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인물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나폴레옹 3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오딜롱 바로, 니콜라 샹가르니에, 루이외젠 카베냐크, 알렉상드르 오귀스트 르드뤼롤랭, 아돌프 티에르, 알프레드 드 팔루, 샤를 드 모르니, 아르망자크 르루아 드 생타르노, 알퐁스 드 라마르틴, 아르망 마라스트, 루이 블랑, 마르크 코시디에르,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프랑수아 기조, 알렉시 드 토크빌, 루이 필리프 1세, 빅토르 위고, 샤를 우디노, 조르주 당통,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 카미유 데물랭, 요제프 바이데마이어, 아돌프 르플로, 쥘 드 폴리냐크, 샤를 10세, 루이 18세, 펠릭스 피아, 피에르앙투안 베리에, 앙리 다르투아, 루이마티외 몰레, 앙드레 뒤팽, 빅토르 드 브로이, 샤를 드 몽탈랑베르, 레옹 포셰, 샤를 드 레뮈자, 탕기 뒤샤텔, 나르시스아실 드 살방디, 프랑수아 도를레앙, 필리프 도를레앙, 엘렌 드 메클랑부르슈베린, 에밀 드 지라르댕, 델핀 드 지라르댕, 루이 베롱, 아돌프 그라니에 드 카사냐크, 아실 풀드, 쥘 바로슈, 외젠 루에르, 빅토르 드 페르시니, 샤를마뉴에밀 드 모파, 피에르 카를리에, 알퐁스 도풀, 장에르네스트 뒤코 드 라 이트, 베르나르 피에르 마냥, 루이 쥐쇼 드 라모리시에르, 마리 알퐁스 베도, 장바티스트 샤라스, 장디디에 바즈, 폴 드 플로트, 프랑수아 비달, 외젠 쉬, 포스탱 술루크, 장샤를레오나르 드 시스몽디, 장바티스트 세, 빅토르 쿠쟁, 피에르폴 루아예콜라르, 뱅자맹 콩스탕, 장피에르 라토, 올리버 크롬웰, 존 로크,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마르틴 루터, 피에르 다이, 니콜라 조제프 크레통, 르네 드 토리니, 아실 바라게 딜리에, 오귀스트 르뇨 드 생장당젤리, 막시밀리앵 뇌마예르, 프랑수아 모갱, 파스칼 뒤프라, 조제프앙리 비에라몰리나, 클로드마리위스 바이스, 조제프 드 빌렐 용어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보나파르티즘, 1851년 12월 2일 쿠데타, 프랑스 제2공화국, 질서당 (1848–1851), 산악파 (1848–1851), 12월 10일회, 6월 봉기 (1848), 국립 작업장 (1848), 1848년 프랑스 임시정부, 프랑스 국민방위군 (1789–1872), 프랑스 제2제정, 방돔 원주, 노동할 권리, 자코뱅파, 정통왕조파 (프랑스), 오를레앙파, 룸펜프롤레타리아트, 분할지 농민, 의회 백치증, 나폴레옹적 관념, 카이사르주의, 제헌국민의회 (1848–1849), 입법국민의회 (1849–1851), 기동대 (프랑스, 1848–1850), 1848년 프랑스 헌법, 나폴레옹 법전, 1850년 5월 31일 선거법, 팔루법 (1850), 1849년 6월 13일 시위 (파리), 성주들 (질서당), 재무관 법안 (1851), 프랑스의 로마 원정 (1849), 1851년 프랑스 국민투표, 1851년 12월 쿠데타 반대 봉기, 왕당파 융합 (1850–1851), 부르주 고등법원 재판 (1849), 1850년 3월 10일 보궐선거, 금괴 복권 (1850–1853) 사건프랑스 1848년 혁명과 제2공화국, 1848년 혁명, 제2제정과 노동운동의 재기 학습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 1장 비극과 소극, 2장 두 머리의 헌법, 3장 하강선, 4장 질서당이 무기를 내려놓다, 5장 12월 10일회와 의회 백치증, 6장 의회 공화국의 끝, 7장 분할지 농민과 국가 기구

제2판 서문 (카를 마르크스, 1869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내 벗 요제프 바이데마이어[1]는 1852년 1월 1일부터 뉴욕에서 정치 주간지를 낼 생각이었다. 그는 내게 그 잡지에 쿠데타의 역사를 써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2월 중순까지 매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 보냈다. 그사이 바이데마이어의 원래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 대신 그는 1852년 봄에 월간지 《혁명》을 펴냈는데, 그 첫 호가 내 『브뤼메르 18일』로 채워졌다. 그 가운데 몇백 부가 그 무렵 독일로 건너갔지만 정식 서점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몹시 급진적인 척하는 어느 독일 서적상에게 판매를 맡아 달라고 했더니, 그는 그런 “시대에 맞지 않는 무리한 요구”에 참으로 도덕적인 경악을 드러내며 답했다.

이런 사정에서 알 수 있듯, 이 글은 사건들의 직접적인 압력 아래 생겨났고, 그 역사적 자료는 (1852년) 2월을 넘어가지 않는다. 이번에 다시 펴내는 것은 한편으로는 서적 시장의 수요 때문이고, 한편으로는 독일에 있는 벗들의 재촉 때문이다.

내 글과 거의 같은 무렵에 같은 대상을 다룬 글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둘뿐이다. 빅토르 위고의 『꼬마 나폴레옹』과 프루동의 『쿠데타』다.

빅토르 위고는 쿠데타의 책임 발행인을 향한 신랄하고 재치 있는 독설에 그친다. 그에게 사건 자체는 맑은 하늘에 날벼락처럼 보인다. 그는 거기서 한 개인의 폭력 행위만을 본다. 그는 이 개인에게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만한 개인적 주도권을 돌린다. 그러면서 그 때문에 그를 작게가 아니라 크게 만든다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프루동은 프루동대로 쿠데타를 앞선 역사 발전의 결과로 그려 보이려 한다. 그러나 쿠데타에 대한 그의 역사적 구성은 어느새 쿠데타 주인공을 위한 역사적 변론으로 바뀐다. 그렇게 그는 이른바 객관적 역사가들의 오류에 빠진다. 나는 이와 달리, 프랑스의 계급투쟁이 어떻게 평범하고 우스꽝스러운 인물이 영웅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상황과 조건을 만들어 냈는지를 보여 준다.

이 글을 고쳐 썼다면 글 고유의 색채를 빼앗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식을 바로잡고, 이제는 알아들을 수 없게 된 암시를 지우는 데 그쳤다.

내 글의 마지막 문장, “그러나 황제의 망토가 마침내 루이 보나파르트의 어깨에 걸리면, 나폴레옹의 청동상은 방돔 원주 꼭대기에서 굴러떨어질 것이다”는 이미 실현되었다.

샤라스 대령[2]은 1815년 전역에 관한 저작에서 나폴레옹 숭배에 대한 공격을 열었다. 그 뒤로, 특히 최근 몇 해 동안 프랑스 문필계는 역사 연구, 비평, 풍자, 익살이라는 무기로 나폴레옹 전설의 숨통을 끊었다. 전래의 민중 신앙과 이렇게 격렬하게 갈라선 일, 이 엄청난 정신 혁명은 프랑스 밖에서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고, 이해받은 일은 더더욱 드물었다.

끝으로 나는 내 글이, 지금 특히 독일에서 유행하는 이른바 카이사르주의라는 강단의 상투어를 걷어 내는 데 이바지하기를 바란다. 이런 피상적인 역사적 유비에서 사람들은 요점을 잊는다. 고대 로마에서 계급투쟁은 특권적 소수 안에서만, 곧 자유로운 부자와 자유로운 빈민 사이에서만 벌어졌다. 인구 가운데 생산을 떠맡은 거대한 대중인 노예는 그 투사들의 한낱 수동적인 받침대였을 뿐이다. 사람들은 시스몽디의 의미심장한 말도 잊는다. 로마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에 얹혀살았지만, 근대 사회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얹혀산다는 말이다. 고대와 근대 계급투쟁의 물질적·경제적 조건이 이처럼 완전히 다르니, 거기서 태어난 정치적 소산들끼리도 캔터베리 대주교와 대제사장 사무엘 사이만큼의 공통점밖에 가질 수 없다.

런던, 1869년 6월 23일
카를 마르크스

제3판 서문 (프리드리히 엥겔스, 1885년)

『브뤼메르 18일』이 처음 나온 지 서른세 해 만에 새 판이 필요해졌다는 것은, 이 작은 책이 오늘날에도 그 가치를 조금도 잃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실제로 이것은 천재적인 작품이었다. 그 사건은 정치계 전체를 맑은 하늘의 벼락처럼 놀라게 했다. 어떤 이들은 도덕적 분노의 고함을 지르며 그것을 규탄했고, 어떤 이들은 혁명에서 건져 낸 구원이자 혁명의 탈선에 내린 벌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모두가 그저 놀라 바라보기만 했을 뿐,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 바로 그 사건 직후 마르크스는 짧고 경구 같은 서술을 들고 나섰다. 그 서술은 2월의 나날 이래 프랑스 역사의 전 과정을 그 내적 연관 속에서 펼쳐 보였고, 12월 2일의 기적을 이 연관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로 풀어냈다. 그러면서도 쿠데타의 주인공은 그가 받아 마땅한 경멸로 대하는 것 말고는 달리 대접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 그림은 어찌나 대가의 솜씨로 그려졌는지, 그사이 새로 드러난 사실들은 하나같이 그것이 현실을 얼마나 충실하게 비추는지 보여 주는 새 증거가 되었을 뿐이다. 살아 있는 당대 역사에 대한 이 탁월한 이해, 사건이 벌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사건을 꿰뚫어 보는 이 명료한 통찰은 실로 유례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프랑스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의 정확한 지식도 필요했다. 프랑스는 역사적 계급투쟁이 다른 어느 곳보다도 매번 결판이 날 때까지 치러진 나라다. 그래서 투쟁이 그 안에서 움직이고 그 결과가 집약되는 정치 형태들도 차례로 바뀌면서 가장 날카로운 윤곽을 띠었다. 프랑스는 중세에는 봉건제의 중심이었고, 르네상스 이래로는 통일된 신분제 군주정의 모범국이었다. 그런 프랑스가 대혁명에서 봉건제를 부수고 부르주아지의 순수한 지배를 세웠다. 다른 어떤 유럽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고전적인 형태였다. 떠오르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 부르주아지에 맞서 벌이는 투쟁도 여기서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첨예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프랑스의 지난 역사를 각별히 즐겨 연구했을 뿐 아니라, 진행 중인 역사도 세세한 데까지 좇으며 나중에 쓸 자료를 모았다. 그 때문에 그는 사건에 허를 찔리는 일이 결코 없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사정이 더해졌다. 역사의 거대한 운동 법칙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바로 마르크스였다. 그 법칙에 따르면, 모든 역사적 투쟁은 정치·종교·철학, 그 밖의 어떤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벌어지든 실제로는 사회 계급들이 벌이는 투쟁이 다소간 뚜렷하게 드러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 계급들의 존재와 그에 따른 충돌은 다시 그들의 경제적 처지가 발전한 정도, 그들의 생산 방식과 그에 따라 정해지는 교환 방식에 따라 규정된다. 이 법칙은 자연과학에서 에너지 전환 법칙이 지니는 것과 같은 의미를 역사에서 지닌다 — 바로 이 법칙이 여기서도 그에게 프랑스 제2공화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열쇠를 주었다. 그는 이 역사를 가지고 자기 법칙을 시험했고, 서른세 해가 지난 지금도 우리는 이 시험이 빛나게 성공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F. E.

I

헤겔은 어디선가, 세계사의 모든 거대한 사실과 인물은 말하자면 두 번 나타난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笑劇)으로. 당통 대신 코시디에르, 로베스피에르 대신 루이 블랑, 1793~1795년의 산악파 대신 1848~1851년의 산악파, 큰아버지 대신 조카. 그리고 브뤼메르 18일의 제2판이 나오는 사정도 똑같은 캐리커처다!

인간은 자기 역사를 스스로 만든다. 그러나 마음대로, 스스로 고른 조건 아래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주어지고 과거에서 물려받은 조건 아래서 만든다. 죽은 모든 세대의 전통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머리를 악몽처럼 짓누른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과 사물을 뒤엎고 전에 없던 것을 만들어 내는 데 막 몰두한 듯 보일 때, 바로 그런 혁명적 위기의 시대에 그들은 겁에 질려 과거의 망령들을 불러내 부린다. 망령들에게서 이름과 전투 구호와 의상을 빌려, 이 유서 깊은 분장을 하고 이 빌린 말로 세계사의 새 장면을 상연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루터는 사도 바울의 가면을 썼고, 1789~1814년의 혁명은 번갈아 로마 공화정과 로마 제정의 옷을 걸쳤으며, 1848년의 혁명은 어떤 때는 1789년을, 어떤 때는 1793~1795년의 혁명 전통을 흉내 내는 것보다 나은 일을 알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새 언어를 막 배운 초보자는 그것을 늘 모국어로 되옮긴다. 그가 새 언어의 정신을 제 것으로 삼고 그 언어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모국어를 떠올리지 않고 그 언어 안에서 움직이며 타고난 말을 그 안에서 잊어버릴 때뿐이다.

세계사의 이 망령 불러내기들을 살펴보면 곧바로 눈에 띄는 차이가 있다. 카미유 데물랭, 당통,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나폴레옹 같은 영웅들도, 옛 프랑스 혁명의 당파들과 대중도, 로마의 옷을 입고 로마식 문구를 쓰며 제 시대의 과제를 해냈다. 근대 부르주아 사회를 풀어놓고 세우는 과제였다. 앞의 사람들은 봉건의 땅을 산산조각 내고 그 위에 자라난 봉건의 머리들을 베어 냈다. 뒤의 한 사람은 프랑스 안에서 조건을 만들어 냈다. 그 조건 아래서야 비로소 자유 경쟁이 발전하고, 쪼개진 토지 소유가 활용되고, 족쇄에서 풀린 국민의 산업 생산력이 쓰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 국경 너머 곳곳에서 봉건적 형태들을 쓸어 냈다. 프랑스의 부르주아 사회에 걸맞고 시대에 맞는 환경을 유럽 대륙에 마련해 주는 데 필요한 만큼이었다. 새 사회 구성체가 일단 세워지자 대홍수 이전의 거인들은 사라졌고, 그들과 함께 되살아났던 로마풍도 사라졌다. 브루투스들, 그라쿠스들, 푸블리콜라들, 호민관들, 원로원 의원들, 그리고 카이사르 자신까지. 맨정신의 현실로 돌아온 부르주아 사회는 세, 쿠쟁, 루아예콜라르, 뱅자맹 콩스탕, 기조 같은 이들을 제 진짜 통역자이자 대변인으로 길러 냈다. 그 사회의 진짜 사령관들은 회계 책상 뒤에 앉아 있었고, 루이 18세의 비곗덩어리 머리가 그 정치적 우두머리였다. 부를 생산하는 일과 경쟁이라는 평화로운 싸움에 온통 빠져 버린 그 사회는, 로마 시대의 유령들이 제 요람을 지켜 주었다는 것을 더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사회가 아무리 영웅답지 않다 해도, 그것을 세상에 내놓으려면 영웅주의와 희생과 공포정치와 내전, 그리고 여러 민족이 맞붙는 큰 전쟁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사회의 검투사들은 로마 공화정의 고전적으로 엄격한 전통에서 이상과 예술 형식을, 곧 자기기만을 찾아냈다. 자기 투쟁의 부르주아적으로 좁은 내용을 스스로에게 감추고 제 열정을 위대한 역사적 비극의 높이에 붙들어 두는 데 필요한 자기기만이었다. 그렇게 한 세기 앞서, 다른 발전 단계에서 크롬웰과 잉글랜드 민중은 자기들의 부르주아 혁명을 위해 구약성서에서 말과 열정과 환상을 빌려 왔다. 진짜 목표가 이루어지고 잉글랜드 사회의 부르주아적 개조가 끝나자, 로크가 하박국을 밀어냈다.

그러므로 그 혁명들에서 죽은 자를 깨워 낸 것은 새로운 투쟁을 찬미하려는 것이지 옛 투쟁을 패러디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주어진 과제를 상상 속에서 부풀리려는 것이지 현실에서 그 과제를 푸는 일로부터 달아나려는 것이 아니었다. 혁명의 정신을 다시 찾으려는 것이지 혁명의 유령을 다시 떠돌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1848~1851년에는 옛 혁명의 유령만이 떠돌았다. 늙은 바이이[1]로 분장한 ‘노란 장갑을 낀 공화주의자(Républicain en gants jaunes)’ 마라스트부터, 시시하고 역겨운 제 얼굴을 나폴레옹의 쇠로 된 데스마스크 밑에 숨긴 모험가까지. 한 민족 전체가 혁명으로 제 운동에 가속을 붙였다고 믿었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죽은 시대로 되돌아가 있다. 그리고 이 퇴행을 착각할 여지가 없도록 옛 날짜들이 다시 일어선다. 옛 달력, 옛 이름들, 오래전에 골동품 학문으로나 넘어간 옛 칙령들, 오래전에 썩어 없어진 줄 알았던 옛 앞잡이들도. 국민은 자기가 베들럼[2]에 갇힌 그 미친 잉글랜드 사람 같다고 느낀다. 그는 자기가 옛 파라오 시대에 산다고 여기고, 날마다 에티오피아 광산에서 금을 캐는 고된 일을 한탄한다. 그는 지하 감옥에 갇혀 머리에 희미한 등잔을 매달았고, 등 뒤에는 긴 채찍을 든 노예 감독이 있으며, 출구마다 야만인 용병들이 북적댄다. 이 용병들은 광산의 강제 노동자들의 말도, 자기들끼리의 말도 알아듣지 못한다. 같은 말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이 나에게” — 미친 잉글랜드 사람은 한숨 쉰다 — “자유롭게 태어난 브리튼 사람인 나에게 떠맡겨지다니, 옛 파라오들을 위해 금을 만들라고.” “보나파르트 가문의 빚을 갚으라고” — 프랑스 국민은 한숨 쉰다. 그 잉글랜드 사람은 제정신인 동안에는 금 만들기라는 고정관념을 떨쳐 내지 못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혁명을 하는 동안 나폴레옹의 기억을 떨쳐 내지 못했다. 12월 10일의 선거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들은 혁명의 위험에서 벗어나 이집트의 고기 가마[3]로 돌아가기를 갈망했고, 1851년 12월 2일이 그 대답이었다. 그들이 얻은 것은 옛 나폴레옹의 캐리커처만이 아니다. 그들은 옛 나폴레옹 자체를, 19세기 중엽에 그가 보일 수밖에 없는 모습대로 캐리커처로 만들어 냈다.

19세기의 사회 혁명은 그 시를 과거에서 길어 올 수 없고 오직 미래에서만 길어 올 수 있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미신을 모두 벗어 버리기 전에는 제 일을 시작할 수 없다. 이전의 혁명들은 제 내용을 보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마취해야 했고, 그러려면 세계사의 회상이 필요했다. 19세기의 혁명은 제 내용에 이르려면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를 묻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 거기서는 문구가 내용을 넘어섰고, 여기서는 내용이 문구를 넘어선다.

2월 혁명은 낡은 사회를 덮친 기습이었고, 낡은 사회에 대한 불의의 습격이었다. 그리고 인민은 이 뜻밖의 기습 일격을 새 시대를 연 세계사적 행위라고 선포했다. 12월 2일에는 2월 혁명이 사기 도박꾼의 손재주로 감쪽같이 사라진다. 뒤엎인 듯 보이는 것은 이제 군주정이 아니라, 수백 년의 투쟁으로 군주정에게서 억지로 얻어 낸 자유주의적 양보들이다. 사회 자체가 새 내용을 쟁취한 것이 아니라, 국가만이 가장 오래된 형태로, 칼과 사제복의 뻔뻔할 만큼 단순한 지배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1848년 2월의 기습(coup de main)에 1851년 12월의 무모한 일격(coup de tête)이 응답한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 그래도 그사이의 시간이 헛되이 지나간 것은 아니다. 1848~1851년에 프랑스 사회는 공부와 경험을 뒤늦게 따라잡았다. 그것도 혁명적이어서 지름길인 방법으로였다. 2월 혁명이 겉면만 흔들고 끝나지 않으려면, 정상적인, 말하자면 교과서대로의 발전에서는 혁명보다 먼저 거쳤어야 할 공부와 경험이었다. 사회는 지금 출발점보다 뒤로 물러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사회는 이제야 혁명의 출발점을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한다. 그 아래서만 근대 혁명이 진지해질 수 있는 상황과 관계와 조건을.

18세기의 혁명 같은 부르주아 혁명은 성공에서 성공으로 더 빠르게 내달린다. 극적 효과가 서로 앞을 다투고, 사람과 사물은 불꽃 튀는 다이아몬드에 박힌 듯 보이며, 황홀경이 나날의 정신이다. 그러나 그 혁명은 오래가지 못한다. 곧 절정에 이르고, 사회는 그 질풍노도 시기의 결과를 맑은 정신으로 제 것으로 삼는 법을 배우기 전에 긴 숙취에 빠진다. 반면 19세기의 혁명 같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비판하고, 제 진행을 줄곧 멈추어 세우며, 이미 이룬 듯한 것으로 되돌아와 다시 새로 시작한다. 첫 시도들의 어중간함과 약점과 초라함을 가차 없이 철저하게 비웃는다. 적을 쓰러뜨려도, 그것은 적이 땅에서 새 힘을 빨아들여 더 거대한 몸으로 다시 일어나 맞서게 하려는 것일 뿐인 듯하다. 제 목적의 막연한 엄청남 앞에서 거듭 다시 뒷걸음질 친다. 그러다 마침내 어떤 후퇴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관계들 자체가 외친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Hic Rhodus, hic salta!)
여기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추어라![4]

그런데 웬만한 관찰자라면, 프랑스의 발전 과정을 한 걸음 한 걸음 좇지 않았더라도, 혁명에 전대미문의 망신이 닥치리라는 것을 짐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파 나리들이 1852년 5월 둘째 일요일이 베풀 은총을 두고 서로 축하하던 그 자기만족에 찬 승리의 컹컹거림을 듣기만 해도 충분했다. 1852년 5월 둘째 일요일은 그들 머릿속에서 고정관념이, 교리가 되어 있었다. 천년왕국을 믿는 자들의 머릿속에서 그리스도가 다시 나타나 천년왕국이 시작될 날이 그랬던 것처럼. 나약함은 언제나 그렇듯 기적에 대한 믿음으로 도망쳤다. 상상 속에서 적을 마법으로 없애 버리면 적을 이긴 줄 알았다. 그리고 다가올 미래를, 또 속에 품고는 있지만 아직 내놓고 싶지는 않다는 행동들을 하릴없이 찬미하느라 현재를 이해하는 눈을 모조리 잃었다. 그 영웅들은 서로 동정을 베풀고 한 무더기로 뭉치는 것으로 이미 드러난 제 무능을 반박하려 했다. 그들은 짐을 꾸려 놓고 월계관을 가불로 미리 받아 챙겼다. 그리고 ‘이교도 땅의’(in partibus)[5] 공화국들을 어음 시장에서 할인받는 일에 마침 몰두하고 있었다. 그 공화국들을 위해 그들은 소박한 마음으로 남몰래 정부 인원까지 미리 다 짜 놓았다. 12월 2일은 맑은 하늘의 벼락처럼 그들을 덮쳤다. 민중들은 기가 꺾여 언짢은 시대에는 제 속의 불안을 가장 시끄럽게 떠드는 자들의 고함으로 덮어 버리기를 좋아한다. 그런 민중들도 이제는 거위 울음이 카피톨리움을 구할 수 있던 시대는 지났다는 것을 아마 깨달았을 것이다[6].

헌법, 국민의회, 왕조 당파들, 푸른 공화파와 붉은 공화파, 아프리카의 영웅들, 연단의 우레, 일간 신문의 마른번개, 문학 전체, 정치적 명성과 지적 명망, 민법과 형법, ‘자유, 평등, 우애(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그리고 1852년 5월 둘째 일요일 — 이 모든 것이, 그의 적들조차 마법사로 여기지 않는 한 남자의 주문 앞에서 환등처럼 사라져 버렸다. 보통선거권이 잠깐 더 살아남은 것은,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제 손으로 유언장을 쓰고 인민 자신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멸망해 마땅하다”[7]고 선언하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프랑스 사람들이 하듯 자기 민족이 기습을 당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민족이든 여자든, 아무 뜨내기 모험가에게 겁탈당할 수 있었던 방심한 순간은 용서받지 못한다. 그런 말로는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고 달리 표현될 뿐이다. 3,600만 명의 민족이 어떻게 협잡꾼 셋에게 기습당해 아무 저항 없이 포로로 끌려갈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일이 남는다.

1848년 2월 24일부터 1851년 12월까지 프랑스 혁명이 거친 국면들을 큰 줄기로 되짚어 보자.

세 주요 시기가 뚜렷하다. 2월 시기. 1848년 5월 4일부터 1849년 5월 28일까지, 공화국 수립 시기 또는 제헌국민의회 시기. 1849년 5월 28일부터 1851년 12월 2일까지, 입헌공화국 시기 또는 입법국민의회 시기.

첫째 시기, 곧 2월 24일 루이 필리프가 쓰러진 때부터 5월 4일 제헌의회가 모일 때까지의 본래 의미의 2월 시기는 혁명의 서막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성격은, 이 시기가 즉석에서 꾸린 정부가 스스로를 임시라고 선언한 데서 공식적으로 드러났다. 정부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 제안되고 시도되고 말해진 모든 것이 스스로를 임시라고만 내세웠다. 아무도, 어떤 것도, 존속할 권리와 실제로 행동할 권리를 감히 주장하지 못했다. 혁명을 준비했거나 규정한 모든 요소, 곧 왕조 반대파, 공화파 부르주아지, 민주공화파 소부르주아, 사회민주주의 노동자층이 2월 정부 안에 임시로 제자리를 얻었다.

달리 될 수는 없었다. 2월의 나날이 애초에 노린 것은 선거 개혁이었다. 그것으로 유산 계급 안에서 정치적 특권층의 범위를 넓히고 금융귀족의 배타적 지배를 무너뜨리려 했다. 그러나 정말로 충돌이 벌어지자 인민은 바리케이드에 올랐고, 국민방위군은 수동적으로 굴었으며, 군대는 진지하게 저항하지 않았고, 왕은 달아났다. 그러자 공화국은 저절로 당연한 것이 된 듯했다. 당파마다 공화국을 제 뜻대로 해석했다. 무기를 손에 들고 공화국을 쟁취한 프롤레타리아트는 거기에 제 도장을 찍어 공화국을 사회 공화국이라고 선포했다. 이로써 근대 혁명의 일반적 내용이 암시되었다. 그런데 이 내용은 당장 실행할 수 있는 모든 것과 아주 묘하게 어긋났다. 주어진 재료로, 대중이 다다른 교양 수준으로, 눈앞의 상황과 관계 아래서 곧바로 해낼 수 있는 일과 말이다. 한편 2월 혁명에 함께한 나머지 모든 요소는 정부에서 사자의 몫을 받음으로써 제 요구를 인정받았다. 그래서 이 시기만큼 들뜬 문구와 실제의 불안과 서투름이, 열광적인 혁신 욕구와 낡은 관행의 철저한 지배가, 사회 전체의 겉보기 조화와 그 요소들의 깊은 소외가 알록달록하게 뒤섞인 시기는 없다. 파리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자기 앞에 펼쳐진 큰 전망에 도취해 사회 문제를 두고 진지한 토론에 빠져 있는 동안, 사회의 옛 세력들은 무리를 짓고 힘을 모으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국민 대중, 곧 농민과 소부르주아에게서 뜻밖의 버팀목을 찾아냈다. 7월 왕정의 울타리가 무너지자 이들이 한꺼번에 정치 무대로 쏟아져 들어왔던 것이다.

둘째 시기, 1848년 5월 4일부터 1849년 5월 말까지는 부르주아 공화국을 세우고 그 기초를 놓은 시기다. 2월의 나날 직후에는 왕조 반대파가 공화파에게, 공화파가 사회주의자에게 허를 찔렸을 뿐 아니라, 프랑스 전체가 파리에게 허를 찔렸다. 1848년 5월 4일에 모인 국민의회는 국민의 선거로 나왔기에 국민을 대표했다. 그것은 2월의 나날이 들이민 요구에 대한 살아 있는 항의였고, 혁명의 성과를 부르주아의 잣대로 되돌려 놓아야 했다. 이 국민의회의 성격을 곧바로 꿰뚫어 본 파리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존재를 힘으로 부정하고 해산시키려 했다. 국민의 반동적 정신이 자기들을 위협하며 취한 이 조직된 형태를 다시 낱낱의 구성 요소로 흩어 버리려 한 것이다. 그러나 헛일이었다. 알려진 대로 5월 15일은, 블랑키와 그 동지들, 곧 프롤레타리아 당의 진짜 지도자들을 우리가 다루는 순환이 끝날 때까지 공적 무대에서 치워 버린 것 말고는 아무 결과도 낳지 못했다.

루이 필리프의 부르주아 군주정 다음에는 오직 부르주아 공화정이 올 수 있다. 다시 말해, 왕의 이름 아래 부르주아지의 제한된 일부가 지배했다면, 이제는 인민의 이름으로 부르주아지 전체가 지배할 것이다. 파리 프롤레타리아트의 요구는 끝장내야 할 유토피아적 헛소리다. 제헌국민의회의 이 선언에 파리 프롤레타리아트는 6월 봉기로 답했다. 유럽 내전의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사건이었다. 부르주아 공화국이 이겼다. 그 편에는 금융귀족, 산업 부르주아지, 중간 계층, 소부르주아, 군대, 기동대로 조직된 룸펜프롤레타리아트, 지식계의 명사들, 성직자 무리, 농촌 주민이 섰다. 파리 프롤레타리아트 편에는 그 자신 말고 아무도 없었다. 승리 뒤에 3,000명이 넘는 봉기자가 학살되었고, 1만 5,000명이 재판 없이 유형에 처해졌다. 이 패배와 함께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 무대의 뒤편으로 물러난다. 운동이 새로 도약하는 듯할 때마다 다시 앞으로 나서려 하지만, 힘은 갈수록 약해지고 결과는 갈수록 작아진다. 자기보다 위에 있는 사회 계층 가운데 하나가 혁명적으로 들끓기 시작하면 곧 그 계층과 손을 잡고, 그렇게 여러 당파가 차례로 겪는 패배를 모두 함께 겪는다. 그러나 이 뒤따르는 타격들은 사회의 표면 전체에 퍼질수록 점점 약해진다. 의회와 언론에서 활동하던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름난 지도자들은 하나씩 법정의 희생물이 되고, 갈수록 수상쩍은 인물들이 그 선두에 선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는 교조적 실험, 교환은행과 노동자 협동조합에 뛰어든다. 곧 낡은 세계를 그 세계 자신의 거대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 뒤엎기를 포기하고, 오히려 사회의 등 뒤에서 사적으로, 제 제한된 생존 조건 안에서 자기 구원을 이루려는 운동에 뛰어든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 안에서 혁명적 위대함을 되찾지도, 새로 맺은 동맹에서 새 에너지를 얻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6월에 맞서 싸웠던 모든 계급이 그 곁에 납작 쓰러질 때까지는. 그러나 적어도 프롤레타리아트는 세계사적 대투쟁의 명예를 안고 쓰러진다. 프랑스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가 6월의 지진에 떤다. 반면 그 뒤를 잇는 상층 계급들의 패배는 너무 값싸게 치러져서, 승리한 당파가 뻔뻔하게 부풀려 주어야만 겨우 사건 축에 낄 수 있다. 그리고 패배한 당파가 프롤레타리아 당과 멀수록 그 패배는 더 수치스러워진다.

6월 봉기자들의 패배는 부르주아 공화국을 세우고 쌓아 올릴 터를 마련하고 고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패배는 동시에, 유럽에서는 “공화정이냐 군주정이냐”와는 다른 문제가 걸려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여기서 부르주아 공화국이란 한 계급이 다른 계급들 위에 군림하는 무제한의 전제정치를 뜻한다는 것을 드러냈다. 또 오랜 문명국에서는 공화국이 어디까지나 부르주아 사회의 정치적 변혁 형태를 뜻할 뿐 그 보수적 생활 형태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계급 형성이 발전하고, 근대적 생산 조건을 갖추었으며, 물려받은 모든 관념이 수백 년의 작업으로 녹아 버린 정신적 의식을 지닌 나라들 말이다. 공화국이 보수적 생활 형태인 곳은 이를테면 북아메리카 합중국 같은 곳이다. 거기에도 이미 계급은 있지만 아직 고정되지 않았고, 끊임없이 흐르며 구성원을 바꾸고 서로 주고받는다. 거기서 근대적 생산 수단은 정체된 과잉 인구와 겹치는 대신, 오히려 머리와 손이 상대적으로 모자라는 것을 메운다. 그리고 거기서는 새 세계를 제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물질적 생산의 열에 들뜬 젊은 운동이, 낡은 유령 세계를 없앨 시간도 기회도 남겨 두지 않았다.

6월의 나날 동안 모든 계급과 당파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곧 무정부당이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당에 맞서 질서당으로 뭉쳤다. 그들은 “사회의 적”에 맞서 사회를 “구했다”. 그들은 낡은 사회의 표어 “재산, 가족, 종교, 질서”를 제 군대에 구호로 나누어 주고, 반혁명 십자군에게 외쳤다. “이 표시로 너는 이기리라!” 그 순간부터, 이 표시 아래 6월 봉기자들에 맞서 모였던 수많은 당파 가운데 하나가 제 계급 이익을 위해 혁명의 싸움터를 지키려 들기만 하면, 그 당파는 “재산, 가족, 종교, 질서”라는 외침 앞에 무너진다. 사회는 그 지배자의 범위가 좁아질 때마다, 더 배타적인 이익이 더 넓은 이익에 맞서 관철될 때마다 구원받는다. 가장 단순한 부르주아 재정 개혁, 가장 평범한 자유주의, 가장 형식적인 공화주의, 가장 밋밋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조차 모두 “사회에 대한 암살 기도”로 처벌받는 동시에 “사회주의”라는 낙인이 찍힌다. 그리고 마침내 “종교와 질서”의 대제사장들 자신이 발길질에 차여 피티아의 신탁 의자에서 쫓겨나고, 한밤중 어둠을 틈타 침대에서 끌려 나와 죄수 호송차에 실려 감옥에 던져지거나 망명길에 오른다. 그들의 신전은 땅바닥까지 허물어지고, 입은 봉해지고, 펜은 꺾이고, 법은 찢긴다. 종교와 재산과 가족과 질서의 이름으로. 질서에 미친 부르주아들이 제 발코니에서 술 취한 병사 떼의 총에 맞아 쓰러지고, 그들의 집이 심심풀이 포격을 당한다 — 재산과 가족과 종교와 질서의 이름으로. 마침내 부르주아 사회의 찌꺼기가 질서의 신성한 밀집대를 이루고, 영웅 크라풀린스키[8]가 “사회의 구원자”로서 튀일리궁에 입성한다.

II

발전의 실마리를 다시 잡아 보자.

6월의 나날 이후 제헌국민의회의 역사는 부르주아지 공화파 분파의 지배와 해체의 역사다. 삼색기 공화파, 순수 공화파, 정치적 공화파, 형식주의 공화파 따위의 이름으로 알려진 바로 그 분파 말이다.

이 분파는 루이 필리프의 부르주아 군주정 아래서 공식 공화주의 반대파를 이루었고, 그래서 당시 정치 세계의 인정받는 구성 요소였다. 의회에 대표를 두었고, 언론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다. 그 파리 기관지 《나시오날》은 나름대로 《주르날 데 데바》 못지않게 점잖은 신문으로 통했다. 그 성격도 입헌군주정 아래서 차지한 이런 위치에 걸맞았다. 이 분파는 거대한 공동 이해로 묶이고 고유한 생산 조건으로 구별되는 부르주아지의 한 분파가 아니었다. 그것은 공화주의 성향의 부르주아, 문필가, 변호사, 장교, 관리들의 패거리였다. 그 영향력은 나라 안에 퍼진 루이 필리프에 대한 개인적 반감, 옛 공화국에 대한 추억, 몇몇 몽상가들의 공화주의 신앙, 그리고 무엇보다 프랑스 민족주의에 기대고 있었다. 이 분파는 빈 조약과 영국과의 동맹을 미워하는 프랑스 민족주의의 증오를 끊임없이 일깨웠다. 《나시오날》이 루이 필리프 아래서 거느린 지지층의 큰 부분은 이 숨은 제국주의 덕분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공화국 아래서 이 제국주의는 루이 보나파르트라는 인물의 모습으로 《나시오날》 앞에 파멸적인 경쟁자로 나타날 수 있었다. 《나시오날》은 나머지 부르주아 반대파 전체가 그랬듯 금융귀족과 싸웠다. 프랑스에서 예산 공격은 금융귀족과의 싸움과 딱 맞물려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값싼 인기와, 청교도풍 사설(leading articles)에 쓸 너무나 푸짐한 소재를 안겨 주었으므로 써먹지 않을 수 없었다. 산업 부르주아지는 《나시오날》이 프랑스 보호관세 체제를 노예처럼 옹호해 준 데 고마워했다. 물론 《나시오날》이 그 체제를 받아들인 것은 국민경제적 이유보다는 민족적 이유에서였다. 부르주아지 전체는 《나시오날》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악의적으로 고발해 준 데 고마워했다. 그 밖에 《나시오날》파는 순수 공화주의적이었다. 곧 부르주아 지배의 군주정 형태 대신 공화정 형태를 요구했고, 무엇보다 그 지배에서 제 몫으로 사자의 몫을 요구했다. 이런 변화가 어떤 조건에서 이루어질지에 대해서는 전혀 분명한 생각이 없었다. 반면 이들에게 아주 분명했던 것, 그리고 루이 필리프 말기의 개혁 연회에서 공공연히 드러난 것은, 민주파 소부르주아와 특히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그들이 인기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 순수 공화파는 순수 공화파답게, 우선은 오를레앙 공작부인의 섭정으로 만족하려던 참이었다. 바로 그때 2월 혁명이 터져 그 가장 이름난 대표자들에게 임시정부의 자리를 내주었다. 그들은 물론 처음부터 부르주아지의 신임과 제헌의회의 다수를 쥐고 있었다. 국민의회가 모이면서 구성한 집행위원회에서는 임시정부의 사회주의 요소들이 곧바로 배제되었다. 그리고 《나시오날》파는 6월 봉기가 터진 것을 이용해 집행위원회마저 물러나게 하고, 가장 가까운 경쟁자인 소부르주아 공화파, 곧 민주 공화파(르드뤼롤랭 등)를 떨쳐 냈다. 6월 전투를 지휘한 부르주아 공화파의 장군 카베냐크가 일종의 독재 권력을 쥐고 집행위원회의 자리를 차지했다. 《나시오날》의 전 편집장 마라스트는 제헌국민의회의 상임 의장이 되었고, 장관 자리를 비롯한 나머지 모든 요직은 순수 공화파에게 돌아갔다.

오래전부터 자신을 7월 왕정의 정당한 상속자로 여겨 온 부르주아지의 공화파 분파는 이렇게 자기 이상을 넘어서는 것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들이 지배에 이른 것은, 루이 필리프 시절에 꿈꾸었던 것처럼 왕좌에 맞선 부르주아지의 자유주의적 반란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자본에 맞섰다가 산탄 세례에 짓밟힌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동을 통해서였다. 그들이 가장 혁명적인 사건으로 상상했던 것이 현실에서는 가장 반혁명적인 사건으로 일어났다. 열매는 그들의 품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의 나무가 아니라 지식의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였다[1].

부르주아 공화파의 배타적 지배는 1848년 6월 24일부터 12월 10일까지만 이어졌다. 그것은 공화국 헌법의 제정과 파리 계엄으로 요약된다.

새 헌법은 근본적으로 1830년 입헌 헌장을 공화국식으로 고친 판에 지나지 않았다. 7월 왕정은 납세액으로 선거 자격을 좁게 묶어, 부르주아지의 큰 부분마저 정치적 지배에서 밀어냈다. 이런 제한 선거는 부르주아 공화국의 존재와 양립할 수 없었다. 2월 혁명은 곧바로 이 납세 자격 대신 직접 보통선거권을 선포했다. 부르주아 공화파는 이 일을 없던 일로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선거구에 여섯 달 이상 거주해야 한다는 제한 규정을 덧붙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행정, 지방 자치, 사법, 군대 따위의 옛 조직은 그대로 남았다. 헌법이 그것을 고친 곳에서도 바뀐 것은 목차였지 내용이 아니었고, 이름이었지 실체가 아니었다.

1848년 자유들의 빠질 수 없는 참모진, 곧 인신의 자유, 출판·언론·결사·집회·교육·종교의 자유 따위는 헌법의 제복을 받아 입고 불사신이 되었다. 이 자유들은 하나하나 프랑스 시민(citoyen)의 무조건적 권리로 선포된다. 그러나 늘 여백에 단서가 붙는다. “타인의 동등한 권리와 공공의 안전”으로 제한되지 않는 한, 또는 바로 이 개인적 자유들끼리의 조화, 그리고 그것들과 공공의 안전 사이의 조화를 매개해야 할 “법률”로 제한되지 않는 한, 그 자유는 무제한이라는 단서다. 예를 들어 이렇다. “시민은 결사할 권리, 평화롭게 무기 없이 집회할 권리, 청원할 권리, 출판이나 그 밖의 어떤 방법으로든 의견을 표현할 권리를 가진다. 이 권리의 향유는 타인의 동등한 권리와 공공의 안전 말고는 어떤 제한도 받지 않는다.”(프랑스 헌법 제2장 제8조) — “교육은 자유롭다. 교육의 자유는 법률이 정한 조건 아래, 국가의 최고 감독 아래 향유되어야 한다.”(같은 곳, 제9조) — “모든 시민의 주거는 법률이 정한 형식에 따르는 경우 말고는 침해할 수 없다.”(제2장 제3조) 등등. — 그래서 헌법은 끊임없이 장래의 조직법을 가리킨다. 그 법이 여백의 단서들을 구체화하고, 이 무제한의 자유들을 누리는 일을 조정하여, 자유들이 서로 부딪치지도 공공의 안전과 부딪치지도 않게 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뒷날 질서의 벗들이 이 조직법들을 만들어 냈고, 그 모든 자유는 부르주아지가 그것을 누리는 데 다른 계급의 동등한 권리에 걸리는 일이 없도록 조정되었다. 부르주아지가 “다른 이들”에게 이 자유들을 완전히 금지하거나, 하나하나가 경찰의 올가미인 조건을 달아 누리게 할 때, 그것은 언제나 헌법이 규정한 대로 오직 “공공의 안전”, 곧 부르주아지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 뒤로 양쪽이 모두 정당하게 헌법을 근거로 내세운다. 그 자유들을 모조리 없앤 질서의 벗들도, 그것들을 모조리 내놓으라고 요구한 민주파도 그렇다. 헌법의 조항 하나하나가 제 반명제를, 제 상원과 하원을 제 안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 문구에는 자유가, 여백의 단서에는 자유의 폐지가 들어 있다. 그러니 자유의 이름을 존중하면서 그 실제 실현만 가로막는 한, 물론 합법적인 길로 가로막는 한, 헌법 속 자유의 존재는 다치지 않고 온전했다. 자유의 평범한 일상의 존재가 아무리 철저히 맞아 죽었더라도.

이렇게 기발한 방식으로 불사신이 된 이 헌법도 아킬레우스처럼 한 군데 약점이 있었다. 발뒤꿈치가 아니라 머리, 아니 헌법이 둘로 갈라져 끝나는 두 개의 머리였다. 한쪽은 입법의회, 다른 쪽은 대통령이다. 헌법을 훑어보면, 대통령과 입법의회의 관계를 정한 조항들만이 절대적이고 확정적이며 모순이 없고 달리 비틀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는 부르주아 공화파가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헌법 제45조에서 제70조까지는, 국민의회는 대통령을 헌법에 따라 물러나게 할 수 있지만 대통령은 국민의회를 헌법에 어긋나게만, 곧 헌법 자체를 없애야만 없앨 수 있도록 짜여 있다. 그러니 여기서 헌법은 스스로 폭력적으로 파괴되기를 부추긴다. 이 헌법은 1830년 헌장처럼 권력 분립을 신성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견딜 수 없는 모순에까지 넓혔다. 기조는 입법권과 행정권 사이의 의회 다툼을 헌법 권력들의 놀이라고 불렀다. 1848년 헌법에서 이 놀이는 언제나 판돈을 다 건 도박(va banque)이다. 한쪽에는 보통선거로 뽑히고 다시 뽑힐 수 있는 750명의 인민 대표가 있다. 이들은 통제할 수도 해산할 수도 나눌 수도 없는 국민의회를 이룬다. 이 국민의회는 입법의 전권을 누리고, 전쟁과 강화와 통상 조약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며, 대사면권을 홀로 가지며, 상설 기구이기에 줄곧 무대 앞자리를 차지한다. 다른 쪽에는 대통령이 있다. 그는 왕권의 모든 속성을 지니고, 국민의회와 상관없이 장관을 임명하고 해임할 권한을 가지며, 행정권의 모든 수단을 손에 쥐고 있다. 그는 모든 관직을 나누어 주고, 그로써 프랑스에서는 적어도 150만 명의 생계를 좌우한다. 50만 명의 관리와 모든 계급의 장교들에게 그만큼의 사람들이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의 뒤에는 무장 병력 전체가 있다. 그는 개별 범죄자를 사면하고, 국민방위군 부대의 활동을 정지시키고, 시민이 직접 뽑은 도의회·캉통 의회·시읍면 의회를 국무원의 동의를 얻어 해산할 특권을 누린다. 외국과의 모든 조약의 발의와 지휘는 그에게 맡겨져 있다. 의회는 줄곧 무대 위에서 연기하며, 따지기 좋아하는 범속한 대낮의 빛 앞에 서 있다. 그동안 그는 엘리시온 들판에서 숨은 삶을 산다[2]. 그것도 헌법 제45조를 눈앞에, 가슴속에 품고서. 그 조항은 날마다 그에게 외친다. “형제여, 우리는 죽어야 하오!(Frère, il faut mourir!)”[3] 너의 권력은 네가 뽑힌 지 네 해째 되는 해, 아름다운 5월의 둘째 일요일에 끝난다! 그때는 영광도 끝이고, 연극은 두 번 상연되지 않는다. 빚이 있다면 헌법이 너에게 내준 60만 프랑으로 갚도록 미리미리 살펴 두어라. 아름다운 5월의 둘째 월요일에 클리시[4]로 걸어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 헌법은 이렇게 대통령에게 사실상의 권력을 주는 한편, 국민의회에는 도덕적 권력을 보장해 주려 한다. 법 조항으로 도덕적 권력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헌법은 여기서 또다시 스스로를 지워 버린다. 대통령을 모든 프랑스 사람의 직접 투표로 뽑게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표는 국민의회의 750명 의원에게는 흩어지지만, 여기서는 한 개인에게 모인다. 개별 인민 대표는 이 당 저 당, 이 도시 저 도시, 이 교두보 저 교두보를 대표할 뿐이고, 심지어 아무나 750분의 1을 하나 뽑아야 할 필요성만을 대표할 뿐이다. 그를 뽑을 때 사람들은 사안도 사람도 그리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는다. 반면 그는 국민이 뽑은 사람이고, 그를 뽑는 행위는 주권자 인민이 네 해에 한 번 내놓는 큰 으뜸패다. 뽑힌 국민의회는 국민과 형이상학적 관계에 있지만, 뽑힌 대통령은 국민과 인격적 관계에 있다. 국민의회는 개별 대표들을 통해 국민정신의 여러 면을 나타내지만, 대통령에게서 국민정신은 육신을 입는다. 대통령은 국민의회에 맞서 일종의 신권(神權)을 지닌다. 그는 ‘인민의 은총으로’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는 아킬레우스에게, 그가 한창 젊은 나이에 죽으리라고 예언했다. 아킬레우스처럼 약점을 지닌 헌법도 아킬레우스처럼 자기가 일찍 죽어야 하리라는 예감을 품고 있었다. 헌법을 만드는 순수 공화파로서는 이상적 공화국의 구름 낀 하늘에서 세속 세상을 한 번 내려다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자기들의 위대한 입법 예술품을 완성해 갈수록, 그만큼 왕당파, 보나파르트파, 민주파, 공산주의자들의 오만과 그들 자신의 신용 추락이 날마다 커지고 있다는 것을. 그걸 알려 주려고 테티스가 바다를 떠나 비밀을 일러 줄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헌법 제111조라는 헌법다운 잔꾀로 운명을 속여 넘기려 했다. 그 조항에 따르면 헌법 개정 제안은 저마다 꼬박 한 달씩 사이를 두는 세 차례의 연이은 토론에서 적어도 4분의 3의 찬성으로 의결되어야 하고, 게다가 의원이 적어도 500명은 투표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력한 시도일 뿐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의회의 소수가 되리라는 것을 이미 마음속으로 예언자처럼 내다보고 있었고, 소수가 되어서도 권력을 휘둘러 보려 한 것이다. 그런데 그 권력은 그들이 의회의 다수와 정부 권력의 모든 수단을 쥐고 있던 바로 그때에도 날마다 그들의 약한 손에서 더 빠져나가고 있었다.

끝으로 헌법은 한 멜로드라마 같은 조항에서 자기 자신을 “프랑스 인민 전체와 프랑스 사람 하나하나의 경계심과 애국심”에 맡겼다. 그 전에 이미 다른 조항에서 “경계하는 자들”과 “애국적인 자들”을, 자기가 손수 고안해 낸 고등법원(haute cour)의 다정하고도 지엄하신 관심에 맡겨 둔 다음에 말이다.

이것이 1848년 헌법이었다. 1851년 12월 2일, 이 헌법은 누군가의 머리가 쓰러뜨린 것이 아니라, 그저 모자 하나가 닿자 넘어졌다. 물론 그 모자는 나폴레옹의 삼각모였다.

부르주아 공화파가 의회 안에서 이 헌법을 궁리해 내고 토론하고 표결하는 데 몰두하는 동안, 카베냐크는 의회 밖에서 파리 계엄을 유지했다. 파리 계엄은 공화국을 낳는 진통을 겪는 제헌의회의 산파였다. 나중에 헌법이 총검으로 세상에서 치워진다 해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헌법은 이미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총검의, 그것도 인민을 겨눈 총검의 보호를 받아야 했고, 총검의 손을 빌려 세상에 나와야 했다. “점잖은 공화파”의 선조들은 자기들의 상징인 삼색기에게 유럽을 한 바퀴 돌게 했다. 그 후손들도 하나의 발명품을 내놓았다. 이것도 저절로 대륙 전체로 길을 찾아 나섰다가 늘 새로운 애정을 품고 프랑스로 돌아왔고, 마침내 지금은 프랑스 도의 절반에서 시민권을 얻었다. 바로 계엄이다. 프랑스 혁명이 흘러가는 동안 뒤이은 위기마다 주기적으로 쓰인 훌륭한 발명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병영과 야영지를 주기적으로 프랑스 사회의 머리에 얹어 그 뇌를 짓누르고 사회를 얌전하게 만들었다. 칼과 소총에게는 주기적으로 재판하고 행정하고 후견하고 검열하게 했고, 경찰 노릇과 야경꾼 노릇까지 시켰다. 콧수염과 군복은 주기적으로 사회의 최고 지혜이자 사회의 교장이라고 떠들썩하게 치켜세웠다 — 그러니 병영과 야영지, 칼과 소총, 콧수염과 군복이 마침내 이런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차라리 자기 체제를 최고의 것으로 선포하고 부르주아 사회를 스스로 다스리는 걱정에서 아예 풀어 줌으로써, 단번에 영원히 사회를 구하자는 생각을. 병영과 야영지, 칼과 소총, 콧수염과 군복은 더욱 이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면 높아진 공로에 대해 더 나은 현찰 보수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그저 주기적인 계엄과, 이런저런 부르주아 분파의 명령에 따른 일시적인 사회 구원에서는, 몇몇 사망자와 부상자, 부르주아들이 지어 보이는 몇 번의 상냥한 억지웃음 말고는 손에 쥐는 것이 별로 없었다. 군대도 마침내 한 번쯤은 제 이익을 위해, 제 이익을 걸고 계엄 놀이를 하고, 그러면서 부르주아의 증권거래소까지 포위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나가는 김에 말해 두자. 카베냐크 아래서 봉기자 1만 5,000명을 재판 없이 유형에 보내는 데 한몫한 군사위원회 의장 베르나르 대령, 바로 그자가 지금 이 순간 다시 파리에서 활동하는 군사위원회들의 우두머리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점잖은 공화파, 순수 공화파는 파리 계엄으로 1851년 12월 2일의 근위병들이 자라날 묘판을 일구었다. 그 대신 그들에게는 칭찬받을 만한 점도 있다. 루이 필리프 시절처럼 민족 감정을 부풀리기는커녕, 국민의 힘을 지휘하게 된 지금은 외국 앞에서 기고, 이탈리아를 해방하기는커녕 오스트리아와 나폴리 군대가 이탈리아를 다시 정복하도록 내버려 둔다는 점이다. 1848년 12월 10일 루이 보나파르트가 대통령으로 뽑히면서 카베냐크의 독재와 제헌의회는 끝났다.

헌법 제44조는 이렇게 말한다.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은 결코 프랑스 시민의 자격을 잃은 적이 없어야 한다.” 프랑스 공화국의 첫 대통령 L.-N.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시민의 자격을 잃었을 뿐 아니라, 영국의 특별 경관[5]이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귀화한 스위스 사람이었다.

12월 10일 선거의 의미는 내가 다른 곳에서[6] 밝혔다. 여기서 다시 다루지는 않겠다. 그것이 2월 혁명의 비용을 치러야 했던 농민이 국민의 나머지 계급들에 맞서 일으킨 반동, 도시에 맞선 농촌의 반동이었다는 것만 말해 두면 충분하다. 이 선거는 큰 호응을 얻었다. 《나시오날》의 공화파가 영광도 수당도 마련해 주지 못한 군대에서, 보나파르트를 군주정으로 가는 다리로 반긴 대부르주아지에게서, 그를 카베냐크를 내리칠 채찍으로 반긴 프롤레타리아와 소부르주아에게서. 나중에 농민과 프랑스 혁명의 관계를 더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1848년 12월 20일부터 1849년 5월 제헌의회가 해산할 때까지의 시기는 부르주아 공화파가 몰락하는 역사를 담고 있다. 그들은 부르주아지를 위한 공화국을 세우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싸움터에서 몰아내고, 민주파 소부르주아에게 당분간 입을 다물게 한 다음, 그들 자신이 부르주아지 대중에게 밀려난다. 부르주아지 대중은 이 공화국을 당연히 제 재산으로 압류한다. 그런데 이 부르주아지 대중은 왕당파였다. 그 한 부분인 대토지 소유자들은 왕정복고 아래서 지배했고, 그래서 정통왕조파였다. 다른 부분인 금융귀족과 대산업가들은 7월 왕정 아래서 지배했고, 그래서 오를레앙파였다. 군대, 대학, 교회, 법조계, 학술원, 언론의 고위 명사들은 비율은 달라도 양쪽에 나뉘어 있었다. 여기, 부르봉이라는 이름도 오를레앙이라는 이름도 아닌 자본이라는 이름을 단 부르주아 공화국에서, 그들은 함께 지배할 수 있는 국가 형태를 찾아냈다. 6월 봉기가 이미 그들을 “질서당”으로 묶어 놓았다. 이제 우선 할 일은 아직 국민의회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부르주아 공화파 패거리를 치워 버리는 것이었다. 이 순수 공화파는 인민을 상대로 물리력을 남용할 때는 그토록 잔인했다. 그런데 행정권과 왕당파에 맞서 자기들의 공화주의와 입법권을 지켜야 할 지금은 그만큼 비겁하게, 기죽고 맥 빠지고 꺾여 싸울 힘도 없이 물러섰다. 그들이 해체되는 수치스러운 역사를 여기서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그것은 쓰러짐이 아니라 스러짐이었다. 그들의 역사는 영영 막을 내렸다. 다음 시기에 그들은 의회 안에서든 밖에서든 추억으로만 등장한다. 그 추억은 공화국이라는 이름만이 문제가 될 때마다, 그리고 혁명적 충돌이 가장 낮은 수준으로 가라앉을 듯할 때마다 다시 살아나는 듯 보인다. 지나가는 길에 말해 두자면, 이 당에 이름을 준 신문 《나시오날》은 다음 시기에 사회주의로 개종했다.

이 시기를 마무리하기 전에 두 세력을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는 1851년 12월 2일 다른 하나를 없애 버리지만, 1848년 12월 20일부터 제헌의회가 물러날 때까지는 부부처럼 살았다. 한쪽은 루이 보나파르트, 다른 쪽은 연합한 왕당파의 당, 질서의 당, 대부르주아지의 당이다. 대통령에 취임하자 보나파르트는 곧바로 질서당 내각을 세우고 그 우두머리에 오딜롱 바로를 앉혔다. 눈여겨볼 것은 바로가 의회 부르주아지 가운데 가장 자유주의적인 분파의 옛 지도자였다는 점이다. 바로 씨는 1830년부터 망령처럼 자기를 따라다니던 장관 자리를 마침내 사냥해 냈고, 게다가 그 내각의 수반 자리까지 얻었다. 그러나 루이 필리프 시절에 상상했던 것처럼 의회 반대파의 가장 진보적인 우두머리로서가 아니었다. 의회 하나를 죽이라는 임무를 띠고, 그것도 예수회와 정통왕조파 같은 자기의 모든 숙적과 동맹을 맺은 채였다. 그는 마침내 신부를 집으로 데려왔지만, 신부가 몸을 판 다음이었다. 보나파르트 자신은 겉보기에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 당파가 그를 대신해 움직였다.

첫 각료회의에서 곧바로 로마 원정이 결정되었다. 원정은 국민의회 몰래 실행하고, 그 비용은 거짓 구실을 대어 국민의회에게서 뜯어내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일은 국민의회를 속이는 것으로, 그리고 혁명적인 로마 공화국에 맞서 외국 절대주의 열강과 몰래 공모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보나파르트는 같은 방식으로, 같은 술책으로 왕당파 입법의회와 그 입헌공화국을 겨눈 12월 2일의 쿠데타를 준비했다. 1848년 12월 20일에 보나파르트의 내각을 이룬 바로 그 당파가 1851년 12월 2일에는 입법국민의회의 다수를 이루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제헌의회는 8월에, 헌법을 보완할 일련의 조직법을 다 만들어 공포한 다음에야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질서당은 1849년 1월 6일 라토 의원을 시켜, 조직법은 그만두고 오히려 제 해산을 결의하라고 제헌의회에 제안하게 했다. 이때 오딜롱 바로 씨를 우두머리로 한 내각만이 아니라 국민의회의 왕당파 의원 모두가 제헌의회를 다그쳤다. 신용을 회복하고 질서를 굳히려면, 막연한 임시 상태를 끝내고 확정된 상태를 세우려면 해산이 필요하다고. 제헌의회가 새 정부의 생산성을 가로막고 있으며 오직 앙심으로 목숨을 이어 가려 한다고. 나라가 제헌의회에 진저리를 낸다고. 보나파르트는 입법권에 퍼부은 이 모든 독설을 새겨 두고 외워 두었다가, 1851년 12월 2일 의회의 왕당파들에게 그들에게서 배웠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는 그들의 표어를 그대로 그들에게 되돌려 주었다.

바로 내각과 질서당은 더 나아갔다. 그들은 프랑스 전역에서 국민의회에 보내는 청원을 부추겼다. 청원은 국민의회에게 사라져 달라고 아주 정중히 부탁했다. 이렇게 그들은 헌법에 따라 조직된 인민의 표현인 국민의회에 맞서, 인민의 조직되지 않은 대중을 싸움에 내보냈다. 그들은 보나파르트에게 의회를 넘어 인민에게 호소하는 법을 가르쳤다. 마침내 1849년 1월 29일, 제헌의회가 제 해산을 결정해야 할 날이 왔다. 국민의회가 나와 보니 의사당은 군대에 점령되어 있었다. 국민방위군과 정규군의 최고 지휘권을 한 손에 쥔 질서당의 장군 샹가르니에는 마치 전투가 임박한 듯 파리에서 대규모 열병을 벌였다. 그리고 연합 왕당파는 제헌의회가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힘을 쓰겠다고 위협했다. 제헌의회는 순순히 따랐고, 아주 짧은 연명 기간만 흥정해 얻어 냈다. 1월 29일은 무엇이었던가? 1851년 12월 2일의 쿠데타(coup d’état)와 다를 바 없지 않았던가? 다만 왕당파가 보나파르트와 함께 공화파 국민의회에 맞서 벌였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이 나리들은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알아차리려 하지 않았다. 보나파르트가 1849년 1월 29일을 이용해 튀일리궁 앞에서 군대 일부의 분열 행진을 받았다는 것을. 의회 권력에 맞선 군사력의 이 첫 공개 동원을 그가 탐욕스럽게 붙잡아 칼리굴라[7]를 넌지시 내비쳤다는 것을. 그들의 눈에는 물론 자기들의 샹가르니에밖에 보이지 않았다.

질서당이 제헌의회의 수명을 억지로 줄이려 한 데는 특별한 동기가 하나 더 있었다. 교육법, 종교법 같은, 헌법을 보완하는 조직법들이었다. 연합 왕당파에게는 이 법들을 자기들이 직접 만드는 것, 의심이 많아진 공화파가 만들게 두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런데 이 조직법 가운데에는 공화국 대통령의 책임에 관한 법도 있었다. 1851년 입법의회는 바로 그런 법을 만들고 있었는데, 보나파르트가 12월 2일의 쿠데타로 이 쿠데타를 앞질렀다. 그 책임법이 이미 다 만들어져 있었다면, 그것도 의심 많고 적의에 찬 공화파 의회가 만든 것이었다면, 1851년 의회 겨울 전역을 치르던 연합 왕당파는 무엇인들 내주지 않았겠는가!

1849년 1월 29일 제헌의회가 제 손으로 마지막 무기를 꺾어 버린 뒤, 바로 내각과 질서의 벗들은 제헌의회를 죽을 때까지 몰아붙였다. 굴욕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고, 스스로에게 절망한 그 무력함을 다그쳐, 대중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존경마저 잃게 하는 법들을 억지로 짜냈다. 나폴레옹식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보나파르트는 이렇게 의회 권력이 깎여 나가는 것을 공공연히 써먹을 만큼 대담했다. 1849년 5월 8일 국민의회가 우디노의 치비타베키아 점령을 두고 내각을 견책하고, 로마 원정을 그 표방된 목적으로 되돌리라고 명령했을 때였다. 보나파르트는 그날 저녁 《모니퇴르》에 우디노에게 보내는 편지를 실었다. 그 편지에서 그는 우디노의 무훈을 축하하고, 펜대나 놀리는 의회꾼들과 달리 자신이 군대의 너그러운 보호자인 양 벌써부터 행세했다. 왕당파는 이를 보고 웃었다. 그들은 그를 그저 자기들의 봉(dupe)으로 여겼다. 마침내 제헌의회 의장 마라스트가 한순간 국민의회의 안전이 위협받는다고 믿고, 헌법에 기대어 한 대령에게 그 연대를 이끌고 오라고 징발 명령을 내렸을 때였다. 대령은 군 기율을 내세워 거절하고 마라스트를 샹가르니에에게 보냈다. 샹가르니에는 자기는 생각하는 총검(baïonnettes intelligentes)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로 그를 비웃으며 물리쳤다. 1851년 11월, 연합 왕당파가 나폴레옹과 결전을 시작하려 할 때 그들은 악명 높은 재무관 법안[8]으로, 국민의회 의장이 군대를 직접 징발할 수 있다는 원칙을 관철하려 했다. 그들의 장군 가운데 하나인 르플로가 그 법안에 서명했다. 샹가르니에가 그 법안에 찬성표를 던지고 티에르가 옛 제헌의회의 신중한 지혜에 경의를 바쳤지만 헛일이었다. 육군 장관 생타르노는 샹가르니에에게, 일찍이 샹가르니에가 마라스트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대답했다. 그것도 — 산악파의 박수 속에서!

이렇게 질서당 자신이, 아직 국민의회가 아니라 내각에 지나지 않았을 때 이미 의회 체제에 낙인을 찍었던 것이다. 그런데 1851년 12월 2일이 그 체제를 프랑스에서 추방하자 질서당은 비명을 지른다!

우리는 그 체제에 즐거운 여행을 빈다.

III

1849년 5월 28일 입법국민의회가 열렸다. 1851년 12월 2일 그 의회는 깨부수어졌다. 이 기간이 곧 입헌 공화국 또는 의회 공화국의 수명이다.

제1차 프랑스 혁명에서는 입헌파의 지배 뒤에 지롱드파의 지배가 오고, 지롱드파의 지배 뒤에 자코뱅파의 지배가 온다. 이 당파들은 저마다 더 앞선 당파에 기댄다. 어느 당파가 혁명을 끌고 나가다가 더는 혁명을 따라갈 수도, 하물며 앞장설 수도 없는 데까지 이르면, 뒤에 선 더 대담한 동맹자가 그 당파를 옆으로 밀어내고 단두대로 보낸다. 혁명은 이렇게 상승선을 그리며 나아간다.

1848년 혁명은 그 반대다. 프롤레타리아 당은 소부르주아 민주파의 부속물로 나타난다. 4월 16일, 5월 15일, 그리고 6월 봉기 때 프롤레타리아 당은 민주파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받는다. 민주파는 민주파대로 부르주아 공화파의 어깨에 기댄다. 부르주아 공화파는 겨우 제 발로 섰다 싶자마자 귀찮은 동료를 떨쳐 내고 자신은 질서당의 어깨에 기댄다. 질서당은 어깨를 움츠려 부르주아 공화파를 굴러떨어지게 하고, 자신은 무장한 폭력의 어깨에 몸을 던진다. 질서당은 아직 그 어깨에 올라앉아 있다고 믿다가, 어느 화창한 아침 그 어깨가 총검으로 바뀐 것을 알아차린다. 각 당파는 뒤에서 앞으로 밀고 나오는 당파를 뒷발로 걷어차고, 앞에서 뒤로 밀어붙이는 당파에게 몸을 앞으로 기댄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있으니, 각 당파가 균형을 잃고 피할 수 없는 찡그린 얼굴을 지어 보인 다음 기묘한 곤두박질을 치며 쓰러지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혁명은 이렇게 하강선을 그리며 움직인다. 마지막 2월 바리케이드가 치워지고 첫 혁명 당국이 들어서기도 전에, 혁명은 이미 이 뒷걸음질 속에 들어서 있다.

우리 앞에 놓인 이 시기는 요란한 모순들이 뒤섞인 더없이 잡다한 혼합물이다. 헌법에 맞서 공공연히 음모를 꾸미는 입헌파가 있고, 스스로 입헌파라고 털어놓는 혁명가들이 있다. 전능하려 하면서도 늘 의회의 틀에 머무는 국민의회가 있다. 참고 견디는 것을 제 소명으로 알고, 앞으로 거둘 승리를 예언하는 것으로 지금의 패배를 받아넘기는 산악파가 있다. 공화국의 원로원 의원(patres conscripti)[1] 노릇을 하는 왕당파가 있다. 그들은 처지에 떠밀려, 자기들이 받드는 서로 적대하는 왕가들은 외국에 붙들어 두고 자기들이 미워하는 공화국은 프랑스에 붙들어 두어야 한다. 자신의 약함 속에서 힘을 찾고, 자신이 불러일으키는 경멸 속에서 체면을 찾는 행정 권력이 있다. 그리고 두 군주정, 곧 왕정복고와 7월 왕정의 파렴치를 한데 버무려 놓고 제정의 상표를 붙였을 뿐인 공화국이 있다. 첫 조항이 결별인 동맹이 있고, 결판을 내지 않는 것이 첫 법칙인 싸움이 있다. 평온의 이름으로 벌이는 거칠고 알맹이 없는 선동이 있고, 혁명의 이름으로 하는 더없이 엄숙한 평온 설교가 있다. 진실 없는 열정, 열정 없는 진실, 영웅적 행위 없는 영웅, 사건 없는 역사가 있다. 달력만이 유일한 원동력인 듯한 전개는 같은 긴장과 이완을 끝없이 되풀이해 사람을 지치게 한다. 대립들은 주기적으로 절정까지 치닫는 듯하지만, 그것은 무뎌지고 주저앉기 위해서일 뿐 끝내 풀리지는 않는다. 허세 부리며 내보이는 안간힘이 있고, 세상의 종말이 닥칠까 떠는 부르주아의 공포가 있다. 그와 동시에 세상을 구한다는 자들은 더없이 쩨쩨한 음모와 궁정 희극을 벌이는데, 그 될 대로 되라는 태평함은 최후의 심판보다 프롱드 시대[2]를 떠올리게 한다. 프랑스의 공인된 천재들이 다 모여서도 한 개인의 교활한 어리석음에 망신을 당한다. 국민의 총의는 보통선거로 말할 때마다 대중의 이익을 거스르는 해묵은 적들 속에서 제게 맞는 표현을 찾다가, 마침내 한 해적의 제멋대로인 의지 속에서 그것을 찾아낸다. 역사의 어느 한 토막이 잿빛에 잿빛을 덧칠해 그려졌다면, 바로 이 토막이다. 사람도 사건도 거꾸로 된 슐레밀[3], 곧 몸을 잃어버린 그림자처럼 보인다. 혁명은 혁명을 떠받치는 이들을 스스로 마비시키고, 혁명의 적들에게만 격렬한 열정을 갖추어 준다. 반혁명가들이 줄곧 불러냈다가 쫓아내곤 하던 ‘붉은 유령’이 마침내 나타날 때, 그것은 머리에 무정부의 프리지아 모자를 쓰고 나타나지 않는다. 질서의 제복, 곧 붉은 군복 바지[4]를 입고 나타난다.

우리가 본 대로, 보나파르트가 1848년 12월 20일, 그가 승천한 날에 세운 내각은 질서당의 내각, 곧 정통왕조파와 오를레앙파 연합의 내각이었다. 이 바로-팔루 내각은 공화파 제헌의회의 수명을 얼마간 억지로 줄여 놓고 그 의회보다 오래 살아남아, 여전히 키를 잡고 있었다. 연합 왕당파의 장군 샹가르니에는 제1군관구 총사령관직과 파리 국민방위군 총사령관직을 여전히 한 몸에 겸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총선거는 국민의회의 압도적 다수를 질서당에게 안겨 주었다. 여기서 루이 필리프 시대의 하원 의원과 귀족원 의원들은 정통왕조파의 거룩한 무리와 만났다. 이 정통왕조파에게는 국민이 던진 수많은 투표용지가 정치 무대로 들어가는 입장권으로 바뀌어 있었다. 보나파르트파 의원들은 너무 드문드문 뽑혀서 독자적인 의회 정당을 이룰 수 없었다. 그들은 질서당의 꼴사나운 꼬리로만 나타났다. 이렇게 질서당은 통치 권력과 군대와 입법부, 한마디로 국가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쥐었다. 게다가 자기 지배를 인민의 의지처럼 보이게 해 준 총선거와, 같은 때 유럽 대륙 전역에서 거둔 반혁명의 승리로 도덕적인 힘까지 얻었다.

이보다 더 많은 수단을 갖추고 이보다 더 좋은 징조 아래 출정한 당은 일찍이 없었다.

난파한 순수 공화파는 입법국민의회에서 50명쯤 되는 패거리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 선두에는 아프리카의 장군들인 카베냐크, 라모리시에르, 베도가 섰다. 그러나 큰 반대당을 이룬 것은 산악파였다. 이것은 사회민주파가 스스로 붙인 의회의 세례명이었다. 산악파는 국민의회 750표 가운데 200표 넘게 가졌으므로, 질서당의 세 분파 가운데 어느 것을 따로 떼어 놓고 보아도 적어도 그 하나만큼은 강했다. 왕당파 연합 전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소수였지만, 이는 특별한 사정들로 메워지는 듯했다. 지방 도들의 선거는 산악파가 농촌 주민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었음을 보여 주었다. 그뿐 아니라 산악파에는 파리 의원이 거의 모두 들어 있었다. 군대는 하사관 세 명을 뽑아 민주주의 신앙 고백을 했다. 그리고 산악파의 우두머리 르드뤼롤랭은 질서당의 어느 의원과도 달리 다섯 개 도가 표를 몰아주어 의회의 귀족 반열에 올라 있었다. 그러니 1849년 5월 28일, 왕당파끼리, 그리고 질서당 전체와 보나파르트 사이에 충돌이 피할 수 없는 만큼, 산악파 앞에는 성공의 모든 요소가 놓여 있는 듯했다. 두 주 뒤 산악파는 모든 것을 잃었다. 명예까지.

의회의 역사를 더 따라가기 전에 몇 가지 짚어 두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앞에 놓인 이 시대의 성격 전체를 두고 흔히 빠지는 착각을 피할 수 있다. 민주주의자들의 눈으로 보면, 입법국민의회 시기에도 제헌의회 시기와 마찬가지로 문제는 공화파와 왕당파 사이의 단순한 싸움이다. 그들은 운동 자체를 한 마디 구호로 요약한다. “반동”이다. 모든 고양이가 잿빛으로 보이는 밤과 같은 이 말 덕분에, 그들은 야경꾼처럼 상투어를 줄줄 읊어 댈 수 있다. 물론 언뜻 보면 질서당은 여러 왕당파 분파가 엉킨 실타래로 보인다. 이 분파들은 저마다 자기 왕위 요구자를 왕좌에 올리고 상대편의 요구자를 몰아내려고 서로 음모를 꾸민다. 그러면서도 ‘공화국’을 함께 미워하고 함께 공격하는 데서는 모두 하나로 뭉친다. 산악파는 산악파대로 이 왕당파 음모에 맞서 ‘공화국’의 대변자로 나선다. 질서당은 늘 ‘반동’에 바쁜 것처럼 보인다. 그 반동은 프로이센에서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언론, 결사 따위를 겨누고, 프로이센에서처럼 관료와 헌병과 검찰의 난폭한 경찰식 간섭으로 집행된다. ‘산악파’는 또 산악파대로 이 공격을 막아 내고 그렇게 ‘영원한 인권’을 지키느라 늘 바쁘다. 이른바 인민의 당이라면 어느 당이든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다소간 그래 왔듯이 말이다. 그러나 상황과 당파들을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 피상적인 겉모습은 사라진다. 계급투쟁과 이 시기의 독특한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겉모습이다.

앞서 말했듯이 정통왕조파와 오를레앙파는 질서당의 두 큰 분파였다. 이 분파들을 저마다의 왕위 요구자에게 붙잡아 매고 서로 떼어 놓은 것은 무엇이었나? 백합과 삼색기, 부르봉가와 오를레앙가, 왕당주의의 여러 빛깔, 아니 도대체 왕당주의라는 신앙 고백이었나? 부르봉가 아래서는 대토지 소유가 그 사제들과 하인들을 거느리고 다스렸다. 오를레앙가 아래서는 고급 금융, 대공업, 대상업, 곧 자본이 변호사·교수·달변가의 무리를 거느리고 다스렸다. 정통 왕권은 땅의 주인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지배를 정치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었고, 7월 왕정은 부르주아 벼락부자가 찬탈한 지배를 정치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니 이 분파들을 갈라놓은 것은 이른바 원칙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의 물질적 존재 조건,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소유였다. 도시와 농촌의 오랜 대립, 자본과 토지 소유의 경쟁이었다. 물론 옛 추억, 개인적 원한, 걱정과 희망, 편견과 환상, 호감과 반감, 신념, 신앙 조항, 원칙도 그들을 이 왕가나 저 왕가에 묶어 놓았다. 누가 그것을 부정하겠는가? 소유의 서로 다른 형태 위에, 사회적 존재 조건 위에는 서로 다르고 독특하게 빚어진 감정, 환상, 사고방식, 인생관으로 이루어진 상부구조 전체가 솟아오른다. 계급 전체가 자신의 물질적 토대와 그에 맞는 사회적 관계로부터 이것들을 만들어 내고 빚어낸다. 전통과 교육을 통해 이것들을 물려받은 개인은 이것들이야말로 자기 행동의 참된 동기이자 출발점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오를레앙파와 정통왕조파는 각 분파마다 자신과 상대에게 두 왕가에 대한 애착이 자기들을 가른다고 믿게 하려 애썼다. 그러나 뒷날의 사실이 증명한 것은 오히려 그들의 갈라진 이해가 두 왕가의 결합을 가로막았다는 것이었다. 사생활에서도 우리는 한 사람이 자기를 두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과,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하는지를 구별한다. 역사의 싸움에서는 더더욱 당파들의 말과 상상을 그들의 실제 조직, 실제 이해와 구별해야 한다. 그들이 품은 관념을 그들의 실재와 구별해야 한다. 오를레앙파와 정통왕조파는 공화국 안에서 같은 권리 주장을 들고 나란히 서게 되었다. 각 편이 상대편에 맞서 자기 왕가의 복고를 관철하려 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부르주아지를 갈라놓은 두 큰 이해, 곧 토지 소유와 자본이 저마다 자신의 패권과 상대의 종속을 되살리려 했다는 뜻이다. 우리가 부르주아지의 두 이해라고 말하는 것은, 대토지 소유가 봉건적 교태와 혈통 자랑에도 불구하고 근대 사회의 발전으로 완전히 부르주아화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토리당도 오랫동안 자기들이 왕권과 교회와 옛 영국 헌정의 아름다움에 열광한다고 착각했다. 그러다 위험이 닥친 날, 자기들이 열광하는 것은 지대뿐이라고 실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합한 왕당파는 의회 밖에서, 언론에서, 엠스와 클레어몬트[5]에서 서로를 겨누는 음모를 벌였다. 무대 뒤에서는 옛 오를레앙파와 정통왕조파의 제복을 다시 꺼내 입고 옛 마상 시합을 다시 벌였다. 그러나 공개 무대에서, 거창한 국가 대사극에서, 큰 의회 정당으로서는 각자의 왕가에 형식적인 절만 올리고 군주정의 복고를 한없이 미루었다. 그들은 질서당으로서 진짜 사업을 했다. 다시 말해 정치적 명목이 아니라 사회적 명목으로, 떠도는 공주를 모시는 기사가 아니라 부르주아 세계 질서의 대표자로서, 공화파에 맞선 왕당파가 아니라 다른 모든 계급에 맞선 부르주아 계급으로서 일했다. 그리고 질서당으로서 그들은 사회의 다른 계급들 위에, 일찍이 왕정복고나 7월 왕정 아래서보다 더 무제한적이고 가혹한 지배를 휘둘렀다. 그런 지배는 오직 의회 공화국이라는 형태 아래서만 가능했다. 이 형태 아래서만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두 큰 갈래가 하나로 뭉칠 수 있었고, 그리하여 계급 안 한 특권 분파의 체제가 아니라 계급 전체의 지배를 의사일정에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질서당으로서도 공화국을 모욕하고 공화국에 대한 혐오를 드러냈다면, 그것은 왕당파의 추억 때문만은 아니었다. 본능이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공화국은 그들의 정치적 지배를 완성하지만, 동시에 그 사회적 토대를 허문다는 것을. 공화국에서 그들은 아무 매개 없이, 왕관이라는 은신처도 없이, 억눌린 계급들과 직접 맞서 씨름해야 했다. 자기들끼리의 싸움이나 왕권과의 싸움 같은 부차적인 싸움으로 국민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릴 수도 없었다. 그들을 자기 계급 지배의 순수한 조건 앞에서 움찔 물러서게 하고, 그 지배의 덜 완전하고 덜 발달한, 바로 그래서 덜 위험한 형태를 그리워하게 만든 것은 약함의 느낌이었다. 반대로 연합 왕당파가 자기들과 맞선 왕위 요구자 보나파르트와 충돌할 때마다, 행정 권력이 자기들의 의회 전능을 위협한다고 믿을 때마다, 그래서 자기 지배의 정치적 명목을 내세워야 할 때마다, 그들은 왕당파가 아니라 공화파로 나선다. 공화국이야말로 자기들을 가장 덜 갈라놓는다고 국민의회에 경고하는 오를레앙파 티에르부터, 1851년 12월 2일 삼색 띠를 두르고 제10구 구청 앞에 모인 인민에게 호민관처럼 공화국의 이름으로 연설하는 정통왕조파 베리에까지 그렇다. 하기야 메아리는 그에게 비웃듯이 되받아 외친다. 앙리 5세! 앙리 5세!

연합한 부르주아지에 맞서 소부르주아와 노동자의 연합, 이른바 사회민주파가 생겨나 있었다. 소부르주아는 1848년 6월 봉기 뒤 자기들이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느꼈다. 물질적 이해는 위태로워졌고, 그 이해를 주장할 수 있게 해 줄 민주주의적 보장들은 반혁명 때문에 흔들렸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자에게 다가갔다. 다른 한편 그들의 의회 대표인 산악파는 부르주아 공화파가 독재하는 동안 밀려나 있었지만, 제헌의회 임기 후반에 보나파르트와 왕당파 장관들과 싸우면서 잃었던 인기를 되찾았다. 산악파는 사회주의 지도자들과 동맹을 맺었다. 1849년 2월에는 화해의 연회가 열렸다. 공동 강령이 마련되고, 공동 선거위원회가 세워지고, 공동 후보가 나섰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적 요구는 혁명적인 날이 꺾이고 민주주의 쪽으로 방향이 틀어졌다. 소부르주아지의 민주주의적 요구는 순전히 정치적인 형식이 벗겨지고 사회주의적인 날이 드러났다. 그렇게 사회민주파가 생겨났다. 이 결합의 산물인 새 산악파는 노동계급 출신의 몇몇 들러리와 몇몇 사회주의 종파 인사를 빼면, 옛 산악파와 같은 요소로 이루어졌다. 다만 수가 더 많았을 뿐이다. 그러나 전개 과정에서 산악파는 자신이 대표하는 계급과 함께 변해 있었다. 사회민주파의 독특한 성격은 이렇게 요약된다. 민주공화제의 제도를 수단으로 요구하되, 자본과 임노동이라는 두 극단을 함께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대립을 누그러뜨려 조화로 바꾸기 위해서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 목적을 이루려고 어떤 방책이 제안되든, 그 목적이 다소간 혁명적인 관념으로 얼마나 치장되든, 내용은 그대로다. 그 내용은 민주주의적인 길로 사회를 바꾸는 것, 그러나 소부르주아지의 테두리 안에서 바꾸는 것이다. 다만 소부르주아지가 원칙적으로 이기적인 계급 이해를 관철하려 한다는 편협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소부르주아지는 자기 해방의 특수한 조건이 곧 보편적 조건이며, 오직 그 조건 안에서만 근대 사회를 구하고 계급투쟁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대표자들이 모두 가게 주인이거나 가게 주인에 열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교양으로 보나 개인적 처지로 보나 가게 주인과 하늘과 땅만큼 떨어져 있을 수 있다. 그들을 소부르주아의 대표자로 만드는 것은, 소부르주아가 생활에서 넘지 못하는 한계를 그들이 머릿속에서 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론에서, 소부르주아가 물질적 이해와 사회적 처지에 떠밀려 실천에서 이르는 바로 그 과제와 해결책에 이른다. 이것이 대체로 한 계급의 정치적·문필적 대표자와 그들이 대표하는 계급 사이의 관계다.

이렇게 설명하고 나면 다음은 저절로 이해된다. 산악파가 공화국과 이른바 인권을 두고 질서당과 끊임없이 씨름한다 해도, 공화국도 인권도 산악파의 최종 목적은 아니다. 무기를 빼앗길 판이 되어 맞서 싸우는 군대가, 제 무기를 지니고 있으려고 싸움터에 나선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질서당은 국민의회가 열리자마자 산악파를 도발했다. 부르주아지는 이제 민주파 소부르주아를 끝장낼 필요를 느꼈다. 한 해 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끝장낼 필요를 깨달았던 것처럼. 다만 적의 처지가 달랐다. 프롤레타리아 당의 힘은 거리에 있었고, 소부르주아의 힘은 국민의회 안에 있었다. 그러니 시간과 기회가 그 힘을 굳히기 전에 그들을 국민의회에서 거리로 꾀어내어, 그들 손으로 자기 의회 권력을 부수게 해야 했다. 산악파는 고삐를 풀어 놓고 함정 속으로 내달렸다.

프랑스군의 로마 포격이 산악파에게 던져진 미끼였다. 그 포격은 프랑스 공화국이 다른 인민의 자유를 겨누어 무력을 쓰는 것을 금한 헌법 제5조를 어겼다. 게다가 제54조는 행정 권력이 국민의회의 동의 없이 전쟁을 선포하는 것을 일절 금했고, 제헌의회는 5월 8일 결의로 로마 원정을 견책한 바 있었다. 이를 근거로 르드뤼롤랭은 1849년 6월 11일 보나파르트와 그 장관들에 대한 탄핵안을 냈다. 티에르의 말벌 같은 쏘아붙임에 약이 오른 그는, 헌법을 모든 수단으로, 무기를 들고서라도 지키겠다는 위협까지 내뱉고 말았다. 산악파는 한 사람처럼 일어나 이 무장 호소를 되풀이했다. 6월 12일 국민의회는 탄핵안을 부결했고, 산악파는 의회를 떠났다. 6월 13일의 사건은 잘 알려져 있다. 산악파 일부가 성명을 내어 보나파르트와 장관들을 “헌법 밖”에 있다고 선언했다. 민주파 국민방위군이 거리 행진을 벌였는데, 무기가 없었던 터라 샹가르니에의 군대와 맞닥뜨리자 흩어져 달아났다. 등등, 등등. 산악파의 일부는 외국으로 도망쳤고, 다른 일부는 부르주 고등법원에 넘겨졌으며, 나머지는 의회 규칙에 따라 국민의회 의장에게 학생처럼 감독받는 신세가 되었다. 파리는 다시 계엄 아래 놓였고, 파리 국민방위군의 민주파 부대는 해산되었다. 이렇게 의회 안 산악파의 영향력과 파리 소부르주아의 힘이 꺾였다.

리옹에서는 6월 13일이 노동자들의 유혈 봉기를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그 리옹도 인근 다섯 개 도와 함께 계엄이 선포되었다. 그 계엄은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지고 있다.

산악파의 본대는 선봉의 성명에 서명을 거부함으로써 선봉을 저버렸다. 언론은 탈영했다. 그 궐기 선언을 감히 실은 신문은 두 곳뿐이었다. 소부르주아는 자기 대표자들을 배신했다. 국민방위군은 나오지 않았고, 나온 곳에서는 바리케이드 쌓기를 막았다. 대표자들은 소부르주아를 속였다. 군대 안에 있다던 동조자들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끝으로 민주파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서 힘을 보태 받기는커녕, 제 약함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옮겨 놓았다. 그리고 민주주의자들이 큰일을 벌일 때 늘 그렇듯, 지도자들은 자기 ‘인민’을 탈영했다고 나무랄 수 있어 흡족했고, 인민은 지도자들을 사기꾼이라고 나무랄 수 있어 흡족했다.

산악파의 이번 출정만큼 요란하게 예고된 행동은 드물었고, 민주주의의 피할 수 없는 승리만큼 확신에 차서 오래전부터 나팔 불어 댄 사건도 드물었다. 분명히 민주주의자들은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린 그 나팔을 믿는다. 그래서 전제정의 성벽 앞에 설 때마다 그 기적을 흉내 내려 한다. 산악파가 의회에서 이기려 했다면 무기를 들자고 외쳐서는 안 되었다. 의회에서 무기를 들자고 외쳤다면 거리에서 의회식으로 굴어서는 안 되었다. 평화 시위가 진심이었다면, 그것이 무력으로 맞아들여지리라는 것을 내다보지 못한 것은 어리석었다. 진짜 싸움을 노렸다면, 싸움에 꼭 필요한 무기를 내려놓은 것은 참으로 독창적이었다. 그러나 소부르주아와 그 민주주의 대표자들의 혁명적 위협은 상대를 겁주려는 시도일 뿐이다. 그들이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아, 위협을 실행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체면을 걸고 나면, 그 실행은 애매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목적을 이룰 수단만은 무엇보다 피하고, 질 핑계만 붙잡으려는 방식이다. 싸움을 알리던 우렁찬 서곡은 막상 싸움이 시작되어야 할 때 기죽은 투덜거림으로 잦아든다. 배우들은 더는 자기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고, 극은 바늘로 찌른 바람 든 풍선처럼 납작하게 주저앉는다.

어떤 당도 민주파만큼 자기 수단을 부풀려 생각하지 않으며, 어떤 당도 그만큼 경솔하게 상황을 오판하지 않는다. 군대 일부가 자기들에게 표를 던졌다고 해서, 산악파는 이제 군대가 자기들을 위해 반란을 일으키리라고 확신했다. 그것도 어떤 계기로? 병사들 처지에서 보면 혁명가들이 프랑스 병사에 맞서 로마 병사 편을 든다는 뜻밖에 없는 계기로. 다른 한편 1848년 6월의 기억이 아직 너무 생생했다. 그러니 국민방위군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깊은 반감과, 민주파 우두머리들에 대한 비밀 결사 우두머리들의 뿌리 깊은 불신이 없을 수 없었다. 이 틈을 메우려면 큰 공동의 이해가 걸려 있어야 했다. 헌법의 추상적인 한 조항이 짓밟혔다는 것으로는 그런 이해가 생기지 않았다. 민주주의자들 자신의 말대로라도 헌법은 이미 여러 번 짓밟히지 않았던가? 가장 인기 있는 신문들은 헌법을 반혁명의 날림 작품이라고 낙인찍지 않았던가? 그러나 민주주의자는 소부르주아지, 곧 두 계급의 이해가 함께 무뎌지는 과도기 계급을 대표한다. 그래서 자신이 계급 대립 일반을 넘어서 있다고 자부한다. 민주주의자들은 특권 계급이 자기들과 맞서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자기들은 국민의 나머지 모두와 함께 인민을 이룬다고 여긴다. 그들이 대표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이고, 그들의 관심사는 인민의 이익이다. 그러니 싸움이 다가와도 여러 계급의 이해와 처지를 따져 볼 필요가 없다. 자기 수단을 너무 꼼꼼히 저울질할 필요도 없다. 신호만 보내면 인민이 그 무궁무진한 힘을 다 쏟아 압제자들에게 덤벼들 테니까. 그런데 막상 해 보니 자기들의 관심사가 아무의 관심도 끌지 못하고 자기들의 힘이 무력함으로 드러나면, 탓할 곳은 정해져 있다. 나눌 수 없는 인민을 서로 적대하는 진영으로 갈라놓는 해로운 궤변가들 탓이다. 아니면 군대가 너무 짐승처럼 무디고 눈이 멀어 민주주의의 순수한 목적이 자기에게도 가장 좋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탓이다. 아니면 실행의 세부 하나 때문에 전체가 실패했거나, 뜻밖의 우연이 이번 판을 망친 탓이다. 어쨌든 민주주의자는 결백하게 들어갔던 것처럼 더없이 수치스러운 패배에서도 흠 하나 없이 빠져나온다. 그리고 새로운 확신을 얻는다. 자기는 이길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다. 자기와 자기 당이 낡은 입장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상황이 자기에게 맞추어 무르익어야 한다는 확신이다.

그러니 수가 줄고 꺾이고 새 의회 규칙으로 굴욕을 당한 산악파를 너무 불행하게만 그릴 필요는 없다. 6월 13일이 그 우두머리들을 치워 버렸다면, 그것은 다른 한편 더 아랫급 인재들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이들은 새 지위가 흐뭇했다. 의회에서 그들이 무력하다는 것을 더는 의심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제 그들은 자기 행동을 도덕적 분노의 폭발과 우렁찬 열변으로 한정할 권리도 얻었다. 질서당은 그들을 혁명의 마지막 공식 대표자로 내세워 그들 몸에 무정부의 온갖 공포가 깃들어 있다고 짐짓 떠들었다. 그럴수록 그들은 실제로는 더 시시하고 얌전해도 되었다. 그리고 6월 13일에 대해서는 이 심오한 말로 스스로를 달랬다. 그러나 감히 보통선거권을 건드리기만 해 봐라, 그때는! 그때는 우리가 누구인지 보여 주겠다. 두고 보자!

외국으로 도망친 산악파 의원들에 대해서는 이렇게만 말해 두면 된다. 르드뤼롤랭은 자기가 이끌던 강력한 당을 두 주도 안 되어 돌이킬 수 없이 망쳐 놓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이제 자기가 이름뿐인(in partibus)[6] 프랑스 정부를 세울 사명을 받았다고 여겼다. 멀리 떨어져 행동의 무대에서 들어 올려진 그의 모습은, 혁명의 수위가 낮아지고 공식 프랑스의 공식 거물들이 난쟁이처럼 작아질수록 그만큼 커지는 듯 보였다. 그는 1852년을 노리는 공화파 왕위 요구자 노릇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왈라키아인과 다른 여러 민족에게 주기적으로 회람을 보내, 자기와 동맹자들의 행동으로 대륙의 전제군주들을 위협했다. 프루동이 이 신사들에게 “당신들은 허풍선이일 뿐이오!” 하고 외쳤을 때, 그가 완전히 틀렸던가?

질서당은 6월 13일 산악파를 꺾었을 뿐 아니라 헌법을 국민의회의 다수결 아래 두는 것을 관철했다. 질서당이 이해한 공화국은 이런 것이었다. 부르주아지가 의회의 형식으로 다스리되, 군주정에서처럼 행정 권력의 거부권이나 의회 해산권이라는 제약에 부딪히지 않는 것. 그것이 티에르가 이름 붙인 의회 공화국이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6월 13일 의사당 안에서 자기 전능을 확보하면서 의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부분을 쫓아냈다. 그로써 행정 권력과 인민 앞에서 의회 자체를 고칠 수 없이 약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던가? 수많은 의원을 별 절차도 없이 검찰의 요구에 내줌으로써, 부르주아지는 자기 자신의 의원 불가침권을 없앴다. 산악파에 씌운 굴욕적인 규칙은 개개 인민 대표를 끌어내리는 만큼 공화국 대통령을 높인다. 헌법을 지키려는 봉기를 사회 전복을 노리는 무정부적 행위로 낙인찍음으로써, 부르주아지는 행정 권력이 자기에게 맞서 헌법을 어길 때 봉기에 호소할 길을 스스로 막았다. 그리고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렇다. 보나파르트의 명령으로 로마를 포격해 6월 13일 헌법 수호 소요의 직접적 계기를 만든 장군이 우디노다. 1851년 12월 2일 질서당은 바로 그 우디노를 보나파르트에 맞설 헌법의 장군으로 인민에게 애원하듯 내밀어야 하고, 그것도 헛되이 그래야 한다. 6월 13일의 또 다른 영웅 비에라는 고급 금융에 속한 국민방위군 무리를 이끌고 민주파 신문사들에서 만행을 저질렀고, 그 일로 국민의회 연단에서 칭찬을 거두어들였다. 바로 그 비에라가 보나파르트의 음모에 가담했고, 국민의회의 임종 때 국민방위군의 보호를 일절 끊어 놓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6월 13일에는 또 다른 뜻이 있었다. 산악파는 보나파르트를 억지로라도 탄핵하려 했다. 그러니 산악파의 패배는 보나파르트의 직접적 승리, 민주파 적들에 대한 그의 개인적 승리였다. 질서당이 싸워서 승리를 얻었고, 보나파르트는 그것을 거두어들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는 그렇게 했다. 6월 14일 파리의 벽에 한 포고문이 나붙었다. 거기서 대통령은 마치 제 뜻과는 상관없이, 마지못해, 오로지 사건의 힘에 떠밀려 수도원 같은 은둔에서 나온다. 그는 알아주는 이 없는 미덕인 양 적들의 중상을 한탄한다. 그리고 자기 개인을 질서의 대의와 동일시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은 질서의 대의를 자기 개인과 동일시한다. 게다가 국민의회는 로마 원정을 나중에야 승인했지만, 원정을 먼저 꾀한 것은 보나파르트였다. 대사제 사무엘을 바티칸에 다시 들여앉혔으니, 그는 다윗 왕으로서 튀일리궁에 들어갈 날을 바랄 수 있었다[7]. 그는 사제들을 제 편으로 얻었다.

앞서 보았듯 6월 13일의 소요는 평화로운 거리 행진에 그쳤다. 그러니 그것을 상대로 무공의 월계관을 얻을 거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영웅도 사건도 드문 이 시절에 질서당은 이 피 흘림 없는 전투를 제2의 아우스터리츠로 둔갑시켰다. 연단과 언론은 무정부의 무력함인 인민 대중과 맞세워 군대를 질서의 힘이라고 기렸고, 샹가르니에를 “사회의 방벽”으로 치켜세웠다. 끝내 샹가르니에 자신도 믿게 된 신비화였다. 그러나 뒤에서는 미덥지 않아 보이는 부대를 파리에서 옮기고 프랑스에서 알제리로 내쫓았으며, 병사들 가운데 말썽 많은 자들은 징벌 부대로 보냈다. 끝으로 언론을 병영에서, 병영을 시민 사회에서 떼어 놓는 일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우리는 프랑스 국민방위군 역사의 결정적 전환점에 이르렀다. 1830년 국민방위군은 왕정복고의 몰락을 결정지었다. 루이 필리프 아래서는 국민방위군이 군대 편에 선 소요는 모두 실패했다. 1848년 2월의 나날에 국민방위군이 봉기에는 소극적으로, 루이 필리프에게는 애매하게 굴자, 그는 스스로 끝났다고 여겼고 실제로 끝났다. 그리하여 혁명은 국민방위군 없이는 이길 수 없고, 군대는 국민방위군에 맞서서는 이길 수 없다는 확신이 뿌리내렸다. 그것은 부르주아의 전능에 대한 군대의 미신이었다. 국민방위군 전체가 정규군과 함께 봉기를 짓눌렀던 1848년 6월 봉기는 이 미신을 굳혀 주었다. 보나파르트가 집권한 뒤 국민방위군의 지위는 어느 정도 떨어졌다. 헌법을 어기고 국민방위군 지휘권을 제1군관구 지휘권과 함께 샹가르니에 한 사람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여기서 국민방위군 지휘권이 군 최고 사령관에게 딸린 속성으로 나타났듯이, 국민방위군 자체도 이제 정규군의 부속물로만 보였다. 6월 13일 마침내 국민방위군은 꺾였다. 부분적인 해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해산은 그 뒤로 프랑스 곳곳에서 주기적으로 되풀이되어 국민방위군의 잔해만 남겼다. 6월 13일의 시위는 무엇보다 민주파 국민방위군의 시위였다. 그들은 군대 앞에 무기는 아니어도 제복만은 들고 나섰다. 그런데 바로 그 제복에 부적의 힘이 깃들어 있었다. 군대는 이 제복도 여느 것과 다름없는 털실 천 조각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마법이 풀렸다. 1848년 6월 봉기 때 부르주아지와 소부르주아지는 국민방위군으로서 군대와 함께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섰다. 1849년 6월 13일 부르주아지는 소부르주아 국민방위군을 군대가 흩어 버리게 내버려 두었다. 1851년 12월 2일에는 부르주아지의 국민방위군 자체가 사라져 있었다. 보나파르트가 뒤늦게 국민방위군 해산령에 서명했을 때, 그는 이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이렇게 부르주아지는 군대에 맞설 마지막 무기를 제 손으로 부숴 버렸다. 그러나 소부르주아지가 더는 가신으로서 뒤에 서지 않고 반역자로서 앞에 맞서게 된 순간부터, 부르주아지는 그 무기를 부술 수밖에 없었다. 부르주아지가 스스로 절대 권력이 되자마자 절대주의에 맞서던 자신의 방어 수단을 모두 제 손으로 부술 수밖에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사이 질서당은 권력을 되찾은 것을 축하했다. 1848년에 잃은 듯했다가, 1849년에 온갖 제약에서 풀려난 채 다시 찾은 권력이었다. 축하의 방식은 공화국과 헌법에 퍼붓는 독설이었고, 미래와 현재와 과거의 모든 혁명, 자기네 지도자들이 일으킨 혁명까지 포함한 모든 혁명에 대한 저주였다. 그리고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결사를 없애고, 계엄을 상설 제도로 규정하는 법률들이었다. 그런 다음 국민의회는 자리를 비우는 동안을 맡을 상임위원회를 임명하고 8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휴회했다. 이 휴가 동안 정통왕조파는 엠스와, 오를레앙파는 클레어몬트와 음모를 꾸몄다. 보나파르트는 왕자처럼 지방을 순회하며, 도의회들은 헌법 개정을 논의하며 음모를 꾸몄다. 이런 일은 국민의회가 주기적으로 휴회할 때마다 어김없이 되풀이되는데, 나는 그것이 사건이 될 때에야 다루려 한다. 여기서는 이것만 짚어 두자. 국민의회는 꽤 긴 기간 무대에서 사라져, 공화국 꼭대기에 하나의 형상만, 그것도 초라하기 짝이 없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형상만 보이게 했다. 그사이 질서당은 대중이 보는 앞에서 추태를 부리며 왕당파 구성 요소들로 흩어져, 서로 부딪치는 복고 욕망을 좇았다. 그러니 국민의회는 정치적으로 서툴게 행동한 것이다. 이 휴가 동안 의회의 어지러운 소음이 잦아들고 의회라는 몸이 국민 속으로 흩어질 때마다, 이 공화국의 참모습을 완성하는 데 모자란 것은 단 하나뿐이라는 것이 뚜렷이 드러났다. 의회의 휴가를 영구적인 것으로 만들고, 공화국의 구호 ‘자유, 평등, 박애’를 오해의 여지 없는 말, ‘보병, 기병, 포병!’으로 바꾸는 것이다.

IV

1849년 10월 중순 국민의회가 다시 모였다. 11월 1일 보나파르트는 교서를 보내 국민의회를 놀라게 했다. 바로-팔루 내각을 해임하고 새 내각을 꾸렸다는 통고였다. 하인도 보나파르트가 장관들을 내쫓은 것만큼 격식 없이 쫓겨난 적은 없었다. 국민의회에 돌아갈 발길질을 당분간은 바로 일당이 받았다.

앞서 보았듯 바로 내각은 정통왕조파와 오를레앙파로 짜인 질서당의 내각이었다. 보나파르트에게 이 내각이 필요했던 것은 공화파 제헌의회를 해산하고, 로마 원정을 해치우고, 민주파를 꺾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 내각 뒤에 숨어 겉으로는 모습을 감추었고, 통치 권력을 질서당의 손에 넘겼으며, 겸손한 가면을 썼다. 루이 필리프 시대에 신문의 책임 발행인[1]이 쓰던 가면, 곧 허수아비의 가면이었다. 이제 그는 그 가면을 던져 버렸다. 그것은 더는 제 얼굴을 숨겨 주는 가벼운 장막이 아니라, 제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게 막는 철가면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질서당의 이름으로 공화파 국민의회를 날려 버리려고 바로 내각을 세웠다. 그리고 질서당의 국민의회로부터 자기 이름이 독립했음을 선언하려고 그 내각을 해임했다.

해임의 그럴듯한 구실은 얼마든지 있었다. 바로 내각은 공화국 대통령을 국민의회와 나란한 하나의 권력으로 보이게 해 줄 예의범절조차 소홀히 했다. 국민의회가 휴회하는 동안 나폴레옹은 에드가르 네에게 보내는 편지를 공개했는데, 거기서 그는 교황의 반자유주의적 처신을 못마땅해하는 듯했다. 앞서 제헌의회에 맞서, 로마 공화국을 공격한 우디노를 칭찬하는 편지를 공개했던 것과 같은 식이었다. 그런데 국민의회가 로마 원정 예산을 표결할 때, 빅토르 위고가 자유주의를 표방한답시고 그 편지를 들추어냈다. 질서당은 “보나파르트의 착상 따위에 무슨 무게가 있다는 거냐”는 듯 경멸하고 못 믿겠다는 외침을 퍼부어 이 착상을 묵살했다. 장관 가운데 누구도 그를 위해 도전장을 받아 들지 않았다. 또 한 번은 바로가 그 유명한 공허한 비장함으로, 대통령 바로 곁에서 벌어진다는 “가증스러운 책동”에 분노하는 말을 연단에서 떨구었다. 끝으로 내각은 오를레앙 공작부인에게는 국민의회에서 과부 연금을 얻어 주면서, 대통령 세비를 올려 달라는 제안은 모두 거절했다. 그런데 보나파르트 안에서는 황제 자리를 노리는 왕위 요구자와 몰락한 모험가가 너무나 단단히 녹아 붙어 있었다. 그래서 자기가 제정을 되살릴 사명을 받았다는 큰 생각 하나에는, 프랑스 인민이 자기 빚을 갚아 줄 사명을 받았다는 또 하나의 생각이 늘 따라붙었다.

바로-팔루 내각은 보나파르트가 세운 처음이자 마지막 의회 내각이었다. 그래서 그 해임은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이 내각과 함께 질서당은 의회 체제를 지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거점, 곧 행정 권력의 손잡이를 잃었고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프랑스 같은 나라를 생각해 보면 곧바로 이해된다. 이 나라에서 행정 권력은 50만 명이 넘는 관리 군단을 부리고, 그래서 엄청난 수의 이해관계와 생계를 늘 더없이 무조건적으로 자기에게 매어 둔다. 국가는 시민 사회를 그 가장 큰 생활 표현에서 가장 하찮은 움직임까지, 가장 일반적인 존재 방식에서 개인의 사생활까지 휘감고, 통제하고, 규제하고, 감시하고, 후견한다. 이 기생체는 더없이 극단적인 중앙집권 덕분에 어디에나 있고 모든 것을 알며, 재빨리 움직이고 튀어 오르는 힘을 얻는다. 그 힘에 견줄 만한 것은 현실 사회라는 몸이 보이는 속수무책의 비자립성과 흐트러진 무정형뿐이다. 이런 나라에서 국민의회가 장관 자리를 마음대로 할 권한을 잃으면, 모든 실질적 영향력을 내준 것이나 다름없다. 동시에 국가 행정을 단순하게 하고, 관리 군단을 되도록 줄이고, 끝으로 시민 사회와 여론이 통치 권력에서 독립한 자기 기관을 만들어 내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물질적 이해는 바로 그 넓고 가지 많은 국가 기계를 유지하는 것과 더없이 깊이 얽혀 있다. 부르주아지는 여기서 남아도는 인구를 자리 잡게 하고, 이윤·이자·지대·사례금의 형태로 챙기지 못하는 것을 국가 봉급의 형태로 채운다. 다른 한편 부르주아지는 정치적 이해 때문에 억압을, 곧 국가 권력의 수단과 인원을 날마다 늘려야 했다. 동시에 여론에 맞서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야 했고, 사회의 자립적인 운동 기관들을 아예 잘라 내지 못하는 곳에서는 의심 어린 눈으로 불구로 만들고 마비시켜야 했다. 이렇게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계급적 처지 때문에, 한편으로는 모든 의회 권력의 생존 조건을, 따라서 자기 의회 권력의 생존 조건까지 없애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와 적대하는 행정 권력을 거역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새 내각은 도풀 내각이라고 불렸다. 도풀 장군이 총리 자리에 올랐다는 뜻은 아니다. 보나파르트는 바로를 내보내면서 이 직위 자체를 없애 버렸다. 이 직위가 있는 한 공화국 대통령은 입헌 군주처럼 법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묶여 있었다. 그것도 왕좌도 왕관도 없고, 홀도 칼도 없고, 책임을 지지 않는 특권도 없고, 최고 국가 지위를 시효 없이 차지할 권리도 없고, 가장 치명적이게도 세비마저 없는 입헌 군주였다. 도풀 내각에서 의회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단 하나, 유대인 풀드뿐이었다. 그는 고급 금융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인물 가운데 하나였고, 재무부를 맡았다. 파리 증권 거래소의 시세표를 찾아보라. 1849년 11월 1일부터 프랑스 국채가 보나파르트파 주가의 오르내림에 따라 오르내린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거래소에서 한패를 얻은 보나파르트는 동시에 카를리에를 파리 경찰청장에 앉혀 경찰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내각 교체의 결과는 사태가 전개되면서야 드러날 수 있었다. 처음에 보나파르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가 그만큼 더 눈에 띄게 뒤로 밀려났을 뿐이다. 퉁명스러운 교서 뒤에는 국민의회에 바치는 더없이 비굴한 복종 선언이 이어졌다. 장관들이 그의 개인적인 변덕을 법안으로 내놓는 소심한 시도를 감행할 때마다, 그들 자신도 마지못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실패할 줄 미리 아는 우스꽝스러운 심부름을 한다는 듯이. 보나파르트가 장관들 등 뒤에서 제 속셈을 떠벌리고 자기의 ‘나폴레옹적 관념’을 가지고 놀 때마다, 바로 그의 장관들이 국민의회 연단에서 그를 부인했다. 그의 찬탈 욕망은 적들의 고소해하는 웃음이 그치지 않게 하려고 소리를 내는 것처럼만 보였다. 그는 온 세상이 바보 취급하는, 알아주는 이 없는 천재처럼 굴었다. 그가 이 시기만큼 모든 계급의 경멸을 흠뻑 받은 적은 없었다. 부르주아지가 이 시기만큼 무조건적으로 지배하고, 지배의 휘장을 이만큼 뽐내며 두른 적도 없었다.

이 시기 부르주아지가 벌인 입법 활동의 역사를 여기서 쓸 생각은 없다. 그 활동은 두 법으로 요약된다. 포도주세를 되살린 법과, 불신앙을 없애는 교육법[2]이다. 프랑스인은 포도주를 마시기가 어려워진 대신, 참된 생명의 물은 그만큼 넉넉히 받았다. 부르주아지가 포도주세 법으로 프랑스의 낡고 미움받는 조세 제도를 건드릴 수 없는 것으로 선언했다면, 교육법으로는 그 제도를 견디게 해 준 대중의 낡은 마음가짐을 지키려 했다. 오를레앙파, 곧 자유주의 부르주아들, 볼테르주의와 절충 철학의 이 오랜 사도들이 자기들의 숙적인 예수회에게 프랑스 정신의 관리를 맡기는 것을 보면 놀랍다. 그러나 오를레앙파와 정통왕조파는 왕위 요구자를 두고는 갈라설 수 있어도, 자기들의 연합 지배가 두 시대의 억압 수단을 하나로 합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이해했다. 곧 7월 왕정의 예속 수단을 왕정복고의 예속 수단으로 보완하고 강화해야 했다.

모든 희망을 배신당한 농민들은 한편으로는 낮은 곡물 값에, 다른 한편으로는 늘어나는 조세 부담과 저당 빚에 어느 때보다 짓눌려, 지방에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돌아온 대답은 교사들을 몰아쳐 사제에게 굴복시키고, 시장들을 몰아쳐 도지사에게 굴복시키고, 모두를 감시 체계 아래 두는 것이었다. 파리와 큰 도시들에서는 반동 자체가 제 시대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짓누르기보다 도발하는 편이다. 농촌에서 반동은 시시하고 비천하고 쩨쩨하고 지루하고 들볶는 것, 한마디로 헌병이 된다. 사제의 축복을 받은 헌병의 지배 3년이 미숙한 대중을 얼마나 타락시킬 수밖에 없었는지 알 만하다.

질서당이 국민의회 연단에서 소수파를 상대로 얼마만 한 열정과 열변을 쏟아붓든, 그 말은 ‘예, 예, 아니요, 아니요!’만 해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의 말[3]처럼 외마디였다. 연단에서도 외마디, 신문에서도 외마디였다. 답이 미리 알려진 수수께끼 같았다. 청원권이든 포도주세든, 언론 자유든 자유무역이든, 클럽이든 지방자치 제도든, 개인 자유의 보호든 국가 예산의 정리든, 구호는 언제나 되풀이되고 주제는 언제나 같으며 판결은 언제나 이미 나와 있다. 판결은 한결같다. “사회주의!” 부르주아 자유주의조차 사회주의적이라고 선고되고, 부르주아 계몽도 사회주의적, 부르주아 재정 개혁도 사회주의적이라고 선고된다. 운하가 이미 있는 곳에 철도를 놓는 것도 사회주의적이었고, 칼로 공격당했을 때 지팡이로 막는 것도 사회주의적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말버릇이나 유행이나 당의 전술이 아니었다. 부르주아지는 올바로 꿰뚫어 보았다. 자기가 봉건제에 맞서 벼려 낸 모든 무기가 칼끝을 자기에게 돌리고, 자기가 만들어 낸 모든 교육 수단이 자기 문명에 반역하며, 자기가 만든 모든 신이 자기를 저버렸다는 것을. 이른바 시민적 자유와 진보 기관들이 모두 자기의 계급 지배를 사회적 토대에서도 정치적 정점에서도 공격하고 위협한다는 것, 그러니까 “사회주의적”이 되었다는 것을 부르주아지는 이해했다. 이 위협과 공격 속에서 부르주아지가 사회주의의 비밀을 찾아낸 것은 옳았다. 부르주아지는 사회주의의 의미와 경향을, 이른바 사회주의가 스스로를 판단하는 것보다 더 바르게 판단한다. 그래서 이른바 사회주의는 부르주아지가 왜 그토록 완고하게 자기를 외면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 사회주의가 감상적으로 인류의 고통을 두고 훌쩍이든, 기독교식으로 천년왕국과 보편적 형제애를 선포하든, 인문주의식으로 정신과 교양과 자유를 늘어놓든, 교조적으로 모든 계급의 화해와 복리를 위한 체계를 짜내든 마찬가지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거기서 나오는 귀결은 이해하지 못했다. 자기 자신의 의회 체제, 아니 자기의 정치적 지배 일반도 이제 사회주의적이라는 이유로 모두의 단죄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귀결이다.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가 완전히 조직되지 않고 순수한 정치적 표현을 얻지 못한 동안에는, 다른 계급들의 대립도 순수하게 드러날 수 없었다. 드러나더라도, 국가 권력에 맞선 모든 싸움을 자본에 맞선 싸움으로 바꾸어 놓는 위험한 방향을 띨 수는 없었다. 사회의 모든 생활 움직임에서 ‘평온’이 위협받는다고 본 부르주아지가, 어떻게 사회의 꼭대기에서 불안의 체제를, 자기 자신의 체제인 의회 체제를 지키려 할 수 있었겠는가? 부르주아지의 한 연사 말대로 싸움 속에서 싸움으로 살아가는 이 체제를? 의회 체제는 토론으로 산다. 그런 체제가 어떻게 토론을 금하겠는가? 여기서는 모든 이해, 모든 사회 제도가 일반적 사상으로 바뀌고 사상으로서 논의된다. 그런데 어떤 이해나 제도가 어떻게 사유 위에 버티고 서서 신앙 조항으로 군림하겠는가? 연단에서 벌어지는 연사들의 싸움은 신문 글쟁이들의 싸움을 불러낸다. 의회 안의 토론 클럽은 살롱과 술집의 토론 클럽들로 반드시 보완된다. 늘 여론에 호소하는 대표자들은 여론에게 청원으로 제 진짜 생각을 말할 권리를 준다. 의회 체제는 모든 것을 다수의 결정에 맡긴다. 그런데 어떻게 의회 밖의 큰 다수가 결정하려 들지 않겠는가? 국가의 꼭대기에서 너희가 바이올린을 켜는데, 저 아래 사람들이 춤추는 것 말고 무엇을 기대하는가?

그러니 부르주아지가 예전에 “자유주의적”이라고 기리던 것을 이제 “사회주의적”이라고 이단으로 몬다면, 부르주아지는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스스로 다스리는 위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나라에 평온을 되찾으려면 무엇보다 자기의 부르주아 의회를 잠재워야 하고, 사회적 권력을 온전히 지키려면 정치적 권력을 부숴야 한다는 것을. 개개 부르주아가 다른 계급들을 계속 착취하고 소유, 가족, 종교, 질서를 거리낌 없이 누리려면, 자기 계급이 다른 계급들과 나란히 똑같이 정치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처지에 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지갑을 지키려면 머리의 왕관을 쳐 내야 하고, 자기를 지켜 줄 칼을 동시에 다모클레스의 칼로 제 머리 위에 매달아야 한다는 것을.

부르주아 일반의 이익이 걸린 영역에서 국민의회는 너무나 비생산적이었다. 이를테면 1850년 겨울에 시작된 파리-아비뇽 철도 심의는 1851년 12월 2일에도 아직 끝날 기미가 없었다. 억압하거나 반동 짓을 하지 않는 곳에서 국민의회는 고칠 수 없는 불모에 시달렸다.

보나파르트의 내각은 질서당의 정신에 맞는 법안을 먼저 내놓기도 하고, 그 법을 집행하고 다루면서 질서당의 가혹함을 한층 부풀리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보나파르트 자신은 유치하고 어리석은 제안들로 인기를 얻으려 했다. 그렇게 국민의회와 자기의 대립을 확인시키고, 지금은 사정 때문에 막혀 있을 뿐 언젠가 프랑스 인민에게 감춰 둔 보물을 열어 줄 비밀스러운 복안이 있음을 내비치려 했다. 하사관들에게 하루 4수의 수당을 주자는 제안이 그랬다. 노동자들을 위한 명예 대부 은행을 세우자는 제안이 그랬다. 돈을 거저 받고 돈을 꾸어 받는 것, 그것이 그가 대중을 꾀려고 내건 전망이었다. 거저 받기와 꾸어 받기, 룸펜프롤레타리아트의 재정학은 거기서 끝난다. 상류의 룸펜프롤레타리아트든 하층의 룸펜프롤레타리아트든 마찬가지다. 보나파르트가 움직일 줄 아는 태엽도 거기서 끝났다. 어떤 왕위 요구자도 이보다 더 천박하게 대중의 천박함에 기대 투기한 적은 없었다.

국민의회는 자기를 희생시켜 인기를 얻으려는 이 뻔한 시도에 거듭 발끈했다. 빚이 등을 떠밀고 쌓아 둔 명성 하나 붙잡아 주지 않는 이 모험가가 필사적인 일을 저지를 위험이 커져 가는 데에도 발끈했다. 질서당과 대통령 사이의 불화가 위협적인 기세를 띠었을 때, 뜻밖의 사건이 그를 뉘우치며 질서당의 품으로 되돌려 보냈다. 1850년 3월 10일의 보궐선거를 말한다. 이 선거는 6월 13일 뒤로 투옥이나 망명으로 빈 의석을 다시 채우려고 치러졌다. 파리는 사회민주파 후보만 뽑았다. 파리는 가장 많은 표를 1848년 6월의 봉기 가담자 드 플로트에게 몰아주기까지 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동맹한 파리 소부르주아지는 이렇게 1849년 6월 13일의 패배를 되갚았다. 소부르주아지가 위험한 순간에 싸움터에서 사라진 듯 보였던 것은, 좋은 기회가 오면 더 많은 병력과 더 대담한 구호를 들고 다시 나서기 위해서였던 것 같았다. 이 선거 승리의 위험을 키우는 듯한 사정이 하나 있었다. 군대가 파리에서는 보나파르트의 장관 라 이트에 맞서 6월 봉기 가담자에게 표를 던졌고, 지방에서도 대부분 산악파에게 표를 던졌다. 산악파는 지방에서도 파리만큼 뚜렷하지는 않았지만 적수들보다 우세했다.

보나파르트는 갑자기 다시 혁명과 마주했다. 1849년 1월 29일처럼, 1849년 6월 13일처럼, 1850년 3월 10일에도 그는 질서당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는 고개를 숙였고, 비굴하게 용서를 빌었고, 의회 다수의 명령에 따라 어떤 내각이든 임명하겠다고 나섰다. 오를레앙파와 정통왕조파 당수들, 티에르니 베리에니 브로이니 몰레니 하는 이들, 한마디로 이른바 성주들[4]에게 몸소 국가의 키를 잡아 달라고 애원하기까지 했다. 질서당은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을 살릴 줄 몰랐다. 내밀어진 권력을 대담하게 움켜쥐기는커녕, 11월 1일에 해임된 내각을 다시 앉히라고 보나파르트에게 강요하지도 않았다. 질서당은 그를 용서해 주는 것으로 굴욕을 주고, 도풀 내각에 바로슈 씨를 들여보내는 데 그쳤다. 이 바로슈는 검사로서 부르주 고등법원에서 한 번은 5월 15일의 혁명가들을, 또 한 번은 6월 13일의 민주파를, 두 번 다 국민의회 침해죄로 몰아 사납게 날뛰었던 자다. 보나파르트의 장관 가운데 뒷날 국민의회를 깎아내리는 데 그보다 더 이바지한 사람은 없었다. 1851년 12월 2일 뒤에 우리는 그를 다시 만난다. 좋은 자리에 앉아 비싼 봉급을 받는 원로원 부의장으로서. 그는 혁명가들의 수프에 침을 뱉어 놓아, 그 수프를 보나파르트가 먹어 치우게 했다.

사회민주파는 사회민주파대로 제 승리를 다시 문제 삼고 그 날을 무디게 할 구실만 찾는 듯했다. 새로 뽑힌 파리 의원 가운데 하나인 비달은 스트라스부르에서도 함께 당선되어 있었다. 당은 그를 설득해 파리 당선을 사양하고 스트라스부르 당선을 받아들이게 했다. 민주파는 선거에서 거둔 승리를 확정 지어 질서당이 곧바로 의회에서 그것을 다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지 않았다. 인민의 열광과 군대의 우호적 분위기가 무르익은 순간에 적을 싸움으로 몰아붙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3월과 4월 내내 새 선거 운동으로 파리를 지치게 했다. 흥분한 인민의 열정이 또 한 번의 임시 투표 놀음에서 닳아 없어지게 했고, 혁명적 활력이 헌법상의 성공에 배불러 작은 음모와 공허한 열변과 겉치레 운동 속에 흩어지게 했다. 그사이 부르주아지가 전열을 가다듬고 대비하게 내버려 두었다. 끝내는 뒤이은 4월 선거에서 외젠 쉬[5]를 뽑아, 3월 선거의 의미에 감상적으로 김을 빼는 주석을 달았다. 한마디로 민주파는 3월 10일을 만우절 장난으로 만들어 버렸다.

의회 다수파는 적의 약점을 알아챘다. 보나파르트가 공격의 지휘와 책임을 다수파에게 떠넘겼으므로, 다수파의 성주 17명이 새 선거법을 만들었다. 그 법안을 내는 일은 그 영예를 자청한 포셰 씨에게 맡겨졌다. 5월 8일 포셰는 법안을 냈다. 그 법은 보통선거권을 없애고, 유권자에게 선거하는 곳에 3년 동안 거주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으며, 끝으로 노동자는 그 거주를 고용주의 증명서로만 입증할 수 있게 했다.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선거전이 벌어지는 동안 민주파는 혁명적으로 흥분하고 날뛰었다. 그런데 무기를 들고 그 선거 승리가 진지했음을 증명해야 할 지금, 그들은 그만큼 입헌적으로 질서와 장엄한 평온(calme majestueux)과 법을 지키는 태도를 설교했다. 다시 말해 법률로 행세하는 반혁명의 의지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라는 것이었다. 토론 중에 산악파는 질서당의 혁명적 격정에 맞서 법의 토대를 지키는 점잖은 시민의 냉정한 태도를 내세워 질서당을 부끄럽게 했다. 그리고 질서당이 혁명적으로 행동한다는 무시무시한 비난으로 질서당을 때려눕혔다. 새로 뽑힌 의원들조차 점잖고 신중하게 처신하며, 자기들을 무정부주의자라고 헐뜯고 자기들의 당선을 혁명의 승리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인지 증명하려 애썼다. 5월 31일 새 선거법이 통과되었다. 산악파는 대통령의 주머니에 항의문을 몰래 찔러 넣는 것으로 만족했다. 선거법 뒤에는 새 언론법이 따라왔고, 이로써 혁명적 신문은 완전히 없어졌다. 그 신문들은 그런 운명을 받아 마땅했다. 이 대홍수 뒤에 혁명의 맨 끝 전초로 남은 것은 두 부르주아 기관지 《나시오날》과 《라 프레스》였다.

우리는 보았다. 민주파 지도자들은 3월과 4월에는 파리 인민을 겉치레 싸움에 끌어들이려고 온갖 일을 다 했고, 5월 8일 뒤에는 인민을 진짜 싸움에서 떼어 놓으려고 온갖 일을 다 했다. 게다가 1850년이 산업과 상업이 더없이 번창한 해 가운데 하나였고, 그래서 파리 프롤레타리아트가 모두 일자리를 얻고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1850년 5월 31일의 선거법은 그들을 정치권력에 참여하는 일에서 모조리 밀어냈다. 싸움터 자체를 그들에게서 잘라 냈다. 노동자들을 2월 혁명 전의 천민 처지로 되돌려 놓았다. 노동자들은 이런 사건 앞에서 민주파에게 이끌려 다녔고, 한때의 안락 때문에 자기 계급의 혁명적 이익을 잊을 수 있었다. 그로써 그들은 정복하는 세력이 되는 영예를 포기하고 제 운명에 굴복했다. 그리고 1848년 6월의 패배가 자기들을 여러 해 동안 싸울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 역사의 과정이 당분간 다시 자기들의 머리 위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6월 13일에 “그러나 보통선거권을 건드리기만 해 봐라, 그때는!” 하고 외쳤던 소부르주아 민주파는 어떠했는가. 그들은 이제 자기들을 친 반혁명의 일격은 일격이 아니고, 5월 31일의 법은 법이 아니라는 말로 스스로를 달랬다. 1852년 5월 둘째 일요일에는 모든 프랑스인이 한 손에 투표용지, 다른 손에 칼을 들고 투표장에 나타난다. 그들은 이 예언으로 만족했다. 끝으로 군대는 1849년 5월 29일 선거 때처럼 1850년 3월과 4월 선거 때도 상관들에게 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이번에 군대는 단호히 다짐했다. “혁명이 우리를 세 번째로 속이지는 못한다.”

1850년 5월 31일의 법은 부르주아지의 쿠데타였다. 부르주아지가 그때까지 혁명에게서 빼앗은 것들은 모두 임시적인 성격만 띠었다. 지금의 국민의회가 무대에서 물러나는 순간 그것들은 흔들릴 판이었다. 그것들은 새 총선거라는 우연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1848년 이후 선거의 역사는 부르주아지의 사실상의 지배가 자라는 만큼, 인민 대중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도덕적 지배는 사라진다는 것을 반박할 수 없게 증명했다. 보통선거권은 3월 10일 부르주아지의 지배에 정면으로 반대한다고 선언했고, 부르주아지는 보통선거권을 추방하는 것으로 답했다. 그러니 5월 31일의 법은 계급투쟁의 필연 가운데 하나였다. 다른 한편 헌법은 공화국 대통령 선거가 유효하려면 최소 200만 표를 요구했다. 어느 대통령 후보도 이 최소치를 얻지 못하면, 국민의회가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세 후보 가운데서 대통령을 뽑게 되어 있었다. 제헌의회가 이 법을 만들 때 선거인 명부에 오른 유권자는 1000만 명이었다. 그러니 제헌의회의 뜻으로는 유권자의 5분의 1이면 대통령 선거를 유효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5월 31일의 법은 선거인 명부에서 적어도 300만 표를 지워 유권자를 700만 명으로 줄였으면서도, 대통령 선거의 법정 최소치 200만 표는 그대로 두었다. 그렇게 법정 최소치를 유권자 표의 5분의 1에서 거의 3분의 1로 높였다. 다시 말해 대통령 선거를 인민의 손에서 국민의회의 손으로 몰래 넘기려고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이렇게 질서당은 5월 31일의 선거법으로 자기 지배를 이중으로 굳힌 듯 보였다. 국민의회 선거와 공화국 대통령 선거를 사회의 정체된 부분에 맡겼기 때문이다.

V

혁명의 위기를 넘기고 보통선거권을 없애자마자 국민의회와 보나파르트의 싸움이 곧바로 다시 터졌다.

헌법은 보나파르트의 봉급을 60만 프랑으로 정해 두었다. 그는 취임한 지 반년도 안 되어 이 액수를 두 배로 늘리는 데 성공했다. 오딜롱 바로가 이른바 교제비 명목으로 해마다 60만 프랑의 보조금을 제헌의회에서 억지로 받아 냈기 때문이다. 6월 13일 뒤에도 보나파르트는 비슷한 바람을 내비쳤지만, 이번에는 바로가 들어주지 않았다. 이제 5월 31일 뒤, 그는 좋은 때를 놓치지 않고 곧장 장관들을 시켜 국민의회에 300만 프랑의 왕실비를 요구하게 했다. 오랫동안 모험을 일삼으며 떠돌아다닌 덕분에 그에게는 아주 예민한 더듬이가 생겼다. 자기 부르주아들에게서 돈을 짜내도 될 약한 순간을 더듬어 찾아내는 더듬이였다. 그는 그야말로 공갈을 쳤다. 국민의회는 그의 도움을 받으며, 그도 다 아는 가운데 인민 주권을 욕보였다. 그는 국민의회가 지갑을 열어 해마다 300만 프랑으로 자기 입을 사지 않으면 의회의 범죄를 인민 법정에 고발하겠다고 을러댔다. 국민의회는 프랑스인 300만 명의 투표권을 빼앗았다. 그는 통용이 정지된 프랑스인 한 사람마다 통용되는 프랑 한 닢, 꼭 300만 프랑을 내놓으라고 했다. 600만 명이 뽑은 그는 뒤늦게 사기로 빼앗긴 표만큼 손해를 물어내라고 했다. 국민의회 위원회는 이 뻔뻔한 자를 물리쳤다. 보나파르트파 신문들은 위협했다. 국민의회가 원칙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국민 대중과 갈라선 바로 그 순간에 공화국 대통령과도 갈라설 수 있었을까? 국민의회는 해마다 주는 왕실비는 거부했지만, 한 번만 주는 보조금 216만 프랑은 승인했다. 그렇게 해서 국민의회는 이중의 약점을 드러냈다. 돈을 내주면서, 마지못해 내준다는 것을 짜증으로 내보인 것이다. 보나파르트가 그 돈을 어디에 썼는지는 나중에 보게 될 것이다. 이 짜증스러운 뒷이야기는 보통선거권 폐지에 바로 뒤이어 일어났다. 보나파르트는 여기서 3월과 4월 위기 때의 고분고분한 태도를 버리고, 찬탈자 의회에 도전하듯 뻔뻔하게 굴었다. 이 일이 있은 뒤 국민의회는 8월 11일부터 11월 11일까지 석 달 동안 휴회했다. 의회는 자기 대신 28명으로 된 상설위원회를 남겼다. 거기에는 보나파르트파는 하나도 없고 온건 공화파가 몇 사람 있었다. 1849년의 상설위원회는 질서의 사나이들과 보나파르트파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때 질서당은 혁명에 맞서 상설 태세를 선언했다. 이번에는 의회 공화국이 대통령에 맞서 상설 태세를 선언했다. 5월 31일 법 이후 질서당 앞에는 이 경쟁자 하나만 남아 있었다.

1850년 11월 국민의회가 다시 모였을 때는, 그때까지 대통령과 벌이던 자잘한 실랑이 대신 큰 싸움이 피할 수 없게 된 것처럼 보였다. 사정을 보지 않는 싸움, 두 권력이 사생결단을 내는 싸움이었다.

1849년에 그랬듯이 질서당은 이번 의회 휴가 동안에도 분파별로 흩어졌다. 분파마다 자기 나름의 왕정복고 음모에 매달렸고, 루이 필리프의 죽음이 그 음모에 새 먹이를 주었다. 정통왕조파의 왕 앙리 5세는 아예 정식 내각까지 임명했다. 그 내각은 파리에 자리 잡았고, 상설위원회 위원들도 거기 들어 있었다. 그러니 보나파르트도 나름대로 프랑스의 도들을 순회할 권리가 있었다. 그는 몸소 납시어 기쁨을 베푼 도시의 분위기에 따라 때로는 은근히, 때로는 대놓고 자기 나름의 복고 계획을 흘리고 표를 모았다. 큰 관보 《모니퇴르》와 보나파르트의 자그마한 사설 모니퇴르들은 이 행차를 당연히 개선 행진으로 떠받들어야 했다. 그 길에는 언제나 12월 10일회 회원들이 따라다녔다. 이 단체는 1849년에 생겼다. 자선 단체를 세운다는 구실로 파리의 룸펜프롤레타리아트가 비밀 분대들로 조직되었다. 분대마다 보나파르트파 요원이 이끌었고, 맨 위에는 보나파르트파 장군이 있었다. 생계 수단도 수상하고 출신도 수상한 몰락한 난봉꾼들, 부르주아지에서 떨어져 나온 타락한 모험가들 곁에 부랑자, 제대 군인, 출소한 죄수, 도망친 갤리선 노예, 사기꾼, 협잡꾼, 라차로니, 소매치기, 요술쟁이, 노름꾼, 포주, 매음굴 주인, 짐꾼, 글쟁이, 손풍금 악사, 넝마주이, 칼 가는 사람, 땜장이, 거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프랑스인들이 라 보엠(la bohème)이라 부르는, 뚜렷한 형체 없이 흐트러져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는 대중 전체였다. 보나파르트는 자기와 닮은 이 분자들로 12월 10일회의 몸통을 만들었다. “자선 단체”라는 이름은 맞는 말이었다. 모든 회원이 보나파르트처럼, 일하는 국민의 등을 쳐서 제 배를 불리고 싶어 했다는 점에서 그랬다. 이 보나파르트는 스스로 룸펜프롤레타리아트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는 자기가 개인적으로 좇는 이익을 여기서만 대량으로 다시 발견했고, 모든 계급의 이 쓰레기, 찌꺼기, 부스러기 속에서 자기가 무조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을 알아보았다. 이 보나파르트야말로 진짜 보나파르트, 꾸밈없는 보나파르트(sans phrase)다. 닳고 닳은 늙은 난봉꾼인 그는 여러 인민의 역사적 삶과 그들의 거창한 국가 대사극을 가장 저속한 뜻의 희극으로 여긴다. 웅장한 의상과 말과 몸짓이 가장 하찮은 협잡을 가리는 가면 노릇만 하는 가장무도회로 여기는 것이다. 스트라스부르로 쳐들어갔을 때도 그랬다. 길들인 스위스산 대머리수리 한 마리가 나폴레옹의 독수리 노릇을 했다[1]. 불로뉴에 침입할 때는 런던의 하인 몇을 프랑스 군복에 쑤셔 넣었다. 그들이 군대 노릇을 했다. 12월 10일회에는 룸펜 1만 명을 끌어모았다. 직조공 보텀이 사자를 연기하듯[2] 그들이 인민을 연기해야 했다. 부르주아지 자신이 더없이 완벽한 희극을 연기하던 때였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태도로, 프랑스 연극 예법의 까다로운 조건 하나 어기지 않고 연기하던 때였다. 부르주아지는 반쯤은 속고, 반쯤은 자기 국가 대사극의 엄숙함을 믿고 있었다. 그런 때에는 희극을 그저 희극으로 받아들인 모험가가 이길 수밖에 없었다. 엄숙한 적수를 치워 버리고 나면 그는 이제 자기 황제 배역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나폴레옹의 가면을 쓰고서 진짜 나폴레옹을 연기한다고 믿는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는 자기 세계관의 희생자가 된다. 더는 세계사를 희극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 희극을 세계사로 여기는 진지한 어릿광대가 되는 것이다. 사회주의 노동자에게 국립 작업장이, 부르주아 공화파에게 기동대가 그랬듯, 보나파르트에게는 12월 10일회가 그만의 당파 무력이었다. 그가 여행할 때면 기차에 실린 그 분대들이 즉석에서 청중을 만들어 내고, 대중의 열광을 연출하고, “황제 만세(vive l'Empereur)”를 울부짖고, 공화파를 모욕하고 두들겨 패야 했다. 물론 경찰의 보호 아래서였다. 그가 파리로 돌아올 때면 그들이 선발대가 되어 반대 시위를 미리 막거나 흩어 버려야 했다. 12월 10일회는 그의 것이었다. 그것은 그 자신의 작품, 오롯이 그만의 생각이었다. 그 밖에 그가 손에 넣는 것은 상황의 힘이 그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그 밖에 그가 하는 일은 상황이 대신 해 주는 것이거나, 남이 한 일을 베끼는 데 그친다. 그러나 앞에서는 시민들을 향해 질서·종교·가족·재산이라는 공식 문구를 늘어놓고, 뒤에는 쉬프테를레와 슈피겔베르크 같은 무리의 비밀 결사, 무질서와 매춘과 도둑질의 결사를 거느린 모습, 그것이 원작자로서의 보나파르트 자신이다. 12월 10일회의 역사는 곧 그 자신의 역사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질서당 소속 인민 대표들이 12월회원들의 몽둥이에 얻어맞는 일이 일어났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국민의회에 배치되어 의회의 안전 경비를 맡은 경찰 감독관 용이 알레라는 자의 진술을 근거로 상설위원회에 고발했다. 12월회원들의 한 분대가 샹가르니에 장군과 국민의회 의장 뒤팽을 암살하기로 결의하고 실행할 자들까지 정해 두었다는 것이었다. 뒤팽 씨가 얼마나 겁먹었을지 짐작할 만하다. 12월 10일회에 대한 의회 조사, 곧 보나파르트의 비밀 세계를 세상에 까발리는 일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국민의회가 다시 모이기 직전 보나파르트는 미리 손을 써서 자기 단체를 해산했다. 물론 서류상으로만이었다. 1851년 말에도 경찰청장 카를리에는 상세한 의견서를 올려 12월회원들을 실제로 흩어 버리라고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12월 10일회는 보나파르트가 공식 군대를 12월 10일회로 바꾸는 데 성공할 때까지 그의 사병으로 남을 것이었다. 보나파르트는 국민의회가 휴회한 직후 그 첫 시도를 했다. 그것도 방금 의회에서 억지로 받아 낸 돈으로 했다. 운명론자인 그는 인간이, 특히 병사가 거스를 수 없는 어떤 더 높은 힘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런 힘으로 그는 무엇보다 먼저 시가와 샴페인, 차가운 닭고기와 마늘 소시지를 꼽는다. 그래서 그는 먼저 엘리제궁의 방들에서 장교와 부사관들에게 시가와 샴페인, 차가운 닭고기와 마늘 소시지를 대접했다. 10월 3일에는 생모르 사열식에서 대규모 병력을 상대로 이 작전을 되풀이했고, 10월 10일에는 사토리 열병식에서 같은 작전을 더 큰 규모로 벌였다. 큰아버지는 아시아에서 벌인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을 떠올렸고, 조카는 같은 땅에서 벌인 바쿠스의 정복 행진을 떠올렸다. 알렉산드로스는 반신이었지만 바쿠스는 신이었고, 게다가 12월 10일회의 수호신이었다.

10월 3일 사열식 뒤 상설위원회는 육군장관 도풀을 불러들였다. 그는 그런 군기 위반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10월 10일 보나파르트가 도풀의 약속을 어떻게 지켰는지는 다들 아는 바다. 두 사열식 모두 파리 군 총사령관 샹가르니에가 지휘했다. 그는 상설위원회 위원이자 국민방위군 사령관이기도 했다. 1월 29일과 6월 13일의 “구원자”였고, “사회의 방벽”이었으며, 질서당의 대통령 후보, 두 왕가가 저마다 점찍어 둔 몽크[3]였다. 그는 그때까지 한 번도 자기가 육군장관 밑에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고, 공화국 제도를 늘 대놓고 비웃었으며, 보나파르트에게는 애매하게 거드름 피우는 보호자 행세를 했다. 그런 그가 이제 육군장관에 맞서 군기를 위해, 보나파르트에 맞서 헌법을 위해 열을 올렸다. 10월 10일 기병 일부가 “나폴레옹 만세! 소시지 만세!”를 외치는 동안, 샹가르니에는 적어도 자기 친구 뇌마예르가 지휘하는 보병만은 행진하며 얼음 같은 침묵을 지키게 했다. 그 벌로 육군장관은 보나파르트의 부추김을 받아 뇌마예르 장군을 파리의 자리에서 내쫓았다. 제14·15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한다는 구실이었다. 뇌마예르는 이 전보를 거절했고, 그래서 물러나야 했다. 샹가르니에는 샹가르니에대로 11월 2일 일일 명령을 내려, 병사들이 무장한 채로 어떤 정치적 구호도 시위도 하지 못하게 했다. 엘리제궁 신문들은 샹가르니에를, 질서당 신문들은 보나파르트를 공격했다. 상설위원회는 비밀 회의를 거듭 열었고, 거기서 조국이 위기에 처했다고 선포하자는 동의가 거듭 나왔다. 군대는 서로 적대하는 두 진영으로 갈라지고, 참모부도 둘로 나뉘어 맞선 듯했다. 한쪽은 보나파르트가 사는 엘리제궁에, 다른 쪽은 샹가르니에가 사는 튀일리궁에 있었다. 국민의회가 모이기만 하면 싸움의 신호가 울릴 것 같았다. 프랑스 대중은 보나파르트와 샹가르니에의 이 마찰을 어느 영국 기자처럼 보았다. 그 기자는 이렇게 묘사했다.

“프랑스의 정치 하녀들이 낡은 빗자루로 혁명의 뜨거운 용암을 쓸어 내면서, 일하는 내내 서로 악다구니를 쓴다.”

그사이 보나파르트는 서둘러 육군장관 도풀을 해임해 허겁지겁 알제로 보내고, 그 자리에 슈람 장군을 육군장관으로 앉혔다. 11월 12일 그는 국민의회에 교서를 보냈다. 미국식으로 장황하고, 세부 사항이 잔뜩 실리고, 질서의 냄새를 풍기고, 화해를 갈망하고, 헌법에 순순히 따르겠다는 체념이 묻어나는 글이었다. 교서는 온갖 것을 다 다루면서 정작 지금의 뜨거운 문제(questions brûlantes)만은 다루지 않았다. 그는 지나가는 말처럼, 헌법의 명시적 규정에 따라 대통령만이 군대를 지휘한다는 말을 흘렸다. 교서는 다음과 같은 거창한 다짐으로 끝났다.

“프랑스는 지금 무엇보다 평온을 바란다…… 나는 오직 선서에 묶여, 선서가 내게 그어 준 좁은 한계 안에 머물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인민이 나를 뽑았고 내 권력은 오직 인민에게서 나왔으니, 나는 법으로 표현된 인민의 뜻에 언제나 따를 것이다. 여러분이 이번 회기에 헌법 개정을 결의한다면, 제헌의회가 행정 권력의 지위를 정할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인민이 1852년에 엄숙하게 자기 결정을 알릴 것이다. 그러나 앞날의 해결책이 무엇이 되든, 우리 서로 이해에 이르도록 하자. 그래서 격정이나 기습이나 폭력이 위대한 국민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하자…… 무엇보다 내 관심을 끄는 것은 1852년에 누가 프랑스를 다스릴지 아는 것이 아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잘 써서 그사이가 동요와 혼란 없이 지나가게 하는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여러분에게 내 마음을 열었다. 여러분은 내 솔직함에 신뢰로, 내 선한 노력에 협력으로 답할 것이며, 나머지는 하느님이 해 주실 것이다.”

부르주아지의 이 말투는 점잖고, 위선적으로 온건하고, 덕스럽게 진부하다. 그런 말투가 12월 10일회의 전제군주, 생모르와 사토리의 소풍 영웅의 입에서 나오면 그 가장 깊은 뜻이 드러난다.

질서당의 성주들은 이 속마음 털어놓기를 얼마나 믿어도 될지 한순간도 착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서 따위에는 오래전부터 심드렁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정치적 위증의 고참, 위증의 대가들이 여럿 있었다. 군대에 관한 대목도 그들은 흘려듣지 않았다. 교서는 최근 공포된 법률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도 가장 중요한 법률, 곧 선거법만은 짐짓 입을 다물고 넘어갔다. 그들은 이것을 불쾌하게 알아차렸다. 오히려 교서는 헌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1852년 대통령 선거를 인민에게 맡긴다고 했다. 선거법은 질서당의 발에 달린 납덩이였다. 그것 때문에 걷기도 힘든데 하물며 돌격이라니! 게다가 보나파르트는 12월 10일회를 공식 해산하고 육군장관 도풀을 해임해, 제 손으로 희생양들을 조국의 제단에 바쳤다. 그는 예상되던 충돌의 칼끝을 꺾어 버렸다. 끝으로 질서당 자신도 행정 권력과의 결정적 충돌을 겁먹은 채 피하고, 누그러뜨리고, 덮어 버리려 했다. 혁명에게서 빼앗은 것을 잃을까 두려워, 질서당은 그 열매를 경쟁자가 거두게 내버려 두었다. “프랑스는 무엇보다 평온을 바란다.” 2월 이래 질서당은 혁명을 향해 그렇게 외쳤고, 보나파르트의 교서는 질서당을 향해 그렇게 외쳤다. “프랑스는 무엇보다 평온을 바란다.” 보나파르트는 찬탈을 노리는 행동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 행동을 두고 소란을 피우고 그것을 우울증 환자처럼 해석하면, “평온을 깨뜨리는” 쪽은 질서당이 되었다. 사토리의 소시지들은 아무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프랑스는 무엇보다 평온을 바란다.” 그러니 보나파르트는 자기가 하는 대로 조용히 내버려 두라고 요구했다. 의회 정당은 이중의 두려움에 마비되었다. 혁명의 소요를 다시 불러낼까 하는 두려움, 그리고 자기 계급, 곧 부르주아지의 눈에 자기가 소란을 일으키는 자로 보일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프랑스가 무엇보다 평온을 바랐으므로, 보나파르트가 교서에서 “평화”를 말하자 질서당은 감히 “전쟁”으로 답하지 못했다. 국민의회가 열리면 큰 추문이 벌어지리라 잔뜩 기대하던 대중은 헛물만 켰다. 10월 사건에 관한 상설위원회 의사록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반대파 의원들은 다수에 밀려 표결에서 졌다. 흥분을 일으킬 만한 토론은 원칙적으로 다 피했다. 1850년 11월과 12월 국민의회의 일은 아무 흥미도 없었다.

마침내 12월 말쯤 의회의 특권 하나하나를 둘러싼 게릴라전이 시작되었다. 부르주아지가 보통선거권 폐지로 계급투쟁을 일단 처리해 버린 뒤로, 운동은 두 권력의 특권을 둘러싼 자잘한 트집 잡기 속에서 수렁에 빠졌다.

인민 대표 가운데 한 사람인 모갱에게 빚 때문에 법원 판결이 내려졌다. 법원장이 묻자 법무장관 루에르는 더 따질 것 없이 채무자에게 구속 영장을 발부하라고 답했다. 그래서 모갱은 채무자 감옥에 갇혔다. 국민의회는 이 폭거를 알고 들끓었다. 의회는 그를 즉시 풀어 주라고 명령했을 뿐 아니라, 그날 저녁 바로 서기장(greffier)을 보내 클리시 감옥에서 그를 강제로 빼내 왔다. 그러나 사유재산의 신성함에 대한 믿음은 지키고 싶었고, 여차하면 귀찮아진 산악파 의원들을 모셔 둘 피난처를 열어 두려는 속셈도 있었다. 그래서 의회는 자기 허락을 먼저 받으면 인민 대표도 빚 때문에 가둘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의회는 대통령도 빚 때문에 가둘 수 있다고 정하는 것은 잊었다. 의회는 자기 몸의 지체들을 감싸고 있던 불가침의 마지막 겉모습마저 없애 버렸다.

기억하겠지만, 경찰 감독관 용은 알레라는 자의 진술을 근거로 12월회원들의 한 분대를 뒤팽과 샹가르니에 암살 음모 혐의로 고발했다. 첫 회의에서 곧바로 재무관들은 이 일과 관련해 의회 자체의 경찰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급료는 국민의회 자체 예산에서 주고, 경찰청장과는 전혀 무관한 경찰이었다. 내무장관 바로슈는 자기 소관에 대한 이 침해에 항의했다. 그래서 초라한 타협이 맺어졌다. 의회의 경찰 감독관은 의회 자체 예산에서 급료를 받고 재무관들이 임명·해임하지만, 그 전에 내무장관과 협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사이 정부는 알레를 기소했다. 이제는 그의 진술을 날조로 몰고, 검사의 입을 빌려 뒤팽과 샹가르니에와 용과 국민의회 전체를 웃음거리로 만들기가 쉬웠다. 그러더니 12월 29일 바로슈 장관이 뒤팽에게 편지를 보내 용을 해임하라고 요구한다. 국민의회 의장단은 용을 그 자리에 두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국민의회는 이 결정을 승인하지 않는다. 의회는 모갱 사건에서 자기가 부린 폭력에 겁을 먹었고, 행정 권력에 한 대를 치면 그 대가로 두 대를 맞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의회는 용이 보인 근무 열성에 대한 상으로 그를 해임하고, 의회의 특권 하나를 스스로 버린다. 밤에 결정해서 낮에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낮에 결정하고 밤에 실행하는 사람을 상대로는 없어서는 안 될 특권이었다.

우리는 국민의회가 11월과 12월 동안 크고 뚜렷한 계기가 있을 때는 행정 권력과의 싸움을 어떻게 피하고 억눌렀는지 보았다. 이제 우리는 의회가 더없이 하찮은 계기로 그 싸움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을 본다. 모갱 사건에서 의회는 인민 대표를 빚 때문에 가둘 수 있다는 것을 원칙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대표에게만 적용하게 할 권리는 남겨 두었고, 이 파렴치한 특권을 두고 법무장관과 다툰다. 의회는 암살 음모라는 것을 이용해 12월 10일회를 조사하고, 보나파르트를 파리 룸펜프롤레타리아트의 우두머리라는 참모습 그대로 프랑스와 유럽 앞에 빠져나갈 길 없이 폭로할 수 있었다. 그러기는커녕 의회는 충돌을 끌어내려, 내무장관과 다투는 것이 고작 경찰 감독관 한 명을 누가 임명하고 해임하느냐 하는 문제가 되게 만든다. 이렇게 이 시기 내내 질서당은 애매한 처지에 몰려, 행정 권력과의 싸움을 자잘한 권한 다툼과 트집, 말꼬리 잡기, 경계 분쟁 속에서 흐지부지 날려 버리고 잘게 부숴 버린다. 질서당은 더없이 시시한 형식 문제를 자기 활동의 내용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충돌이 원칙의 의미를 지닐 때, 행정 권력이 정말로 약점을 드러냈을 때, 국민의회의 일이 곧 국민의 일이 될 때, 질서당은 감히 그 충돌에 나서지 못한다. 그랬다가는 국민에게 진군 명령을 내리는 셈이 될 텐데, 질서당이 무엇보다 두려워한 것은 국민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때면 질서당은 산악파의 동의를 물리치고 다음 의사일정으로 넘어간다. 질서당이 이렇게 쟁점을 큰 차원에서 내버리고 나면, 행정 권력은 그 쟁점을 하찮고 사소한 계기로 다시 들고 나올 수 있는 때를 느긋하게 기다린다. 말하자면 의회의 지엽적인 이해밖에 걸려 있지 않은 때다. 그러면 질서당의 억눌린 분노가 터져 나온다. 질서당은 무대 뒤의 장막을 걷어 젖히고, 대통령을 고발하고, 공화국이 위태롭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때는 그 비장함도 시시해 보이고, 싸움의 계기도 위선적인 핑계이거나 아예 싸울 가치가 없는 일로 보인다. 의회의 폭풍은 찻잔 속의 폭풍이 되고, 싸움은 음모가 되고, 충돌은 추문이 된다. 혁명적 계급들은 국민의회가 굴욕당하는 것을 고소해하며 즐긴다. 그들이 국민의회의 의회 특권에 열광하는 정도는 국민의회가 공공의 자유에 열광하는 정도와 꼭 같으니까. 한편 의회 밖의 부르주아지는 의회 안의 부르주아지가 어떻게 그런 자잘한 말다툼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대통령과의 그런 초라한 경쟁으로 평온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가 전투를 기다릴 때 화평을 맺고, 모두가 화평이 맺어졌다고 믿을 때 공격하는 전략에 어리둥절해한다.

12월 20일 파스칼 뒤프라가 금괴 복권 문제로 내무장관에게 질의했다. 이 복권은 “엘리시온의 딸”[4]이었다. 보나파르트가 측근들과 함께 낳았고, 경찰청장 카를리에가 공식적으로 보호해 주었다. 프랑스 법은 자선 목적의 추첨 말고는 모든 복권을 금지하는데도 그랬다. 복권은 한 장에 1프랑씩 700만 장이었고, 그 수익은 파리 부랑자들을 캘리포니아로 실어 보내는 데 쓴다는 명목이었다. 한편으로는 황금빛 꿈이 파리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적 꿈을 밀어내고, 일확천금의 유혹적인 전망이 노동권이라는 공론적 권리를 밀어내야 했다. 물론 파리 노동자들은 캘리포니아 금괴의 광채 속에서, 누군가 자기 주머니에서 꾀어내 간 볼품없는 프랑 동전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요점은 대놓고 등쳐 먹는 사기였다. 파리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캘리포니아 금광을 열고 싶었던 부랑자들은 바로 보나파르트 자신과 빚에 찌든 그의 원탁의 동료들이었다. 국민의회가 승인해 준 300만 프랑은 흥청망청 다 써 버렸으니, 어떻게든 금고를 다시 채워야 했다. 보나파르트는 이른바 노동자 주택(cités ouvrières)을 짓겠다며 국민 모금을 벌이고 자기가 큰 금액으로 명단 맨 위에 이름을 올렸지만 허사였다. 매정한 부르주아들은 그가 자기 몫을 실제로 내는지 의심을 품고 지켜보았다. 그 돈은 당연히 들어오지 않았고, 사회주의적 공중누각에 건 투기는 납작하게 땅에 떨어졌다. 금괴는 더 잘 먹혔다. 보나파르트와 그 패거리는 700만 장 복권의 판매액 가운데 경품 금괴 값을 넘는 나머지를 일부 착복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짜 복권을 만들었고, 같은 번호로 10장, 15장, 많게는 20장까지 찍어 냈다. 12월 10일회의 정신에 걸맞은 재정 조작이었다. 여기서 국민의회가 마주한 것은 허구의 공화국 대통령이 아니라 살과 피를 지닌 보나파르트였다. 여기서 의회는 그가 헌법이 아니라 형법전과 충돌하는 현장을 덮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의회는 뒤프라의 질의를 넘기고 다음 의사일정으로 갔다. 그 까닭은 “만족(satisfait)”을 표명하자는 지라르댕의 동의가 질서당에게 자기네의 조직적 부패를 떠올리게 했기[5]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르주아는, 특히 정치가로 부풀어 오른 부르주아는 실천의 비루함을 이론의 과장으로 메운다. 정치가가 된 그는 자기와 마주 선 국가 권력처럼 더 높은 존재가 된다. 그런 존재와는 더 높고 거룩한 방식으로만 싸울 수 있다.

보나파르트는 보헤미안이자 왕자 출신 룸펜프롤레타리아였기에 치사한 부르주아보다 나은 점이 하나 있었다. 싸움을 저열하게 치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의회가 몸소 그의 손을 잡고 군대 연회, 사열식, 12월 10일회, 마침내 형법전이라는 미끄러운 땅을 건너게 해 준 지금, 그는 겉보기의 방어에서 공격으로 넘어갈 때가 왔다고 보았다. 그사이 법무장관, 육군장관, 해군장관, 재무장관이 잇달아 작은 패배를 겪었다. 국민의회는 그것으로 투덜대는 불만을 드러냈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장관들이 물러나 행정 권력이 의회에 복종한다고 인정하는 일을 막았을 뿐 아니라, 이제 국민의회 휴가 동안 시작한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군사 권력을 의회에서 떼어 내는 일, 곧 샹가르니에 해임이었다.

엘리제궁의 한 신문이 일일 명령 하나를 실었다. 5월 중에 제1군관구에 내려졌다는 것이니 샹가르니에가 낸 명령이 된다. 거기서는 장교들에게 이렇게 권하고 있었다. 반란이 일어나면 자기 대열 안의 배신자들을 봐주지 말고 즉시 총살하며, 국민의회가 병력을 징발하려 하면 내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1851년 1월 3일 내각은 이 일일 명령에 관해 질의를 받았다. 내각은 이 일을 검토하겠다며 처음에는 석 달, 그다음에는 일주일, 마지막에는 겨우 24시간의 말미를 달라고 했다. 의회는 당장 해명하라고 고집한다. 샹가르니에가 일어나 그런 일일 명령은 있었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자기가 언제나 국민의회의 요구에 서둘러 따를 것이며, 충돌이 일어나면 의회가 자기를 믿어도 된다고 덧붙인다. 의회는 그의 말을 형언할 수 없는 박수로 맞고 그에게 신임 결의를 내린다. 의회는 퇴위한다. 한 장군의 사사로운 보호 아래 들어가, 자기의 무력함과 군대의 전능함을 법령으로 선포한다. 그러나 장군도 착각하고 있다. 보나파르트에게서 봉토로 받아 쥐고 있을 뿐인 권력을 보나파르트에 맞서 의회 마음대로 쓰라고 내주면서, 자기대로는 이 의회, 곧 보호가 필요한 자기 피보호자에게서 보호를 기대하니 말이다. 그러나 샹가르니에는 1849년 1월 29일 이래 부르주아지가 자기에게 부여한 신비한 힘을 믿는다. 그는 자기가 다른 두 국가 권력과 나란히 선 제3의 권력이라고 여긴다. 그는 이 시대의 다른 영웅들, 아니 성인들과 같은 운명을 나눈다. 그들의 위대함이란 바로 자기 당파가 잇속을 따져 그들에게 지어 준 대단한 평판에 있다. 그리고 상황이 기적을 행해 보라고 청하는 순간 그들은 평범한 인물로 쪼그라든다. 영웅으로 여겨지지만 실은 성인인 이들에게는 무릇 불신이야말로 치명적인 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열광할 줄 모르는 재담꾼과 조롱꾼들에게 위엄 있고 도덕적인 분노를 터뜨린다.

같은 날 저녁 장관들이 엘리제궁에 불려 간다. 보나파르트는 샹가르니에를 해임하라고 다그치고, 장관 다섯이 서명을 거부한다. 《모니퇴르》는 내각 위기를 알리고, 질서당 신문들은 샹가르니에의 지휘 아래 의회 군대를 만들겠다고 위협한다. 질서당에게는 이 조치를 취할 헌법상 권한이 있었다. 샹가르니에를 국민의회 의장으로 임명하고, 자기 안전을 위해 원하는 만큼 병력을 징발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것도 그만큼 더 안전하게 할 수 있었다. 샹가르니에가 아직 실제로 군대와 파리 국민방위군의 우두머리였고, 군대와 함께 징발되기만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나파르트파 신문들은 국민의회가 병력을 직접 징발할 권리를 감히 문제 삼지도 못했다. 그런 법률적 트집은 주어진 상황에서 성공할 가망이 없었다. 군대가 국민의회의 명령에 따랐을 가능성은 크다. 보나파르트가 샹가르니에 해임에 부서하겠다는 장군 둘, 곧 바라게 딜리에와 생장당젤리를 찾아내려고 파리를 여드레나 뒤져야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다. 그러나 질서당이 자기 대열 안에서, 그리고 의회에서 그런 결의에 필요한 표를 얻었을지는 몹시 의심스럽다. 여드레 뒤 286표가 질서당에서 떨어져 나갔고, 산악파가 1851년 12월, 결단의 마지막 순간에도 비슷한 제안을 물리쳤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다. 그래도 성주들은 이때라면 아직 당의 대중을 영웅적 행동으로 끌고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영웅적 행동이란 총검의 숲 뒤에서 안심하고, 자기 진영으로 넘어온 군대의 봉사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러는 대신 성주 나리들은 1월 6일 저녁 엘리제궁으로 가서, 정치가다운 말솜씨와 염려를 늘어놓으며 보나파르트에게 샹가르니에를 해임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누군가를 설득하려 한다는 것은 그를 상황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 행보로 자신감을 얻은 보나파르트는 1월 12일 새 내각을 임명한다. 옛 내각의 지도자 풀드와 바로슈는 그대로 남는다. 생장당젤리가 육군장관이 되고, 《모니퇴르》는 샹가르니에 해임 법령을 싣는다. 그의 지휘권은 둘로 나뉘어, 바라게 딜리에가 제1군관구를, 페로가 국민방위군을 받는다. 사회의 방벽이 해임되었다. 그 일로 지붕에서 돌 하나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주가가 올랐다.

질서당은 샹가르니에라는 인물을 통해 자기 손에 들어오려던 군대를 밀쳐 냈다. 그렇게 해서 군대를 돌이킬 수 없이 대통령에게 넘겨주었다. 그럼으로써 질서당은 부르주아지가 지배할 소명을 잃었다고 선언한 셈이다. 의회 내각은 이미 없었다. 이제 군대와 국민방위군이라는 손잡이마저 잃었으니, 질서당에게 무슨 강제 수단이 남았던가? 인민 위에 선 의회의 찬탈한 권력과, 대통령에 맞선 의회의 헌법상 권력을 동시에 지켜 낼 수단 말이다. 하나도 없었다. 남은 것은 힘없는 원칙들에 호소하는 일뿐이었다. 그런데 질서당은 그런 원칙을 언제나 일반 규칙으로만 해석해 왔다. 자기는 더 자유롭게 움직이려고 남에게 지키라고 내리는 규칙 말이다. 샹가르니에가 해임되고 군사 권력이 보나파르트 손에 넘어가면서, 우리가 살펴보는 시기, 곧 질서당과 행정 권력이 싸운 시기의 첫 단락이 끝난다. 두 권력 사이의 전쟁은 이제 공공연히 선포되고 공공연히 치러진다. 그러나 질서당이 무기와 병사를 잃은 뒤에야 그렇게 된다. 내각도 없고, 군대도 없고, 인민도 없고, 여론도 없고, 5월 31일 선거법 이래 주권자 국민의 대표도 더는 아니고,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이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6], 국민의회는 차츰 옛 프랑스의 고등법원[7]으로 변해 버렸다. 행동은 정부에 맡기고, 자기는 일이 끝난 뒤(post festum) 투덜대며 간언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기관이다.

질서당은 새 내각을 분노의 폭풍으로 맞는다. 바도 장군은 휴가 동안 상설위원회가 보인 너그러움을 상기시킨다. 위원회는 지나치게 배려한 나머지 의사록 공개까지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내무장관 자신이 그 의사록을 공개하라고 고집한다. 이제 그 의사록은 당연히 고인 물처럼 밍밍해져 있다. 새로운 사실은 하나도 드러내지 못하고, 심드렁해진 대중에게 아무 반향도 일으키지 못한다. 레뮈자의 제안에 따라 국민의회는 각 분과로 물러나 “비상조치 위원회”를 임명한다. 파리는 일상의 질서라는 궤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마침 이때 장사가 잘되고, 공장들은 일감이 있고, 곡물 값은 낮고, 먹을거리는 넘쳐 나고, 저축은행에는 날마다 새 예금이 들어오고 있었으니 더욱 그랬다. 의회가 그토록 요란하게 알린 “비상조치”는 1월 18일 장관들에 대한 불신임 결의로 김이 빠져 버린다. 샹가르니에 장군의 이름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질서당은 공화파의 표를 얻으려고 결의문을 그렇게 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공화파는 내각의 모든 조치 가운데 하필 샹가르니에 해임만은 찬성했고, 질서당은 질서당대로 내각의 다른 행위들은 사실 자기가 불러 준 것이라 나무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월 18일 불신임 결의는 찬성 415표, 반대 286표로 결정되었다. 그러니까 이 결의는 단호한 정통왕조파·오를레앙파가 순수 공화파·산악파와 연합해서야 통과되었다. 이로써 드러난 것은, 질서당이 내각만이 아니라, 군대만이 아니라, 보나파르트와 충돌할 때는 자기 독자적인 의회 다수까지 잃었다는 사실이었다. 의원 한 무리가 질서당 진영에서 탈주했다. 중재라면 광신하다시피 매달려서, 싸움이 두려워서, 지쳐서, 피붙이들이 받는 국가 봉급을 생각한 집안 사정 때문에, 자리가 비게 될 장관직을 노리는 계산 때문에(오딜롱 바로), 그리고 평범한 부르주아가 언제나 자기 계급 전체의 이익을 이런저런 사사로운 동기에 바치려 드는 천박한 이기심 때문에. 보나파르트파 의원들은 애초부터 혁명에 맞서 싸울 때만 질서당에 속해 있었다. 가톨릭당의 우두머리 몽탈랑베르는 의회 정당이 살아남으리라는 희망을 버리고, 벌써 그때 자기 영향력을 보나파르트 쪽 저울에 얹었다. 끝으로 이 당의 지도자들, 오를레앙파 티에르와 정통왕조파 베리에는 자기가 공화파라고 공공연히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은 왕당파지만 머리는 공화파이며, 의회 공화국이 부르주아지 전체의 지배를 위한 유일하게 가능한 형태라고 고백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의회 뒤에서 지치지도 않고 계속 좇던 복고 계획을, 바로 부르주아 계급의 눈앞에서 위험한 만큼이나 머리 없는 음모라고 낙인찍어야 했다.

1월 18일 불신임 결의는 장관들을 겨누었지 대통령을 겨누지 않았다. 그러나 샹가르니에를 해임한 것은 내각이 아니라 대통령이었다. 그렇다면 질서당은 보나파르트 자신을 탄핵해야 했을까? 그의 복고 욕심 때문에? 그 욕심은 질서당 자신의 욕심을 보충할 뿐이었다. 군대 사열식과 12월 10일회에서 꾸민 음모 때문에? 질서당은 그 주제들을 단순한 의사일정 속행 결의로 이미 오래전에 묻어 버렸다. 1월 29일과 6월 13일의 영웅, 폭동이 일어나면 파리 네 귀퉁이에 불을 지르겠다고 1850년 5월에 을러댔던 사나이를 해임했기 때문에? 그들의 동맹자인 산악파와 카베냐크는 쓰러진 사회의 방벽을 공식 조의 표명으로 일으켜 세우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 자신도 장군을 해임할 대통령의 헌법상 권한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날뛴 것은 다만 그가 자기 헌법상 권리를 비의회적으로 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네 의회 특권을, 특히 보통선거권을 없앨 때, 끊임없이 비헌법적으로 쓰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들은 의회의 울타리 안에서만 꼼짝없이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1848년 이래 대륙 전체에 퍼진 그 독특한 병, 의회 백치증이 있어야 했다. 이 병은 감염된 자들을 상상의 세계에 붙박아 두고, 거친 바깥 세계에 대한 모든 감각과 기억과 이해를 빼앗는다. 그들은 의회 권력의 조건을 모두 제 손으로 부숴 버렸고, 다른 계급과 싸우면서 부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이 여전히 의회의 승리를 승리로 여기고, 대통령의 장관들을 치면서 대통령을 맞혔다고 믿으려면 바로 이 의회 백치증이 있어야 했다. 그들은 그에게 국민의 눈앞에서 국민의회를 다시 욕보일 기회를 주었을 뿐이다. 1월 20일 《모니퇴르》는 내각 전원의 사임이 수리되었다고 알렸다. 보나파르트는 이제 어떤 의회 정당도 다수를 갖고 있지 않다는 구실을 댔다. 산악파와 왕당파가 연합해 낳은 열매인 1월 18일 결의가 그것을 보여 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 다수가 형성되기를 기다린다며 이른바 과도 내각을 임명했다. 그 구성원은 하나도 의원이 아니었고, 모두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하찮은 인물들이었다. 그저 사무원과 서기들로 된 내각이었다. 질서당은 이제 이 꼭두각시들을 상대로 실컷 진을 빼도 좋았다. 행정 권력은 국민의회에서 진지하게 대표될 필요조차 없다고 여겼다. 장관들이 순전한 엑스트라일수록 보나파르트는 행정 권력 전체를 더 눈에 띄게 자기 한 몸에 모았고, 그것을 자기 목적에 쓸 여지도 그만큼 더 넓어졌다.

산악파와 연합한 질서당은 앙갚음으로 대통령 교부금 180만 프랑을 부결했다. 12월 10일회의 우두머리가 자기 사무원 장관들을 시켜 내놓게 한 안이었다. 이번에는 겨우 102표 차의 다수로 결정되었다. 1월 18일 이후 다시 27표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질서당의 해체는 계속되었다. 그러면서도 질서당은 산악파와 연합한 뜻을 누구도 한순간이라도 오해하지 않도록, 산악파 의원 189명이 서명한 정치범 일반 사면 동의는 심의조차 하지 않았다. 내무장관 바이스라는 자가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충분했다. 평온은 겉보기일 뿐이고 은밀히 큰 소요가 일고 있다. 은밀히 어디에나 있는 결사들이 조직되고 있고, 민주파 신문들이 다시 나올 채비를 하고 있으며, 도들에서 올라오는 보고는 좋지 않다. 제네바의 망명자들이 리옹을 거쳐 남프랑스 전역에 걸친 음모를 지휘하고 있고, 프랑스가 공업과 상업 공황의 문턱에 서 있으며, 루베의 공장주들은 노동시간을 줄였고, 벨일의 수감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고작 바이스 같은 자가 붉은 유령을 불러내기만 해도, 질서당은 토론도 없이 그 동의를 물리쳤다. 국민의회에 엄청난 인기를 안겨 주고 보나파르트를 다시 의회의 품으로 던져 넣었을 것이 틀림없는 동의였다. 질서당은 행정 권력이 내민 새 소요의 전망에 겁먹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급투쟁에 조금 놀 자리를 내주어 행정 권력이 자기에게 기대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질서당은 불장난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사이 이른바 과도 내각은 4월 중순까지 근근이 이어졌다. 보나파르트는 끊임없이 새 내각 조합을 내놓으며 국민의회를 지치게 하고 놀렸다. 어떤 때는 라마르틴과 비요를 넣은 공화파 내각을, 어떤 때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오딜롱 바로를 넣은 의회 내각을 만들려는 듯했다. 봉이 필요할 때면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이름이다. 또 어떤 때는 바티메닐과 브누아 다지를 넣은 정통왕조파 내각을, 어떤 때는 말빌을 넣은 오를레앙파 내각을 만들려는 듯했다. 그렇게 그는 질서당의 여러 분파를 서로 긴장 속에 묶어 두고, 공화파 내각이 들어서고 그러면 보통선거권 회복도 피할 수 없으리라는 전망으로 그들 모두를 겁주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부르주아지에게는, 의회 내각을 만들려는 자기의 진심 어린 노력이 왕당파 분파들의 고집 때문에 좌절된다는 확신을 심었다. 그런데 전반적인 상업 공황이 다가오는 듯 보일수록 부르주아지는 “강력한 정부”를 더 크게 외쳤고, 프랑스를 “행정부 없이” 내버려 두는 것을 더욱 용서할 수 없다고 여겼다. 공황은 도시에서, 파멸적으로 낮은 곡물 값은 농촌에서 사람들을 사회주의 쪽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장사는 날로 시들해졌고 일 없는 손은 눈에 띄게 늘었다. 파리에서는 적어도 1만 명의 노동자가 먹고살 길을 잃었고, 루앙, 뮐루즈, 리옹, 루베, 투르쿠앵, 생테티엔, 엘뵈프 등지에서는 수많은 공장이 멈춰 섰다. 이런 상황에서 보나파르트는 4월 11일 1월 18일의 내각을 되살릴 엄두를 낼 수 있었다. 루에르, 풀드, 바로슈 같은 나리들에 레옹 포셰 씨가 더해졌다. 포셰는 제헌의회가 마지막 나날에 거짓 전보를 퍼뜨렸다는 이유로 불신임 결의를 내려 낙인찍은 사람이었다. 장관 다섯 표만 빼고 만장일치였다. 그러니까 국민의회는 1월 18일 내각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석 달 동안 보나파르트와 싸웠는데, 그것은 4월 11일 풀드와 바로슈가 청교도 포셰를 셋째 동지로 자기네 장관 동맹에 받아들일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던 셈이다.

1849년 11월 보나파르트는 비의회 내각에 만족했고, 1851년 1월에는 의회 밖 내각에 만족했다. 4월 11일에 그는 반의회 내각을 꾸릴 만큼 자신이 강하다고 느꼈다. 공화파 의회와 왕당파 의회, 곧 제헌의회와 입법국민의회가 저마다 내린 불신임 결의를 사이좋게 한 몸에 모은 내각이었다. 이 내각들의 사다리는 의회가 자기 체온이 떨어지는 것을 잴 수 있는 온도계였다. 4월 말 그 체온은 페르시니가 샹가르니에를 직접 만나 대통령 진영으로 넘어오라고 권할 수 있을 만큼 떨어져 있었다. 페르시니는 보나파르트가 국민의회의 영향력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여긴다고 장담했다. 늘 계획하고 있으나 우연히 다시 미뤄진 쿠데타 뒤에 발표할 포고문도 벌써 준비되어 있다고 했다. 샹가르니에는 질서당 지도자들에게 이 사망 통지를 전했다. 그러나 빈대에게 물려 죽는다고 누가 믿겠는가? 그리고 의회는 그토록 얻어맞고, 그토록 해체되고, 그토록 죽을 기운조차 없이 늘어져 있으면서도, 12월 10일회의 괴상한 우두머리와 벌이는 결투를 빈대와의 결투 말고 다른 것으로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보나파르트는 아게실라오스가 아기스 왕에게 그랬듯 질서당에게 답했다. “그대는 나를 개미로 보지만, 나는 언젠가 사자가 되리라.”[8]

VI

질서당은 군사 권력을 계속 쥐고 행정 권력의 최고 지휘권을 되찾으려 헛되이 애쓰다가 산악파, 그리고 순수 공화파와 연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연합은 질서당이 독자적인 의회 다수를 잃었다는 것을 반박할 수 없이 증명했다. 5월 28일, 달력과 시계 바늘의 힘만으로도 질서당이 완전히 해체될 신호가 울렸다. 5월 28일과 함께 국민의회의 마지막 한 해가 시작되었다. 이제 국민의회는 헌법을 그대로 유지할지, 개정할지 정해야 했다. 그러나 헌법 개정은 부르주아지의 지배냐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지배냐, 민주주의냐 프롤레타리아의 무정부 상태냐, 의회 공화국이냐 보나파르트냐 하는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시에 오를레앙이냐 부르봉이냐 하는 문제였다! 이렇게 의회 한가운데 불화의 사과가 떨어졌다. 질서당을 서로 적대하는 분파로 갈라놓은 이해관계의 충돌이 이 사과를 두고 공공연히 불붙을 수밖에 없었다. 질서당은 이질적인 사회적 물질들이 결합한 것이었다. 개정 문제는 그 화합물이 다시 원래의 성분으로 분해되는 정치적 온도를 만들어 냈다.

보나파르트파가 개정을 바라는 이유는 단순했다. 무엇보다 보나파르트의 재선을 금지한 헌법 제45조를 없애고 그의 권력을 연장하는 것이 문제였다. 공화파의 입장도 그에 못지않게 단순해 보였다. 그들은 어떤 개정이든 무조건 거부했다. 개정은 공화국에 맞서 사방에서 꾸민 음모라고 보았다. 그들은 국민의회에서 4분의 1이 넘는 표를 쥐고 있었고, 헌법상 개정을 유효하게 의결하고 개정 의회를 소집하려면 4분의 3의 찬성이 필요했다. 그러니 그들은 자기 표만 세어 보면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승리를 확신했다.

이런 분명한 입장들 앞에서 질서당은 풀 수 없는 모순에 빠졌다. 개정을 거부하면 현상 유지가 위태로워졌다. 보나파르트에게는 폭력이라는 출구 하나만 남게 되고, 결단의 순간인 1852년 5월 둘째 일요일에 프랑스는 혁명적 무정부 상태에 내맡겨진다. 그때 프랑스에는 권위를 잃어 가는 대통령, 권위를 잃은 지 오래인 의회, 그 권위를 다시 차지하려 드는 인민이 남을 것이었다. 헌법에 따른 개정에 찬성표를 던지면, 그 표가 헛되고 공화파의 거부권에 걸려 헌법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질서당은 알고 있었다. 헌법을 어기고 단순 과반수로 충분하다고 선언하면, 질서당이 혁명을 다스리기를 바랄 길은 행정 권력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보나파르트를 헌법과 개정과 질서당 자신의 주인으로 만드는 꼴이었다. 대통령의 권력만 연장하는 부분 개정은 제정(帝政)을 노리는 찬탈에 길을 터 주었다. 공화국의 수명을 줄이는 전면 개정은 두 왕가의 요구를 피할 수 없는 충돌로 몰아넣었다. 부르봉 복고의 조건과 오를레앙 복고의 조건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서로를 배제했기 때문이다.

의회 공화국은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두 분파, 곧 정통왕조파와 오를레앙파, 대토지 소유와 산업이 대등한 권리를 갖고 나란히 살 수 있는 중립지대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두 분파가 함께 지배하기 위해 빠뜨릴 수 없는 조건이었다. 또 그들의 일반적 계급 이익이 각 분파의 특수한 요구와 사회의 다른 모든 계급을 한꺼번에 굴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국가 형태였다. 왕당파로서 그들은 옛 대립, 곧 토지 소유가 우위에 서느냐 화폐가 우위에 서느냐 하는 싸움으로 되돌아갔다. 이 대립의 최고 표현, 그 화신은 왕들 자신, 그들의 왕조였다. 질서당이 부르봉가를 다시 불러들이는 것을 한사코 꺼린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오를레앙파 의원 크레통은 1849년, 1850년, 1851년에 걸쳐 주기적으로 왕가들에 대한 추방령을 폐지하자는 안을 냈다. 의회 역시 그때마다 같은 광경을 연출했다. 왕당파들의 의회가 추방된 자기 왕들이 돌아올 문을 한사코 닫아 버리는 광경이었다. 리처드 3세는 헨리 6세를 죽이면서, 이 사람은 이 세상에 살기에는 너무 착하니 하늘나라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1]. 왕당파들은 프랑스가 너무 못돼서 자기 왕들을 다시 모실 자격이 없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형편에 떠밀려 공화파가 되었고, 자기 왕들을 프랑스에서 내쫓은 인민의 결정을 거듭 승인했다.

헌법 개정은 — 형편상 그것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공화국과 함께 두 부르주아 분파의 공동 지배도 문제 삼았다. 그리고 군주정의 가능성과 함께, 군주정이 번갈아 가며 앞세워 대표했던 이해관계의 경쟁, 곧 한 분파가 다른 분파보다 우위에 서려는 싸움을 되살려 놓았다. 질서당의 외교가들은 두 왕조를 하나로 합쳐서, 이른바 왕당파 정당들과 그 왕가들의 융합으로 이 싸움을 가라앉힐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복고 왕정과 7월 왕정의 진짜 융합은 의회 공화국이었다. 거기서는 오를레앙파의 색깔도 정통왕조파의 색깔도 지워졌고, 부르주아의 여러 종(種)은 그냥 부르주아라는 하나의 속(屬)으로 녹아 사라졌다. 그런데 이제는 오를레앙파가 정통왕조파가 되고 정통왕조파가 오를레앙파가 되어야 했다. 그들의 대립을 몸으로 나타내던 왕권이 그들의 통일을 구현해야 했다. 저마다 배타적인 분파 이익의 표현이 공동의 계급 이익의 표현이 되어야 했다. 두 군주정의 폐지, 곧 공화국만이 해낼 수 있었고 실제로 해냈던 일을 군주정이 해내야 했다. 이것이 질서당의 박사들이 머리를 싸매고 만들어 내려던 현자의 돌이었다. 마치 정통 군주정이 언젠가 산업 부르주아의 군주정이 될 수 있고, 시민 왕정이 언젠가 대대로 내려온 토지 귀족의 왕정이 될 수 있다는 듯이. 마치 토지 소유와 산업이 하나의 왕관 아래서 형제처럼 지낼 수 있다는 듯이. 왕관은 형이든 아우든 한 사람의 머리에만 얹힐 수 있는데도. 마치 토지 소유가 스스로 산업적이 되기로 마음먹지 않는 한, 산업이 토지 소유와 화해할 수 있다는 듯이. 앙리 5세가 내일 죽는다 해도, 파리 백작은 그 때문에 정통왕조파의 왕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를레앙파의 왕이기를 그만두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나 융합의 철학자들은 개정 문제가 전면에 나설수록 기세를 올렸고, 《아상블레 나시오날》이라는 공식 일간지까지 만들었으며, 바로 지금(1852년 2월)도 다시 일을 꾸미고 있다. 그들은 모든 어려움이 두 왕조의 반감과 경쟁에서 생긴다고 여겼다. 오를레앙 가문과 앙리 5세를 화해시키려는 시도는 루이 필리프가 죽은 뒤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왕조 음모가 다 그렇듯 국민의회가 쉬는 동안에만, 막간에, 무대 뒤에서 벌어졌고, 진지한 사업이라기보다 옛 미신과 나누는 감상적인 추파에 가까웠다. 이제 이 시도는 국가 대사극이 되었다. 질서당은 그것을 지금까지의 아마추어 극장이 아니라 공개 무대에 올렸다. 파발꾼들이 파리에서 베네치아로, 베네치아에서 클레어몬트로, 클레어몬트에서 파리로 날아다녔다[2]. 샹보르 백작은 성명을 내어 “자기 가문 모든 구성원의 도움을 받아” 자기의 복고가 아니라 “국민의” 복고를 하겠다고 알린다. 오를레앙파 살방디는 앙리 5세의 발아래 엎드린다. 정통왕조파 우두머리 베리에, 브누아 다지, 생프리스트는 오를레앙 가문을 설득하러 클레어몬트로 순례를 떠나지만 헛수고로 끝난다. 융합파는 너무 늦게야 깨닫는다. 두 부르주아 분파의 이해관계가 가족의 이해관계, 두 왕가의 이해관계라는 형태로 날카로워지면, 배타성은 조금도 줄지 않고 양보심은 조금도 늘지 않는다는 것을. 앙리 5세가 파리 백작을 후계자로 인정한다 해도 — 이것이 융합이 잘해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성과였다 — 오를레앙가는 앙리 5세에게 자식이 없다는 사실로 이미 보장된 것 말고는 아무 권리도 얻지 못한다. 오히려 7월 혁명으로 얻어 낸 모든 권리를 잃는다. 오를레앙가는 자기 고유의 권리를 버리게 된다. 거의 백 년에 걸친 싸움에서 부르봉가의 맏가지에게서 빼앗아 낸 모든 명분을 버리고, 자기의 역사적 특권, 곧 근대 왕권의 특권을 족보의 특권과 맞바꾸는 셈이다. 그러니 융합이란 오를레앙가가 스스로 물러나는 것, 정통왕조파에 굴복하는 것, 개신교 국교회에서 가톨릭교회로 뉘우치며 되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렇게 되돌아가 봐야 잃어버린 왕좌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태어난 왕좌의 계단에 서는 것이었다. 기조, 뒤샤텔 등 옛 오를레앙파 장관들도 융합을 거들러 클레어몬트로 달려갔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대변한 것은 7월 혁명에 대한 숙취, 시민 왕정과 시민들의 왕정에 대한 절망, 그리고 무정부 상태를 막을 마지막 부적으로 정통성을 믿는 미신뿐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는 오를레앙가와 부르봉가의 중재자라고 상상했지만, 실제로는 배신한 오를레앙파에 지나지 않았다. 주앵빌 공은 그들을 그렇게 맞았다. 반면 오를레앙파 가운데 생명력 있고 호전적인 쪽, 곧 티에르, 바즈 등은 루이 필리프 일가를 더 쉽게 설득했다. 직접적인 왕정 복고는 모두 두 왕조의 융합을 전제하고, 그런 융합은 모두 오를레앙가의 퇴위를 전제한다. 그러니 당분간 공화국을 인정하고, 대통령 의자를 왕좌로 바꿀 수 있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선조들의 전통에 꼭 들어맞는다는 것이었다. 주앵빌의 출마설이 소문으로 퍼졌고, 세상의 호기심은 애가 타게 붙들려 있었다. 몇 달 뒤, 개정안이 부결된 다음 9월에 그의 출마가 공식으로 선언되었다.

이렇게 오를레앙파와 정통왕조파의 왕당파 융합 시도는 실패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의회 융합, 곧 공화국이라는 공동 형태를 깨뜨리고 질서당을 다시 원래의 성분으로 분해해 버렸다. 그러나 클레어몬트와 베네치아 사이가 멀어지고 화해가 깨지고 주앵빌 운동이 번져 갈수록, 보나파르트의 장관 포셰와 정통왕조파 사이의 협상은 더 열띠고 더 진지해졌다.

질서당의 해체는 원래 성분에서 멈추지 않았다. 두 큰 분파도 저마다 다시 쪼개졌다. 마치 예전에 정통왕조파 쪽이든 오를레앙파 쪽이든 두 진영 안에서 서로 싸우고 밀치던 옛 갈래들이 모두 다시 녹아 풀려난 것 같았다. 마른 적충류가 물에 닿아 되살아나듯, 저마다 따로 무리를 짓고 독자적으로 맞설 만큼 생명력을 되찾은 것 같았다. 정통왕조파는 튀일리궁과 마르상관 사이의, 빌렐과 폴리냐크 사이의 쟁점으로 되돌아가는 꿈을 꾸었다[3]. 오를레앙파는 기조, 몰레, 브로이, 티에르, 오딜롱 바로가 마상 시합을 벌이던 황금시대를 다시 살았다.

질서당 가운데 개정을 바라지만 개정의 범위를 두고는 다시 의견이 갈린 부분이 있었다. 한쪽은 정통왕조파였는데, 한 무리는 베리에와 팔루가, 다른 무리는 라 로슈자클랭이 이끌었다. 다른 쪽은 싸움에 지친 오를레앙파로, 몰레, 브로이, 몽탈랑베르, 오딜롱 바로가 이끌었다. 이들은 보나파르트파 의원들과 손잡고 다음과 같은 막연하고 폭넓은 동의안에 합의했다.

“아래 서명한 의원들은 국민에게 그 주권의 온전한 행사를 돌려주기 위해 헌법을 개정할 것을 동의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들은 보고자 토크빌을 통해 만장일치로 이렇게 선언했다. 국민의회는 공화국 폐지를 제안할 권리가 없으며, 그 권리는 개정 의회에만 있다. 게다가 헌법은 “합법적인” 방식으로만, 곧 헌법이 정한 4분의 3의 찬성이 있어야만 개정될 수 있다. 엿새 동안 격론을 벌인 끝에 7월 19일, 예상대로 개정안은 부결되었다. 찬성 446표, 반대 278표였다. 티에르, 샹가르니에 등 단호한 오를레앙파는 공화파, 산악파와 함께 반대표를 던졌다.

이렇게 의회 다수는 헌법에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헌법 자체는 소수 편을 들어 소수의 결정이 구속력을 갖는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질서당은 1850년 5월 31일에도, 1849년 6월 13일에도 헌법을 의회 다수 아래 두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질서당의 정책 전체가 헌법 조문을 의회 다수의 결의 아래 두는 데 기대지 않았던가? 질서당은 법조문을 떠받드는 구약식 미신은 민주파에게 넘겨 두고, 그 미신 때문에 민주파를 혼내 주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 순간 헌법 개정이란 대통령 권력의 지속일 뿐이었고, 헌법의 지속이란 보나파르트의 퇴진일 뿐이었다. 의회는 보나파르트 편을 들었지만, 헌법은 의회에 반대했다. 그러니 보나파르트는 헌법을 찢어 버려도 의회의 뜻대로 하는 것이었고, 의회를 쫓아 버려도 헌법의 뜻대로 하는 것이었다.

의회는 헌법을, 그리고 그와 함께 자기 자신의 지배를 “다수의 밖에” 있다고 선언했다. 의회는 자기 결의로 헌법을 폐기하고 대통령 권력을 연장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기가 살아 있는 한 헌법은 죽을 수 없고 대통령 권력은 살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의회를 묻을 자들의 발이 이미 문 앞에 와 있었다. 의회가 개정을 토론하는 동안, 보나파르트는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인 바라게 딜리에 장군을 제1군관구 사령관 자리에서 내보냈다. 그 자리에는 마냥 장군을 앉혔다. 마냥은 리옹의 정복자이자 12월 사태의 영웅이며 보나파르트의 앞잡이였다. 루이 필리프 시절 불로뉴 원정 때 이미 그를 위해 얼마간 제 몸을 더럽힌 자였다.

질서당은 개정에 관한 결의로 드러냈다. 자기가 다스릴 줄도 섬길 줄도, 살 줄도 죽을 줄도, 공화국을 견딜 줄도 무너뜨릴 줄도, 헌법을 지킬 줄도 뒤엎을 줄도, 대통령과 함께 일할 줄도 갈라설 줄도 모른다는 것을. 그렇다면 질서당은 모든 모순의 해결을 누구에게 기대했는가? 달력에게, 사건의 흐름에게 기대했다. 질서당은 사건을 다스릴 힘이 있다고 내세우기를 그만두었다. 그렇게 해서 사건들이 자기에게 폭력을 휘두르도록 부추겼다. 사건들만이 아니라 그 권력도 부추겼다. 인민과 싸우는 동안 질서당은 그 권력에 자기 속성을 하나씩 넘겨주었고, 마침내 그 앞에 아무 힘 없이 서게 되었다. 행정 권력의 우두머리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질서당을 칠 작전을 짜고, 수단을 늘리고, 도구를 고르고, 진지를 굳힐 수 있도록, 질서당은 이 위기의 한복판에서 무대를 떠나 8월 10일부터 11월 4일까지 석 달 동안 휴회하기로 했다.

의회 정당은 두 큰 분파로 갈라졌고, 각 분파는 다시 안에서 쪼개졌다. 그뿐이 아니었다. 의회 안의 질서당은 의회 밖의 질서당과 틀어졌다. 부르주아지의 대변인과 문필가들, 그들의 연단과 신문, 한마디로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그와 부르주아지 자신, 대표하는 자와 대표되는 자가 서로 낯설게 마주 섰고 더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방의 정통왕조파는 시야는 좁고 열광은 끝이 없었다. 그들은 의회 지도자 베리에와 팔루가 보나파르트 진영으로 넘어가고 앙리 5세를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그들의 백합꽃 머리는 타락은 믿었지만 외교는 믿지 않았다.

상업 부르주아지와 그 정치가들의 결별은 이보다 훨씬 치명적이고 결정적이었다. 상업 부르주아지가 자기 정치가들을 나무란 것은, 정통왕조파가 자기 지도자들을 나무랐듯 원칙을 저버려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거꾸로, 쓸모없어진 원칙에 매달린다고 나무랐다.

앞에서 이미 넌지시 말했듯, 풀드가 내각에 들어간 뒤로 루이 필리프 치하에서 사자의 몫을 차지했던 상업 부르주아지의 일부, 곧 금융귀족은 보나파르트파가 되었다. 풀드는 증권거래소에서 보나파르트의 이익을 대변했을 뿐 아니라, 보나파르트 곁에서 증권거래소의 이익도 대변했다. 금융귀족의 처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그들의 유럽 기관지인 런던의 《이코노미스트》에서 따온 인용이다. 1851년 2월 1일 자 지면에 이 잡지는 파리발 통신을 이렇게 싣는다.

“이제 우리는 프랑스가 무엇보다 평온을 원한다는 것을 사방에서 확인했다. 대통령은 입법의회에 보내는 교서에서 그렇게 선언하고, 국민의 연단은 그것을 메아리로 되돌려 주며, 신문들은 그것을 다짐하고, 설교단은 그것을 알린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소란이 일 기미가 보이면 국채가 민감하게 흔들리고, 행정 권력이 이길 때마다 국채가 굳건해진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11월 29일 자 지면에서 《이코노미스트》는 자기 이름으로 이렇게 선언한다.

“이제 유럽의 모든 증권거래소에서 대통령은 질서의 보초로 인정받는다.”

이렇게 금융귀족은 질서당이 행정 권력과 벌이는 의회 투쟁을 질서의 교란이라고 비난했고, 대통령이 자기들의 대표라는 자들에게 이길 때마다 질서의 승리라고 축하했다. 여기서 금융귀족이란 대규모 공채 인수업자와 국채 투기꾼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들의 이익이 국가 권력의 이익과 일치한다는 것은 누구나 당장 알 수 있다. 근대의 화폐 거래 전체, 은행업 전체가 공공 신용과 아주 긴밀하게 얽혀 있다. 은행의 영업 자본 일부는 빨리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국채에 투자되어 이자를 낳을 수밖에 없다. 은행의 예금, 곧 은행에 맡겨져 은행이 상인과 산업가에게 나누어 주는 자본은 일부가 국채 이자 생활자들의 배당금에서 흘러나온다. 어느 시대에나 국가 권력의 안정은 화폐 시장 전체와 그 사제들에게 모세이자 예언자였다[4]. 하물며 대홍수가 일 때마다 낡은 국가들과 함께 낡은 국가 부채까지 쓸어 가 버릴 듯한 오늘날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산업 부르주아지도 질서에 대한 광신에 사로잡혀, 의회의 질서당이 행정 권력과 벌이는 말다툼에 짜증을 냈다. 티에르, 앙글레스, 생트뵈브 등은 샹가르니에 해임을 계기로 1월 18일에 투표한 뒤, 바로 산업 지역의 선거구민들에게서 공개 질책을 받았다. 질책은 특히 그들이 산악파와 연합한 것을 질서에 대한 대역죄라고 꾸짖었다. 질서당과 대통령의 싸움은 허세 섞인 놀림과 좀스러운 음모로 나타났고, 그런 싸움이 이보다 나은 대접을 받을 만하지 않았다는 것은 앞에서 보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부르주아 정당은 자기 대표들에게, 군사 권력을 자기 의회의 손에서 모험가 왕위 요구자의 손으로 저항 없이 넘겨주라고 요구했다. 그런 정당은 자기를 위해 허비된 그 음모들만 한 값어치도 없었다. 이 정당이 증명한 것은, 자기의 공적 이익, 자기 자신의 계급 이익, 자기의 정치권력을 지키려는 싸움을 사사로운 사업을 방해하는 성가시고 언짢은 일로만 여긴다는 것이었다.

지방 도시의 부르주아 명사들, 판사들, 상사 법원 판사 등은 보나파르트가 순회하는 곳마다 거의 예외 없이 그를 더없이 비굴하게 맞았다. 디종에서처럼 그가 국민의회와 특히 질서당을 거리낌 없이 공격할 때조차 그랬다.

장사가 잘될 때는, 1851년 초까지 그랬듯이, 상업 부르주아지는 장사의 흥이 깨지지 않도록 모든 의회 투쟁에 대고 날뛰었다. 장사가 안될 때는, 1851년 2월 말부터 줄곧 그랬듯이, 의회 투쟁이 불황의 원인이라고 탓하며, 장사가 다시 떠들썩해지도록 의회는 입을 다물라고 외쳤다. 개정 논쟁은 바로 이 나쁜 시기에 벌어졌다. 기존 국가 형태가 사느냐 죽느냐가 걸린 문제였으므로, 부르주아지는 자기 대표들에게 이 고문 같은 임시 상태를 끝내면서 동시에 현상을 유지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더욱 있다고 느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었다. 부르주아지가 말하는 임시 상태의 끝이란 바로 그 상태가 계속되는 것,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을 아득히 먼 곳으로 미루는 것이었다. 현상은 두 가지 길로만 유지될 수 있었다. 보나파르트의 권력을 연장하든가, 그가 헌법대로 물러나고 카베냐크를 뽑든가. 부르주아지의 일부는 뒤의 해결을 바랐다. 그들이 자기 대표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충고라고는 입을 다물고 뜨거운 문제를 건드리지 말라는 것뿐이었다. 대표들이 말을 하지 않으면 보나파르트도 행동하지 않으리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머리를 처박는 타조 같은 의회를 바랐다. 부르주아지의 다른 일부는 보나파르트가 기왕 대통령 의자에 앉아 있으니 그대로 앉혀 두어 모든 것이 옛 궤도대로 굴러가기를 바랐다. 그들은 자기들의 의회가 대놓고 헌법을 깨고 군말 없이 물러나지 않는 것에 분개했다.

대부르주아지의 지방 대표 기관인 도의회들은 국민의회 휴회 중인 8월 25일부터 회의를 열었는데, 거의 만장일치로 개정에 찬성한다고 선언했다. 곧 의회에 반대하고 보나파르트를 지지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의회 대표들과 틀어진 것보다 더 노골적으로 자기 문필 대표들, 자기 신문에 분노를 터뜨렸다. 부르주아 기자가 보나파르트의 찬탈 욕심을 공격할 때마다, 신문이 행정 권력에 맞서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권리를 지키려 할 때마다, 부르주아 배심원들은 감당할 수 없는 벌금과 낯 뜨거운 징역형을 선고했다. 이 판결들은 프랑스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를 놀라게 했다.

내가 보여 주었듯, 의회의 질서당은 평온을 외치다가 스스로에게 잠자코 있으라는 처분을 내렸다. 다른 사회 계급들과 싸우면서 자기 체제, 곧 의회 체제의 모든 조건을 제 손으로 없애 버림으로써,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지배가 부르주아지의 안전과 존속에 맞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한편 의회 밖의 부르주아 대중은 대통령에게 굽실거리고, 의회를 헐뜯고, 자기 신문을 무지막지하게 짓밟음으로써 보나파르트를 부추겼다. 자기의 말하고 쓰는 부분, 자기의 정치가와 문필가, 자기의 연단과 신문을 억누르고 없애 버리라고 말이다. 그래야 강력하고 무제한의 정부의 보호 아래 안심하고 사사로운 사업에 힘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부르주아지는 지배의 수고와 위험에서 벗어나려고 자기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떨쳐 버리고 싶어 안달이 났다고 분명히 선언했다.

부르주아지는 자기 계급의 지배를 위한 싸움이 의회와 신문에서 벌어지는 것만으로도 분개했고, 그 싸움의 지도자들을 배신했다. 그런 부르주아지가 이제 와서 감히 프롤레타리아트를 고발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를 위해 피비린내 나는 싸움, 사생결단의 싸움에 나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번번이 자기의 일반적 계급 이익, 곧 정치적 이익을 더없이 편협하고 더러운 사적 이익에 갖다 바쳤고, 자기 대표들에게도 그런 희생을 요구했다. 그런 부르주아지가 이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의 이상적인 정치적 이익을 자기의 물질적 이익에 희생시켰다고 한탄한다. 부르주아지는 사회주의자들에게 홀린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오해받고 결정적 순간에 버림받은 아름다운 영혼인 척한다[5]. 그리고 부르주아 세계 전체에서 맞장구를 얻는다. 물론 나는 여기서 독일의 시골 정치꾼들과 지조를 내세우는 건달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저 《이코노미스트》를 보라. 이 잡지는 1851년 11월 29일, 그러니까 쿠데타 나흘 전만 해도 보나파르트는 “질서의 보초”이고 티에르와 베리에는 “무정부주의자”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보나파르트가 그 무정부주의자들을 잠재운 뒤인 1851년 12월 27일에는 벌써, “무지하고 버릇없고 어리석은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중간 및 상류 사회 계층의 수완, 지식, 규율, 정신적 영향력, 지적 자원, 도덕적 무게”를 배신했다고 외쳐 댄다. 어리석고 무지하고 비열한 대중은 다름 아닌 부르주아지 자신이었다.

물론 프랑스는 1851년에 일종의 작은 상업 공황을 겪었다. 2월 말에는 1850년보다 수출이 줄었고, 3월에는 상업이 어려워지고 공장들이 문을 닫았다. 4월에는 산업 도(道)들의 형편이 2월의 나날 직후처럼 절망적으로 보였고, 5월에도 경기는 아직 되살아나지 않았다. 6월 28일에도 프랑스 은행의 장부를 보면 예금은 엄청나게 늘고 어음 대출은 그만큼 크게 줄어, 생산이 멈춰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0월 중순에야 경기가 차츰 나아지기 시작했다.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이 불황을 순전히 정치적 원인으로 설명했다. 의회와 행정 권력의 싸움, 임시변통의 국가 형태가 주는 불안, 1852년 5월 둘째 일요일에 대한 공포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모든 사정이 파리와 지방의 몇몇 산업 부문을 짓눌렀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나 어쨌든 정치 상황의 이런 영향은 국지적이고 사소했다. 정치 상태가 나빠지고 정치의 지평이 어두워져 언제 엘리제궁에서 벼락이 떨어질지 모르던 바로 그때, 10월 중순 무렵에 상업이 나아졌다는 것 말고 다른 증거가 필요한가? 덧붙이자면 프랑스 부르주아의 “수완, 지식, 정신적 통찰, 지적 자원”은 제 코끝을 넘지 못한다. 그래도 그는 런던 산업박람회가 열리는 내내 자기 장사가 안되는 원인에 코가 닿도록 부딪칠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공장들이 문을 닫는 동안 영국에서는 상사들이 파산했다. 프랑스에서 4월과 5월에 산업 공황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영국에서도 4월과 5월에 상업 공황이 절정에 이르렀다. 프랑스 양모 공업처럼 영국 양모 공업도 어려움을 겪었고, 프랑스 견직업처럼 영국 견직업도 그랬다. 영국의 면공장들은 계속 돌아갔지만, 1849년과 1850년만큼 이윤을 내지는 못했다. 차이라고는 이것뿐이었다. 프랑스의 공황은 산업 공황이었고 영국의 공황은 상업 공황이었다. 프랑스에서는 공장들이 멈췄지만 영국에서는 공장들이 늘어났다. 다만 앞선 해들보다 불리한 조건에서였다. 프랑스에서는 수출이, 영국에서는 수입이 큰 타격을 받았다. 공통 원인은 뻔했다. 물론 그 원인을 프랑스 정치의 지평 안에서 찾을 수는 없다. 1849년과 1850년은 물질적 번영이 최고에 이른 해였고, 과잉생산의 해였다. 그 과잉생산은 1851년에야 과잉생산으로 드러났다. 이해 초에는 산업박람회에 대한 기대가 과잉생산을 더욱 부추겼다. 여기에 특유의 사정들이 겹쳤다. 처음에는 1850년과 1851년의 면화 흉작, 다음에는 예상보다 면화를 많이 거두리라는 확실한 전망, 처음에는 오르다가 갑자기 떨어진 면화 가격, 한마디로 면화 가격의 출렁임이었다. 생사 수확은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평년작에도 못 미쳤다. 끝으로 양모 공업은 1848년 이래 너무 커져서 양모 생산이 따라가지 못했고, 원모 가격이 양모 제품 가격에 견주어 크게 어긋날 만큼 올랐다. 이렇게 세계 시장을 상대하는 세 산업의 원료에서만 벌써 상업 불황의 재료가 세 겹으로 쌓인 셈이다. 이런 특수한 사정을 빼고 보면, 1851년의 겉보기 공황은 과잉생산과 과잉투기가 산업 순환을 그려 나갈 때마다 한 번씩 멈춰 서는 휴지기에 지나지 않았다. 과잉생산과 과잉투기는 그렇게 멈췄다가 온 힘을 다시 끌어모아, 순환의 마지막 구간을 열병에 걸린 듯 내달려 출발점인 전반적 상업 공황으로 되돌아온다. 상업사의 이런 막간에 영국에서는 상사들이 파산하고, 프랑스에서는 산업 자체가 멈춘다. 프랑스 산업은 한편으로는 바로 그때 모든 시장에서 견딜 수 없게 되는 영국과의 경쟁에 밀려 물러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치품 산업이라서 불황마다 남보다 먼저 얻어맞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는 전반적 공황 말고도 자기 나라만의 상업 공황을 겪는다. 그러나 그것도 프랑스 국내 사정보다는 세계 시장의 전반적 상태에 훨씬 더 크게 좌우된다. 프랑스 부르주아의 선입견에 영국 부르주아의 판단을 맞세워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리버풀의 가장 큰 상사 가운데 하나는 1851년 연례 상업 보고서에 이렇게 쓴다.

“방금 끝난 해만큼 연초의 기대를 크게 저버린 해는 드물었다. 모두가 한목소리로 큰 번영을 기대했지만, 지난 사반세기 가운데 가장 실망스러운 해로 드러났다. 물론 이것은 상업 계급에만 해당하고 산업 계급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연초에는 분명 그 반대로 판단할 근거가 있었다. 상품 재고는 적었고, 자본은 남아돌았고, 식량은 쌌으며, 풍성한 가을이 확실했다. 대륙에는 흔들림 없는 평화가 있었고, 국내에는 정치적·재정적 소란이 없었다. 참으로 상업의 날개가 이보다 더 자유로웠던 적은 없었다. …… 이 불리한 결과를 무엇 탓으로 돌릴 것인가? 우리는 수입과 수출 양쪽의 과잉 거래 탓이라고 본다. 우리 상인들이 스스로 활동에 더 좁은 한계를 긋지 않는다면, 3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공황 말고는 우리를 제 궤도에 붙들어 둘 것이 없다.”

이제 프랑스 부르주아를 떠올려 보라. 이 장사 공황 한가운데서 장사에 병든 그의 머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에 시달리고, 그것들이 윙윙 맴도는 통에 얼이 빠진다. 쿠데타와 보통선거권 부활에 관한 소문, 의회와 행정 권력의 싸움, 오를레앙파와 정통왕조파의 프롱드 전쟁, 남프랑스의 공산주의 음모, 니에브르 도와 셰르 도에서 일어났다는 자크리(농민 봉기), 여러 대통령 후보들의 선전, 신문들의 요란한 구호, 무기를 들고 헌법과 보통선거권을 지키겠다는 공화파의 위협, 1852년 5월 둘째 일요일에 세상이 끝난다고 알리는 망명한 명목뿐인 영웅들[6]의 복음. 그러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융합, 개정, 연장, 헌법, 음모, 연합, 망명, 찬탈, 혁명이 뒤엉킨 이 말할 수 없이 시끄러운 혼란 속에서, 부르주아가 미친 듯이 씩씩거리며 자기의 의회 공화국에 대고 이렇게 외치는 까닭을. “끝없는 공포보다는 차라리 공포스러운 끝을!”

보나파르트는 이 외침을 알아들었다. 채권자들의 성화가 갈수록 거세져 그의 이해력은 더 날카로워졌다. 채권자들은 해가 질 때마다 지급일, 곧 1852년 5월 둘째 일요일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별들의 운행이 지상의 어음에 맞서 지급 거절 증서를 낸다고 여겼다. 그들은 진짜 점성술사가 되어 버렸다. 국민의회는 헌법에 따라 권력을 연장하리라는 보나파르트의 희망을 끊어 버렸고, 주앵빌 공의 출마로 보나파르트는 더는 잠자코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그림자를 앞에 드리운 적이 있다면, 그것은 보나파르트의 쿠데타였다. 이미 1849년 1월 29일, 선거에서 이긴 지 겨우 한 달 만에 그는 샹가르니에에게 쿠데타를 제안했다. 그 자신의 총리 오딜롱 바로는 1849년 여름에 에둘러, 티에르는 1850년 겨울에 대놓고 쿠데타 정책을 고발했다. 1851년 5월에는 페르시니가 샹가르니에를 다시 한번 쿠데타에 끌어들이려 했고, 《메사제 드 라상블레》가 이 협상을 폭로했다. 보나파르트파 신문들은 의회에 폭풍이 일 때마다 쿠데타로 위협했고, 위기가 다가올수록 그 어조는 높아졌다. 보나파르트는 밤마다 남녀 사기꾼 패거리와 술잔치를 벌였다. 자정이 가까워지고 넉넉한 헌주에 혀가 풀리고 상상이 달아오를 때마다, 쿠데타는 이튿날 아침으로 결정되었다. 칼을 뽑고, 잔을 부딪치고, 의원들이 창밖으로 내던져지고, 황제의 망토가 보나파르트의 어깨에 걸쳐졌다. 그러다 이튿날 아침이 오면 유령은 다시 사라졌고, 깜짝 놀란 파리는 입이 가벼운 베스타 무녀들과 조심성 없는 기사들에게서 자기가 또 한 번 아슬아슬하게 피해 간 위험을 전해 들었다. 9월과 10월에는 쿠데타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림자는 알록달록한 은판 사진처럼 색깔까지 띠었다. 유럽 일간지들에 실린 9월과 10월의 월간 정세 기사를 들춰 보라. 다음과 같은 귀띔이 글자 그대로 실려 있을 것이다. “파리에 쿠데타 소문이 가득하다. 밤사이 수도에 군대가 들어차고, 이튿날 아침 국민의회를 해산하고, 센 도에 계엄을 선포하고, 보통선거권을 되살리고, 인민에게 호소하는 포고령이 나오리라고 한다. 보나파르트는 이 불법 포고령들을 집행할 장관을 찾고 있다고 한다.” 이런 소식을 전하는 통신은 언제나 운명처럼 “연기됨”으로 끝난다. 쿠데타는 언제나 보나파르트의 고정관념이었다. 그는 이 생각을 품고 프랑스 땅을 다시 밟았다. 이 생각이 그를 얼마나 사로잡았던지 그는 줄곧 그것을 내비치고 떠벌렸다. 그리고 그는 너무 나약해서 줄곧 그것을 다시 포기했다. 쿠데타의 그림자는 파리 사람들에게 유령처럼 너무 익숙해져서, 그것이 마침내 살과 피를 갖추고 나타났을 때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쿠데타를 성공시킨 것은 12월 10일회 우두머리의 입 무거운 신중함도 아니었고, 국민의회가 뜻밖에 기습당한 것도 아니었다. 쿠데타가 성공했다면, 그것은 그의 경솔함에도 불구하고, 국민의회가 미리 다 아는 가운데 성공한 것이다. 그것은 앞선 발전의 필연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10월 10일 보나파르트는 장관들에게 보통선거권을 되살리겠다는 결심을 알렸다. 16일 장관들은 사표를 냈고, 26일 파리는 토리니 내각이 꾸려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같은 때 경찰청장 카를리에는 모파로 바뀌었고, 제1군관구 사령관 마냥은 가장 믿을 만한 연대들을 수도에 모았다. 11월 4일 국민의회가 다시 회의를 열었다. 국민의회가 할 일이라고는, 자기가 밟아 온 과정을 짧게 간추려 복습하는 것, 그리고 자기가 죽은 다음에야 묻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뿐이었다.

국민의회가 행정 권력과 싸우다 잃은 첫 진지는 내각이었다. 국민의회는 껍데기뿐인 토리니 내각을 온전한 내각으로 받아들여 이 손실을 엄숙히 인정해야 했다. 지로 씨가 새 장관들을 대표해 인사하러 나왔을 때 상설위원회는 웃음으로 그를 맞았다. 보통선거권 부활처럼 강력한 조치에 이토록 약한 내각이라니! 그러나 바로 그것이 핵심이었다. 의회 안에서는 아무것도, 의회에 맞서서는 모든 것을 관철하는 것이었다.

국민의회는 다시 문을 연 첫날 보나파르트의 교서를 받았다. 그는 보통선거권을 되살리고 1850년 5월 31일 법을 폐지하라고 요구했다. 같은 날 장관들이 그런 취지의 법안을 냈다. 의회는 장관들의 긴급 동의를 즉시 부결했고, 11월 13일에는 법안 자체를 355 대 348로 부결했다. 이렇게 국민의회는 또 한 번 자기 위임장을 찢었다. 자유롭게 선출된 인민의 대표 기관에서 한 계급의 찬탈자 의회로 바뀌었음을 또 한 번 확인했다. 의회라는 머리를 국민이라는 몸에 이어 주던 근육을 제 손으로 끊었다는 것을 또 한 번 고백했다.

행정 권력이 보통선거권 부활을 제안하며 국민의회를 건너뛰어 인민에게 호소했다면, 입법 권력은 재무관 법안으로 인민을 건너뛰어 군대에 호소했다. 이 재무관 법안은 의회가 군대를 직접 징발할 권리, 의회의 군대를 만들 권리를 정해 두려는 것이었다. 의회는 이렇게 군대를 자기와 인민 사이, 자기와 보나파르트 사이의 심판관으로 세우고 군대를 결정적인 국가 권력으로 인정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 자기가 오래전에 군대를 지배하겠다는 요구를 버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당장 군대를 징발하지 않고 징발할 권리를 토론함으로써, 의회는 자기 힘을 스스로 의심한다는 것을 드러냈다. 재무관 법안을 부결함으로써 자기의 무력함을 공공연히 고백했다. 이 법안은 108표 차로 떨어졌으니, 산악파가 승부를 가른 셈이었다. 산악파는 뷔리당의 당나귀[7] 꼴이었다. 다만 건초 두 자루 사이에서 어느 쪽이 더 맛있을지 고르는 것이 아니라, 몽둥이찜질 두 벌 사이에서 어느 쪽이 더 아플지 골라야 했다. 한쪽에는 샹가르니에에 대한 두려움, 다른 쪽에는 보나파르트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영웅다운 처지가 아니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11월 18일, 질서당이 낸 지방 선거법에 수정안이 나왔다. 지방 선거 유권자는 3년 대신 1년만 거주하면 충분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수정안은 단 한 표 차로 떨어졌는데, 그 한 표는 곧 착오로 밝혀졌다. 질서당은 적대하는 분파들로 쪼개지면서 이미 오래전에 독자적인 의회 다수를 잃은 터였다. 이제 질서당은 의회에 다수라는 것 자체가 더는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국민의회는 의결할 능력을 잃었다. 원자처럼 흩어진 그 성분들은 어떤 응집력으로도 더는 한데 묶이지 않았다. 국민의회는 마지막 숨을 다 써 버렸다. 국민의회는 죽었다.

끝으로, 의회 밖의 부르주아 대중은 파국을 며칠 앞두고 의회 안의 부르주아지와 결별했음을 다시 한번 엄숙히 확인하게 된다. 티에르는 의회의 영웅답게 의회 백치증이라는 불치병에 누구보다 깊이 걸려 있었다. 그는 의회가 죽은 뒤에도 국가평의회와 함께 새 의회 음모를 꾸며 냈다. 대통령을 헌법의 테두리 안에 붙잡아 두려는 책임법이었다. 보나파르트는 9월 15일 파리 새 중앙시장의 초석을 놓으면서 제2의 마사니엘로[8]가 되어 시장 아낙네들(dames des halles), 생선 장수 아낙네들을 홀린 적이 있다. 하기야 생선 장수 아낙네 한 사람이 실제 힘으로는 성주들 열일곱을 당해 냈다. 또 재무관 법안이 나온 뒤에는 엘리제궁에서 대접한 중위들을 열광시켰다. 이번에는 11월 25일, 같은 솜씨로 산업 부르주아지를 휘어잡았다. 이들은 런던 산업박람회의 상패를 그의 손에서 받으려고 서커스장에 모여 있었다. 그의 연설 가운데 특징적인 부분을 《주르날 데 데바》에 실린 대로 옮긴다.

“이처럼 뜻밖의 성공을 거두었으니, 나는 거듭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프랑스 공화국이 한편으로는 선동가들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군주정의 환각에 끊임없이 방해받지 않고 자기의 실제 이익을 좇고 자기의 제도를 개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위대해지겠습니까. (원형 극장 곳곳에서 크고 열렬한 박수가 거듭 터져 나온다.) 군주정의 환각은 모든 진보와 모든 진지한 산업을 가로막습니다. 진보 대신 싸움만 있을 뿐입니다. 예전에 왕의 권위와 대권을 가장 열심히 떠받들던 사람들이, 보통선거권에서 나온 권위를 약하게 만들려고 국민공회의 지지자가 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크고 거듭된 박수.) 혁명으로 가장 많이 고통받고 혁명을 가장 많이 한탄하던 사람들이, 오로지 국민의 의지를 옭아매려고 새 혁명을 부추기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 나는 여러분에게 앞으로의 평온을 약속합니다. 운운.” (브라보, 브라보, 열광적인 브라보.)

이렇게 산업 부르주아지는 12월 2일의 쿠데타에, 의회의 파괴에, 자기 지배의 몰락에, 보나파르트의 독재에 비굴한 브라보를 보낸다. 11월 25일의 우레 같은 박수는 12월 4일의 우레 같은 대포 소리로 답을 받았다. 그리고 브라보를 가장 많이 친 살랑드루즈 씨의 집은 포탄을 가장 많이 맞아 박살이 났다.

크롬웰은 장기 의회를 해산할 때 혼자 그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그는 자기가 정한 기한을 한순간도 넘기지 않도록 시계를 꺼내 들고, 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쾌활하고 익살스러운 욕설로 쫓아냈다. 나폴레옹은 본보기보다 작았지만, 브뤼메르 18일에 적어도 입법부에 몸소 들어가 비록 떨리는 목소리로나마 사형 선고를 읽어 주었다. 두 번째 보나파르트는 크롬웰이나 나폴레옹과는 전혀 다른 행정 권력을 쥐고 있었는데도, 자기 본보기를 세계사의 연대기가 아니라 12월 10일회의 연대기, 범죄사의 연대기에서 찾았다. 그는 프랑스 은행에서 2500만 프랑을 훔치고, 마냥 장군을 100만 프랑에, 병사들을 한 사람에 15프랑과 화주로 산다. 밤도둑처럼 몰래 공범들과 만나고, 가장 위험한 의회 지도자들의 집을 부수고 들어가게 하여 카베냐크, 라모리시에르, 르플로, 샹가르니에, 샤라스, 티에르, 바즈 등을 침대에서 끌어내게 한다. 파리의 주요 광장과 의사당을 군대로 점령하게 하고, 이른 아침 모든 벽에 요란한 벽보를 붙이게 한다. 벽보는 국민의회와 국가평의회의 해산, 보통선거권 부활, 센 도의 계엄을 알린다. 그러고는 얼마 뒤 《모니퇴르》에 가짜 문서를 싣는다. 의회의 영향력 있는 이름들이 자문 위원회에 모여 그를 둘러싸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제10구 구청 건물에 모인 잔부(殘部) 의회는 주로 정통왕조파와 오를레앙파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의회는 “공화국 만세”를 거듭 외치며 보나파르트의 해임을 의결하고, 건물 앞에 구경하러 모인 군중에게 헛되이 연설한다. 그러고는 끝내 아프리카 저격병들의 호송을 받으며 먼저 오르세 병영으로 끌려갔다가, 나중에는 죄수 호송차에 실려 마자, 앙, 뱅센 감옥으로 옮겨진다. 이렇게 질서당과 입법의회와 2월 혁명은 끝난다. 결론으로 서두르기 전에, 그 역사의 도식을 간단히 적어 둔다.

I. 제1기. 2월 24일부터 1848년 5월 4일까지. 2월 시기. 서막. 너나없이 형제가 되자는 사기극.

II. 제2기. 공화국과 제헌의회가 세워지는 시기.

  1. 5월 4일부터 1848년 6월 25일까지. 모든 계급이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싸운다. 6월 봉기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패배한다.
  2. 6월 25일부터 1848년 12월 10일까지. 순수 부르주아 공화파의 독재. 헌법 기초. 파리에 계엄 선포. 12월 10일 보나파르트가 대통령에 뽑히면서 부르주아 독재가 물러난다.
  3. 1848년 12월 20일부터 1849년 5월 28일까지. 제헌의회가 보나파르트, 그리고 그와 손잡은 질서당과 싸운다. 제헌의회의 몰락. 공화파 부르주아지의 몰락.

III. 제3기. 입헌 공화국과 입법국민의회의 시기.

  1. 1849년 5월 28일부터 1849년 6월 13일까지. 소부르주아가 부르주아지, 보나파르트와 싸운다. 소부르주아 민주파의 패배.
  2. 1849년 6월 13일부터 1850년 5월 31일까지. 질서당의 의회 독재. 보통선거권 폐지로 지배를 완성하지만 의회 내각을 잃는다.
  3. 1850년 5월 31일부터 1851년 12월 2일까지. 의회 부르주아지와 보나파르트의 싸움.
    1. 1850년 5월 31일부터 1851년 1월 12일까지. 의회가 군 최고 지휘권을 잃는다.
    2. 1월 12일부터 1851년 4월 11일까지. 의회가 행정 권력을 되찾으려다 실패한다. 질서당이 독자적인 의회 다수를 잃는다. 질서당이 공화파, 산악파와 연합한다.
    3. 1851년 4월 11일부터 1851년 10월 9일까지. 개정, 융합, 임기 연장 시도. 질서당이 제 성분으로 흩어진다. 부르주아 의회와 부르주아 신문이 부르주아 대중과 갈라진 것이 굳어진다.
    4. 10월 9일부터 1851년 12월 2일까지. 의회와 행정 권력의 공공연한 결별. 의회는 자기 계급에게도, 군대에게도, 다른 모든 계급에게도 버림받아 임종 의식을 치르고 쓰러진다. 의회 체제와 부르주아 지배의 몰락. 보나파르트의 승리. 제정 복고의 패러디.

VII

사회 공화국은 2월 혁명의 문턱에서 하나의 구호로, 하나의 예언으로 나타났다. 1848년 6월 봉기 때 그것은 파리 프롤레타리아트의 피 속에서 숨이 끊겼지만, 이 연극의 다음 막들에도 유령으로 떠돈다. 다음으로 민주 공화국이 등장을 알렸다. 그것은 1849년 6월 13일 달아나 버린 제 소부르주아들과 함께 허망하게 사그라들었지만, 달아나면서도 갑절로 허풍을 떠는 광고를 등 뒤로 뿌려 댄다. 의회 공화국은 부르주아지와 함께 무대 전체를 차지하고, 제 존재를 한껏 펼치며 산다. 그러나 1851년 12월 2일은 연합한 왕당파의 겁에 질린 외침 “공화국 만세!” 속에 그것을 묻어 버린다.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일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에 맞서 날뛰다가, 결국 룸펜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자로 앉혔다. 그 맨 꼭대기에는 12월 10일회의 우두머리가 있다. 부르주아지는 앞으로 닥칠 붉은 무정부 상태의 공포로 프랑스를 숨도 못 쉬게 몰아붙였다. 보나파르트는 그 미래를 어음 할인하듯 앞당겨 내주었다. 12월 4일, 독한 술에 달아오른 질서의 군대를 시켜 몽마르트르 대로와 이탈리앵 대로의 점잖은 시민들을 그들의 창가에서 쏘아 떨어뜨리게 한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칼을 신으로 떠받들었다. 이제 칼이 부르주아지를 다스린다. 부르주아지는 혁명적 언론을 없앴다. 이제 제 언론이 없어졌다. 인민 집회를 경찰 감시 아래 두었다. 이제 제 살롱이 경찰 감시 아래 있다. 민주적인 국민방위군을 해산했다. 이제 제 국민방위군이 해산되었다. 계엄을 선포했다. 이제 계엄이 부르주아지에게 선포되었다. 배심원 대신 군사위원회를 앉혔다. 이제 제 배심원 자리에 군사위원회가 앉았다. 민중 교육을 사제들에게 내맡겼다. 이제 사제들이 부르주아지를 제 식으로 가르친다. 재판 없이 유형을 보냈다. 이제 제가 재판 없이 유형을 간다. 국가 권력으로 사회의 모든 움직임을 억눌렀다. 이제 제 사회의 모든 움직임이 국가 권력에 짓눌린다. 지갑을 향한 열정에 들떠 제 정치가와 문필가들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제 정치가와 문필가는 치워졌다. 그러나 지갑은 입이 틀어막히고 펜이 꺾인 뒤 털리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성 아르세니우스가 그리스도교도들에게 그랬듯 혁명을 향해 지치지도 않고 외쳤다. “달아나라, 침묵하라, 쉬어라!(Fuge, tace, quiesce!)” 이제 보나파르트가 부르주아지를 향해 외친다. “달아나라, 침묵하라, 쉬어라!”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나폴레옹이 내놓은 양자택일을 이미 오래전에 풀어 버렸다. “50년 뒤 유럽은 공화국이 되거나 코사크가 될 것이다(Dans cinquante ans l’Europe sera républicaine ou cosaque).” 부르주아지는 이것을 ‘코사크 공화국’으로 풀었다. 어떤 키르케가 사악한 마법을 부려 부르주아 공화국이라는 예술품을 흉측한 괴물로 일그러뜨린 것이 아니다. 그 공화국이 잃은 것이라고는 점잖은 겉모습뿐이다. 지금의 프랑스는 의회 공화국 안에 이미 다 만들어진 채 들어 있었다. 거품이 터지고 괴물이 눈앞에 튀어나오게 하는 데는 총검으로 한 번 찌르기만 하면 되었다.

파리 프롤레타리아트는 왜 12월 2일 뒤에 들고일어나지 않았는가?

부르주아지의 몰락은 아직 포고되었을 뿐, 그 포고가 집행되지는 않았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봉기했다면, 그것은 곧바로 부르주아지에게 새 숨을 불어넣고, 부르주아지를 군대와 화해시키고, 노동자들에게 두 번째 6월의 패배를 안겨 주었을 것이다.

12월 4일 부르주아와 식료품 상인(épicier)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싸움으로 부추겼다. 그날 저녁 국민방위군의 여러 군단이 무장하고 제복을 갖춰 싸움터에 나오겠다고 약속했다. 부르주아와 식료품 상인이 그제야 알아챘기 때문이다. 보나파르트는 12월 2일 포고령 가운데 하나에서 비밀 투표를 없애고, 그들에게 공식 명부의 자기 이름 뒤에 찬성이나 반대를 적어 넣으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12월 4일의 저항은 보나파르트를 겁먹게 했다. 그는 밤사이 파리의 길모퉁이마다 비밀 투표를 되살린다는 벽보를 붙이게 했다. 부르주아와 식료품 상인은 목적을 이루었다고 믿었다. 이튿날 아침 나타나지 않은 자들, 그것은 식료품 상인과 부르주아였다.

파리 프롤레타리아트는 12월 1일에서 2일로 넘어가는 밤, 보나파르트의 기습으로 지도자들, 곧 바리케이드의 우두머리들을 빼앗겼다. 장교 없는 군대가 된 프롤레타리아트는 1848년 6월과 1849년 6월, 1850년 5월의 기억 때문에 산악파의 깃발 아래 싸울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파리의 봉기 명예를 구하는 일을 제 전위인 비밀 결사들에게 맡겼다. 부르주아지는 그 명예를 아무 저항 없이 군인 패거리에게 넘겨주었다. 얼마나 순순했던지, 보나파르트는 나중에 국민방위군의 무장을 해제하면서 이렇게 비웃는 이유를 댈 수 있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국민방위군의 무기를 국민방위군 자신을 치는 데 악용할까 봐 걱정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회주의의 완전하고 결정적인 승리다!(C’est le triomphe complet et définitif du socialisme!)” 기조는 12월 2일을 이렇게 평했다. 의회 공화국의 몰락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를 싹으로 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몰락이 당장 손에 잡히게 가져온 결과는 보나파르트가 의회를, 행정 권력이 입법 권력을, 미사여구 없는 권력이 미사여구의 권력을 이긴 것이었다. 의회에서 국민은 자기의 일반 의지를 법으로 높였다. 다시 말해 지배 계급의 법을 국민의 일반 의지로 높였다. 행정 권력 앞에서 국민은 제 의지를 모두 내려놓고, 남의 의지, 곧 권위의 명령에 복종한다. 입법 권력과 달리 행정 권력은 국민의 자율이 아니라 타율을 나타낸다. 그러니 프랑스는 한 계급의 전제에서 빠져나오자마자 한 개인의 전제 아래로, 그것도 권위 없는 한 개인의 권위 아래로 되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싸움은 모든 계급이 똑같이 힘없이, 똑같이 말없이 개머리판 앞에 무릎을 꿇는 것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혁명은 철저하다. 혁명은 아직 연옥을 지나는 여행길에 있다. 혁명은 제 일을 차근차근 해 나간다. 1851년 12월 2일까지 혁명은 준비 작업의 한쪽 절반을 마쳤고, 지금은 나머지 절반을 해치우는 중이다. 혁명은 의회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도록 먼저 그것을 완성했다. 그 일을 이룬 지금, 혁명은 행정 권력을 완성한다. 행정 권력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깎아 내고, 고립시키고, 자기가 겨눌 유일한 과녁으로 제 앞에 세운다. 파괴의 힘을 모조리 그것에 모으려는 것이다. 혁명이 이 준비 작업의 둘째 절반까지 마치면, 유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할 것이다. 잘 팠다, 늙은 두더지야![1]

이 행정 권력은 거대한 관료 조직과 군사 조직을 갖추고, 복잡하고 인위적인 국가 기구를 거느린다. 50만 명의 관리 군단 옆에 또 50만 명의 군대가 있다. 이 끔찍한 기생체는 그물막처럼 프랑스 사회의 몸을 휘감고 그 숨구멍을 모두 틀어막는다. 이것은 절대왕정 시대에, 봉건 제도가 무너질 때 생겨났고, 그 붕괴를 앞당기는 데 한몫했다. 토지 소유자와 도시가 누리던 영주의 특권은 하나하나 국가 권력의 속성으로 바뀌었다. 봉건 고관들은 봉급 받는 관리로 바뀌었다. 서로 다투던 중세의 온갖 전권이 얼룩덜룩 뒤섞여 있던 견본표는, 공장에서처럼 일을 나누고 중앙에 모은 국가 권력의 질서 정연한 설계도로 바뀌었다. 프랑스 제1차 혁명은 국민의 부르주아적 통일을 이루려고 지방·지역·도시·주의 모든 특수 권력을 깨뜨려야 했다. 그러려면 절대왕정이 시작한 일, 곧 중앙집권을 발전시켜야 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통치 권력의 범위와 속성과 하수인들도 키울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이 국가 기구를 완성했다. 정통 왕정과 7월 왕정이 덧붙인 것은 분업을 더 늘린 것뿐이었다. 부르주아 사회 안의 분업이 새 이해 집단을, 곧 국가 행정이 다룰 새 재료를 만들어 내는 데 발맞추어 이 분업도 커졌다. 공동의 이해는 모두 곧바로 사회에서 떼어 내져 더 높은 일반적 이해로서 사회 맞은편에 세워졌다. 그것은 사회 구성원들의 자발적 활동에서 빼앗겨 정부 활동의 대상이 되었다. 시골 마을의 다리와 학교 건물과 마을 공유 재산에서부터 프랑스의 철도와 국유 재산과 국립 대학에 이르기까지 그랬다. 마지막으로 의회 공화국은 혁명과 싸우면서, 탄압 조치와 함께 통치 권력의 수단과 중앙집권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변혁은 이 기구를 부수는 대신 완성했다. 번갈아 지배권을 다툰 당파들은 이 거대한 국가 건물을 차지하는 것을 승자의 가장 큰 전리품으로 여겼다.

그러나 절대왕정 아래서, 제1차 혁명 동안, 나폴레옹 아래서 관료제는 부르주아지의 계급 지배를 준비하는 수단일 뿐이었다. 왕정복고 아래서, 루이 필리프 아래서, 의회 공화국 아래서 관료제는 아무리 독자적인 힘을 얻으려 애썼어도 지배 계급의 도구였다.

두 번째 보나파르트 아래서 비로소 국가는 완전히 자립한 것처럼 보인다. 국가 기구는 부르주아 사회에 맞서 아주 단단히 자리를 굳혔다. 그래서 그 꼭대기에 12월 10일회의 우두머리 하나만 앉혀 두어도 충분할 정도다. 외국에서 굴러 들어온 이 협잡꾼 모험가는 술 취한 군인 패거리가 방패 위에 태워 떠받든 자다. 그는 그들을 독한 술과 소시지로 샀고, 그러니 늘 새로 소시지를 던져 주어야 한다. 그래서 프랑스는 풀이 죽어 절망한다. 더없이 큰 굴욕과 모멸의 느낌이 프랑스의 가슴을 짓누르고 숨을 막는다. 프랑스는 능욕이라도 당한 듯한 기분이다.

그렇지만 국가 권력은 허공에 떠 있지 않다. 보나파르트는 한 계급을 대표한다. 그것도 프랑스 사회에서 가장 수가 많은 계급, 분할지 농민을 대표한다.

부르봉가가 대토지 소유의 왕조였고 오를레앙가가 화폐의 왕조였듯이, 보나파르트가는 농민의 왕조, 곧 프랑스 인민 대중의 왕조다. 농민이 고른 사람은 부르주아 의회에 굴복한 보나파르트가 아니라, 부르주아 의회를 쫓아낸 보나파르트다. 3년 동안 도시들은 12월 10일 선거의 뜻을 비틀고 농민에게서 제국의 부활을 가로채는 데 성공했다. 1848년 12월 10일의 선거는 1851년 12월 2일의 쿠데타로 비로소 이루어졌다.

분할지 농민은 거대한 대중을 이룬다. 그 구성원들은 같은 처지에서 살지만, 서로 이런저런 관계를 맺지는 않는다. 그들의 생산 방식은 그들을 서로 오가게 하는 대신 서로 떼어 놓는다. 이 고립은 프랑스의 형편없는 교통수단과 농민의 가난 때문에 더 심해진다. 그들의 생산 터전인 분할지는 경작에 분업도, 과학의 응용도 허락하지 않는다. 따라서 다양한 발전도, 재능의 차이도, 풍부한 사회관계도 없다. 농민 가족 하나하나는 거의 자급자족한다. 자기가 소비하는 것의 대부분을 직접 생산하고, 그래서 살림거리를 사회와의 교류보다는 자연과의 교환에서 얻는다. 분할지 하나, 농민 하나, 가족 하나. 그 옆에 또 분할지 하나, 농민 하나, 가족 하나. 이런 것이 몇십 개 모이면 마을이 되고, 마을이 몇십 개 모이면 도가 된다. 이렇게 프랑스 국민의 큰 덩어리는 같은 단위의 크기를 그저 더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마치 자루 속 감자들이 감자 한 자루를 이루는 것과 같다. 수백만 가족이 놓인 경제적 생존 조건이 그들의 생활 방식과 이해와 교양을 다른 계급들의 그것과 갈라놓고 그들과 적대하게 만드는 한, 그들은 하나의 계급을 이룬다. 그러나 분할지 농민 사이에 지역적인 연결만 있을 뿐이고, 이해가 똑같아도 그것이 그들 사이에 아무런 공동체도, 전국적 결속도, 정치 조직도 낳지 못하는 한, 그들은 계급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의회를 통해서든 국민공회를 통해서든, 자기 계급의 이해를 제 이름으로 내세우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을 대표하지 못하고, 대표되어야 한다. 그들의 대표자는 동시에 그들의 주인으로, 그들 위에 선 권위로 나타나야 한다. 다른 계급들로부터 그들을 지켜 주고 위에서 비와 햇빛을 내려 주는 무제한의 통치 권력으로 나타나야 한다. 따라서 분할지 농민의 정치적 영향력이 마지막으로 표현되는 것은, 행정 권력이 사회를 제 아래에 두는 일에서다.

역사적 전통은 프랑스 농민 사이에 기적 같은 믿음을 낳았다.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의 사나이가 모든 영광을 되찾아 주리라는 믿음이다. 그리고 한 개인이 나타나 자기가 바로 그 사나이라고 내세웠다.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지녔다는 것이 근거였다. 그가 그 이름을 지닌 것은 “친부 조사는 금지된다(La recherche de la paternité est interdite)”고 명한 나폴레옹 법전 덕분이다.[2] 스무 해의 떠돌이 생활과 잇따른 기괴한 모험 끝에 전설은 이루어지고, 그 사나이는 프랑스인의 황제가 된다. 조카의 고정관념이 실현된 것은, 그것이 프랑스에서 가장 수가 많은 계급의 고정관념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프랑스 절반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는 어떻게 된 것인가? 군대가 농민을 몰이사냥한 일, 농민을 무더기로 가두고 유형 보낸 일은?

루이 14세 이래 프랑스에서 “선동적 책동을 벌였다”는 죄목으로 농민이 이토록 박해받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잘 이해해야 한다. 보나파르트 왕조는 혁명적 농민이 아니라 보수적 농민을 대표한다. 제 사회적 생존 조건인 분할지를 넘어서려는 농민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굳히려는 농민을 대표한다. 제 힘으로 도시와 손잡고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농촌 주민을 대표하지 않는다. 거꾸로 이 낡은 질서 속에 멍하니 갇힌 채, 제 분할지와 함께 제국의 유령에게 구원받고 우대받기를 바라는 농촌 주민을 대표한다. 보나파르트 왕조는 농민의 계몽이 아니라 미신을, 판단이 아니라 편견을,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대표한다. 농민의 현대판 세벤이 아니라 현대판 방데를 대표한다.[3]

의회 공화국의 가혹한 3년 지배는 프랑스 농민의 일부를 나폴레옹 환상에서 풀어 주었고, 피상적으로나마 그들을 혁명화했다. 그러나 농민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마다 부르주아지는 그들을 힘으로 되밀어 냈다. 의회 공화국 아래서 프랑스 농민의 근대적 의식은 전통적 의식과 맞붙어 싸웠다. 이 과정은 학교 교사와 사제 사이의 끝없는 싸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부르주아지는 교사들을 때려눕혔다. 농민은 처음으로 정부 활동에 맞서 독자적으로 행동하려고 애썼다. 그것은 시장과 도지사 사이의 끊이지 않는 충돌로 나타났다. 부르주아지는 시장들을 파면했다. 마침내 의회 공화국 시기에 여러 지방의 농민이 그들 자신이 낳은 자식인 군대에 맞서 들고일어났다. 부르주아지는 계엄과 처형으로 그들을 벌했다. 그런 부르주아지가 이제 와서 대중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소리친다. 그 “천한 무리(vile multitude)”가 자기들을 보나파르트에게 팔아넘겼다는 것이다. 농민 계급의 제정 숭배를 힘으로 굳힌 것은 바로 부르주아지 자신이다. 이 농민 종교가 태어나는 터전인 상태를 그대로 붙들어 둔 것도 부르주아지다. 하기야 부르주아지는 대중이 보수적인 동안에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대중이 혁명적이 되자마자 그들의 통찰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쿠데타 뒤의 봉기들에서 프랑스 농민의 일부는 손에 무기를 들고 1848년 12월 10일 자기가 던진 표에 항의했다. 1848년 이래의 학교가 그들을 깨우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의 저승에 제 몸을 팔아 버렸고, 역사는 그들의 약속을 물고 늘어졌다. 게다가 다수는 아직 미망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하필 가장 붉은 도들에서 농민 주민이 공개적으로 보나파르트에게 표를 던졌다. 그들이 보기에는 국민의회가 보나파르트의 발을 묶어 두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도시들이 농촌의 의지에 채워 둔 족쇄를 끊었을 뿐이다. 곳곳에서 농민은 심지어 나폴레옹 하나에 국민공회 하나를 곁들인다는 기괴한 생각까지 품었다.

제1차 혁명은 반쯤 예속된 농민을 자유로운 토지 소유자로 바꾸어 놓았다. 그 뒤 나폴레옹은 조건을 굳히고 정비했다. 농민이 막 제 몫으로 얻은 프랑스 땅을 방해받지 않고 일구고, 갓 생긴 소유욕을 마음껏 채울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지금 프랑스 농민을 망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의 분할지 자체다. 토지의 분할, 나폴레옹이 프랑스에 굳혀 놓은 그 소유 형태다. 그것은 바로 프랑스의 봉건 농민을 분할지 농민으로, 나폴레옹을 황제로 만든 그 물질적 조건이다. 피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오는 데는 두 세대면 충분했다. 농업은 갈수록 나빠지고, 농민은 갈수록 빚더미에 앉았다. ‘나폴레옹식’ 소유 형태는 19세기 초에는 프랑스 농촌 주민을 해방하고 부유하게 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 세기를 지나는 동안 그것은 농민을 노예로 만들고 빈곤에 빠뜨리는 법칙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법칙이 두 번째 보나파르트가 지켜야 할 ‘나폴레옹적 관념’의 첫째다. 그가 아직도 농민과 같은 환상을 품고 있다면, 곧 농민이 망하는 원인을 분할지 소유 자체가 아니라 그 바깥, 부차적인 사정의 영향에서 찾는다면, 그의 실험들은 생산관계에 부딪혀 비눗방울처럼 터져 버릴 것이다.

분할지 소유가 경제적으로 발전하면서, 농민과 다른 사회 계급들의 관계는 밑바닥부터 뒤집혔다. 나폴레옹 아래서는 농촌의 토지 분할이 도시의 자유 경쟁과 막 시작된 대공업을 보완했다. 농민 계급은 막 무너진 토지 귀족에 맞선 항의로서 어디에나 있었다. 분할지 소유가 프랑스 땅에 내린 뿌리는 봉건제에서 모든 양분을 빼앗았다. 분할지의 경계 말뚝은 부르주아지를 옛 주인들의 온갖 기습에서 지켜 주는 천연 요새가 되었다. 그러나 19세기를 지나는 동안 봉건 영주 자리에는 도시의 고리대금업자가, 귀족의 토지 소유 자리에는 부르주아 자본이 들어섰다. 농민의 분할지는 이제 구실일 뿐이다. 자본가는 그것을 구실로 밭에서 이윤과 이자와 지대를 뽑아내고, 농사짓는 사람 자신에게는 제 품삯이나마 알아서 짜내 보라고 내버려 둔다. 프랑스 땅에 얹힌 저당 빚은 프랑스 농민층에게 이자를 물린다. 그 액수는 영국 국채 전체에 붙는 한 해 이자만큼이나 크다. 분할지 소유는 발전하면서 어쩔 수 없이 자본의 노예 상태로 내몰린다. 이 노예 상태에서 분할지 소유는 프랑스 국민 대중을 동굴 주민으로 만들었다. 농민 1600만 명(여자와 아이 포함)이 굴에서 산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구멍이 하나뿐이고, 또 일부는 둘뿐이며, 형편이 가장 나은 것도 셋뿐이다. 집에 창문이란 머리에 오감과 같다. 이 세기 초에 국가를 새로 생긴 분할지 앞에 보초로 세우고 분할지에 월계수 거름을 주던 부르주아 질서는, 이제 흡혈귀가 되어 분할지의 심장에서 피를, 머리에서 골수를 빨아먹고 자본의 연금술 솥에 던져 넣는다. 나폴레옹 법전은 이제 강제 집행과 경매와 강제 매각의 법전일 뿐이다. 프랑스에는 공식 집계로 빈민, 부랑자, 범죄자, 매춘부가 400만 명(아이 등 포함) 있다. 여기에 생존의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 500만 명이 더해진다. 그들은 농촌에 그대로 살거나, 누더기와 아이들을 데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끊임없이 떠돈다. 따라서 농민의 이해는 이제 나폴레옹 때와 달리 부르주아지의 이해, 곧 자본과 맞아떨어지지 않고 그것과 맞선다. 그래서 농민은 부르주아 질서의 전복을 과제로 삼는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에게서 타고난 동맹자이자 지도자를 발견한다. 그러나 강하고 제한 없는 정부, 이것이 두 번째 나폴레옹이 실행해야 할 둘째 ‘나폴레옹적 관념’이다. 그리고 이 정부가 맡은 사명이 바로 이 ‘물질적’ 질서를 힘으로 지키는 것이다. 실제로 반란 농민을 겨냥한 보나파르트의 모든 포고문에서 이 ‘물질적 질서(ordre matériel)’가 표어로 나온다.

분할지를 짓누르는 것은 자본이 지운 저당만이 아니다. 세금도 짓누른다. 세금은 관료, 군대, 사제, 궁정, 한마디로 행정 권력의 기구 전체를 먹여 살리는 젖줄이다. 강한 정부와 무거운 세금은 같은 것이다. 분할지 소유는 그 본성상 전능하고 셀 수 없이 많은 관료 집단의 토대가 되기에 알맞다. 분할지 소유는 나라 전체에 걸쳐 형편과 사람을 고르게 한 수준으로 맞춰 놓는다. 그러니 맨 위의 한 중심에서 이 고른 덩어리의 모든 지점에 고르게 힘을 미칠 수 있게 해 준다. 분할지 소유는 인민 대중과 국가 권력 사이에 있던 귀족이라는 중간 단계들을 없앤다. 그러니 국가 권력이 사방에서 직접 끼어들고, 그 직속 기관들이 그 사이를 메우게 만든다. 끝으로 분할지 소유는 농촌에도 도시에도 자리를 얻지 못하는 일 없는 과잉 인구를 낳는다. 그들은 관직을 일종의 체면 서는 구호품으로 여겨 거기 매달리고, 관직을 새로 만들라고 들볶는다. 나폴레옹은 강제로 거둔 세금을 이자까지 붙여 돌려주었다. 총검으로 열어젖힌 새 시장과 유럽 대륙의 약탈이 그 돌려준 몫이었다. 그때 세금은 농민의 근면을 북돋는 박차였다. 그런데 지금 세금은 농민의 근면에서 마지막 밑천을 앗아 가고, 농민이 빈곤 앞에 아무 저항도 못 하게 만든다. 그리고 금줄 장식을 두르고 잘 먹은 거대한 관료 집단이야말로 두 번째 보나파르트의 마음에 가장 드는 ‘나폴레옹적 관념’이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는 사회의 실제 계급들 옆에 인위적인 신분 하나를 만들어 내야 하고, 이 신분에게 그의 체제를 지키는 일은 밥줄이 걸린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맨 처음 벌인 재정 조치 가운데 하나도 관리 봉급을 옛 수준으로 다시 올리고 새 한직을 만든 것이었다.

또 하나의 ‘나폴레옹적 관념’은 통치 수단으로서 사제의 지배다. 새로 생긴 분할지는 사회와 어울리고, 자연의 힘에 기대고, 위에서 자기를 지켜 주는 권위에 복종했으니 자연히 신앙심이 깊었다. 그러나 빚에 시달리고, 사회와도 권위와도 틀어지고, 제 좁은 테두리 밖으로 내몰린 분할지는 자연히 신앙을 잃는다. 방금 얻은 좁은 땅뙈기에 하늘이 덤으로 얹히는 것은 꽤 근사한 일이었다. 하늘이 날씨를 만드니 더욱 그랬다. 그러나 분할지 대신 하늘을 받으라고 떠안기면, 하늘은 모욕이 된다. 그러면 사제는 이 세상 경찰의 기름 부음 받은 사냥개로만 보인다. 이것도 또 하나의 ‘나폴레옹적 관념’이다. 다음번 로마 원정은 프랑스 안에서 벌어질 것이다. 다만 몽탈랑베르 씨가 바란 것과는 거꾸로다.[4]

끝으로 ‘나폴레옹적 관념’의 정점은 군대의 우위다. 군대는 분할지 농민의 명예(point d’honneur)였다. 군대 안에서 농민은 영웅이 되었다. 바깥을 향해 새 재산을 지키고, 방금 얻은 국민적 존재를 빛내고, 세계를 약탈하고 혁명화했다. 제복은 농민 자신의 예복이었고, 전쟁은 그들의 시였다. 상상 속에서 늘어나고 둥글게 다듬어진 분할지가 조국이었고, 애국심은 소유 감각의 이상적 형태였다. 그러나 프랑스 농민이 지금 제 재산을 지켜야 할 적은 코사크가 아니라 집달리와 세리다. 분할지는 이제 이른바 조국 안에 있지 않고 저당 등기부 안에 있다. 군대도 이제 농민 청년의 꽃이 아니라 농민 룸펜프롤레타리아트의 늪지 꽃이다. 군대는 대부분 대리 복무자(remplaçant), 곧 대역들로 이루어진다. 두 번째 보나파르트 자신이 대리인, 곧 나폴레옹의 대역일 뿐인 것과 같다. 군대는 이제 농민을 산양 사냥하듯, 짐승 몰이하듯 쫓고 헌병 노릇을 하면서 무공을 세운다. 그리고 그의 체제의 내부 모순이 12월 10일회의 우두머리를 프랑스 국경 밖으로 내몰면, 군대는 몇 번의 도적질 끝에 월계관이 아니라 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보다시피 ‘나폴레옹적 관념’은 모두 아직 덜 발전한, 젊고 싱싱한 분할지의 관념이다. 수명이 다한 분할지에게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분할지가 죽어 가며 보는 환각일 뿐이다. 말은 빈말로, 혼은 유령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 대중을 전통의 무게에서 풀어 주고, 국가 권력과 사회의 대립을 순수하게 드러내려면 제정의 패러디가 필요했다. 분할지 소유가 갈수록 무너지면서, 그 위에 세운 국가 건물도 무너진다. 근대 사회에 필요한 국가적 중앙집권은, 봉건제에 맞서 벼려 낸 군사·관료적 통치 기구의 폐허 위에서만 일어선다.[5]

프랑스 농민의 사정은 12월 20일과 21일의 보통선거라는 수수께끼를 풀어 준다. 이 선거는 두 번째 보나파르트를 시나이산으로 이끌었다. 율법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내려 주라는 것이었다.

부르주아지에게는 이제 보나파르트를 뽑는 것 말고는 선택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청교도들이 교황들의 방탕한 생활을 탄식하며 풍속 개혁이 필요하다고 한숨짓자, 피에르 다이 추기경은 그들에게 벼락같이 호통쳤다. “가톨릭교회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악마 그 자신뿐인데, 너희는 천사를 바라는구나.” 프랑스 부르주아지도 쿠데타 뒤에 그렇게 외쳤다. 부르주아 사회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이제 12월 10일회의 우두머리뿐이다! 재산을 구하는 것은 도둑질뿐이고, 종교를 구하는 것은 거짓 맹세뿐이며, 가족을 구하는 것은 사생아뿐이고, 질서를 구하는 것은 무질서뿐이다!

자립한 행정 권력으로서 보나파르트는 ‘부르주아 질서’를 지키는 것이 제 사명이라고 느낀다. 그런데 이 부르주아 질서의 힘은 중간 계급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중간 계급의 대표자로 여기고, 그런 뜻의 포고령을 낸다. 그러나 그가 그나마 무엇이라도 되는 것은, 이 중간층의 정치권력을 꺾었고 날마다 새로 꺾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중간 계급의 정치적·문필적 힘의 적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는 중간 계급의 물질적 힘을 지켜 줌으로써 그 정치권력을 다시 낳는다. 그러니 원인은 살려 두되, 결과는 나타나는 곳마다 없애야 한다. 그러나 이 일에는 원인과 결과를 조금씩 뒤바꾸는 실수가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둘은 서로 작용하면서 저마다를 가르는 특징을 잃기 때문이다. 경계선을 흐리는 새 포고령들. 동시에 보나파르트는 부르주아지에 맞서 자신을 농민과 인민 전체의 대표자로, 부르주아 사회 안에서 하층 인민 계급에게 복을 베풀려는 사람으로 여긴다.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에게서 통치의 지혜를 미리 가로채는 새 포고령들. 그러나 보나파르트는 무엇보다 자신을 12월 10일회의 우두머리로, 룸펜프롤레타리아트의 대표자로 여긴다. 그 자신도, 그의 측근(entourage)도, 그의 정부도, 그의 군대도 이 룸펜프롤레타리아트에 속한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제 배를 불리고 국고에서 캘리포니아 복권을 뽑아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는 포고령으로, 포고령 없이, 포고령을 거슬러 자신이 12월 10일회의 우두머리임을 입증한다.

이 사나이의 모순된 과제가 그의 정부의 모순을 설명해 준다. 그의 정부는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더듬는다. 이 계급, 저 계급을 번갈아 끌어들이려 하다가 또 모욕하려 하면서, 모든 계급을 똑같이 제게 등 돌리게 만든다. 실제 행동은 이렇게 갈팡질팡하는데, 정부 문서는 큰아버지의 것을 고분고분 베낀 거만하고 단호한 문체로 쓰인다. 그 대조가 몹시 우스꽝스럽다.

공업과 상업, 곧 중간 계급의 사업은 강한 정부 아래서 온실 속처럼 꽃피어야 한다. 수많은 철도 부설권 허가. 그러나 보나파르트파 룸펜프롤레타리아트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 미리 귀띔받은 자들이 증권거래소에서 철도 부설권으로 벌이는 농간. 그러나 철도에 댈 자본이 나타나지 않는다. 은행에 철도 주식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라는 의무 부과. 그러나 은행도 사사로이 우려먹어야 하니 비위를 맞춰 주어야 한다. 은행에 주간 보고서 공개 의무 면제. 은행과 정부가 맺은, 한쪽이 몫을 독차지하는 계약. 인민에게 일자리를 주어야 한다. 국가 공사 발주. 그러나 국가 공사는 인민의 세금 부담을 늘린다. 그러니 금리 생활자를 쳐서 세금 인하. 5퍼센트 국채의 4.5퍼센트 국채 전환. 그러나 중간층에게도 다시 사탕을 물려 주어야 한다. 그러니 포도주를 소매로 사는 인민에게는 포도주세 두 배, 도매로 사서 마시는 중간층에게는 절반 인하. 실제 노동자 협동조합의 해산, 그러나 앞으로 베풀 협동조합 기적의 약속. 농민을 도와야 한다. 농민의 빚과 소유의 집중을 앞당기는 저당 은행. 그러나 이 은행들로 몰수한 오를레앙가 재산에서 돈을 뽑아내야 한다. 포고령에 적혀 있지 않은 이 조건을 받아들일 자본가는 아무도 없고, 저당 은행은 한낱 포고령으로 남는다. 등등, 등등.

보나파르트는 모든 계급의 가부장적 은인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는 한 계급에게 주려면 다른 계급에게서 빼앗지 않을 수 없다. 프롱드 시절 사람들은 기즈 공작을 두고 프랑스에서 가장 남에게 베푸는 사람(obligeant)이라고 했다. 제 재산을 몽땅 제 추종자들이 자기에게 진 빚(obligation)으로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6] 그처럼 보나파르트도 프랑스에서 가장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프랑스의 모든 재산, 모든 노동을 자기에게 진 개인적인 빚으로 바꾸고 싶어 한다. 그는 프랑스 전체를 훔쳐서 프랑스에 선물하고 싶어 한다. 아니, 프랑스의 돈으로 프랑스를 다시 사고 싶어 한다. 12월 10일회의 우두머리인 그는 제 것이 되어야 할 것을 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국가 기관이 매수 기관이 된다. 원로원, 국가평의회, 입법원, 레지옹 도뇌르, 군인 훈장, 공중 세탁장, 국가 공사, 철도, 졸병 없는 국민방위군 참모부, 몰수한 오를레앙가 재산이 다 그렇다. 군대와 통치 기구의 자리 하나하나가 매수 수단이 된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빼앗아 프랑스에 주는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오가는 동안 12월 10일회의 머리와 팔다리에게 떨어지는 구전이다. 모르니 씨의 정부인 L. 백작 부인은 오를레앙가 재산 몰수를 두고 “이것이 독수리의 첫 비상(vol)이다(C’est le premier vol de l’aigle)”라는 재치 있는 말을 남겼다.[7] 이 말은 독수리라기보다 까마귀에 가까운 이 독수리의 비상 하나하나에 다 들어맞는다. 그 자신과 그 패거리는 날마다 서로에게 외친다. 앞으로 몇 해를 두고 누릴 재산을 뽐내며 늘어놓는 수전노에게 저 이탈리아의 카르투시오회 수도사가 한 말 그대로다. “Tu fai conto sopra i beni, bisogna prima far il conto sopra gli anni.”[8] 그들은 햇수를 잘못 세지 않으려고 분 단위로 센다. 궁정으로, 각 부처로, 행정과 군대의 꼭대기로 한 무리의 작자들이 밀려든다. 그 가운데 가장 나은 자에 대해서도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른다고 해야 할 패거리다. 시끄럽고, 수상쩍고, 약탈에 굶주린 보헤미안 무리다. 그들은 술루크의 고관대작들과 똑같이 괴상한 위엄을 부리며 금줄 두른 예복 속으로 기어든다.[9] 12월 10일회의 이 상층부가 어떤 자들인지는, 베롱크르벨[10]이 그들의 도덕 설교자이고 그라니에 드 카사냐크가 그들의 사상가라는 것만 생각해 보아도 눈앞에 그려진다. 기조는 장관 시절 이 그라니에를 시시한 신문에 내세워 왕조 반대파를 공격하게 했는데, 그를 칭찬할 때면 늘 이렇게 말했다. “그자는 어릿광대들의 왕이다(C’est le roi des drôles).” 루이 보나파르트의 궁정과 일족을 보고 섭정 시대나 루이 15세를 떠올린다면 잘못이다. “프랑스는 정부(情婦)들의 정치는 이미 여러 번 겪었지만, 남에게 얹혀사는 사내들(hommes entretenus)의 정치는 아직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11]

이 처지의 모순된 요구들에 쫓기는 보나파르트는, 동시에 요술쟁이처럼 끊임없이 사람들을 놀라게 해서 관객의 눈길을 나폴레옹의 대역인 자기에게 붙잡아 두어야 한다. 그러니 날마다 작은 쿠데타(coup d’état en miniature)를 하나씩 벌여야 한다. 그래서 그는 부르주아 경제 전체를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1848년 혁명에게는 손댈 수 없어 보였던 모든 것에 손을 댄다. 어떤 이들은 혁명을 참게 만들고, 어떤 이들은 혁명을 바라게 만든다. 질서의 이름으로 무질서 그 자체를 낳는다. 그러면서 국가 기구 전체에서 후광을 벗겨 내고, 그것을 더럽히고, 역겨우면서도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그는 트리어의 성의(聖衣) 숭배를 파리에서 나폴레옹 황제 망토 숭배로 되풀이한다.[12] 그러나 황제의 망토가 마침내 루이 보나파르트의 어깨에 걸리면, 나폴레옹의 청동상은 방돔 원주 꼭대기에서 굴러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