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국가적 배경

우크라이나

106 명

해당 인물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스테프냐크-크라프친스키

Сергей Михайлович Степняк-Кравчинский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우크라이나 1851–1895 ✕ 열차 사고사

차르 헌병대장을 단검으로 처단하고 펜으로 서구에 러시아 혁명을 소개한 나로드니키

1878년 메젠초프 암살 직전, 크라프친스키는 선언문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사랑을 충분히 설교했다 — 이제 증오를 불러낼 때가 왔다. 무자비한 피의 복수가 이제부터 너희 악행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러시아 나로드니키 혁명운동과 서구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 작가이자 혁명가. 차이콥스키 서클에서 활동하고 1878년 헌병대장 메젠초프를 단검으로 암살한 후 망명하여, 런던에서 『지하 러시아』(1883)를 출판하고 자유 러시아 출판 기금과 러시아 자유의 벗 협회를 창립해 망명 반체제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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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2–1873차이콥스키 서클(대선전회) 가입,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대상 사회주의 선전
  • 1873–1874‘민중 속으로’ 참여 — 트베리·툴라 농민 선전, 체포 후 탈출
  • 1875–1876헤르체고비나 반오스만 봉기 참전; 제네바 바쿠닌계 기관지 『라보트니크』 기고
  • 1877이탈리아 베네벤토 무장봉기 참가(말라테스타·카피에로와 함께), 체포 후 사면
  • 1878토지와 자유당 입당, 기관지 편집; 8월 4일 메젠초프 암살; 11월 해외 망명
  • 1883『지하 러시아』(Underground Russia) 출판 — 서구 최초의 러시아 혁명운동 종합 보고서
  • 1889소설 『니힐리스트의 생애』(안드레이 코주호프) 출판
  • 1890–1895러시아 자유의 벗 협회·자유 러시아 출판 기금 창립, 월간 『자유 러시아』 편집

미하일 블라디미로비치 로댠코

Михаил Владимирович Родзянко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우크라이나 1859–1924 ○ 망명 중 빈곤 속 자연사

차르에게 '뚱보'라 불린 의회주의자, 제국의 마지막 두마 의장

1917년 2월, 참수부에 보낸 전문에서: "수도는 무정부 상태. 정부는 마비되었다. 지체는 죽음이다. 왕조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시간이다." 니콜라이 2세는 읽고 나서 시종장에게 말했다. "이 뚱보 로댠코가 또 무슨 헛소리를 써 보냈군."

우크라이나계 귀족 출신으로, 1905년 10월당을 공동 창립하여 입헌군주제와 의회주의라는 두 축에서 차르 체제의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다. 1911년부터 1917년까지 제3·4대 국가두마 의장을 지내며 라스푸틴을 공개 비판하고 전시 정부의 무능에 맞섰다. 1917년 2월 혁명기에는 국가두마 임시위원회를 이끌며 니콜라이 2세 퇴위를 결정적으로 추동했으나, 미하일 대공이 즉위를 거부하며 입헌군주제 구상은 무너졌다. 1920년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하여 빈곤 속에서 회고록 『라스푸틴의 통치』를 남겼고, 망명 군주주의자들에게 배척당한 채 숨졌다. 혁명 이전 러시아 의회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한 몸에 체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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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0월당(옥탸브리스트) 공동 창립, 입헌군주제 노선
  • 1907–1911제3대 국가두마 의원, 부의장(1909~)
  • 1911–1912제3대 국가두마 의장(구치코프 후임)
  • 1912–1917제4대 국가두마 의장, 진보블록 참여
  • 1917.2–3국가두마 임시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2세 퇴위 협상 주도
  • 1917 여름구치코프와 자유공화당 창당
  • 1917.10–1920백군 지역(돈·크림)에서 반볼셰비키 활동
  • 1920–1924유고슬라비아 망명, 『라스푸틴의 통치: 제국의 붕괴』 집필

미하일 이바노비치 투간-바라놉스키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Туган-Барановский
이론가 러시아 제국 우크라이나 1865–1919 ○ 심장마비로 사망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윤리적 사회주의로: 공황주기론을 개척한 경제학자

1900년 4월 프스코프에서 열린 『이스크라』 창간 조직회의에서 그는 레닌, 마르토프, 스트루베와 함께 자리했으나, 정작 사회민주당 지하조직에는 끝내 가입하지 않았다.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 경제학자로, 1894년 『현대 영국의 공업위기』에서 자본주의 공황의 내생적 주기이론을 제시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표트르 스트루베와 함께 나로드니키에 맞서 마르크스주의 경제사 분석을 전개하고 1900년 『이스크라』 창간 회의에 참여했으나, 이후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 칸트 윤리학에 기초한 '윤리적 사회주의'로 전환, 협동조합 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정립했다. 1917년 2월혁명 후 우크라이나 중앙라다 재무장관과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창립 회원을 지냈으며, 그의 공황이론은 케인스 등 서구 거시경제학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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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하리코프 대학 졸업, 자연과학 후보학위 취득
  • 1894『현대 영국의 공업위기』 출간, 모스크바 대학 정치경제학 석사
  • 1895–1899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정치경제학 강사(사도첸트)
  • 1898『러시아 공장의 과거와 현재』 출간, 모스크바 대학 정치경제학 박사
  • 1900『이스크라』 창간 조직회의 참여 (프스코프)
  • 1901–1905폴타바 지역 젬스트보 활동, 『정치경제학 최근사 개요』 집필
  • 1906–1913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및 폴리테크니크 강사·교수
  • 1909–1917『협동조합 통보』(Вестник кооперации) 편집장
  • 1917.8–11우크라이나 중앙라다 재무장관(서기)
  • 191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창립 회원, 사회경제부문 책임자

게오르기 아폴로노비치 가폰

Георгий Аполлонович Гапон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우크라이나 1870–1906 ✕ 살해

행진을 이끈 신부, 이중 첩자로 끝나다

피의 일요일 직후 가폰은 이렇게 썼다. 「우리에게 더 이상 차르는 없다. 오늘 피의 강이 차르와 러시아 민중을 갈라놓았다. 이제 러시아 노동자는 차르 없이 자유를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1905년 1월 9일, 15만 노동자의 겨울궁전 청원 행진을 이끌었으나 군대가 발포했다. 살아남아 「우리에게 더 이상 차르는 없다」는 격문을 남겼지만, 경찰과의 이중 관계가 드러나 이듬해 SR 전투단에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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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04경찰 후원 합법 노동회(주바토프식) 「공장노동자회」 조직
  • 1905.1.9겨울궁전 청원 행진 인솔, 피의 일요일
  • 1905–06망명, 혁명 정당들과 접촉
  • 1906경찰 내통이 드러나 SR 전투단에 처형
등장 장면 피의 일요일

알렉산드르 드미트리예비치 추루파

Александр Дмитриевич Цюрупа
중앙계획 기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1870–1928 ○ 심장마비

식량독재를 설계하고 스스로 굶주린 인민위원

곡물 징발을 지휘하러 가는 열차 안에서 추루파는 굶주림으로 쓰러졌다. 식량인민위원이 굶어 실신했다는 소식은 레닌조차 놀라게 했고, 그의 봉급을 두 배로 올리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1898년 입당한 올드 볼셰비키로, 내전기 RSFSR 식량인민위원으로서 곡물 징발제(프로드라즈베르스트카)와 무장 식량분견대를 주도하여 적군과 도시의 기아를 막았다. 1918년 5월 식량 독재 법령을 입안해 농촌 강제 징발을 국가 체계로 정비했다. 네프 도입 후 인민위원회의 부의장·고스플란 의장·무역인민위원을 지내며 전시 공산주의에서 계획경제로의 이행을 실무적으로 관리했다. 혁명의 '병참 책임자'로서 소비에트 국가 동원 체제의 행정 토대를 놓은 집행형 관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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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1898헤르손 농업학교 제적 후 통계사·농업기사, 사회민주주의 선전 활동
  • 1898RSDLP 입당, 이스크라 요원으로 우파·하르코프에서 활동
  • 1902–1905체포되어 올로네츠현으로 유형
  • 1905–1917우파현에서 쿠구셰프 공작 영지 관리인으로 위장한 볼셰비키 지하 활동
  • 1917우파 RSDLP(b) 위원·시두마 의장, 페트로그라드로 곡물 열차 수송 조직
  • 1918–1921RSFSR 식량인민위원 — 식량 독재·곡물 징발제·무장 식량분견대 주도
  • 1921–1923RSFSR·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겸 노동농민감독인민위원
  • 1923–1925소련 고스플란 의장
  • 1925–1926소련 대외·국내무역인민위원

미콜라 올렉시요비치 스크리프니크

Микола Олексійович Скрипник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우크라이나 1872–1933 ✕ 자살

우크라이나화의 설계자, 스스로 총구를 겨눈 문화혁명가

1918년,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지도부에 "정부와 공화국 놀음을 그만두라"고 명령하자, 스크리프니크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러시아 인민위원의 태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노동대중의 의지에 따라 행동한다."

볼셰비키 우크라이나 최초 정부 수반을 지낸 혁명가이자 마르크스주의 민족문제 이론가였다. 1927년부터 1933년까지 우크라이나 계몽인민위원으로서 우크라이나어 교육·출판·과학·예술 전반에서 우크라이나화 정책을 주도했고, '하르키우 맞춤법'으로 불리는 철자법 개혁을 완성했다. 600편이 넘는 저작을 남겼으며,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과 코민테른 집행위원을 지냈다. 1933년 민족주의적 일탈 혐의로 공격받던 중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사후 30년간 이름이 지워졌다가 1962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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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0사회민주주의 서클에서 활동 시작, 마르크스주의 문헌 독학
  • 1900–1917페테르부르크 기술원 입학, 이스크라·프라우다 등 당 기관지 편집, 15차례 체포·7차례 유형, 6차례 탈옥
  • 1917.3–1917.12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중앙평의회 서기, 10월 봉기 때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7.12–1918.4레닌 지시로 우크라이나 파견, 초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 인민비서국 의장
  • 1918.7–1918.12체카 반혁명투쟁부장, 비상사태하 진압 작전 지휘
  • 1921–1927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이어 법무인민위원 겸 검찰총장, 법전 편찬 주도
  • 1927–1933.2우크라이나 계몽인민위원, 우크라이나화 정책·철자법 개혁·과학원·백과사전 총괄
  • 1933.2–1933.7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으로 좌천

파울로 페트로비치 스코로파츠키

Павло Петрович Скоропадський
반혁명 세력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1873–1945 ○ 망명 중 사망

독일 점령 하 우크라이나국의 마지막 헤트만

1918년 4월 29일 키예프에서 전우크라이나 지주대회가 만장일치로 '헤트만 만세!'를 외치며 파울로 스코로파츠키를 우크라이나의 헤트만으로 추대했다.

코사크 헤트만 가문의 후예이자 제정 러시아 군단장으로 1차 세계대전을 치른 귀족 장군. 1918년 4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독일군의 후원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중앙라다의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우크라이나국의 헤트만으로 즉위했다. 8개월간의 집권기 동안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와 국립대학을 세우고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나, 대지주 중심의 토지 정책과 독일 점령군의 곡물 강제 징발이 농민의 광범한 저항을 불렀다. 1918년 11월 독일 패전과 함께 페틀류라가 이끈 반헤트만 봉기에 밀려 퇴위했고, 이후 독일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나치 협력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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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근위 기병연대 장교 임관
  • 1904–1905러일전쟁에서 코사크 부대 지휘, 훈장 수훈
  • 1912소장 승진, 니콜라이 2세의 시종무관
  • 1914–1916제1차 세계대전에서 기병사단 지휘, 중장 승진
  • 1917제34군단장, 우크라이나화하여 제1우크라이나군단으로 개편
  • 1917.10자유코사크 총사령관(오타만)으로 선출
  • 1918.04–12우크라이나국 헤트만
  • 1919–1945독일 망명, 헤트만 운동 지도

보리스 미하일로비치 엘친

Борис Михайлович Эльцин
좌익 반대파 소련 우크라이나 1876–1937 ✕ 처형

러시아 초대 대통령과 이름이 겹치는, 의사 출신의 좌익반대파

러시아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러시아어 표기도 이쪽은 Эльцин, 대통령은 Ельцин으로 다르다.

1876년 키예프현 즈베니고로드카에서 태어났다(1875년으로 적은 자료도 있다). 1897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갔고 이듬해 오데사의 노보로시야대학 의학부를 마친 의사였다. 1910년 혁명 활동으로 우파현에 유배되어 벨레베이에서 위생의사로 일하며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혁명 후 지역 소비에트와 여러 위원회에서 일했고, 1923년부터 좌익반대파에 속해 46인 선언에 서명했다. 1927년 당에서 제명되어 이듬해 초 우스티-뷔미로 유배되었고, 1929년에는 수즈달 정치격리소에 수용되었다. 1936년 다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으며, 같은 해 마가단에서 정치범 단식투쟁을 조직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1937년 처형되었고 1956년 11월 23일 복권되었다. 아들 빅토르 보리소비치 엘친도 반대파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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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898오데사 노보로시야대학 의학부 졸업
  • 1910우파현 유배, 벨레베이 위생의사
  • 1923좌익반대파 가담, 46인 선언 서명
  • 1927당에서 제명
  • 1928–1929우스티-뷔미 유배, 수즈달 정치격리소 수용
  • 1936재체포, 시베리아 유배, 마가단 정치범 단식투쟁 조직
  • 1937처형
  • 1956복권

그리고리 니키티치 바쿨렌추크

Григорий Никитич Вакуленчук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우크라이나 1877–1905 ✕ 봉기 중 사살

장교의 총탄에 쓰러져 포툠킨 반란을 촉발하고, 장례는 오데사 혁명 시위가 된 수병

「지체하는 것은 혁명을 실패시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도처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도 공동의 투쟁에 나서야 한다.」

볼린 지방의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898년 흑해함대에 징집되어 포툠킨함의 포병 부사관이 되었다. 1903년 RSDLP에 입당하고 세바스토폴 수병 중앙위원회(첸트랄카) 결성을 주도한 선동가로, 전함에 붉은 기를 숨겨 두고 함대 전체 봉기를 준비했다. 1905년 6월 27일 썩은 고기에 항의하는 수병들 앞에서 기량롭스키 부함장의 총에 치명상을 입었고, 이틀 뒤 오데사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대규모 정치 시위로 전환되어 포툠킨함이 육상 포격으로 답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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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흑해함대 징집
  • 1900기뢰·포술학교 졸업, 전함 포툠킨 포수 배치
  • 1903RSDLP 입당, 세바스토폴 수병 첸트랄카 결성 참여
  • 1905.06.27포툠킨 반란 중 기량롭스키 부함장에 치명상, 함상에서 사망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페트롭스키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Петровский
국가원수 소련 우크라이나 1878–1958 ○ 자연사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국가원수, 드니프로페트롭스크의 이름이 된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1915년 2월, 차르 법정은 페트롭스키에게 모든 권리 박탈과 투루한스크 종신 유형을 선고했다. 반전 연설을 한 노동자 의원에게 내려진 형벌이었다.

하리코프현 재단사의 아들로 열한 살부터 노동한 볼셰비키다. 국가두마 노동자 의원(1912)으로 반전 연설로 유형되었고, 10월 혁명 후 내무인민위원으로 체카 창설에 참여했다. 1919년부터 1938년까지 우크라이나 SSR 국가원수로 소련 창설 조약에 서명했고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냈다. 대숙청에서 살아남았으나 1939년 해임되어 혁명박물관 부관장으로 여생을 보냈다. 예카테리노슬라프는 1926년 그의 이름을 따 드네프로페트롭스크가 되어 2016년까지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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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898예카테리노슬라프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 가담,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00–1903두 차례 체포·투옥, 1905년 예카테리노슬라프 소비에트 서기
  • 1912–1914제4대 국가두마 볼셰비키 노동자 의원, 32회 연설
  • 1914–1917반전 활동으로 체포, 투루한스크 종신 유형
  • 1917.11–1919.03내무인민위원: 체카 창설 참여, 적색 테러 지령 서명
  • 1919–1938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우크라이나 SSR 국가원수)
  • 1922–1938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 (우크라이나 대표)
  • 1926–1939정치국 후보위원
  • 1939–1940모든 직위에서 해임, 1년간 실직
  • 1940–1958모스크바 혁명박물관 부관장

시몬 바실리요비치 페틀류라

Симон Васильович Петлюра
반혁명 세력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1879–1926 ✕ 파리에서 암살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이끌었으나 유대인 학살의 책임 논쟁에 휩싸인 독립운동가

러시아의 운명에서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떼어놓지 말아야 합니다. 러시아가 패배하면 그 재앙은 우크라이나에도 미칠 것입니다.

폴타바 출신의 사회민주주의 언론인으로, 1917년 중앙라다 군사사무총서기를 시작으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군 총사령관과 집정내각(디렉토리야) 수반을 지냈다. 볼셰비키·백군·폴란드 사이에서 독립을 수호하려 싸웠으나 1920년 패퇴 후 폴란드, 이어 파리로 망명했다. 그의 군대 휘하에서 약 5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으며, 페틀류라가 이를 막지 못했는지 의도적으로 방치했는지는 오늘날까지 논쟁의 대상이다. 1926년 파리에서 유대인 아나키스트 숄롬 슈바르츠바르트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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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17우크라이나 혁명당(RUP)·우크라이나 사회민주노동당(USDRP) 활동, 언론인으로 우크라이나 민족운동 주도
  • 1917.5–1917.12중앙라다 군사사무총서기, 우크라이나 군 편성 주도
  • 1918.1–1918.3하이다마키 코쉬 지휘관, 키예프 아르세날 봉기 진압
  • 1918.11–1919.2우크라이나 집정내각(디렉토리야) 군사총책
  • 1919.2–1920.12집정내각 수반 겸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 총사령관
  • 1920.4폴란드와 바르샤바 조약 체결, 대볼셰비키 동맹
  • 1924–1926파리 망명정부에서 주간지 『트리주브(Тризуб)』 발행

글레프 이바노비치 보키

Глеб Иванович Бокий
국가보안 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879–1937 ✕ 처형 · 복권 1956

소련 신호정보의 아버지, 체카 스페츠오트델 창설자

경찰이 압수한 그의 수학 공책을 가리키며 "이게 암호라면 풀어 보시지"라고 조롱했다. 차르 비밀경찰은 끝내 해독하지 못했다.

구 러시아 제국 말기 지하혁명운동에서 암호 작성술을 익힌 올드 볼셰비키.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과 동부·투르케스탄 전선 특별부장을 거쳐 1921년 체카 산하 스페츠오트델(Спецотдел)을 직접 기획·창설하여 1937년까지 이끌며 소련의 통합 암호·도청·무선정보 체계를 구축했다. 국가기밀 보호, 외교공관 도청 및 암호 해독, 무선 펠렌게이션, 최초의 정부보안통신망을 한 부서 아래 통합한 공로로 소련 신호정보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한편 솔로프키 특수수용소(SLON)의 큐레이터로서 굴라그 체계 초기 형성에도 관여했으며, 밀교와 티베트 탐사에 경도된 이력이 후일 기소의 빌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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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RSDLP 입당, 페테르부르크 볼셰비키 지하조직 활동
  • 1904–1909RSDLP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위원
  • 1917.04–1918.03RSDLP(b) 페트로그라드 시위원회 서기
  • 1918.03–08북부지역·페트로그라드 체카 부의장
  • 1918.08–11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 1919.01–09동부전선 체카 특별부장
  • 1919.09–1920.08투르케스탄 전선 체카 특별부장
  • 1921–1937체카·GPU·OGPU·GUGB NKVD 스페츠오트델(제9부) 국장
  • 1923–1934OGPU 콜레기야 위원
  • 1935국가보안 3등급 정치위원

니콜라이 일리치 포드보이스키

Николай Ильич Подвойский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880–1948 ○ 심장마비

10월 무장봉기의 작전사령관, 혁명 뒤엔 뒷방으로

"자네, 내 고집이 얼마나 센지 알지? 내 말 잘 듣고, 나중에 안 하면 돼. 대신 전부 받아 적어." 1927년 영화 『10월』의 고증을 지도하며 예이젠시테인에게.

시골 사제의 아들로 신학교를 중퇴하고 볼셰비키에 합류한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는, 1917년 군사혁명위원회 작전트로이카를 이끌며 10월 무장봉기와 겨울궁전 습격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초대 군사인민위원이 되었으나 4개월 만에 트로츠키에게 밀려났고, 내전 시기에는 브세보부치(보편군사훈련)를 조직했다. 적성과 적기훈장의 창안자이며, 이후 스포르틴테른 의장으로 대중 체육에 헌신했다. 스탈린 시대에 철저히 주변화되었으나 숙청을 살아남아 회고록을 썼고, 61세에 모스크바 방어 참호를 자원하여 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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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5RSDLP 입당·볼셰비키 합류;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직물파업·소비에트 지도
  • 1906–1916망명·지하출판; 『즈베즈다』·『프라우다』 창간 참여; 중앙위 러시아국 뷰로 재무위원장
  • 1917.3–10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군사조직 책임자; 군인신문 편집; 적위대 조직
  • 1917.10VRK 작전트로이카 위원·부의장; 무장봉기·겨울궁전 습격 현장 지휘
  • 1917.11–1918.3초대 군사인민위원; 적군 편성 전러시아 콜레기야 의장
  • 1918–1919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우크라이나 군사인민위원
  • 1920–1927스포르틴테른 의장·최고체육평의회 의장 — 혁명가에서 체육행정가로
  • 1935–1948개인연금자; 회고록 집필·선전활동; 1941년 모스크바 방어 참호 자원

드미트리 자하로비치 마누일스키

Дмитрий Захарович Мануильский
코민테른 소련 우크라이나 1883–1959 ○ 자연사

스탈린 시대 코민테른의 실무 관리자

1939년 스탈린이 디미트로프에게 한 말: "마누일스키는 아첨꾼이야! 트로츠키주의자였지!" - 트로츠키와의 과거 인연에도 불구하고 대숙청을 생존한 몇 안 되는 구볼셰비키 중 한 사람이었다.

볼린 지방 성직자 가문 출신 볼셰비키로, 1905년 크론슈타트·스베아보르크 수병 봉기를 조직했다. 1928년부터 1943년까지 코민테른 서기로서 각국 공산당의 노선 전환과 숙청을 집행하며 스탈린의 세계 공산주의 운동 통제를 실무 관장했다. 1944년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으로 전환되어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유엔 헌장 전문과 '목적과 원칙' 장의 초안 작성을 주재하는 극적인 반전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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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재학 중 RSDLP 입당, 볼셰비키
  • 1905–06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선동원, 크론슈타트·스베아보르크 수병 봉기 조직
  • 1906체포, 야쿠티야 5년 유형 — 탈출, 파리 망명
  • 1907–12파리 망명, 간헐적 러시아 밀입국 활동
  • 1912–13상트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지하활동 후 재망명
  • 1914–171차대전 반대, 트로츠키와 《골로스》·《나셰 슬로보》 발행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 합류
  • 1921–22우크라이나 CP 제1서기, 농업인민위원 — 기근 대응
  • 1924–28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간부
  • 1928–44코민테른 서기 — 각국 공산당 노선 통제, 숙청 집행
  • 1944–50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 부의장·외무장관, 유엔 창설 대표단

예핌 아파나시예비치 샤덴코

Ефим Афанасьевич Щаденко
군사 · 국방 소비에트 우크라이나계 1885–1951 ○ 자연사

1기병군의 인민위원에서 대숙청의 인사 집행자로

「모터전, 기계화, 항공, 화학 같은 건 군사전문가들이 지어낸 것이다. 지금으로선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다. 앞으로의 전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기병대일 것이다.」

1904년 입당한 볼셰비키로, 재단사에서 직업혁명가가 되었다. 부됸니, 보로실로프와 함께 제1기병군을 창건하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하며 내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1937년 국방부인민위원 대리 겸 지휘·지도인원관리국장에 오른 뒤, 키예프 군관구에서 지휘관들에 대한 '군부 파시스트 음모' 수사를 주도하며 대숙청의 핵심 집행자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글라부쁘라포름(총군편성보충관리국) 국장으로서 붉은 군대의 병력 편성과 보충을 총괄했으나, 기병 만능론에 집착해 기계화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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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RSDLP(볼셰비키) 입당
  • 1917카멘스카야 볼셰비키 위원회 의장 · 적위대 지휘관
  • 1918–1919제10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우크라이나 전선 RVS 위원
  • 1919–1920제1기병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0제2기병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마흐노 토벌
  • 1930–1934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7–1940국방부인민위원 대리 · 지휘·지도인원관리국장
  • 1939–1941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41–1943국방부인민위원 대리 · 글라부쁘라포름 국장
  • 1943–1944남부전선 · 제4우크라이나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알렉산드르 야코블레비치 파르호멘코

Александр Яковлевич Пархоменко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886–1921 ✕ 마흐노군에 전사

차리친 방어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화를 이끈 내전 지휘관

마흐노에게 체포된 그는 아나키스트 동생 아르툠이 '아직 늦지 않았다'고 쓴 편지를 꺼내 보였으나, 마흐노의 총에 쓰러졌다.

1886년 예카테리노슬라프현 우크라이나 농가에서 태어나 루간스크 기관차 공장 노동자로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05년 혁명에서 무장 분견대를 이끌었고, 1917년 이후 보로실로프와 함께 돈바스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고 백군 및 독일 점령군과 싸웠으며, 차리친 방어전에서 스탈린·보로실로프와 협력했다. 제1기병군 특별전권위원과 제14기병사단장으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과 브란겔 토벌에 참전했고, 1921년 1월 3일 마흐노 부대의 기습으로 전사했다. 사후 두 차례 적기훈장을 받고 이바노프의 소설과 1942년 동명 영화로 소비에트 내전 영웅의 판테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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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17루간스크 공장 노동자, 볼셰비키 입당(1904), 1905년 혁명 무장분견대 조직, 수차례 체포
  • 1917–1918루간스크 적위대 참모장, 돈바스 소비에트 권력 수립, 칼레딘·독일군과 전투
  • 1918보로실로프와 함께 차리친으로 후퇴, 제10군 혁명군사평의회 특별전권위원
  • 1919하리코프 군사위원·수비대장, 그리고리예프 반란 진압, 예카테리노슬라프 탈환
  • 1919–1920제1기병군 혁명군사평의회 특별전권위원, 로스토프 함락 참여
  • 1920–1921제14기병사단장, 소비에트-폴란드 전쟁·북타브리야 작전 참전, 마흐노군 토벌 중 전사

시디르 아르테모비치 콥파크

Сидор Артемьевич Ковпак
작가·예술가 소련 우크라이나 1887–1967 ○ 자연사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종단한 소비에트 최고의 파르티잔 사령관

「화염이 카르파티아 산비탈을 밝혔다… 밤인데도 대낮 같았고, 불타는 기름의 굉음은 우리를 괴롭히던 독일 비행기 엔진 소리조차 삼켜버렸다.」 — 1943년 비트쿠프 유전 습격을 회고하며.

우크라이나 출신의 소비에트 파르티잔 사령관. 1941년 푸티블에서 부대를 조직해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종단하며 독일군 후방을 교란했고, 두 번의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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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2러시아 제국군 제186아슬란두스 보병연대 복무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정찰병·부사관, 게오르기 십자훈장 3·4급
  • 1918–1919코텔바 적색 파르티잔 부대 지휘관
  • 1919–1926붉은 군대 보급·병사 업무, 현 군사위원 역임
  • 1926–1939군 협동조합 지도원, 푸티블 도로국장 등 지방 경제 관료
  • 1940–1941푸티블 시 집행위원회 의장
  • 1941–1943수미 파르티잔 연대 지휘관, 소장 진급 (1943)
  • 1944–1947우크라이나 SSR 최고재판소 판사
  • 1947–1967우크라이나 SSR 최고회의 부의장

네스토르 이바노비치 마흐노

Нестор Иванович Махно
비소련 혁명가 소련 우크라이나 1888–1934 ○ 골결핵 · 파리

볼셰비키·백군·독일군·민족주의자를 차례로 상대한 아나키스트 농민군 사령관

1918년 6월 크렘린. 레닌은 마흐노에게 "당신 같은 아나키스트라면 우리도 기꺼이 협력할 텐데"라고 말했지만, 마흐노는 2년 뒤 볼셰비키의 배신을 두 번 겪었다.

우크라이나 아나코-공산주의 혁명가. 농민군을 이끌고 자유지구라는 무정부주의 자치 실험을 주도했다. 적군과 두 차례 동맹으로 백군을 격퇴했으나 매번 배신당했고, 망명 후 파리에서 회고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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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훌랴이폴레 아나코-공산주의 그룹 '자유 경작자 연맹' 가입, 부유층 몰수 시작
  • 1910사형 선고 후 연소 감형으로 종신 노역형; 부티르카 감옥에서 아르시노프에게 이론 교육을 받음
  • 1917–1918사면 후 훌랴이폴레 귀환, 소비에트 의장 겸 흑위대 조직, 지주 토지 몰수
  • 1919.2–6적군과 동맹, 제1자드네프롭스크 사단 제3여단장; 트로츠키가 무법자로 선언하자 결별
  • 1919.7–10우크라이나 혁명반란군 총사령관; 데니킨 후방 600km 기습으로 백군 모스크바 진격 교란; 자유지구 선포
  • 1920.10–11브란겔에 맞서 적군과 재동맹, 크림 작전 참가; 승리 직후 적군이 마흐노 부대 포위·섬멸
  • 1921–1925루마니아·폴란드·단치히를 거쳐 파리로 망명
  • 1925–1934파리 망명 중 무정부주의 활동, 회고록 집필, 골결핵으로 사망

볼로디미르 페트로비치 자톤스키

Владимир Петрович Затонский
이념 · 선전 소련 우크라이나 1888–1938 ✕ 처형 · 복권 1956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국가건설자이자 학자정치인, 교육·당·통제를 관통한 혁명 관료

1934년 제17차 전당대회 개표위원장으로서 스탈린 반대표가 대량 나왔음을 카가노비치에게 보고했다. 훗날 아들에게 "그것이 내 사형선고였다"고 말했다.

볼셰비키 우크라이나의 창립 세대 정치가이자 학자로, 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결성을 주도하고 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에서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대표단을 이끌었고 소련 수립 조약에 서명했다. 교육인민위원으로 두 차례(1922~1924, 1933~1938) 재임했으며, 1933년 미콜라 스크리프니크의 후임으로 우크라이나화 정책의 후퇴를 집행했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백과사전 초대 편집장이자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서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학술 기반을 구축했고, 중앙위원회 서기와 노동자농민감찰인민위원을 역임했다. 1937년 영화관에서 체포되어 20분 재판 끝에 사형 선고를 받고 당일 총살당했으며,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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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멘셰비키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키이우 대학 물리수학부 졸업 후 키이우 공과대학 물리학 강사
  • 1917.3–1917.11볼셰비키로 전향, 키이우 당위원회 위원장, 키이우 무장봉기 지도
  • 1917.12–1918.3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인민비서국 교육담당 비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우크라이나 대표단장
  • 1918.3–1918.4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국가원수)
  • 1918.7–1920좌파에스에르 반란 진압 공산대대 정치위원, 붉은군대 제12·13·14군 및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0.7–1920.9갈리치아 혁명위원회 의장
  • 1921크론시타트 봉기 진압 참여, 적기훈장 수훈
  • 1921–1922전우크라이나 소비자협동조합연합회 의장
  • 1922–1924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1차), 소련 수립 조약 서명
  • 1924–1925우크라이나·크림 군관구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겸 정치국장
  • 1925–192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정치국 정위원
  • 1927–1932우크라이나 노동자농민감찰인민위원 겸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중앙통제위원회 의장
  • 1933–1937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2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백과사전 초대 편집장
  • 1934–1938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이반 파블로비치 톱스투하

Иван Павлович Товстуха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우크라이나 1889–1935 ○ 폐결핵 · 사망

스탈린의 첫 비서, 그 기록 보관자이자 첫 전기 작가

바자노프의 회고: 톱스투하는 당대회 투표용지의 필적을 하나하나 대조하며 누가 스탈린의 이름을 지웠는지 식별했다. 「그가 가진 건 반쪽짜리 폐뿐이었지만, 스탈린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스탈린의 첫 개인비서(1918~1935)이자 중앙위 비밀부장(1926~1930)으로, 스탈린 개인 사무국을 운영하고 레닌연구소 기록보관소를 통제한 인물이다. 1922년 백과사전 「그라나트」에 스탈린의 첫 공식 전기를 집필했으며, 레닌 전집 초판 편찬 작업을 주도했다. 망명 시절 프랑스 사회당에 가입해 노동자로 일했고, 귀국 후 민족인민위원부 서기로 스탈린과 인연을 맺었다. 그의 기록 관리(특히 레닌과 트로츠키 관련 문서의 선택적 접근)는 스탈린 진영의 이념적 정비에 결정적 도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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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09체르니고프 사회민주주의 조직에서 혁명운동 시작
  • 1909–11불온서적 소지로 체포, 시베리아 유형
  • 1912–17망명, 오스트리아·프랑스에서 노동; 프랑스 사회당 및 파리 RSDLP(b) 지부 가입
  • 1917–18적위대 중앙참모부 감찰부 서기
  • 1918–21민족인민위원부 서기·간부, 스탈린과 결합
  • 1921–24중앙위 기구 책임일꾼, 스탈린 개인 사무국 조직·운영
  • 1922백과사전 「그라나트」에 스탈린 최초 공식 전기 집필
  • 1924–26레닌연구소 부소장, 레닌 전집 초판 편찬 참여
  • 1926–30중앙위 비밀부장 겸 서기장 제1보좌관
  • 1930–31레닌연구소 부소장,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 편집위원
  • 1931–35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부소장 겸 기록보관소장
  • 1934–35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후보위원,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파벨 예피모비치 디벤코

Павел Ефимович Дыбенко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889–1938 ✕ 처형

발트 함대를 이끌고 10월 혁명의 승부를 결정지은 첫 해군 인민위원

1917년 11월 1일, 가치나 궁전. 수천 명의 수병을 이끌고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부대를 포위한 디벤코는 코사크 대표단에게 말했다: "여러분의 장군을 넘기시오. 소비에트 권력이 보장하는 안전한 귀가를 약속하겠소." 이튿날 아침 크라스노프 장군이 체포되었고, 케렌스키는 여장을 하고 도주했다. 혁명의 운명을 결정한 일주일이었다.

체르니고프의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발트 함대 수병으로 복무하며 볼셰비키 지하조직에 가담했다. 1917년 4월 첸트로발트 의장이 되어 함대를 장악했고, 10월 혁명 당시 헬싱포르스와 크론슈타트에서 수병 부대를 페트로그라드로 투입해 봉기를 성공시켰으며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와 제헌의회 해산을 지휘했다. 내전기에는 크림 반도 점령과 차리친 해방에 공을 세웠고, 크론슈타트·탐보프 봉기 진압에 참여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의 결혼으로 혁명기의 가장 유명한 커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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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발트 함대 징병, 전함 임페라토르 파벨 1세에서 전기병 복무; 함내 볼셰비키 지하조직 가입
  • 1917.04–1918.03첸트로발트 의장; 10월 봉기에 수병 부대 투입,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 제헌의회 해산
  • 1917.10–1918.03초대 해군인민위원; 나르바 패배로 사임·당 제명, 군사재판에서 무죄
  • 1919.02–1919.09제1자드네프롭스크 사단장; 크림반도 점령, 크림 소비에트군 사령관
  • 1919.10–1920.05제37소총병사단장; 차리친 해방, 북캅카스에서 데니킨군 격파
  • 1921.03–1921.04혼성사단장으로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 크론슈타트 요새 사령관; 탐보프 봉기 진압 참여
  • 1928–1937중앙아시아·프리볼시스키·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1935년 2급 군사령관

게오르기 레오니도비치 퍄타코프

Георгий Леонидович Пятаков
좌익 반대파 소련 우크라이나 1890–1937 ✕ 처형

혁명과 산업 계획 사이의 볼셰비키

1937년 1월,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석에서. 독일 작가 리온 포이히트방어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중간 키에 중년, 약간 벗겨진 머리와 붉은빛이 도는 옛날식의 떨리는 뾰족 수염을 한 퍄타코프가 마이크 앞에 서서, 자기가 맡은 산업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조용하고도 공들여 이야기하는 모습을. 마치 대학 강사처럼 손가락을 뻗어 설명하며, 오래전에 죽은 '퍄타코프'라는 인물의 삶과 행적을 상세히 밝히려는 역사학자처럼, 청중이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납득하기를 바라는 한 가지 소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초대 수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민족자결권 문제에서 좌파 공산주의자로서 레닌과 맞섰고, 레닌이 '유언'에서 언급한 단 여섯 명의 볼셰비키 중 한 명이다. 좌익 반대파로 출당되었다가 복당 후 중공업 부인민위원으로 5개년 계획을 주도했으며,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주피고인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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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1917볼셰비키 입당, 키예프 지하활동, 유형과 망명
  • 1917–1918키예프 위원장, 국립은행 인수, 좌파 공산주의자
  • 1918–1920CP(b)U 중앙위 서기, 우크라이나 임시정부 수반, 군사정보국장
  • 1920–1927돈바스·고스플란·최고경제회의 부의장, 좌익 반대파
  • 1928–1930복당, 고스방크 총재, 신용개혁
  • 1930–1936중공업 부인민위원·제1부인민위원, 5개년 계획
  • 1936–1937체포, 제2차 모스크바 재판 주피고인, 처형

그리고리 페도로비치 그린코

Григорий Фёдорович Гринько
경제 운영 소련 우크라이나 1890–1938 ✕ 처형

우크라이나 보로트비스트에서 소련 재무인민위원으로: 5개년 계획의 재정 설계자

1937년 그린코가 '인민의 적'으로 체포되자, 그의 서명이 박힌 1·3·5루블 지폐는 정치적 곤란을 야기했다. 당국은 동일한 도안에서 서명만 지운 비상 발행 지폐를 내놓았고, 이후 소련 지폐에서는 아예 어떤 관리의 서명도 인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르키우현에서 태어난 우크라이나 혁명가. 좌파 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을 이끌다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우크라이나 교육인민위원과 고스플란 의장을 지낸 뒤 1926년 모스크바로 올라가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농업 부인민위원을 역임했다. 1930년 10월 소련 재무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제1·2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업화 자금을 조달하고 재정 제도를 정비했다. 그의 서명이 찍힌 루블 지폐가 전국에 유통될 만큼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으나, 1937년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로 서고 1938년 총살당했다. 1959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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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7사회혁명당 당원(1906–1912); 모스크바·하르키우 대학에서 학생운동으로 제적;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예카테리노슬라프 근위척탄병연대 장교
  • 1919–1920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 조직 및 지도; 전우크라이나 혁명위원회 위원
  • 1920–1922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 1922–1926우크라이나 SSR 고스플란 의장(1922–1923, 1925–1926); 키예프 현 집행위원장 겸 시의회 의장(1923–1925)
  • 1926–1930소련 고스플란 부의장(1926–1929); 소련 농업 부인민위원(1929–1930)
  • 1930–1937소련 재무인민위원; 제1·2차 5개년 계획 재정 정책 총괄;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 후보(1934–1937)
  • 1937–19381937년 8월 해임·제명·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피고; 1938년 3월 15일 총살
  • 1959사후 복권 및 당적 회복

올렉산드르 야코블레비치 슘스키

Александр Яковлевич Шумский
문화 · 문학예술 통제 소련 우크라이나 1890–1946 ✕ 살해

우크라이나 민족공산주의의 선구자, '슘스키즘'의 원형

1926년 4월, 슘스키는 스탈린과 두 시간 독대하며 카가노비치 교체와 우크라이나화 가속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정치국 서한으로 '슘스키즘'을 민족주의적 일탈로 규탄, 우크라이나 민족공산주의 탄압의 분수령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민족공산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모스크바 중앙집권에 맞서 공화국의 자율성을 주장한 '슘스키즘'의 원형. 보로트비스트에서 CP(b)U 정치국원으로 합류한 그는 교육인민위원(1924~1927) 시절 도시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탈러시아화, 우크라이나인 간부 등용을 강력히 밀어붙였다. 1926년 스탈린과 정면 충돌하여 '민족주의적 일탈'로 규탄받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으며, 이후 그의 이름은 우크라이나 자율성 탄압의 대명사가 되었다. 1933년 체포되어 솔로프키 수용소와 크라스노야르스크 유형을 거쳐 1946년 석방 직후 NKVD에 암살, 1958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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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 스필카(Spilka) 입당
  • 1917–1919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UP SR) 좌파 지도부, 이후 보로트비스트 중앙위원
  • 1919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첫 임기)
  • 1920보로트비스트와 CP(b)U 통합 주도; CP(b)U 정치국·조직국 위원, 코민테른 집행위원
  • 1921–1923폴란드 주재 우크라이나 SSR 전권대표
  • 1924–1927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두 번째 임기); 우크라이나화 정책 주도
  • 1927'슘스키즘'으로 규탄받고 전보; 레닌그라드 국민경제연구소·공업대 학장
  • 1933–1946체포·수감·유형; 석방 직후 NKVD에 암살됨 (1958년 복권)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쿨리크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Кулик
군사 · 국방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1890–1950 ✕ 처형 · 사후 복권

차르친에서 스탈린의 신임을 얻은 포병대장, T-34·카추샤를 거부한 원수

로켓포가 뭐가 필요하단 말이냐? 중요한 건 마차 견인포다.

차르친 전투에서 스탈린의 신임을 얻은 포병 장교로,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적군 포병총국을 이끌며 T-34·KV-1 전차, 카추샤 로켓포, 기관단총 도입을 모두 거부한 극단적 군사 보수주의자였다. 독소전 초기 야전 지휘의 연이은 실패로 1942년 원수 계급이 박탈되고 소장으로 강등되었으며, 1950년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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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제1기병군 포병대장
  • 1926–1929적군 포병총국(GAU) 국장
  • 1932–1936제3소총군단장 겸 군사위원
  • 1937–1941적군 포병총국(GAU) 국장
  • 1939–1941소련 국방 제1인민위원 대리
  • 1941제54군 사령관
  • 1943제4근위군 사령관
  • 1944–1945군 편성·충원 총국 부국장

예브헨 미하일로비치 코노발레츠

Євген Михайлович Коновалець
반혁명 세력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1891–1938 ✕ NKVD 암살 · 로테르담

시치 소총병을 이끌고 UVO와 OUN을 조직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지도자

1938년 5월 23일 로테르담. 신뢰하던 연락원 파벨 수도플라토프가 건넨 우크라이나식 초콜릿 상자 안에는 모스크바에서 제작한 시한폭탄이 들어 있었다.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 자시키우 출신의 우크라이나 군인·정치가.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군 포로가 된 뒤 1917년 키이우에서 시치 소총병을 조직했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의 핵심 지휘관으로 싸웠다. 독립전쟁 패배 후 망명지에서 우크라이나 군사조직(UVO)을 이끌었으며, 1929년 빈에서 여러 민족주의 단체를 통합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을 창설하고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유럽과 북미의 망명 조직을 연결하고 국제연맹에 우크라이나 문제를 제기하려 했으나, 1938년 로테르담에서 OUN에 침투한 NKVD 요원 파벨 수도플라토프가 건넨 폭탄으로 암살되었다. 1929년 리투아니아 시민권과 여권을 받아 망명 활동의 법적 기반을 마련했지만, 그의 민족적·정치적 정체성과 운동의 목표는 일관되게 우크라이나 독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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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5오스트리아-헝가리군 복무, 마키우카 전투 뒤 러시아군 포로
  • 1917–1920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 시치 소총병 조직·지휘
  • 1920–1929우크라이나 군사조직(UVO) 창립·지도
  • 1929–1938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 초대 지도자
  • 1938.05로테르담에서 파벨 수도플라토프의 폭탄 공작으로 암살

블라스 야콥레비치 추바리

Влас Яковлевич Чубарь
정부 수반 소련 우크라이나 1891–1939 ✕ 처형

11년간 우크라이나 정부를 이끈 경제행정가, 스탈린과 기근 사이에서 균열을 드러내다

1932년 6월, 15일간 키예프·빈니차의 굶주린 마을들을 직접 돌아본 추바리는 스탈린에게 100만 푸드의 긴급 구호 곡물을 요청했다. 두 달 뒤 스탈린은 카가노비치에게 썼다: '추바리는 지도자가 아니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6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경제행정가로, 1923년부터 11년간 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지내며 공업화와 집단화를 진두지휘했다. 1932~33년 기근 당시 스탈린에게 곡물 긴급 지원을 공식 요청한 몇 안 되는 고위 지도자였으며, 이로 인해 스탈린과 반복적으로 충돌했다. 1935년 정치국 정위원에 올랐으나 대숙청 와중인 1938년 '독일 첩자'라는 날조된 혐의로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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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제정 노동자구에서 사회민주주의 서클 조직, 16세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1–1917크라마토르스크·마리우폴·모스크바·페트로그라드 공장 노동자, 지하운동
  • 1917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중앙평의회 위원, 10월 혁명기 포병총국 정치위원
  • 1918–1923국가기계제작공장연합(ГОМЗа) 이사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우크라이나 산업복구 조직국 의장
  • 1921–1923우크라이나 SSR 최고경제회의 의장 겸 중앙석탄공업관리국 의장
  • 1923–1934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11년간), 공업화·집단화 주도
  • 1923–1925, 1934–1938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 1926–1935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
  • 1935–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 1937–1938소련 재무인민위원
  • 1938.7.4'독일 첩보기관 요원' 혐의로 체포, 정치국 축출
  • 1939.2.26군사재판 사형 판결, 당일 총살

프세볼로트 아폴로노비치 발리츠키

Всеволод Аполлонович Балицкий
국가보안 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892–1937 ✕ 처형

우크라이나 보안기구의 지배자

1937년 7월 7일, 하바롭스크 역에서 후임 류시코프를 마중 나갔다가 예조프 서명의 체포영장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1월 27일 자신의 45번째 생일에 '특별절차'로 사형 집행.

우크라이나 GPU·NKVD 수장(1923~1937)으로 공화국 보안의 실권자. 홀로도모르 시기 탄압을 지휘하고 정치국 트로이카 일원으로 사형 처결권을 행사했으며, 민족주의 조작 사건을 주도했다. 1935년 국가보안위원 1급, 1937년 체포·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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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2볼히니아·키예프 체카 의장, 전우크라이나 체카 부의장
  • 1923–1931우크라이나 GPU 의장
  • 1924–1930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겸임
  • 1931–1934OGPU 부의장
  • 1932–1934우크라이나 주재 OGPU 전권대표
  • 1934–1937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 1937극동 전출, 체포와 처형

미하일 페트로비치 키르포노스

Михаил Петрович Кирпонос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892–1941 ✕ 전사 · 키예프 포위망

키예프 포위망에서 전사한 남서전선 사령관

1941년 6월 26일, 독일 육군참모총장 할더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남부집단군에 맞서는 적군은 단호하고도 정력적인 지휘를 보여주고 있다.」 브로디 전차전의 혼란 속에서도 키르포노스의 남서전선은 붕괴하지 않았다.

가난한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산림 노동자로 일하다 1915년 징집되었다. 내전기에는 쇼로스의 사단에서 대대장·연대장으로 백군과 싸웠고,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카잔 보병학교 교장을 거쳤다. 1939-40년 겨울전쟁에서 제70소총사단을 지휘해 핀란드만 빙판을 우회하여 비보르크 배후를 차단, 이 공로로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1년 1월 키예프 특별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독소전 발발과 함께 남서전선 사령관으로서 브로디 전차전과 우만·키예프 방어전을 지휘했다. 1941년 9월 20일 키예프 포위망 탈출 시도 중 박격포 파편에 전사했으며, 키예프 참사에서 전사한 최고위급 소련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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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7러시아제국군 징집, 하사관·연대위원장
  • 1918–21붉은군대 입대, 쇼로스 사단에서 대대장·제22연대장
  • 1927–34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제44소총사단 참모장 등
  • 1934–39카잔 보병학교 교장
  • 1939–40제70소총사단장 — 겨울전쟁, 소련영웅 수훈
  • 1940.04–06제49소총군단장
  • 1940–41 (1월)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41.01–06키예프 특별군관구 사령관 (주코프 후임)
  • 1941.06–09남서전선 사령관 — 브로디·우만·키예프 전투
  • 1941.09.20키예프 포위망 탈출 중 전사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예료멘코

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Ерёменко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892–1970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의 남쪽 집게발을 닫은 기병 출신 사령관

1941년 8월,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예료멘코는 스탈린에게 직접 "그 악당 구데리안을 때려부수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실패했고, 구데리안은 키예프를 포위했다.

우크라이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된 병사에서 소련 원수까지 오른 군인. 부됸니의 제1기병군에서 내전을 치렀고, 기병 장교로 숙청기를 무사히 통과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남동전선(후에 스탈린그라드 전선)을 지휘하며 흐루쇼프와 함께 도시 방어 계획을 세웠고, 천왕성 작전에서 남쪽 포위망을 닫아 파울루스의 제6군을 가두는 데 성공했다. 전쟁 동안 무려 여덟 개 전선군을 지휘했고, 1945년 제4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이끌어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해방을 완수했다. 전후 1955년 원수 계급을 받았으나 군사적 성과와 달리 정치적 비중은 제한적이었다. 금지된 종전 일기를 전쟁 내내 몰래 써내려간 기록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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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7제국군 징집병, 남서·루마니아 전선에서 하사관
  • 1918–20마르콥카 빨치산 조직, 제1기병군에서 내전 종군
  • 1935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38–39제6기병군단장, 폴란드 동부 진주
  • 1941.6–7서부전선군 사령관 대리, 스몰렌스크 방어전에서 부상
  • 1941.8–10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 타이푼 작전에서 포위·부상
  • 1942.8–1943.1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천왕성 작전 남쪽 집게발
  • 1943–44칼리닌·제1발트·제2발트 전선군 사령관
  • 1944독립연안군 사령관, 크림 해방
  • 1945.3–5제4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해방
  • 1945–58카르파티아·서시베리아·북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 1955소련 원수 진급
  • 1958–70국방부 감찰총감, 회고록 집필

미콜라 흐리호로비치 흐빌로비

Микола Григорович Хвильовий
작가·예술가 소련 우크라이나 1893–1933 ✕ 자살

근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산문의 창시자

1933년 5월 13일, 동료 작가들을 자택으로 불러 모은 뒤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에 이렇게 썼다: '얄로비의 체포는 한 세대 전체의 처형이다... 나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공산주의 만세, 공산당 만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산문의 기초를 놓은 작가. 바플리테를 이끌며 '모스크바로부터 멀리!'를 외치며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했고, 스탈린의 개입으로 '흐빌로비즘' 탄압을 받았다. 대표작 「나」, 『멧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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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9볼셰비키 지하운동 참여, 적군 합류
  • 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1하르키우로 이주, 문학 활동 시작
  • 1922–1923『푸른 에튀드』, 「나(로맨티시즘)」 발표
  • 1925–1928바플리테(VAPLITE) 주도, 『체르보니 실랴흐』 편집
  • 1926팸플릿 선언으로 '흐빌로비즘' 공세 촉발
  • 1927『멧도요』(발트슈네피) 출간
  • 1930프롤리트프론트 조직, 곧 해체

파벨 세묘노비치 리발코

Павел Семёнович Рыбалко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894–1948 ○ 신장병

스탈린그라드에서 프라하까지, 3근위전차군을 이끈 두 번의 영웅

쿠르스크 전투 중, 리발코의 차량에 독일 공군이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운전병과 부관이 쓰러졌고 차는 구덩이에 빠졌지만, 리발코는 상처 하나 없이 일어나 다른 차로 갈아타고 작전을 계속했다.

평기병에서 출발해 제3근위전차군을 이끌고 쿠르스크에서 프라하까지 진격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 영웅.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에서 다섯 번 부상당했고, 전후 기갑·기계화군 총사령관으로 재직 중 53세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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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러시아 제국군 82보병사단, 프셰미실 공방전·브루실로프 공세 참전, 부상
  • 1917–1922적위대·적군에서 파르티잔 지휘관, 연대장, 여단 정치위원으로 내전 종군, 다섯 차례 부상
  • 1931–1934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이후 중국 신장에서 군사고문(1934–1935)
  • 1937–1939, 1940소련 주폴란드·주중국 무관
  • 1942–1943제5전차군·제3전차군 사령관, 오스트로고시스크-로소시 작전 성공, 중장 진급
  • 1943–1945제3근위전차군 사령관 — 쿠르스크, 드네프르, 키예프, 르보프,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프라하
  • 1943, 1945두 차례 소비에트연방 영웅 칭호 수여
  • 1947–1948소련군 기갑·기계화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도브젠코

Александр Петрович Довженко
작가·예술가 소련 우크라이나 1894–1956 ○ 심장마비

〈대지〉의 시인: 우크라이나의 대지와 민중을 서정적 몽타주로 노래한 소비에트 영화의 거장

나는 아직도 장례식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장례식은 내 모든 시나리오와 내 모든 영화를 관통한다… 삶과 죽음의 문제가 어린 시절부터 내 상상력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소비에트 무성영화의 서정적 몽타주 미학을 개척한 영화감독. '우크라이나 3부작'(특히 세계 영화사 최고작 중 하나로 꼽히는 〈대지〉(1930))으로 우크라이나의 대지와 민중을 시적으로 형상화했으며, 스탈린의 후원과 통제 사이에서 활동하며 키이우 도브젠코 영화 스튜디오의 기초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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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데뷔작 〈바샤 개혁가〉·〈사랑의 열매〉 연출
  • 1928–1930'우크라이나 3부작' 〈즈베니고라〉·〈무기고〉·〈대지〉 발표 — 서정적 몽타주 미학 확립
  • 1932첫 유성영화 〈이반〉 발표 —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건설을 다룬 산업 서사시
  • 1935〈아에로그라드〉 발표, 레닌훈장 수훈
  • 1939–1941〈쇼르스〉 발표, 스탈린상 1급 수상
  • 1943–1945종군기자 겸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우리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를 위한 전투〉 등 제작
  • 1948〈미추린〉 발표, 두 번째 스탈린상 수상
  • 1950–1956모스필름에서 활동, 유작 〈바다의 시〉 시나리오 집필 중 심장마비로 사망

데먄 세르게예비치 코롯첸코

Демьян Сергеевич Коротченко
정부 수반 소련 우크라이나 1894–1969 ○ 자연사

흐루쇼프의 충복: 우크라이나 정부를 두 번 이끈 농민 출신 당 관료

'침묵이 그의 비장의 카드였다. 흐루쇼프가 무언가 제안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네, 네, 물론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 윌리엄 토브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정부 수반을 두 차례(1938~1939, 1947~1954) 역임하고 최고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1954~1969)으로 15년간 재임한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적색 파르티잔을 조직했다. 1930년대 모스크바 바우만 구역에서 니키타 흐루쇼프와 인연을 맺어 측근으로 성장했고, 대숙청기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발탁되었다. 전시 파르티잔 투쟁을 조직하고 종전 후 공화국 재건을 주도했다. 흐루쇼프의 충실한 집행자로, '침묵이 그의 가장 큰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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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적색 파르티잔 조직 · 붉은 군대 정치일꾼
  • 1921–1928쇼스트카·체르니고프·페르보마이스크 당위원회 서기
  • 1931–1937모스크바 바우만 구소비에트 의장 → 모스크바 주당 제2서기 → 서부 주당 제1서기
  • 1938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주당 제1서기 대행
  • 1938–1939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39–194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전시 파르티잔 조직)
  • 1947–1954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두 번째 임기)
  • 1954–1969우크라이나 SSR 최고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

세묜 콘스탄티노비치 티모셴코

Семё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Тимошенко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895–1970 ○ 자연사

전쟁 직전의 국방인민위원

1940년 1월 7일, 스탈린이 "누가 지휘를 맡겠는가?"라고 묻자 긴 침묵이 흘렀다. 티모셴코가 일어나 말했다. "논의된 모든 것을 주신다면 제가 지휘를 맡겠습니다.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부됸니 기병군에서 성장한 원수로, 겨울전쟁에서 만네르헤임 선을 돌파하며 명성을 얻었다. 1940년 보로실로프를 대신해 국방인민위원이 되어 대숙청으로 망가진 붉은 군대의 기계화·재편성을 추진했으나, 1941년 독일 침공까지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 개전 직후엔 스타브카 의장을 맡았고, 이후 여러 전선을 지휘하며 로스토프 반격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하리코프 참패로 전선 지휘에서 물러났다. 전후에는 소련군 원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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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기병 지휘관으로 내전 참전, 부됸니 기병군 계열에서 성장
  • 1939–1940겨울전쟁 후반 지휘로 명성을 얻고 원수로 승진
  • 1940–1941국방인민위원, 대숙청 뒤 붉은 군대 재건 시도
  • 1941–1942독소전 초기 여러 전선을 지휘하나 하리코프 패배 등 한계 노출
  • 1943–1945최고사령부 대표와 원로 지휘관 역할로 후퇴
  • 전후군 원로와 명예직으로 남음

비탈리 마르코비치 프리마코프

Виталий Маркович Примаков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897–1937 ✕ 처형 · 복권 1957

붉은 카자크를 이끈 '붉은 로렌스',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한 소련 군사령관

1929년, 프리마코프는 튀르크 장교 '라기브 베이'로 위장하고 아프간 군복을 입은 2천 기병을 이끌고 국경을 넘었다. 서방은 그를 '붉은 로렌스'라 불렀다.

비탈리 프리마코프는 적군(赤軍)의 군사 지휘관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붉은 카자크(Червонное казачество) 부대를 창설해 남북전쟁에서 14차례의 후방 급습과 60회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929년에는 '라기브 베이'라는 가명으로 아프간 군복을 입고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을 지휘하여 서방에서 '붉은 로렌스'라 불렸으며,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일본에서 무관으로 복무했다. 1936년 체포되어 1937년 6월 투하쳅스키 등과 함께 '트로츠키주의 반소비에트 군사조직' 사건으로 사형당했고, 1957년 복권되었다. 마야콥스키의 연인으로 유명한 릴리야 브릭의 세 번째 남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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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볼셰비키 입당
  • 1915반전 선전 활동으로 시베리아 종신 유형
  • 19172월 혁명으로 석방, 키예프 볼셰비키 위원, 겨울궁전 습격 지휘
  • 1918–1920붉은 카자크 연대→여단→8기병사단→1기병군단 지휘, 3차례 적기훈장
  • 1924–1925레닌그라드 고등기병학교장
  • 1925–1926중국 국민군 군사고문
  • 1927–1930아프가니스탄·일본 주재 무관
  • 1929'라기브 베이'로 위장,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개입 지휘
  • 1933–1934북카프카스 군관구 부사령관
  • 1935–1936레닌그라드 군관구 부사령관, 국방인민위원 산하 군사평의회 위원
  • 1936체포 (8월 14일)
  • 1937'트로츠키주의 반소비에트 군사조직' 사건으로 사형, 총살 (6월 12일)
  • 1957사후 복권 (1월 31일)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기칼로

Николай Фёдорович Гикало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우크라이나 1897–1938 ✕ 처형

그로즈니 방어전을 지휘한 내전 영웅, 세 공화국 당 제1서기로 공업화·집단화를 추진했다

1933년 2월, 기칼로는 정치국에 보낸 서한에서 트락토로첸트르 체계의 '쿨라크 및 백위대 음모' 사건을 트로이카가 심리하게 해달라고 직접 요청했다 — 공화국 당수가 직접 숙청 가속을 청원한 장면이다.

오데사 출신 우크라이나인 볼셰비키로, 내전기 그로즈니 방어전(1918)을 지휘해 적기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이다. 1929년부터 우즈베키스탄·아제르바이잔·벨로루시 세 공화국 당 제1서기를 연이어 맡아 공업화와 집단화를 추진했고, 벨로루시에서는 당원 수가 절반 가까이 줄 만큼 대대적 숙청을 주도했다. 1934년 중앙위 후보위원이자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에 가담했으나,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총살당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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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티플리스 군의학교 졸업, 제1차 세계대전 위생병 복무,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 1917–1918RSDLP(b) 입당, 그로즈니 시당위원장 겸 집행위원장, 그로즈니 방어전 지휘, 적기훈장 수훈
  • 1919–1921카프카스 지방위원, 테레크·다게스탄 반란군 사령관, 페르시아 적군 사령관
  • 1921–1927고르스키 주당위 책임서기, 남동부 중앙위 뷰로 위원, 북카프카스 지방위 선전부장·서기·제2서기
  • 1927–1930중앙아시아 뷰로 조직부장,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제1서기(1929),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1929–1930)
  • 1930–1932중앙위 조직지도부 부부장, 모스크바 주·시 당위원회 서기
  • 1932–1937벨로루시 공산당 제1서기, 중앙위 후보위원(1934–1937), NKVD 트로이카 참여
  • 1937–1938하리코프 주·시 당위원회 제1서기, 체포(1937.10.11), 총살(1938.4.25), 1955년 복권

이반 표도로비치 페드코

Иван Фёдорович Федько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897–1939 ✕ 처형

적기훈장 4회 수훈의 내전 영웅, 국방제1부인민위원까지 올랐으나 숙청의 칼날에 스러지다

수사관이 내게 말했다: '네가 적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너는 자백할 것이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내전에서 가장 용맹한 적군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 북카프카스, 크림, 탐보프, 크론슈타트 등 모든 주요 전선에서 부대를 지휘하며 적기훈장을 네 차례 수훈했다. 전후 군단·군관구 지휘관을 거쳐 1937년 키예프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38년 1등군사령관 계급과 함께 국방제1부인민위원에 올랐다. 대숙청기에는 키예프군관구에서 자신도 대규모 숙청을 주도했으나, 같은 해 7월 체포되어 고문 끝에 '군사 파시스트 음모'를 자백했다. 1939년 2월 사형 판결을 받고 당일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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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8볼셰비키 입당, 페오도시야에서 적위대 조직, 제1흑해혁명연대 지휘
  • 1918–1920북카프카스 혁명군 총사령관 대행, 제11군 부사령관, 제58·46소총사단장
  • 1921크론슈타트 봉기 진압(제187여단장), 탐보프 봉기 진압(제1전투구역 사령관)
  • 1922–1931제18사단장 → 제13·2군단장 → 북카프카스·레닌그라드군관구 참모장·부사령관
  • 1931–1937카프카스군·볼가군관구 사령관, 극동특별군 부사령관, 연해주군집단 사령관
  • 1937–1938키예프군관구 사령관
  • 1938국방제1부인민위원, 1등군사령관

니콜라이 갈락티오노비치 니콜라예프-주리드

Николай Галактионович Николаев-Журид
국가보안 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897–1940 ✕ 처형

군 숙청과 민족 작전을 지휘한 예조프의 방첩 책임자

1938년 10월 체포된 뒤 그는 독일·폴란드·프랑스를 위해 간첩 활동을 했다고 「자백」했다. 2년 동안 그가 남들에게서 받아 내던 바로 그런 종류의 자백이었다.

코노토프의 우크라이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키예프에서 김나지움을 마치고 법학부를 다니다 제정군 하급 장교로 복무했고, 1918년 적군에 들어갔다. 1919년부터 체카 군 방첩에서 일했으며 예브도키모프 아래에서 우크라이나와 북캅카스 보안기관을 거쳐 올라왔다. 1936년 말 모스크바로 옮겨 NKVD 작전부장이 되었고, 1937년부터 적군 탄압의 주무 부서인 특수부(제5부)와 방첩부를 차례로 이끌며 폴란드·독일·라트비아·조선인 민족 작전을 감독했다. 1938년 10월 체포되어 1940년 2월 예조프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됐다. 2013년 러시아 대법원은 그를 복권 대상이 아니라고 판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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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제정군 하급 장교
  • 1918–1919적군 입대, 정보 업무
  • 1919–1921체카 군 방첩 요원
  • 1921–1930우크라이나·북캅카스 보안기관 근무
  • 1930–1932OGPU 특수부 부부장
  • 1935–1936레닌그라드주 NKVD 부책임자
  • 1936–1937NKVD 작전부장
  • 1937–1938GUGB 특수부(제5부)장·방첩부장
  • 1938–1940체포, 재판과 처형

그리고리 표도로비치 고르바치

Григорий Фёдорович Горбач
국가보안 기관 소련 우크라이나인 1898–1939 ✕ 처형

옴스크에서 하바롭스크까지 상한 증액을 몰고 다닌 '북캅카스파' 체키스트

옴스크주에 승인된 1급 한도는 1,000명이었다. 1937년 8월 15일 고르바치는 한도 증액을 청하는 암호전보를 예조프에게 보냈다. '8월 13일 현재 옴스크주에서 1급으로 5,444명이 체포되었고...'

예브도키모프가 1934년 국가정치국 안의 '자기 사람'으로 꼽은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로, 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부국장을 지냈다. 1937년 옴스크주 NKVD 국장으로서 상한 증액 암호전보를 예조프에게 보내 한도를 9천 명 늘렸고, 이어 미로노프의 뒤를 이어 서시베리아(노보시비르스크주) NKVD를 맡아 숙청과 대량작전을 함께 밀어붙인 지도자로 꼽힌다. 류시코프 망명 뒤인 1938년 여름 하바롭스크 변경주 NKVD 국장으로 파견되었으나 그해 11월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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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36북캅카스 체카·OGPU 요원
  • 1936–1937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부국장
  • 1937옴스크주 NKVD 국장, 한도 9천 명 증액
  • 1937–1938노보시비르스크주 NKVD 국장
  • 1938하바롭스크(극동) 변경주 NKVD 국장
  • 1938–193911월 체포, 총살

표트르 표도로비치 불라흐

Пётр Фёдорович Булах
국가보안 기관 소련 우크라이나인 1898–1940 ✕ 처형

기한보다 먼저 쏘기 시작한 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국장

1938년 봄 그의 사건을 정리한 결정문은 이렇게 썼다. '모든 범죄 행위는 내무인민위원부 국 기구에 침투하여, 국장 불라흐의 정치적 근시안과 무사안일 덕분에 튼튼한 둥지를 틀은 계급적 적들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북캅카스에서 잔뼈가 굵은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로, 다긴이 고리키주로 옮겨 가자 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제3부장에서 국장으로 올라섰다. 1937년 쿨라크 작전에서 예정된 기한보다 앞서 7월 29일에 작전을 개시해 프리놉스키의 격렬한 반응을 불렀고, 평균을 웃도는 숫자를 제안하며 상한을 훨씬 초과해 체포를 밀어붙였다. 지역 체키스트의 자의에 대한 불만이 모스크바에 닿으면서 1938년 3월 해임되고 4월 말 체포되었으며, 1940년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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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36북캅카스 체카·OGPU·NKVD 요원
  • 1936–1937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제3부장
  • 1937–1938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국장
  • 1937기한 전 대량작전 개시, 상한 초과 집행
  • 19383월 해임, 4월 체포
  • 1940총살

로디온 야코블레비치 말리놉스키

Родион Яковлевич Малиновский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898–1967 ○ 자연사

흐루쇼프 시대의 전쟁영웅 국방장관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 모스크바의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독단으로 제2근위군을 멈춰 세워 만슈타인의 구원군을 요격했다. 이 결단이 코텔니코보 전투의 승리와 파울루스 6군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오데사 빈민가의 사생아로 태어나 열다섯 살에 1차대전에 뛰어들었고, 프랑스 전선과 스페인 내전을 거친 보기 드문 국제 이력의 군인이었다. 스탈린그라드 반격, 우크라이나 해방, 발칸 진격, 만주 작전까지 2차대전의 결정적 전역을 지휘하며 소련 최정상의 야전사령관으로 우뚝 섰다. 프랑스어·스페인어에 능통했던 유일한 소련 원수로, 10년간 국방장관으로서 핵·미사일 시대의 전략적 재편을 관리했고 당 지도부와의 긴장 속에서도 군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지켜낸 전후 소련 군부의 중심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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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9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 참전, 적군 지휘관으로 성장
  • 1942–1943스탈린그라드 반격과 남부전선 작전에서 핵심 지휘관으로 부상
  • 1944–1945우크라이나·루마니아·헝가리·만주 작전 지휘
  • 1956헝가리 봉기 진압 국면에서 고위 군사지도부로 참여
  • 1957–1967국방장관, 핵·미사일 시대 소련군을 관리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

Трофим Денисович Лысенко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우크라이나 1898–1976 ○ 자연사

미추린 농생물학으로 소비에트 생물학을 30년간 지배한 농학자

「당 중앙위원회가 나의 보고를 검토했고 승인했다」 — 1948년 8월 VASKhNIL 총회 폐막사에서. 이 한마디로 소련 전역에서 고전유전학이 금지되었다.

우크라이나 농민가정 출신 소비에트 농학자. 추파처리(야로비자치야) 기술로 주목받아 1930년대 중반부터 소비에트 생물학계를 장악했다. 멘델유전학을 부르주아 사이비과학으로 공격하고 후천획득형질 유전을 주장했으며, 1948년 8월 VASKhNIL 총회 승리로 소련 전역에서 고전유전학이 금지되었다. 감자 여름심기·기장 재배법 등 실용적 농업기술도 제안했다. 3개 스탈린상·8개 레닌 훈장·사회주의노동영웅(1945) 수상. 흐루쇼프 실각 후 1965년 해임, 1976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당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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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9간자 육종시험장 연구원, 추파처리(야로비자치야) 개발
  • 1929–1938오데사 전연방육종유전연구소(VSGI) 선임전문원 → 소장
  • 1938–1956, 1961–1962VASKhNIL 총재
  • 1940–1965소련 과학아카데미 유전학연구소 소장
  • 19488월 VASKhNIL 총회 — 멘델유전학 '패배' 선언, 전국 금지
  • 1965–1975'고르키 레닌스키예' 실험기지 실험실장

보리스 아르카디예비치 야르체프

Борис Аркадьевич Рыбкин
국가보안 기관 소련 우크라이나계 유대인 1899–1947 ✕ 의문이 남은 교통사고사

정보관의 얼굴로 수행한 위험한 외교

그는 1938년 4월 핀란드 측에 독일이 핀란드를 거쳐 레닌그라드를 공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리스 아르카디예비치 리브킨은 야르체프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소련의 정보관이자 외교관이었다. 1938년 그는 핀란드에 대한 독일의 위협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비밀 협상을 시작했지만, 영토 교환 요구는 합의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 실패한 접촉은 협상과 안보 불신이 얽힌 채 겨울전쟁으로 향하던 소련·핀란드 관계의 첫 단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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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예카테리노슬라프 체카에 입문
  • 1924–1929OGPU 반정보 부문 간부
  • 1931–1935이노 OGPU 중앙아시아·해외 공작
  • 1935–1938헬싱키 소련 공사관 영사, 야르체프 명의 활동
  • 1938–1939핀란드와 비밀 협상 담당
  • 1941–1943스톡홀름 소련 공관 정보 거점 책임
  • 1944–1945동유럽 비합법 공작·공작원 침투 부서장
  • 1947MGB 대외특수공작 중 사망

안드레이 그리고리예비치 크랍첸코

Андрей Григорьевич Кравченко
군사 · 국방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1899–1963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에서 만주까지, 소련 최정예 전차군을 이끈 기갑사령관

1945년 8월, 크랍첸코의 제6근위전차군은 고비사막을 가로질러 3주도 안 되어 800킬로미터를 돌파하며 대싱안링 산맥을 넘어 만주 평원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소련의 전차군 지휘관으로, 스탈린그라드 포위 고리를 닫은 제4전차군단을 지휘했고 쿠르스크와 드네프르에서 제5근위전차군단을 이끌었다. 1944년 제6전차군(이후 제6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코르순-셰우첸콥스키, 우만-보토샤니, 야시-키시네프, 부다페스트, 빈 공세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1945년 8월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그의 군대는 고비사막과 대싱안링 산맥을 초고속으로 돌파하며 관동군을 분쇄하는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이 공로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전차병 대장까지 진급한 몇 안 되는 기갑지휘관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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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붉은군대 자원입대, 남북전쟁 참전 — 타라샤 연대, 제44소총병사단, 제60소총연대
  • 1923폴타바 보병학교 졸업
  • 192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39–1940제173차량화소총사단 참모장, 소련-핀란드 전쟁 및 베사라비아 진주 참전
  • 1941–1942제31전차여단장 (모스크바 방어전), 제61군 전차병과 부사령관
  • 1942제1전차군단 참모장 → 제2전차군단장 (스탈린그라드)
  • 1942–1944제4전차군단장 → 제5근위전차군단장 (스탈린그라드 포위, 쿠르스크, 드네프르)
  • 1944–1947제6전차군 사령관 → 제6근위전차군 사령관 (코르순, 야시-키시네프, 부다페스트, 빈, 만주)
  • 1948–1954자바이칼·발트·극동 군관구 기갑·기계화병과 사령관, 극동 군관구 전차무장 담당 부사령관
  • 1955건강 악화로 예비역 편입

그리고리 페트로비치 코샤첸코

Григорий Петрович Косяченко
중앙계획 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01–1983 ○ 자연사

스탈린 말기와 전환기의 고스플란 계획가

스탈린 사망 직후인 1953년 3월 고스플란 의장에 올랐으나 넉 달 만에 사부로프에게 자리를 넘겼다. 워낙 짧아 많은 연구서가 이 임기를 아예 기록하지 않는다.

열여섯 살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소련의 경제 계획가로, 루간스크 기관차 공장 노동자에서 적군 정치장교를 거쳐 중앙계획의 핵심 간부로 올라섰다. 전시에는 산업 대피와 군수 물자 생산을 조정하는 군사경제 계획 수립에 참여했고, 전후 고스플란 기관지 《플라노보예 호자이스트보》의 편집장(1944–1949)을 지냈다. 1953년 3월부터 6월까지 말렌코프 제1차 정부 아래에서 사부로프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임기 사이에 잠시 고스플란 의장을 맡았으며, 이후 1957년까지 다시 제1부의장으로 복귀했다. 말년에는 재무차관과 재무부 산하 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며 《소비에트 재정 50년》(1967) 편찬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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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2적위대 · 파르티잔 · 제42소총사단 정치일꾼
  • 1922–1929톨마초프 군사정치아카데미 수료 후 군사정치학교 교원
  • 1929–1937적색교수경제연구소 수료, 프룬제·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정치경제학 주임
  • 1940–1949고스플란 부의장 · 《플라노보예 호자이스트보》 편집장(1944–1949)
  • 1949–1953고스플란 제1부의장 · 초대 코메콘 소련 상임대표(1949)
  • 1953 (3–6월)고스플란 의장
  • 1953–1957고스플란 제1부의장
  • 1957–1970재무차관(1957–1960) · 재무연구소 소장(1960–1970)

드미트리 다닐로비치 렐류셴코

Дмитрий Данилович Лелюшенко
군사 · 국방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계 1901–1987 ○ 자연사

구데리안을 멈춰 세운 '전진 장군', 4근위전차군을 프라하까지 이끌다

참모부에 거의 머물지 않고 밤낮으로 최전선에서 보냈다. — 시테멘코 육군대장이 '전진 장군!'이라 부르며 회고한 렐류셴코의 지휘 방식

2차례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은 육군대장으로, 1941년 10월 므첸스크에서 구데리안의 기갑 집단을 저지하며 모스크바 남쪽 접근로를 봉쇄한 것이 그의 군사적 유산의 정점이다. 모스크바 반격에서 제30군을 지휘하여 클린을 탈환했고,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제3근위군으로 포위망 외곽을 형성했으며, 이후 제4전차군(후에 제4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서 리비우-산도미에시,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프라하 작전을 연속으로 수행했다. 전후에는 자바이칼 및 우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DOSAAF 중앙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기갑부대 운용에 관한 군사과학 후보논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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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1붉은 파르티잔으로 참전, 이후 제1기병군 소속 제21기병연대에서 복무, 남북전쟁 전역 참전
  • 1925–1933기병연대 정치지도원·군정위원,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1933)
  • 1933–1939전차중대장, 기계화여단 작전과장, 훈련전차대대장을 거쳐 제39독립경전차여단장
  • 1939–1940제39독립전차여단장으로 겨울전쟁에 참전, 만네르헤임선 돌파 공훈으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1차 수훈
  • 1941제21기계화군단장(다우가프필스 방어), 제1근위특수소총군단을 급편성하여 므첸스크에서 구데리안 차단, 제5군 사령관(보로지노 방어)으로 중상
  • 1941–1943제30군 사령관(모스크바 반격·클린 탈환), 제1·제3근위군 사령관(스탈린그라드 포위, 보로실로브그라드 공세)
  • 1944–1945제4전차군(후 제4근위전차군) 사령관 — 리비우-산도미에시,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프라하 작전, 소비에트 연방 영웅 2차 수훈
  • 1946–1964주독군 기갑·기계화부대 사령관, 제1독립군 사령관(극동), 자바이칼·우랄 군관구 사령관, DOSAAF 중앙위원회 의장(1960–1964)
  • 1964–1987국방부 총감찰단 감찰고문으로 복무, 육군대장(1959), 군사과학 후보(1951)

키릴 세묘노비치 모스칼렌코

Кирилл Семёнович Москаленко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902–1985 ○ 자연사

베리야를 직접 체포한 원수, 부하를 '인민의 적'이라 외친 사령관

1953년 6월 26일, 크렘린. 모스칼렌코는 주코프 등 장군들과 함께 권총을 품고 각료회의장에 들어섰다. 흐루쇼프의 신호에 베리야에게 다가가 "당신은 체포되었소"라고 선언했다. 스탈린 이후 최대 권력자를 한마디로 끝장낸 순간이었다.

우크라이나 농민 출신 포병 장교로, 스탈린그라드에서 제1전차군, 쿠르스크에서 제40군을 지휘했고 드네프르 도하로 첫 영웅 칭호를 받았다. 1953년 6월 흐루쇼프의 지시로 크렘린에 권총을 밀반입해 라브렌티 베리야를 직접 체포함으로써 탈스탈린 권력 투쟁의 결정적 순간을 만들었다. 이후 전략로켓군 총사령관으로 소련 핵전력을 지휘했으나, 부하에게 '인민의 적'이라 폭언하는 불같은 성격으로 두려움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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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22적군 제1기병군 복무, 내전 종군
  • 1939–41핀란드 전쟁, 이후 제1대전차여단장
  • 1942–43제1전차군·제1근위군·제40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
  • 1943드네프르 강 도하로 소련 영웅 칭호
  • 1943–45제38군 사령관, 키예프·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해방
  • 1953베리야 체포 주도,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55/1960–62소련 원수, 전략로켓군 총사령관
  • 1978두 번째 소련 영웅 칭호

티모페이 암브로시예비치 스트로카치

Тимофей Амвросиевич Строкач
국가보안 기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인 1903–1963 ○ 키예프에서 병사

베리야가 '수용소 먼지'로 위협하고 흐루쇼프에게 쿠데타를 경고한 내무장관

베리야가 전화로 "우리는 당신을 기관에서 쫓아내고 체포해 수용소에서 썩게 할 것이며, 가루로 만들어 수용소 먼지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말했다.

대조국전쟁 시기 30만 빨치산을 지휘한 우크라이나 파르티잔 사령부 책임자로, 이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무장관을 지낸 소비에트 보안기관 간부다. 전후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 반란군(UPA) 진압을 직접 지휘하며 대규모 체포를 주도했고, 스탈린 사후 라브렌티 베리야에 의해 르비우 주 경찰청장으로 좌천되었다. 1953년 6월 베리야가 당 기관을 우회해 MVD의 독자적 권력을 구축하려 한다고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경고했으며, 베리야로부터 '수용소 먼지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은 이 사건은 베리야 체포 결의의 결정적 방아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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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6우크라이나 SSR 내무부인민위원
  • 1942–1945우크라이나 파르티잔 운동 참모장
  • 1946–1953우크라이나 SSR 내무장관
  • 1953.03–06르비우 주 내무국장
  • 1953–1956우크라이나 SSR 내무장관 (복귀)
  • 1956–1957소련 내무차관 겸 국경·내무군 총국장

니콜라이 빅토로비치 포드고르니

Николай Викторович Подгорный
국가원수 소련 우크라이나 1903–1983 ↓ 실각 1977

브레즈네프-코시긴 집단지도부의 국가원수

1965년 바쿠 연설에서 중공업 편향을 공개 비판했다가 수슬로프로부터 '수정주의적'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는 평생 후회할 한 방의 반격이었다.

우크라이나 제당공업 기술관료에서 당 제1서기로 성장해 1964년 흐루쇼프 축출 음모의 실질적 주동자가 되었고, 이후 브레즈네프·코시긴과 함께 집단지도체제의 한 축을 이룬 정치가. 국가원수로서 경공업·소비재 우선의 경제 노선을 주장하며 브레즈네프와 각을 세웠다. 1977년 정치국에서 축출되며 브레즈네프 1인 지배의 완성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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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77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표트르 키릴로비치 코셰보이

Пётр Кириллович Кошевой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904–1976 ○ 자연사

사푼산과 쾨니히스베르크를 함락시킨 두 번의 영웅

≪적은 강하고 교활하다. 그러니 너희가 더 교활하고 더 영리해져라. 약점을 찾아내 예상치 못한 강한 일격을 가해라.≫ — 부하들을 훈련시키며.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5세에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한 소련 군사 지휘관이다. 대조국전쟁에서 티흐빈, 스탈린그라드, 크림, 동프로이센 전역을 지휘하며 사푼산 탈환과 쾨니히스베르크 함락으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시베리아·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65년 주독 소련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1968년 소련군 원수로 진급했다. 재임 중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진압 작전에 주독 소련군 부대를 투입했으며, 1969년 해임될 때까지 동독 주둔 소련군의 전투태세를 강화했다. 1961년부터 1971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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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붉은 군대 자원입대, 제8적기카자크기병사단에서 복무
  • 1927우크라이나 기병학교 졸업, 소대장 보임
  • 1939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제15기병사단 참모장
  • 1940제65소총병사단 사단장 (자바이칼 군관구)
  • 1941–1942티흐빈·류반 작전에서 제65소총병사단 지휘
  • 1942–1943제24근위소총병사단장으로 스탈린그라드·북카프카스 전투
  • 1943–1944제63소총병군단장 — 돈바스·멜리토폴·크림 공세, 사푼산 탈환
  • 1944첫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수여 (5월 16일)
  • 1944–1945제71소총병군단장, 이후 제36근위소총병군단장 — 동프로이센 공세, 쾨니히스베르크 함락
  • 1945두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수여 (4월 19일), 승리 퍼레이드에서 제3벨로루시전선 연대 지휘
  • 1946–1948제6근위군 사령관, 이후 보로실로프 고등군사아카데미 과정 수료
  • 1948–1954제5군 사령관 (극동)
  • 1954–1955제11근위군 사령관 (발트 군관구)
  • 1955–1957주독 소련군 제1부총사령관
  • 1957–1960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
  • 1960–1965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 1961–1971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65–1969주독 소련군 총사령관
  • 1968소련군 원수 진급 (4월 15일)
  • 1969–1976국방부 감찰총감 그룹에서 명예직 수행

세묜 데니소비치 이그나티예프

Семён Денисович Игнатьев
국가보안 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04–1983 ↓ 실각 1953

스탈린 말기의 마지막 MGB 장관

스탈린이 이그나티예프를 불러 "의사들에게서 자백을 받아내지 못하면 네 목을 짧게 해주겠다"고 위협했다. 흐루쇼프는 1956년 비밀연설에서 이 장면을 공개 증언했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자란 당 조직 전문가. 부랴티야·바시키르·벨라루스 등 민족 공화국에서 당 제1서기를 지내다 스탈린 말기 MGB 장관에 기용되었다. 의사 음모와 밍그렐 사건을 지휘했고, 스탈린의 직접적 위협 아래 복종했으나 체카 출신이 아닌 온순한 당료였기에 처형을 면했다. 실각 후 타타르 공화국 당 서기로 복귀해 타타르어 보존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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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1940s당 조직·선전 라인에서 성장, 중앙위 관료로 승진
  • 1951–1953MGB 국가보안장관, 스탈린 말기 보안기관 수장
  • 1952–1953의사 음모 수사와 말기 반유대주의 공포 국면에 관여
  • 1953스탈린 사후 베리야에게 공격받고 MGB에서 축출
  • 1950s–1960s처형은 피하고 지방 당직으로 밀려남

세르게이 이그나티예비치 루덴코

Сергей Игнатьевич Руденко
군사 · 국방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1904–1990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 제16공군을 지휘한 공군원수

1945년 5월 2일 밤, 베를린. 부관이 루덴코를 깨웠다. "창밖을 보십시오, 저 불빛을! 전쟁이 끝난 게 틀림없습니다." 거리로 나서자 대공포와 소총이 허공에 꽂히고 있었다 — 패배한 제국의 수도 위로 번쩍이는, 즉흥적인 승리의 축포였다.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1923년 붉은군대에 자원입대, 키예프 항공학교를 거쳐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1942년 10월부터 종전까지 제16공군 사령관으로서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바그라티온,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작전에서 항공지원을 지휘하며 대전 최고의 소련 공군 지휘관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1944년 벨로루시 공세에서의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고, 1955년 공군원수로 진급했다. 전후에는 공수부대 사령관, 공군 주참모장, 장거리항공대 사령관, 공군 제1부총사령관을 역임했으며, 1968년부터 가가린 공군아카데미 교장을 맡아 교수로도 활동했다. 만년에는 국방부 감찰총감단에서 복무하며 회고록 『승리의 날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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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붉은군대 자원입대, 키예프 항공학교 생도
  • 1927전투기 조종사, 항공대 지휘관
  • 1932–1941항공여단·항공사단 지휘관, 주콥스키 공군아카데미 졸업
  • 1942제16공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베를린)
  • 1948–1949공수부대(VDV) 사령관
  • 1950–1953장거리항공대 사령관 겸 공군 부총사령관
  • 1953–1968공군 주참모장 겸 제1부총사령관
  • 1968–1973가가린 공군아카데미 교장, 교수

바실리 스테파노비치 랴스노이

Василий Степанович Рясной
국가보안 기관 소련 우크라이나계 1904–1995 ○ 해임 · 자연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반군 진압을 지휘한 NKVD 내무인민위원

"7월 20일까지 자진 출두하면 사면한다. 이후의 모든 자는 조국의 배신자로서 체포·엄벌·섬멸될 것이다." — 1945년 5월,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으로서 UPA에 내린 최후통첩.

사마르칸트 출신으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콤소몰·당 경력을 쌓은 뒤 1937년 당 충원으로 NKVD에 들어갔다. 1943년부터 1946년까지 우크라이나 SSR 내무인민위원으로서 UPA와 민족주의 지하조직을 무력 진압하는 작전을 지휘했으며, 종전 후에는 대규모 사면 회유와 가족 추방을 병행하는 이중 전략을 폈다. 이후 소련 내무차관, 국가보안차관 겸 MGB 제2총국(방첩) 국장을 거쳐 1952년 후보 중앙위원이 되었으나, 1956년 '장교 명예를 실추시킨 행위'로 해임된 후 건설 부문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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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33투르크메니스탄 콤소몰·당 활동; 모스크바 전연방 공업아카데미
  • 1933–1937MTS 정치부장, 스탈린그라드 지역구 당 서기
  • 1937–1941GUG NKVD 방첩부 요원 → 과장
  • 1941–1943고리키주 NKVD/NKGB 국장
  • 1943–1946우크라이나 SSR 내무인민위원
  • 1946–1952소련 내무제1차관 → 내무차관
  • 1952–1953소련 국가보안차관 겸 MGB 제2총국(방첩) 국장
  • 1953–1956모스크바·모스크바주 MVD 국장

이반 이오시포비치 프로스쿠로프

Иван Иосифович Проскуров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41 ✕ 처형

스탈린에게 독일 침공을 경고하고 총살당한 GRU 국장

1940년 4월 소련-핀란드 전쟁 참패 후 열린 군사평의회에서, 프로스쿠로프는 패배의 원인을 정보 실패 탓으로 돌리는 스탈린의 해석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 폭격비행대를 지휘해 소련영웅 칭호를 받은 폭격기 조종사 출신 군사정보 수장. 1939년 4월부터 1940년 7월까지 GRU(소련 군사정보국) 국장 겸 국방부 인민위원 대리를 지냈다. 1940년 6월 프랑스 함락 직후 독일의 소련 침공 준비를 경고하는 보고서를 스탈린에게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소련-핀란드 전쟁 후 열린 군사평의회에서 정보 실패 탓으로 돌리는 스탈린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1941년 6월 체포되어 재판 없이 10월 28일 총살되었고, 1954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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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33스탈린그라드 군사비행학교 졸업, 비행교관
  • 1936.9모스크바-하바롭스크 TB-3 기록 비행, 보로실로프로부터 금시계 수여
  • 1936–37스페인 내전 제1국제폭격비행대 지휘관, 46회 출격
  • 1937.6소련영웅 칭호 수여, 대위에서 소령으로 특진
  • 1938제2특수목적항공군 사령관, 극동 전선
  • 1939.4–1940.7GRU(제5국) 국장 겸 소련 국방부 인민위원 대리
  • 1940.6항공 중장 진급, 독일의 소련 침공 준비에 관한 첫 경고 보고서 제출
  • 1941.6.19제7군 공군사령관 임명, 취임 전 독소전 발발

이반 다닐로비치 체르냐홉스키

Иван Данилович Черняховский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45 ✕ 전사

37세에 전선을 지휘한 최연소 사령관, 승리 직전 동프로이센에서 전사하다

체르냐홉스키의 60군이 보조 공격축에서 독일 방어선을 무너뜨리자, 로코솝스키는 직접 그의 지휘소로 날아와 전선군 전체의 주공 방향을 이 구역으로 전환했다.

우크라이나 출신 소련군 대장. 60군 사령관으로 쿠르스크·드네프르 돌파를 이끌었고, 제3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으로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빌뉴스와 민스크를 해방했다. 1945년 2월 동프로이센에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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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28오데사 보병학교 → 키예프 포병학교 졸업, VKP(b) 입당
  • 1928–3617군단 포병연대에서 소대장·포대장, 기계화·차량화 아카데미 수석 졸업
  • 1938–41제9경전차연대장 → 제28전차사단장 (프리발트 특별군관구)
  • 1941–42북서전선군에서 28전차사단 지휘, 솔치·노브고로드 방어, 제18전차군단장
  • 1942–4460군 사령관 — 보로네시·쿠르스크·드네프르 도하·키예프 해방, 첫 영웅 칭호
  • 1944–45제3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 — 바그라티온, 빌뉴스·카우나스 해방, 두 번째 영웅 칭호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코롤료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Королё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66 ○ 자연사

수용소에서 우주로. 이름조차 국가기밀이었던 설계자

1961년 4월 12일, 바이코누르 발사대. 코롤료프의 무선 음성: "예비단계… 중간단계… 주단계… 발사!" 가가린: "출발이다!(Поехали!)" — 한 사람의 목소리와 다른 한 사람의 대답으로 인류 우주시대가 열렸다.

1938년 숙청에 걸려 콜리마 금광에서 건강과 이를 잃은 로켓 기술자. 살아 돌아와 스푸트니크와 가가린을 쏘아 올린 로켓을 만들었지만, 생전에 그의 이름은 기밀이었다. 노벨상 위원회의 문의에 소련은 「수석설계자」라고만 답했다. 수용소가 망가뜨린 몸은 1966년의 수술을 견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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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제트추진연구그룹(GIRD) 출신으로 로켓연구소 창설 참여
  • 1938–40체포, 콜리마 금광
  • 1940–44옥중 설계국(샤라시카)에서 항공기 설계
  • 1946–57수석설계자: R-7 대륙간탄도미사일
  • 1957/1961스푸트니크, 보스토크(가가린) 발사
  • 1966수술 중 사망, 사후에야 실명 공개

보리스 예프스타피예비치 부토마

Борис Евстафьевич Бутома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우크라이나계 1907–1976 ○ 사망 · 자연사

19년간 소련 조선을 지휘한 핵잠수함 함대의 설계자

1959년 7월 23일, '특수장비 제작에 관한 정부 과업 수행'이라는 비밀 포고령으로 부토마는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 '특수장비'란 K-3 '레닌스키 콤소몰' — 소련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이었다.

소련의 조선 기술관료이자 당·국가 지도자로, 195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19년간 소련 조선산업을 총괄했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두 시대를 관통하며 국내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프로젝트 627, K-3 '레닌스키 콤소몰'), 세계 최초의 탄도미사일 잠수함(프로젝트 V611), 그리고 전략미사일 잠수함 667B형의 건조를 진두지휘하여 소련 해군을 대양함대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지휘 아래 220여 개 조선·선박기계 공장이 신설·재건되었고, 민간 부문에서도 원자력 쇄빙선과 초대형 유조선 건조가 본격화되었다. 스탈린상(1949), 사회주의노동영웅(1959), 레닌상(1974)을 수상했으며, 1966년부터 사망 시까지 CPSU 중앙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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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레닌그라드 조선연구소 졸업
  • 1936–1944블라디보스토크 달자보트 조선소에서 정비공·진수기사·수석기사 역임
  • 1944–1948젤레노돌스크 제340조선소 수석기사, 이후 소장
  • 1948–1952소련 조선공업부 본부장
  • 1952–1953, 1954–1957소련 조선공업부 차관
  • 1957–1965소련 각료회의 국가조선위원회 의장
  • 1965–1976소련 조선공업부 장관

로만 안드레예비치 루덴코

Роман Андреевич Руденко
국가보안 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81 ○ 자연사

뉘른베르크의 소련 수석검사, 소련 검찰을 28년간 이끈 최장수 검찰총장

1946년 2월 8일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루덴코는 나치 지도부를 향해 그들이 '식인종의 도덕과 강도의 탐욕'을 독일 민족에게 주입했다고 규탄하며 소련 검찰의 개시 진술을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코사크 가문 출신으로 1926년 입당, 1944년 우크라이나 검사장이 되었다. 1945~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소련 수석검사로 괴링을 신문하며 나치 전쟁범죄의 실체를 법정에 세웠다. 1953년부터 사망 시까지 28년간 소련 검찰총장으로 재임하며 베리야 재판을 주도하고 정치범 재활위원회를 이끌어 흐루쇼프 해빙기의 사법 복권을 추진했다. 브레즈네프 시기에는 안드로포프와 함께 반체제 인사에 대한 '예방적 경고' 제도를 도입하고 1979년 소련 검찰법 제정으로 검찰 제도의 법적 기반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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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체르니고프 지역 검찰청 수사관
  • 1937–1938도네츠크 주 검사
  • 1938–1940스탈리노 주 검사
  • 1942–1944우크라이나 SSR 부검사장
  • 1944–1953우크라이나 SSR 검사장
  • 1945–1946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소련 수석검사
  • 1953–1981소련 검찰총장
  • 1961–1981CPSU 중앙위원회 위원

페트로 그리고리예비치 그리고렌코

Пётр Григорьевич Григоренко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87 ○ 망명 중 뇌졸중

소련 장성에서 인권·민족 권리 옹호로 전향한 반체제 인사

"지하에서는 쥐밖에 만날 수 없다" — 반체제 활동은 공개적으로 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을 담아 회고록 제목이 된 말.

소련군 소장(1959) 출신의 반체제 인사로, 크림 타타르인의 귀환 권리 투쟁을 이끌고 모스크바·우크라이나 헬싱키 그룹 창립에 모두 참여한 인권운동가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공개 규탄하고 두 차례 정치적 정신병원에 강제 수감(1964–65, 1969–74)되면서 소련의 정신의학 정치적 남용을 상징하는 사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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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29콤소몰 간부 · 우크라이나 콤소몰 중앙위원
  • 1934–1939군사공학 아카데미 및 참모 아카데미 우등 졸업
  • 1939–1943할힌골 전투 · 극동전선 참모 · 여단장
  • 1943–1945독소전: 제10근위군 부참모장 · 제8소총사단 참모장 (부상)
  • 1945–1961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수 · 군사사이버네틱스 학과장 (1959 소장 진급)
  • 1961–1964정치 연설로 해임 · 극동 좌천 · '레닌주의 부활 동맹' 결성
  • 1964–1974정치적 정신병원 강제 수감 (1964–65, 1969–74)
  • 1976–1977모스크바 헬싱키 그룹 · 우크라이나 헬싱키 그룹 창립 멤버

게오르기 카르포비치 치뇨프

Георгий Карпович Цинёв
국가보안 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96 ○ 자연사

브레즈네프가 KGB 안에 심은 또 하나의 눈

장군은 배신하지 않는다 — 20년 뒤 체포된 CIA 이중간첩 폴랴코프에 대한 첫 경고가 왔을 때 치뇨프가 한 말이다.

브레즈네프가 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당 시절부터 신임한 야금 기술자 출신 KGB 간부로, 부의장 자리에서 15년간 안드로포프 의장의 움직임을 총비서에게 직접 보고한 'KGB 안의 브레즈네프의 눈'이었다. 육군대장·사회주의노동영웅까지 올랐으나 음모와 전횡으로 동료들의 평판은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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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39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야금 공장 노동자 · 기술자
  • 1939–41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당 간부 (브레즈네프 아래서 근무)
  • 1941–45군 정치위원: 칼리닌 전선 폴리트국 부국장 → 제57군 폴리트부장
  • 1945–51소련 측 오스트리아 연합국위원회 보좌관 · 부최고위원
  • 1953–58주독 소련군 특별부장 (MVD/KGB)
  • 1966–67KGB 제3국장 (군 방첩)
  • 1967–70KGB 제2총국장 (방첩)
  • 1970–82KGB 부의장 (군 방첩·수사부서 총괄)
  • 1982–85KGB 제1부의장
  • 1985–92국방부 총감찰관단 감찰관

파벨 아나톨리예비치 수도플라토프

Павел Анатольевич Судоплатов
국가보안 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96 ○ 자연사

트로츠키를 제거한 스탈린의 첩보 거장, 결국 스탈린의 감옥에서 15년

베리야는 우리가 추천한 사람들이 유죄인지 무죄인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던진 질문은 단 하나였다: '그들이 정말로 필요한가?' — 『특수임무』

멜리토폴의 제분업자 아들로 태어나 열두 살에 붉은군대에 뛰어든 소년병은 남북전쟁의 무법지를 헤치고 GPU의 암약요원으로 성장했다. 1938년 로테르담에서 스탈린의 친필 명령으로 OUN 지도자 코노발레츠를 암살했고, 1940년에는 나움 에이팅곤과 함께 '오리 작전'을 지휘해 트로츠키를 제거했다. 독소전쟁기에는 제4국장으로서 적 후방의 파르티잔·사보타주 활동과 원자력 첩보(그룹 'S')를 총괄했다. 1953년 베리야의 '공범'으로 체포되어 15년을 감옥에서 보냈고, 석방 후 필명으로 역사소설을 쓰며 살다가 소련 붕괴 뒤인 1992년 완전히 복권되었다. 그의 회고록 『특수임무』는 소련 정보기관의 가장 내밀한 작전들을 처음으로 공개한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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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1붉은군대 소년병; 포로·탈출 후 오데사에서 부랑자 생활
  • 1921–1932우크라이나 GPU·OGPU 정보장교로 두각을 드러냄
  • 1933–1938OGPU·NKVD 외국부(INO) — 베를린 OUN 내부 침투, 해외 암약
  • 1938코노발레츠 암살(로테르담); NKVD 외국정보국장 대행(11월–12월)
  • 1939–1941외국정보부국장; '오리 작전' — 트로츠키 암살 지휘
  • 1941–1946NKVD 제4국장 — 적 후방 파르티잔·사보타주 전쟁; 원자력 첩보 그룹 'S' 지휘
  • 1946–1953전후 대NATO 사보타주 작전; MVD 제1총국 부국장 (1953)
  • 1953–1968베리야 '공범'으로 체포, 15년형 — 블라디미르 교도소에서 복역
  • 1968–1996석방 후 필명으로 소설 집필; 1992년 완전 복권, 회고록 『특수임무』 출간

알렉세이 일라리오노비치 키리첸코

Алексей Илларионович Кириченко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우크라이나 1908–1975 ↓ 실각 1960

흐루쇼프 초의 당 임명 담당 서기

1957년 6월 반당 그룹과의 대결에서 키리첸코는 논거를 고르는 수고도 없이 모든 비난을 거칠게 쳐내며 흐루쇼프 편에 섰다. 흐루쇼프 없이는 자신에게도 미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당 역사상 첫 우크라이나인 제1서기로, 1957년 반당 그룹에 맞서 흐루쇼프를 결사적으로 지지하며 모스크바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었다. 1958년 사실상 당 제2서기로서 서기국을 주재하고 인사권을 장악했으나, 거친 성격과 독자적 행보로 동료들의 반감을 사고 흐루쇼프의 신임마저 잃었다. 1960년 실각 후 공장장으로 전락했다가 연금 생활자로 완전히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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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57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
  • 1957–60중앙위 서기, 당 임명 업무
  • 1960흐루쇼프 체제 내부에서 실각

아르히프 미하일로비치 률카

Архип Михайлович Люлька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우크라이나 1908–1984 ○ 폐암

독일 엔진을 베끼지 않고 소련 제트추진 시대를 연 설계자

"많은 사람들은 '무언가'로 들어간 제트 기류가 '무언가'에서 나와 어떻게 비행기를 움직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 1930년대 후반, 률카가 최초의 터보제트 엔진 구상을 처음 설명했을 때 마주한 반응.

우크라이나 태생의 소련 항공엔진 설계자. 1941년 세계 최초의 터보팬 엔진 설계 특허를 출원했고, 독일 포획 장비를 모방하기를 거부하며 독자적인 연구로 1947년 소련 최초의 터보제트 엔진 TR-1을 완성했다. OKB-165(후일 NPO 사투른)의 총설계자로서 AL-7, AL-21, AL-31F 등 AL 시리즈 엔진을 개발하여 수호이·미그·투폴레프 전투기 세대를 추진했으며, AL-31F는 오늘날까지 Su-27 계열의 심장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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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키예프 공과대학 졸업, 하리코프 터보발전기 공장
  • 1933–39하리코프 항공연구소 강사, 가스터빈 연구
  • 1939–41키로프 공장 SKB-1, RD-1 설계, 세계 최초 터보팬 특허
  • 1941–43첼랴빈스크 전차공장 디젤 엔지니어
  • 1946–57OKB-165 수석설계자; TR-1 소련 최초 터보제트 국가시험 통과 (1947)
  • 1957–81OKB-165 총설계자; AL-7, AL-21, AL-31F 엔진 시리즈
  • 1968–8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가스터빈 위원회 의장

발렌틴 페트로비치 글루시코

Валентин Петрович Глушко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우크라이나 1908–1989 ○ 자연사

R-7을 하늘로 올린 소련 액체로켓엔진의 창시자

1924년 3월, 열다섯 살 글루시코가 치올콥스키에게 보낸 첫 편지: "행성 간 통신은 제 이상이자 평생의 목표입니다. 이 위대한 일에 인생을 바치겠습니다."

오데사 출신으로 열여섯 살에 치올콥스키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주비행 책을 썼다. 1929년 GDL에서 세계 최초의 전기열로켓을 시험한 후 소련 액체로켓엔진의 기초를 세웠다. 1938년 체포되어 8년형을 받고 샤라시카에서 설계를 이어갔으며, 1944년 석방·복권되었다. OKB-456(현 에네르고마시) 수석설계자로서 R-7의 RD-107/108 엔진을 개발해 스푸트니크와 가가린을 우주로 보냈다. 코롤료프 사후 1974년 NPO 에네르기야의 총괄설계자가 되어 15년간 소련 유인우주계획을 이끌었고, 세계 최강 액체로켓 RD-170과 에네르기야-부란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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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가스역학연구소(GDL) 입소, 전기열로켓·액체로켓 개발 주도
  • 1933–38로켓연구소(RNII)에서 ORM 계열 엔진 개발
  • 1938–44체포·8년형, 카잔 샤라시카에서 항공기용 보조로켓 RD-1 설계
  • 1946–74OKB-456 수석설계자: R-7 계열 엔진(RD-107/108), 프로톤 엔진(RD-253) 개발
  • 1957/1961스푸트니크·보스토크(가가린) 발사 성공,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 1974–89NPO 에네르기야 총괄설계자, 소련 유인우주계획 총괄
  • 1988RD-170 엔진 탑재 에네르기야-부란 발사 성공

페트로 예피모비치 셸레스트

Пётр Ефимович Шелест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우크라이나 1908–1996 ↓ 해임 1972

우크라이나 문화투자로 밀려난 공화국 제1서기

수슬로프가 "그대의 카자크는 시대착오요!"라고 외치자, 셸레스트는 "카자크가 없었다면 자네도 여기 없었을 것이네. 그들은 유목민 무리로부터 국경을 가슴으로 막아냈어." 하고 받아쳤다.

1963년부터 1972년까지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내며 흐루쇼프에서 브레즈네프로 넘어가는 전환기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위기를 관통했다. 호르티차 역사보호구, 피로히우 민속건축박물관, 26권짜리 『우크라이나 도시와 마을의 역사』 등 우크라이나 문화유산 사업에 대규모 재정을 배정했다. 소비에트 연방 틀 안에서 우크라이나의 경제·문화적 이해를 대변하다가 1972년 브레즈네프 파벌에 의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혐의로 해임되었으며, 그의 몰락은 소비에트 연방제에서 공화국 자율성과 중앙 통제 사이의 긴장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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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54하르키우·첼랴빈스크·사라토프 당 간부, 키예프 항공공장장
  • 1954–1957키예프 주당위 제2서기
  • 1957–1962키예프 주당위 제1서기
  • 1963–1972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64–1973CPSU 중앙위 정치국(상무회) 위원
  • 1972–1973소비에트연방 각료회의 부의장
  • 1974–1984모스크바 교외 항공공장 설계국장

이반 그리고리예비치 파블롭스키

Иван Григорьевич Павловский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909–1999 ○ 자연사

체코를 침공하고 아프가니스탄을 반대한 지상군 총사령관

1979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파블롭스키는 국방장관 우스티노프와 참모총장 오가르코프에게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단호히 반대하는 서면 보고서를 제출했고, 수개월 후 지상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됐다.

우크라이나 농촌 출신으로 농업학교를 나와 붉은 군대에 입대, 독소전쟁에서 코카서스에서 베를린까지 진군한 소총사단을 지휘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67년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13년간 소련 지상군을 지휘했으며, 1968년에는 바르샤바조약군 통합군 사령관으로서 체코슬로바키아 침공(다뉴브 작전)을 현장 지휘했다. 1979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귀환한 후 국방장관 우스티노프와 참모총장 오가르코프에게 소련군 파병을 단호히 반대하는 서면 보고서를 제출했고, 수개월 뒤 해임됐다. 소련 최대의 지상군을 13년간 이끈 육군대장으로서 군사개입을 공개 반대한 이력은 브레즈네프 말기 군사 엘리트 내부의 균열을 드러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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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328소총사단장으로 코카서스에서 베를린까지 진군, 바르샤바 해방
  • 1952–1955북카프카스 군관구 제6소총군단장
  • 1955–1958자카프카스 군관구 제7근위군 사령관
  • 1961–1963볼가 군관구 사령관
  • 1963–1967극동 군관구 사령관
  • 1967–1980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1968년 다뉴브 작전 지휘
  • 1979아프가니스탄 사절단 파견, 소련군 파병 반대 보고서 제출
  • 1980–1992국방부 총감찰단 군사고문, 이후 퇴역

표트르 표도로비치 크리보노스

Пётр Фёдорович Кривонос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우크라이나인 1910–1980 ○ 자연사

철도에서 생산성 혁신을 조직한 기관사

1935년 7월 1일, 크리보노스의 기관차 편대가 화물열차 속도를 종전의 시속 30킬로미터에서 53킬로미터로 끌어올렸다.

표트르 크리보노스는 기관사로서 철도의 운송 능력을 끌어올린 소련의 생산성 혁신가였다. 그는 1935년 7월 화물열차의 기술 속도를 크게 높이는 운전법을 선보여 스타하노프보다 앞서 철도 부문 노동 영웅의 전형을 만들었고, 이를 따르는 ‘크리보노스파’가 확산됐다. 전쟁 때는 철도 수송과 파괴된 철도망 복구를 지휘했으며, 전후에는 교육을 보완해 장기간 철도를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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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9슬라뱐스크 기관차고 정비공·기계공 학교 학생
  • 1929–1933남부도네츠 철도 보조기관사·기관사
  • 1935화물열차 운전 혁신, 철도 부문 생산성 운동의 선구자
  • 1937–1938슬라뱐스크 기관차고장
  • 1938–1941남부도네츠 철도 및 북도네츠 철도장
  • 1941–1943전시 철도 수송·건설 전권대표, 톰스크 철도장
  • 1943–1953북도네츠 철도장, 전후 철도 복구 책임자
  • 1953–1980우크라이나 남서 철도장

파벨 표도로비치 바티츠키

Павел Фёдорович Батицкий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910–1984 ○ 자연사

소련 방공군을 건설한 원수, 베리야를 직접 처형한 사령관

베리야의 눈을 가리려던 헌병을 제지하며 바티츠키가 말했다. '왜 가리나? 보게 놔둬!'

14세에 붉은 군대에 입대해 기병·참모 장교로 성장했고, 독소전쟁에서는 254소총사단과 73·128소총군단을 지휘하며 드네프르 도하, 벨라루스 해방, 베를린·프라하 공세를 치렀다. 1953년 라브렌티 베리야의 사형 집행을 자청해 직접 방아쇠를 당겼고, 모스크바 방공군구 사령관으로서 소련 영공 방어 체계의 기초를 닦았다. 1966년 방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1978년까지 12년간 방공군을 전략적 우주방어 체계로 확대하고 바르샤바조약 통합방공을 총괄했으며, 임기 말 방공군 분할 결정에 반대해 스스로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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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3254소총사단장, 데먄스크 전역 방어전
  • 1943–194473소총군단장, 드네프르 도하·체르카시 해방·코르순-셰우첸콥스키 작전
  • 1944–1945128소총군단장, 벨라루스·동프로이센·베를린·프라하 공세
  • 1950–1953공군 주참모장·공군 부총사령관, 베리야 체포·처형 참여
  • 1954–1965모스크바 방공군구 사령관
  • 1965–1966소련군 참모총장 제1차장
  • 1966–1978방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바르샤바조약 통합방공군 사령관
  • 1978–1984국방부 감찰총감단

표트르 스테파노비치 네포로즈니

Пётр Степанович Непорожний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우크라이나 1910–1999 ○ 자연사

통합에너지시스템을 만든 최장수 에너지 장관

미국 방문 중 닉슨 대통령을 만난 네포로즈니는 지역 전력망을 연결하라고 조언했다. 「미국인들은 그 충고를 받아들였고, 이제 미국의 주요 지역들은 500kV와 750kV 송전선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러시아 위키백과는 전한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수력 기술자가 된 네포로즈니는, 1962년부터 23년간 소련 에너지·전화부 장관으로 재임하며 세계 최대 규모의 수력발전소들과 원자력발전 프로그램을 총괄했다. 브라츠크, 크라스노야르스크, 사야노-슈셴스카야 등 시베리아의 거대 댐들과 볼가 강 cascade, 중앙아시아의 고압력 댐들을 동시에 추진했고, 소련 전역에 원전을 건설하는 한편 세계에서 가장 신뢰성 높은 통합에너지시스템(ЕЭС)을 구축했다. 그의 재임 기간 소련의 발전 용량은 8,200만 kW에서 3억 1,500만 kW로 거의 네 배 성장했다. 레닌상 수상자이자 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으로, 2000년 사야노-슈셴스카야 수력발전소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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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3중앙아시아 수자원·관개 및 수력 건설 현장에서 기술자로 활동
  • 1933–1935발트 해군 복무
  • 1935–1940레닌그라드 Гидропроект, 치르치크ГЭС 건설, 중공업인민위원부 수력건설총국 근무
  • 1940–1954중앙아시아·레닌그라드·카홉카 수력발전소 건설에서 수석기술자 역임
  • 1954–1959우크라이나 SSR 부수상 겸 국가건설위원회 의장
  • 1959–1962소련 발전소건설부 제1차관
  • 1962–1985소련 에너지·전화부 장관
  • 1985–1999은퇴 후 에너지 분야 베테랑 협의회 지도

블라디미르 표도로비치 톨룹코

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Толубко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914–1989 ○ 자연사

소련 전략로켓군을 대미 전략적 균형으로 이끈 사령관

1983년 3월 25일, 톨룹코는 중간 계급인 포병원수를 건너뛰고 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직접 진급했다. 소련 역사상 유일한 사례다.

독소전에서 전차장교로 단련되고 1972년부터 1985년까지 전략로켓군(RVSN)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으로 재임하며 MIRV 탑재 3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이동식 미사일 «피오네르»의 실전 배치를 주도하여 소련의 대미 전략적 균형을 완성한 군인이다. 1983년 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바로 진급한 유일한 사례로, 1962년 쿠바 미사일 배치 작전 「아나디리」 조직에도 핵심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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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독소전 참전, 전차여단 지휘 및 4근위기계화군단 작전과장
  • 1951–1960주동독 제19근위기계화사단장 → 제1근위전차군 → 제8근위군 사령관
  • 1960–1968전략로켓군 제1부사령관, 작전 「아나디리」(쿠바 미사일 배치) 조직 참여
  • 1968–1972시베리아·극동 군관구 사령관
  • 1972–1985전략로켓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3세대 미사일 배치 주도
  • 1983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직접 진급 (소련 역사상 유일)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랴시코

Александр Павлович Ляшко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우크라이나 1915–2002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우크라이나 정부를 15년간 이끈 도네츠크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관리자

«폭발이 중앙 당국에 보고된 것은 몇 시간 이내였지만, 사태의 전모는 이틀이 지나서야 분명해졌습니다.» — 1986년 5월 8일 키예프 기자회견에서 체르노빌 초기 대응의 정보 지연을 설명하며.

도네츠크 공업지대에서 기술자로 출발하여 당 기구를 따라 승진한 랴시코는, 1972년부터 1987년까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공화국 경제를 총괄했다. 15년의 임기는 이 직책 사상 최장기 재임이었으며, 브레즈네프 안정기 전체와 페레스트로이카 출범기를 관통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직후에는 공화국 정부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사고 수습을 지휘했으며, 사고 발생 수 시간 내에 중앙에 보고했으나 전모 파악에는 이틀이 걸렸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셰르비츠키와 함께 우크라이나 당·정을 분담하며 중앙의 정책을 충실히 집행하는 제도적 안정성을 대표했고, 퇴임 후에는 4권의 회고록 《기억의 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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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하리코프 전차학교 졸업, 전차소대장으로 북캅카스 전선 참전, 이후 사마르칸트 전차학교 교관
  • 1945–1952노보크라마토르스크 기계제작공장 기술자·부공장장·당조직자
  • 1952–1954크라마토르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54–1960스탈리노(도네츠크) 주당위 서기 → 제2서기
  • 1960–1963도네츠크 주당위 제1서기
  • 1963–1966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공업건설국 의장
  • 1966–1969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 1969–1972우크라이나 SSR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소련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부의장
  • 1972–1987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 1986체르노빌 원전 사고 공화국 정부위원회 위원장

스테판 바실리예비치 체르보넨코

Степан Васильевич Червоненко
외교 소련 우크라이나 1915–2003 ○ 자연사

중소분쟁·프라하의 봄·데탕트를 관통한 24년 임기 소련 대사

1968년 8월 21일, 지시보다 두 시간 앞서 스보보다 대통령을 찾아간 체르보넨코는 체코슬로바키아군의 무저항 전문을 이끌어냈다. 그레치코 원수의 회고: 「그 공으로 대사에게 레닌훈장을 두 개 줘야 한다고 누군가 말하더군.」

소련 외교관으로 중소 분열기 주중 대사(1959~1965), 프라하의 봄 당시 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1965~1973), 주프랑스 대사(1973~1982)를 지냈다. 1968년 8월 21일 모스크바 지시보다 두 시간 앞서 스보보다 대통령을 찾아가 체코슬로바키아군에 무저항 명령을 설득해 대규모 유혈 충돌을 막았으며, 소련 지도부는 이 공로에 「레닌훈장 두 개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1961~1989년 CPSU 중앙위원, 5개 레닌훈장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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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1중학교 교사·교장, 키예프주·수미주
  • 1941–1944붉은군대 복무, 위대한 조국전쟁 참전
  • 1944–1949체르카시 사범대학 마르크스-레닌주의 학과장·부학장
  • 1949–1951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선전부 강사단장
  • 1951–1956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과학·고등교육 부장
  • 1956–1959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이념 담당)
  • 1959–1965주중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5–1973주체코슬로바키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73–1982주프랑스 소련 특명전권대사 (마다가스카르 겸임 1973~1974)
  • 1982–1988CPSU 중앙위 해외간부·출국관리 부장
  • 1989–1993소련·러시아 외무부 고문

세묜 쿠지미치 츠비군

Семён Кузьмич Цвигун
국가보안 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17–1982 ✕ 권총 자살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 옆에 심은 감시자

1982년 1월 19일, 수슬로프와의 격렬한 대면 후 다차 서재에서 권총 한 발. 당일 소집된 의사들은 심장마비로 사망진단서를 썼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 출신으로 역사 교사에서 NKVD에 입문해 몰다비아에서 브레즈네프의 신임을 얻었고, 1967년 KGB 제1부의장 겸 제5국장으로서 반체제 인사 탄압을 총괄했다. 1982년 1월 의문의 권총 사망은 수슬로프의 급서와 안드로포프의 당직 이동, 브레즈네프의 사망으로 이어지며 크렘린 권력 구도의 분수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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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39역사 교사 · 중학교 교장
  • 1939NKVD 입대
  • 1941–45남서부·남부 전선 및 SMERSH 복무 (전선 기록 논란)
  • 1951–53몰다비아 MGB 부장관: 브레즈네프와 인연
  • 1957–63타지크 KGB 의장
  • 1963–67아제르바이잔 KGB 의장
  • 1967–82KGB 제1부의장 · 제5국장: 반체제 탄압 총괄

드미트리 스테파노비치 폴랸스키

Дмитрий Степанович Полянский
농업 소련 우크라이나 1917–2001 ↓ 전보 1976

농업과 정부 부문을 오간 브레즈네프 시대 관료

1973년 2월, 브레즈네프는 상임간부회에서 폴랸스키의 농업장관 전보를 통보했다. 몸을 떨며 일어선 폴랸스키가 "아무도 나와 상의하지 않았다"고 하자, 브레즈네프는 "자, 지금 상의하고 있잖나"라고 응수했다.

정치국원·제1부수상을 지내며 1964년 흐루쇼프 축출을 위한 '폴랸스키 보고서'를 작성한 소련 고위 관료. 이후 농업장관을 거쳐 일본·노르웨이 대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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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1976농업장관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셰르비츠키

Владимир Васильевич Щербицкий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우크라이나 1918–1990 ○ 자연사

17년간 우크라이나를 이끈 브레즈네프 시대의 공화국 건설자, 드네프르 클랜의 핵심

«도대체 어떤 바보가 페레스트로이카라는 말을 만들어냈나? 집이 무너지지도 않는데 왜 다시 지어야 하나? 우리는 잘 살고 있다!» —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대한 셰르비츠키의 반응.

드네프로제르진스크·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공업 지구에서 당 간부로 성장하여, 1972년부터 1989년까지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와 18년간 CPSU 정치국원(1971–1989)을 겸했다. 브레즈네프와 드네프르 인맥을 공유하며 17년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진두지휘했고, 공화국 경제 규모를 4배 이상 키웠다. 흐루쇼프의 분권 실험에 반대하여 일시 좌천되었으나 브레즈네프 집권 후 복귀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정보 통제와 키예프 메이데이 행진 강행으로 비판받았으며, 1989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교체된 마지막 구세대 공화국 수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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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화학방호군 장교, 자캅카스 전선 복무, 대위 제대
  • 1946–1952드네프로제르진스크 코크스화학공장·금속공장 당비서 및 당 간부
  • 1952–1954드네프로제르진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55–1957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57–1961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61–1963, 1965–1972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 1972–1989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71–1989CPSU 중앙위 정치국 정위원 (1961–1963, 1965–1971 후보위원)

그리고리 바실리예비치 키순코

Григорий Васильевич Кисунько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우크라이나 1918–1998 ○ 자연사

세계 최초의 작전형 미사일 방어 체계를 설계한 소련 군사과학자

사망 몇 시간 전, 아내에게 "녀석들에게 전화해야겠어. 내가 문제를 풀었는데, 그들이 내게 맡긴 문제 말이야"라고 말했다.

소련의 전파물리학자이자 미사일 방어 체계의 개척자. S-25 베르쿠트와 S-75 대공 미사일 체계 개발에 참여한 후, 1956년부터 세계 최초의 실전형 탄도미사일 방어 체계인 시스템 A의 수석설계자를 맡아 1961년 3월 4일 사상 최초로 비행 중인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모스크바 방어를 위한 A-35 및 A-35M 체계의 총설계자로서 소련의 전략적 방어 우위를 확립했으며, 레닌상과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1975년 무선공업부 지도부와의 갈등 속에 자신이 설계한 체계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해임되었고, 말년에는 은퇴 후 회고록 『비밀 구역』을 집필하며 역사 속에 묻힌 자신의 작업을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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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337독립무선대대, 모스크바 방공군 — 소대장 보좌관·소대장·중대 기술장교
  • 1944–1950부됸니 통신사관학교 — 레이더 이론 교관·부학과장
  • 1950KB-1 — 초고주파 부문장, S-25 베르쿠트 체계 유도 레이더 시험 부기술책임자
  • 1953SKB-30 / KB-1 — 특수설계국장, 대미사일 방어 주제 착수
  • 1956시스템 A 수석설계자 — 세계 최초의 실험적 탄도미사일 방어 체계
  • 1958A-35 미사일 방어 체계 총설계자
  • 1961OKB-30 (후일 OKB 빔펠) — 초대 소장 겸 총설계자
  • 1970중앙과학생산연합 빔펠 — 과학담당 부총국장
  • 1975중앙무선전자시스템연구소 — 과학담당 제1부소장 (ABM 작업에서 배제됨)
  • 1979–1987국방부 제45중앙연구소 — 과학 고문
  • 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이론문제부 — 연구실장

그리고리 표도로비치 그리고렌코

Григорий Фёдорович Григоренко
국가보안 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18–2007 ○ 자연사

SMERSH 라디오 게임에서 KGB 제2총국까지 40년 방첩의 설계자

그리고렌코가 직접 조직하고 수행한 SMERSH 라디오 게임은 181건에 달했다 — '자가드카(수수께끼)', '투만(안개)' 등 암호명으로 압베어와 체펠린을 교란하며 독일군 사령부에 허위 정보를 주입했다.

그리고리 그리고렌코는 소련 방첩 기관의 중추를 40년 넘게 떠받친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SMERSH에서 181건의 라디오 게임을 직접 수행하며 압베어와 체펠린을 상대로 기만 작전을 지휘했고, 이후 MGB와 KGB로 이어지는 방첩 부서에서 경력을 쌓았다. 1970년부터 1983년까지 KGB 제2총국장을 맡아 CIA와 서방 정보기관의 심층 침투 요원들을 연쇄 적발하는 체계를 구축했으며, 1978년부터는 KGB 부의장을 겸임하며 유리 안드로포프의 핵심 측근으로 활동했다. 그의 방첩 시스템은 외국 정보기관의 모스크바 거점을 수년간 마비시켰고,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방첩의 방법론적 토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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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2NKVD 특별부 작전장교, 남서전선 및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전
  • 1943–1946SMERSH 3과 선임작전장교, 181건의 라디오 게임 수행
  • 1954–1956헝가리 주재 KGB 대표부 제1부대표
  • 1962–1969KGB 제1총국 대외방첩국장
  • 1970–1983KGB 제2총국장
  • 1978–1983KGB 부의장 (제2총국장 겸임)
  • 1983–1989소련 일반기계제작부 차관

비탈리 바실리예비치 페도르추크

Виталий Васильевич Федорчук
국가보안 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18–2008 ↓ 전보 1982

안드로포프 뒤의 짧은 KGB 의장

1982년 12월 내무장관으로 부임한 페도르추크는 첫 확대 합동회의를 내무부 청사가 아닌 루뱐카의 KGB 건물에서 소집했다. 한 장성은 훗날 '그는 떠날 생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우크라이나 빈농 가정 출신의 군 방첩 장교로, 할힌골 전투와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실전을 겪은 뒤 SMERSH와 KGB 군 방첩 계통에서 경력을 쌓았다. 1970년부터 12년간 우크라이나 KGB 의장으로 공화국 보안기관을 이끌며 브레즈네프 후기 내내 자리를 지켰고,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이 되자 소련 KGB 의장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7개월 만에 내무장관으로 이동해 약 9만 명의 경찰 간부를 부패 혐의로 해임하는 숙정을 단행했으며,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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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70s우크라이나와 군 방첩 계통에서 장기 보안 경력 축적
  • 1970–1982우크라이나 KGB 의장, 공화국 보안기관을 지휘
  • 1982안드로포프가 서기장이 되자 KGB 의장으로 승진
  • 1982–1986곧 내무장관으로 이동, 안드로포프-체르넨코기의 규율 캠페인에 관여
  • 1986고르바초프 집권 뒤 해임

이반 파블로비치 카자네츠

Иван Павлович Казанец
정부 수반 소련 우크라이나 1918–2013 ○ 자연사

우크라이나 총리에서 소련 철강부 장관으로: 20년간 소련 철강을 지배한 드네프르 출신 기술관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카자네츠 동지. 미국보다 더 많이 제련한다고 자랑하지만, 금속 품질은 어떻습니까? 생산된 톤당 40%만 제품이 되고 나머지는 슬래그와 부스러기로 나갑니다!» — 1972년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브레즈네프의 질책.

드네프르 강 도선사 집안 출신의 우크라이나인 기술관료로, 전기기사로 시작해 쿠즈네츠크 제철소와 예나키예베 제철소에서 현장 경험을 쌓았다. 1953년 흐루쇼프의 발탁으로 35세에 도네츠크 주당위 제1서기가 되었고, 1960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1963–1965년 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을 지냈다. 1965년 코시긴 개혁으로 소련 철강부가 재설립되자 초대 장관에 임명되어 20년간 재임하며 소련을 세계 최대 철강 생산국으로 올려놓았다. 브레즈네프 시기 내내 중앙위원을 지냈고, 1985년 고르바초프 집권 직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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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4쿠즈네츠크 제철소 전기기사·기사·변전소 구역장, 시베리아 야금연구소 졸업
  • 1944–1952예나키예베 제철소 압연공장 교대장·당위 부비서·공장장, 1950년 당조직자
  • 1952–1953예나키예베 시당위 제1서기 → 마케예프카 시당위 제1서기
  • 1953–1960우크라이나 공산당 도네츠크 주당위 제1서기
  • 1960–1963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 1963–1965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 1965–1985소련 철강부 장관
  • 1961–1986CPSU 중앙위원 (1956–1961 후보위원)

보리스 예브도키모비치 셰르비나

Борис Евдокимович Щербина
중공업 · 군수공업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1919–1990 ○ 자연사

시베리아 유전을 일군 체르노빌 사령관

1986년 4월 27일 오전 10시, 프리피야티에서 정부위원회를 소집한 셰르비나는 단 한 마디로 회의를 열었다. '피난을 시작한다.' 사고 32시간 만에 5만 명의 도시 전체가 버스에 올랐다.

소련을 세계 1위 탄화수소 생산국으로 만든 서시베리아 석유·가스 단지의 설계자. 튜멘주 당서기와 석유가스건설장관으로서 타이가와 영구동토를 뚫고 송유관·도시·철도를 건설했으며, 부총리로서 체르노빌 사고(1986)와 아르메니아 지진(1988) 정부대책위원회를 직접 지휘했다. 방사능에 노출된 건강 악화 속에서도 현장을 떠나지 않은 기술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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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소련-핀란드 전쟁 자원입대 (제316스키대대)
  • 1942–1944하리코프주 콤소몰 서기
  • 1951–1961이르쿠츠크주 당서기 → 제2서기
  • 1961–1973튜멘주 당 제1서기
  • 1973–1984소련 석유·가스공업 건설장관
  • 1984–1989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에너지 부문 총괄)
  • 1986체르노빌 사고 정부대책위원장
  • 1988아르메니아 지진 구호위원장

이반 니키토비치 코제두프

Иван Никитович Кожедуб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920–1991 ○ 심장마비

연합군 최고 격추 기록의 소련 전투기 에이스

「단련되지 않은 용기는 빈 총알일 뿐이다」 — 『조국에 대한 충성』에서.

64대를 격추한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 최고의 전투기 에이스로, 330회 출격·120회 공중전을 치르며 단 한 번도 격추되지 않았다. 200~300미터까지 접근해 명중시키는 저격술이 트레이드마크였고, 1945년 2월에는 소련 조종사 최초로 Me-262 제트전투기를 격추했다. 한국전쟁에서는 제324전투항공사단장으로 직접 출격이 금지되었으나, 휘하 조종사들이 216대를 격추하고 27대를 손실하는 탁월한 교환비를 기록했다. 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부사령관(1964~1971)을 거쳐 1985년 항공원수로 진급했으며, 1990년 소련 인민대표대회에서 군대 비방을 규탄하는 '영웅들의 호소문'을 낭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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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붉은군대 입대, 추후예프 군사항공학교 졸업 후 교관
  • 1943–1945제240전투항공연대 조종사 → 중대장 → 제176근위전투항공연대 부연대장. 64기 격추, 세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 1949공군사관학교(모니노) 졸업
  • 1951–1952제324전투항공사단장, 한국전쟁 참전 (암호명 '크릴로프')
  • 1956보로실로프 고등군사아카데미 졸업
  • 1964–1971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제1부사령관
  • 1971–1978공군 전투훈련총국 제1부국장
  • 1985항공원수 진급

보리스 파블로비치 부가예프

Борис Павлович Бугаев
경제 운영 소련 우크라이나 1923–2007 ○ 자연사

브레즈네프의 개인 조종사에서 항공원수가 된 민간항공 수장

1961년 지중해 상공, 납치된 프랑스 전투기가 브레즈네프의 Il-18기에 발포했을 때 조종간을 잡은 부가예프는 급선회로 공격을 회피했다. 착륙 후 브레즈네프는 "네 덕분에 살았다"고 말했다.

브레즈네프의 개인 조종사로 발탁되어 1970년부터 17년간 민간항공부 장관을 지내며 아에로플로트를 제트기 중심의 세계적 항공사로 성장시켰다. 1977년 항공원수로 진급하여 모든 병종을 통틀어 소련 최후의 원수 계급 보유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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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3항공훈련대대 생도, 악튜빈스크 항공학교 교관
  • 1943–1947215항공대 조종사·편대장, 당파운동 중앙참모부 임무 수행
  • 1948–1957브누코보 공항 기장·교관 조종사, 아에로플로트 최초 장거리 노선 개척
  • 1957–1966제235특별항공대대장, 브레즈네프 전용기 조종사
  • 1966–1970민간항공부 차관, 제1차관
  • 1970–1987민간항공부 장관, 아에로플로트 제트화·세계적 확장 주도
  • 1987–1992국방부 감찰총감

이반 모이세예비치 트레티야크

Иван Моисеевич Третьяк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923–2007 ○ 자연사

KAL 007 격추 명령을 내린 소련 방공군 총사령관

1983년 9월 1일, 극동군관구 사령관 트레티야크는 참모본부로부터 소련 영공을 침범한 여객기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부하 부대에 그대로 하달했다.

소련의 육군대장(1976)으로, 독소전쟁에서 21세에 연대장을 지내며 소련영웅 칭호를 받은 전쟁영웅이었다. 전후 벨라루스군관구 사령관(1967~1976)과 극동군관구 사령관(1976~1984)을 거쳐, 1986년 국방차관에 임명되고 이듬해 방공군 총사령관(1987~1991)으로서 소련 영공방어를 총괄했다. 1983년 9월 1일 극동군관구 사령관으로서 소련 영공을 침범한 대한항공 007편 여객기를 격추하라는 본부 명령을 하달하여 269명의 민간인 사망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82)에도 선정될 만큼 전후 소련 군사엘리트의 전형적 궤적을 밟았으나,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해임되며 시대의 종언과 함께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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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독소전쟁 참전: 제29근위소총사단 소대장·중대장·대대장·제93근위소총연대장
  • 1956–1957제26근위소총사단장
  • 1960–1964주독소련군 제3연합군 참모장·제1부사령관
  • 1964–1967자캅카스군관구 제4군 사령관
  • 1967–1976벨라루스군관구 사령관
  • 1976–1984극동군관구 사령관
  • 1984–1986극동방면군 총사령관
  • 1986–1987국방차관 겸 국방부 감찰총국장
  • 1987–1991국방차관 겸 방공군 총사령관

게오르기 마르코비치 코르니옌코

Георгий Маркович Корниенко
외교 소련 우크라이나 1925–2006 ○ 지병으로 자연사

그로미코의 대미정책 실무 책임자, 아프간 침공과 거짓말에 맞섰던 외교관

1979년 가을, 코르니옌코는 부하들에게 아프가니스탄 파병 반대 의견서를 작성하게 했다. 그로미코는 서명을 거부하고 중앙위원회에 올리지 않았다.

게오르기 코르니옌코는 40년 넘게 소련의 대미 외교를 실무에서 이끈 외교관으로,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 아래에서 제1차관(1977–1986)을 지내며 1970~80년대 미소 군축 협상의 핵심 의제를 설계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워싱턴 대사관 참사관으로 냉전의 최전선에 섰으며, 이후 소련 외무부 미국국장으로서 닉슨·카터·레이건 행정부와의 모든 정상회담을 준비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결정에 내부 반대했고, 1983년 KAL 007기 격추 사건 때는 진실 공개가 국제적 고립보다 낫다고 주장했으나 모두 묵살되었다. 냉전 후에는 회고록 『냉전: 한 참여자의 증언』을 남겨 소련 외교정책 결정 과정의 내막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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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소련 외무부 산하 정보위원회에서 외교 경력 시작
  • 1960–1964주미 소련 대사관 참사관, 이후 공사참사관
  • 1965–1975소련 외무부 미국국장
  • 1975–1977소련 외무차관
  • 1977–1986소련 외무제1차관
  • 1981–1989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86–1988CPSU 중앙위 국제부 제1부장

야코프 페트로비치 포그레브냐크

Яков Петрович Погребняк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우크라이나인 1928–2016 ○ 자연사

반알코올 캠페인을 이끌며 리가초프의 마산드라 비노테카 파괴 명령을 폭로한 우크라이나 공산당 서기

나는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잔의 내용물을 테이블 밑에 쏟아버렸다. 옆에 있던 당 서기가 속삭였다. '이봐, 내 바지가 벌써 다 젖었어. 구두 속에도 보드카야!'

도네츠크 공업대학을 졸업한 금속공학자 출신으로, 1957년부터 당에 들어가 크라마토르스크, 이바노프란코프스크, 니콜라예프 주당 제1서기를 거쳐 1971년부터 16년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반알코올 캠페인이 시작되자 우크라이나 내 시행을 감독했으며, 후일 예고르 리가초프가 마산드라 와인 공장의 150년 역사 비노테카를 파괴하라고 요구했고 블라디미르 셰르비츠키의 개입으로 이를 막았다고 증언했다. 1987년 민족주의 정서가 고조되던 리보프로 발령받아 1990년까지 제1서기를 지냈고, 소련 붕괴 후에는 '우크라이나-폴란드 협회' 회장을 맡으며 회고록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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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0크라마토르스크 시당 제2서기
  • 1960–1962크라마토르스크 시당 제1서기
  • 1963–1964폴타바 공업주당 제1서기
  • 1966–1969이바노프란코프스크 주당 제1서기
  • 1969–1971니콜라예프 주당 제1서기
  • 1971–198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통상·반알코올 캠페인)
  • 1987–1990리보프 주당 제1서기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마요레츠

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Майорец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우크라이나인 1929–2016 ○ 자연사

체르노빌 현장에 투입된 마지막 소련 에너지장관

1986년 4월 26일 새벽, 체르노빌 사고 첫 보고를 받은 마요레츠는 니콜라이 리즈코프 총리에게 이를 알린 직후 현장으로 날아갔다. 도착하자마자 정격 출력으로 가동 중인 두 원자로 블록을 즉각 정지·비상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자포리자 변압기 공장의 전기기사로 출발해 공장장까지 오른 산업 관료로, 소련 전기공업과 에너지 부문을 25년간 이끌었다. 1980년 전기공업장관, 1985년 에너지·전화장관을 역임하며 송배전 인프라와 원자력 발전을 총괄했다.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전 사고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인물로, 리즈코프 총리에게 보고한 직후 현장으로 떠나 가동 중이던 두 원자로를 비상 정지시켰다. 셰르비나가 이끄는 정부위원회 위원으로서 사고 수습 1단계에 참여했으며, 이후 소련 원자력 안전 체계 재편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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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62자포로지에 변압기 공장 전기기사 → 선임 작업반장 → 책임자
  • 1962–1965자포로지에 변압기 공장장
  • 1965–1974소련 전기공업부 차관
  • 1974–1980소련 전기공업부 제1차관
  • 1980–1985소련 전기공업장관
  • 1985–1989소련 에너지·전화장관
  • 1986체르노빌 사고 정부위원회 위원 (셰르비나 위원장)

파벨 로마노비치 포포비치

Павел Романович Попович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우크라이나 1930–2009 ○ 뇌졸중

보스토크 4호로 첫 동시 유인 비행에 나선 4번째 우주인

비행 중 코롤료프의 요청으로 우크라이나 민요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네」를 불러, 인류가 우주에서 노래한 첫 순간을 만들었다.

소련의 4번째 우주인이자 최초의 우크라이나 출신 우주인으로, 보스토크 1호의 교신 담당관을 맡은 뒤 1962년 8월 보스토크 4호 조종사로 안드리얀 니콜라예프와 세계 최초의 동시 유인 궤도 비행을 수행했다. 두 우주선은 6.5 km까지 접근했고, 포포비치는 궤도상에서 우크라이나 민요를 불러 우주 최초의 음악 공연을 남겼다. 1974년 소유스 14호 사령관으로서 첫 군사 유인 정거장 알마즈에 도킹하는 두 번째 우주 비행을 마치고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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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마그니토고르스크 공업전문학교·비행클럽 졸업
  • 1954군사 항공학교 졸업, 공군 복무
  • 1960제1기 우주비행사단 선발
  • 1961.4보스토크 1호 교신 담당관 (가가린 비행)
  • 1962.8.12–15보스토크 4호: 첫 동시 유인 비행, 니콜라예프와 6.5 km 접근
  • 1966–68소련 달 착륙 계획 훈련
  • 1974.7.3–19소유스 14호 사령관: 살류트 3호(알마즈) 도킹
  • 1978–89가가린 우주비행사 훈련센터 부센터장

빅토르 세르게예비치 마카렌코

Виктор Сергеевич Макаренко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우크라이나 1931–2007 ○ 자연사

크림의 당 관료이자 마산드라를 지킨 실무 정치가

반알코올 운동 때 셰르비츠키와 함께 마산드라의 와이너리와 에노테카를 지키는 데 개입했다.

빅토르 마카렌코는 공장 노동자에서 출발해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지역 당 지도자로 올라선 당 관료였다. 세바스토폴과 크림에서 산업·농업·관광을 조정하며, 중앙의 지시와 지역의 생산·문화 유산 사이의 긴장을 다뤘다. 1980년대 반알코올 운동 때 그는 블라디미르 셰르비츠키와 함께 마산드라 와이너리와 그 에노테카를 보존하는 쪽에 섰다. 그의 회고는 후기 소비에트 지역 통치가 중앙 정책을 그대로 집행하는 일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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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크리보이로크 지역 주택관리국 노동자
  • 1955드니프로페트롭스크 금속공업대학 졸업, 크리보이로크 제철소 근무
  • 1967–1969크리보이로크 시 당위원회 제2서기
  • 1969–1972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감찰관
  • 1972–1977세바스토폴 시 당위원회 제1서기
  • 1977–1987우크라이나 공산당 크림주위원회 제1서기
  • 1982–1989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87–2007연금 생활, 회고록 집필

블라디미르 안토노비치 이바시코프

Владимир Антонович Ивашко
당 서기국 · 조직인사 러시아 우크라이나 1932–1994 ↓ 당 해체 1991

해체 직전 공산당의 마지막 부서기장

1991년 8월 21일 아침, 쿠데타가 무너지는 것이 확실해지자 이바시코는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야나예프에게 전화해 "고르바초프를 만나러 갈 비행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거절당한 그는 결국 자신이 지지하지 않은 쿠데타 주역들—야조프, 루키야노프 등—과 같은 비행기에 올라 포로스로 향해야 했다.

하르키우 광산대학 출신의 경제학자로, 우크라이나 당 기구에서 20년간 경력을 쌓은 뒤 1989년 셰르비츠키의 후임으로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다. 1990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신설된 부서기장직에 선출되어 모스크바로 옮겼다.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고르바초프가 총서기직을 사임하자 당 역사상 마지막 지도자가 되었으나, 불과 닷새 만에 당 활동이 정지되면서 소비에트 공산당은 그와 함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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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90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
  • 1990–91공산당 부서기장
  • 1991.8고르바초프 사임 뒤 며칠간 서기장 대행

비톨트 파블로비치 포킨

Вітольд Павлович Фокін
외국 정치가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인 1932–2025 ○ 자연사

소련 경제관료에서 독립 우크라이나의 첫 총리로

비톨트 포킨은 광산 기술자 출신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경제관료로, 계획경제의 운영과 국가 전환을 함께 경험했다. 그는 독립 직전과 직후 우크라이나 정부를 이끌며 경제 위기와 연방 해체의 압력을 조정해야 했다. 1991년 12월 레오니드 크라프추크와 함께 우크라이나 대표로 벨로베시 협정에 서명해 소련 이후 질서의 출범에 참여했다. 말년에는 돈바스 협상에서 논쟁적인 입장을 보여 공적 역할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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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63루한스크 지역 탄광 기술자·관리자
  • 1963–1971돈바스 무연탄 산업 관리자
  • 1971–1987우크라이나 국가계획위원회 부서장·부위원장
  • 1987–1990우크라이나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 1990–1991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91–1992우크라이나 초대 총리
  • 1991벨로베시 협정 우크라이나 서명자
  • 2020우크라이나 삼자접촉그룹 대표단 제1부대표

레오니트 마카로비치 크랍추크

Леонід Макарович Кравчук
국가원수 소련 우크라이나 1934–2022 ○ 뮌헨에서 별세

공산당 선전가에서 시작해 소련을 서명으로 끝낸 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

벨로베즈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은 멀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1958년 입당해 30여 년간 우크라이나 공산당 선전·이념 부서를 오르내린 당료였으나, 1990년 최고소비에트 의장에 오르며 '민족공산주의'로 방향을 틀었다.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는 연방이 아닌 연합(конфедерация)을 고수하며 신연방조약 서명을 9월로 미루었고,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후 8월 24일 우크라이나 독립선언을 주재했다. 그해 12월 1일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일주일 뒤 옐친·슈시케비치와 벨로베즈 협정에 서명하여 소련의 종말을 확정지었다. 대통령 재임 중 핵무기 포기와 경제 침체로 비판받았으나, 평화로운 정권 교체로 퇴진해 의원으로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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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70정치경제학 교사에서 체르니우치 주당 선전선동 부장까지
  • 1970–8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 부서에서 승진
  • 1980–8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 부장
  • 1988–89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이념 부장
  • 1989–90.6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정치국원, 제2서기
  • 1990.7–1991.8우크라이나 최고소비에트 의장; 독립선언 주재
  • 1991.12–1994.7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 벨로베즈 협정 서명, 쿠치마에 패배
  • 1994–2006인민대의원, SDPU(o) 원내대표

발렌티나 세메니브나 셰우첸코

Валентина Семенівна Шевченко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인 1935–2020 ○ 사망

체르노빌 참사 당시 모스크바 반대를 무릅쓰고 어린이 52만 명 대피를 관철한 우크라이나 최고회의 의장

'불은 껐고, 다 정상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는 결혼식, 하나는 텃밭, 하나는 프리피야티 강에서 낚시질입니다.' 내무차관의 4월 26일 아침 보고를 이렇게 전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으로서, 모스크바의 지시와 달리 키이우와 오염 지역에서 어린이 52만 6천 명을 닷새 만에 대피시킨 인물이다. 크리비리흐 광부의 딸로 태어나 콤소몰과 교육부 차관을 거쳐 1985년 공화국 국가원수 자리에 올랐으며, 재임 기간 내내 중앙의 정보 통제와 싸우며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1989년 우크라이나 인민운동(Rukh) 금지 결의안에 서명을 거부했고, 은퇴 후 아동·여성 복지 재단을 이끌며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긍정적 회고와 독립 우크라이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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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7크리비리흐에서 피오네르 지도자, 지리 교사, 학교 콤소몰 서기
  • 1957–1962크리비리흐 시 콤소몰 서기, 이후 제르진스키 구 당위원회 서기
  • 1962–1969우크라이나 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 겸 부서장
  • 1969–1972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교육부 차관
  • 1975–1985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
  • 1985–1990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국가원수)
  • 1985–1989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레벤코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Ревенко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우크라이나 1936–2014 ○ 자연사

고르바초프 대통령 집권기의 제도적 중추, 총무부장에서 대통령장까지

1990년 고르바초프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날, 레벤코를 불러 "소비에트 백만장자를 보고 싶나?"라고 한 뒤 상금 전액을 아동 종양센터와 체르노빌 지역에 배분했다. 다 쓴 뒤 고르바초프가 말했다: "이제 백만장자는 없네."

우크라이나 출신 소련 당·국가 기구 관료로, 고르바초프 시기 중앙당 총무부장과 소련 대통령장을 지내며 개혁기 제도 운영의 핵심 축을 형성했다. 오데사와 키예프에서 콤소몰과 당 기구를 거쳐 1984년 모스크바로 발탁되었고, 1985년 총무부장이 되어 중앙위 문서 흐름과 서기장실을 총괄하는 최측근 참모가 되었다. 1990년 대통령제 출범 후 대통령자문위원회 위원과 대통령장을 역임하며 소련 말기 행정권의 제도적 전환을 실무적으로 떠받쳤다. 소련 해체 후 고르바초프 재단 부총재로 일하다 키예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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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1오데사 냉동기계공장 기술자
  • 1961–1972오데사 콤소몰 지도부, 우크라이나 콤소몰 중앙위 서기
  • 1972–198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감사원, 키예프 주당위 서기·제2서기
  • 1980–1984우크라이나 SSR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 우크라이나 공산당 감사위원회 의장
  • 1984–1985CPSU 중앙위 감사원, 조직당사업부 부부장
  • 1985–1991CPSU 중앙위 총무부장 — 고르바초프의 사실상 비서실장
  • 1990–1991소련 대통령자문위원회 위원
  • 1991–1992소련 대통령장

비탈리 알렉세예비치 코로티치

Виталий Алексеевич Коротич
작가·예술가 소련 우크라이나 1936–2025 ○ 자연사

『오고뇨크』를 글라스노스트의 충격파로 바꾸어, 70년간 억압된 진실을 쏟아부은 편집자

「70년 동안 우리는 아버지를 배신한 아들이, 교회를 불태운 자가 영웅이라고 배워왔다. 사람들은 철저한 거짓말 속에서 살아왔다」

키이우 출신 시인이자 의사로, 1985년 반미 소설로 국가상을 받을 만큼 체제 순응적 작가였으나, 1986년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의 추천으로 『오고뇨크』 편집장에 임명되자 잡지를 글라스노스트의 선봉으로 돌변시켰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실상, 스탈린 시대 대숙청, 노멘클라투라의 특권을 최초로 폭로하며 구독 부수를 26만에서 460만으로 끌어올렸고, 파스테르나크와 나보코프의 작품을 최초로 게재했다. 1989년 인민대표로 당선되어 지역간그룹에 가담했고, 1991년 쿠데타 당시 미국 체류 중 귀국을 거부해 편집장직에서 해임된 후 보스턴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말년에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공개 지지해 고국에서 배척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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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6의사, 키이우
  • 1966–1967『라노크』 편집장
  • 1967–1969우크라이나작가동맹 서기
  • 1978–1986『프세스비트』 편집장
  • 1986–1991『오고뇨크』 편집장
  • 1989–1991소련 인민대표
  • 1992–1998보스턴대학 교수
  • 1999–2014『불바르 고르도나』 편집위원장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골루시코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Голушко
국가보안 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37–2025 ○ 자연사

소련·우크라이나·러시아 3개국 보안기관을 두루 거친 KGB 우크라이나 공화국 KGB의 마지막 의장

그는 회고록 제목처럼 소련·우크라이나·러시아 3개국 보안기관에서 근무했다. 1994년 10월 사태 관련자 사면을 막으라는 옐친의 요구를 거부하고 “러시아 장교로서 국민에게 한 맹세를 지켰다”며 사임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경력을 쌓아 우크라이나 공화국 KGB의 마지막 의장(1987–1991)을 지낸 인물이다. KGB 제5총국(이념적 방첩 및 반체제 탄압)에서 오래 근무하며 민족주의 감시와 반소 활동 단속을 전담하다가, 페레스트로이카기 우크라이나 공화국 보안기관 수장으로 발탁되었다. 소련 해체 후에는 잠시 독립 우크라이나의 국가안보국(SBU)을 이끌었고, 이후 러시아로 옮겨 보안장관과 연방방첩국(FSK) 국장을 역임하며 3개국 보안기관에서 근무한 특이한 이력을 남겼다. 러시아 보안장관 시절 1993년 10월 사태 수감자 사면 문제로 옐친 대통령과 갈등하다 사임하였으며, 회고록 『3개국의 특별기관에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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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3케메로보 검찰청 수사관
  • 1963–1974케메로보주 KGB, 작전요원 → 제5과 부과장
  • 1974–1983KGB 제5총국 제2과(민족주의 담당) 과장
  • 1983–1984KGB 제5총국 부총국장
  • 1984–1987KGB 사무국 제1부국장 겸 당직근무국장
  • 1987–1991우크라이나 공화국 KGB 의장, KGB Collegium 위원
  • 1991우크라이나 국가안보국(SNBU) 의장 대행
  • 1992–1993러시아 보안부 제1차관
  • 1993러시아 보안장관
  • 1993–1994러시아 연방방첩국(FSK) 국장

콘스탄틴 이바노비치 코베츠

Константин Иванович Кобец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939–2012 ○ 부패 혐의 유죄, 사망

8월 쿠데타 당시 옐친 편에 선 최고위 장성, 백악관 방어를 지휘했다

"군대는 국민에게 총을 겨누지 않을 것입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기자회견)

소련 통신병대 총책임자이자 참모총장 차장으로 체르노빌 사고 수습에도 참가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맞서 보리스 옐친 편에 선 최고위 현역 장성으로, 모스크바 백악관 방어본부를 조직하고 8월 20일 러시아 연방 국방장관에 임명되었으며 24일 대장으로 진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93년 10월 헌정위기 때는 자신이 방어했던 같은 건물을 공격하는 쪽에 섰으며, 1997년 부패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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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6체르노빌 원전 사고 수습 참가
  • 1987–1991소련 국방부 통신병대 총책임자 겸 참모총장 차장
  • 1990RSFSR 인민대표로 선출
  • 1991.01RSFSR 국가방위안보위원회 위원장
  • 1991.08.20RSFSR 국방장관 임명, 8월 24일 대장 진급
  • 1993–1997러시아 연방 국방차관
  • 1997부패 혐의 체포, 유죄 판결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카잔니크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Казанник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우크라이나 1941–2019 ○ 지병으로 사망

옐친에게 의석을 양보한 날 선 양심의 법학자

훗날 카잔니크는 그 결정을 이렇게 돌아봤다: "모스크바에서 옐친에게 투표한 사람은 550만 명, 나에게는 170만 명이었다. 옐친이 최고회의 첫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카자흐스탄의 건설 노동자와 소련 공병대 복무를 거쳐 이르쿠츠크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법학자로, 1975년부터 옴스크대학에서 환경법과 국가법을 가르쳤다. 1989년 소련 인민대의원으로 당선되었고, 5월 29일 제1차 대회에서 옐친이 최고회의 의원 선출에 실패하자 자신의 당선 자리를 옐친에게 양보해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다. 1993년 옐친에 의해 러시아 검찰총장에 임명되었으나, 1994년 2월 국가두마의 사면 결의를 헌법에 따라 집행했다는 이유로 대통령 측의 압력을 받고 사임하며 원칙을 지켰다. 이후 옴스크주 부지사(1996–2003)를 지내고 모교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힘쓰다 201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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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카자흐 SSR 테미르타우에서 목수로 노동
  • 1960–63소련군 공병대 복무
  • 1963–75이르쿠츠크대학 법학부 졸업, 대학원, 조교, 전임강사
  • 1975–91옴스크대학 부교수(환경법·국가법)
  • 1989–91소련 인민대의원; 지역간대의원그룹 회원
  • 1993–94러시아 검찰총장
  • 1996–2003옴스크주 부지사
  • 2003–19옴스크대학 교수; 옴스크법학연구소 제1부소장(2003–07)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구벤코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Губенко
문화 · 문학예술 통제 소련 우크라이나 1941–2020 ○ 자연사

소련의 마지막 문화장관

히틀러 역을 맡은 졸업 공연에서, 구벤코는 부모를 죽인 자를 향한 모든 증오를 배역에 쏟아부었다. 공연을 본 류비모프는 곧바로 그를 타간카 극장으로 영입했다.

전쟁 고아에서 인민예술가로 성장한 배우·영화감독. 루나차르스키 이래 처음으로 현역 예술인이 소련 문화장관(1989–1991)에 오른 인물이다. 소련 붕괴 후에는 좌파 정치인으로 전향하여 국가두마 문화위원장과 모스크바 시의회 부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문화유산 수호에 앞장섰다. 타간카 극장 분열 후에는 「타간카 배우 동지회」를 창설해 2020년까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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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1991문화장관

발레리 일리치 호뎀추크

Валерий Ильич Ходемчук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인 1951–1986 ✕ 폭발로 즉사, 시신 미수습

폭발 순간 펌프실에 있었고, 시신도 수습되지 못한 체르노빌의 첫 번째 희생자

폭발 직전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 "22번 펌프 하부 급수를 재충전해야 해… 좋아, 잠깐만…"이라고 말했다. 그게 그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키이우주 크라피브냐에서 태어나 1978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 입사해 주순환펌프(GCN) 운전원으로 일했다. 1986년 4월 26일, 4호기 안전시험 중 폭발이 일어났을 때 그는 북쪽 GCN 펌프실에 있었고, 건물 잔해에 매몰되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시신은 지금도 석관 내부 잔해 속에 남아 있으며, 3호기와 4호기 사이 격벽에는 그의 기념 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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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입사, 보일러 기사·선임 기사(열·지하통신 작업장)
  • 19784호기 주순환펌프(GCN) 운전원, 이후 제7그룹 수석 운전원
  • 1984노동영예훈장 3등급 수훈
  • 1986.04.264호기 안전시험 중 폭발, 북쪽 GCN 펌프실에서 순직
  • 1986.12명예휘장훈장 추서
  • 2008우크라이나 용기훈장 3등급 추서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샤셰노크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Шашенок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우크라이나 1951–1986 ✕ 사고 당일 사망

원전 시운전과 사고 대응을 맡은 기술자

동료들이 무너진 계측실에서 그를 끌어냈지만, 그는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오전 6시 프리피야티 병원에서 숨졌다.

블라디미르 샤셰노크는 원자력발전소의 계측·자동화 설비를 조정하고 시험하던 기술자였다. 체르노빌 4호기 시험에 참여하던 중 폭발로 척추와 갈비뼈가 부러지고 중화상과 방사선 화상을 입었으며, 동료들에게 구조되어 프리피야티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는 사고 당일 숨진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발전소의 기술 노동이 재난의 최전선에 놓였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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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코노토프 산업기술학교 졸업
  • 1970–1980산업·원자력 설비 분야 기술 업무
  • 1980–1984체르노빌 원전 계측·자동화 조정 및 시험 기술자
  • 1984–1986스몰렌스크아톰에네르고날라드카 소속 조정·시험 기술자
  • 1986체르노빌 4호기 시험 지원 중 사고로 사망

블라디미르 파블로비치 프라비크

Володимир Павлович Правик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우크라이나인 1962–1986 ✕ 급성 방사선 증후군

방사능 위험을 통보받지 못한 채 체르노빌 3호기 지붕에 오른 첫 소방대장

'모든 게 괜찮아졌어. 우리 백 살까지 살 거야'... 방사능이 몸을 파괴하는 중에도 모스크바 병상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

블라디미르 프라비크는 체르노빌 원전 소방대(VПЧ-2) 제3교대를 지휘한 소련 내무부 소방 중위였다. 1986년 4월 26일 4호기 폭발 2분 만에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고, 이윽고 대원 넷과 함께 3호기 지붕에 올라 가동 중인 원자로로의 연소 확대를 저지했다. 방사능 위험을 통보받지 못한 채 시간당 6,000뢴트겐 이상의 방사선장에서 작업했으며, 체르노빌 희생자 중 가장 높은 1,520REM(치사량의 약 3배)에 피폭되어 1986년 5월 11일 모스크바에서 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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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9–1982체르카시 소방기술학교 졸업
  • 1982소련 내무부 소방 중위 임관
  • 1982–1986체르노빌 원전 제2군사화소방대(VПЧ-2) 제3교대장
  • 1986.4.26체르노빌 참사 첫 대응, 3호기 지붕 화재 진압
  • 1986.5.11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모스크바에서 사망

그리고리 페트로비치 하르첸코

Григорий Петрович Харченко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우크라이나인 1936– ○ 소련 해체 후 모스크바 정착

숨가이트의 참상을 목격한 조직당사업부 부장, "우리는 하루 늦었다"

고르바초프는 우리가 세 시간 늦었다고 말하지만, 전혀 아니다. 우리는 하루 늦었다! 하루 종일 군대 파견 결정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소련 철도 기술자에서 당 간부로 성장하여 고르바초프 시기 중앙위 조직당사업부 부장(1987~1988)을 지냈다. 1988년 2월 28일 밤 KGB 부의장 필리프 봅코프와 함께 숨가이트에 도착, 사흘간의 포그롬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중앙의 대응이 '세 시간이 아니라 하루 늦었다'고 증언했다. 이후 자포리자 주당 제1서기(1988~1990)와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정치국원(1990~1991)을 지냈으며, 소련 해체 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상품생산자연합 부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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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모스크바철도공학원 졸업, 자포리자 전기기관차수리공장 근무
  • 1960–1967콤소몰 서기 → 자포리자 주 콤소몰 제1서기
  • 1967–1974레닌 구 당 제1서기 → 자포리자 시집행위 의장
  • 1974–1986자포리자 주당 산업담당 서기 → 제2서기
  • 1987–1988중앙위 조직당사업부 부장
  • 1988.02볼스키 조에 합류, 숨가이트 파견
  • 1988–1990자포리자 주당 제1서기
  • 1990–1991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정치국원

바실 마로치코

Василь Марочко
연구자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인 1956– ○ 활동 중

홀로도모르의 제도와 기억을 추적한 역사학자

바실 마로치코는 1920~1930년대 우크라이나 농촌과 홀로도모르를 연구해 온 우크라이나 역사학자다. 그의 연구는 기근을 추상적 재난이 아니라 곡물 징발과 농촌 통제를 결합한 국가 정책의 결과로 분석한다. 그는 흑색명부가 우크라이나 SSR 405개 구역 중 252개를 포괄했다는 계산을 제시하며, 식량 박탈과 행정적 격리가 농민 사회를 어떻게 압박했는지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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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1–1995우크라이나 역사연구소 대학원생·연구원
  • 1985「우크라이나 집단농촌의 소비에트 생활양식 형성」으로 역사학 박사 학위 취득
  • 1996「우크라이나 농민 협동조합」으로 역사학 박사 논문 방어
  • 1996우크라이나 홀로도모르 연구자협회 회장
  • 2008–2015우크라이나 홀로도모르 연구자협회 회장
  • 2013–우크라이나 역사 전공 교수
  • 2022홀로도모르 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립 홀로도모르-제노사이드 박물관

세르히 미콜라요비치 플로히

Сергій Миколайович Плохій
연구자 미국 우크라이나 1957–

체르노빌이 소련 붕괴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주장한 하버드대 역사학자

체르노빌 이야기 없이는, 소련의 붕괴는 심각하게 불완전할 것이다.

하버드대학교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석좌교수이자 우크라이나 연구소 소장을 지낸 역사학자로, 동유럽과 냉전의 지성사·국제사를 연구해 왔다. 2018년 『체르노빌: 비극의 역사』로 베일리 기퍼드상을 수상했으며, 이 책에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글라스노스트를 촉발하고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의 기반을 형성해 소련 붕괴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제국』, 『유럽의 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통해 소련 해체와 동유럽 민족 정체성의 역사적 기원을 재해석하며 현대 동슬라브 역사서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소리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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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드니프로페트롭스크 대학교 역사·사회과학 학사
  • 1982민족우호대학교 대학원 수료
  • 1983–1991드니프로페트롭스크 대학교 교수
  • 1990키예프 대학교 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 1996–2007앨버타 대학교 캐나다 우크라이나 연구소 교수
  • 2007–현재하버드대학교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석좌교수
  • 2013–2025하버드 우크라이나 연구소 소장
  • 2018『체르노빌: 비극의 역사』로 베일리 기퍼드상 수상

헤나디 흐리호리요비치 예피멘코

Геннадій Григорович Єфіменко
연구자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인 1971– ○ 활동 중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국가와 사회를 추적한 역사가

헤나디 예피멘코는 20세기 전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정치·사회사를 연구한 우크라이나 역사가다. 그는 홀로도모르 이후 농촌 재정착을 두 차례 파동으로 나누어 분석하고, 국가가 곡물 생산 기반을 회복하려 경제적으로 추진한 정책과 이주민의 대규모 귀환을 함께 밝혔다. 그의 연구는 인구 이동을 민족 구성의 단순한 변화로 과장하지 않고, 기근 뒤 농촌의 노동력과 국가 통치가 맞물린 문제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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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1994루한스크 국립 교육기관 역사학부에서 수학
  • 1993–1997마르키우카 중등학교 역사 교사
  • 1997–2000우크라이나 역사연구소 대학원
  • 2001「1932~1938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연방공산당의 민족·문화 정책」으로 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 2000–현재우크라이나 국립과학원 역사연구소 20~30년대 우크라이나사 부문 연구원
  • 2013「기근 이후 시기 이주와 추방」에서 1933~1934년 재정착의 지역별 자료를 체계화
  • 2014–현재역사 대중화 프로젝트 ‘리크베즈’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