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국가적 배경

중국

25 명

해당 인물

쭤린 위팅 장

张作霖
외국 정치가 중국 중국인 1875–1928 ✕ 관동군 폭살

만주를 지배한 군벌 정치가

1928년 6월 4일, 베이징에서 돌아오던 그의 열차가 황고둔에서 폭발했다.

장쭤린은 청 말의 군인에서 출발해 중국 군벌시대 동북 지역의 독자적 권력자로 성장한 중국 정치가였다. 그는 봉천군벌을 이끌며 만주를 사실상 자치적으로 통치했고, 군사력과 산업·재정 정비를 결합해 자신의 기반을 강화했다. 일본의 지원과 만주 이권을 둘러싼 협력은 그의 권력을 키웠지만, 동시에 일본군과 충돌할 여지도 남겼다. 국민당의 북벌로 베이징에서 철수하던 중 관동군 장교들이 설치한 폭탄에 중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이 황고둔 사건은 일본군의 독단적 만주 개입이 심화되는 전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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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1895청군 기병으로 청일전쟁 참전
  • 1905봉천성 정규군 연대 지휘관
  • 1916봉천성 군무독판
  • 1918동삼성 순열사, 만주 군정 장악
  • 1924베이징 장악, 중화민국 군사독재자
  • 1927–1928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
  • 1928황고둔 사건으로 관동군에 암살됨

천두슈

陈独秀
비소련 혁명가 중국 중국 1879–1942 ○ 자연사

《신청년》으로 중국을 깨우고 공산당을 창당해 6년간 이끈 혁명가

“과학과 민주주의, 오직 이 두 분을 우리 선생으로 모셔야 한다.” — 《신청년》

중국 공산당의 주요 창립자이자 초대 총서기(1921–1927). 《신청년》으로 신문화운동을 주도했으며, 국공합작 붕괴 후 코민테른에 의해 해임·제명된 뒤 트로츠키주의로 전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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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과거에 합격해 수재(秀才)가 되다
  • 1901–1908일본 유학 중 반청 혁명운동 참여 — 와세다대학에서 서양 사상 수학
  • 1915상하이에서 《신청년》(新青年) 창간 — 신문화운동의 기관지
  • 1917–1919베이징대학 문과 학장 — 5·4운동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
  • 1920상하이 마르크스주의 소조 결성 — 보이틴스키와 접촉
  • 1921–1927중국 공산당 초대 총서기 — 제1차 국공합작과 북벌기 당을 지도
  • 1927'우익 기회주의'로 비판받고 코민테른에 의해 해임·제명
  • 1929–1931트로츠키주의로 전향 — 중국 트로츠키주의 통일회의 지도자
  • 1932–1937국민당 정부에 체포되어 5년간 수감

주더

朱德
비소련 혁명가 중국 중국 1886–1976 ○ 자연사

중국 홍군과 인민해방군을 창건한 총사령관, 10대 원수 중 제1인자

암살자들이 권총을 겨누자 "쏘지 마시오. 나는 그냥 취사병이오"라고 말해 살아남았고, 병사들은 그를 '취사반장'이라 불렀다.

중국 공산혁명의 군사적 승리를 이끈 총사령관이다. 1928년 징강산에서 마오쩌둥과 합류해 '주-마오 군대'를 형성했고, 게릴라전을 전략 차원으로 끌어올려 대장정·항일전쟁·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부주석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으며, 1955년 10대 원수 중 첫 번째로 임명되었다. 군벌 장군에서 아편을 끊고 공산주의자로 거듭난 그의 삶은 중국 혁명의 궤적을 가장 완전하게 체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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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윈난군관학교 졸업, 신해혁명 참가
  • 1922베를린에서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공산당 입당
  • 1927난창 봉기 공동 지휘 — 인민해방군의 기원
  • 1928징강산에서 마오쩌둥과 합류 — '주-마오' 제4홍군
  • 1930중국 홍군 총사령관, 1~4차 포위섬멸전 승리
  • 1934–1935대장정에서 홍군 총사령관
  • 1937–1945팔로군 총사령관, 백단대전 지휘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10대 원수 중 제1위

장제스

蔣介石
외국 정치가 중국 중국계 1887–1975 ○ 자연사

항일전쟁과 반공 통치를 함께 이끈 국민당 지도자

1937년 소련과 조약을 맺은 뒤에도 그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일본과 공산당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의 군사·정치 지도자로서 1920년대 북벌을 이끌어 난립한 중국을 국민정부 아래 통합했다. 그는 공산당과의 내전을 우선시했지만, 1936년 서안사변 뒤 일본에 맞선 제2차 국공합작을 받아들였고 1937년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바탕으로 무기와 항공기 지원을 확보했다. 항일전쟁에서 중국의 저항을 지휘한 뒤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대만으로 정부를 옮겼으며, 그곳에서 장기간의 계엄과 권위주의 통치를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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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중국동맹회 가입
  • 1924–1927황푸군관학교 교장
  • 1926–1928국민혁명군 총사령관, 북벌 지휘
  • 1928–1931국민정부 주석, 행정원장
  • 1937–1945중국 전구 항일전쟁 최고지휘관
  • 1948–1975중화민국 총통
  • 1950–1975대만에서 국민정부 통치

리다자오

李大钊
비소련 혁명가 중국 중국 1889–1927 ✕ 처형

중국 최초로 마르크스주의를 껴안고 마오쩌둥 세대를 길러낸 베이징대학 도서관장

1918년 11월 「볼셰비즘의 승리」에서: "세계 각지에서 볼셰비즘의 승리의 깃발이 펄럭이고 승리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것을 보라. (…) 오늘 이후로 이곳은 더 이상 부르주아지의 세계도, 자본주의의 세계도, 제국주의의 세계도 아니다. 이것은 노동자의 세계, 볼셰비즘의 세계다!"

중국 마르크스주의 선구자이자 공산당 공동 창립자. 베이징대 도서관장으로 마오쩌둥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전했고, 5·4운동을 이끌며 러시아 혁명을 옹호했다. 국공합작을 설계했고 1927년 장쭤린에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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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3톈진 북양법정전문학교 정치경제학 전공
  • 1913–1916와세다대학 유학, 반위안스카이 학생운동 지도
  • 1918–1927베이징대학 도서관장·역사학 교수, 『신청년』 편집위원
  • 1919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이자 조직자
  • 1920베이징 공산주의 소조 창립, 보이틴스키와 천두슈 연결
  • 1921중국공산당 공동 창립자 (제1차 전국대표대회)
  • 1922–1924제1차 국공합작 주창자, 국민당 중앙집행위원
  • 1926–1927농민무장혁명론 전환, 소련대사관에서 지하활동 지도

마오쩌둥

毛泽东
사회주의권 지도자 중국 중국 1893–1976 ○ 자연사

농민의 나라에 맞게 혁명의 문법을 다시 쓴 중국 혁명의 지도자

“작은 불씨 하나가 온 들판을 태울 수 있다(星星之火,可以燎原).” — 당내 서신(1930)

중국 공산혁명을 이끌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혁명가이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농촌이 도시를 포위하는 인민전쟁 전략을 창안했으며, 제3세계 해방운동과 서구 신좌파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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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중국공산당 창립 참여
  • 1927후난 농민운동 시찰 보고 — 농민 혁명론
  • 1934–1935대장정 — 쭌이 회의에서 실권 장악
  • 1937철학논문 《실천론》·《모순론》 발표
  • 1940《신민주주의론》 발표
  • 1949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 1958–1961대약진 운동 — 파국적 기근
  • 1966–1976문화대혁명

쑹쯔원

宋子文
외국 정치가 중국 중국인 1894–1971 ○ 자연사

재정과 외교를 잇댄 국민정부 실무가

1945년 8월 7일, 쑹쯔원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중소 협상을 재개했다.

쑹쯔원은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재정가이자 외교관으로, 국가 재정과 대외 원조를 연결해 전쟁기 국민당 국가의 운영을 뒷받침했다. 그는 재정 통합과 관세 자주권을 추진했지만, 중앙집권적 전쟁 재정과 가족·금융 네트워크의 결합이라는 긴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1945년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중소조약을 협상하며 만주 철도와 뤼순의 처리, 외몽골의 지위를 둘러싼 중국의 양보를 조율했고, 그 합의는 일본 패전 뒤 동북아 질서를 규정했다. 전후 행정원장으로서 인플레이션과 내전 재정 위기를 수습하지 못한 뒤 미국으로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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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하버드대학교 경제학 졸업
  • 1923–1924광저우 중앙은행 설립 실무, 쑨원의 영어 비서·세무국장
  • 1925–1927광둥 혁명정부 재정부장
  • 1928–1933국민정부 재정부장, 중앙은행 총재
  • 1940–1942워싱턴 주재 장제스 특사, 대미 전시 원조 교섭
  • 1942–1945중화민국 외교부장
  • 1945–1947행정원장, 1945년 모스크바 중소조약 협상 대표
  • 1947–1949광둥성 정부 주석·광저우 행영 주임

장팅푸

蒋廷黻
외국 정치가 중화민국 중국 (한족) 1895–1965 ○ 자연사

소련 대표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만든, 안보리 의장석의 국민당 외교관

1950년 1월, 의장석에 앉은 장팅푸를 향해 말리크가 '이것은 회의가 아니라 회의의 패러디'라고 외치고 퇴장했다.

청나라 외교문서를 실증적으로 연구한 역사가에서 중화민국 외교관으로 전환한 인물이다. 컬럼비아대에서 박사를 마치고 난카이·칭화대에서 중국 근대외교사 연구를 개척했으며, 1935년 학계를 떠나 국민정부에 합류해 주소대사와 상임 유엔대표를 지냈다. 1950년 1월 안보리 의장으로 회의를 주재할 때 소련 대표 말리크가 중공이 아닌 국민당 대표와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다며 퇴장했고, 이 공백은 6월 한국전쟁 유엔군 결의가 거부권 없이 통과되는 결정적 조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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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9난카이대학 역사학과 교수·주임
  • 1929–1935칭화대학 역사학과 주임·문학원장
  • 1935–1936국민정부 행정원 정무처장
  • 1936–1938주소 중화민국 대사
  • 1944–1946UNRRA 중국 대표·행정원 선후구제총서 서장
  • 1947–1962중화민국 상임 유엔대표·안보리 대표
  • 1961–1965주미 중화민국 대사 (유엔대표 겸임)

류사오치

刘少奇
비소련 혁명가 중국 중국 1898–1969 ○ 구금 중 병사

중국공산당의 수석 이론가이자 마오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가 문화대혁명에 휩쓸린 국가주석

"다행히도 역사는 인민이 쓰는 법이다" — 숙청되어 카이펑으로 압송되던 1969년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말.

중국공산당 노동운동의 초기 조직자로서 안위안 탄광 파업을 지도하고 상하이·우한에서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1939년 「공산당원의 수양」을 집필해 마르크스주의 당 건설 이론에 독창적으로 기여했으며, 1945년 당 규약에 마오쩌둥 사상을 명문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에 취임해 대약진 실패 후 경제 조정을 주도하며 '삼자일포' 등 실용주의 노선을 밀어붙였으나, 이는 마오와의 치명적 분열로 이어졌다. 문화대혁명 발발 후 '자본주의 노선의 사령관'으로 몰려 1968년 모든 직위에서 해임·제명되었고 1969년 구금 중 사망했으나, 1980년 덩샤오핑에 의해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로 전면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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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25안위안 탄광 노동자클럽 전권대표, 중화전국총공회 집행위원
  • 1936중국공산당 북방국 서기 (화북 항일 저항 지도)
  • 1941–1943신사군 정치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겸 중앙군사위 부주석
  • 1945제7차 당대회에서 「당에 관하여」 보고, 마오쩌둥 사상 당규약 명문화
  • 1949중앙인민정부 부주석
  • 1954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 1959중화인민공화국 주석 (국가원수)
  • 1968모든 당내외 직위 박탈 및 제명

펑더화이

彭德怀
사회주의권 지도자 중국 중국 1898–1974 ○ 옥사, 1978년 복권

대약진을 비판했다가 숙청된 중국 인민해방군 원수이자 한국전쟁 지휘관

'나는 하이루이(海瑞)가 되겠다!' — 1962년 마오쩌둥에게 제출한 8만 자 상소문에서, 황제에게 직언한 명나라 청렴 관리를 자처하며

중국 인민해방군 10대 원수 중 한 명으로, 한국전쟁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을 지휘했고 국방부장으로서 소련식 군대 개혁을 추진한 군사 지도자였다. 1959년 루산 회의에서 대약진의 실패와 기근을 마오쩌둥에게 서한으로 비판한 일로 '반당 집단' 수장으로 숙청되었고, 문화대혁명 시기 투옥·고문 끝에 1974년 옥사했으며 1978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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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국민당 군대에서 봉기, 홍5군 창설 후 징강산에서 마오·주더와 합류
  • 1930–1934홍3군단 사령관, 장시 소비에트 방어전 지휘
  • 1934–1935대장정 참가,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 지지
  • 1937–1940팔로군 부총사령관, 백단대전 총지휘
  • 1947–1949서북야전군 사령관, 옌안 방어 및 서북 5개 성 해방
  • 1950–1953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 한국전쟁 지휘
  • 1954–1959국방부장, 중앙군사위 부주석; 소련식 군 현대화 추진
  • 1959루산 회의에서 대약진 비판 서한으로 숙청, 전직 박탈

저우언라이

周恩来
사회주의권 지도자 중국 중국 1898–1976 ○ 자연사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총리이자 외교의 설계자

1972년 닉슨 방중을 성사시킨 외교는 냉전의 삼각구도를 바꾸었다.

중국 공산혁명의 초기부터 마오쩌둥과 함께한 지도자다. 1949년부터 사망 때까지 국무원 총리로서 국가 건설과 외교를 맡았고, 문화대혁명기의 권력 균형에도 깊이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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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76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 1954–1958외교부장 겸임
  • 1972미중 관계 정상화의 길을 연 외교

취추바이

瞿秋白
비소련 혁명가 중국 중국 1899–1935 ✕ 국민당에 처형

중국어로 《인터내셔널》을 처음 울린 마르크스주의 문예비평가이자 1927년 당의 지도자

1935년 6월 18일, 장팅 중산공원의 작은 언덕. 총살형 집행을 앞둔 취추바이는 풀밭에 앉아 집행인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바로 여기가 좋군!" 그리고 《인터내셔널》을 부르며 숨을 거두었다.

5·4운동 세대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러시아어를 익혀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볼셰비키 혁명의 현장을 중국에 생생히 전했다. 1923년 귀국 후 천두슈의 뒤를 이어 CCP 임시 중앙을 이끌며 광저우 봉기 등 무장투쟁 노선을 추진했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실각 후에는 루쉰·마오둔과 함께 좌익작가연맹을 이끌며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을 중국에 정초했고, 《인터내셔널》을 비롯한 러시아·소비에트 문학 번역에 헌신했다. 1935년 국민당에 체포되어 장팅에서 총살당했으며, 사형장까지 《인터내셔널》을 부른 최후로 혁명적 순교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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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2《천바오》 모스크바 특파원
  • 1922모스크바에서 중국 공산당 입당
  • 1923CCP 중앙위원, 선전·기관지 편집 책임
  • 1927–1928CCP 임시 정치국 수장 (사실상 당 지도자)
  • 1928–1930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무위원, CCP 대표단 단장
  • 1930–1931CCP 중앙위원, 좌경폭동주의 비판 후 해임
  • 1931–1934상하이 좌익작가연맹 지도, 루쉰과 공동 활동, 번역·문예비평
  • 1934–1935중화소비에트공화국 교육인민위원, 《붉은 중국》 편집

펑전

彭真
사회주의권 지도자 중국 중국 1902–1997 ○ 혈액암으로 사망

문화대혁명의 첫 희생양이 된 베이징 시장이자 마오 사후 중국 법치의 제도적 기초를 놓은 정치인

"마오 주석도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오 주석의 위신이 에베레스트만큼 높지 않더라도 타이산만큼은 높습니다. 흙 몇 톤을 퍼내도 여전히 그만큼 높습니다" ― 1962년 7천인대회에서 마오를 공개 비판하며

1923년 산시성에서 창립 당원으로 입당해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쳐 1945년 정치국원에 올랐다. 1951년부터 15년간 베이징 시장 겸 시당위 제1서기로 수도 전역을 당의 충실한 거점으로 만들었다. 1966년 2월 5인 소조의 「2월 강요」로 문화대혁명의 학술적 봉쇄를 시도했으나, 마오쩌둥에 의해 무효화되고 '반혁명 수정주의자'로 몰려 53차례 대중투쟁을 당했다. 바로 문화대혁명의 개막이었다. 1979년 덩샤오핑에 의해 복권되어 중앙정법위원회 서기로 7개 기본 법률을 3개월 만에 통과시켰고, 제6기 전인대 상무위원장(1983~1988)으로서 개혁기 중국 법치의 제도적 기초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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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타이위안에서 중국공산당 입당, 산시성 창립 당원
  • 1929–1935베이징·톈진에서 투옥, 옥중에서도 지하활동 지속
  • 1937–1941화북국 조직부장 겸 산시-차하얼-허베이 변경구 서기
  • 1941–1944중앙당교 부교장, 옌안 정풍운동에서 당교 숙청 주도
  • 1945정치국원 선출; 동북국 서기 파견 — 1946년 군사적 패배로 해임
  • 1951–1966베이징 시장 겸 시당위 제1서기
  • 19665인 소조 조장, 「2월 강요」 기초; 5월 회의에서 숙청, 문화대혁명 개막
  • 1979–1988전인대 법제위 주임, 중앙정법위 서기; 제6기 전인대 상무위원장(1983–1988)

왕밍

王明
비소련 혁명가 중국 중국 (한족) 1904–1974 ○ 망명 중 사망

'28인의 볼셰비키' 지도자이자 마오쩌둥의 최대 정적

1932년 상하이 사변 당시 "오늘 중국은 '양국의 투쟁' — 신생 중화소비에트공화국과 부패한 중화민국의 투쟁"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하며, 이 대립이 "현재 중국 정치생활 전체의 핵심"이라고 규정했다.

중국 공산당 초기 지도부에서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의 핵심 지도자로, 모스크바 쑨원대학 유학 시절 파벨 미프의 후원을 받아 1931년부터 1937년까지 코민테른 주재 중공 대표를 지냈다. 스탈린 노선에 충실한 교조주의자로서 마오쩌둥의 주요 정치적 경쟁자였으며, 마오는 『실천론』과 『모순론』에서 왕밍의 노선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항일민족통일전선 노선을 제시했으나, 1942년 정풍운동에서 교조주의의 표적으로 숙청된 후 1956년 소련으로 망명하여 모스크바에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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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9모스크바 쑨원대학 유학
  • 1931.1중공 중앙정치국원 선출
  • 1931–1937코민테른 주재 중공 대표
  • 1935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간부회원 선출
  • 1937–1938중공 장강국 서기
  • 1949–1956중앙법제위원회 주임
  • 1956–1974소련 망명, 반마오 선전 활동

덩샤오핑

邓小平
사회주의권 지도자 중국 중국 1904–1997 ○ 자연사

개혁개방으로 중국의 궤도를 바꾼 실권자

1978년 이후의 전환은 계획경제와 사회주의의 관계를 다시 묻게 만들었다.

프랑스와 모스크바에서 혁명운동을 경험한 중국 공산당 지도자다. 문화대혁명 시기 두 차례 실각 뒤 복귀해 1978년부터 경제 개혁과 대외 개방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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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학습
  • 1978–1992중국의 사실상 최고지도자·개혁개방 주도
  • 1979미국 방문과 대외 개방의 상징적 출발

가오강

高岗
사회주의권 지도자 중국 중국 1905–1954 ✕ 자살

만주에서 사실상 독자적 권력을 휘둘렀다가 마오의 함정에 걸려 죽음으로 몰락한 당내 2인자

'이 훈장은 후방의 곰보딱지 가오강에게 가야 합니다': 1953년 7월 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 훈장을 받으며 펑더화이가 한 말

산시성 유격 근거지에서 출발해 만주(둥베이)의 당·정·군을 총괄한 중국공산당 초기 지도자로, 1949년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이 되었다. 한국전쟁 시기 둥베이 군구 사령원으로서 중국인민지원군의 후방 기지와 보급망 전반을 책임졌으며, 펑더화이조차 '이 훈장은 곰보딱지 가오강에게 가야 한다'고 인정했을 정도로 참전의 물질적 토대를 조직했다. 1952년 국가계획위원회 주석으로 발탁되었으나, 류샤오치를 대체하려 한 권력 투쟁이 '가오-라오 반당 연맹'으로 규정되며 실각, 1954년 가택연금 중 수면제로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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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중국공산당 입당
  • 1932–1935산시-간쑤 소비에트 지역 창설, 대장정 종착 기지 제공
  • 1941정풍운동 지도소조 위원
  • 1945–1952둥베이국 부서기(1945), 서기(1946), 둥베이 인민정부 주석(1949), 둥베이 군구 사령원 겸 정치위원
  • 1949중앙인민정부 부주석
  • 1950–1953둥베이 변경 방위군 사령원, 중국인민지원군 후방·보급 총책
  • 1952–1954국가계획위원회 주석, 제1차 5개년 계획 주도
  • 1954'가오-라오 반당 연맹'으로 실각, 8월 자살

천윈

陈云
사회주의권 지도자 중국 중국 1905–1995 ○ 자연사

'새장 경제' 개념으로 중국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설계한 공산당 원로

'새장은 계획이고, 그 안에서 새[경제]는 마음껏 날 수 있다.' — 1982년, 시장과 계획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핵심 구상을 정식화하며

중국 공산당 제1·2세대 지도부의 핵심 인물로, 중국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설계자 역할을 수행했다. 상하이 상무인서관 식자공 출신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고, 대장정과 옌안 정풍운동을 거치며 당 조직부장으로서 마오쩌둥의 측근이 되었다. 1949년 이후 중앙재경위원회 주임으로서 제1차 5개년 계획을 입안하고 물가 안정과 통일 재정을 확립했으며, 대약진 붕괴 이후 저우언라이·덩샤오핑과 함께 경제 재건을 주도했다. 1980년대에는 '새장 경제' 개념(시장은 계획이라는 새장 안에서 자유롭게 날아야 한다)을 정식화하며 덩샤오핑에 이은 중국 제2의 실력자로 개혁의 속도를 조절하는 보수파의 구심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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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상하이 상무인서관 노동쟁의 지도, 5·30운동 참여 후 중국 공산당 입당
  • 1931–1934중앙위원·정치국원, 대장정 참가 — 쭌이 회의 참석
  • 1937–1944중앙조직부장, 옌안 정풍운동에서 핵심 역할
  • 1949–1954중앙재경위원회 주임 겸 정무원 부총리, 제1차 5개년 계획 입안
  • 1956–1962중공 중앙위원회 부주석; 대약진 이후 경제 재건 주도
  • 1978–1987중앙기율검사위원회 제1서기, 중앙고문위원회 주임 — 개혁개방 초기 설계와 보수적 견제
  • 1987–1992중앙고문위원회 주임, 당내 보수파 구심점

보구

博古
비소련 혁명가 중국 중국 (한족) 1907–1946 ✕ 비행기 추락 사망

코민테른 노선을 대표한 중공의 젊은 총서기이자 당 언론의 설계자

정풍운동에서 그는 "당에 이렇게 큰 손실을 끼쳤으니,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얼마나 많은 일을 더 해도 이 손실을 메울 수 없다"고 고백하며 "모든 악결과의 가장 주요한 책임자는 바로 나"라고 말했다.

중국공산당 총서기(1931–1935)로서 장시 소비에트 시기와 대장정 초기 당을 이끌었으며, 모스크바 쑨원대학 출신 '28인의 볼셰비키' 일원으로 왕밍과 함께 코민테른 좌경 노선을 대표했다.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에게 실각한 후 조직부장, 신화통신사 사장, 『해방일보』 사장을 지내며 중공 언론·선전의 제도적 기초를 세웠다. 1946년 충칭 협상 후 옌안으로 귀환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으며, 당내에서는 그를 '정직하고 박식했던' 초기 지도자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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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6상하이대학 수학, 5·30 운동 참여
  • 1926–1930모스크바 쑨원대학 유학, '28인의 볼셰비키' 결성
  • 1931–1935중공 중앙 총서기 (중앙총책임자)
  • 1935.1쭌이 회의에서 실각, 정치국원 유임
  • 1937–1938중공 중앙 조직부장
  • 1941–1946『해방일보』 사장 겸 신화통신사 사장
  • 1946충칭 정치협상회의 중공 대표, 귀환 중 순직

린뱌오

林彪
비소련 혁명가 중국 중국 1907–1971 ✕ 비행기 추락사

마오의 후계자였던 군사 천재, 중국 내전을 승리로 이끈 10대 원수

대중이 자신을 '마오의 가장 훌륭한 제자'로 여긴다는 말에 린뱌오는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아무 재능이 없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마오 주석에게서 배운 것이다.'

린뱌오는 중국 공산당의 가장 뛰어난 군사지휘관 중 한 명으로, 만주에서 랴오선·핑진 전역을 지휘해 국민당 주력을 섬멸하고 인민해방군을 베이징으로 진군시켰다. 1955년 10대 원수 중 3위로 서열되었으며, 국방부장으로서 마오쩌둥의 개인숭배를 주도하고 문화대혁명을 적극 추진했다. 1966년 당의 유일한 부주석으로 마오의 공식 후계자로 지정되어 최고 권력에 근접했으나, 1970년대 초 마오와의 갈등 속에 실각했다. 1971년 9월 쿠데타 시도 실패 후 소련으로 탈출하던 중 몽골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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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황푸군관학교 입학, 중국 공산당 입당
  • 1932홍군 제1군단장
  • 1937팔로군 115사단장 — 핑싱관 대첩 승리
  • 1948–1949동북야전군 사령관, 랴오선·핑진 전역 승리로 베이징 입성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10대 원수 제3위)
  • 1959국방부장 — 마오쩌둥 개인숭배와 인민해방군 정치화 주도
  • 1966–1971당 중앙위원회 유일 부주석, 마오쩌둥의 공식 후계자

덩화

邓华
사회주의권 지도자 중국 중국인 1910–1980 ○ 명예 회복 후 자연사

전쟁의 흐름을 읽은 야전 지휘관

그는 아내에게 “장군은 전장에서 죽는 법”이라고 남기고 북쪽으로 떠났다.

덩화는 중국공산당 혁명과 국공내전을 거치며 대규모 부대를 지휘한 인민해방군 장군이었다. 1950년에는 동북변방군의 편성과 훈련을 맡아 압록강을 건널 부대를 실제로 준비했고, 조선전쟁에서 펑더화이의 제1부사령관으로 전쟁 수행을 뒷받침했다. 1952년부터는 중국인민지원군을 지휘하며 전선의 작전과 정전 국면을 이끌었다. 훗날 펑더화이와의 연좌로 실각했지만 1980년 명예를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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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중국공산당 입당
  • 1928–1937홍군 지휘관, 장정 참가
  • 1937–1945팔로군 제115사단 및 진차지 군구 지휘관
  • 1947–1949동북야전군 제7종대 사령관, 제15병단 사령관
  • 1950동북변방군 제13병단 사령관
  • 1950–1952중국인민지원군 제1부사령관 겸 제1부정치委员
  • 1952–1954중국인민지원군 대리 사령관 겸 정치委员, 사령관
  • 1955–1959인민해방군 상장, 선양군구 사령관

장칭

江青
비소련 혁명가 중국 중국 1914–1991 ✕ 사형 선고 후 감형, 자살

상하이 무대에서 문화대혁명의 정점까지: 마오쩌둥의 아내이자 사인방의 수장으로 중국 혁명예술을 재편한 정치인

1980년 재판에서 장칭은 '나는 마오 주석의 개였다. 그가 물라고 하면 나는 물었다'고 외치며 모든 혐의를 부인했고, 법정 밖으로 끌려나가면서도 혁명 구호를 외쳤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핵심 지도자이자 '사인방'의 수장으로, 마오쩌둥의 부인으로서 중국공산당 내 가장 강력한 여성 정치인이었다. 1930년대 상하이에서 좌익 연극·영화 배우로 활동하다 1937년 옌안으로 가 마오쩌둥과 결혼했고, 20년간 정치에서 배제된 후 1963년 경극 혁명을 계기로 공적 무대에 복귀했다. 1966년 중앙문화혁명소조 부조장에 임명되어 《해서파관》 비판으로 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열었고, 8개의 혁명적 양판희를 제정해 전통 예술을 프롤레타리아 주제로 재편했으며, 1969년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마오 사후 1976년 10월 체포되어 '반혁명 범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감형되었고, 1991년 5월 병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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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중국 공산당 입당
  • 1935–1937상하이 좌익 영화·연극 배우 (예명: 란핑)
  • 1938마오쩌둥과 결혼, 옌안 루쉰 예술학원 연극 강사
  • 1949–1951영화지도위원회 부주임
  • 1966–1969중앙문화혁명소조 부조장
  • 1969–1976중국공산당 정치국 위원
  • 1976'사인방'과 함께 체포됨
  • 1980–1991사형 선고 → 무기징역 → 의료 가석방 → 자살

그레이스 리 보그스

Grace Lee Boggs
비소련 혁명가 미국 중국 1915–2015 ○ 자연사

마르크스 1844년 수고 첫 영역자에서 디트로이트 혁명의 철학자로

“우리가 바로 우리가 기다려온 지도자다.” — 90대 디트로이트 인터뷰에서

중국 이민 노동자의 딸로 브린마에서 철학 박사를 받았으나 인종차별로 학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노동자당에 입당했다. C.L.R. 제임스, 라야 두나옙스카야존슨-포레스트 경향의 3인 핵심으로서 소련 국가자본주의론과 『국가자본주의와 세계혁명』을 공저했고, 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수고』를 최초로 영역했다. 1953년 흑인 자동차 노동자 제임스 보그스와 결혼 후 디트로이트에 정착해 트로츠키주의와 결별하고 흑인해방 중심의 공동체 혁명 실천으로 전환, 90대까지 『다음 미국 혁명』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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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에서 중국 이민자 식당 주인의 딸로 출생, 중국명 위핑(玉平)
  • 1935바너드 칼리지 졸업
  • 1940브린마 칼리지에서 조지 허버트 미드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 취득
  • 1940–1945시카고 대학 철학 도서관에서 저임금 사서로 근무, 세입자 권리 운동으로 노동자당 입당
  • 1945–1947C.L.R. 제임스·두나옙스카야와 존슨-포레스트 경향 결성, 마르크스 『1844년 수고』 첫 영역
  • 1947SWP에 합류, 필명 '리아 스톤'으로 존슨-포레스트 경향 저술 활동
  • 1950제임스·두나옙스카야와 『국가자본주의와 세계혁명』 공동 저술
  • 1951SWP 탈퇴, 코레스폰던스 출판위원회 결성 참여
  • 1953흑인 자동차 노동자·정치 활동가 제임스 보그스와 결혼, 디트로이트로 이주
  • 1962C.L.R. 제임스와 결별, 부부 독자 노선으로 코레스폰던스 이끌며 디트로이트 공동체 운동 집중
  • 1964맬컴 엑스에게 미 상원 출마를 설득하려 시도했으나 무산
  • 1970디트로이트 아시아 정치연합 공동 창립
  • 1974제임스 보그스와 『20세기의 혁명과 진화』 출간
  • 1979전미혁명기구(NOAR) 창립 참여
  • 1992다문화 세대 간 청년 프로그램 '디트로이트 서머' 창립
  • 1998자서전 『변화를 위한 삶』 출간
  • 201195세에 스콧 쿠라시게와 『다음 미국 혁명』 출간
  • 2015디트로이트에서 100세로 사망, 오바마 대통령 애도 성명 발표

장춘차오

张春桥
비소련 혁명가 중국 중국 1917–2005 ○ 사형 선고 후 감형, 1998년 석방

문화대혁명 '사인방'의 이론가, 상하이 인민공사를 조직하고 부르주아지 전면독재를 주창한 정치인

1980년 재판에서 장춘차오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수년 후 가족 면회가 허용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핵심 이론가이자 '사인방' 구성원. 1938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상하이에서 《해방일보》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1958년 「부르주아 법권 사상을 타파하자」를 발표해 마오쩌둥의 주목을 받았고, 문화대혁명기 중앙문화혁명소조 성원으로 1967년 상하이 인민공사를 조직해 기존 시 정부를 전복시켰다. 1975년 부총리로서 「부르주아지에 대한 전면독재를 실시하자」를 집필해 사회주의 이행기 계급투쟁 노선을 정식화했으며, 마오 사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98년 석방될 때까지 마오주의 신념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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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중국 공산당 입당
  • 1949–1966《해방일보》 편집장
  • 1966–1969중앙문화혁명소조 성원
  • 1967–1976상하이 혁명위원회 주임 (시장)
  • 1969–1973정치국 위원 → 1973–1976: 정치국 상무위원
  • 1975–1976부총리 겸 총정치부 주임
  • 1976'사인방'과 함께 체포됨
  • 1984–1998사형 선고 → 무기징역 → 18년형 → 의료 석방

낸시 치안

Nancy Qian
연구자 미국 중국계 1975–

역사 자료로 국가정책의 효과를 추적한 경제학자

낸시 치안은 개발경제학·정치경제학·경제사를 넘나들며 제도와 정책이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효과를 대규모 자료와 엄밀한 실증분석으로 연구한 경제학자다. 중국 경제와 권위주의 국가를 다룬 연구로 알려졌으며, 성별 격차와 교육, 기근의 정치경제를 연결해 분석했다. 안드레이 마르케비치, 나탈랴 나우멘코와 함께한 2021년 연구는 우크라이나 기근의 지역별 사망률과 곡물 조달을 비교해 민족적 편향과 중앙계획 조달정책의 역할을 계량적으로 제시했다. 이 작업은 홀로도모르를 생산량만이 아니라 국가의 분배와 강제 조달이 빚은 결과로 파악하는 논쟁에 자료를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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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텍사스대학교 오스틴 학사
  • 2005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 경제학 박사
  • 2005–2009브라운대학교 경제학 조교수
  • 2007–2009하버드대학교 아카데미 펠로
  • 2009–2016예일대학교 경제학 교수, 부교수
  • 2017–현재노스웨스턴대학교 켈로그경영대학원 제임스 J. 오코너 교수
  • 2021「우크라이나 기근 사망률의 원인」 공동저자

선즈화

沈志华
연구자 중국 중국 1950–현재 ○ 현역 역사학자

냉전 문서로 중소관계를 다시 읽은 역사가

선즈화는 중국 냉전사와 소련사, 중소관계사를 연구해 온 역사학자이며 화둥사범대학 냉전국제사연구센터를 이끌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해제 문서를 직접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소련 문서집을 편찬해 중국 냉전사 연구의 자료 기반을 넓혔다. 그의 연구는 중소분열을 국가이익과 국제공산주의운동의 관계가 교차한 과정으로 분석하며, 중국의 선택을 이념적 연대만으로 설명하는 공식 서술에 질문을 던졌다. 한국전쟁과 중소동맹에 관한 저술은 중국과 소련, 조선 사이의 상호 계산을 추적해 중국 학계의 냉전 해석을 국제적으로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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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베이징에서 출생
  • 1971–1978스징산 발전소 노동자·선전 부문 간부
  • 1978–1982중국사회과학원 세계사 연구생
  • 1983–1984국가기밀 누설 혐의로 수감, 조기 석방
  • 1993–2002동방역사연구센터 설립·소련 역사档案 편찬
  • 2004–현재화둥사범대학 종신교수·냉전국제사연구센터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