지도자로 전환했다. 1944년 브라우더의 당 해산에 맞서 당을 재건했고, 『미국 공산당사』 등 마르크스주의 역사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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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미국 사회당 입당
  • 1909IWW 가입, 스포케인 언론자유 투쟁 참가
  • 1912북미신디칼리스트연맹(SLNA) 창립
  • 1917–1918시카고 도축산업 노동자 조직화 — 8시간 노동제 중재
  • 1919대철강파업 지휘 — 25만 노동자 동원
  • 1920노동조합교육연맹(TUEL) 창립
  • 1921코민테른 제3차 대회 참석 후 공산당 입당
  • 1924첫 대선 출마 — 공산당 후보
  • 1929CPUSA 의장 취임, TUUL 창설
  • 1935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간부회원 선출
  • 1944–1945브라우더 당 해산 반대 — CPUSA 재건, 서기장
  • 1948스미스법 기소 — 건강 악화로 재판 연기
  • 1957CPUSA 명예의장 은퇴
  • 1961모스크바 사망 — 붉은광장 국장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882–1945 ○ 뇌출혈 · 63세

대공황과 세계대전의 미국, 얄타에서 마지막 힘을 쥐어짠 4선 대통령

얄타에서 돌아온 루스벨트는 1945년 3월 1일 의회 연설에 앉아서 임했다. 걸을 수 없는 대통령이 평생 숨겨온 장애를 처음으로 공개한 순간이었다.

루스벨트는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관통한 미국의 32대 대통령으로, 4선에 오른 유일한 대통령이다. 뉴딜로 연방정부의 역할을 재정의했고 진주만 공격 이후 연합국을 이끌며 독일 우선 전략을 관철했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그는 소련의 대일 참전과 유엔 창설이라는 두 가지 목표에 외교력을 집중했고 스탈린과의 개인적 관계에 신뢰를 걸었으나, 이미 심부전과 고혈압으로 쇠약해져 있었다. 회담 두 달 뒤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얄타 합의는 유엔을 낳고도 동유럽을 넘겨주었다는 비판 속에 냉전기 내내 논쟁의 중심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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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뉴욕주 하이드파크의 부유한 명문가에서 출생
  • 1913–1920해군 차관보, 제1차 세계대전 중 해군 확장 주도
  • 1921소아마비 진단, 하반신 영구 마비
  • 1929–1932뉴욕 주지사, 대공황 대응 실업구제 정책 선도
  • 1933–1945제32대 대통령, 뉴딜·제2차 세계대전 지휘
  • 1943.11테헤란 회담, 스탈린과 첫 대면
  • 1945.02.04–11얄타 회담, 소련의 대일 참전·유엔 안보리 틀 합의
  • 1945.04.12그루지야주 웜스프링스에서 뇌출혈로 사망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882–1972 ○ 자연사

루스벨트의 '보조 대통령'이자 포츠담 배상안을 설계한 국무장관

번스의 국무장관 취임 선서 직후, 트루먼이 말했다. "지미, 성경에 입 맞춰." 번스가 그러고 나서 성경을 트루먼에게 건네며 말했다. "대통령님도 입 맞추시죠." 트루먼이 그렇게 하자 자리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제임스 F. 번스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민주당 정치인으로, 뉴딜 입법을 주도한 상원의원, 전시 동원을 총괄하며 '보조 대통령'으로 불린 루스벨트의 오른팔,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포츠담 회담에서 독일 배상의 틀을 설계한 인물이다. 포츠담에서 번스는 각 점령국이 자국 점령지역에서 배상을 취하되 소련에는 서방 지역 산업설비의 15%를 식량·원자재와 교환하고 10%를 무상 제공하는 절충안을 몰로토프와 협상해 타결시켰다. 루스벨트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뒤 트루먼과의 관계도 점차 냉각되었으나,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로 당선되어 인종 분리 교육 체제를 고수하며 '분리하되 평등하게' 노선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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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25사우스캐롤라이나주 하원의원
  • 1931–1941사우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
  • 1941–1942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 1942–1943경제안정국 국장
  • 1943–1945전시동원국 국장
  • 1945–1947미국 국무장관
  • 1951–1955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해리 S. 트루먼

Harry S. Truman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884–1972 ○ 자연사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으로 냉전의 미국 틀을 세운 33대 대통령

트루먼의 집무실 책상에는 '책임은 여기서 끝난다(The buck stops here)'라는 문구가 놓여 있었고, 원자폭탄에서 맥아더 해임까지 그는 그대로 살았다.

트루먼은 루스벨트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명령한 미국의 33대 대통령이다. 1947년 3월 '무장 소수파나 외부 압력에 저항하는 자유민을 지원한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했고, 1948년 4월 마셜 플랜에 서명해 서유럽 재건과 소련 봉쇄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 파병을 주도했고 중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해 맥아더를 해임함으로써 민간 통제 원칙을 재확인했다. 퇴임 당시 역대 최저 지지율로 떠났으나 냉전 승리와 함께 '위대에 가까운' 대통령으로 사후 재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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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미주리주 라마에서 농부의 아들로 출생
  •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 전선 포병대 대위로 참전
  • 1935–1945미주리주 상원의원, 트루먼 위원회로 전시 계약 부패 조사
  • 1945.01–04부통령, 루스벨트 사망으로 4월 12일 대통령 승계
  • 1945–1953제33대 대통령, 원자폭탄 투하·트루먼 독트린·마셜 플랜·NATO 창설·한국전쟁
  • 1947.03.12트루먼 독트린 선언, 그리스·터키 군사원조 요청
  • 1948.04.03마셜 플랜(경제협력법) 서명
  • 1951.04.11맥아더 극동사령관 해임

조지 S. 패튼

George Smith Patton Jr.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계 1885–1945 ○ 교통사고 후 자연사

기동전과 기만작전의 공격적 지휘관

1944년 포티튜드 사우스에서 패튼은 실재하지 않는 제1미군집단의 얼굴이 되어 칼레를 향한 위협을 연출했다.

조지 S. 패튼은 기갑부대의 기동성과 공격적 작전 운용을 중시한 미국 육군 장군이었다. 그는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에서 전투 지휘 능력을 보였지만, 병사 폭행과 거친 발언으로 지휘권과 명성에 반복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1944년 포티튜드 사우스에서는 허구의 제1미군집단을 지휘하는 인물로 내세워 독일군이 칼레 방면의 상륙을 믿도록 만들었고, 실제 노르망디 상륙 뒤에도 독일 예비전력을 묶어 두는 데 기여했다. 이후 제3군을 이끌고 프랑스를 가로질러 독일로 진격했으나, 전후에는 반소련 발언과 탈나치화 비판으로 바이에른 군정에서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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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미국 육군 기병 소위
  • 1916판초 비야 원정 참전, 퍼싱 장군 부관
  • 1917–1918프랑스 전차학교 창설·지휘, 제304전차여단 지휘
  • 1942횃불 작전 서부기동부대 지휘, 북아프리카 상륙
  • 1943미 제7군 사령관, 시칠리아 전역 지휘
  • 1944포티튜드 사우스 허구 제1미군집단 사령관
  • 1944–1945미 제3군 사령관, 프랑스·독일 진격
  • 1945바이에른 군정관, 제15군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Chester William Nimitz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계 1885–1966 ○ 자연사

정보와 기동으로 태평양 함대를 재편한 제독

미드웨이에서 일본군의 공격 목표를 확신한 뒤 가용 전력을 방어에 집중했다.

체스터 W. 니미츠는 미국 해군의 잠수함·군수 전문가에서 태평양 전쟁의 연합군 해상 지휘관으로 올라선 제독이다. 1941년 진주만 공습 직후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된 그는 일본군 통신정보를 작전 판단에 결합해 미드웨이에 가용 전력을 집중했고, 과달카날 공세를 승인하며 반격의 지휘 체계를 세웠다. 그의 지휘는 압도적 물자와 정보 우위를 작전 기동으로 전환했지만, 섬 전투와 봉쇄가 낳은 막대한 희생이라는 전쟁의 대가를 지우지는 못했다. 전후에는 해군참모총장으로 감군과 핵추진 잠수함 건설을 함께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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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미 해군사관학교 졸업, 해군 장교로 임관
  • 1917–1918대서양 잠수함군 참모장
  • 1939–1941해군 항해국장
  • 1941–1945미 태평양함대 및 태평양 전구 연합군 총사령관
  • 1942미드웨이 방어 전력 배치와 과달카날 반격 지휘 체계 승인
  • 1944미 해군 최고 계급인 함대원수에 임명
  • 1945–1947미 해군참모총장
  • 1947–1966함대원수로 현역 신분 유지, 해군 자문과 전후 미일 화해 활동

애나 루이즈 스트롱

Anna Louise Strong
비소련 혁명가 미국 미국 1885–1970 ○ 자연사

러시아·중국 혁명을 50년간 현장에서 기록한 미국인 저널리스트, 『모스크바 뉴스』 창간자

「우리는 이 나라 노동이 시도한 가장 거대한 행동에 착수하고 있다 — 그 끝은 아무도 모른다!」 1919년 시애틀 총파업 직전 사설

미국 네브래스카 출신 좌파 저널리스트이자 공산주의자. 시카고대 철학 박사 후 시애틀 총파업(1919)을 취재하며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1921년 소련으로 건너가 1930년 영자신문 『모스크바 뉴스』를 창간했다. 1946년 옌안에서 마오쩌둥을 인터뷰해 '모든 반동파는 종이호랑이'라는 유명한 발언을 기록했고, 1949년 소련에서 첩자 혐의로 추방되었다가 1955년 명예 회복 후 중국에 정착했다. 이후 '외국인 친구'로서 문화대혁명기까지 마오의 중국을 취재하며 30권 이상의 저작을 남겼다. 20세기 공산주의 혁명들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서방에 전한 독보적 증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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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네브래스카주 프렌드에서 진보적 목사 가정의 딸로 출생
  • 1908시카고대 철학 박사 — 「기도의 사회심리학」으로 학위 취득
  • 1916–1918시애틀 교육위원 선출 — IWW 지지·반전 활동으로 리콜
  • 1919『시애틀 유니언 레코드』 편집자 — 시애틀 총파업을 현장 취재
  • 1921AFSC 구호단원으로 소련행 — 볼가 기근 구호 참여 후 모스크바 특파원 정착
  • 1930소련 최초 영자신문 『모스크바 뉴스』 창간·편집장
  • 1931소련 농업경제학자 조엘 슈빈과 결혼 (1942년 사별)
  • 1937–1938스페인 내전·중국 항일 근거지 종군 취재
  • 1946옌안에서 마오쩌둥 인터뷰 — 「모든 반동파는 종이호랑이」 발언 기록
  • 1949소련 당국에 체포, 「미국 간첩」 혐의로 추방 — 1955년 명예 회복
  • 1958–1970중국 영구 정착 — 마오·저우언라이와 교류하며 '외국인 친구'로 활동
  • 19703월 29일 베이징에서 심장마비 사망 — 저우언라이·궈모뤄 문상

프랭크 잭 플레처

Frank Jack Fletcher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계 1885–1973 ○ 자연사

항공모함 시대의 작전 지휘관

그는 산호해에서 포트모르즈비 침공 함대를 물러나게 했다.

프랭크 잭 플레처는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에서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한 미국 해군 제독이다. 그는 산호해에서 일본의 포트모르즈비 진격을 저지하고, 미드웨이에서는 전술 지휘관으로 일본 항공모함 네 척의 격침에 관여했다. 그의 신중한 항공모함 운용은 전력을 보존했지만, 과달카날에서 함대 철수를 둘러싼 논쟁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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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1906미 해군사관학교 생도
  • 1914베라크루스 작전 참가, 명예훈장 수훈
  • 1918–1919구축함 벤험·그리들리 함장
  • 1933–1936해군장관 보좌관
  • 1939–1941순양함 사단 지휘관, 소장
  • 1942.01–05제17기동부대 지휘관, 산호해 해전
  • 1942.06미드웨이 해전 전술 지휘관
  • 1942–1945알래스카 해역 미 해군 지휘관

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

Raymond Ames Spruance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인 1886–1969 ○ 자연사

미드웨이의 냉정한 항공전 지휘관

깊은 위기에서도 침착하고 결단력 있었으며, 모든 기회를 과감히 붙잡았다.

레이먼드 스프루언스는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 작전을 지휘한 제독이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을 거느린 제16기동부대를 지휘해 일본의 항공모함 네 척을 격침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신중한 판단과 침착한 지휘로 명성을 얻었으며, 전후에는 해군대학 총장과 필리핀 주재 대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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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미국 해군사관학교 졸업
  • 1913–1922구축함 지휘 및 태평양 함대 복무
  • 1935–1938해군대학 교관
  • 1938–1939전함 미시시피 함장
  • 1942제16기동부대 지휘, 미드웨이 해전
  • 1943–1945중부 태평양군 및 제5함대 사령관
  • 1946–1948해군대학 총장
  • 1952–1955필리핀 주재 미국 대사

존 리드

John Reed
비소련 혁명가 미국 미국 1887–1920 ○ 발진티푸스

볼셰비키 혁명의 목격자에서 미국 공산당 창립자로: 크렘린 성벽에 묻힌 미국인

붉은광장 혁명 희생자 합동 장례식. 리드는 깨달았다. 경건한 러시아 민중은 더 이상 사제가 필요 없었다. 그들은 지상에 어떤 천국보다 찬란한 왕국을 짓고 있었다.

미국 언론인이자 공산주의자. 1917년 10월 혁명을 목격하고 『세계를 뒤흔든 10일』을 썼다. 미국 공산노동당을 공동 창립하고 코민테른 집행위원이 되었다. 크렘린 벽에 안장된 극소수 미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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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하버드대 졸업, 뉴욕에서 저널리즘 경력 시작
  • 1913『더 매시스』 기자 합류, 패터슨 파업 취재 중 첫 체포
  • 1913–1914멕시코 혁명 종군기자 — 판초 비야 군대와 4개월 동행, 『반란의 멕시코』 출간
  • 1917페트로그라드에서 10월 혁명 직접 목격, 볼셰비키 정부 외무인민위원부에서 활동
  • 1919『세계를 뒤흔든 10일』 출간, 미국 공산노동당(CLP) 공동 창립
  • 1919–1920코민테른 집행위원, 제2차 코민테른 대회 미국 대표, 바쿠 동방민족대회 참석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

Alexander Vandegrift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계 네덜란드인 1887–1973 ○ 자연사

과달카날을 지키고 해병대를 지킨 장군

1946년 상원에서 그는 해병대의 미래를 의회가 결정해야 한다며, “무릎 꿇는 것은 우리 군단의 전통이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는 미국 해병대 장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에서 상륙작전과 방어를 결합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1942년 8월 제1해병사단을 이끌고 과달카날에 상륙해 헨더슨 비행장을 중심으로 한 교두보를 지켰고, 이 공세는 미국의 첫 대규모 지상 반격이 되었다. 전후에는 해병대 사령관으로서 육군 편입론에 맞서 해병대의 독자적 역할을 의회에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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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미국 해병대 소위로 임관
  • 1912–1914쿠바·니카라과·멕시코 원정 복무
  • 1915–1923아이티 점령 및 헌병대에서 복무
  • 1942제1해병사단장, 과달카날 상륙과 방어 지휘
  • 1943제1해병상륙군단장, 부건빌 상륙 지휘
  • 1944–1947제18대 미국 해병대 사령관
  • 1945현역 해병 최초로 대장 진급
  • 1964회고록 《Once a Marine》 출간

존 포스터 덜레스

John Foster Dulles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인 1888–1959 ○ 자연사

동맹망으로 냉전을 밀어붙인 미국 외교가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자유선거 없는 전독일 정부 구상을 거부하고 서방의 선거 절차를 내세웠다.

존 포스터 덜레스는 변호사 출신의 미국 외교가로, 전후 국제질서를 동맹과 군사적 억지의 틀로 재편하려 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대소 봉쇄를 넘어 공산주의 세력의 후퇴를 압박하는 노선을 폈고, NATO를 중심으로 서방의 결속을 강화했다.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몰로토프의 집단안보 구상과 전독일 정부 제안에 맞서 자유선거를 거친 통일을 주장했으며, 그해 서독의 NATO 가입을 관철해 유럽 분단의 제도화를 선택했다. 이 노선은 서방 진영의 안정과 미국의 영향력을 넓혔지만, 이란·과테말라 정권 전복 지원과 핵 위협을 포함한 개입주의라는 책임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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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프린스턴대학교 졸업
  • 1911설리번 앤드 크롬웰 국제변호사
  • 1919파리 강화회의 미국 대표단 법률고문
  • 1945–1950유엔 회의·총회 미국 대표 및 외교 고문
  • 1950–1952트루먼 대통령 대일 강화조약 특별고문
  • 1953–1959미국 국무장관
  • 1954베를린 회의 참가, 서독 NATO 가입 협상 주도
  • 1959국무장관 사임, 5월 24일 사망

피티림 알렉산드로비치 소로킨

Питирим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орокин
비소련 혁명가 미국 (1930년 귀화) 러시아 1889–1968 ○ 망명 중 자연사

차르와 볼셰비키 모두에게 투옥된 에스에르 지도자에서 하버드 사회학과 창설자로

1918년 벨리키 우스튜크의 체카 지하실에서 사형을 기다리며 쓴 공개서한에서 소로킨은 에스에르 탈당과 정치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러시아 혁명기 사회주의혁명당(에스에르)의 주요 지도자로, 케렌스키 총리의 비서, 제헌의회 의원을 지냈다. 차르 체제에서 세 차례 투옥되었고 볼셰비키 집권 후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22년 '철학의 배'로 추방되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1930년 하버드대에 사회학과를 창설하고, 사회 계층화·사회 이동성 연구와 『사회문화동학』에서의 순환 이론으로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회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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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에스에르당 입당, 키네슈마에서 체포·투옥
  • 1909–1914페테르부르크대 법학부 졸업, 범죄학 전공
  • 1917에스에르 지도자, 케렌스키 총리 비서, 제헌의회 의원
  • 1919–1922페트로그라드대 교수, 러시아 최초 사회학과 창설
  • 1922소비에트에서 추방 ('철학의 배')
  • 1924–1930미네소타대 교수
  • 1930–1959하버드대 교수, 사회학과 창설 및 학과장
  • 1965미국사회학회 회장

해리 홉킨스

Harry Hopkins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인 1890–1946 ○ 자연사

뉴딜의 행정가이자 전시 외교의 실무자

1945년 5월 모스크바에서 그는 스탈린에게 소련군의 대일전 준비 시점을 물었고, 스탈린은 8월 8일을 제시했다.

해리 홉킨스는 대공황기 미국의 공공구호를 유급 일자리 정책으로 조직한 행정가이자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가장 가까운 참모였다. 그는 연방구호와 공공사업을 대규모로 운영한 뒤 상무장관을 지냈고, 전쟁기에는 무기대여법과 연합국 협력을 조율했다. 건강 악화에도 루스벨트와 트루먼의 특사로 소련과 협상했으며, 1945년 5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에게 대일전 참전 시점과 일본 점령 구역을 물어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쟁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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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5뉴욕 빈곤개선협회 가족복지부 고용국 감독관
  • 1915–1918뉴욕시 아동복지국 사무국장
  • 1921–1923미국 적십자 남서부 지부 총괄 관리자
  • 1933–1935연방긴급구호청장
  • 1935–1938공공사업진흥청장
  • 1938–1940미국 상무장관
  • 1940–1945루스벨트 대통령 특별보좌관·전시 특사
  • 1945트루먼 대통령 특사, 모스크바 회담 대표
  • 1946뉴욕에서 사망
비소련 혁명가 미국 미국 1890–1964 ○ 자연사

"이스트사이드의 잔 다르크": IWW 반항소녀에서 공산당 첫 여성 의장까지

"우리는 자랑스럽게도 공공연히 공산주의 지도자입니다. 우리는 범죄 음모단이 아니라, 미국 인민의 당면한 요구와 열망에 헌신하는 33년 된 노동계급 정당입니다." — 스미스법 재판 최후 진술, 1952년 4월 24일

미국 노동운동가·공산주의자. 15세에 IWW '반항소녀'로 불리며 로렌스 파업을 이끌고 ACLU 공동 창립에 참여했다. 1961년 CPUSA 첫 여성 의장이 되었고, 사후 모스크바 붉은광장 국장이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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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할렘사회주의클럽 첫 연설 직후 체포; IWW 가입
  • 1907–1916IWW 전임 조직가 — 로렌스·패터슨 파업, 미줄라·스포케인 언론자유 투쟁
  • 1918노동자방위연합(WDU) 창설 — 간첩법 기소자 법률지원
  • 1920ACLU 공동 창립; 사코-반제티 구명운동 주도
  • 1936CPUSA 입당, 『데일리 워커』 칼럼 집필
  • 1940공산당원이라는 이유로 ACLU 이사회에서 축출
  • 1951–1955스미스법 위반 유죄 판결 — 올더슨 교도소 2년 복역, 『올더슨 이야기』 집필
  • 1961–1964CPUSA 국가위원회 의장; 모스크바 사망 — 붉은광장 국장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Dwight D. Eisenhower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890–1969 ○ 자연사

노르망디 상륙을 지휘하고 군산복합체를 경고한 5성 장군 대통령

이런 종류의 일에 뛰어들 때는 단 하나만 명심해야 하네. 반드시 성공해야 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5성 장군 출신의 제34대 미국 대통령이다. 재임 중 냉전 봉쇄정책을 추진하며 이란·과테말라 쿠데타를 지원했고, 1960년 3월 카스트로 전복을 위한 CIA 비밀공작을 승인했다. 피그스만 침공 실패 후 케네디에게 '이런 일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조언했으며, 소련의 대응을 두려워해 개입을 숨기려는 발상은 오히려 상대를 대담하게 만들 뿐이라고 경고했다. 퇴임사에서는 '군산복합체'의 위험을 경고하며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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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웨스트포인트 졸업
  • 1942–1945유럽 연합군 최고사령관 (제2차 세계대전)
  • 1945미국 점령 독일 군정장관
  • 1945–1948미국 육군 참모총장
  • 1948–1953컬럼비아 대학교 총장
  • 1951–1952NATO 연합군 최고사령관
  • 1953–1961제34대 미국 대통령

제임스 P. 캐넌

James P. Cannon
좌익 반대파 미국 미국 1890–1974 ○ 자연사

모스크바에서 트로츠키의 비판문을 읽고 미국 트로츠키즘 운동을 창건한 노동운동가

“그들은 자기 당의 심장을 추방한 셈이었다. 트로츠키가 진지한 젊은 활동가들을 모두 자기편으로 만들었고, 빈 껍데기만 남았다.” — 1937년 사회당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축출한 뒤

캔자스 출신의 아일랜드계 노동운동가로, 1919년 미국 공산당 창립에 참여하고 1922년 코민테른 상임간부회에 올랐다. 1928년 모스크바에서 트로츠키의 코민테른 비판문을 접하고 좌익반대파로 전환, 공산당에서 제명된 후 미국 공산주의자동맹을 창립했다. 1934년 미니애폴리스 트럭 운전사 총파업을 성공적으로 지도했고, 1938년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을 창당하여 초대 전국서기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반대 활동으로 스미스법에 따라 18개월간 수감되었으며, 제4인터내셔널의 핵심 지도자로서 국제 트로츠키즘 운동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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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미국 사회당(SPA) 입당
  • 1911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가입, 중서부 조직가로 활동
  • 1919미국 공산노동당(CLP) 창립 참여, 캔자스·미주리·네브래스카 지역서기
  • 1922코민테른 제4차 세계대회 미국 대표, ECCI 상임간부회 선출
  • 1925국제노동방위(ILD) 창립, 초대 전국서기
  • 1928트로츠키주의 전향으로 CPA 제명; 미국 공산주의자동맹(CLA) 공동 창립
  • 1934미니애폴리스 트럭 운전사 총파업 지도
  • 1938사회주의노동자당(SWP) 창당, 초대 전국서기 선출
  • 1944–1945스미스법 위반으로 18개월 수감
  • 1953–1974전국서기직 사임 후 명예 전국의장;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

얼 러셀 브라우더

Earl Russell Browder
비소련 혁명가 미국 미국 1891–1973 ○ 자연사

공산주의는 20세기 아메리카니즘이라 선언하고, 당을 스스로 해산한 미국 공산당의 지도자

“공산주의는 20세기 아메리카니즘이다.” — 1938년 7월 4일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성조기와 적기를 함께 걸며

캔자스 출신으로 15년간 미국 공산당을 이끈 얼 브라우더는 '공산주의는 20세기 아메리카니즘'을 내걸고 1944년 당을 해산하는 '브라우더리즘'을 추진했으나, 1946년 제명 후 결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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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미국 사회당 입당 (16세)
  • 1912사회당 분열로 탈당, 신디칼리스트 동맹 참여
  •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반대 활동으로 간첩법 위반 혐의 체포, 2년형 복역
  • 1920미국 통일공산당 입당
  • 1921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RILU) 창립대회 미국 대표단으로 모스크바 파견
  • 1926–1929RILU 범태평양 노동조합 사무국 서기 — 상하이 주재
  • 1930미국 공산당 정치국 서기 — 사실상의 당 지도자
  • 1932–1945미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 1935코민테른 집행위원회(ECCI) 위원 선출
  • 1936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 — 공산당 후보
  • 1940여권 사기 혐의로 4년형 선고; 대선 재출마
  • 1942.5루스벨트 대통령의 감형으로 14개월 복역 후 석방
  • 1944제12차 당대회에서 공산당 해산 결의 통과 — '공산주의정치협회' 창설
  • 1945.7제13차 당대회에서 브라우더리즘 노선 폐기, 당 재건
  • 1946.2미국 공산당 제명
  • 1958『마르크스와 미국』 출간 — 미국에서의 마르크스주의 적용 불가 주장

에드워드 맬러리 알몬드

Edward Mallory Almond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892–1979 ○ 자연사

공세적 지휘와 인종주의가 얽힌 미군 장성

“중국인 세탁부대 따위가 우리를 막게 두지 마라.”

에드워드 알몬드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친 미국 육군 장성으로, 공격적 지휘관이라는 명성과 인종주의적 편견이 함께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흑인 병사들로 구성된 제92보병사단을 지휘했으며, 사단의 전투 성과를 병사들의 인종적 능력 탓으로 돌려 군의 흑인 전투부대 운용에 반대했다. 한국전쟁에서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참모총장으로서 인천상륙 뒤 창설된 X군단을 지휘했고, 인천과 서울 탈환에 기여했다. 그러나 동북부 진격에서 병력을 넓게 분산하고 중국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해 X군단의 위기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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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버지니아 군사학교 졸업
  • 1918제4사단 제12기관총대대 지휘, 프랑스 전선 참전
  • 1942–1945제92보병사단 사단장, 이탈리아 전선 지휘
  • 1946–1949도쿄 극동사령부 인사참모, 이어 맥아더의 참모총장
  • 1950–1951X군단 사령관, 인천상륙과 동북부 작전 지휘
  • 1951–1953육군전쟁대학 교장, 1953년 퇴역

올리버 P. 스미스

Oliver Prince Smith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계 1893–1977 ○ 자연사

신중함으로 포위된 사단을 구한 해병 지휘관

“후퇴라니, 지옥에나 가라! 우리는 그저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중이다.”

올리버 P. 스미스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복무한 미국 해병대 장군으로, 상륙작전 전문성과 신중한 판단으로 알려졌다. 제1해병사단장으로서 1950년 인천 상륙과 서울 진격을 지휘했으며, 이후 장진호에서 중국군에 포위된 병력을 조직적으로 돌파시켰다. 그는 맥아더와 앨먼드의 속도 중심 명령에 맞서 보급선과 철수로를 준비했고, 그 선택은 병력 보존과 작전 지속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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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미 해병대 소위 임관
  • 1934–1936프랑스 육군 고등전쟁학교 수학
  • 1944제5해병연대장, 뉴브리튼 작전 지휘
  • 1944–1945제1해병사단 부사단장, 펠렐리우·오키나와 작전
  • 1950–1951제1해병사단장, 인천·서울·장진호 작전
  • 1953–1955대서양 함대 해병대 사령관
  • 1955대장으로 퇴역

오마르 넬슨 브래들리

Omar Nelson Bradley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계 1893–1981 ○ 자연사

노르망디를 지휘한 미국 육군 지휘관

오마르 브래들리는 제2차 세계대전의 미국 육군 고위 지휘관으로,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를 거쳐 노르망디 상륙과 서유럽 공세를 지휘했다. 그는 기존의 제1미군집단 본부가 연합군의 기만작전에서 허구의 지휘부로 활용되는 과정을 거쳤고, 실제 전선에서는 제1군과 제12군집단을 이끌었다. 전후에는 육군참모총장과 초대 합동참모의장을 지내며 한국전쟁 초기 미국의 군사정책을 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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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미 육군 보병 소위
  • 1941미 육군 보병학교장
  • 1943제2군단장, 북아프리카·시칠리아
  • 1944제1군사령관, 노르망디 상륙작전
  • 1944–1945제12군집단사령관, 서유럽
  • 1948–1949미 육군참모총장
  • 1949–1953초대 합동참모의장
  • 1950육군원수 임명

로버트 다니엘 머피

Robert Daniel Murphy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계 1894–1978 ○ 자연사

베를린 봉쇄의 위험을 먼저 읽은 외교관

소콜롭스키가 회의장을 떠난 직후, 머피는 소련이 서방을 베를린에서 몰아내려는 3단계 계획에 착수했다고 보고했다.

로버트 대니얼 머피는 전쟁과 점령의 현장에서 협상과 정보 판단을 결합한 미국 외교관이었다. 1948년 독일 주재 미국 정치고문으로서 그는 소련이 서방을 베를린에서 몰아내려는 단계적 압박에 들어갔다고 분석해 워싱턴에 보고했고, 그 판단은 봉쇄와 공수작전을 둘러싼 미국의 인식 형성에 기여했다. 그의 경력은 북아프리카 상륙 준비와 전후 독일 행정, 벨기에·일본 대사직, 국무부 고위직을 거쳤으며, 외교관의 현장 보고가 군사·정치 결정을 움직이는 과정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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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미국 우체국에서 연방 공직 시작
  • 1917–1919스위스 베른 미국 공사관 암호 서기
  • 1921–1925취리히 부영사, 뮌헨 부영사
  • 1930–1940파리 영사, 비시 프랑스 주재 대리대사
  • 1940–1944프랑스령 북아프리카 대통령 특사, 연합군 정치고문
  • 1944–1949독일 주재 미국 정치고문
  • 1949–1952주벨기에 미국 대사
  • 1952–1959주일 대사, 국무부 정치 담당 차관

윌리엄 K. 해리슨 주니어

William K. Harrison Jr.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895–1987 ○ 자연사

158차례 정전회담 끝에 판문점에서 유엔군 대표로 정전협정에 서명한 미 육군 중장

1952년 6월, 회담이 성과 없이 끝날 것이 분명하자 해리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을 나갔고, 남일 장군은 어안이 벙벙한 채 남겨졌다.

서부전선과 벌지 전투에서 무공을 세운 기병 장교 출신으로, 1952년 5월 유엔군 정전대표단 수석대표가 되어 1년 넘게 판문점 회담을 이끌었다. 1953년 7월 27일, 남일 장군과 서로 눈길 한 번 마주치지 않고 18부의 정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3년간의 한국전쟁 교전을 멈추었다. 독실한 복음주의 신자이자 장교기독교친목회 회장을 지낸 그는, 퇴역 후에도 '명령 아래 사는 사람'이라는 신앙의 규율을 평생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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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웨스트포인트 졸업, 기병 소위 임관
  • 1944제30보병사단 부사단장, 노르망디·벌지 전투 참전
  • 1946–1949연합국 최고사령부(GHQ) 배상과장, 일본 점령
  • 1950–1951제9보병사단장, 포트 딕스
  • 1951.12제8군 부사령관, 한국
  • 1952.05–1953.07유엔군 정전대표단 수석대표
  • 1953.09극동군 부사령관 겸 참모장
  • 1954–1957카리브군 사령관, 퇴역

존 J. 매클로이

John Jay McCloy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895–1989 ○ 자연사

전후 미국 국제질서를 설계한 실무가

흐루쇼프는 미국의 군비 증강이 전쟁 위협이라고 경고했다.

존 J. 매클로이는 법률가 출신의 미국 외교·안보 관료이자 금융가로, 전쟁 수행과 전후 국제질서 구축을 잇는 통로였다. 그는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과 독일 전범 사면·감형 같은 결정에 관여하며 미국 권력의 폭넓은 책임과 그 모순을 드러냈다. 1961년 존 F. 케네디의 군비축소 고문으로서 소련과 시험금지 및 군비축소를 협상했고, 7월 모스크바 회담에서 베를린 위기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을 직접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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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9미 육군 포병 장교, 프랑스 전선 복무
  • 1921–1940뉴욕 변호사, 월스트리트 법률가
  • 1941–1945전쟁부 차관보, 전시 동원·정보·안보 정책 담당
  • 1947–1949세계은행 제2대 총재
  • 1949–1952미국 독일 고등판무관
  • 1953–1960체이스맨해튼은행 회장
  • 1953–1970외교협회 이사회 의장
  • 1961케네디 대통령 군비축소 고문

마크 W. 클라크

Mark W. Clark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계 1896–1984 ○ 자연사

전쟁의 성과와 민간인 피해 사이에 선 연합군 지휘관

1953년 7월 27일, 마크 W. 클라크는 판문점 정전협정에 유엔군사령부 대표로 서명했다.

마크 W. 클라크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지휘한 미국 육군 장성으로, 연합전의 참모 역량과 현장 지휘를 함께 보여 준 인물이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로마 점령과 독일군 항복을 이끌었지만, 라피도강 작전과 몬테카시노 폭격을 둘러싸고 작전 판단과 민간 유산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전쟁 말기 유엔군사령관으로서 공세와 정전협상을 병행했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유엔군 측 대표로 서명했다. 그의 경력은 미국의 군사적 우위 추구가 연합 지휘체계와 전쟁의 파괴성을 어떻게 함께 드러냈는지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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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미 육군 보병 소위
  • 1942북아프리카 연합군 작전 부사령관
  • 1943–1944미 제5군 사령관, 이탈리아 전선
  • 1944–1945제15군집단 사령관, 이탈리아
  • 1945–1947오스트리아 미군 점령군 총사령관
  • 1947–1949미 제6군 사령관
  • 1949–1952미 육군 야전군 사령관
  • 1952–1953유엔군사령부·극동군사령부 총사령관

루시우스 D. 클레이

Lucius D. Clay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897–1978 ○ 폐기종 · 80세

서베를린 봉쇄에 공수로 맞서 324일을 버텨낸 미군 지구 군정장관

봉쇄 하루 만인 1948년 6월 25일, 클레이는 트루먼의 공식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공수 작전을 스스로 명령했고, 살아남은 베를린 시민들은 그를 '도시의 아버지'라 부르며 무덤에 '우리 자유의 수호자'라는 감사 비문을 새겼다.

그루지야 출신의 공병 장교로, 전시 보급 지휘로 두각을 나타낸 뒤 1947년 점령 독일 미군 지구 군정장관이 되었다. 1948년 소련이 서베를린을 봉쇄하자 무력 호송대 대신 공수를 택해 직접 명령을 내렸고, 베를린 방위가 곧 미국의 명예이자 서유럽의 운명이라고 주장하며 324일의 공수를 끝까지 이끌었다. 1949년 퇴역한 뒤 사업가와 역대 대통령의 고문을 지냈고, 1961년 베를린 장벽 위기 때 케네디의 특사로 돌아와 체크포인트 찰리의 미군 전차를 소련 전차와 대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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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그루지야주 메리에타에서 알렉산더 스티븐스 클레이 상원의원의 아들로 출생
  • 1918웨스트포인트 졸업, 공병 장교로 임관
  • 1942최연소 준장으로 승진, 아이젠하워 휘하 물자국장
  • 1945–1946아이젠하워 부관, 독일 연합군 정부 부군정장관
  • 1947–1949미군 지구 군정장관 겸 유럽 주둔 미군 사령관
  • 1948.06.25베를린 공수 작전 개시 명령
  • 1949–1962퇴역, 컨티넨털 캔 사 회장
  • 1961–1962케네디의 베를린 특사, 체크포인트 찰리 미소 전차 대치

폴 리로이 로브슨

Paul Leroy Robeson
비소련 혁명가 미국 미국 1898–1976 ○ 자연사

'올 맨 리버'를 투쟁의 찬가로 바꾼 예술가

1937년 스페인 내전을 계기로 〈올 맨 리버〉의 체념적 가사를 바꿔 불렀다: "하지만 나는 계속 웃는다 / 우는 대신에 / 나는 계속 싸워야 한다 / 죽는 그날까지." 웨일스에서 "예술가는 편을 들어야 한다. 나는 선택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고 선언했다.

미국의 베이스-바리톤 가수이자 배우, 전미 풋볼 올아메리칸 출신의 사회주의 운동가. 할렘 르네상스의 스타로 《쇼 보트》와 《오셀로》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1934년 소련 방문 후 평생 사회주의와 반식민주의를 지지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를 후원하고 아프리카문제위원회를 이끌었다. 매카시 시대 여권이 박탈되고 블랙리스트에 올랐으나 소련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고, 1958년 대법원 판결로 여권을 되찾았다. 그의 예술과 정치적 헌신은 흑인 해방운동과 국제 반제국주의 투쟁을 잇는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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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9러트거스대학, 미식축구 올아메리칸 2회, 졸업생 대표
  • 1919–1923컬럼비아 로스쿨, NFL 선수 활동
  • 1924–1928《황제 존스》 등 주연, 할렘 르네상스 스타로 부상
  • 1928–1939런던 《쇼 보트》로 세계적 명성, 《오셀로》(1930)로 영국 첫 흑인 오셀로
  • 1934첫 소련 방문 — "처음으로 흑인이 아니라 한 인간이다"
  • 1937–1939스페인 공화파 지지, 국제여단 방문, 아프리카문제위원회 활동
  • 1943–1945브로드웨이 《오셀로》 — 백인 출연진과 첫 흑인 오셀로, 296회 공연
  • 1949파리 평화대회 연설 후 피크스킬 폭동, 블랙리스트 시작
  • 1950–1958여권 박탈, HUAC 조사, 《프리덤》 창간, 스탈린 평화상(1952)
  • 1958대법원 판결로 여권 회복, 《Here I Stand》 출간
  • 1958–1960유럽·소련·호주·뉴질랜드 순회공연, 《오셀로》 출연
  • 1961–1963건강 악화, 동베를린 부흐 클리닉에서 회복
  • 1963–1976은둔 생활, 필라델피아에서 뇌졸중 합병증으로 사망
이론가 미국 독일 1898–1979 ○ 뇌졸중으로 사망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이자 1960년대 신좌파의 대표적 이론가

'그것은 가장 진전된 위치에서 위대한 거부, 즉 존재하는 것에 대한 항의다' — 《일차원적 인간》(1964)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핵심 철학자로,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 정신분석을 결합하여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 이론을 전개했다. 《에로스와 문명》(1955)에서 자본주의의 억압 구조를 분석하고 해방된 에로스의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탐구했으며, 《일차원적 인간》(1964)에서는 기술적 풍요가 비판 의식을 잠식하는 현대 산업사회를 '일차원적 사회'로 규정하며 억압적 탈승화 개념을 제시했다. 독일계 유대인으로 나치를 피해 미국에 망명, 전시 OSS에서 근무하고 브랜다이스대와 UC샌디에이고에서 가르치며 1960년대 학생 운동과 신좌파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위대한 거부'로 상징되는 그의 급진적 사유는 비판 이론과 해방 정치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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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제네바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 합류
  • 1934–1942컬럼비아대학교 사회연구소 연구원, 뉴욕
  • 1942–1951OSS 및 국무부 분석관, 중앙유럽과장
  • 1954–1965브랜다이스대학교 정치이론 교수
  • 1965–1970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철학 교수

해리 헤이우드

Harry Haywood
비소련 혁명가 미국 미국 1898–1985 ○ 자연사

코민테른 '흑인 벨트' 테제의 설계자: 남부 흑인은 자결권을 가진 억압된 네이션이다

“흑인 문제는 근본적으로 억압된 네이션의 문제이며 완전한 자결권을 가진다.” — 『흑인 해방』(1948)

전 노예의 아들로 급진화된 미국 공산주의자. 코민테른에서 남부 흑인 자결권 테제를 수립했고, CPUSA 정치국원과 스페인 내전 정치위원을 지냈다. 탈스탈린화 반대로 제명된 후 마오주의 운동의 핵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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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9제1차 세계대전 — 미 육군 제8연대(흑인연대) 복무, 프랑스 전선 참전
  • 1922–1925아프리카 혈맹단 → 청년공산주의동맹 → 미국공산당 입당
  • 1926–1930모스크바 유학 — 동방노력자공산대학·국제레닌학교, 코민테른 흑인문제 결의 초안
  • 1931–1938CPUSA 정치국원 겸 흑인부장 — 스코츠보로 구명운동, 남부 소작인조합 조직
  • 1937스페인 내전 — 에이브러햄 링컨 대대 연대 정치위원, 브루네테 전투
  • 1943–1945제2차 세계대전 — 미국 상선대 복무
  • 1948『흑인 해방』 출간 — 남부 흑인 해방을 미완의 민주혁명 과제로 이론화
  • 1959반수정주의와 흑인 자결권 고수로 CPUSA에서 제명
  • 1964–1978신공산주의 운동 — 10월동맹/CPML 중앙위원, 『블랙 볼셰비키』 출간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계 1900–1949 ○ 자연사

기업 권력에서 국제질서의 설계자로 이동한 외교가

얄타 회담 의정서에는 미국 대표로 ‘E. R. 스테티니우스 주니어’의 서명이 남았다.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는 대기업 경영과 국가 동원 행정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 말 미국 외교의 중심에 선 정치가였다. 무기대여 원조를 관리하며 동맹국의 전쟁 수행을 뒷받침했고, 얄타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함께 전후 유럽과 국제기구의 틀을 협의했다. 그는 얄타 의정서에 미국 대표로 서명한 뒤 유엔 창설회의를 이끌었지만, 소련과의 긴장을 유엔을 통한 협력으로 풀려 한 구상은 트루먼 행정부와 충돌했다. 이 경력은 기업과 국가의 전시 동원이 전후 다자주의로 이어지는 동시에 냉전의 문턱에서 제약받은 과정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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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제너럴 모터스 입사, 존 리 프랫의 보좌역
  • 1931제너럴 모터스 공공·산업관계 담당 부사장
  • 1934–1938US스틸 이사, 1938년 이사회 의장
  • 1939–1941전쟁자원위원회와 생산우선순위 기관에서 전시 동원 담당
  • 1941–1943무기대여 원조 행정관
  • 1943–1944미국 국무부 차관
  • 1944–1945미국 국무장관, 얄타 회담 미국 대표
  • 1945–1946초대 미국 유엔대사

애들레이 유잉 스티븐슨

Adlai Ewing Stevenson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00–1965 ○ 심장마비

유엔 안보리에서 흐루쇼프의 미사일을 추궁한 두 번의 대선 후보

"통역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예 아니오? … 지옥이 얼어붙을 때까지 답변을 기다릴 용의가 있습니다."

애들레이 스티븐슨은 1952년과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두 차례 패했지만, 냉전 시대 미국 자유주의의 지적 양심으로 남은 정치가다. 일리노이 주지사 시절 매카시즘의 충성서약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고, 케네디 행정부 유엔 대사로 피그만 침공의 외교적 후폭풍을 감당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안보리에서 소련 대표 발레리안 조린에게 "지옥이 얼어붙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항공사진을 공개했고, 백악관에서는 튀르키예 미사일 철수 교환을 제안해 매파의 맹비난을 받았으나 이는 위기 해소의 실제 합의였다. 죽기 직전까지 유엔 대사로 재임하며 대화를 통한 냉전 관리라는 신념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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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4해군장관실 수석 법률보좌관
  • 1945국무장관 특별보좌관 · 유엔 준비위원회 미국 부대표
  • 1948–1953제31대 일리노이 주지사
  • 1952민주당 대통령 후보
  • 1956민주당 대통령 후보 (재지명)
  • 1961–1965유엔 주재 미국 대사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인 1901–1987 ○ 자연사

핵시대의 군사 전략가

쿠바 미사일 위기 때 그는 군사 선택지를 설명한 뒤 대통령의 봉쇄 결정을 군에 전달했다.

맥스웰 테일러는 제2차 세계대전의 공수부대 지휘관에서 냉전기의 미국 군사·외교 정책가로 변모한 장교였다. 그는 핵무기에 과도하게 의존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뉴 룩’을 비판하고 재래식 전력과 유연한 대응을 강조했다. 케네디의 신임을 얻어 합동참모본부 의장과 대통령 군사대표를 지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EXCOMM에 참여해 군사 선택지를 제시하는 동시에 대통령의 봉쇄 결정을 군에 전달했다. 이후 베트남 개입 확대를 지지하며 냉전 군사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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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미 육군 공병 소위
  • 1942–1945제82공수사단 포병 지휘관, 제101공수사단장
  • 1949–1951서베를린 주둔 연합군 사령관
  • 1953–1955제8군 사령관, 육군참모차장
  • 1955–1959미 육군참모총장
  • 1961–1962대통령 군사대표
  • 1962–1964합동참모본부 의장, EXCOMM 위원
  • 1964–1965주베트남 미국 대사

존 알렉산더 매콘

John Alexander McCone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02–1991 ○ 자연사

쿠바에 소련 미사일이 올 것이라 홀로 경고한 CIA 국장

기습 공격은 미국에 '진주만 오명'을 남길 것이라고 경고하며, 공습 전 카스트로와 흐루쇼프에게 24시간의 사전 경고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사업가이자 공화당원으로, 피그만 침공 실패 후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CIA 국장에 임명되었다. 1962년 여름과 가을,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반입할 것이라고 거듭 경고했으나 정보기관 내부에서 기각당했고, 9월 20일 신혼여행 중 보낸 전문에서 '상상력 있는 분석'을 촉구한 끝에 10월 14일 U-2 정찰기를 명령해 미사일 기지를 발견했다. 케네디 암살 후 존슨 행정부에서도 재임했으나 베트남 확전을 둘러싼 불화로 1965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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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Consolidated Steel Corporation 수석부사장
  • 1937Bechtel-McCone 공동 창업
  • 1941–1945California Shipbuilding Corporation 사장
  • 1950–1951미국 공군 차관
  • 1958–1961미국 원자력위원회 위원장
  • 1961–1965제6대 CIA 국장

루엘린 E. 톰슨

Llewellyn Thompson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04–1972 ○ 암으로 사망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흐루쇼프의 마음을 읽고 해법을 제시한 인물

「흐루쇼프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쿠바를 구했다, 나는 침공을 막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 ExComm 회의에서.

미국 외교관으로, 1957년부터 1962년까지 모스크바 주재 대사를 역임하며 흐루쇼프와 독자적인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의 국가안전보장회의 집행위원회(ExComm)에서, 10월 27일 도착한 두 통의 흐루쇼프 서한 중 강경한 두 번째 서한을 무시하고 26일의 첫 번째 서한에 응답하라고 권고했으며, 이 전략이 위기 해소의 핵심이 되었다. 이후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다시 모스크바 대사를 지내며 SALT 협상과 핵비확산 정책 수립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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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미국 외교관으로 임용
  • 1941주소 미국대사관 2등서기관, 독소전 발발 후 모스크바 잔류
  • 1952–1957주오스트리아 고등판무관·대사, 오스트리아 국가조약 및 트리에스테 협상
  • 1957–1962주소 미국 대사 (1차), 캠프 데이비드·빈 정상회담, U-2 사건, 부엌 논쟁
  • 1962ExComm 위원, 쿠바 미사일 위기 해결에 핵심 조언
  • 1962–1966국무부 소련 담당 대사급 순회대사·정무담당 부차관보
  • 1967–1969주소 미국 대사 (2차), 글래스보로 정상회담, SALT·핵비확산 협상

찰스 E. 유스티스 볼렌

Charles E. Bohlen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04–1974 ○ 췌장암으로 사망

케넌클레이턴의 정책 메모를 마셜의 하버드 연설문으로 옮긴 국무부 소련 전문가

「포츠담 이후, 소련이 세계 공동체의 합리적이고 협력적인 구성원이 되도록 유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회고록 『역사의 증인』에서.

미국 외교관이자 소련 전문가로, 1934년 주소 미국대사관 개설부터 냉전기까지 미소관계의 거의 모든 중대한 장면에 입회했다. 루스벨트트루먼의 통역으로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배석했으며, 1947년 마셜 국무장관의 요청으로 케넌과 클레이턴의 정책 메모를 하버드 졸업식 연설문으로 작성해 마셜 플랜의 공개적 출발을 이끌었다. 1953년 주소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매카시의 공격을 받으며 인준 청문회를 겪었고, 이후 프랑스 대사까지 지내며 '현자들'로 불린 초당파 외교 고문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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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국무부 외교관으로 임용
  • 1934–1940주소 미국대사관 3등서기관, 독소불가침조약 전문 입수
  • 1943–1945백악관 소련 고문,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 통역
  • 1947–1949국무부 고문, 마셜의 하버드 연설 초안 작성
  • 1949–1951주프랑스 미국 공사
  • 1953–1957주소 미국 대사
  • 1957–1959주필리핀 미국 대사
  • 1962–1968주프랑스 미국 대사

조지 F. 케넌

George F. Kennan
이론가 미국 미국 1904–2005 ○ 노환으로 사망

1946년 장전문과 X 논문으로 봉쇄 정책을 설계한 미국 외교관·역사가

「소련에 대한 미국 정책의 주요 요소는 러시아의 팽창 경향에 대한 장기적이고 인내심 있으면서도 단호하고 경계하는 봉쇄여야 한다」, 1947년 X 논문에서.

미국 외교관이자 역사가로, 1946년 모스크바에서 국무부에 보낸 '장전문'과 1947년 《포린 어페어스》에 발표한 X 논문에서 소련의 팽창을 장기적·인내심 있게 봉쇄해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국무부 정책기획실 초대 실장으로서 마셜 플랜의 설계에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이후 트루먼 독트린과 NATO로 이어지는 냉전 초기 미국 대외정책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자신이 설계한 봉쇄가 군사적 대결로 변질되자 평생 비판자로 돌아섰고, 베트남 전쟁과 NATO 확장에 공개 반대하며 현실주의적 외교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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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국무부 외교관으로 임용
  • 1933–1936주소 미국대사관 3등서기관
  • 1944–1946주소 미국대사관 공사참사관, '장전문' 송신
  • 1947–1949국무부 정책기획실 초대 실장, 마셜 플랜 설계, X 논문 발표
  • 1952주소 대사, 페르소나 논 그라타 선언
  • 1956–2005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 외교사 저술
  • 1961–1963주유고슬라비아 대사

윌리엄 H. 터너

William H. Tunner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계 1906–1983 ○ 자연사

대규모 공수작전의 설계자

“모든 비행은 날씨가 좋든 나쁘든, 낮이든 밤이든 계기비행으로 한다.”

윌리엄 H. 터너는 제2차 세계대전의 히말라야 공수와 베를린 공수에서 대규모 항공수송을 정교한 체계로 바꾼 미국 공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베를린 봉쇄 때 연합 공수임무부대를 이끌며 항공기를 일방통행 회랑과 엄격한 시간표에 배치해 임시 작전을 지속 가능한 공급망으로 전환했다. 블랙 프라이데이의 사고 뒤에는 악천후에도 계기비행을 의무화하고 착륙 실패 항공기를 되돌리는 규칙을 세워 안전과 처리량을 함께 높였다. 이후 한국전쟁 공수와 군사항공수송 근무를 지휘하며 현대 전략공수의 조직 원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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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41미 육군 항공대 장교, 조종사와 참모
  • 1942–1943항공수송사령부 국내·수송 사단장
  • 1942여성보조수송비행대 창설 조직
  • 1944–1945인도·중국 사단장, 히말라야 공수 지휘
  • 1948–1949연합 공수임무부대 사령관, 베를린 공수
  • 1950–1951전투화물사령부 사령관, 한국전쟁 공수
  • 1958–1960군사항공수송 근무 사령관
  • 1960미 공군 퇴역

커티스 E. 르메이

Curtis LeMay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906–1990 ○ 심장마비로 사망

일본을 불태우고 상대에게 핵폭격을 주장한 공군 원수

클레이가 '석탄이라도 실어날라 줄 수 있겠소?' 하고 묻자 르메이는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에 대한 전략폭격을 지휘한 인물로,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을 시작으로 66개 도시를 소이탄으로 태웠다. 1948년 미 유럽공군 사령관으로서 베를린 봉쇄에 맞서 루시우스 클레이에게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하며 공수의 첫 단계를 세웠다. 이어 전략공군사령부(SAC)를 맡아 핵전력 중심의 제트 공군으로 개편했고, 1961년 공군 참모총장이 되어 쿠바 위기 때 미사일 기지 폭격을 주장했다. 은퇴 후에는 인종분리주의자 조지 월리스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1968년 대선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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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제305폭격단장, 유럽 전선
  • 1944–1945제21폭격사령부 지휘관, 일본 소이탄 공습
  • 1947–1948미 유럽공군(USAFE) 사령관, 베를린 공수 개시
  • 1948–1957전략공군사령부(SAC) 사령관
  • 1957–1961미 공군 부참모총장
  • 1961–1965미 공군 참모총장
  • 1968조지 월리스의 부통령 후보

제임스 웨브

James Edwin Webb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인 1906–1992 ○ 자연사

아폴로를 조직한 행정가

아폴로 1호 화재 뒤 그는 NASA가 조사와 수습을 맡아야 한다고 존슨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제임스 웨브는 과학자나 기술자가 아니라 대규모 공공사업을 조직한 미국의 행정가였다. NASA 국장으로서 아폴로 계획에 안정적인 예산과 정치적 지지를 결합하고, 연구센터와 산업·대학을 조정하는 중앙집중적 운영 체계를 세웠다. 그는 유인 달 착륙을 추진하면서도 마리너와 파이어니어 같은 행성과학 및 우주망원경 연구를 지지했다. 아폴로 1호 화재 뒤에는 조사를 이끌고 NASA의 책임을 의회에 설명하며 계획의 연속성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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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졸업
  • 1936워싱턴 법학대학원 졸업, 변호사 자격 취득
  • 1936–1944스페리 자이로스코프 인사·재무·경영 담당
  • 1946–1949미국 예산국 국장
  • 1949–1952미국 국무부 차관
  • 1961–1968미 항공우주국 국장
  • 1969대통령 자유훈장 수훈, 『우주시대의 관리』 출간

어니스트 그로스

Ernest A. Gross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06–1999 ○ 자연사

유엔의 절차를 움직인 국제법률가

1950년 6월 25일, 그는 한국의 상황을 보고하고 결의안 표결을 위한 안전보장이사회 절차를 이끌었다.

어니스트 그로스는 국제법률가이자 미국 외교관으로, 법률 자문과 전후 점령지 행정을 거쳐 유엔에서 미국의 정책을 대표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미국 대표단을 이끌며 안전보장이사회가 결의 82를 채택하도록 절차와 표결을 조율했다. 이 과정은 소련 대표의 불참이라는 조건을 활용한 미국 외교의 성과였지만, 유엔의 집단안보가 강대국 경쟁 속에서 작동한 방식이라는 긴장도 남겼다. 이후 그는 국제변호사로서 티베트 문제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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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33미 국무부 법률고문
  • 1940–1943전시노동위원회 부법률고문
  • 1943–1945미 육군 민정국 경제과장
  • 1945–1949국무부 법률고문 및 점령지역 담당 차관보 보좌관
  • 1949국무부 의회관계 담당 차관보
  • 1949–1953유엔 주재 미국 대표부 차석대표, 1949–1950년 대표단장 직무대행
  • 1953–1999커티스·말레-프레보스트 법률사무소 변호사
  • 1959–1960티베트 망명정부 국제연합 로비스트·자문역
  • 1960년대국제사법재판소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 소송 제기

폴 니츠

Paul Nitze
외국 정치가 미국인 미국계 1907–2004 ○ 자연사

핵전략과 군비통제를 오간 냉전 설계자

1982년 제네바 협상 중 유리 크비친스키와 ‘숲속 산책’을 하며 타협안을 모색했다.

폴 니츠는 미국의 냉전 전략과 핵무기 정책을 형성한 외교·안보 관료였다. 그는 NSC-68에서 소련과의 장기 대결을 군사력 증강의 문제로 정식화했지만, 핵무기의 위험을 관리하려면 정교한 협상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SALT에 참여하고 레이건 행정부의 INF 협상을 이끌면서, 강한 억지력과 군비 감축을 서로 배타적인 선택으로 보지 않는 실무 노선을 추구했다. 이 때문에 그는 군비경쟁의 설계자이자 협상 가능한 질서를 찾은 인물이라는 상반된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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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46전략폭격조사단 부의장
  • 1950–1953국무부 정책기획국장
  • 1961–1963국방부 국제안보담당 차관보
  • 1963–1967해군장관
  • 1967–1969국방부 부장관
  • 1969–1973SALT I 미국 대표단
  • 1981–1984INF 미국 수석협상가
  • 1984–1989대통령·국무장관 군비통제 특별고문

린든 B. 존슨

Lyndon B. Johnson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08–1973 ○ 자연사

개혁과 전쟁 사이의 냉전 대통령

1968년 7월, 미국과 소련이 전략무기 제한 협상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린든 B. 존슨은 의회에서 다져진 협상력으로 미국의 국내 개혁과 냉전 전략을 함께 밀어붙인 대통령이었다. 그는 민권법과 투표권법, 메디케어를 포함한 ‘위대한 사회’를 확장했지만, 베트남전의 확대는 그 성과를 압도하는 역사적 책임이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경쟁을 지속하면서도 소련과 전략무기 제한을 모색해 1967년 글래스버러 정상회담과 1968년 전략무기 협상 합의로 훗날 SALT로 이어질 길을 열었다. 선거에서 물러난 마지막 해에도 베트남 평화협상과 군비통제를 병행하려 했으나, 합의의 결실은 후임 정부가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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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9텍사스 제10선거구 연방 하원의원
  • 1949–1951텍사스주 연방 상원의원
  • 1951–1953상원 민주당 원내총무
  • 1953–1955상원 민주당 원내대표
  • 1955–1961상원 다수당 원내대표
  • 1961–1963미국 부통령
  • 1963–1969미국 제36대 대통령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908–1987 ○ 심장병으로 사망

6단계 쿠바 전복 계획으로 소련에 침공의 확신을 안긴 몽구스 작전의 설계자

맥나마라가 전황 측정 지표에 적어둔 'X 인자'가 무엇이냐고 묻자, 랜스데일은 '베트남 농촌 서민들의 감정'이라고 답했다. 맥나마라는 연필로 그 항목을 지워버렸다.

미 공군 소장으로, 광고계에서 군 정보장교로 전향한 후 필리핀 훅발라합 반란 진압에서 심리전을 무기화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베트남에서는 사이공 군사임무단을 이끌며 응오딘지엠 정권을 뒷받침했고, 1962년 케네디 대통령에게 몽구스 작전의 6단계 계획을 제출해 그해 10월 쿠바 내 반란과 정권 전복을 목표로 설정했다. 이 문서는 소련이 쿠바 침공이 임박했다고 판단한 핵심 근거가 되어 쿠바 미사일 위기를 촉발한 고리 중 하나가 되었다. 지엠 축출에 반대하며 1963년 강제 전역했고, 말년에는 심리전과 대분란전의 선구자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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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7육군 군사정보대 및 OSS 복무, 소령 진급
  • 1947–1950미 공군 대위로 전군, 전략정보학교 교관
  • 1950–1954필리핀 합동군사원조단, 훅발라합 반란 진압 심리전 지휘, 막사이사이 대선 승리 지원
  • 1954–1957사이공 군사임무단장, 지엠 정권 수립 지원, 북부 가톨릭 남하 작전 주도
  • 1957–1961국방부 특수작전 부차관보, 해외 대분란전 기획
  • 1961–1963몽구스 작전 작전책임자, 케네디에게 6단계 쿠바 전복 계획 제출(1962.2)
  • 1965–1968주사이공 미국 대사관 참사관, 대분란전 자문
  • 1963공군 소장으로 강제 전역

버넷 볼로튼

Burnett Bolloten
연구자 미국 영국 1909–1987 ○ 자연사

스페인 내전을 기록한 집요한 사료 연구자

그는 전쟁을 취재하러 갔다가, 패배한 혁명의 기록을 평생 수집하는 역사가가 되었다.

버넷 볼로튼은 스페인 내전을 취재한 기자이자, 공화파 내부의 권력투쟁과 혁명 억압을 추적한 역사가였다. 그는 전쟁 중 공산당에 우호적이었으나, 1937년 5월의 충돌과 POUM 탄압을 조사하며 공산주의 세력이 공화국의 혁명적 동맹을 억눌렀다고 보게 되었다. 난민 증언과 방대한 신문·문서 자료를 수십 년간 모아 《스페인 혁명》과 유고작 《스페인 내전》을 남겼고, 그의 연구는 내전의 정치사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 자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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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웨일스에서 태어남
  • 1936–1938유나이티드 프레스 스페인 특파원
  • 1940년대–1980년대멕시코와 미국에서 내전 자료 수집·연구
  • 1961《대위장》 출간
  • 1979《스페인 혁명》 출간
  • 1987캘리포니아에서 사망
  • 1991유고작 《스페인 내전》 출간

딘 러스크

Dean Rusk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09–1994 ○ 자연사

봉쇄를 국제 연대로 만든 냉전 외교가

“유엔에서는 미사일 위협 제거를, 미주기구에서는 리우 조약에 따른 공동행동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딘 러스크는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국무부를 거쳐 미국 외교의 중심에 선 국제주의자였다.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군사적 충돌을 통제하면서도 봉쇄를 선택했고, 미주기구와 유엔을 통해 그 조치를 국제적으로 방어하려 했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는 점차 개입을 강하게 옹호해, 국제법과 동맹 외교를 중시한 인물이 전쟁의 정당화에도 관여한 긴장을 남겼다. 퇴임 뒤에는 그루지야대학교에서 국제법과 외교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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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40밀스 칼리지 정부학 교수
  • 1941–1945미 육군 중국·버마·인도 전구 참모장교
  • 1947–1949국무부 특수정치업무국장
  • 1949–1950국무부 차관보급 부차관
  • 1950–1952극동 담당 국무부 차관보
  • 1952–1961록펠러 재단 회장
  • 1961–1969미국 국무장관
  • 1970–1984그루지야대학교 국제법 교수

조지 볼

George Ball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09–1994 ○ 암으로 사망

쿠바 위기서 진주만 비유로 공습을 저지하고, 베트남전에서 홀로 확전을 반대한 국무차관

기습으로 쿠바를 치는 건 진주만과 똑같은 짓이다. 그게 어디로 갈지 생각하면 정말 소름이 끼친다... 미사일을 다 제거해도 그게 끝이 아니야. 그게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국무차관(1961–1966)으로 존 F. 케네디린든 B. 존슨 두 행정부에서 복무하며, 쿠바 미사일 위기와 베트남전이라는 냉전의 두 결정적 순간에 확전을 반대한 예외적 인물이었다. 1962년 10월 EXCOMM에서 기습 공습을 '또 하나의 진주만'이라 규정하며 로버트 케네디를 비롯한 다수를 봉쇄 쪽으로 돌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후 1965년까지 베트남 파병 확대에 홀로 반대하는 각료 내 유일한 반대자가 되었다. 퇴임 후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편향된 중동 정책을 비판했고, 유럽 통합의 초기 설계자 중 한 명으로 장 모네와 함께 슈만 계획과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조약의 초안을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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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42시카고에서 변호사 활동
  • 1942–1945렌드리스 관리국 · 전략폭격조사단
  • 1946–1961Cleary, Gottlieb, Steen & Hamilton 공동 창립
  • 1961국무부 경제담당 차관
  • 1961–1966국무차관
  • 1968유엔 주재 미국 대사
  • 1969–1982리먼 브라더스 선임 전무이사

라야 두나옙스카야

Raya Dunayevskaya
비소련 혁명가 미국 러시아 1910–1987 ○ 자연사

트로츠키의 비서에서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의 창시자로

“트로츠키와 결별한 후에야 내 진정한 발전이 시작되었다.” — 1980년대 인터뷰에서

러시아 제국 출신 유대계 이주민. 트로츠키의 비서로 출발했으나 소련 문제로 결별, C.L.R. 제임스와 국가자본주의론을 정립했다. 이후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을 창시하고 뉴스 앤 레터스 위원회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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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가족과 함께 미국 시카고로 이주
  • 1928트로츠키주의 옹호로 미국공산당 청년 조직에서 제명
  • 1929보스턴의 독립 트로츠키주의 그룹(코니코프 지도)에 합류
  • 1937–1938멕시코에서 트로츠키의 러시아어 비서 겸 속기사
  • 1939소련의 성격 문제로 트로츠키와 결별
  • 1940SWP 분열 참여 → 노동자당(WP) 결성
  • 1941–1943C.L.R. 제임스와 존슨-포레스트 경향 결성, 소련 국가자본주의론 정립
  • 1947SWP로 복귀
  • 1951한국전쟁 반대, SWP 재탈퇴, 코레스폰던스 출판위원회 결성
  • 1953헤겔 『정신현상학』 연구 — '철학적 계기'로서의 절대자 해석 제시
  • 1955C.L.R. 제임스와 결별, 뉴스 앤 레터스 위원회 창설
  • 1958『마르크스주의와 자유』 출간 (마르쿠제 서문)
  • 1973『철학과 혁명』 출간
  • 1982『로자 룩셈부르크, 여성해방, 마르크스의 혁명 철학』 출간
  • 1987시카고에서 77세로 사망

거스 홀

Gus Hall
비소련 혁명가 미국 핀란드계 1910–2000 ○ 당뇨 합병증 사망

41년간 미국 공산당을 이끈 핀란드계 노동운동가이자 네 차례 대선 후보

'미국의 사회주의는 투표함을 통해 올 것이다' — 1996년 클리블랜드 플레인 딜러와의 인터뷰에서.

핀란드계 이민 노동자의 아들로 철강 파업 현장에서 성장하여 41년간 미국 공산당을 이끈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다.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하고 스미스법으로 투옥된 후 당권을 장악, 모스크바 노선에 충실히 경도되어 네 차례 대선에 출마한 냉전기 미국 공산주의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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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미국 공산당 입당, 청년공산주의동맹 조직가
  • 1931–1933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 1935–1937철강노동자조직위원회(SWOC) 창립 참여, '리틀 스틸' 파업 주도
  • 1939클리블랜드 CPUSA 지도자
  • 1942–1946미 해군 기계병 복무 (괌)
  • 1948–1957스미스법 기소, 리븐워스 연방교도소에서 5년 이상 복역
  • 1959–2000CPUSA 서기장·의장
  • 1972–1984CPUSA 대통령 후보 (4회 출마)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11–2004 ○ 자연사

핵폐기를 진심으로 믿었으나 SDI만은 양보하지 않았던, 냉전의 마지막 미국 대통령

1986년 10월 12일 오후,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모든 핵무기를 2000년까지 폐기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40분 뒤, SDI 연구를 실험실에 가두라는 고르바초프의 조건을 레이건이 거부하면서 협상은 무너졌다.

로널드 레이건은 배우에서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거쳐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이 된 인물로, 레이거노믹스와 대규모 군비 증강으로 1980년대를 열었다. 취임 초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며 대결을 고조시켰으나, 핵무기 없는 세상을 진심으로 염원하여 고르바초프와 네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1986년 레이캬비크에서 전면 핵폐기 합의 직전까지 갔지만, 전략방위구상(SDI)을 양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협상은 막판에 결렬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 서명하여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을 통째로 폐기했고, 냉전은 그가 퇴임한 지 몇 달 만에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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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일리노이주 탬피코의 아일랜드계 가정에서 출생
  • 1937–1964할리우드 배우, 영화 53편 출연, 영화배우조합 회장 역임
  • 1967–1975캘리포니아 주지사, 대학 시위 진압과 복지 개혁 추진
  • 1981–1989제40대 대통령, 레이거노믹스·군비 증강·'악의 제국' 연설
  • 1986.10레이캬비크 정상회담, 전면 핵폐기 직전까지 갔으나 SDI로 결렬
  • 1987.06브란덴부르크문 앞 '이 벽을 허무시오' 연설
  • 1987.12INF 조약 서명, 중거리 핵미사일 전량 폐기
  • 1994–2004알츠하이머병 진단, 200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

헨리 M. 잭슨

Henry M. Jackson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12–1983 ○ 재임 중 사망

유대인 이민을 통상 지위와 묶어 데탕트를 흔든 민주당 매파 상원의원

미국민은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데탕트', 곧 사람과 사상의 자유로운 이동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이민자의 아들로 워싱턴주에서 태어나 40년 넘게 의회에서 활동한 냉전 자유주의자였다. 민권과 환경 정책에는 앞장섰지만 데탕트에는 회의적이어서, 소련의 유대인 이민을 통상 지위와 연결한 잭슨-배닉 수정안을 주도했다. 1974년 키신저·도브리닌과의 비공식 협상이 소련의 거부로 무산되며 잭슨은 1972년 통상협정을 사실상 좌초시킨 인물로 남았다. 그의 매파 보좌관들은 훗날 신보수주의의 핵심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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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0스노호미시군 검사장
  • 1941–1953연방 하원의원
  • 1953–1983연방 상원의원
  • 1963–1981내무·에너지·천연자원위원회 위원장
  • 1972·1976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출마
  • 1974잭슨-배닉 수정안 공동 발의

고든 스킬링

Harold Gordon Skilling
연구자 캐나다 캐나다 1912–2001 ○ 자연사

프라하의 봄을 기록한 캐나다 정치학자

그는 프라하의 봄을 ‘중단된 혁명’으로 명명해 개혁의 가능성을 역사적 질문으로 남겼다.

고든 스킬링은 체코슬로바키아 현대사와 정치의 권위 있는 연구자로 활동한 캐나다 정치학자였다. 그는 《중단된 혁명》에서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좌절된 실험이 아니라 외부 개입으로 중단된 개혁 혁명으로 분석해, 개혁 공산주의의 가능성을 둘러싼 논쟁에 오래 남을 틀을 제시했다. 토론토대학교에서 동유럽 연구 기반을 세운 그는 학술 연구와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화 세력에 대한 연대를 함께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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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런던대학교 박사 연구를 위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처음 방문
  • 1938–1939프라하에서 라디오 방송과 NBC·CBS 뉴스 업무
  • 1959토론토대학교 정치학 교수
  • 1960–1974러시아·동유럽 연구센터 창립 및 초대 소장
  • 1976《체코슬로바키아의 중단된 혁명》 출간
  • 1981왕립캐나다학회 이니스-게랭 메달 수상
  • 1992바츨라프 하벨에게 체코슬로바키아 백사자훈장 수훈

리처드 밀하우스 닉슨

Richard Milhous Nixon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13–1994 ○ 뇌졸중 사망

데탕트로 소련과 핵무기 제한의 틀을 열고 워터게이트로 무너진 유일한 사임 대통령

1959년 모스크바 미국 박람회의 모형 주방 앞에서, 닉슨은 흐루쇼프를 향해 "우리도 색채 텔레비전에서는 앞서 있다"고 응수하며 즉흥적인 체제 논쟁을 벌였다.

반공 조사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하원의원에서 부통령을 거쳐, 두 차례의 낙선을 딛고 1968년 대통령에 오른 집요한 정치인이었다. 냉전의 대표적 반공 인사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소련 및 중국과의 데탕트를 주도하여, 1972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브레즈네프와 ABM 조약 및 SALT I 잠정협정에 서명했다. 초강대국 간 핵무기 제한의 첫 국제법적 틀이었다. 베트남전을 '명예로운 평화'로 종결시키고 중국 방문으로 미중 관계의 문을 열었으나,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1974년 8월 9일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사임한 대통령이 되었다. 퇴임 후 외교 원로로서 이미지를 회복했으나, 그의 유산은 데탕트의 성취와 대통령직을 무너뜨린 불법 사이에 영원히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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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50캘리포니아 12구 연방 하원의원; 반미활동위원회에서 앨저 히스 사건으로 전국적 명성
  • 1950–1953캘리포니아주 연방 상원의원
  • 1953–1961미국 부통령 (아이젠하워 행정부), 1959년 모스크바 '주방 논쟁'
  • 1961–1968변호사 개업, 저술, 1962년 주지사 선거 낙선 후 정치적 재기
  • 1969–1974제37대 미국 대통령; 1972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SALT I·ABM 조약 서명, 베트남전 종결, 중국 방문; 1974년 워터게이트로 사임

제럴드 포드

Gerald Ford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13–2006 ○ 사망

선거로 뽑히지 않은 채 데탕트의 마지막 국면을 이끈 대통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기차에서 워싱턴의 눈 치우기가 힘들다는 포드의 말에 브레즈네프가 '우리의 첫 거래는 죽 드리죠, 소련 제설차'라고 받았다.

하원의원 25년과 부통령을 거쳐 1974년 닉슨의 사임으로 대통령이 된 공화당 정치가로, 한 번도 선거로 뽑히지 않고 백악관에 오른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다. 닉슨이 연 데탕트를 계승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브레즈네프를 만나 SALT II의 틀, 운반수단 2,400기와 MIRV 1,320기의 상한을 잡았고, 이듬해 헬싱키 최종의정서에 서명하며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법으로 만들었다. 닉슨에 대한 사면이 최대 논란이 되었고, 1976년 카터에게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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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73하원의원 (미시간 5선거구)
  • 1965–1973하원 소수당 원내대표
  • 1973–1974부통령
  • 1974–1977제38대 미국 대통령
  • 1974.11블라디보스토크 회담, 브레즈네프와 SALT II 기본 틀 합의

찰스 배닉

Charles Vanik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계 체코인 1913–2007 ○ 자연사

이민의 자유를 무역법에 새긴 의원

1974년 그는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하원에 제출해 이민의 자유를 무역 조건으로 만들었다.

찰스 배닉은 클리블랜드 동부의 노동자와 동유럽계 주민을 기반으로 활동한 민주당 하원의원이었다. 그는 조세 형평, 사회보장, 메디케어, 오대호 환경 문제를 다루며 국내 개혁 의제를 외교정책과 연결했다. 1974년 헨리 잭슨과 함께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발의해, 이민을 제한하는 비시장경제 국가에 대한 정상 무역관계 부여를 조건부로 묶었다. 이 법은 소련계 유대인을 비롯한 종교적 소수자의 이주를 압박하는 수단이 되었지만, 데탕트와 무역을 인권 조건에 연계한 미국 의회의 개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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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39클리블랜드 시의회 의원
  • 1940–1942오하이오주 상원의원
  • 1942–1945미 해군 예비역 장교, 대서양·태평양 전선 복무
  • 1947–1954클리블랜드 시 법원 판사
  • 1955–1969미국 하원의원, 오하이오 제21선거구
  • 1969–1981미국 하원의원, 오하이오 제22선거구
  • 1973–1981하원 세입위원회 무역소위원회 위원장
  • 1985–1995Squire Sanders & Dempsey 워싱턴 사무소 변호사, 동유럽 무역 담당
  • 2007플로리다주 주피터에서 사망

제라드 스미스

Gerard C. Smith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14–1994 ○ 자연사

핵시대의 협상가

제라드 C. 스미스는 미국의 변호사이자 핵정책 전문가로, 군비통제와 비확산을 국가정책의 문제로 다룬 외교관이었다. 그는 SALT I에서 미국 대표단을 이끌며 경쟁하는 핵전략 속에서 제한 협상의 실무를 조직했고, 회고록 Doubletalk에 그 과정의 긴장과 판단을 기록했다. 이후에도 핵물질 전용 방지와 탄도탄요격미사일 조약의 보존을 주장하며 군비경쟁의 관리와 한계를 함께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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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예일대학교 졸업
  • 1938예일 법학대학원 졸업, 뉴욕 변호사
  • 1942–1945미 해군성 조달 담당관
  • 1950–1954원자력위원회 특별보좌관
  • 1954–1961국무부 원자력 담당 특별보좌관 및 정책기획국장
  • 1969–1973미국 군비통제·군축청장, SALT I 미국 대표단 수석협상가
  • 1977–1980대통령 특별대표, 핵확산 방지 담당
  • 1981대통령 자유훈장 수훈

아서 룬달

Arthur C. Lundahl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15–1992 ○ 호흡부전으로 사망

U-2 정찰사진으로 쿠바 미사일 위기의 문을 연 사진판독의 대부

"내 생애 이보다 옳았으면 싶었던 적은 없다": 1962년 10월 15일, 쿠바 상공 U-2 사진에서 소련 미사일을 확인하며

시카고 출신의 지질학자로 제2차 세계대전 중 해군 사진판독 장교로 경력을 시작했다. 1953년 CIA에 합류해 사진판독부를 이끌었고, 1961년 국가사진판독센터(NPIC)의 초대 소장이 되어 U-2 정찰기와 초기 정찰위성의 영상 분석을 총괄했다. 1962년 10월 15일, NPIC 분석관들이 쿠바 상공 U-2 사진에서 소련 SS-4 중거리탄도미사일 기지를 식별했을 때 룬달이 직접 확인하고 '내 생애 이보다 옳았으면 싶었던 적은 없다'는 말과 함께 CIA 본부에 보고했으며, 다음 날 백악관에서 케네디 대통령에게 이를 브리핑했다. 1973년 퇴임까지 NPIC를 이끌며 냉전기 미국의 영상정보 역량을 구축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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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2시카고 대학 지질학 학사·석사
  • 1942–1945미 해군 사진판독 장교
  • 1946–1953해군사진판독센터 측량과장
  • 1953–1961CIA 사진판독부장
  • 1961–1973국가사진판독센터(NPIC) 초대 소장
  • 1973국가안보훈장 수상 및 퇴임

그레이스 리 보그스

Grace Lee Boggs
비소련 혁명가 미국 중국 1915–2015 ○ 자연사

마르크스 1844년 수고 첫 영역자에서 디트로이트 혁명의 철학자로

“우리가 바로 우리가 기다려온 지도자다.” — 90대 디트로이트 인터뷰에서

중국 이민 노동자의 딸로 브린마에서 철학 박사를 받았으나 인종차별로 학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노동자당에 입당했다. C.L.R. 제임스, 라야 두나옙스카야존슨-포레스트 경향의 3인 핵심으로서 소련 국가자본주의론과 『국가자본주의와 세계혁명』을 공저했고, 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수고』를 최초로 영역했다. 1953년 흑인 자동차 노동자 제임스 보그스와 결혼 후 디트로이트에 정착해 트로츠키주의와 결별하고 흑인해방 중심의 공동체 혁명 실천으로 전환, 90대까지 『다음 미국 혁명』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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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에서 중국 이민자 식당 주인의 딸로 출생, 중국명 위핑(玉平)
  • 1935바너드 칼리지 졸업
  • 1940브린마 칼리지에서 조지 허버트 미드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 취득
  • 1940–1945시카고 대학 철학 도서관에서 저임금 사서로 근무, 세입자 권리 운동으로 노동자당 입당
  • 1945–1947C.L.R. 제임스·두나옙스카야와 존슨-포레스트 경향 결성, 마르크스 『1844년 수고』 첫 영역
  • 1947SWP에 합류, 필명 '리아 스톤'으로 존슨-포레스트 경향 저술 활동
  • 1950제임스·두나옙스카야와 『국가자본주의와 세계혁명』 공동 저술
  • 1951SWP 탈퇴, 코레스폰던스 출판위원회 결성 참여
  • 1953흑인 자동차 노동자·정치 활동가 제임스 보그스와 결혼, 디트로이트로 이주
  • 1962C.L.R. 제임스와 결별, 부부 독자 노선으로 코레스폰던스 이끌며 디트로이트 공동체 운동 집중
  • 1964맬컴 엑스에게 미 상원 출마를 설득하려 시도했으나 무산
  • 1970디트로이트 아시아 정치연합 공동 창립
  • 1974제임스 보그스와 『20세기의 혁명과 진화』 출간
  • 1979전미혁명기구(NOAR) 창립 참여
  • 1992다문화 세대 간 청년 프로그램 '디트로이트 서머' 창립
  • 1998자서전 『변화를 위한 삶』 출간
  • 201195세에 스콧 쿠라시게와 『다음 미국 혁명』 출간
  • 2015디트로이트에서 100세로 사망, 오바마 대통령 애도 성명 발표

로버트 맥나마라

Robert McNamara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16–2009 ○ 자연사

베트남전을 주도하고 쿠바 위기에서 핵전쟁을 막은, 양적 분석의 국방장관

쿠바 미사일 위기의 가장 큰 교훈: 인간의 오류 가능성과 핵무기의 무기한 결합은 국가들을 파괴할 것이다.

미국 제8대 국방장관(1961–1968)으로, 케네디와 존슨 두 행정부에서 7년 이상 국방을 이끈 최장수 재임자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EXCOMM 내 공습 대신 해상 '격리' 봉쇄를 처음 제시하고 강력히 밀어붙여, 흐루쇼프에게 결의를 보여주면서도 군사 충돌로 번지지 않을 통제된 선택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는 계량적 분석과 병력 증강을 주도하다 점차 회의에 빠졌고, 퇴임 27년 뒤 회고록에서 그 전쟁이 '잘못됐다'고 고백했다. 이후 세계은행 총재(1968–1981)로 빈곤 퇴치로 은행의 방향을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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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6USAAF 통계통제실, 중령 전역
  • 1946–1960포드 자동차, 사장(1960)
  • 1961–1968제8대 미국 국방장관
  • 1968–1981세계은행 총재

존 F. 케네디

John F. Kennedy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17–1963 ✕ 댈러스에서 암살

냉전의 최전선에서 핵전쟁 직전까지 간 최연소 미국 대통령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으라.

미국 제35대 대통령(1961–1963)으로, 43세의 최연소 당선자이자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이었다. 1961년 피그만 침공을 승인했으나 실패로 끝났고, 같은 해 흐루쇼프와의 빈 정상회담에서 위협을 느낀 소련은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했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해상 '격리' 봉쇄를 선택하고, 로버트 케네디를 통해 튀르키예의 주피터 미사일 철수라는 비밀 양보로 핵전쟁을 막았다. 1963년 11월 22일 댈러스에서 암살당했으며, 그의 죽음 이후 민권법과 세제 개혁 등 의제가 의회를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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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1953매사추세츠주 하원의원
  • 1953–1960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 1961–1963제35대 미국 대통령

아서 M. 슐레진저

Arthur M. Schlesinger Jr.
연구자 미국 미국계 1917–2007

자유주의를 변호한 역사가이자 권력의 내부 기록자

피그만 침공 뒤 그는 결정적 회의에서 더 크게 경고하지 못한 자신을 두고 "나는 몹시 자책했다"고 회고했다.

아서 M. 슐레진저 주니어는 미국 자유주의와 대통령 권력의 역사를 탐구한 역사가이자 공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존 F. 케네디 행정부의 특별보좌관으로 라틴아메리카 문제와 연설문을 다루며 피그만 침공에 반대했지만, 결정적 회의에서 침묵한 책임도 훗날 인정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 국가안보회의 집행위원이 아니었으나 유엔 주재 대사 애들레이 스티븐슨의 위기 발표 작성을 도왔다. 1965년의 『A Thousand Days』는 케네디의 위기 관리를 정교한 지도력의 서사로 각인시켰고, 이후 연구자들은 그 영웅적 기억이 배제한 쿠바와 소련의 행위, 비밀 합의, 구조적 위험을 다시 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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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하버드대학교 학사, 최우등 졸업
  • 1939–1942하버드대학교 펠로
  • 1943–1945전략정보국 분석관
  • 1946–1962하버드대학교 역사학 교수
  • 1961–1964케네디 대통령 특별보좌관
  • 1966–1994뉴욕시립대학교 대학원 인문학 교수
  • 1965『A Thousand Days』 출간, 1966년 퓰리처상 수상

맥조지 번디

McGeorge Bundy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19–1996 ○ 심장마비

쿠바 미사일 위기 첫날 밤,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기로 한 국가안보보좌관

레이 클라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가 걱정해온 그것들, 정말 있는 것 같습니다.' 번디가 물었다. '확실한가?'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1961–1966)으로,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에서 베트남전 확전의 핵심 설계자였다. 1962년 10월 15일 저녁 CIA로부터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 증거를 보고받았으나, 비밀 유지와 준비 부족을 이유로 다음 날 아침까지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1966년 퇴임 후 포드재단 회장을 지냈고, 말년에는 핵무기 선제사용 포기를 주창하며 핵군축 논의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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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예일대학교 수학 학사
  • 1943–1946미군 정보장교
  • 1949–1953하버드대학교 정부학 교수
  • 1953–1961하버드대학교 문리학부 학장
  • 1961–1966미국 국가안보보좌관
  • 1966–1979포드재단 회장
  • 1979–1989뉴욕대학교 역사학 교수

발터 슈텔레

Walter Stoessel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계 1920–1986 ○ 자연사

데탕트의 현장을 지킨 직업 외교관

1974년 3월 4일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로 신임장을 제정했다.

발터 슈텔레는 냉전기 미국 외교관으로, 소련과 유럽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룬 직업 외교관이었다. 그는 1974년부터 1976년까지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로서 데탕트 국면의 미소 협상을 현장에서 지켜봤고, 헬싱키 협정으로 이어진 외교 과정과도 맞닿아 있었다. 이후 서독 대사와 국무부 부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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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4미 육군 복무
  • 1947–1953국무부 동유럽·소련 담당
  • 1963–1965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관 공사
  • 1968–1972폴란드 주재 미국대사
  • 1972–1974유럽·캐나다 담당 국무부 차관보
  • 1974–1976소련 주재 미국대사
  • 1976–1981서독 주재 미국대사
  • 1982–1983미 국무부 부장관

조지 프랫 슐츠

George Shultz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20–2021 ○ 노환 · 100세

레이건 곁에서 고르바초프와의 대화를 밀어붙여 냉전 종식을 이끈 국무장관

슐츠는 레이건 부부와의 저녁 식사에서 소련 지도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듣고 깨달았다. '이 사람은 공산당 지도자와 대화를 해본 적이 없고, 몹시 하고 싶어 하는구나.'

조지 슐츠는 노동·예산·재무·국무의 4개 부처 장관을 모두 지낸 두 미국인 중 하나로, 레이건 행정부에서 6년 반 동안 국무장관을 맡아 대소 외교의 방향을 다시 썼다. 국방장관 와인버거와 CIA 국장 케이시가 협상을 반대하는 가운데서도 슐츠는 레이건이 고르바초프와 직접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제네바(1985)와 레이캬비크(1986) 정상회담의 외교적 토대를 놓았다. 그 결과 1987년 INF 조약으로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 전체가 폐기되었고, 슐츠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동유럽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냉전의 종식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의 회고록 『격랑과 승리』는 1980년대 외교사의 핵심 사료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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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뉴욕시 출생, 뉴저지주 엥글우드에서 성장
  • 1942–1945해병대 장교, 앙가우르 전투 참전
  • 1969–1974노동장관 → OMB 국장 → 재무장관, 브레턴우즈 체제 종료
  • 1974–1982벡텔 사장, 중동 건설 사업 확장
  • 1982–1989국무장관, 제네바·레이캬비크 정상회담, INF 조약
  • 1989–2021스탠퍼드 후버연구소 선임연구원, 핵군축 및 탄소세 운동
  • 1993회고록 『격랑과 승리』(Turmoil and Triumph) 출간

게일 할보르센

Gail Halvorsen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계 1920–2022 ○ 자연사

선의의 행동을 국제적 상징으로 만든 공군 조종사

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비행기를 알리는 방법을 묻자 날개를 흔들겠다고 약속했다.

게일 할보르센은 미국 공군 조종사로, 1948년 베를린 공수작전에 참여해 서베를린의 생존을 뒷받침한 수송 임무를 수행했다. 템펠호프 공항 철책가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껌을 건넨 뒤 손수건 낙하산으로 사탕을 떨어뜨린 일은 Operation Little Vittles로 확대되어 공수작전의 물자 수송에 인간적 얼굴을 더했다. 이 자발적 행동은 미군의 규정과 냉전 선전의 경계에 놓였지만, 베를린 주민과 미국 어린이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며 서방의 정치적 호소력을 키웠다. 그는 이후에도 공군의 항공·우주 개발과 베를린 템펠호프 지휘를 맡았고 1974년 대령으로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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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미 육군항공대 입대, 조종사 훈련
  • 1948–1949베를린 공수작전 C-54 조종사, Operation Little Vittles 창시
  • 1952–1957라이트 항공개발센터 항공화물기 연구개발 담당
  • 1958–1962공군 체계사령부 우주체계 부문 근무
  • 1965–1969공군 본부 우주·기술국, 유인 재사용 우주선 계획 담당
  • 1970–1972베를린 템펠호프 공항 제7350 공군기지단 지휘관
  • 1974미 공군 대령으로 퇴역

게이브리얼 잭슨

Gabriel Jackson
연구자 미국 미국계 1921–2019 ○ 자연사

스페인 공화국과 내전을 해석한 미국 역사학자

게이브리얼 잭슨은 미국의 스페인 현대사 연구자이자 역사가, 저널리스트였다. 1965년 저서 《스페인 공화국과 내전》은 영어권에서 제2공화국과 내전을 종합적으로 다룬 초기 연구로, 공화파 내부의 정치적 갈등까지 분석한 작업이었다. 그는 공화파의 제도적 개혁과 PCE의 전쟁 수행을 상대적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한 반면, POUM과 혁명적 좌파의 전략을 비현실적으로 보았으며, 이 해석은 내전사 논쟁의 한 축이 되었다. 매카시즘으로 학문 경력이 지연되었지만 UC 샌디에이고에서 현대 유럽사를 가르쳤고, 은퇴 뒤에도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 역사에 관한 저술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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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하버드대학교 역사·문학 학사
  • 1942–1946미군 복무, 항공기 정비·사진 판독·지도 제작
  • 1950스탠퍼드대학교 현대사 석사
  • 1952툴루즈대학교 현대·현대사 박사
  • 1965–1983UC 샌디에이고 현대 유럽사 교수
  • 1965–1969UC 샌디에이고 역사학과장
  • 1969–1971UC 샌디에이고 교수평의회 의장
  • 1983–2019명예교수·스페인 역사 저술가
이론가 미국 폴란드 1923–2018 ○ 노환으로 사망

10월 혁명을 '쿠데타'로 규정한 냉전기 러시아사의 대표적 보수 해석자

1917년 10월에 일어난 것은 대중의 지지 없는 고전적 현대 쿠데타였다... 거짓 구호 아래 현대 국가의 신경 중추를 은밀히 장악한 것이었다.

폴란드 태생의 미국 역사가로, 소련학 '전체주의 학파'의 지적 설계자였다. 그의 2권짜리 대작은 10월 혁명이 대중 봉기가 아니라 권력에 굶주린 소수 지식인들의 쿠데타였으며 볼셰비키 통치는 처음부터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이었다고 주장했다. 팀B(1976) 책임자와 레이건 행정부 NSC 소련·동유럽 국장(1981~82)을 지내며 자신의 학문을 대소 강경 정책으로 옮겼고, 이는 훗날 소련 붕괴를 앞당긴 요인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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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96하버드 대학교 러시아사 교수
  • 1968–1973하버드 러시아연구소 소장
  • 1976CIA 팀B 책임자, 소련 전략역량 경쟁분석
  • 1981–1982레이건 NSC 소련·동유럽 담당 국장
  • 1990『러시아 혁명』 출간
  • 1994『볼셰비키 치하의 러시아』 출간
  • 1997『러시아 혁명의 세 가지 의문』 출간

헨리 앨프리드 키신저

Henry Alfred Kissinger
외국 정치가 미국 독일 1923–2023 ○ 자연사

데탕트와 '연계' 전략으로 초강대국 핵무기 통제의 틀을 설계한, 현실주의 외교의 화신

1972년 파판치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은 마차 대열을 홀로 앞서 달리는 카우보이를 좋아합니다. 이 낭만적인 캐릭터는 제게 꼭 맞습니다"라고 말해 닉슨을 격노시켰다.

나치 독일을 피해 15세에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난민 출신으로, 하버드대에서 현실주의 외교 이론을 정립하고 닉슨·포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냈다. 소련과의 데탕트를 주도하며 '연계' 전략을 고안, 도브리닌 주미 소련대사와의 비밀 배후채널을 통해 1972년 SALT I과 ABM 조약을 성사시키는 결정적 외교를 펼쳤다. 중국 비밀 방문으로 미중 화해의 문을 열고 파리 평화협정을 중재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나, 캄보디아 폭격과 제3세계 개입으로 전쟁범죄 논란 역시 끌어안은 복합적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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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3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 시티칼리지에서 회계학 수학 후 미군 입대
  • 1943–194984보병사단 정보장교로 유럽 전선 참전, 방첩대 요원으로 게슈타포 색출 및 탈나치화 임무
  • 1950–1969하버드대 정치학 교수, 국방연구프로그램 소장; 록펠러·닉슨 캠페인 외교 고문
  • 1969–1975국가안보보좌관: 데탕트·대중국 개방·SALT I 협상 주도, 도브리닌과의 배후채널 운영
  • 1971–1972중국 비밀 방문으로 마오쩌둥·저우언라이와 회담, 닉슨 방중 길을 열다
  • 1973–1977국무장관: 파리 평화협정, 노벨 평화상(1973), 중동 셔틀 외교; 칠레 쿠데타 연루
  • 1977–2023키신저 어소시에이츠 설립, 저술 및 12명의 대통령에 대한 외교 자문

마틴 에드워드 말리아

Martin Edward Malia
연구자 미국 미국인 1924–2004 ○ 자연사

소련 붕괴를 예견한 역사 해석자

그는 ‘Z’라는 이름으로 고르바초프가 공산주의의 모순을 넘지 못하리라 썼고, 훗날 그 글의 필자를 인정했다.

마틴 말리아는 러시아와 유럽의 지성사를 연구한 미국 역사가로, 버클리에서 러시아사 연구와 교육을 이끌었다. 그는 《소련의 비극》에서 레닌주의 사회주의의 자기완결적 설계가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함께 잠식해 소련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1990년에는 ‘Z’라는 필명으로 「스탈린 묘에 부쳐」를 발표해 고르바초프의 개혁이 공산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의 해석은 소련 붕괴를 설명하는 강력한 한 극을 이루었지만, 사회주의의 역사적 가능성을 이념 자체의 결함으로 환원한다는 논쟁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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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예일대학교 프랑스어 학사
  • 1951하버드대학교 역사학 박사
  • 1954–1958하버드대학교 역사학 조교수
  • 1955미 의회도서관 러시아 도서 교환 특별 보좌
  • 1958–1991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역사학 교수
  • 1991–2004버클리 명예교수, 저술 활동
  • 1994《소련의 비극》 출간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24–2018 ○ 자연사

몰타에서 고르바초프와 냉전 종식을 선언했지만, 신중함이 거의 역사를 놓칠 뻔했던 미국 대통령

몰타 공동 기자회견에서 부시는 말했다. '우리는 항구적 평화를 실현할 수 있으며 동서 관계를 지속적 협력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고르바초프 의장과 제가 바로 이곳 몰타에서 시작한 미래입니다.'

조지 H. W. 부시는 제2차 세계대전의 해군 조종사에서 석유 사업가를 거쳐 미국 제41대 대통령이 된 인물로, CIA 국장·유엔 대사·중국 주재 대표를 두루 지낸 외교 경험을 바탕으로 냉전의 마지막 4년을 이끌었다. 1989년 취임 직후 대소 정책 재검토라는 '부시 휴지기'로 고르바초프를 조바심나게 했으나, 그해 12월 몰타 회담에서 두 정상은 냉전의 종식을 공동으로 확인했고, 이듬해 독일 통일을 지지하며 유럽의 새 질서를 다졌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는 다국적군을 조직해 걸프전으로 응수했으나, 불황 속에 '새로운 세금은 없다'는 공약을 깨면서 1992년 재선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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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매사추세츠주 밀턴의 부유한 정치 명문가에서 출생
  • 1942–1945해군 뇌격기 조종사로 58회 출격, 지치지마에서 격추되어 잠수함에 구조
  • 1953–1966자파타 오프쇼어 석유회사 창업, 텍사스의 백만장자
  • 1967–1971텍사스주 하원의원, 두 차례 상원 선거 낙선
  • 1971–1977유엔 대사, 공화당 전국위 의장, 중국 주재 대표, CIA 국장
  • 1981–1989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아래 부통령
  • 1989–1993제41대 대통령: 몰타 회담으로 냉전 종식, 독일 통일 지지, 걸프전
  • 2018휴스턴에서 94세로 사망

지미 카터

Jimmy Carter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24–2024 ○ 자연사

데탕트의 정점과 종말을 모두 품은 미국의 39대 대통령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후, 카터는 1980년 1월 국정연설에서 '페르시아만 지역에 대한 외부 세력의 지배 시도는 미합중국의 중대한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루지야 땅콩 농장에서 자란 침례교도로, 해군 핵잠수함 장교를 거쳐 남부의 인종차별 철폐를 공약한 '뉴사우스' 주지사가 되었다. 1976년 워싱턴 아웃사이더를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파나마 운하 반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성사시켰다. 1979년 6월 빈에서 브레즈네프와 SALT II에 서명하며 데탕트를 정점으로 이끌었으나, 같은 해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조약 비준을 철회하고 카터 독트린을 선언하며 데탕트의 종막을 알렸다. 퇴임 후 카터 센터를 설립해 인권과 공중보건, 분쟁 중재에 헌신했으며,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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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1967그루지야주 상원의원
  • 1971–1975제76대 그루지야 주지사
  • 1977–1981제39대 미국 대통령
  • 1982카터 센터 설립
  • 2002노벨 평화상 수상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25–1968 ✕ 로스앤젤레스에서 암살

형 대통령의 최측근 법무장관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 타결의 실무자가 된 정치인

그는 훗날 이렇게 적었다. 〈전면 기습 공격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그것이 역(逆)진주만이 되어 전 세계의 눈에 미국의 이름을 더럽히리라는 점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남동생이자 가장 신임받는 정치 고문으로, 35세에 법무장관이 되어 조직범죄 소탕과 시민권 보호에 앞장섰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초기에는 침공을 선호했으나, 해상 봉쇄 측으로 전환한 뒤 위기 후반 도브리닌 소련 대사와의 비밀 회담에서 튀르키예 미사일 철수 약속을 전하며 타결의 열쇠가 되었다. 형의 암살 후 상원의원으로 베트남 전쟁 반대와 빈곤 퇴치에 나섰고, 1968년 대선 경선 중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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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존 F. 케네디 상원 선거 캠프 매니저
  • 1953–1955상원 상설조사소위원회(매카시 위원회) 법률고문
  • 1957–1959상원 노동부패조사위원회(매클렐런 위원회) 수석법률고문
  • 1961–1964제64대 미국 법무장관
  • 1965–1968뉴욕주 상원의원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계 1925–2020 ○ 자연사

냉전 종식기의 신중한 전략가

몰타 회담은 시기상조일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결국 회담의 핵심 참모로 참여했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는 미국 공군 장교 출신의 국가안보 관료로, 대통령과 외교·군사 관료 사이의 정책 조정을 중시한 현실주의적 전략가였다. 그는 제럴드 포드조지 H. W. 부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내며 냉전 말기의 군비·유럽 외교를 조율했다. 1989년 몰타 회담에는 성급한 정상회담이 기대만 키울 수 있다며 처음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지만, 회담이 열리자 미소 관계의 전환을 관리하는 핵심 참모로 참여했다. 이후에도 동맹과 국제기구를 중시하며 이라크 침공과 일방주의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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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미국 육군사관학교 졸업, 미국 공군 소위 임관
  • 1953컬럼비아 대학교 국제관계학 석사
  • 1967컬럼비아 대학교 국제관계학 박사
  • 1972–1973리처드 닉슨 대통령 군사보좌관
  • 1973–1975국가안보 담당 대통령 부차관보
  • 1975–1977제럴드 포드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 1989–1993조지 H. W. 부시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 2001–2005대통령 외국정보자문위원회 의장

스베틀라나 이오시포브나 알릴루예바

Светлана Иосифовна Аллилуева
작가·예술가 미국 러시아 1926–2011 ○ 결장암으로 사망

스탈린의 외동딸이자 크렘린을 버린 최초의 목격자

2010년 인터뷰에서 그녀는 말했다. "그는 내 인생을 망가뜨렸다" — 문학 공부를 거부하고 카플레르를 체포했을 때.

이오시프 스탈린의 외동딸로, 1967년 인도에서 미국으로 망명하여 크렘린 내부를 서방에 최초로 증언한 회고록으로 국제적 파장을 일으켰다. 《친구에게 보내는 스무 통의 편지》는 아버지의 사적 면모와 소비에트 지배층의 삶을 폭로한 기록으로 평가되며, 이후 귀환과 재망명을 거듭하면서도 평생 스탈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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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 졸업
  • 1954문헌학 후보학위 취득
  • 1956–1967세계문학연구소 연구원 및 번역가
  • 1967인도에서 미국으로 망명, 《친구에게 보내는 스무 통의 편지》 출간
  • 1978미국 시민권 취득, 라나 피터스로 개명
  • 1984–1986소련 귀환 후 재차 미국으로 이주

리처드 하이저

Richard Heyser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27–2008 ○ 뇌졸중으로 사망

6분 동안 928장을 찍어 세계를 핵전쟁 직전으로 몰아넣은 U-2 정찰 조종사

「나는 내가 이 모든 일을 시작한 사람으로 기억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평판을 원하지 않았다.」, 2005년 AP 통신 인터뷰에서

플로리다주 아팔라치콜라 출신으로 17세에 육군항공대에 입대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전투 임무를 수행한 미 공군 조종사였다. 1962년 10월 14일 일요일 아침 쿠바 상공을 6분 동안 비행하며 촬영한 928장의 사진에서 소련의 SS-4 중거리탄도미사일이 확인되었고, 이 사진이 케네디 대통령의 책상에 올라가며 13일간의 핵전쟁 위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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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미 육군항공대 입대
  • 1952공군 조종사 훈련 시작, 한국전쟁 전투 출격
  • 1957U-2 기종 전환 훈련 수료 (50번째 U-2 조종사)
  • 1957–1962제4080전략정찰비행단 U-2 조종사
  • 1962.10.14쿠바 상공 정찰비행(임무 3101), 소련 미사일 포착
  • 1960s베트남전쟁 두 차례 전투 배치
  • 1974중령으로 30년 복무 후 퇴역

테드 소렌슨

Ted Sorensen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28–2010 ○ 뇌졸중으로 사망

쿠바 위기에서 케네디의 펜을 잡은 연설문 작성자, '격리'라는 길을 낸 사람

'그 유명한 구절을 당신이 썼습니까?'라는 질문에 소렌슨의 평생 대답은 '묻지 마시라(Ask not)'였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수석 연설문 작성자이자 측근 보좌관으로, 케네디는 그를 '나의 지적 혈액은행'이라 불렀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합동참모본부의 공습 주장에 맞서 해상 봉쇄를 지지했고, 10월 22일 대국민 TV 연설을 초안하며 '봉쇄(blockade)' 대신 '격리(quarantine)'라는 용어를 선택해 전쟁 선포의 법적 함정을 피했다. 후일 이 연설을 '지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케네디의 연설'이라고 평했으며, 흐루쇼프와의 비밀 서한 초안도 작성했다. 케네디 암살 후 린든 존슨의 '계속 나아갑시다' 연설을 기초하고 1964년 사임, 이후 변호사와 저술가로 활동하며 2008년 버락 오바마를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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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61존 F. 케네디 상원의원 수석 입법 보좌관
  • 1961–1964대통령 특별고문 겸 수석 연설문 작성자
  • 1964–1966저술가 (『케네디』 출간, 국제적 베스트셀러)
  • 1966–2010국제 변호사, Paul, Weiss 로펌
  • 1977CIA 국장 지명자 (인준 철회)
외국 정치가 미국 폴란드 1928–2017 ○ 노환으로 사망

소련을 아프간 늪으로 끌어들인 카터의 국가안보보좌관

그 비밀 작전은 탁월한 발상이었다. 그것은 러시아인들을 아프간 덫으로 끌어들였다… 소련이 국경을 넘던 날 나는 카터 대통령에게 썼다: 우리는 지금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를 가졌다.

폴란드 출신의 미국 정치학자이자 외교 전략가로, 카터 행정부(1977–1981)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다. 소련 견제를 위한 인권 외교와 대중국 관계 정규화,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주도했으며, 카터 독트린으로 페르시아만 군사 개입 의지를 천명했다. 1979년 7월 3일, 소련 개입을 유발할 위험을 알리는 메모를 대통령에게 보내면서도 무자헤딘 비밀 원조 지시에 서명했으며, 훗날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라 평했다. 냉전 후에는 《거대한 체스판》(1997)으로 유라시아 지정학과 NATO 확장을 주창하며 미국 외교에 지속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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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1981국가안보보좌관
  • 1973–19763극위원회 디렉터
  • 1966–1968국무부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 1960–1972컬럼비아대학교 교수, 공산권연구소 소장
  • 1953–1960하버드대학교 교수
  • 1981–2017존스홉킨스대학교 SAIS 교수, CSIS 고문

폴 에이브리치

Paul Avrich
연구자 미국 러시아 1931–2006 ○ 자연사

『크론시타트 1921』로 러시아·미국 아나키즘사를 개척한 역사가

명예교수로 임명됐을 때 그를 소개하며 인용된 말, '진정 좋은 사람이라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누구나 아나키스트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오데사 출신 유대인 이민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퀸스 칼리지에서 평생 러시아와 미국의 아나키즘 운동사를 가르친 개척적 역사가였다. 『크론시타트 1921』(1970)으로 볼셰비키가 그 봉기를 반혁명 음모로 규정한 신화를 실증적으로 깨뜨렸으며, 훗날 게츨러의 명부 연구가 더 정밀한 수치를 내놓자 그 우위를 인정했다. 아나키스트를 '부도덕하고 폭력적'으로 보는 편견에 맞서 그들을 '사회정의의 선구자'로 복원하려 했고, 평생 모은 2만 점의 자료를 미국 의회도서관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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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뉴욕 브루클린 출생
  • 1952코넬대학교 졸업
  • 1950년대 초미 공군으로 한국전쟁 참전
  • 1961컬럼비아대학교 박사 학위, 퀸스 칼리지 강사 임용
  • 1967첫 책 『러시아의 아나키스트들』 출간
  • 1970『크론시타트 1921』 출간
  • 1984『헤이마켓 비극』으로 필립 태프트 노동사 도서상 수상
  • 1999퀸스 칼리지에서 퇴임

레너드 H. 퍼루츠

Leonard H. Perroots
군사 · 국방 미국 미국 1933–2017 ○ 자연사

핵전쟁의 문턱에서 신중함을 택한 정보장교

소련의 핵준비가 비정상적이었지만 나토 경보를 더 높이지 말라고 권고했다.

레너드 H. 퍼루츠는 미국 공군 장성이자 군사정보 전문가로, 냉전 말기의 핵위기 관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3년 유럽 주둔 미 공군 정보참모차장으로서 소련군의 비정상적 핵 readiness를 관찰했지만 나토의 경보 수준을 올리지 말도록 권고해 긴장을 더 키우지 않았다. 이후 국방정보국장을 지내며 정보 판단과 군사 의사결정의 관계를 보여 주었고, 말년에는 애이블 아처 83의 위험을 되돌아보는 보고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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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미 공군 임관
  • 1970년대공군 지휘·정보 보직
  • 1982–1984유럽 주둔 미 공군 정보참모차장
  • 1983애이블 아처 83 당시 나토 경보 격상에 신중한 판단을 권고
  • 1984–1985미 공군 정보참모차장
  • 1985–1988국방정보국장
  • 1989미 공군 퇴역
  • 2017사망

알렉산더 예브게니예비치 라비노비치

Alexander Evgen'evich Rabinowitch
연구자 미국 미국 1934–2026 ○ 노환으로 사망

냉전 쿠데타 테제를 기록으로 뒤집은 러시아 혁명의 수정주의 역사가

나는 오히려 당의 내적으로 비교적 민주적이고 관용적이며 분권화된 구조와 운영 방식, 그리고 당시 대중의 정서에 대한 민감성을 강조할 것이다.

러시아 혁명사 연구의 수정주의 학파를 대표하는 미국 역사학자. 1960년대부터 소련 기록보관소에서 작업한 최초의 서방 연구자 중 한 명으로, 1976년 저서 『볼셰비키 권력 장악』에서 10월 혁명이 소수 쿠데타가 아니라 평화·토지·빵을 요구한 대중의 폭넓은 지지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실증적으로 밝혀 파이프스의 냉전적 쿠데타 테제를 정면으로 뒤집었다. 1917년 볼셰비키 당이 '상대적으로 개방적이고 민주적이며 분권화된 조직'이었다는 그의 발견은 혁명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으며,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배치되는 결론을 기록 자료에 근거해 기꺼이 받아들인 역사가로서도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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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1999인디애나 대학교 블루밍턴 역사학 교수
  • 1975–1984인디애나 대학교 러시아·동유럽 연구소 소장
  • 1986–1993인디애나 대학교 국제 프로그램 학장
  • 1976『볼셰비키 권력 장악』 출간: 서방 혁명사 연구의 전환점
  • 2007『볼셰비키 집권기』 출간: 혁명 첫해의 페트로그라드를 기록으로 재구성
  • 2013–2026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연구소 부설 연구원
  • 2026『볼셰비키 생존』 출간: 페트로그라드 1919년 연구로 4부작 완성
연구자 미국 미국 1938–2020 ○ 폐암

부하린 전기로 '잃어버린 대안'을 제기하고 소련 개혁 가능성을 끝까지 주장한 미국의 러시아사 학자

"역사의 결정적 순간마다, 스탈린의 등장과 흐루쇼프의 몰락과 소련의 종말, 각각에 대안이 존재했다."

스티븐 코언은 소비에트학계에서 소련 체제가 본질적으로 개혁 불가능했다는 통념에 가장 체계적으로 반박한 학자였다. 1973년 『부하린과 볼셰비키 혁명』에서 니콜라이 부하린의 정치노선을 스탈린주의에 대한 실현 가능한 대안으로 제시하며, 소련사가 단선적 필연이 아니라 분기점들의 연쇄였음을 주장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고 부하린의 사후 복권에 기여했으며, 소련 붕괴 후에는 미국의 대러 정책을 '실패한 십자군'으로 비판하면서 냉전 이후에도 러시아를 적대시하는 워싱턴의 합의에 맞섰다. 말년에는 우크라이나 사태와 러시아게이트를 둘러싸고 친푸틴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미국 언론의 러시아 보도가 냉전기보다 더 이데올로기적이라고 주장하며 고립을 무릅쓰고 소신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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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1998프린스턴 대학교 정치학 교수
  • 1982–1987『더 네이션』 칼럼 '소비에티쿠스' 연재
  • 1985–1991CBS 뉴스 고르바초프 개혁 자문·해설
  • 1998–2011뉴욕대학교 러시아·슬라브학 교수
  • 2011–2020뉴욕대학교 명예교수, 저술·방송 활동
  • 2015–2020미국 동서화합위원회 공동 설립 이사

J. 아치 게티

J. Arch Getty
연구자 미국 미국인 1950–2025 ○ 자연사

소련 정치사의 revisionist 역사가

그는 기록보관소를 자신이 설명해야 할 상상할 수 없는 공포를 연구하는 실험실에 비유했다.

J. 아치 게티는 소련 정치사와 스탈린 시대를 연구한 미국의 역사가로, UCLA에서 러시아·소련사 연구와 교육을 이끌었다. 1985년 저서 『대숙청의 기원』에서 스탈린 체제를 단일한 중앙 통제의 산물로 보지 않고, 취약한 당 조직과 지역의 자율성, 지도부 내부의 갈등이 정책 형성에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이 접근은 흐루쇼프의 비밀연설과 스탈린주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에서 서방 수정주의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지만, 테러에 대한 스탈린과 당 지도부의 책임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소련 기록보관소 개방 뒤에는 동료들과 함께 억압의 규모와 국가 폭력을 새 자료로 재검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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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2펜실베이니아대학교 학사
  • 1979보스턴 칼리지 박사
  • 1985–1986캘리포니아대학교 리버사이드 역사학 교수, 올해의 우수 교육자
  • 1985『대숙청의 기원』 출간
  • 1993『스탈린주의 테러』 공동 편집, 중앙당 문서고 연구 안내서 공동 편찬
  • 1999올레크 나우모프와 『테러로 가는 길』 공동 저술
  • 2015–2016UCLA 제119회 교수 연구 강연자
  • 2024『스탈린주의에 대한 성찰』 공동 편집

그레이엄 앨리슨

Graham Allison
연구자 미국 미국 1940–

쿠바 미사일 위기 분석으로 외교정책 결정 이론을 재편한 정치학자

우리는 지금 케네디가 몰랐던 것을 안다. 소련은 핵탄두 탑재 탄도미사일 외에 전술핵무기 100기를 쿠바에 배치했고, 현지 소련군 사령관은 모스크바의 추가 승인 없이도 이를 발사할 수 있었다.

미국의 정치학자로, 1971년 저서 『결정의 본질』에서 합리적 행위자·조직 과정·관료정치라는 세 분석 모델을 제시하며 외교정책 결정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하버드 케네디스쿨의 설립 학장(1977~1989)으로 이 학교를 세계적 공공정책 대학원으로 키웠고,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방부 차관보로 구소련 4개국 비핵화를 주도해 국방부 최고 훈장을 두 차례 받았다. 케네디가 위기 당시 핵전쟁 확률을 '3분의 1에서 반반'으로 보았다는 그의 분석은 이후 모든 쿠바 미사일 위기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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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하버드대 조교수
  • 1971『결정의 본질』 출간
  • 1972하버드대 정교수
  • 1977–1989하버드 케네디스쿨 학장
  • 1993–1994미 국방부 차관보
  • 1995–2017하버드 벨퍼센터 소장
  • 2017『투키디데스의 함정』 출간

낸시 치안

Nancy Qian
연구자 미국 중국계 1975–

역사 자료로 국가정책의 효과를 추적한 경제학자

낸시 치안은 개발경제학·정치경제학·경제사를 넘나들며 제도와 정책이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효과를 대규모 자료와 엄밀한 실증분석으로 연구한 경제학자다. 중국 경제와 권위주의 국가를 다룬 연구로 알려졌으며, 성별 격차와 교육, 기근의 정치경제를 연결해 분석했다. 안드레이 마르케비치, 나탈랴 나우멘코와 함께한 2021년 연구는 우크라이나 기근의 지역별 사망률과 곡물 조달을 비교해 민족적 편향과 중앙계획 조달정책의 역할을 계량적으로 제시했다. 이 작업은 홀로도모르를 생산량만이 아니라 국가의 분배와 강제 조달이 빚은 결과로 파악하는 논쟁에 자료를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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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텍사스대학교 오스틴 학사
  • 2005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 경제학 박사
  • 2005–2009브라운대학교 경제학 조교수
  • 2007–2009하버드대학교 아카데미 펠로
  • 2009–2016예일대학교 경제학 교수, 부교수
  • 2017–현재노스웨스턴대학교 켈로그경영대학원 제임스 J. 오코너 교수
  • 2021「우크라이나 기근 사망률의 원인」 공동저자

니나 투마르킨

Nina Tumarkin
연구자 미국 러시아계 1945–

레닌 숭배와 대조국전쟁 기억 정치를 파헤친 소련사의 탁월한 기록자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이 언제나 가져온 것은 상실이었다."

1945년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1975년부터 웰즐리 칼리지에서 소비에트 역사와 기억 정치를 가르쳐 온 미국의 러시아사 학자다. 『레닌은 살아 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레닌 숭배』(1983)로 윌슨상을 수상했고, 결정적 저작 『산 자와 죽은 자: 러시아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 숭배의 흥망』(1994)에서 스탈린이 전쟁 기억을 억압하고 브레즈네프가 숭배로 격상시켰으며 1985년 이후 그 숭배가 흔들렸음을 실증했다. 1985년 제네바 정상회담을 앞두고 레이건을 브리핑한 6인의 소비에트 전문가 중 한 명이었으며, 클린턴은 1995년 모스크바 승전 기념일 방문에 앞서 그녀의 책을 읽고 '위대한 책'이라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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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웰즐리 칼리지 역사학과 교수
  • 1983『레닌은 살아 있다』 출간, 윌슨상 수상
  • 1985레이건 대통령 소비에트 문제 고문, 제네바 정상회담 브리핑
  • 1994『산 자와 죽은 자』 출간
  • 2000s–웰즐리 칼리지 러시아 지역학 프로그램 디렉터
  • 1970s–하버드 대학교 데이비스 센터 연구원

다론 아제모을루

Daron Acemoğlu
연구자 미국 아르메니아계 1967–

코시긴 개혁의 구조적 실패를 제도로 설명한 노벨상 경제학자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선진 기술을 빠르게 따라잡으며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지만, 창조적 파괴가 부재했기 때문에 1970년대에 이르러 힘이 빠지고 있었다.'

이스탄불의 아르메니아계 가정에서 태어나 MIT 경제학 교수가 된 다론 아제모을루는, 국가 간 번영 격차의 제도적 기원을 규명한 공로로 202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제도경제학의 대표적 학자다. 로빈슨과 함께 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2012)에서 소련 계획경제 아래 가격은 실물 가치와 유리되어 혁신을 평가할 수 없고, 상여금이 총임금기금에 연동되어 기업이 자동화를 기피하게 되므로 코시긴 개혁은 구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그의 연구는 포용적 제도 없이 지속적 경제성장은 불가능하다는 통찰로 발전경제학과 정치경제학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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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요크대학교 경제학 학사
  • 1992LSE 경제학 박사
  • 1993–MIT 경제학 교수 (2000년 정교수)
  • 2010–MIT 킬리언 석좌교수
  • 2019–MIT 인스티튜트 프로페서
  • 2012『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출간
  • 2024노벨 경제학상 수상

대니얼 코왈스키

Daniel Kowalsky
연구자 미국 미국 1966–

기밀해제된 소련 문서로 스페인 내전 개입사를 재검토한 미국 역사가

오리건 번스 출신. 위스콘신대학-매디슨에서 스탠리 G. 페인의 지도 아래 2001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4년 『스탈린과 스페인 내전』(Columbia University Press)을 출간하여, 기밀해제된 소련 문서를 바탕으로 스탈린의 작전 X가 '엄청난 야심에도 불구하고 작전상 실패'였음을 논증했다. 벨파스트 퀸스대학에서 유럽사와 홀로코스트를 가르치며 전간기 유럽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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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위스콘신대학-매디슨 박사 (지도교수 스탠리 G. 페인)
  • 2001–2005워싱턴대학, 카이로 미국대학, 브리스틀대학에서 강의
  • 2004『스탈린과 스페인 내전』 출간
  • 2005–현재퀸스대학 벨파스트 역사학·인류학부 교수
  • 2005–2010『영국 외교문서집』 소련·핀란드권 시리즈 편집장

데이비드 브랜든버거

David Brandenberger
연구자 미국 미국 b. 1970

레닌그라드 사건의 세 해석 학파를 정리한 미국의 소련사학자

브랜든버거는 2004년 논문에서 레닌그라드 사건의 배후에 '러시아 공산당 창당' 루머가 결정적 변수로 작용했다고 주장해, 정치적 파벌 투쟁으로 보는 기존 해석에 이데올로기적 차원을 추가했다.

버지니아 리치먼드대학 러시아·소련사 교수. 스탈린 시대 선전·이데올로기와 러시아 민족 정체성의 형성을 연구하며, 『국가 볼셰비즘』(2002)에서 스탈린의 루소중심적 동원 선전이 의도치 않게 근대 러시아 민족 정체성을 낳았다고 주장했다. 현재 집필 중인 『스탈린의 후계자 후보들 숙청』은 레닌그라드 사건(1949~1952)에 관한 20여 년의 연구로, 파벌 투쟁·스탈린의 레닌그라드 불신·후견-의뢰 네트워크의 자초라는 세 해석 학파를 정리하면서도 결정적 판단을 내리기에는 아카이브가 여전히 폐쇄적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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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매캘리스터 칼리지 역사학·소비에트 지역학 학사
  • 1999하버드대학교 역사학 박사
  • 1999–2003하버드·예일·코네티컷 칼리지에서 역사학 강사
  • 2003–현재리치먼드대학 역사학과 교수 (2016년 정교수)
  • 2002『National Bolshevism』 출간 (하버드대 출판부)
  • 2011『Propaganda State in Crisis』 출간 (예일대 출판부)
  • 2019–현재모스크바 고등경제대학 부설연구원

데이비드 코츠

David M. Kotz
연구자 미국 미국 1946–현재 ○ 생존

소련 체제 변동을 연구한 정치경제학자

데이비드 M. 코츠는 제도 변화와 정치경제를 연구한 미국의 경제학자다. 그는 프레드 위어와 함께 소련의 해체를 경제 붕괴와 대중 봉기만으로 설명하지 않고, 당·국가 엘리트가 부와 권력을 넓히려 체제를 해체한 과정으로 분석했다. 대표 저서인 『Revolution from Above』는 소련의 정체, 페레스트로이카, 자본주의 연합의 형성과 그 이후 러시아를 연결해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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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8『미국 대기업의 은행 지배』 공동 저자
  • 1994『사회구조적 축적』 공동 편집자
  • 1997프레드 위어와 『위로부터의 혁명』 출간
  • 2007프레드 위어와 『고르바초프에서 푸틴까지 러시아의 길』 출간
  • 2015『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흥망』 출간
  • 2021매사추세츠 애머스트대학교 경제학 명예교수

라파엘 레우베니

Rafael Reuveny
연구자 미국 (이스라엘 이중국적) 이스라엘계 미국인 1957–

소련-아프간 전쟁이 소련 붕괴로 이어지는 인과 메커니즘을 정립한 이스라엘계 정치경제학자

라파엘 레우베니는 이스라엘 출신의 국제정치경제학자로, 인디애나대학교 공공환경대학 교수이다. 1999년 아심 프라카시와 공동 집필한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소련의 붕괴」는 소련-아프간 전쟁이 인식 효과, 군사 효과, 정당성 효과, 글라스노스트 효과라는 네 가지 경로를 통해 소련 해체를 촉발했음을 논증하여 이 분야의 표준적 인과 메커니즘 틀로 자리 잡았다. 그의 연구는 경제 세계화, 기후 이주, 자연자원과 전쟁의 관계, 문명 붕괴 모델링 등으로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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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8테크니온 공대 학사 졸업 (최우등)
  • 1978–1985이스라엘 방위군 장교 복무
  • 1985미국 이주
  • 1996인디애나대학교 MBA
  • 1997인디애나대학교 정치학 박사
  • 1997–현재인디애나대학교 공공환경대학 교수
  • 1999「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소련의 붕괴」 발표 (아심 프라카시와 공저)

로널드 그리고르 수니

Ronald Grigor Suny
연구자 미국 아르메니아계 1940–

소련이 민족을 파괴했다는 냉전 통념을 뒤집고, 소비에트 정책이 오히려 민족을 만들었다고 주장한 역사학자

초등학교 6학년 때 소련이 파시즘을 물리치고 전쟁 이후 샌프란시스코 크기의 도시들을 건설했다는 발표를 했더니 선생님은 얼굴이 하얘졌다. 그날부터 졸업할 때까지 나는 '수니 동무'로 불렸다.

아르메니아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소련 민족 문제 연구의 패러다임을 전환한 인물이다. 1993년 저서 『과거의 복수』에서 소비에트 체제가 민족들을 탄압하고 러시아화했다는 기존의 냉전적 통념을 뒤집고, 소련의 민족 정책이 오히려 영토·언어·관료제를 통해 민족 정체성을 제도화하고 구축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연방을 파괴할 민족들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이 '과거의 복수' 테제는 소련 해체 이후 소비에트 민족 연구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되었다. 코카서스 3국 각각에 대한 연구로도 저명하며, 2020년 출간된 스탈린 전기로 도이처 기념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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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1981오벌린 칼리지 역사학 조교수·부교수·정교수
  • 1981–1995미시간 대학교 알렉스 마누키언 근대 아르메니아사 석좌교수
  • 1995–2005시카고 대학교 정치학·역사학 교수
  • 2005미국 슬라브학 진흥협회(AAASS) 회장
  • 2005–2015미시간 대학교 찰스 틸리 사회·정치사 석좌교수
  • 2015–2022미시간 대학교 윌리엄 H. 수얼 주니어 석좌교수
  • 1993『과거의 복수』 출간: 소련 민족 연구의 패러다임 전환
  • 2021『스탈린: 혁명으로 가는 길』로 도이처 기념상 수상

로널드 라도시

Ronald Radosh
연구자 미국 미국 1937– ○ 생존

공산주의에서 반공 보수주의로 이동한 역사가

모스크바 문서고의 공개 자료는 스페인 내전에서 소련의 역할을 다시 묻게 했다.

로널드 라도시는 미국의 역사가이자 저술가로, 공산주의 가정에서 성장해 미국 공산당과 신좌파를 거쳤다. 로젠버그 사건을 재검토하며 소련 간첩 활동에 관한 기존 신념을 바꾸었고, 이 과정은 그의 반공 보수주의적 전환을 굳혔다. 그는 메리 하벡, 그리고리 세바스티아노프와 함께 『스페인 배신』을 편집해 모스크바 архив 문서를 바탕으로 스페인 내전에서 소련의 정책과 코민테른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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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뉴욕에서 출생
  • 1950년대미국 공산당 주변에서 성장하고 활동
  • 1960년대베트남전 반대 운동과 신좌파 활동
  • 1970년대미국 현대사와 보수주의 비판을 연구하고 저술
  • 1983『로젠버그 파일』을 공동 저술
  • 2001『스페인 배신』 공동 편집, 스페인 내전의 소련 정책을 분석
  • 2000년대허드슨 연구소에서 연구와 저술 활동

로버트 앨런

Robert C. Allen
연구자 미국 미국 1947–

소련 산업화를 20세기 가장 성공적인 개발 사례로 재평가한 옥스퍼드 경제사학자

"소련 경제는 대개 실패로 치부된다. 그러나 나는 소련 경제가 훌륭히 작동했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20세기 가장 성공한 개발도상국이었지만, 소련은 바로 그 뒤를 이었다."

옥스퍼드대학교 경제사학자 로버트 앨런은 2003년 저서 『농장에서 공장으로: 소비에트 산업혁명의 재해석』에서 소련의 산업화가 20세기 가장 성공적인 개발 사례 중 하나였다고 주장했다. 그의 추계에 따르면 1928년부터 1937년까지 1인당 소비는 약 30% 증가했으며, 이는 기존 연구(버그슨·채프먼)의 소비 감소 결론을 정면으로 뒤집는 결과였다. 그는 계량모형을 바탕으로 집단화 없는 NEP 지속 경로가 GDP 성장률 면에서는 실제 성과와 비슷했을 것이라는 반사실적 시뮬레이션도 제시해, 소련 산업화의 비용과 성과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 참조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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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1975해밀턴 칼리지 조교수
  • 1975–2001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 2000–2013옥스퍼드대학교 경제사 교수·너필드 칼리지 펠로
  • 2012–2013경제사학회 회장
  • 2014–현재뉴욕대학교 아부다비 글로벌 석좌교수

로버트 오언 팩스턴

Robert Owen Paxton
연구자 미국 미국 1932– ○ 생존

비시 프랑스의 협력을 재구성한 역사가

“비시 정권은 패배 뒤 프랑스를 재편하려는 자체의 적극적 계획을 갖고 있었다.”

로버트 팩스턴은 미국의 현대 유럽사 연구자로, 비시 프랑스와 파시즘의 사회적·정치적 조건을 분석했다. 독일 점령기 문서와 프랑스 자료를 함께 읽어 비시 정권이 독일의 수동적 도구가 아니라 자체적인 국가 재편 구상을 지닌 협력자였음을 밝혔다. 마이클 마루스와 함께 쓴 『비시 프랑스와 유대인』은 비시의 초기 반유대 법령이 독일의 직접 명령 없이 추진된 정책임을 논증해 프랑스의 전후 기억과 역사학을 바꾸었다. 그의 연구는 협력과 저항을 도덕적 신화가 아니라 국가기관, 사회세력, 전쟁 조건의 상호작용으로 보게 했으며 세부 해석을 둘러싼 논쟁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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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워싱턴 앤드 리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받음
  • 1961옥스퍼드 대학교 머턴 칼리지에서 석사 학위를 받음
  • 1963하버드 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음
  • 1966『비시의 행진과 정치』를 출간
  • 1969컬럼비아 대학교 역사학과에 합류
  • 1972『비시 프랑스』를 출간해 협력 연구의 전환을 촉발
  • 1981마이클 마루스와 『비시 프랑스와 유대인』을 출간
  • 1997모리스 파퐁 재판에서 비시 협력에 관한 전문가 증언
  • 2004『파시즘의 해부』를 출간
  • 2009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오피시에 서훈

리처드 B. 프랭크

Richard B. Frank
연구자 미국 미국계 1947– ○ 생존

태평양전쟁의 사료 중심 군사사가

리처드 B. 프랭크는 미국의 변호사이자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을 연구한 군사사가다. 그는 과달카날 전투부터 일본 제국의 종말까지 작전과 정책, 일본 지도부의 판단을 함께 추적하며 전쟁의 귀결을 설명했다. 특히 『Downfall』은 일본의 항복을 둘러싼 군사적 붕괴와 원자폭탄 투하,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결합해 논쟁적인 종결 과정을 분석한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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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9미주리대학교 졸업
  • 1969–1973미 육군 복무, 제101공수사단 소대장으로 베트남전 참전
  • 1976조지타운대학교 법학센터 졸업
  • 1990『과달카날』 출간, 미국 해병대 월리스 M. 그린상 수상
  • 1999『Downfall』 출간
  • 2007『MacArthur』 출간
  • 2020『Tower of Skulls』 출간

마이클 돕스

Michael Dobbs
연구자 미국 영국 1950– ○ 생존

냉전의 위기를 기록한 사료 기반 저널리스트

그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정상회담의 신화가 아니라 우발적 사건들이 겹친 시간대별 위기로 다시 펼쳐 보였다.

마이클 돕스는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로, 냉전 종식과 국제분쟁을 현장에서 취재했다. 그는 워싱턴 포스트의 동유럽·파리·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일하며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그 국제적 결과를 기록했다. 『자정 1분 전』은 미국·소련·쿠바 자료를 대조해 쿠바 미사일 위기를 시간대별로 재구성하고, 핵전쟁의 위험이 기존 통념보다 훨씬 컸음을 보여 주었다. 그의 작업은 정상 지도자들의 대결이라는 서사를 넘어 현장 지휘관과 우발적 사건이 위기를 어떻게 증폭했는지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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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출생
  • 1972요크 대학교 경제학·경제사 학사
  • 1974–1975로이터 로마 특파원
  • 1977–1980벨그라드 주재 특별특파원, 티토 사망 등 취재
  • 1980–1981워싱턴 포스트 동유럽 지국장, 그단스크 조선소 파업 취재
  • 1982–1986워싱턴 포스트 파리 지국장
  • 1988–1993워싱턴 포스트 모스크바 지국장
  • 2008『자정 1분 전』 출간

마크 N. 카츠

Mark N. Katz
연구자 미국 미국 1954–현재 ○ 현역 연구자

철군 뒤의 전쟁을 다시 읽은 국제정치학자

마크 N. 카츠는 러시아 정치와 외교정책, 혁명, 테러와의 전쟁을 연구한 미국 국제정치학자다. 조지 메이슨 대학교에서 소련과 러시아의 제3세계 정책 및 혁명 운동의 국제적 차원을 가르치고 저술했다. 2011년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분석하며, 소련군 철수 뒤에도 소련의 군사·경제 원조가 나지불라 정권을 3년 넘게 지탱했고 철군이 곧 붕괴를 뜻하지 않았다고 논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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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6캘리포니아 대학교 리버사이드 국제관계학 학사
  • 1978존스 홉킨스 대학교 고등국제학대학원 국제관계학 석사
  • 1982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정치학 박사
  • 1982미 국무부 소련 문제 분석관
  • 1988조지 메이슨 대학교 정부·정치학 조교수
  • 1998조지 메이슨 대학교 정부·정치학 정교수
  • 2011「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군에서 얻는 교훈」 발표
  • 2024조지 메이슨 대학교 명예교수로 퇴직

마크 베이신저

Mark R. Beissinger
연구자 미국 미국 1954–

소련 붕괴가 구조적 필연이 아니라 사건의 파도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 정치학자

「민족주의는 행동의 원인일 뿐 아니라 행동의 산물로도 이해되어야 한다」고 베이신저는 말했다. 사건이 구조를 반영할 뿐 아니라 구조 자체를 재구성한다는 뜻이다.

미국 비교정치학자로, 소련 민족주의 동원과 국가 붕괴의 관계를 사건 데이터로 실증한 연구자이다. 2002년 저서 『Nationalist Mobilization and the Collapse of the Soviet State』에서 소련 해체가 구조적 필연이 아니라, 한 공화국의 민족운동이 다른 공화국으로 확산되는 '조수(tidal)' 효과로 사건들이 누적되며 초래되었다고 주장했다. 선리(Ronald Suny)의 구조적 설명과 대비되는 이 입장은, 민족운동의 전염성과 사건의 우발성이 제도의 제약을 압도할 수 있다고 보며 이후 색깔혁명 연구로도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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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6듀크대학교 정치학 학사 (magna cum laude)
  • 1982하버드대학교 정치학 박사
  • 1982–1987하버드대학교 조교수
  • 1988–2006위스콘신대학교 매디슨 정치학 교수
  • 2001–2004위스콘신대학교 정치학과장
  • 2006–프린스턴대학교 헨리 W. 퍼트넘 정치학 석좌교수
  • 2007슬라브·동유럽·유라시아학회(ASEEES) 회장
  • 2022『The Revolutionary City』 출간

마크 크레이머

Mark Kramer
연구자 미국 미국 현재 ○ 현역 역사학자

냉전의 기록을 해독한 역사학자

폴란드어로 번역된 비밀연설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마크 크레이머는 냉전과 소련, 사회주의권 및 탈공산주의 동유럽의 정치 변화를 연구한 미국 역사학자다. 하버드대학교 데이비스 러시아·유라시아 연구센터에서 냉전연구 프로그램을 이끌며, 동유럽과 서방의 개방된 기록보관소를 폭넓게 활용해 왔다. 그는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이 폴란드 공산당 지도부와 사회에 유통된 경로를 추적해, 비밀로 남기려던 문서가 탈스탈린화의 정치적 동력이 된 과정을 밝혔다. 연구와 편집을 통해 냉전사를 국가 지도부의 결정만이 아니라 문서와 정보가 이동하는 국제적 과정으로 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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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하버드대학교 데이비스 러시아·유라시아 연구센터 냉전연구 프로그램 디렉터
  • 현재《냉전연구 저널》 편집자
  • 현재하버드 냉전사 연구 총서 편집자
  • 2006「스탈린 폐위: 1956년 폴란드와 그 유산」 발표
  • 2000년대동유럽 탈스탈린화와 냉전 국제사 연구
  • 1990년대 이후구 바르샤바조약기구 국가와 서방의 기록보관소 연구

배리 아이켄그린

Barry Eichengreen
연구자 미국 미국 1952– ○ 생존

국제통화 질서를 역사로 분석한 경제학자

마셜 플랜을 원조 사업이 아니라 전후 유럽의 경제 질서를 바꾼 구조조정 프로그램으로 읽었다.

배리 아이켄그린은 국제통화·금융 체제의 역사를 현재의 정책 문제와 연결해 분석해 온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경제사가다. 그는 금본위제가 대공황을 국제적으로 확산시킨 구조를 밝히며, 통화 제도와 국가 정책의 상호작용을 연구했다. 마셜 플랜 연구에서는 원조액 자체보다 원조에 붙은 조건이 서유럽의 전후 혼합경제를 시장과 무역 중심으로 재편한 효과에 주목했다. 이 연구는 경제 재건에서 자금과 제도적 조건의 관계를 묻는 논쟁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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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타크루즈 학사
  • 1986예일 대학교 경제학 박사
  • 1987–현재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경제학·정치학 교수
  • 1991J. 브래드퍼드 디롱과 「마셜 플랜: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구조조정 프로그램」 공동 집필
  • 1992『황금의 족쇄』 출간
  • 1997–1998국제통화기금 선임 정책자문관
  • 2010–2011경제사학회 회장

보이텍 마스트니

Vojtěch Mastný
연구자 미국 체코슬로바키아계 1936–현재 ○ 생존

냉전의 архив를 개방한 역사가

그는 1962년 소련 유람선에서 튀니스에 내려 미국행 비자를 신청했다.

보이텍 마스트니는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미국 역사학자로, 냉전과 소련 대외정책을 연구했다. 계급 배경 때문에 정규 중등교육 대신 공장 노동과 기록관 실무를 거친 경험은 그의 사료 중심 연구 태도와 맞물렸다. 그는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처음부터 단일한 군사동맹으로 보지 않고, 정치적 협상 수단과 소련의 규율 장치 사이의 긴장 속에서 해석했으며, 공개 기록을 통해 그 실제 작동을 추적했다. 평행사 프로젝트를 이끌며 동구권 군 관계자들의 증언과 문서를 국제 연구 공간에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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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프라하에서 출생
  • 1950년대공장 기계공으로 일하며 노동자학교에서 수학
  • 1950년대 후반–1962국립박물관 보조 기록관, 카를대학교에서 중세사와 기록학 전공
  • 1962미국으로 이주해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수학
  • 1970년대–현재컬럼비아대학교, 일리노이대학교, 보스턴대학교, 존스홉킨스 국제관계대학원 등에서 역사와 국제관계 강의
  • 1996–1998NATO 최초 만프레트 뵈르너 펠로
  • 1990년대–현재평행사 프로젝트에서 NATO와 바르샤바 조약기구 사료 연구를 조정
  • 2005말콤 번과 함께 《A Cardboard Castle?》 출간

브루스 커밍스

Bruce Cumings
연구자 미국 미국 1943–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재규정한 수정주의 역사학의 대표 주자

내전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도래하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원』)

미국의 동아시아사 학자로, 『한국전쟁의 기원』(1981, 1990) 2권을 통해 한국전쟁을 냉전의 국제적 충돌이 아니라 일제 식민지배와 해방 후 사회 갈등에서 비롯된 내전으로 재규정했다. 시카고 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미국 학계의 한국전쟁 이해를 근본적으로 전환시켰고, 이 공로로 미국역사협회 존 K. 페어뱅크상과 김대중 학술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업은 전통주의 냉전 서사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현대 한국사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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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1968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서 활동
  • 1975컬럼비아 대학교 정치학 박사
  • 1980–1987워싱턴 대학교 교수
  • 1987–1999노스웨스턴 대학교 교수
  • 1999–2015시카고 대학교 석좌교수 및 역사학부장
  • 2007김대중 학술상 수상

블라디미르 콘토로비치

Владимир Конторович
연구자 미국 소련 1950–

부분 개혁이 계획체계를 파괴할 뿐이라고 본 경제사학자

고르바초프의 경제학자들」을 분석한 글들에는 '사기꾼'이나 '무식한 자'라는 말이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소련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경제학자로, 노보시비르스크 대학과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수학했다. 1988년 논문 「1965년 소련 경제개혁의 교훈」에서 코시긴 개혁에 대한 중앙 부처와 고스플란의 저항이 단순한 관료적 이기심이 아니라, 부분적 시장 개혁이 중앙계획 체계를 파괴하면서도 작동 가능한 대안은 내놓지 못한다는 합리적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마이클 엘먼과 함께 『소련 경제체제의 파괴』를 편집했으며, 이 체제 비양립성 테제는 소련 개혁 실패를 둘러싼 역사학적 논쟁의 중심 논거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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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노보시비르스크 대학 경제학 디플로마
  • 1985펜실베이니아 대학 경제학 박사
  • 1984–2002계획경제연구소(Command Economies Research, Inc.) 설립·대표, 미 국방부·CIA 계약 연구 수행
  • 1987–해버포드 칼리지 경제학과 조교수→부교수→정교수
  • 1988「1965년 소련 경제개혁의 교훈」 발표 (Soviet Studies)
  • 1992/1998마이클 엘먼과 『소련 경제체제의 붕괴』·『소련 경제체제의 파괴』 공동 편집
  • 2008『뉴 팔그레이브 경제학 사전』 '소련 경제개혁' 항목 집필

블라디미르 트레믈

Vladimir Treml
연구자 미국 미국 1932– ○ 생존

소련 경제의 숨은 흐름을 계량한 연구자

공식 판매량이 줄어도 사모곤은 통계 밖에서 계속 소비되었다.

블라디미르 트레믈은 소련 경제에서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소득과 소비를 간접 지표로 추정한 미국의 경제학자다. 그는 사모곤을 포함한 실제 주류 소비량과 국가 재정에서 보드카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을 분석해, 주류 판매 통계만으로는 소련 사회의 음주 규모를 파악할 수 없음을 보였다. 1982년 저서 《소련의 알코올》은 이 연구를 집약했으며, 소련에서는 도서관 제한 열람 자료로 취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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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s소련 경제와 비공식 소득 연구
  • 1970s소련의 비공식 경제와 소비 추정
  • 1977소련 제2경제 연구에 기여
  • 1982《소련의 알코올》 출간
  • 1987소련의 음주와 알코올 남용 연구 발표
  • 1989마이클 알렉세예프와 소련 제2경제의 불안정화 연구

블라디미르 티스머네아누

Vladimir Tismăneanu
연구자 미국 루마니아 1951–

망명한 루마니아계 미국 정치학자, 1989년 혁명 연구의 권위자

1990년 6월 부쿠레슈티에서 광부들이 반정부 시위대를 폭력 진압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고, 이를 '가장 조잡하고 역겨운 형태의 야만성'에 대한 통찰을 준 경험이라고 기록했다.

루마니아 공산당 엘리트 가정에서 태어나 1981년 망명한 정치학자로, 스탈린주의와 동유럽 공산 체제의 몰락을 비교정치학적 시각에서 분석해 왔다. 2003년 『모든 계절을 위한 스탈린주의』로 루마니아 공산주의사의 결정적 종합을 제시했고, 2006년 루마니아 대통령 직속 공산독재연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공산주의 과거사 청산 보고서를 이끌었다. 1989년 혁명의 원인·의미·결과를 다룬 2009년 논문은 혁명 이후 민족 갈등과 권위주의적 반동에도 불구하고 그 '관대한 메시지'는 훼손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1989년 연구의 기준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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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1981부쿠레슈티 표준건축설계연구소 사회학자
  • 1983–1990필라델피아 외교정책연구소(FPRI) 연구원
  • 1985–1990펜실베이니아대학교 강사
  • 1990–메릴랜드대학교 정치학 교수
  • 1998–2004『East European Politics and Societies』 편집장
  • 2006루마니아 공산독재연구 대통령위원회 위원장
  • 2009「1989년 혁명: 원인, 의미, 결과」 『Contemporary European History』 발표

세르히 미콜라요비치 플로히

Сергій Миколайович Плохій
연구자 미국 우크라이나 1957–

체르노빌이 소련 붕괴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주장한 하버드대 역사학자

체르노빌 이야기 없이는, 소련의 붕괴는 심각하게 불완전할 것이다.

하버드대학교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석좌교수이자 우크라이나 연구소 소장을 지낸 역사학자로, 동유럽과 냉전의 지성사·국제사를 연구해 왔다. 2018년 『체르노빌: 비극의 역사』로 베일리 기퍼드상을 수상했으며, 이 책에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글라스노스트를 촉발하고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의 기반을 형성해 소련 붕괴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제국』, 『유럽의 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통해 소련 해체와 동유럽 민족 정체성의 역사적 기원을 재해석하며 현대 동슬라브 역사서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소리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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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드니프로페트롭스크 대학교 역사·사회과학 학사
  • 1982민족우호대학교 대학원 수료
  • 1983–1991드니프로페트롭스크 대학교 교수
  • 1990키예프 대학교 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 1996–2007앨버타 대학교 캐나다 우크라이나 연구소 교수
  • 2007–현재하버드대학교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석좌교수
  • 2013–2025하버드 우크라이나 연구소 소장
  • 2018『체르노빌: 비극의 역사』로 베일리 기퍼드상 수상

스탠리 페인

Stanley G. Payne
연구자 미국 미국 1934–

제2공화국의 급진화가 내전을 불렀다고 본 미국의 대표적 보수 역사학자

역사적 기억이라는 표현 자체가 모순어법이다. 기억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매우 자주 오류에 빠진다.

미국을 대표하는 스페인 현대사 연구자로, 위스콘신대학에서 37년간 봉직하며 파시즘 유형론과 스페인 내전 연구의 보수적 해석을 정립했다. 그의 핵심 주장은 제2공화국 붕괴의 일차적 원인이 우파 음모가 아니라 사회당 주도의 혁명적 급진화에 있다는 것으로, 내전을 혁명과 반혁명의 충돌로 읽는다. 2000년대 이후 프랑코 정권에 온정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비냐스, 프레스턴 등 진보 진영의 주요 논쟁 상대가 되었으나, 그가 세운 수정주의적 틀은 스페인 내전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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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Pacific Union College에서 역사학 학사
  • 1960컬럼비아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지도교수 Shepard B. Clough)
  • 1962–1968UCLA 역사학 조교수
  • 1968–2005위스콘신-매디슨대학교 역사학 교수; Hilldale-Jaume Vicens Vives 석좌교수
  • 1987스페인 왕립역사아카데미 통신회원
  • 2004위스콘신-매디슨대학교 명예교수

스티븐 마크 코트킨

Stephen Mark Kotkin
연구자 미국 미국 1959–

소련은 죽어가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 소련 붕괴의 구조적 분석가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서방과의 경쟁에서 분명히 패배했지만, 무기력하게 안정적이었고 상당 기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소련사 연구의 구조적·제도적 전환을 이끈 미국의 역사가로, 스탈린주의를 하나의 '문명'으로 분석한 『마그니토고르스크』(1995)와 3권작 스탈린 평전으로 퓰리처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피한 아마겟돈』(2001)에서 그는 소련이 1985년까지도 '무기력하게 안정적'이었으며, 체제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고르바초프의 개혁 시도 자체였다고 주장해 소련 붕괴 논쟁의 핵심 축을 재편했다. 프린스턴대에서 33년간 러시아·유라시아 연구를 이끌었고, 후버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서 오늘날까지도 러시아·중국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사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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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1로체스터 대학교 영문학 학사
  • 1988UC버클리 역사학 박사
  • 1989–2022프린스턴대학교 역사학·국제관계학 교수
  • 1995『마그니토고르스크: 하나의 문명으로서의 스탈린주의』 출간
  • 2001『피한 아마겟돈: 소련 붕괴 1970–2000』 출간
  • 2014『스탈린: 권력의 역설 1878–1928』 출간, 퓰리처상 최종후보
  • 2017『스탈린: 히틀러를 기다리며 1929–1941』 출간
  • 2022–현재후버연구소 클라인하인츠 선임연구원

쓰요시 하세가와

長谷川 毅
연구자 미국 일본 1941– ○ 현역 연구자

전쟁 종결의 국제사를 다시 쓴 역사가

1945년 8월의 항복은 원폭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쓰요시 하세가와는 러시아·소련사와 냉전사, 러시아·일본 관계를 연구한 일본계 미국인 역사가다. 그는 러시아혁명, 일소 관계, 태평양전쟁 종결이라는 세 분야를 넘나들며 국가 간 외교와 사회 변동을 함께 분석했다. 대표작 《Racing the Enemy》는 1945년 8월 일본의 전략적 선택에서 히로시마 원폭만이 아니라 소련의 대일전 참전과 중립조약 파기가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해 항복 원인에 관한 논쟁을 다시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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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4도쿄대학교 교양학부 졸업
  • 1969워싱턴대학교 역사학 박사
  • 1970년대뉴욕주립대학교 오스위고 역사학 교수
  • 1980–1981《The February Revolution》 출간
  • 1980년대–1990년대홋카이도대학교 슬라브연구센터 교수
  • 1998《The Northern Territories Dispute and Russo-Japanese Relations》 출간
  • 2005《Racing the Enemy》 출간, 로버트 퍼렐상 수상
  • 2016캘리포니아대학교 샌타바버라 역사학 교수 은퇴

아르테미 미하일로비치 칼리놉스키

Артемий Михайлович Калиновский
이론가 미국 러시아 1979?–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기나긴 작별'로 분석한 냉전사 학자

소련·러시아 외교정책과 중앙아시아를 연구하는 역사가. 2011년 『기나긴 작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출간하여, 소련의 철수 결정이 전장보다 국내 정치에 의해 형성된 '기나긴 작별'이었음을 기록 자료와 구술로 입증했다. 조지워싱턴대에서 학사, 런던정경대(LSE)에서 박사를 받은 뒤 암스테르담대에서 10년간 강의했고, 현재 템플대 교수로 재직하며 『사회주의 발전의 실험실』(2018)로 데이비스상과 휴잇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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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조지워싱턴대학교 학사
  • 2009런던정경대(LSE) 국제사 박사
  • ~2010–2020암스테르담대학교 동유럽학 전임강사
  • 2011『기나긴 작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출간 (하버드대 출판부)
  • 2018『사회주의 발전의 실험실』 출간 (코넬대 출판부), 데이비스상·휴잇상 수상
  • ~2020–템플대학교 러시아·소비에트·포스트소비에트학 교수

아시프 시디키

Asif Siddiqi
연구자 미국 벵골계 1966–

소련 우주사 연구의 기초를 세운 방글라데시계 미국 역사가

다카 출생의 방글라데시계 미국인 역사가 시디키는, 소련 붕괴 후 개방된 기록물을 처음으로 체계 분석하여 소련 우주사 연구를 독립된 학문 분야로 정립했다. 2000년 NASA가 출간한 『Challenge to Apollo』는 소련 유인우주계획의 결정적 기록사로서 『월스트리트저널』 선정 '우주탐사 최고의 책 5선'에 오른 이후 지금까지 표준문헌으로 남아 있다. 2010년 『The Red Rockets' Glare』로 19세기 러시아 우주적 상상력의 문화사까지 영역을 넓혔고, 현재는 굴라그와 과학기술의 접점을 다룬 저작을 준비하며 포덤대학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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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NASA 역사시리즈로 『Challenge to Apollo』 출간
  • 2004카네기멜론대학교 역사학 박사
  • 2005–현재포덤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 2010『The Red Rockets' Glare』 출간 (케임브리지대학 출판부)
  • 2016구겐하임 펠로십 수상
  • 2016–현재존스홉킨스대학 출판부 과학기술사 시리즈 공동편집자

앤 애플바움

Anne Applebaum
연구자 미국 미국계 1964– ○ 생존

소련과 동유럽의 기억을 추적한 역사가

제20차 당대회의 탈스탈린화는 “두 걸음 전진한 뒤 한 걸음 물러선” 과정이었다.

앤 애플바움은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 권위주의, 시민사회를 연구해 온 미국의 역사가이자 저널리스트다. 『굴라크』는 수용소 체계를 혁명기부터 해체기까지 архив 자료와 증언으로 재구성해 2004년 퓰리처 일반 논픽션상을 받았다. 『철의 장막』과 『붉은 기근』에서는 전후 동유럽의 소비에트화와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다루며, 제20차 당대회의 탈스탈린화가 해방과 통제의 재편을 동시에 낳았다고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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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6예일대학교 역사·문학 학사
  • 1987런던정치경제대학교 국제관계학 석사
  • 1988–1991『이코노미스트』 바르샤바 특파원 및 동유럽 담당 기자
  • 1992–1996『스펙테이터』 외교·부편집장, 이후 『이브닝 스탠더드』 정치 편집자
  • 2002–2006『워싱턴 포스트』 편집위원
  • 2003–2004『굴라크』 출간, 퓰리처 일반 논픽션상 수상
  • 2011–2016레가툼 연구소 전환 포럼 창립·운영
  • 2020–현재『애틀랜틱』 스태프 작가, 존스홉킨스대 SNF 아고라 연구소 선임연구원

앤절라 데이비스

Angela Davis
비소련 혁명가 미국 미국 1944– ○ 생존

감옥-산업복합체 개념을 정초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철학자, 비판적 저항의 공동창립자

「나는 이제 이 법정 앞에서, 이 나라 국민 앞에서, 캘리포니아 주가 나에 대해 제기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합니다」 — 1971년 1월 5일 법정 진술

미국 마르크스주의-페미니스트 철학자이자 감옥 폐지 운동의 핵심 이론가. 1968년 CPUSA 입당, 1980·1984년 부통령 후보 출마. 1970년 체포·16개월 수감 후 무죄 평결로 국제 연대 운동 촉발. 『여성, 인종, 계급』(1981)으로 인종-성별-계급 교차 분석을 정초했고 감옥-산업복합체 개념을 발전시켰다. 1997년 비판적 저항(Critical Resistance)을 공동창립해 폐지 민주주의를 제도화했으며, UC 샌타크루즈 석좌교수로 퇴임했다. 반세기 넘게 급진 사상과 실천의 교차점에 서 있는 살아있는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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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출생 — '다이너마이트 힐' 흑인 중산층 이웃에서 성장
  • 1965브랜다이스대학 우등 졸업 —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제자
  • 1968CPUSA 입당, 블랙팬서당 LA 지부에서 정치교육 담당
  • 1969UCLA 철학과 조교수 임용 — 공산당원 자격으로 즉시 해고, 법원 판결로 복직
  • 1970–1972마린 카운티 법정 무장 사건 연루로 체포, FBI 10대 지명수배 — 16개월 수감 후 전면 무죄 평결
  • 1979소련 레닌 평화상 수상
  • 1980, 1984CPUSA 부통령 후보 — 거스 홀의 러닝메이트
  • 1981『여성, 인종, 계급』 출간 — 교차성 분석의 고전
  • 1991CPUSA 탈당,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위한 통신위원회(CCDS) 공동창립
  • 1991–2008UC 샌타크루즈 역사의식·페미니스트 연구 교수 — 2008년 석좌교수 퇴임
  • 1997비판적 저항(Critical Resistance) 공동창립 — 감옥-산업복합체 폐지 운동의 제도적 기반
  • 2003『감옥은 폐지되어야 하는가』 출간 — 폐지 민주주의의 대중적 선언

에드워드 W. 워커

Edward W. Walker
연구자 미국 미국인 1955–현재 ○ 현역 연구자

소련 해체를 연방제의 역설로 분석한 정치학자

에드워드 W. 워커는 미국의 정치학자로 소련과 탈소련 공간의 민족정치, 연방제, 분리주의를 연구했다. 그는 버클리에서 소련·유라시아 연구 프로그램을 이끌며 공산주의 체제와 탈공산주의 정치의 연결을 분석했다. 대표작 Dissolution은 소비에트 연방제가 민족공화국을 통합하는 동시에 주권의 언어와 제도를 제공했으며, 중앙 통제가 약화되자 그 틀이 분리를 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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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하버드대학교 학사
  • 1986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석사
  • 1992컬럼비아대학교 정치학 박사
  • 1997『소수자, 물라, 근대성』 편집
  • 1998–1999후버연구소 내셔널 펠로
  • 2003『해체: 주권과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출간
  • 2000s–2017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정치학과 부교수 겸 유라시아·동유럽 연구 프로그램 책임자

에이미 나이트

Amy Knight
연구자 미국 미국 1946–

베리야 전기로 스탈린의 집행자가 의외의 개혁가였다는 역설을 밝혀낸 미국 역사학자

《뉴욕 타임스》는 나이트를 두고 "서구 최고의 KGB 학자"라고 평했다.

에이미 나이트는 소련과 러시아를 연구하는 미국 역사학자로, 《뉴욕 타임스》로부터 "서구 최고의 KGB 학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1993년 저서 《베리야: 스탈린의 제1부관》은 영어권 최초의 본격적인 라브렌티 베리야 학술 전기로, 새로 개방된 소련 기록보관소 자료를 활용해 가학적 비밀경찰 우두머리라는 캐리커처 너머의 복합적 인물을 드러냈다: 스탈린 사후 권력 공백 속에서 흐루쇼프에게 제거되기 전까지 소련 체제의 자유화를 추진했던 인물이라는 역설이다. 나이트의 작업은 키로프 암살 사건부터 푸틴 시대의 정치적 살인까지 아우르지만, 굴라그의 설계자가 잠시나마 개혁의 목소리를 냈다는 베리야 역설이 그녀의 결정적 학문적 기여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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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런던정치경제대학(LSE)에서 러시아 정치학 박사학위 취득
  • 1977–1995미국 의회도서관 소련·러시아 전문 분석관
  • 1993《Beria: Stalin's First Lieutenant》 출간
  • 1993–1994우드로 윌슨 국제학술센터 펠로
  • 2017《Orders to Kill: The Putin Regime and Political Murder》 출간
  • 2024《The Kremlin's Noose》 출간

윌리엄 체이스 토브먼

William Chase Taubman
연구자 미국 미국 1941– ○ 생존

소련 현대사를 해석한 전기 작가

윌리엄 토브먼은 소련 정치와 냉전사를 연구한 미국 정치학자이자 역사가다. 그는 니키타 흐루쇼프의 삶과 시대를 장기간 연구해 2003년 전기를 출간했고, 이 책은 2004년 퓰리처 전기상을 받았다. 그의 작업은 흐루쇼프를 스탈린주의의 계승자이자 비판자로 함께 다루며, 제20차 당대회 비밀연설을 개인의 성격과 제도적 맥락 속에 놓는다. 또한 고르바초프와 스탈린의 대미 정책을 다룬 저서를 통해 소련 지도부와 국제정치의 관계를 추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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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하버드대학교 학사
  • 1965컬럼비아대학교 석사 및 러시아연구소 수료
  • 1969컬럼비아대학교 정치학 박사
  • 1982『스탈린의 대미 정책』 출간
  • 2003『흐루쇼프: 인간과 시대』 출간
  • 2004『흐루쇼프』로 퓰리처 전기상 수상
  • 2009미국 슬라브·동유럽 연구 학회 회장
  • 2017『고르바초프: 그의 삶과 시대』 출간
연구자 미국 미국 1945–

한국전쟁을 '제3차 세계대전의 대체물'로 해석한 미국의 탈수정주의 외교사학자

"여러모로 한국전쟁은 제3차 세계대전의 드레스 리허설이었다. 우리는 그 세 번째 세계대전을 피했기에,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은 오늘날의 세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이었던 매우 중요한 사건에 관여했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미국의 외교사학자로, 한국전쟁을 국제적 시각에서 재구성한 대표적인 탈수정주의 연구자다. 1995년 『한국전쟁: 국제사』에서 이 전쟁이 시기와 경과, 결과 면에서 제3차 세계대전의 대체물로 기능했다고 주장했으며, 브루스 커밍스의 수정주의적 해석에 맞서 한국전쟁을 냉전의 국제정치적 맥락 속에 재배치했다. 그루지야대학교에서 30년 넘게 재직하며 한국전쟁 연구의 외교사적 패러다임을 정립했고, 이 전쟁을 '잊힌 전쟁'에서 냉전사의 중심 무대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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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브라운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 1981『대결로 가는 길: 중국과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 출간
  • 1982–2012그루지야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퇴임 시 석좌연구교수
  • 1995한국외국어대학교 풀브라이트 석좌교수
  • 1995『한국전쟁: 국제사』(프린스턴대학출판부) 출간
  • 2002『한국전쟁 다시 생각하기: 새로운 외교·전략사』 출간

레이건의 '소비에트 101'을 편성한 NSC 소련 전문가이자 소련 주재 마지막 미국 대사

매트록은 회고했다. "나는 로널드 레이건보다 더 나은 학생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는 자기가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을 알았고,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잭 매트록은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러시아에 매료되어 외교관이 된 미국의 대소 전문가로, 1961년 첫 모스크바 근무 시절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와 흐루쇼프 사이의 외교문을 번역했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NSC 유럽·소련 담당 선임국장으로서 CIA와 국무부 분석관들을 동원해 '소비에트 101'이라는 24편의 브리핑 문건을 편성하고 모의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 역을 맡아 레이건을 훈련시켰다. 1987년 소련 주재 대사로 부임하여 소련의 마지막 4년을 목격했고, 은퇴 후 고르바초프가 제네바에서 SDI 공유 약속을 서면화하지 않은 것을 '전략적 실수'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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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 출생, 듀크대·컬럼비아대 수학
  • 1956–1971외교관 임관, 빈·모스크바·서아프리카·동아프리카 근무, 쿠바 미사일 위기 시 케네디-흐루쇼프 서신 번역
  • 1971–1974국무부 소련 담당 국장
  • 1974–1978주소 미국대사관 공사 겸 부대사
  • 1981–1983체코슬로바키아 주재 미국 대사
  • 1983–1986NSC 유럽·소련 담당 선임국장, '소비에트 101' 편성, 제네바·레이캬비크 정상회담 준비
  • 1987–1991소련 주재 미국 대사, 소련 마지막 4년 목격
  • 1991–컬럼비아대·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 『제국의 부검』·『레이건과 고르바초프』 저술

제니퍼 프로스트

Jennifer Frost
연구자 미국 미국 현재

우주 경쟁의 기준을 다시 묻는 미국사 연구자

“우주비행 능력으로 우주 경쟁을 정의한다면, 소련이 압도적으로 이겼다.”

제니퍼 프로스트는 미국의 여성사와 정치·문화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이며 뉴질랜드 오클랜드대학교에서 가르친다. 그녀는 민권운동과 신좌파, 할리우드 정치, 역사교육을 다룬 저술을 통해 사회운동과 대중문화를 미국사의 핵심 자료로 읽어 왔다. 2019년 우주 경쟁 50주년 논평에서는 달 착륙이라는 단일 기준과 우주비행 능력 전반을 구분해, 소련의 연속된 선행 성과와 미국의 달 착륙을 함께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비교는 경쟁을 국가적 승패만이 아니라 군사적 맥락과 이후의 협력, 사회적 비용까지 포함한 역사적 과정으로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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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저서 《빈민의 인종연합 운동》 출간
  • 2011저서 《헤다 호퍼의 할리우드》 출간
  • 2018오클랜드대학교 역사학 부교수
  • 2019우주 경쟁의 승패를 우주비행 능력의 범위로 재평가하는 논평 발표
  • 현재오클랜드대학교 미국사 연구·교육

제이 바타차리아

Jayanta Bhattacharya
연구자 미국인 인도계 1968–현재 ○ 활동 중

건강정책의 인과관계를 추적한 보건경제학자

그의 연구는 러시아 사망률 위기의 원인을 체제 이행에서 운동의 종결로 다시 물었다.

인도에서 태어나 미국 시민이 된 의사이자 보건경제학자로, 의학적 증거와 공공정책·인구 건강의 관계를 연구했다. 정부 프로그램과 경제 조건, 의생명 혁신이 건강 결과를 어떻게 바꾸는지 분석했다. 2013년 고르바초프 반알코올 운동 연구에서는 자본주의 이행만이 아니라 운동의 종결이 1990년대 초 러시아 사망률 위기의 큰 몫을 설명한다고 주장해 탈소비에트 평가의 쟁점을 바꾸었다. 코로나19 시기에는 방역 제한과 과학 권위를 둘러싼 논쟁적 공적 발언으로 주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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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인도 캘커타 출생
  • 1990스탠퍼드대학교 경제학 학사·석사
  • 1997스탠퍼드대학교 의학박사
  • 2000스탠퍼드대학교 경제학 박사
  • 1998–2001RAND 경제학자, UCLA 방문 조교수
  • 2001–2025스탠퍼드대학교 의학·경제학 교수
  • 2013「고르바초프 반알코올 운동과 러시아 사망률 위기」 공동 저자
  • 2025–현재미국 국립보건원장

제임스 베이커

James Baker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930– ○ 자연사

냉전 종식을 설계한 실무형 외교가

1989년 11월 29일 몰타 회담 메모에서 베이커는 부시고르바초프보다도 "새로운 속도와 목적"을 이끌어야 한다고 썼다.

제임스 베이커는 변호사 출신의 공화당 정치가로, 조지 H. W. 부시와의 오랜 동맹을 바탕으로 미국 보수정치의 핵심 실무자가 되었다. 재무장관으로 환율과 국제 금융을 다룬 뒤 국무장관이 되어 냉전 말기의 외교, 독일 통일, 걸프 위기를 조정했다. 그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무조건 신뢰하기보다 미국의 이익과 동맹의 안정을 계산했지만, 부시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손을 내밀도록 설득하고 1989년 몰타 회담의 의제와 운영을 구체화했다. 그 신중한 현실주의는 대결의 관성을 늦추면서도 변화의 방향을 미국 외교가 관리할 수 있는 협상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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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출생
  • 1952–1954프린스턴대 졸업 후 해병대 장교로 복무
  • 1957–1980휴스턴에서 기업 변호사로 활동
  • 1981–1985레이건 대통령 백악관 비서실장
  • 1985–1988미국 재무장관, 플라자 합의와 베이커 계획 추진
  • 1989–1992미국 국무장관, 몰타 회담과 냉전 말기 외교를 조정
  • 1992–1993부시 행정부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복귀
  • 2010년대–공공정책과 국제 현안에 자문역으로 참여

제임스 하인젠

James Heinzen
연구자 미국 미국인 20세기–현재 ○ 생존

소비에트 농촌 국가를 해부한 역사가

제임스 하인젠은 현대 러시아와 소비에트 사회의 정치·사회·문화사를 연구한 미국의 역사가다. 그의 대표작은 농업인민위원부를 중심으로 1917년 혁명 뒤 국가가 농촌을 변혁하려 한 과정을 추적한 『소비에트 농촌 만들기』다. 그는 농촌의 후진성을 극복하려는 국가 기획과 사회주의 건설의 목표가 충돌하는 지점을, 관료제와 농민의 선택 및 갈등을 통해 분석했다. 이후에는 스탈린 시대의 뇌물과 일상적 부패를 연구해 국가 정책과 사회적 실천 사이의 긴장을 넓혀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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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s펜실베이니아대학교 대학원에서 러시아사 연구
  • 1980s–1990s예일대학교·프린스턴대학교에서 근대 러시아사 강의
  • 2004『소비에트 농촌 만들기』 출간
  • 2010s스탈린 시대 뇌물과 부패 연구
  • 2016『뇌물의 기술』 출간
  • 현재로언대학교 역사학 교수

조너선 브렌트

Jonathan Brent
연구자 미국 미국 1949–

스탈린의 마지막 음모를 기록한 미국의 역사가이자 출판인

「'굴라그'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20세기 최대의 재앙이다.」

미국 출판인·역사가로, 1991년 예일대 출판부에서 냉전 후 공개된 소련 아카이브 자료를 서방에 선보인 『공산주의 연대기』 시리즈를 창설했다. 2003년 블라디미르 나우모프와 공저한 『스탈린의 마지막 범죄』는 이전까지 폐쇄됐던 KGB 및 대통령 문서고 자료를 바탕으로 의사들의 음모 사건을 전면 재구성했으며, 스탈린이 유대인 인구의 대규모 강제 이주와 새로운 대숙청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논제를 제시했다. 2009년부터 YIVO 유대인 연구소의 소장으로서 동유럽 유대인 문서유산 보존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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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1–1991노스웨스턴 대학 출판부 편집장 겸 국장
  • 1981문예지 《Formations》 창간
  • 1991–2009예일대 출판부 편집국장 겸 부국장, 『공산주의 연대기』 시리즈 창설
  • 2003『스탈린의 마지막 범죄』 출간
  • 2004–바드 칼리지 역사·문학 객원교수
  • 2008『스탈린 아카이브의 내부』 출간
  • 2009–YIVO 유대인 연구소 소장 겸 CEO

존 루이스 개디스

John Lewis Gaddis
연구자 미국 미국인 1941–

냉전사 후기수정주의를 창시하고 소련 기록공개 이후 정통주의로 회귀한 역사가

인과의 사슬을 최종적으로 고정시킨 것은 자신의 권위주의적·편집증적·자기애적 성향에 예측 가능하게 반응한 스탈린이었다.

미국의 냉전사가로, 1972년 첫 저서로 후기수정주의 학파를 창시했다. 냉전의 책임이 양측에 있다는 틀을 세웠으나, 소련 붕괴 후 기록보관소가 열리자 1997년 『우리는 이제 안다』에서 스탈린이 냉전의 결정적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정통주의로 회귀했다. 조지 F. 케넌의 공식 전기로 2012년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예일대 교수로 『뉴욕타임스』로부터 '냉전사가들의 학장'이라 불렸다. 그의 궤적은 냉전사 서술이 증거에 따라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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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텍사스대학교 오스틴캠퍼스에서 학사 학위 취득
  • 1968텍사스대학교 오스틴캠퍼스에서 박사 학위 취득
  • 1969–1997오하이오대학교 교수 (1983년 석좌교수)
  • 1972『미국과 냉전의 기원, 1941–1947』 출간: 후기수정주의 학파 창시
  • 1987오하이오대학교 현대사연구소 설립
  • 1991윌슨센터 냉전국제사프로젝트 설립 참여
  • 1997–현재예일대학교 로버트 A. 러벳 군사·해군사 석좌교수
  • 2012『조지 F. 케넌: 미국적 삶』으로 퓰리처상 전기 부문 수상

케이트 브라운

Kate Brown
연구자 미국 미국 1965–

체르노빌의 은폐된 사망자를 추적한 환경사학자

“저선량 피폭에 대한 무지는, 내가 주장해왔듯이, 부분적으로는 의도된 것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벨라루스의 기록보관소를 10년간 뒤져 핵 경관 연구를 다시 쓴 MIT의 과학·환경사학자. 『플루토피아』(2013)로 핸퍼드와 마야크의 플루토늄 재앙을 폭로해 러시아·미국·환경사 분야 최고상을 휩쓸었고, 내셔널 북 크리틱스 서클 최종후보작 『생존 매뉴얼』(2019)에서는 IAEA와 체르노빌 포럼이 오염 식품을 통한 내부피폭 경로를 배제해 수만 명의 사망을 은폐했다고 주장했다. 이 비판은 국제적 합의에 대한 중심적 역사학적 도전이 되었으며, 냉전기 핵 기관들이 저선량 방사선의 과학 자체를 형성해왔다는 문제 제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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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메릴랜드대 볼티모어카운티 캠퍼스(UMBC) 교수 부임
  • 2004『장소 없는 전기』 출간, 미국역사학회 조지 루이스 비어상 수상
  • 2013『플루토피아』 출간, 러시아·미국·환경사 분야 최고 학술상 석권
  • 2015『디스토피아에서 온 소식』 출간, 구겐하임·카네기 펠로십 수상
  • 2018MIT 과학기술사회학과 교수 부임
  • 2019『생존 매뉴얼』 출간, 내셔널 북 크리틱스 서클상 최종후보 및 ASEEES 젤닉상·슐먼상 수상
  • 2026『어디에나 작은 정원』 출간

크리스틴 고드시

Kristen Ghodsee
연구자 미국 미국계 푸에르토리코·페르시아계 1970–

1989년 이후 삶의 사회적 비용을 추적한 민족지학자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뒤 동유럽을 여행한 경험은 그녀가 체제전환의 희망과 비용을 함께 연구하게 한 전환점이었다.

크리스틴 고드시는 미국의 인류학자이자 동유럽 연구자로, 사회주의와 체제전환이 평범한 사람들, 특히 여성의 삶에 남긴 흔적을 민족지학으로 연구했다. 불가리아 현지조사를 바탕으로 사회주의의 성과와 체제전환기의 상실을 함께 살피며, 반공 승리 서사가 지워 온 물질적 경험을 복원했다. 미첼 오렌스타인과 함께 쓴 『충격의 재고』는 1989년 혁명 이후 동유럽의 경제·사회 지표를 비교해 전환의 이익이 불균등하게 분배되었음을 분석했다. 그의 작업은 사회주의를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자본주의 전환의 결과를 경험 자료와 주민의 목소리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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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출생
  • 1992캘리포니아대학교 샌타크루즈에서 창작문예·연극예술 학사
  • 1990년대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에서 인류학 석사·박사 취득
  • 2005『붉은 리비에라』 출간, 불가리아 흑해 연안 관광산업의 여성 노동을 연구
  • 2012존 사이먼 구겐하임 펠로십 수상
  • 2017–현재펜실베이니아대학교 러시아·동유럽 연구 교수
  • 2021미첼 오렌스타인과 『충격의 재고』 출간
  • 2022–현재펜실베이니아대학교 러시아·동유럽 연구학과 학과장
  • 2023『일상적 유토피아』 출간

테리 마틴

Terry Martin
연구자 미국 캐나다계 미국인 1963–현재

소련을 '민족의 감옥'이 아닌 '긍정적 차별의 제국'으로 재정의한 역사학자

소련에서 나온 15개국은 1917년에는 대체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소련이 국가를 민족 원칙에 따라 조직한 결과였다.

소비에트 민족정책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꾼 캐나다 출신 역사학자. 2001년 저서 『긍정적 차별의 제국』에서 초기 소련을 민족을 억압한 '민족의 감옥'이 아니라 세계 최초로 소수민족 우대 정책을 체계적으로 시행한 '긍정적 차별의 제국'으로 재규정하며 리처드 파이프스의 전통적 해석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로서 소련사, 스탈린주의, 민족·제국 연구를 가르치며 우크라이나 연구소(HURI) 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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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하버드대 역사·문학 전공 학사
  • 1996시카고대 역사학 박사
  • 2001『긍정적 차별의 제국』 출간
  • 2001로널드 수니와 『국가들의 국가』 공동 편집
  • 2006하버드대 역사학과 정교수
  • 현재조지 F. 베이커 3세 러시아학 석좌교수 · 우크라이나 연구소(HURI) 소장

폴 R. 그레고리

Paul R. Gregory
연구자 미국 미국 1941–

소련 계획경제의 관료제를 추적한 경제사가

폴 R. 그레고리는 미국 경제사가이자 러시아·소련 경제 연구자다. 그는 소련 경제관료제와 계획의 작동을 통계 분석과 현장 인터뷰로 추적했으며, 소련 인터뷰 프로젝트를 이끌어 계획 담당자와 관료의 경험을 연구 자료로 남겼다. 유리 올세비치와 함께 쓴 2000년 소련 계획경제 회고 연구는 코시긴 개혁을 지령적 계획과 이윤 유인의 긴장을 해소하지 못한 시도로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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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오클라호마대학교 경제학 학사
  • 1964오클라호마대학교 러시아학 석사
  • 1969하버드대학교 경제학 박사
  • 1969–1972오클라호마대학교 경제학 조교수
  • 1972–현재휴스턴대학교 경제학 교수
  • 1979–1988소련 인터뷰 프로젝트 책임연구자
  • 1990『소련 경제관료제의 재편』 출간
  • 2000유리 올세비치와 소련 계획경제 회고 연구 공저

프랜시스 요시히로 후쿠야마

Francis Yoshihiro Fukuyama
이론가 미국 미국계 일본인 1952– ○ 현역 학자

1989년의 승리를 자유민주주의의 종착점으로 읽은 학자

그는 1989년 이렇게 썼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단지 냉전의 종식이 아니라 역사의 종말일 수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국제정치 연구자로, 국가·제도·정치 질서의 형성을 비교해 왔다. 1989년 논문 「역사의 종말?」은 냉전 종식과 자유민주주의의 세계적 확산을 인류의 이념적 진화가 도달한 지점으로 해석하며 1989년의 의미를 둘러싼 가장 유명한 논쟁의 한 축을 만들었다. 1992년 저서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에서 이 주장을 확장했지만, 이후에는 국가 역량과 법치, 책임성을 강조하며 초기 명제의 단순한 낙관론을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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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코넬대학교 고전학 학사
  • 1979–1981하버드대학교 정치학 박사 과정 및 박사학위
  • 1979–1989랜드연구소 정치학 부서 연구원
  • 1981–1982미 국무부 정책기획참모
  • 1989「역사의 종말?」 발표, 『내셔널 인터레스트』
  • 1992『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 출간
  • 2001–2010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정치경제 교수
  • 2010–현재스탠퍼드대학교 프리먼 스폴리 국제학연구소 선임연구원

프랜신 허쉬

Francine Hirsch
연구자 미국 미국 1967–

제정 시대의 제국적 민족지 관행이 소련으로 이어졌다는 연속성 테제를 제시한 미국 역사학자

제정 러시아의 민족지학자들이 볼셰비키 국가의 영토 구획과 인구 범주화를 실질적으로 설계했다는 연속성 테제로, 탈소비에트 시대 소련 민족 연구의 지형을 재편했다.

미국의 러시아·소련사 연구자로, 위스콘신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2005년 저서 『제국들의 민족지』에서 전직 제정 민족지학자들이 볼셰비키에 제공한 지식이 소련의 영토 경계와 민족 정책을 형성했으며, 소련은 제국의 민족지 관행을 단절하지 않고 계승했다는 연속성 테제를 제출했다. 이 저서는 허버트 백스터 애덤스 상을 수상하며 테리 마틴의 『차별적 조치의 제국』이 내세운 소비에트 민족 정책의 참신함 테제와 대비되는, 소련 민족 연구의 양대 해석 축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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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Princeton University 역사학 박사
  • 1998–현재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 사학과 교수
  • 2005『Empire of Nations: Ethnographic Knowledge and the Making of the Soviet Union』 출간 (Herbert Baxter Adams Prize, Wayne S. Vucinich Prize 수상)
  • 2020『Soviet Judgment at Nuremberg: A New History of the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After World War II』 출간

프레더릭 켐프

Frederick Kempe
연구자 미국 독일계 1954– ○ 현역

냉전 위기를 추적한 저널리스트 역사가

프레더릭 켐프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저자로, 독일계 이민자 가정의 배경과 유럽 특파원 경험을 바탕으로 냉전의 정치와 대서양 관계를 다뤘다. 그의 대표작 『베를린 1961』은 새로 공개된 미국·소련·독일 문서와 인터뷰를 엮어 베를린 장벽 건설과 1961년 10월 체크포인트 찰리의 전차 대치를 재구성했다. 이 책은 케네디의 위기 대응을 약함으로 해석하고 흐루쇼프의 선택을 제약 조건 속에 놓았으며, 그 비대칭적 논지는 독립 서평에서 비판과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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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컬럼비아대학교 저널리즘대학원 졸업
  • 1981『월스트리트 저널』 런던 특파원으로 입사
  • 1984『월스트리트 저널』 빈 지국 개설
  • 1990『월스트리트 저널』 베를린 지국장
  • 1992–1997『월스트리트 저널』 편집국 간부, 중부유럽 경제평론 창간
  • 2002–2005세계판 『월스트리트 저널』 유럽 편집자
  • 2007–애틀랜틱 카운슬 회장 겸 최고경영자
  • 2011『베를린 1961』 출간

호프 M. 해리슨

Hope M. Harrison
연구자 미국 미국 1963– ○ 현역 역사학자

베를린 장벽을 다시 읽은 냉전사가

호프 M. 해리슨은 독일과 러시아, 냉전의 국제정치를 연구한 미국의 역사가다. 대표작은 동독과 소련의 관계를 동독 자료와 소련 자료로 재구성한 《소련을 장벽으로 몰아붙이기》다. 그녀는 1961년 국경 폐쇄를 흐루쇼프의 일방적 결정으로만 보던 강대국 중심 서술에 이의를 제기하며, 발터 울브리히트가 동독의 경제·정치적 위기를 해결하려 소련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다고 논증했다. 이 해석은 작은 사회주의 국가의 행위와 동맹 내부의 긴장이 냉전의 고위정치를 형성했다는 점을 부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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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컬럼비아 대학교 학사
  • 1993컬럼비아 대학교 박사
  • 1999–현재조지 워싱턴 대학교 역사학·국제정치학 교수
  • 2003《소련을 장벽으로 몰아붙이기》 출간
  • 2004마셜 슐먼 도서상 수상
  • 2019《베를린 장벽 이후》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