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 2월 3일, 카베의 추종자 69명이 르아브르 항구에서 배에 올랐다. '이카리아로 가자!' 그들은 신대륙에 지상의 공산낙원을 세우러 떠났다.
프랑스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이자 이카리아 운동의 창시자. 1840년 『이카리아 여행』을 출판하여 노동자 협동조합에 기반한 공산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했고, '공산주의(communisme)'라는 말을 처음 정치적 용어로 정립했다. 약 40만 추종자를 거느린 당대 가장 대중적인 사회주의 옹호자로, 『진정한 기독교』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사회 평등의 복음으로 재해석했다. 1848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와 일리노이에 이카리아 공동체를 세웠고, 1898년까지 이어진 미국 최장수 비종교 공동체 실험이 되었다. 계몽주의 유토피아 사상과 노동자 운동을 잇는 교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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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디종 출생. 변호사 자격 취득
1830–18317월혁명 참여 후 바스티아 검찰총장. 코트도르 하원의원 당선
1833–1834『르 포퓰레르』 창간. 반정부 논설로 반역죄 유죄 판결, 영국 망명
1834–1839영국에서 로버트 오웬과 교류하며 공산주의 사상 구상
1840『이카리아 여행』 출판. 스스로 '공산주의자'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
1841–1847『르 포퓰레르』 복간. 약 40만 명 독자층 확보, 『진정한 기독교』 출간
1848추종자들과 미국으로 이주. 텍사스·일리노이에 이카리아 공동체 설립
1849–1856노부 이카리아 공동체 지도자. 내부 갈등 속 1856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사망
「우리 진영의 최후통첩은 이것이다: 부술 수 있는 것은 부숴야 한다. 타격을 견디는 것은 살아남을 자격이 있고, 산산조각 나는 것은 쓰레기다. 어쨌든 좌우로 내리쳐라, 거기서 해는 나오지 않는다.」 — 『19세기 스콜라철학』(1861)
러시아 허무주의(nihilism)의 중심 이론가이자 1860년대 혁명적 민주주의 문학비평의 가장 날카로운 목소리. 체르니솁스키·도브롤류보프와 함께 60년대 급진 지식인을 대표했으며, 『러시아어』(Русское слово)의 주필로서 미학과 관념론 철학을 공격하고 자연과학에 기초한 '현실주의'를 주창했다. 1862년 반정부 선언문 필화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수감되어 4년 반 동안 주요 저작 대부분을 감옥에서 집필했고, 석방 2년 뒤 27세에 발트해에서 익사했다. '합리적 이기주의'와 '사고하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으로 나로드니키 세대를 예비했으며, 도스토옙스키의 라스콜니코프, 파블로프의 과학관, 레닌의 지적 형성에 결정적 흔적을 남겼다.
「파리에서의 투쟁은 작은 전초전에 불과하다. 유럽의 본안은 아직 앞에 있으며, 수십 년 안에 '궁전에 전쟁을, 오두막에 평화를'은 전 유럽의 구호가 될 것이다.」 — 제국의회, 1871년 5월 25일
목수 도제 출신으로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1869년 사회민주노동자당을 창립하고 1875년 고타 통합대회로 독일 사민당(SPD)을 세계 최대 사회주의 정당으로 키웠다. 반사회주의법(1878–1890) 아래 취리히에서 불법 기관지를 발행하며 당을 지하에서 이끌었고,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 채택을 주도해 유럽 사민주의의 기준을 세웠으며,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논쟁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했다. 《여성과 사회주의》(1879)는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의 고전으로 50여 판을 거듭했고, 1913년 사망 시 장례식은 제2인터내셔널의 국제적 집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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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1867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작센인민당 공동 창립, 라이프치히 노동자교육협회에서 활동
「케넌 씨, 우리가 유형지에서 죽을 수도 있고, 우리 아이들도, 손자들도 유형지에서 죽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무언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 1885년 시베리아에서 조지 케넌에게.
귀족 출신으로 1861년 농노 해방에 참여한 뒤 1874년 '민중 속으로' 운동에 뛰어들었다. 1878년 '193인 재판'에서 정치범 최초의 여성 카토르가형을 선고받아 22년간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을 견뎠으며, 조지 케넌의 르포를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1896년 석방 후 그리고리 게르슈니와 사회주의혁명당(SR)을 결성하고 전투조직 창설을 주도했으며, 1904년 미국 순회 강연으로 혁명 자금을 모금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의 상징적 원로로 귀환하여 예비의회 최고령 의장을 맡았으나, 볼셰비키 집권에 반대해 내전 중 백군을 지지했다. 1918년 망명하여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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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농노 해방에 참여, 가문 영지의 농민들을 위한 학교·도서관·협동조합 설립
1873–1874키예프에서 급진적 지식인 공동체 결성; '민중 속으로' 운동 참여, 가짜 여권으로 농촌 선전 활동
1874–1878체포되어 페트로그라드 구치소 수감; '193인 재판'에서 유죄 판결, 카라 형무소 5년 카토르가형 — 여성 정치범 최초의 강제노역 선고
1878–1896카라 카토르가 복역 후 바르구진·셀렌긴스크 유형; 1881년 탈주 실패로 4년 추가 카토르가형; 22년간 수감·유형 생활, 조지 케넌과의 인터뷰로 국제적 명성
1896–1901니콜라이 2세 대관식 사면으로 석방; 그리고리 게르슈니와 함께 민스크에서 나로드니키 운동 재건, SR 결성 준비
1901–1903사회주의혁명당(SR) 공동 창립; 게르슈니와 함께 전국 비밀 조직 활동, 전투조직 창설 주도
1903–1905체포 위협으로 제네바 망명; 1904년 암스테르담 제2인터내셔널 대회 참석 후 미국 순회 강연 — 약 1만 달러 모금, '바부시카' 별명 획득
1905–1910러시아 귀환, 1905년 혁명 참여; 1908년 예브노 아제프의 배신으로 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1910–1917시베리아 종신 유형 선고; 1913년 이르쿠츠크 탈주 시도 실패 후 야쿠츠크 독방 수감; 미국 여론 압력으로 이르쿠츠크 이감
1917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귀환 — 케렌스키의 환영; 예비의회 최고령 의장; 볼셰비키 집권 반대, 체코슬로바크 군단 개입 호소
1918–1934블라디보스토크·일본 경유 미국 망명; 백군 지원 요청 활동; 파리 거쳐 체코슬로바키아 정착, 카르파티아 노동당 조직; 프라하 인근에서 사망
레닌은 메링을 두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길 원할 뿐 아니라, 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 평했다.
독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문예비평·철학을 대표하는 이론가로, 1891년 SPD에 입당하여 『노이에 차이트』의 주요 필자가 되었고 카우츠키·룩셈부르크와 함께 당내 좌파의 이론적 기둥을 이뤘다. 1916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공동 창립하고 1919년 KPD 창당을 주도했으며, 마르크스의 고전적 전기 『카를 마르크스, 그의 생애』(1918)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기념비 『독일 사회민주주의사』(1898)를 남겼다. 프로이센 신화를 해체한 『레싱 전설』(1893)로 엥겔스의 극찬을 받았고, 네오칸트주의와 니체의 영향력에 맞서 사적 유물론을 문화 영역에까지 적용했다.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 피살 2주 만에 급환으로 사망했으며, 베를린 사회주의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1878년 3월 31일, 배심원 전원 무죄 평결. 군중은 자술리치를 어깨 위로 들어올려 페테르부르크 거리를 행진했다. 차르 정부는 즉시 재체포를 명령했지만, 혁명가의 총성은 이미 전 유럽에 울려퍼진 뒤였다.
1878년 페테르부르크 시장 트레포프를 저격했고 배심원들은 무죄를 선고했다. 그 한 방은 짜르 전제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켰고 유럽 전역이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자술리치는 테러가 막다른 길임을 가장 먼저 깨닫고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했다. 1883년 플레하노프 등과 함께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노동해방단」을 창립했고, 「이스크라」 편집위원과 제2인터내셔널 러시아 대표, 그리고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문학 비평가로 활동했다. 멘셰비키로서 1917년 10월 혁명에 반대했고 볼셰비키 정권 아래 폐렴으로 숨졌다.
'레닌과 나는 완전히 갈라섰다… 나는 더 이상 레닌을 믿지 않는다' — 1919년 망명 직전, 반세기 동지였던 볼셰비키와의 결별을 선언하다.
마르크 나탄손은 1870년대 차이콥스키 서클, '토지와 자유', '인민의 권리'의 공동 창립을 주도하고 사회혁명당 중앙위원을 지낸, 러시아 혁명운동의 조직적 골격을 반세기 동안 연결한 핵심 조직가이다. 탁월한 결집력으로 '혁명의 이반 칼리타'로 불렸고, 제1차 세계대전 중 치메르발트·킨탈 회의에서 국제주의 입장을 견지하며 레닌과 협력했다. 1917년 좌파 사회혁명당과 혁명적 공산당 창립을 주도했으나, 일당 독재로 기운 볼셰비키에 환멸을 느끼고 '나는 더 이상 레닌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남긴 채 망명했다.
트로츠키 회고: 「악셀로트 집안에는 소박함과 진심 어린 동지적 참여의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나로드니키로 출발해 1883년 플레하노프·자술리치와 함께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노동해방단」을 창립했다. 1900년 『이스크라』 편집위원, 1903년 RSDLP 분열 후 멘셰비키 핵심 이론가로서 대중적 노동자 정당을 주장하며 레닌의 전위당을 비판했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을 지냈으나 10월 혁명에 반대, 이후 망명하여 생을 마칠 때까지 제2인터내셔널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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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74키예프 대학 차이콥스키 서클에서 나로드니키 활동; 「민중 속으로」 참가
1876–79「토지와 자유」 → 분열 후 「검은 재분할」 지도부
1881–83망명 중 마르크스주의로 전향; 독일 사민당 지도부와 교류
1883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자술리치 등과 「노동해방단」 공동 창립
1900–03『이스크라』 및 『자랴』 편집위원
1903–05RSDLP 분열 후 멘셰비키 핵심 이론가; 레닌의 전위당이 자코뱅주의로 변질될 위험을 최초로 경고
1906–14제2인터내셔널 활동; 청산주의 전술 정당화; 비엔나 회의 OK 해외서기국 선출
"흔히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라고 불리는 것에 나는 지극히 적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목표가 무엇이든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며, 운동이 전부다." — 비판자들에 대한 답변 (1899)
독일 사민당의 이론가이자 정치인.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이자 『사회민주주의자』 편집장으로 마르크스주의 정통파로 출발했으나, 1899년 『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을 통해 자본주의 붕괴론·계급양극화·혁명 필연성을 반박하는 수정주의를 제창했다.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고 운동이 전부다"라는 명제로 사민주의의 개혁적·의회주의적 전환의 토대를 놓았으며, 이는 혁명적 사회주의와 진화적 사회민주주의의 분기점이 되었다. 세계대전 중 반전 입장으로 USPD 창립에 참여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수호하다 나치 집권 6주 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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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사회민주노동당(SDAP, 아이제나흐파) 입당; 1875년 고타 통합대회 대의원
1881–1890망명지 취리히·런던에서 『사회민주주의자(Der Sozialdemokrat)』 편집장; 엥겔스와 긴밀히 협력
1891카우츠키와 함께 에르푸르트 강령 기초; 1895년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로 지명됨
1899『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 출간 — 수정주의 논쟁 촉발, 국제 사회주의 운동 분열의 기점
1902–1928제국의회 의원(브레슬라우-서부, 후일 포츠담 II) — 조세·통상·헌법 문제 주력
1915–1917전쟁 차관 반대파로 전환; 하제·카우츠키와 평화 선언 발표, USPD 공동 창립
1918–1928바이마르 공화국 재무부 차관보 역임, 의회민주주의 수호 활동; 1932년 사망
1878년 메젠초프 암살 직전, 크라프친스키는 선언문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사랑을 충분히 설교했다 — 이제 증오를 불러낼 때가 왔다. 무자비한 피의 복수가 이제부터 너희 악행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러시아 나로드니키 혁명운동과 서구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 작가이자 혁명가. 차이콥스키 서클에서 활동하고 1878년 헌병대장 메젠초프를 단검으로 암살한 후 망명하여, 런던에서 『지하 러시아』(1883)를 출판하고 자유 러시아 출판 기금과 러시아 자유의 벗 협회를 창립해 망명 반체제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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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1873차이콥스키 서클(대선전회) 가입,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대상 사회주의 선전
1873–1874‘민중 속으로’ 참여 — 트베리·툴라 농민 선전, 체포 후 탈출
1875–1876헤르체고비나 반오스만 봉기 참전; 제네바 바쿠닌계 기관지 『라보트니크』 기고
1877이탈리아 베네벤토 무장봉기 참가(말라테스타·카피에로와 함께), 체포 후 사면
1878토지와 자유당 입당, 기관지 편집; 8월 4일 메젠초프 암살; 11월 해외 망명
1883『지하 러시아』(Underground Russia) 출판 — 서구 최초의 러시아 혁명운동 종합 보고서
1889소설 『니힐리스트의 생애』(안드레이 코주호프) 출판
1890–1895러시아 자유의 벗 협회·자유 러시아 출판 기금 창립, 월간 『자유 러시아』 편집
「나는 내 구상의 실현 가능성을 믿으며, 이 믿음이 이 비참한 상황에서 나를 지탱한다… 내 생각이 나와 함께 죽지 않고 인류와 함께 남을 것을 알며 평온히 죽음을 맞으리라」 — 1881년 3월, 감옥에서 작성한 유언 편지.
러시아 혁명가이자 '인민의 의지'의 수석 폭발물 기술자로, 알렉산드르 2세 암살에 사용된 투척 폭탄을 설계·제조했다. 사형을 앞둔 감옥에서 분말 추진제, 짐벌식 추력 제어, 안정 날개를 갖춘 세계 최초의 유인 로켓 비행 장치를 설계했으며, 이 구상은 1918년 볼셰비키 연구자들에 의해 발굴·공개되어 콘스탄틴 치올콥스키가 자신의 가장 위대한 선배로 꼽았다.
1930년대 중반, 요양소에서 "당원 계십니까?"라는 질문에 노인이 답했다. "나는 당원이오. '나로드나야 볼랴' 당원이오."
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이자 혁명적 테러 이론가로, 1880년 『테러 투쟁』을 집필하여 소규모 독립 테러 조직에 의한 전제정 타도를 주장했다. 이 구상은 동시대 동료들에게도 급진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훗날 사회혁명당 테러 전략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25년간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와 슐리셀부르크 요새에 수감되었고, 출소 후 항공학 개척자·과학 대중화자로 변모하여 1932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명예회원이 되었다.
1918년 법정 최후진술에서 "하층 계급이 존재하는 한 나는 그 안에 있고, 범죄자가 존재하는 한 나는 그 일부이며, 감옥에 갇힌 영혼이 있는 한 나는 자유롭지 않다"고 선언했다.
미국 사회주의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로, 산업별 노동조합주의의 선구자였다. 미국철도연합(ARU)을 이끌어 1894년 풀먼 파업을 조직하고 투옥 중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했으며, 미국 사회당(1901)과 IWW(1905) 창립에 참여했다. 다섯 차례 대선에 출마해 1912년 90만 표(6.0%)를 얻었고, 1차 대전 반대 연설로 수감된 1920년에도 91만 표를 득표해 미국 사회주의 선거운동의 정점을 찍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자 플레하노프는 말했다. "러시아의 역사는 아직 사회주의라는 밀빵을 구울 밀가루를 빻지 못했다."
나로드니키로 출발해 러시아에 마르크스주의를 이식한 사람. 레닌 세대 전체가 그의 책으로 배웠다. 그러나 1917년 37년 만에 귀국한 그는 10월 봉기를 「역사의 단계를 무시한 시기상조」라 규탄했다. 제자들이 세운 정권 아래에서 결핵으로 죽었고, 장례식은 반(半)야당 시위가 되었다.
1891년 8월, 정치 집회가 금지된 상황에서 블라고예프는 발칸 산맥 부즐루자 봉우리에 20여 명의 사회주의자들을 비밀리에 모아 불가리아 최초의 사회민주당을 창립했다.
페테르부르크 대학 유학 중이던 1883년 러시아 최초의 맑스주의 서클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결성하고 불법신문 『라보치』를 발행했으며, 체포·추방 후 불가리아로 돌아와 1891년 부즐루자 대회에서 불가리아 사회민주당을 창립했다. 1903년 개량주의 '광역파'와 결별하고 혁명적 '협소파(테스냐키)'를 이끌었으며, 25년간 이론지 『노보 브레메』를 편집하고 『자본론』을 불가리아어로 번역했다. 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고 발칸 연방을 주장했으며, 10월 혁명 후 볼셰비키 편에 서서 1919년 당을 불가리아 공산당으로 재편하고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레닌의 노농동맹론을 끝내 수용하지 않은 독자적 혁명가로, 불가리아 맑스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세운 사상가이기도 했다.
「공화국의 포도주 통 속에 사회혁명의 포도주를 준비하십시오!」 — 1905년 5월 1일, 마로생의 포도 재배 협동조합을 방문한 자리에서
장 조레스는 프랑스 사회주의 통합의 중심 인물로, 1902년 프랑스 사회당을 이끌고 1905년 쥘 게드의 혁명적 사회당과 통합해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를 출범시켰다. 1904년 창간한 《뤼마니테》를 통해 개혁적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고,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반유대주의와 군국주의에 맞서 공화국의 양심을 대변했다. 마르크스주의 계급 분석에 기초한 《프랑스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사》(1900~1903)를 저술해 프랑스 혁명사학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14년 7월, 독일 사민당과의 국제적 총파업으로 세계대전을 막으려 했으나 개전 사흘 전 민족주의자 라울 비용의 총탄에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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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타른주 공화파 의원으로 국민의회 진출
1892–1893카르모 광부 총파업 지지, 독립 사회당 의원으로 재선
1898–1902드레퓌스 사건에서 진보 진영의 양심으로 활동, 《라 프티트 레퓌블리크》 편집
10월 혁명 당일 밤, 트로츠키가 보낸 체포대가 그의 페트로그라드 자택 문을 두드렸다. 부르체프는 반볼셰비키 신문 《나셰 옵셰예 델로》를 그날 아침 발행한 직후였다.
나로드나야 볼랴 출신의 혁명가이자 출판인으로, 예브노 아제프를 비롯한 오흐라나의 도발자들을 연쇄적으로 폭로하여 '러시아 혁명의 셜록 홈스'로 불렸다. 역사 저널 《빌로예(Былое)》를 창간해 19세기 러시아 혁명운동의 기록을 체계화했으며, 베른 재판에서 《시온 장로 의정서》가 오흐라나의 조작임을 증언했다. 1917년 10월 혁명 당일 트로츠키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소비에트 정권의 첫 정치범이 되었고, 이후 망명지 파리에서 반볼셰비키·반파시즘 투쟁을 이어갔다.
“여섯 살 때 나는 반란군 지도자가 되어 '모스칼'과 '슈바벤'에게서 폴란드를 해방하는 꿈을 꾸었다.” — 회고록 『50년 동안』
20년간 차르의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을 견디며 시베리아 원주민 연구로 금메달을 받은 민족지학자가 된 폴란드 혁명가. 폴란드사회당(PPS) 내에서 피우수트스키의 민족주의 노선에 맞서 좌파 분당을 주도했고, 레닌과 함께 봉인열차로 귀환해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국제적색원조회(MOPR) 창립에 참여하고 소비에트 라디오방송체계를 창설했으며, 60년 가까이 국제 혁명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다 대숙청을 넘겨 77세로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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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폴란드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프롤레타리아트' 가입
1884–1891체포, 10년형 선고 — 카라 강제노동수용소 복역; 1889년 여성 수감자 체벌 항의 집단 음독 주도
1891–1904야쿠츠크·이르쿠츠크·미누신스크 유형 — 민족지 연구로 금메달 수상; 레닌·크루프스카야와 교류
1904–1907바르샤바 귀환, PPS 좌파 지도자 — 1906년 피우수트스키 축출 및 PPS-레비차 분당 주도
1907–1914오스트리아 갈리치아 망명 — 드로호비치 노동자 의료보험조합장, PPS-레비차 해외조직 활동
1914–1917스위스 망명 — 치머발트 회의 참석, 국제주의 좌파 활동
1917레닌과 함께 봉인열차로 러시아 귀환; 하리코프 지역 폴란드 문제 정치위원
1918RKP(b) 입당 (당적 1906년 소급 인정); 우크라이나 외무인민위원부·폴란드국 활동
1920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폴레프콤) 위원 — 비아위스토크에서 폴란드 소비에트 정부 수립 시도
1921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책임서기 (3월–12월)
1922–1923코민테른 집행위원회(ICCI) 서기
1925–1928『크라스나야 즈베즈다』(붉은 별) 편집장
1928–1930『라보차야 가제타』 편집장 및 아동잡지 『무르질카』 주필
1931–1933전연방 라디오방송위원회 초대 의장 — 소비에트 라디오 방송체계 창설
1933–1937RSFSR 교육인민위원부 박물관 부서장, 『소베츠키 무제이』 주필
1937–1941『나샤 스트라나』 편집장; 독일 침공 후 모스크바 라디오 폴란드어 방송 지도
어머니의 사면 청원 권유에: "결투를 생각해보세요, 어머니. 한쪽은 이미 총을 쐈습니다. 아직 쏘지 않은 상대에게 총을 쓰지 말라고 부탁할 수는 없습니다."
레닌의 친형.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환형동물 연구로 금메달을 받은 촉망받는 동물학도였으나, 1886년 돌연 혁명에 투신하여 '인민의 의지당'의 '테러 분파'를 조직하고 알렉산드르 3세 암살 계획의 주모자가 되었다. 1887년 3월 1일('제2의 3월 1일') 암살 미수로 체포되어 5월 8일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죽음은 17세 동생 블라디미르(훗날 레닌)를 혁명의 길로 이끈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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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심비르스크 고전 김나지움 금메달 졸업
1883–1886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자연과학 전공, 환형동물 연구로 금메달 수상
1886인민의 의지당 가입, '테러 분파' 조직: 이념가이자 폭탄 제조자
1887.02테러 분파 강령 작성, 알렉산드르 3세 암살용 폭탄 준비
1887.03–053월 1일 체포, 4월 15–19일 재판, 5월 8일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교수형
1920년 붉은 군대의 바르샤바 진군을 앞두고 라데크와 함께 레닌에게 진군 중단을 거듭 권고했다 — 폴란드 노동자의 혁명 의식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폴란드 공산주의 운동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로자 룩셈부르크·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1893년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SDKPiL)을 공동 창립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좌파에서 스파르타쿠스단과 독일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고, 러시아 혁명 후 볼셰비키에 합류해 레닌의 농업·농민 정책 수립을 도왔다. 1920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 위원장을, 이후 국제적십자사(MOPR) 초대 의장과 서방 소수민족 공산대학 초대 총장을 지내며 국제 공산주의 제도화에 기여했다.
시미트가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전보: 「…각하께 제헌의회의 즉각 소집을 요구하며, 더 이상 각하의 대신들에게 복종하지 않습니다. 함대 사령관 P. 시미트.」
러시아 제국 해군 장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905년 혁명의 물결 속에서 세바스토폴 해군 봉기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순양함 오차코프에 적기를 올리고 스스로 흑해함대 사령관을 선언했으며, 니콜라이 2세에게 제헌의회 소집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냈다. 봉기는 90분 만에 진압되었고, 그는 체포되어 베레잔 섬에서 총살당했지만, 그 이름은 소비에트 전역의 거리·함선·기념비와 파스테르나크의 시를 통해 '시미트 중위'로 불멸화되었다.
1919년 3월 10일,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의 죽음을 추적하던 요기헤스는 베를린 모아비트 교도소에서 체포된 지 몇 시간 만에 뒷머리에 총을 맞고 살해되었다. 마지막으로 수사관에게 남긴 말: 「당신들은 이 살인자들을 절대 찾지 못할 것이다」.
폴란드-유대인 출신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1893년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SDKPiL을 창립하고, 1차 세계대전 중 스파르타쿠스단의 핵심 지하 조직가로 활동했다. 평생 룩셈부르크의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지이자 연인이었으며, 뛰어난 조직가였으나 스스로 글로 남기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1919년 1월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살해되자 KPD 지도부를 맡아 그들의 죽음을 파헤치다 두 달 뒤 같은 의용군 계열에 살해되었다.
옛 티플리스 노동자들은 이렇게 회고했다. 「논쟁이나 토론이 벌어질 때면 동지들은 모두 쿠르나톱스키에게 물었다. 그의 결론과 판단은 언제나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다.」
나로드나야 볼랴 활동가로 출발해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한 쿠르나톱스키는 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의 '노동 해방' 그룹과 함께했으며, 미누신스크 유형지에서 레닌을 만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항의」에 서명했다. 1900년 이스크라의 카프카스 대표로 티플리스에 파견되어 RSDLP 티플리스 위원회를 결성했고, 그곳에서 젊은 스탈린의 '당적 스승' 역할을 했다. 1905년 혁명기에는 치타에서 노동자·병사·코사크 대표 소비에트를 조직하고 무장봉기를 이끌어 이른바 '치타 공화국'을 수립했다. 사형선고를 받고 종신 카토르가로 감형된 뒤 일본으로 탈출, 파리에서 망명 중 44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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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1889나로드나야 볼랴 활동가, 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대학에서 제적·유형
1892–1897취리히 공대 졸업(화학공학), 플레하노프의 '노동해방' 그룹 참여
1898–1900미누신스크 유형, 레닌과 만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항의」 서명
1900–1901이스크라 카프카스 대표, RSDLP 티플리스 위원회 결성
1904야쿠츠크 정치유형자 무장항의 지도, 아카투이 카토르가 수감
1905–1906치타 노동자·병사·코사크 소비에트 조직, '치타 공화국' 무장봉기 지도, 《자바이칼스키 라보치》 편집
이오시프 블레이흐만은 장인 출신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혁명가로, 노동자 조직과 병사 집회에 자신의 정치를 밀어 넣었다. 2월혁명 뒤 페트로그라드 무정부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이 되어 산업의 사회화와 지주 재산의 수탈, 코뮌 건설을 임시정부 밖에서 주장했다. 1917년 7월 3일에는 제1기관총연대에 무장하고 행진하라고 촉구해 위기를 무장한 7월 시위로 전환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이 운동은 볼셰비키 지도부가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10월 뒤에는 구체제에 맞선 혁명을 지지하면서도 볼셰비키 국가를 비판했고, 그 결과 거듭된 체포와 강제노동, 병을 겪다가 1921년에 사망했다.
「자본주의는 스스로 개혁할 수 없다」: 93세에 미국 공산당에 입당한 흑인 해방운동의 아버지
「공산주의는 승리할 것이다. 나는 그 날을 앞당기는 데 일조하고 싶다.」 — 1961년 93세의 나이로 미국 공산당에 제출한 입당 신청서에서
미국의 사회학자, 역사가, 범아프리카주의자이자 20세기 가장 중요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식인이다. NAACP 공동 창립자로서 기관지 『더 크라이시스』를 24년간 편집하며 흑인 민권운동의 방향을 이끌었고, 『흑인의 영혼』과 『미국의 흑인 재건』을 통해 미국 사회학과 역사학의 지형을 바꾸었다. 자본주의를 인종차별의 근본 원인으로 보았으며, 마르크스주의와 범아프리카주의의 결합을 추구했다. 1961년 93세의 나이로 미국 공산당에 입당했고, 콰메 은크루마의 초청으로 가나에 정착해 『아프리카나 백과사전』 편찬에 착수하던 중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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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897윌버포스대·펜실베이니아대 연구원, 『필라델피아 니그로』(1899) 출간
1897–1910애틀랜타대 교수, 『흑인의 영혼』(1903) 출간, 나이아가라 운동 창립(1905)
1910–1934NAACP 공동 창립, 기관지 『더 크라이시스』 편집장; 범아프리카회의 조직
1902년 6월 아제프는 오흐라나에 500루블을 테러 활동에 기부했다고 보고하며 '당 내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필요했다'고 적었다. 경찰과 혁명 양쪽에 동시에 장부를 올린 셈이었다.
사회주의혁명당(SR) 전투조직의 수장으로 플레베 내무장관(1904)과 세르게이 대공(1905) 암살을 지휘하며 혁명 테러의 정점을 찍었지만, 동시에 1893년부터 오흐라나의 유급 정보원으로 활동하며 동료들을 체포·처형으로 몰아넣은 이중간첩이었다. 게르슈니의 후계자이자 보리스 사빈코프의 상관으로서 전투조직을 중앙집권적 정예 부대로 재편했고, 암살 성공으로 쌓은 신임을 배신의 밑천으로 삼았다. 1908년 부르체프에게 정체가 폭로되어 SR당 전체가 궤멸적 타격을 입었으며, 독일로 도주한 아제프는 혁명운동과 비밀경찰 사이 가장 어두운 접점으로 남았다.
10월 혁명을 목도한 포트레소프는 이렇게 썼다. "민주주의의 살해다." 그리고 볼셰비키가 세운 체제를 한마디로 규정했다. "바보들의 사회주의."
1900년 이스크라 창간 편집인 6인 중 한 명으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의 창립 세대다. 1903년 당 대회에서 마르토프 편에 서며 멘셰비키의 지도적 이론가가 되었고, 레닌의 전위당 모델에 맞서 대중정당을 주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멘셰비키 방어파를 이끌었으며, 1917년 10월 혁명을 거부했다. 1919년 체카에 체포된 후 1925년 소련을 떠나 베를린과 파리에서 소비에트 체제 비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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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1896스트루베·마르토프의 사회민주주의 서클에서 활동, '노동해방' 그룹과 접촉
1896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결성 참여
1897–1899체포되어 뱟카현으로 유형
1900–1903이스크라 창간 편집인 6인 중 한 명; 제2차 당대회 이후 멘셰비키 지도부
1905–1907귀국하여 멘셰비키 신문 『나찰로』『넵스키 골로스』 편집
1910–1914멘셰비키 청산파 기관지 『나샤 자랴』 편집, 4권짜리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운동』 공동 편찬
크론시타트 봉기 진압을 목격한 뒤 골드만은 이렇게 썼다. '크론시타트는 나를 볼셰비키에 묶어둔 마지막 실을 끊어놓았다' — 그녀는 1921년 12월 소비에트 러시아를 떠났다.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아나키스트 혁명가, 작가, 연설가. 헤이마켓 사건을 계기로 정치에 눈떠 북미와 유럽에서 아나키즘 정치철학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피임·자유연애·반군국주의를 주제로 수천 명을 끌어모은 연설로 '붉은 에마'라 불렸으며, 1919년 소비에트 러시아로 추방되었다. 크론시타트 반란 진압 이후 볼셰비키의 권위주의를 비판하는 전향적인 목소리를 냈고, 《러시아에서의 환멸》(1923)에 그 경험을 기록했다.
「스페인의 레닌」이라 불린 UGT의 노동자 지도자, 혁명과 전쟁 사이에서 무너진 공화국 총리
1936년 11월, 라르고 카바예로는 CNT 지도자 네 명을 각료로 임명했다. 국가의 폐지를 강령으로 삼아 온 아나키스트들이 국가의 장관석에 앉은 것이다. 그중 보건장관 페데리카 몬세니는 스페인 역사상 첫 여성 각료였다.
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미장공으로 일하다 노동조합 지도자가 된 사람. 노동총동맹(UGT)을 이끌며 1917년 8월 총파업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아래에서는 국가참사원에 들어가 조직을 지켰는데 이 선택은 평생 논쟁으로 남았다. 제2공화국 노동장관으로 농촌 8시간 노동제를 밀어붙였고, 1934년 아스투리아스 봉기 전후로 급격히 좌경화해 지지자들에게 「스페인의 레닌」이라 불렸다. 1936년 9월 총리 겸 전쟁장관이 되어 11월에는 CNT 지도자 넷을 입각시켜 아나키스트를 처음으로 정부에 앉혔으나, 인민군 재건과 혁명의 속도를 놓고 공산당·소련 고문단과 계속 부딪쳤다. 1937년 5월 사태 뒤 POUM 금지 요구를 거부하다 각료들이 이탈하면서 물러났고, 망명지 프랑스에서 게슈타포에 붙잡혀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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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마드리드의 가난한 집에서 출생, 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미장공이 됨
1890–1894건설노동자 파업을 계기로 노동총동맹(UGT) 활동 시작, 1894년 PSOE 입당
19178월 총파업 지도로 종신형 선고, 이듬해 하원의원 당선과 함께 석방
1924–1930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아래 국가참사원 노동 참사관, UGT 조직을 유지한 대가로 오랜 논쟁을 남김
1925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사후 PSOE와 UGT의 최고 지도자로
1931–1933제2공화국 노동장관, 농촌 8시간 노동제를 비롯한 노동 입법 추진
1934–1935「스페인의 레닌」으로 불릴 만큼 좌경화, 10월 아스투리아스 봉기 실패로 수감됐다 무죄 석방
1903년 5월 키예프에서 체포된 직후, 게르슈니는 저항하지 않고 헌병과 검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신의 수갑과 족쇄에 입을 맞추었다.
사회주의혁명당(에스에르)의 공동 창립자이자 전투조직의 창설자·초대 지도자로서, 1902년 시피야긴 내무장관 암살을 필두로 1902~1903년 러시아 제국을 충격에 빠뜨린 정치 테러를 기획·지휘했다. 유대인 가정 출신의 약제사·세균학자로서 민스크에서 문화계몽 활동을 펼치다 합법적 수단의 한계를 절감하고 전업 혁명가로 전향, '혁명의 호랑이'라 불리며 제국 최대의 지명수배자가 되었다. 1903년 체포돼 사형 선고 후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1906년 아카투이 카토르가에서 양배추 통에 숨어 탈출해 중국·일본·미국을 거쳐 유럽으로 귀환했으며, 사후에 부하였던 예브노 아제프가 오흐라나 첩자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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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897키예프대학교 약학 과정 수학, 학생운동 참여로 첫 체포
1898–1900민스크에서 세균학 연구소 개설, 학교·문화계몽 활동, '노동자당' 가입·지도
1901–1902분산된 에스에르 그룹들을 단일 사회주의혁명당으로 통합 주도, 전투조직 창설
1902–1903전투조직 초대 수장으로서 시피야긴·보그다노비치 암살, 오볼렌스키 암살 미수 기획·지휘
1903–1904키예프에서 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군사재판 사형 선고 후 종신형 감형
소콜로프가 책상에 앉아 쓰고 있었다. 병사들이 둘러싸고 서서 구술인지 조언인지 모를 말을 쏟아냈다. … 작업을 마치고 종이 위에 「명령 제1호」라고 썼다. 수하노프, 『혁명의 기록』
궁정 사제의 아들로 태어나 반독재 변호사로 삶을 바꾸었다. 1917년 3월 1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서기로서 병사분과 회의를 주재해 군대 민주화의 신호탄이 된 「명령 제1호」를 기초했다. 혁명 초기 가장 분주한 비공식 지도자였으나 당파에는 속하지 않았고, 내전 후 소비에트 법률 고문으로 조용히 살다 얄타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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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1896법률·정치경제학 논문 발표, 『미르 보지』 『오브라조바니예』 『지즌』 등에 기고
1894–1898나로드나야 볼랴 사건 연루 조사;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 가담 체포(1896); 레벨 유형(1898)
시카고 환송연에서 헨리 클레이 프릭의 사망 소식을 듣고 베르크만은 이렇게 말했다: '프릭은 신에 의해 추방되었다.'
러시아 제국 빌나에서 태어나 1888년 미국으로 이주한 아나키스트 혁명가이자 작가. 1892년 홈스테드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에 분노하여 제철소 사장 헨리 클레이 프릭을 암살하려다 실패, 14년간 복역했으며 그 경험을 《한 아나키스트의 옥중기》(1912)에 담았다. 출소 후 에마 골드만의 잡지 《마더 어스》 편집자로 활동하며 미국 아나키스트 운동의 중심 인물이 되었고, 1919년 반전 활동으로 소비에트 러시아로 추방되었다. 처음에는 볼셰비키 혁명에 열광했으나 크론시타트 반란 진압을 목격하고 환멸을 느껴 《볼셰비키 신화》(1925)에서 초기 소비에트 국가의 권위주의를 기록했으며, 이후 프랑스 망명 중 아나코-코뮤니즘 입문서 《지금 그리고 이후에》(1929)를 저술했다.
「대다수, 민중은 떠날 수 없습니다. 나는 늘 노동자들과 함께 살아왔고, 그들과 함께 남을 것입니다. 그들의 운명이 곧 나의 운명입니다」, 사회당 기관지 《라 보스》에, 1939년 3월
마드리드 대학 철학 교수로 출발해 1925년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의 뒤를 이어 사회당(PSOE)과 UGT를 이끈 마르크스주의 수정파였다. 제2공화국 제헌의회 의장(1931)을 지내며 온건한 의회주의 노선을 고수했고, 1934년 10월 무장봉기에 반대하며 당내 주류에서 밀려났다. 내전 발발 후에도 마드리드에 남아 평화 협상을 모색했고, 1939년 3월 카사도 대령의 네그린 전복에 합류해 국방평의회 외무담당이 되었으나 프랑코는 무조건 항복만을 받아들였다. 다른 평의회 구성원들이 망명하는 날에도 홀로 마드리드에 남아 '노동자들과 늘 함께 살아왔으니 그들의 운명을 함께하겠다'고 말했고, 프랑코 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아 카르모나 감옥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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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PSOE·UGT 입당; 마드리드 대학 논리학 교수 임용
1917혁명적 총파업 위원회 참여, 종신형 선고 후 1918년 사면
1925–1931PSOE·UGT 의장;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에 협조 노선
1931–1933제2공화국 제헌의회 의장
193410월 무장봉기에 반대, UGT 의장 사임
1937.05조지 6세 대관식 공화국 대표로 런던 방문, 이든과 평화 중재 모색
1939.03카사도 쿠데타 합류, 국방평의회 외무담당
1939.03–1940.09프랑코군에 체포, 군사재판서 30년형 선고, 카르모나 감옥에서 사망
1918년, 마르토프는 스탈린이 1907년 당에서 제명된 전력이 있음을 폭로했다. 스탈린은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혁명재판소는 마르토프에게 '공적 견책'을 선고했다.
이스크라를 레닌과 함께 만든 동지였으나, 1903년 당원 자격 조항 하나를 두고 갈라져 멘셰비키의 지도자가 되었다. 10월 이후에도 나라를 떠나지 않고 합법 야당의 자리를 지키려 애썼고, 1920년 출국을 「허락받아」 베를린에서 결핵으로 죽었다. 병상의 레닌이 그의 안부를 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임종 직전 "나는 조선의 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소. 동무들은 반드시 고려소비에트공화국을 성립하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대한제국 장교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전향하여 조선 민족해방운동에 마르크스주의를 최초로 접목시킨 공산주의 선구자. 1918년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무장독립노선을 추진했으며, 이승만과 결별 후 고려공산당(상하이파)을 이끌며 민족해방과 계급혁명의 결합을 추구했다.
1918년 1월 18일, 타브리다 궁전. 제헌의회 의장으로 선출된 체르노프는 러시아 최초의 민주적 의회 개회를 선언했다. 볼셰비키 의원들이 퇴장한 후에도 회의는 계속되었고, 토지 사회화 법안이 통과되었다. 새벽 4시 40분, 무장한 수비대가 "경비가 피곤하니 회의를 끝내 달라"며 접근했다. 체르노프는 차기 회의 일정을 정하고 휴회를 선언했다. 그날이 마지막 회기였다.
나로드니키 농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접목해 토지 사회화를 사회혁명당(PSR) 강령으로 정립한 수석 이론가. 1917년 제헌의회 의장에 선출되었으나, 볼셰비키의 의회 해산 후 32년간 망명하며 저술로 맞섰다.
알렉산드르 반놉스키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초기 조직가이자 일본 문학과 철학을 연구한 문학연구자였다. 그는 모스크바 노동자 해방 투쟁 동맹을 대표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회에 참가했고, 이후 불법 인쇄소와 군사기술 활동으로 혁명운동을 조직했다. 1912년 당을 떠난 뒤에는 혁명적 이상과 그 결과를 기독교 사상으로 성찰하며 일본에서 러시아 문학과 일본 신화를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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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모스크바 제국기술학교 학생, 혁명운동에 가담
1898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회 대표, 모스크바 노동자 해방 투쟁 동맹 대표
1898–1900체포와 솔비체고츠크 유형
1903–1905‘의지’ 사회민주주의 그룹 조직, 리빈스크와 야로슬라블의 불법 인쇄소 운영
“독서는 노동계급 해방의 가장 훌륭한 수단 중 하나다. 그러니 많이 읽기를 권한다.” — 레카바렌이 전국 노동자 모임에서 늘 되풀이한 말.
칠레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정당 건설에 평생을 바친 조직가이자 이론가였다. 질산염 광산 노동자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민주당에 입당해 활동하다, 1912년 타협적 개량주의와 결별하고 칠레 사회주의노동자당(POS)을 창당했다. 수차례 투옥과 추방을 겪으면서도 노동자 신문을 창간·편집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계급의식을 고취했으며, 1922년 당을 코민테른에 가입시켜 칠레 공산당으로 전환시켰다. 1924년 당내 노선 갈등과 건강 악화 속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으나, 그가 닦은 조직·교육·언론의 토대는 칠레와 라틴아메리카 혁명 전통의 초석이 되었다.
「지체하는 것은 혁명을 실패시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도처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도 공동의 투쟁에 나서야 한다.」
볼린 지방의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898년 흑해함대에 징집되어 포툠킨함의 포병 부사관이 되었다. 1903년 RSDLP에 입당하고 세바스토폴 수병 중앙위원회(첸트랄카) 결성을 주도한 선동가로, 전함에 붉은 기를 숨겨 두고 함대 전체 봉기를 준비했다. 1905년 6월 27일 썩은 고기에 항의하는 수병들 앞에서 기량롭스키 부함장의 총에 치명상을 입었고, 이틀 뒤 오데사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대규모 정치 시위로 전환되어 포툠킨함이 육상 포격으로 답하게 했다.
재판에서 판사들에게: "나는 피고가 아니라 당신들의 포로다. 우리는 두 진영이다. 전진하는 혁명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라."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원이자 시인으로, 1905년 2월 4일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차르의 숙부 세르게이 대공을 폭탄으로 암살한 인물. 이틀 전, 대공의 아내와 어린 조카들이 마차에 타고 있는 것을 보고 폭탄 투척을 멈춘 그의 행동은 '윤리적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낳았고, 알베르 카뮈의 희곡 『정의의 사람들』의 모델이 되었다. 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에서 활동하다 사회민주당의 점진주의에 실망하여 SR 전투조직에 합류했으며, 플레베 암살 감시에도 참여했다. 재판에서 '전진하는 혁명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라'고 법정에 선언한 후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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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1899모스크바 및 페테르부르크 대학 수학; 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가입 (1898)
레닌은 로스메르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다섯 가지나 여섯 가지 언어로 침묵을 지키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 필리프 로브리외, 『프랑스 공산당 내부사』에서 인용
미국 태생의 프랑스 혁명적 생디칼리스트이자 코민테른 지도부 핵심 인물.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라 비 우브리에르》를 발행하며 반전 국제주의 운동을 조직했고, 모스크바에서 17개월간 체류하며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을 주도했다. 프랑스 공산당 정치국원으로 활약하다 1924년 트로츠키 옹호로 제명된 후 좌익반대파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투신했으며, 1938년 자신의 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만년에는 알제리 전쟁 반대 선언에 서명했고 회고록 『레닌의 모스크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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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914CGT 기관지 《라 비 우브리에르》 편집 —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혁명적 생디칼리슴 운동 주도
1915–1918반전 국제주의자로 치머발트 회의 프랑스 참가 조직 — 전쟁 내내 반전 활동 지속
1919–1920제3인터내셔널 가맹위원회 활동 — 모스크바 파견, 17개월 체류하며 코민테른 집행위원 선출
1921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대회 주도 — 로조프스키·톰 만과 함께 임시평의회 간부
1922–1924프랑스 공산당(PCF) 정치국원 겸 《뤼마니테》 사무총장 — 당내 좌파 지도부 핵심
1924.10트로츠키 반대 운동에 반발하여 수바린·모나트와 함께 PCF에서 제명
1929–1931프랑스 최초 트로츠키주의 조직 공산주의자동맹 결성 참여 — 전술적 차이로 1931년 탈퇴
1938.9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 개최 — GPU의 암살 위협 속 비밀 진행
1939멕시코 방문 — 트로츠키와의 우정 회복, 듀이위원회 참여, 트로츠키 손자 시에바의 후견인
1905년 3월 모스크바 법정에서 차르 체제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연설을 했다. 유형지에서 탈출한 후에도 바쿠 지하로 돌아갔고, 결국 바일로프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출신의 아르메니아계 볼셰비키. 1897년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에 가입하고 1901년 바쿠로 유배된 후 캅카스 사회민주주의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902년 스테판 샤우먄과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을 공동 창립했고, 1903년 RSDLP 제2차 대회에서 이스크라 다수파로 서며 볼셰비키-멘셰비키 분열의 현장에 섰다. 1905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종신 유형 후 탈출해 슈투트가르트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 참석했다. 바쿠 지하로 돌아와 활동하다 1910년 체포되어 바일로프 감옥에서 32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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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입학
1897'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 가입
1901바쿠로 유배, RSDLP 바쿠·캅카스 연합위원회 위원
1902스테판 샤우먄 등과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 공동 창립
1903RSDLP 제2차 대회 바쿠 대의원 — 이스크라 다수파(볼셰비키)
1904–1905모스크바에서 체포, 재판에서 반차르 연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1905.12체포되어 종신 유형 선고
1907유형지 탈출, 슈투트가르트 제2인터내셔널 대회 및 헬싱포르스 RSDLP 제4차 협의회 참석
바쿠 코뮌 붕괴 직전, 동료의 아내가 먼저 피하라 권하자 샤우먄은 답했다. "노동자들이 나에게 뭐라 하겠는가? 맨 먼저 도망치는 건 나에게 수치다."
아르메니아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이자 캅카스 볼셰비키의 지도자. 티플리스 상인 집안 출신으로 리가 공대와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했고, 1899년 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조직했다. 「공산당 선언」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하고 문학비평을 개척했으며, 1912년 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1918년 바쿠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바쿠 코뮌'을 이끌었고, 민족문제를 두고 레닌과 편지 논쟁을 벌인 대표적 이론가였다. 1918년 9월 26인의 바쿠 인민위원들과 함께 총살당해 소비에트 순교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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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티플리스 실과학교 졸업, 리가 공과대학 입학
1899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 조직
1900–1902RSDLP 입당, 리가 공대 퇴학,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 창립
1902–1905베를린 대학 철학부, 「공산당 선언」 아르메니아어 번역, 제네바에서 레닌과 첫 만남
1906–1914RSDLP 4차·5차 대회 대의원, 바쿠 지하신문 편집, 카프카스 연합위원회 지도
1912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 승인
1917.03–1917.05바쿠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초대 의장
1917.11–1918.04바쿠 소비에트 집행위 의장, 레닌이 캅카스 특별 전권위원으로 임명
트로츠키는 그를 두고 '정치가의 완전한 캐리커처였다. 오룔의 여자 신학교에서 어학을 가르치는 매력적인 교사 — 그게 전부다'라고 평했다.
SR 창립자이자 우파 지도자로서, 1905년 혁명기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서 SR 분파를 이끌었고 케렌스키 임시정부의 내무장관과 예비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내전기에는 통일된 반볼셰비키 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의 정점으로서, 우파 국가회의에서 전러시아 임시정부(우파 디렉토리)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11월 콜차크 쿠데타로 체포·추방되었고, 이후 파리와 뉴욕에서 망명 언론 활동을 했다. 그의 정치 궤적은 러시아 혁명기 민주적 사회주의가 무장한 좌우 세력 사이에서 붕괴한 과정을 압축해 보여준다.
포툠킨이 콘스탄차에 입항했을 때 라코프스키를 맞으며 말했다: 「우리는 죽을 각오가 된 300명의 사회민주주의자들입니다.」
하르코프 근교의 전농노 가정에서 태어나 열두 살에 구두 수선을 시작했다. 1905년 전함 포툠킨에서 썩은 고기에 항의하다 무장봉기로 전환해 함상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1일간 붉은 기 아래 흑해를 항해하며 오데사에서 혁명 접합을 시도했다. 루마니아 망명 후 스위스, 미국, 프랑스를 전전하며 레닌과 고리키를 만났으나 어느 당에도 속하지 않았고, 1907년 러시아로 돌아왔다가 세바스토폴에서 교수형당했다.
샤를 들레스트랭은 제1차 세계대전의 포로 경험과 기갑부대 지휘를 거친 프랑스 장군으로, 현대전에서 전차의 역할을 중시했다. 패전과 휴전 뒤에도 저항을 선택한 그는 샤를 드골의 지명으로 비밀군의 초대 지휘관이 되어 여러 저항운동의 군사 조직을 묶었다. 그는 장 물랭과 협력해 점령지 전역으로 조직을 넓혔지만 1943년 6월 9일 체포되었고, 후임을 정해야 하는 상황은 칼뤼르 회의의 배경이 되었다. 나치 수용소에서 살해된 그는 사후 해방훈장을 받았다.
지노비 리트빈-세도이는 러시아 제국의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로, 공장 노동과 체포·유배를 거치며 혁명운동의 실천가가 되었다. 1905년 모스크바 봉기에서 프레냐 전투부대의 지휘를 맡아 바리케이드 방어와 무장 노동자 조직을 이끌었다. 그는 패배의 조건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노동자들이 스스로 봉기를 결정하고 싸웠다는 점을 강조한 회고를 남겼다. 1917년 뒤에는 소비에트 국가의 교통·교육 부문에서 일했다.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이보다 큰 승리는 없었다」, 마티뇽 협정 타결 직후 라디오 연설에서, 1936년 6월
성냥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1909년 서른 살에 노동총동맹(CGT) 사무총장이 되어 1940년까지 이끈 프랑스 노동운동의 얼굴. 혁명적 생디칼리슴에서 출발했으나 1914년 신성동맹을 받아들이며 개혁주의로 옮겨 갔고, 베르사유 조약의 노동 조항 기초와 국제노동기구(ILO) 창설에 참여했다. 1936년 재통합된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에 서명했으며, 비시 정권 아래 억류되어 독일로 이송되었다가 살아 돌아와 1948년 공산당 주도의 CGT에서 갈라져 나온 「노동자의 힘」(FO)의 창립 의장이 되었고 195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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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906오베르빌리에 성냥 공장 노동자, 아버지를 실명시킨 백린에 맞선 파업으로 해고
1909–1940노동총동맹(CGT) 사무총장
1914.08반전 총파업 노선을 접고 「신성동맹」 수용, 조레스 장례식에서 연설
1919–1921베르사유 조약 노동 조항 기초, ILO 창설 참여; CGT 분열로 혁명파가 CGTU로 이탈
1936.03–06재통합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 서명, 조합원 100만에서 400만으로
1929년 대공황을 예측하고도 자본주의의 적응력을 인정했다는 이유로 연구소가 폐쇄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1920년대 말, 모두가 자본주의 안정화를 확신할 때 대공황을 예측했고, 모두가 자본주의 붕괴를 말할 때 그 종말을 예측하여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헝가리 출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1927년부터 20년간 소련 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ИМХМП)를 이끌며 코민테른 최고의 경제분석가로 활약했다. 1929년 대공황의 도래와 종료를 정통 노선에 역행하여 정확히 예측해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으나, 전후에는 전시 국가개입으로 자본주의가 적응·안정화될 수 있다고 분석한 저작으로 1947년 연구소 폐쇄와 함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1963년 레닌상을 수상했고, 유언에 따라 사후 공개된 유고에서는 소련 관료제의 변질과 국제주의 포기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1917년 6월 위기 뒤 그는 볼셰비키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요구하며 혁명의 방어를 주장했다.
미하일 리베르는 본명 미하일 골드만으로, 유대인 노동운동의 조직인 분트에서 성장해 멘셰비키의 주요 지도자가 된 혁명가였다. 그는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분트의 조직 자율성을 주장했고, 1917년에는 혁명적 방어주의와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결합하려 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와 전러시아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임시정부와의 연립을 옹호했으며, 6월 10일 시위 위기 뒤 볼셰비키에 대한 강경 조치를 요구하는 다수파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0월 봉기와 볼셰비키와의 협상에 반대한 그는 이후 체포와 유배를 거듭했고, 1937년 처형된 뒤 사후 복권되었다.
블라디미르 젠지노프는 러시아 사회혁명당의 간부이자 언론인, 북극 시베리아를 기록한 민족지학자였다. 그는 1905년 혁명부터 1917년 혁명까지 반복된 체포와 유배를 겪었고, 유배지의 민족지·조류학 연구를 책으로 남겼다. 1918년 사마라의 제헌의회 의원위원회와 우파 디렉토리에서 볼셰비키와 콜차크 사이의 민주적 대안을 지지했으며, 11월 옴스크 쿠데타 때 체포되어 중국으로 추방됐다. 이후 파리와 뉴욕의 사회주의 망명 언론에서 활동하며 혁명과 내전의 경험을 기록했다.
1923년 10월 21일 켐니츠 회의에서 브란들러는 좌파 사민당원들의 이탈을 목격하고 계획된 봉기를 전격 취소했다. 함부르크에서는 취소 소식이 제때 전달되지 않아 노동자들이 고립된 채 봉기했고, 24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독일공산당(KPD) 의장으로 1921년 3월 행동과 1923년 '독일 10월' 봉기를 이끌었으나, 혁명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봉기를 취소하고 그 책임으로 모스크바에 소환되었다. 에른스트 텔만의 당 지도부에 맞서다 1929년 KPD에서 제명된 후, 아우구스트 탈하이머와 함께 공산당 반대파(KPO)를 창립하여 국제적 '우익반대파'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나치 집권 후 프랑스·쿠바 망명을 거쳐 1949년 서독으로 귀환, 생애 끝까지 독립적 공산주의 노선을 견지하며 노동정치그룹(Gruppe Arbeiterpolitik)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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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1901건설 노조 활동 시작, 사회민주당(SPD) 입당
1914–1916반전 활동, 스파르타쿠스단 창립 멤버; 체포·추방
1918.12독일공산당(KPD) 창립, 중앙위원 선출
1921–1924KPD 의장; 3월 행동·1923년 '독일 10월' 봉기 주도, 실패 후 모스크바 소환
이반 리바르는 크로아티아계 변호사이자 유고슬라브주의 정치가로, 왕국의 의회정치와 반파시스트 해방운동을 잇는 제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1920년 제헌의회 의장으로서 통일 뒤 국가의 헌정 질서를 다루었고, 독재기에는 공산주의 피고인들을 변호했다. 전쟁 중에는 AVNOJ 의장으로 민족해방운동의 대표성을 조직했으며, 전후에는 공화국의 집단적 국가원수인 연방 국민의회 상임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두 아들을 전쟁에서 잃은 그의 경력은 서로 다른 정치 전통이 해방과 국가 재건의 국면에서 결합한 과정을 보여준다.
1917년 3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연단에서 법무장관 취임을 알리며 외쳤다. "나는 인민 없이 살 수 없다. 여러분이 나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 나를 죽여라!" 광장을 가득 메운 노동자와 병사들은 열광했다.
1917년 임시정부의 얼굴이자 마지막 총리. 8월에는 코르닐로프를 막기 위해 감옥의 볼셰비키까지 무장시켰고, 10월에는 그를 지키러 올 군대가 어디에도 없었다. 여장 탈출설은 소비에트의 날조다. 그는 반세기를 망명지에서 「무엇이 잘못이었는가」를 강연하며 살다 뉴욕에서 죽었다.
타간카 감옥에서 형장으로 끌려가며 남긴 마지막 말: "어머니께 내가 평온하게 죽었다고 전해주게."
사회주의혁명당(PSR)에서 분리된 급진좌파 '최대주의자'(SSRM)의 창립 지도자 중 한 명으로, 1905년 12월 모스크바 무장봉기 당시 카잔 철도의 전투부대를 지휘했으며, 1906년 3월 모스크바 상호신용조합에서 87만 5천 루블을 탈취한 유명한 '엑스'를 주도했다. 모스크바 대학 자연과학부 학생으로 1904년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0월 선언 사면으로 풀려나 즉시 무장투쟁에 복귀했으며, PSR의 단계적 혁명론을 거부하고 전면적 사회화와 '노동자 공화국'을 요구한 최대주의자들의 실천적 핵심이었다. 1906년 8월 체포 시 무장 저항하다 중상을 입고 며칠 만에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24세의 나이로 타간카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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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904모스크바 대학 자연과학부 입학, 사회주의혁명당(PSR) 입당
1904모스크바 선전활동으로 체포, 7년형 선고
1905.1010월 선언 사면으로 석방
1905.12모스크바 무장봉기 — 카잔 철도 전투부대 지휘, 치스티예 프루디·프레스냐 전투 참가
1906.3모스크바 상호신용조합 탈취 작전 지휘 (87만 5천 루블)
1906사회주의혁명당-최대주의자 동맹(SSRM) 공동 창립
1906.8–9아크바리움 정원 인근에서 체포 시 무장저항·중상, 군법회의 사형선고, 타간카 감옥 교수형
레닌이 그를 평했다: 「완전히 예외적인 충성심, 용기, 그리고 에너지를 지닌 사람」. 막심 고리키는 그를 「혁명의 예술가」라 불렀다.
본명 시몬 테르-페트로샨. 고리 출신으로 스탈린과 어린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고, 그에게 러시아어를 배우며 마르크스주의에 눈떴다. 1907년 티플리스 은행 마차 습격을 지휘해 25만 루블을 볼셰비키 금고에 쥐여준 조직자였다. 베를린에서 체포되어 독일 정신과 의사들조차 속인 치밀한 광기 연기로 사형을 면했고, 티플리스 정신병원 탈출 후 파리에서 레닌의 환대를 받았다. 내전기에는 캅카스 지하조직을 재건했으나, 그 모든 파괴적 용기는 평화로운 일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1922년 티플리스 거리에서 자전거를 타다 트럭에 치여 생을 마감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SR 분파를 이끈 지도자, 4월 위기에 마리인스키 궁전으로 파견된 혁명적 방어주의자
수하노프는 그를 두고 '탁월한 기술자, 조직가, 행정가일지는 몰라도 정치가는 전혀 아니었다'고 평했다.
모스크바의 부유한 유대계 차 상인 집안 출신으로, 형 미하일을 따라 사회혁명당에 합류해 1906년 전투조직에서 활동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SR 분파의 실질적 지도자로 부상했으며, 4월 위기 때 스코벨레프와 함께 마리인스키 궁전 앞 시위 병사들을 설득하러 파견되었으나 실패했고, 6월 VTsIK 의장에 올랐다. 10월 혁명 후 '조국과 혁명 구원 위원회' 의장으로 무장 저항을 이끌었고, 1922년 쇼 재판에서 사형 선고 후 감형되어 시베리아 유형을 거듭하다 1940년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골로스 트루다』, 1917년: '볼셰비키가 권력을 공고히 하고 합법화하면… 국가와 인민의 삶을 위에서부터 운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반대를 철권으로 분쇄할 권위주의적 정치·국가 기구를 발전시킬 것이다.'
러시아 아나키스트 지식인이자 마흐놉시치나의 지도적 이론가. 페트로그라드에서 『골로스 트루다』를 편집하고, 우크라이나에서 나바트 연합을 공동 창설했으며, 마흐노 군사혁명평의회 의장으로서 아나키스트 통합 이론을 발전시켜 공산주의·개인주의·생디칼리즘 아나키스트들의 협력을 주창했다. 1922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추방된 후, 1917–1921년 혁명의 아나키스트적 결정판인 『미지의 혁명』을 저술했으며, 동지 마흐노가 추진한 플랫폼주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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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 중퇴, 사회혁명당 입당, 노동자 학습 모임 조직
1905피의 일요일 행진 참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결성 참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1907오흐라나에 체포, 시베리아 유배; 탈출하여 프랑스 망명
1911아폴론 카렐린의 영향으로 아나키스트 전향, 파리에서 '자유 공산주의자 형제단' 가입
1915–1916반전 활동으로 프랑스 당국 추적 피해 미국 도피; 뉴욕에서 『골로스 트루다』 편집
1917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귀환; 『골로스 트루다』를 주요 아나코생디칼리즘 기관지로 재창간
1918–1920우크라이나 나바트 연합 공동 창설; 마흐노 군사혁명평의회 의장; 체카에 두 차례 체포
「볼셰비키는 공산주의를 저버리기 시작했다」 — 1922년 레닌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그녀는 이렇게 경고했다. 『워커스 드레드노트』를 당에 넘기기를 거부하고 CPGB에서 축출된 그녀는, 당 규율보다 자유로운 논쟁을 선택했다.
영국 참정권 운동가이자 좌익 공산주의자, 반식민 운동가. 어머니 에멀린의 WSPU와 결별하고 이스트엔드에서 노동계급 여성 조직화에 나섰다. 노동자사회주의연맹(WSF)을 창설하고,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 레닌과 논쟁했으며, 이후 볼셰비키 노선을 비판하는 평의회 공산주의자로 전환했다. 생애 마지막 25년을 에티오피아 반파시스트 연대에 바쳤고, 『뉴 타임스 앤드 에티오피아 뉴스』를 통해 범아프리카주의와 라스타파리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성 삼위일체 대성당 애국자 묘역에 안장된 유일한 외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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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맨체스터에서 에멀린·리처드 팽크허스트의 딸로 출생
1903–1914WSPU 전임 활동가 — 로고·현수막 디자인, '블랙 프라이데이'(1910) 목격, 여성참정권 운동 전국 조직
1914–1918이스트엔드참정권연맹(ELFS) 설립, 『우먼스 드레드노트』 창간 — 전쟁 반대·징병 거부, 임대료 파업·공동급식 조직
1918–1920노동자사회주의연맹(WSF) 창설, 『워커스 드레드노트』 발행 — 코민테른 제2차 대회 참석, 레닌과 직접 논쟁
1921–1924CPGB에서 축출, 「레닌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발표 — 평의회 공산주의로 전환, 공산노동자당(CWP) 결성
1935–1956『뉴 타임스 앤드 에티오피아 뉴스』 창간·편집 — 이탈리아 파시스트 침공 반대, 범아프리카·반식민지 여론 형성
1956–1960에티오피아로 이주 —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고문, 최초의 교육병원 기금 모금, 『에티오피아: 문화사』 저술
1960아디스아바바에서 78세로 사망 — 에티오피아 국장, 성 삼위일체 대성당 애국자 묘역 안장
1911년 6월 바르샤바 파비아크 감옥에서 아들 얀을 낳고, 생후 8개월 동안 감방에서 함께 살았다.
바르샤바의 폴란드계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04년 SDKPiL에 투신해 로자 룩셈부르크 및 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폴란드 혁명운동의 핵심 간부로 활동했다. 반복된 체포와 시베리아 유형에도 지하신문 발행과 크라쿠프 망명 조직을 계속했고, 1918년 베른 소비에트 외교 사절단을 거쳐 모스크바에 정착했다. 1939~1943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폴란드 문제를 맡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점령 폴란드 대상 공산주의 방송 라디오 코시치우슈코를 지휘했으며, 3차례 레닌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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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SDKPiL 입당, 바르샤바에서 지하 혁명운동 시작
1906–1911반복 체포·투옥; SDKPiL 제6차 대회 대표 (1908);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결혼 (1910); 파비아크 감옥에서 아들 얀 출산
체포된 시미트는 세묘놉스키 연대 진영으로 끌려가 벽 앞에 총살 위협을 받았고, 며칠 밤잠 못 이루는 심문 끝에 마침내 자백했다.
모스크바 가구공장을 물려받은 청년 사업가로, 1905년 혁명에 투신해 공장을 노동자 전투대의 무기고·병원·시체안치소로 바꾸고 프레스냐 무장봉기의 물적 거점을 제공했다. 9시간 노동제와 임금 인상을 도입했으며, RSDRP에 무장 자금 2만 루블을 쾌척했다. 12월 봉기 진압 뒤 체포되어 고문 끝에 부티르카 감옥에서 의문사했으며, 유산 약 28만 루블은 볼셰비키의 핵심 재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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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부친 사망, 가구공장 상속
190421세로 공장 경영권 인수
19059시간 노동제·임금 인상 도입, RSDRP에 무장 자금 2만 루블 기부, 공장을 혁명 거점으로 전환
1905.12프레스냐 무장봉기: 공장이 무기고·병원·시체안치소로 기능, 세묘놉스키 연대 포격으로 파괴됨
1921년 3월 행동 직후,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이 팸플릿을 구상할 때 독일공산당은 50만 당원이었다. 8일 후 내가 이 글을 쓸 때, 그 당은 근본에서 동요했고 그 존립 자체가 의문에 처했다. 바쿠닌적 광기에 희생된 전사자들은 말한다: 다시는 결코!」
로자 룩셈부르크의 변호사에서 독일공산당(KPD) 의장이 된 사회주의자. 1921년 3월 행동을 '바쿠닌주의적 푸치즘'으로 규정한 《우리의 길》로 축출된 후 USPD를 거쳐 SPD 좌파 지도자가 되었고, 트로츠키는 그를 '독일에서 유일하게 잃을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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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SPD 입당, 프랑크푸르트에서 변호사 개업
1913로자 룩셈부르크의 변호인으로 반군 선동 재판 변론
1915–1918스파르타쿠스단 창립 참여, 침머발트 좌파·『Spartakusbriefe』 편집
1937년 7월, 바르셀로나에서 KPO 대원 6명이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체포되자, 탈하이머와 브란들러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체포된 동지들에 대한 모든 정치적·개인적 보증을 떠맡는다. 그들은 반파시스트이며 혁명가로서, 스페인 혁명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될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독일공산당(KPD) 창립 멤버이자 1920년대 초반 당의 주요 이론가. 1923년 '독일 10월' 봉기 계획 당시 하인리히 브란들러와 함께 당을 이끌었으나 실패 후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모스크바 쑨원대학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강의했으며, 부하린과 함께 코민테른 강령 초안 작업에 참여했다. 1929년 KPD에서 축출된 후 브란들러와 함께 공산당 반대파(KPO)를 창립하고, 보나파르트주의에 기초한 독자적 파시즘 이론을 발전시켰다. 1933년 이후 프랑스·쿠바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반파시스트 저술을 이어갔다.
미국인 KMT 지지자들이 쑨원에게 '보로딘이 가명이며 본명은 그루젠베르크라는 걸 아십니까' 하고 경고하자, 쑨원은 이렇게 답했다. '압니다. 라파예트요.'
쑨원의 정치고문이자 제1차 국공합작을 설계한 코민테른의 지구적 요원.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6세에 분트에, 1903년 볼셰비키에 가담했으며, 1905년 혁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에서 망명 러시아인 학교를 운영했다. 1919년 멕시코 초대 소비에트 영사로 멕시코공산당 창립을 도왔고, 1923년부터 광저우에서 국민당을 레닌주의 전위정당으로 개조하고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했다. 그가 성사시킨 국공합작은 중국공산당이 대중정당으로 성장할 발판이 되었으나, 1927년 장제스의 숙청으로 와해되었다.
1918년 9월 16일, 아타만 칼미코프의 백군에게 끌려나가 총살당하기 직전 그녀의 마지막 외침: '자유와 독립을 조선에!'
시베리아 한인 이주민의 딸로 태어나 1916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최초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다. 레닌의 지시로 극동에 파견되어 하바롭스크 소비에트 외무인민위원을 지내고 이동휘와 함께 한인사회당을 창당했으며, 조선인 적위대를 조직해 백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1918년 33세로 처형당한, 러시아 혁명과 조선 독립운동을 잇는 상징적 인물이다.
1917년 4월 20일, 밀류코프의 각서에 격분한 15,000명의 무장 군중이 마린스키궁 앞에 집결하자, 고츠와 함께 파견된 스코벨레프는 그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바쿠의 유복한 몰로칸 상인 가문 출신으로, 빈에서 트로츠키의 『프라우다』 편집을 도우며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17년 2월혁명 직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부의장에 올랐고, 4월 위기 때 고츠와 함께 마린스키궁 앞 군중을 진정시키러 파견되었으며, 5월 5일 제1차 연립정부 노동장관으로 입각했다. 10월혁명에 반대했으나 1922년 귀국·입당하여 대외무역 분야에서 일했고, 대숙청 속에 1938년 총살당했다.
3·1운동을 변론한 민족인권변호사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된 진보적 민족주의자
3·1운동 재판에서 '공소불수리론'을 제출하자 일제 검사들이 법정에서 반발했고, 그 광경은 전국 신문에 보도되어 허헌을 항일변호사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대한제국 최초의 변호사(1907)로, 3·1운동 민족대표 47인을 변론하며 김병로·이인과 함께 '3대 민족인권변호사'로 불렸다. 1927년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에 피선되어 항일민족전선을 이끌었고,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과 조선인민공화국 국무총리를 지냈다. 1946년 남조선로동당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1948년 남북협상을 계기로 월북, 최고인민회의 초대 의장과 김일성대학 초대 총장에 취임한 진보적 민족주의자로서 민족운동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한 조선 근대사의 가교였다.
블라디미르 보이트인스키는 러시아 혁명가이자 경제학자로, 노동운동과 시장 이론을 함께 탐구했다. 1905년 혁명기의 볼셰비키 활동과 시베리아 유형을 거쳐 1917년에는 멘셰비키로 전향해 소비에트와 임시정부 사이의 협력을 모색했다. 북부전선 위원으로서 6월 공세 준비에 관여했지만, 병사들의 전쟁 피로와 명령 거부를 직접 마주하며 혁명적 군대의 한계를 드러냈다. 10월 이후 망명한 그는 국제 노동·경제 연구자로 활동하며 민주주의와 사회개혁의 길을 주장했다.
「우리는 이 나라 노동이 시도한 가장 거대한 행동에 착수하고 있다 — 그 끝은 아무도 모른다!」 1919년 시애틀 총파업 직전 사설
미국 네브래스카 출신 좌파 저널리스트이자 공산주의자. 시카고대 철학 박사 후 시애틀 총파업(1919)을 취재하며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1921년 소련으로 건너가 1930년 영자신문 『모스크바 뉴스』를 창간했다. 1946년 옌안에서 마오쩌둥을 인터뷰해 '모든 반동파는 종이호랑이'라는 유명한 발언을 기록했고, 1949년 소련에서 첩자 혐의로 추방되었다가 1955년 명예 회복 후 중국에 정착했다. 이후 '외국인 친구'로서 문화대혁명기까지 마오의 중국을 취재하며 30권 이상의 저작을 남겼다. 20세기 공산주의 혁명들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서방에 전한 독보적 증언자다.
“헝가리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도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배신했다.” — 공화국 붕괴 직전 마지막 연설, 1919년 8월 1일
옛 트란실바니아 출신 유대계 언론인에서 혁명가로 전향한 쿤 벨러는 1919년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의 실질적 창설자이자 지도자였다. 유럽사상 두 번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133일간 이끌며 산업 국유화를 추진했으나, 토지 분배 대신 국영농장을 택해 농민의 지지를 잃고 협상국 개입 속에 붕괴했다. 망명 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와 선전선동부에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이론가로 활동했고, '제3시기' 좌경노선을 지지하다 1935년 인민전선 전환을 놓고 디미트로프와 대립했다. 1937년 대숙청에 휩쓸려 이듬해 총살, 1955년 복권되었다.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 수차례 테러를 겪으며 자식들에게 남긴 말.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백의사의 총에 쓰러졌다.
1918년 신한청년당을 결성,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을 주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창립에 참여하고, 1922년 모스크바에서 레닌·트로츠키와 면담했으며 쑨원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했다. 1945년 8월 총독부로부터 평화적 치안권 이양을 받아내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이 되었다. 1946~47년 김규식과 좌우합작운동을 이끌며 통일정부를 추진했으나, 극우단체 백의사에 암살당했다. 남북 모두가 공식 추모한 유일한 정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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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 결성, 당수 취임
19192·8독립선언 주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1920–1922고려공산당 상하이파 입당; 모스크바 원동피압박민족대회 참석, 레닌·트로츠키 면담
1919년 4월 19일, 흑해의 전함 장 바르호 위에 붉은 깃발이 올랐다. 백군 지원을 거부한 수병들의 반란 지도자로 체포된 앙드레 마르티는 콘스탄티노플 군법회의에서 중노동 20년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 해군 기관사로 복무하던 1919년, 백군 지원을 거부하며 전함 장 바르호의 반란을 이끌어 중노동 20년형을 받았다. 1923년 사면 후 프랑스 공산당에 합류해 하원의원·중앙위원을 지냈고, 1935년 코민테른 서기 겸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국제여단 정치위원으로서 알바세테에서 여단을 조직했고, 엄격한 규율로 '알바세테의 도살자'라 불렸다. 1952년 PCF에서 축출되었으나 30년간 프랑스 공산주의와 코민테른 국제 활동의 중심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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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프랑스 해군 기관병 입대
1919흑해 함대 반란 지도 — 전함 장 바르호에서 백군 지원 거부, 체포 후 중노동 20년형
암살자들이 권총을 겨누자 "쏘지 마시오. 나는 그냥 취사병이오"라고 말해 살아남았고, 병사들은 그를 '취사반장'이라 불렀다.
중국 공산혁명의 군사적 승리를 이끈 총사령관이다. 1928년 징강산에서 마오쩌둥과 합류해 '주-마오 군대'를 형성했고, 게릴라전을 전략 차원으로 끌어올려 대장정·항일전쟁·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부주석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으며, 1955년 10대 원수 중 첫 번째로 임명되었다. 군벌 장군에서 아편을 끊고 공산주의자로 거듭난 그의 삶은 중국 혁명의 궤적을 가장 완전하게 체현했다.
세르게이 바그다체프는 1903년 입당한 볼셰비키 실천가로, 제정기의 탄압과 망명을 거치며 당 조직 활동을 이어 갔다. 1917년 4월 그는 페트로그라드 위원회의 이름으로 임시정부 타도 구호를 내건 전단을 발표했지만, 중앙위원회 결정과 어긋나 당 규율 위반으로 징계를 받았다. 그의 성급한 구호는 소비에트 권력 이양을 지지하면서도 대중 속에서 실천 가능한 요구를 따져야 했던 혁명기의 긴장을 보여 준다.
「권력은 차르의 사형집행인들 손에서 빼앗아, 공산당 사형집행인들 패거리에게 넘기라고 빼앗은 게 아니다」 — 봉기 중 배포한 전단에서
차르 치하에서 20년 중노동형을 선고받고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복역한 사회혁명당 전투원. 1917년 2월 혁명으로 석방된 후 키르사노프 현 민병대장을 지냈으나, 볼셰비키의 식량강제징발과 지방 통치에 반발하여 1918년 지하로 잠적했다. 1920년 8월 탐보프 농민봉기를 장악해 약 20개 연대 규모의 유격군을 조직하고 '노동농민동맹'을 바탕으로 한 대안정부를 수립했으며, 봉기는 그의 이름을 따 '안토놉시나'로 불렸다. 1922년 6월 GPU 부대에 포위되어 동생 드미트리와 함께 총격전 끝에 사망했다.
1918년 11월 「볼셰비즘의 승리」에서: "세계 각지에서 볼셰비즘의 승리의 깃발이 펄럭이고 승리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것을 보라. (…) 오늘 이후로 이곳은 더 이상 부르주아지의 세계도, 자본주의의 세계도, 제국주의의 세계도 아니다. 이것은 노동자의 세계, 볼셰비즘의 세계다!"
중국 마르크스주의 선구자이자 공산당 공동 창립자. 베이징대 도서관장으로 마오쩌둥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전했고, 5·4운동을 이끌며 러시아 혁명을 옹호했다. 국공합작을 설계했고 1927년 장쭤린에 처형되었다.
1918년 벨리키 우스튜크의 체카 지하실에서 사형을 기다리며 쓴 공개서한에서 소로킨은 에스에르 탈당과 정치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러시아 혁명기 사회주의혁명당(에스에르)의 주요 지도자로, 케렌스키 총리의 비서, 제헌의회 의원을 지냈다. 차르 체제에서 세 차례 투옥되었고 볼셰비키 집권 후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22년 '철학의 배'로 추방되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1930년 하버드대에 사회학과를 창설하고, 사회 계층화·사회 이동성 연구와 『사회문화동학』에서의 순환 이론으로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회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체카 심문에서: '나는 오늘 레닌에게 총을 쐈다. 나 혼자 한 일이다. 나는 그를 혁명의 배신자로 간주한다. 나는 제헌의회를 지지했고 지금도 지지한다.'
볼린주 유대인 교사 가정에서 태어난 파니 카플란은 16세에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하다 키예프 총독 암살 기도 혐의로 체포되어 시베리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다. 11년간의 수감 중 실명과 회복을 반복했으며, 마리야 스피리도노바의 영향을 받아 사회혁명당(SR)에 합류했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석방된 후, 볼셰비키의 제헌의회 해산을 계기로 레닌을 혁명의 배신자로 규정하고 1918년 8월 30일 모스크바 미헬손 공장에서 권총 세 발을 발사했다. 이 사건은 같은 날 모이세이 우리츠키 암살과 함께 적색 테러의 직접적 발단이 되었으며, 그녀는 나흘 뒤 크렘린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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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키예프 총독 수호믈리노프 암살 기도 폭탄 음모로 체포됨
1907–1917시베리아 네르친스크 말체프·아카투이 교도소에서 무기징역 복역, 복역 중 실명과 부분 회복 반복
19172월 혁명 후 임시정부 사면으로 석방, 사회혁명당 활동 재개
1918.08.30모스크바 미헬손 공장에서 연설 마친 레닌에게 브라우닝 권총 세 발 발사, 중상 입힘
“나는 투르키스탄 군단을 이끌라는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더 이상의 협력도 거부한다. 내 결정의 모든 결과를 나는 알고 있다.” — 리벤트로프에게 보낸 편지, 1941년
무스타파 쇼카이는 러시아 제국 붕괴 후 중앙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자치 정부인 코칸트(투르키스탄) 자치 정부를 이끈 카자흐 민족주의 정치 지도자였다. 페트로그라드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국가두마 무슬림 분과 서기로 활동하며 제정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식민 정책에 맞섰다. 1918년 볼셰비키가 코칸트를 무력으로 진압하자 프랑스로 망명하여 《야쉬 투르키스탄》 등 간행물로 투르키스탄 독립 사상을 국제적으로 전파했으며, 1941년 나치가 투르키스탄 군단 조직을 제안하자 포로수용소의 실태를 목격하고 이를 거부했다. 그 직후 베를린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으나, 오늘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독립 선구자로 재평가되고 있다.
1920년 5월 10일, 런던 항구. 폴릿은 부두 노동자들을 설득해 폴란드로 향하던 무기 수송선 SS 졸리 조지호의 군수품 선적을 막아냈다. 배는 무기를 내린 채 출항했다.
영국 공산당(CPGB) 창립 당원이자 25년 넘게 총비서를 지낸 영국 공산주의의 중심 인물. 1920년 런던 항만 노동자들을 설득해 폴란드로 향하는 군수품 선적을 저지하며 'Hands Off Russia' 운동의 얼굴이 되었다. 스탈린의 개인적 승인으로 총비서에 올라 당의 '코드 홀더'로서 모스크바와 직접 비밀 무선 연락을 유지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을 지원했고, 전후 평화적 의회주의 노선을 담은 《영국의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공동 집필했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에도 거실의 스탈린 초상화를 끝내 떼지 않았다.
“좌파 놀음을 하며 '중도파 사냥'에 열중하는 마슬로프 동지는 열정은 많으나 분별이 부족하다” — 레닌, 〈독일 공산주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를 직접 이름으로 지목하며 비판했다 (1921년 8월 14일).
우크라이나 유대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소년기에 독일로 이주했다. 피아노를 포기하고 아인슈타인과 플랑크 아래서 자연과학을 공부했으나, 1차대전을 겪으며 정치에 뛰어들어 KPD 창립에 가담했다. 루트 피셔의 평생 동반자로서 1924년 당 의장에 올랐고, '볼셰비키화'를 밀어붙여 초좌익 전환을 이끌었으나 대량 이탈도 초래했다. 1926년 스탈린과 텔만에 의해 제명된 뒤, 레닌분트·트로츠키 협력·국제그룹을 오가며 반스탈린주의 좌파의 독자적 길을 찾아 헤맸다. 1941년 아바나 거리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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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KPD 창립 당원 — 스파르타쿠스단에서 러시아 전쟁 포로 대상 선전 활동
1920–1923KPD 중앙위원 — 피셔와 함께 베를린 좌파 지도, 《로테 파네》 외교편집장
누리야 포즈데라츠는 교사 출신의 보스니아 무슬림 정치가로, 카진 지역에서 대중적 기반을 쌓았다. 그는 우스타샤 정권의 협력 제안을 거부하고 세르비아인과 유대인 박해에 맞섰으며, 아내 데블레타와 함께 유대인 피란민을 숨겨 구했다. 1942년 아브노이 초대 회의에서 집행위원회 부의장으로 선출된 그는 민족적으로 다원적인 해방전선의 대표성을 보여 주었다. 수체스카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1943년 사망했다.
라이프치히에서 돌아온 생리학자, 공화국의 금을 모스크바로 보내고 끝까지 항전을 택한 마지막 총리
1938년 5월, 프랑코에게 내민 「13개 조항」. 스페인의 완전한 독립, 보통선거로 선출되는 정부, 지역 자치, 양심의 자유, 토지개혁, 그리고 전쟁 행위에 대한 보복 금지. 프랑코의 답은 무조건 항복이었다.
생리학자 출신의 스페인 사회노동당(PSOE) 정치인. 킬과 라이프치히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스물아홉에 마드리드 대학 생리학 교수가 되어 세베로 오초아를 길러낸 실험실을 세웠으며, 1929년 PSOE에 입당해 1931년 하원의원이 되었다. 1936년 9월 재무장관으로 입각해 국립은행의 금 준비를 카르타헤나로 옮기고 이를 소련에 맡기는 결정에 서명했고, 바르셀로나 5월 사태 뒤인 1937년 5월 총리에 올라 「저항이 곧 승리」를 내걸고 인민군의 중앙집권화를 밀어붙였다. 그가 공산당과 소련 고문단에 의존한 것은 서방의 불개입 아래 무기를 살 곳이 그곳뿐이었기 때문이었으나, 이 때문에 「모스크바의 꼭두각시」라는 비난을 평생 받았다. 1938년 5월 「13개 조항」으로 협상을 시도했으나 프랑코는 무조건 항복만을 고집했고, 1939년 3월 카사도 대령의 쿠데타로 그는 스페인을 떠났다. 1946년 PSOE에서 제명됐고, 2008년에야 당으로부터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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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카나리아 제도 라스팔마스의 부유한 가톨릭 가정에서 출생
1906–1915독일 킬과 라이프치히에서 의학·생리학 수학, 1912년 의학박사
1922스물아홉에 마드리드 대학 생리학 교수, 세베로 오초아를 배출한 실험실 창설
1929–1931PSOE 입당, 제2공화국 수립과 함께 라스팔마스 선거구 하원의원 당선
1936.09라르고 카바예로 내각 재무장관 취임, 금 준비를 카르타헤나로 이송
1936.10금 준비 510톤을 소련에 맡기는 결정에 서명, 이른바 「모스크바의 금」
1937.05.17바르셀로나 5월 사태 뒤 총리 취임: 「하나의 전쟁, 하나의 군대, 하나의 지휘」
1938.04–1939.03국방장관 겸임, 「저항이 곧 승리」 노선으로 에브로 공세 지휘
1938.05「13개 조항」 발표로 협상 시도, 프랑코가 거부
1938.09–10국제연맹에서 국제여단의 일방적 철수를 발표하고 바르셀로나 고별 행진 주관
1946년 1월 도쿄 당사에 도착한 노사카를 맞으려 기모노와 양장 차림의 젊은 여성들이 마치 스타를 기다리는 팬처럼 모여들었다고 한 신문이 전했다.
일본공산당 창립(1922년)에 참여하고 영국공산당 창립대회(1920년)에도 런던 대표로 출석한 국제 공산주의자로,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미국·중국에서 대일 첩보망을 운영했다. 1940~1945년 옌안에서 일본인민해방연맹을 이끌며 일본군 포로를 공산군 전향 병력으로 재편했고, 전후 일본공산당을 '사랑받는 당'으로 포장해 평화적 혁명 노선으로 35석의 의석을 얻어냈다. 1958년부터 24년간 당 의장을 지내며 안보투쟁과 중·소 분열 속 당의 독자 노선을 유지했으나, 1992년 스탈린 시대 동료 밀고 사실이 폭로되어 자신이 창립한 당에서 제명되었다.
미군기가 산디노 진영을 폭격하는 가운데, 마르티는 타자기를 밀치며 말했다. "역사가 펜으로 쓰이지 못할 때는 총으로 쓰여야 한다." 그리고 소총을 들고 미군기를 향해 사격했다.
엘살바도르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가로, 중미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자이다. 1930년 엘살바도르 공산당(PCS)을 공동 창건하고 1932년 대공황으로 몰락한 농민·원주민의 무장봉기를 이끌었으나 마르티네스 군부의 라 마탄사 학살로 진압·총살당했으며, 사후 그 이름은 FMLN에 계승되어 중미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삶은 값비싸지 않으며, 죽음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명예와 이상에 맞게 사는 것이다.”
베르티 알브레히트는 여성해방과 반파시즘을 결합한 프랑스의 활동가로, 피임과 낙태의 권리를 주장하며 여성주의 잡지를 만들었다. 나치즘의 위험을 일찍 경고하고 독일인 망명자를 도운 일은 앙리 프르네와의 협력, 그리고 지하 저항운동 콩바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Les Petites Ailes와 Vérités의 제작을 맡고 콩바의 사회사업을 조직하며 체포와 투옥, 탈출 뒤에도 활동을 계속했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고문받은 뒤 프레즈네 감옥에서 숨졌고, 사후 해방의 동료로 추서되었다.
1939년 3월 5일 밤, 라디오 마이크 앞에 선 카사도는 네그린 정부가 공산당 독재를 준비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국방평의회의 수립을 선포했고, 마드리드에서는 곧바로 시가전이 시작됐다.
스페인 공화국군의 기병 장교로, 내전 발발 후 공화국 진영에 남아 인민군의 작전·훈련을 맡으며 중부군 사령관까지 올랐다. 전쟁이 이미 졌다고 확신한 그는 1939년 3월 5일 마드리드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네그린 정부를 전복하고 미아하 장군을 내세운 국방평의회를 세웠으며, 공산당의 정권 장악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프랑코와의 평화 협상을 시도했다. 프랑코는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했고, 카사도는 영국 군함으로 탈출해 영국과 베네수엘라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1961년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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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세고비아주 나바데라아순시온에서 출생
1907–1911바야돌리드 기병사관학교 졸업, 소위 임관
1920–1935기병대 장교로 근무, 참모교육 이수, 모로코 참전, 대통령 경호대장 역임
1936–1937인민군 작전과장·참모학교장·혼성여단 편성 담당, 기병 감찰관
1938.05중부군 사령관 취임, 대령 진급
1939.03.05–12네그린 정부에 대한 쿠데타 주도, 국방평의회에서 국방 담당
1939–1961영국과 베네수엘라에서 망명 생활, BBC 해설자, 네슬레 직원으로 근무
1961–1968스페인 귀국, 군사반란 혐의로 기소됐다가 무죄, 1968년 마드리드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1956년 흐루쇼프는 제20차 당대회 개막에서 스탈린·고트발트와 함께 '도쿠다 규이치'의 이름을 부르며 기립 추모를 요청했고, 전당대회가 일어섰다.
일본공산당 창립(1922년) 원년 멤버로,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8년간 비전향으로 복역한 후 1945년 초대 서기장으로 당을 재건했다. 1950년 코민포름의 평화혁명노선 비판을 계기로 소련·중국과 보조를 맞춘 무장투쟁으로 전환했고, 공직추방 후 중국으로 망명해 베이징기관에서 당을 지휘하다 1953년 사망했다.
비센테 로호는 스페인 공화국에 충성한 직업군인으로, 군사 전문성과 가톨릭 신앙을 공화국의 방어에 결합한 인물이다. 그는 마드리드 방어를 조직하고 자라마, 과달라하라, 브루네테, 에브로 전투의 작전을 계획하며 인민군의 핵심 참모가 되었다. 1939년 프랑스에서 후퇴한 뒤 네그린의 귀환 명령을 거부하고 난민 병사들을 돌보는 길을 택했으며, 이후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1957년 귀국했을 때 프랑코 정권은 그를 군사반란 혐의로 기소했지만 형을 집행하지 않고 곧 사면했다.
"경호대는 피곤하다" 한마디로 제헌의회를 해산시킨 아나키스트 수병: 24세에 전사한 혁명의 아이콘
1918년 1월 5일 새벽 4시, 타브리다궁전. "경호대는 피곤하다. 회의를 중지하고 전원 퇴장하라." 이 한마디로 13시간 동안 이어진 제헌의회는 영원히 문을 닫았다.
발트함대 수병 출신 아나키스트 혁명가. 1917년 10월 겨울궁전 습격에 참가했고, 1918년 1월 5일 타브리다궁전 경호대장으로서 "경호대는 피곤하다"는 한마디로 러시아 제헌의회를 해산시켜 혁명의 신화가 되었다. 내전기에는 기관총 사수와 장갑열차 지휘관으로 돈·크라스노프·데니킨 부대와 싸웠으며, 볼셰비키당에 가입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919년 7월 데니킨군 포격에 전사한 뒤 소련 문화에서 노래·시·영화의 주인공으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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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제2발트함대 승무원으로 징집, 기관학교 입학
1916체포 우려로 탈영, 흑해 상선에서 가명으로 화부·기관조수로 근무
1917.5제1차 발트함대 대회(중앙발트) 대표 선출
1917.6두르노보 저택 방어전 가담, 체포되어 14년형 선고; 9월 크레스티 교도소 탈옥
1917.10해군혁명위원회 위원, 겨울궁전 습격 및 아드미랄테이스트보 점령 지휘
1918.1타브리다궁전 경호대장 — 제헌의회 해산
1918.3비르줄라 요새화 지구 사령관, 오스트리아-독일군과 교전
1918.6–9키크비제 사단 예하 제1옐란스키 보병연대장, 차리친 전선에서 크라스노프 코사크군과 교전
1918.10–1919.4오데사 지하활동(빅토르스 가명), 봉기 후 상선노조 위원장
1919.5–7장갑열차 후댜코프호 지휘관; 그리고리예프 반란 진압, 데니킨 전선 전투 중 포격 전사
“조국의 배신자가 침략자들의 손에 내 유해를 넘기지 않게 하라.” — 산디노 선언(1927)
니카라과의 혁명가이자 게릴라 지도자. 1927년부터 1933년까지 미군 점령에 맞서 '국가주권 수호군(EDSN)'을 이끌며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반제국주의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1934년 소모사가 이끄는 국가경비대에 암살되었고, 그의 유산은 1961년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으로 이어져 1979년 소모사 독재를 전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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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미군 개입과 셀레돈 장군 전사 목격 — 반제의식 형성
1921–1926멕시코 망명 — 스탠더드오일 정유공장 노동, 멕시코 혁명 사상 접촉
1926–1927니카라과 귀국 — 금광 노동자 중심 의용군 조직, 입헌전쟁 참전
1927.7에스피노네그로 협정 거부 — 산 알비노 선언으로 대미 게릴라전 개시
1927–1933국가주권 수호군(EDSN) 총사령관 — 미 해병대 상대 6년 게릴라전 지휘
“우리는 새로운 유형의 민주공화국, 깊은 사회적 내용을 지닌 민주적 의회공화국을 위해 싸우고 있다.” — PCE 중앙위원회 확대회의 보고, 발렌시아, 1937년 3월 5일
스페인공산당(PCE) 서기장으로서 인민전선 전략을 주도하며 당을 소수 분파에서 공화국 진영의 핵심 대중정당으로 키웠다. 세비야의 빵집 노동자 출신으로 아나키스트 노동운동에서 활동하다 1927년 PCE에 입당, 1932년 서기장에 올랐다. 1935년 제7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와 함께 반파시스트 통일전선 노선을 관철했으며, 내전 중에는 “새로운 유형의 민주공화국”을 내걸고 군사적 승리에 당의 전 역량을 집중했다. 말기 위암으로 소련에서 투병하다 1942년 트빌리시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산은 이후 수십 년간 스페인 공산주의 전통의 토대가 되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파업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 『르 포퓔레르』 1면에 실은 기고의 제목이자 결론, 1936년 5월 27일
교사 출신의 사회당(SFIO) 좌파 지도자. 1935년 당내 분파 「혁명적 좌익」을 결성해 인민전선을 지지하되 그 너머의 혁명적 출구를 주장했고, 1936년 5월 파업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 『르 포퓔레르』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를 실어 논쟁의 한복판에 섰다. 블룸 총리실의 공보 업무를 맡으면서도 급진화를 멈추지 않았고, 1938년 당에서 제명되자 노동자농민사회당(PSOP)을 세웠다. 전쟁 중 멕시코에 망명했고, 전후 SFIO에 복귀해 죽을 때까지 당내 좌파와 반식민주의 진영에 섰다.
“우리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레닌그라드에는 테러가 지배하고 있다.” — 마슬로프에게 보낸 편지가 소련 검열에 적발되며 공개 낭독되었고, 이것이 스탈린과의 결정적 단절이 되었다 (1926년 2월, 코민테른 특별회의).
독일공산당(KPD) 공동의장(1924–1925)으로 유럽 주요 공산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빈 철학 교수의 딸로 태어나 1918년 오스트리아 공산당을 공동 창립했고, 베를린에서 마슬로프와 함께 KPD 극좌파를 이끌며 1923년 봉기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했다.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트로츠키를 공개 비난할 만큼 치열한 파벌 투사였으나, 1926년 스탈린에게 복종을 거부하며 축출된 뒤 평생 반스탈린주의 좌파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망명지 미국에서 정보기관 협력자로 전락했다가 말년에 다시 공산주의로 회귀하는 극적인 궤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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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오스트리아 공산당(KPÖ) 공동 창립 — 당원 번호 1번
1919–1921베를린으로 이주, KPD 입당
1921–1923베를린 지역당 지도자 — 마슬로프와 함께 KPD 좌파의 '공세 이론' 주창
코민테른 3대 지도기구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비볼셰비키. 그리고 최초의 스탈린 비판 전기 저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지 열흘 뒤인 1917년 11월 17일, 스물두 살의 수바린은 이렇게 썼다: "레닌과 그 동지들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볼셰비키와 그 지도자의 독재가 될 것이 두렵다. 이는 러시아 노동계급에게, 그리고 이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재앙이 될 수 있다. […] 우리가 바라는 것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합의로 안정된 권력을 조직하고, 그것이 한 인간의 권력이 아니라 진정한 인민의 권력이 되는 것이다." — 「최대강령파 코뮌」, 『세 푸아 디르』 제78호
코민테른 3대 지도기구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비볼셰비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 트로츠키 옹호로 제명된 후 1935년 최초의 스탈린 비판 전기를 출간, 소비에트학의 선구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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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프랑스군 동원 —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전선 참호전 경험
1916SFIO 입당, 반전 소수파 기관지 《Le Populaire》에서 활동 — '수바린' 필명 채택
1919제3인터내셔널 위원회 활동 — 코민테른 선전물 배포
1920.5'무정부주의 음모' 혐의로 체포 — 산테 교도소 수감 중 《Bulletin Communiste》 집필
1936년 바르셀로나에서 캐나다 기자 피에르 반 파선에게 한 말로 전해진다. 「우리는 폐허가 조금도 두렵지 않다. 우리는 이 땅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자기 세계를 부수고 물러갈지 몰라도,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이 가슴속에 품고 있다.」 널리 인용되지만 이 인터뷰의 정확한 문구를 두고는 논쟁이 있다.
레온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금속공. 1917년 총파업으로 해고된 뒤 프랑스로 달아나 아나키즘을 받아들였고, 로스 솔리다리오스와 로스 에란테스에서 은행 「수용」과 국왕 암살 시도를 거치며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감옥을 전전했다. 1936년 7월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을 이끌고 아타라사나스 병영을 함락시켜 카탈루냐에서 군부 반란을 무너뜨렸고, 이 전투에서 오랜 동지 프란시스코 아스카소를 잃었다. 곧 6천 명 규모의 두루티 종대를 꾸려 아라곤 전선으로 나가면서 해방 지역에서 토지와 공장의 집단화를 밀어붙였다. 11월 마드리드 방어에 합류했다가 19일 카사데캄포 전선에서 총상을 입고 이튿날 숨졌으며, 총알의 출처를 두고는 적의 사격, 아군의 오발, 그의 자동소총 오작동이라는 설이 지금도 갈린다. 바르셀로나 장례 행렬에는 수십만 명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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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레온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여덟 남매 중 둘째로 출생
1913–1917금속노조(UGT) 가입, 1917년 총파업 참여로 북부철도에서 해고되고 프랑스로 도피
1918–1919망명지에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고 귀국해 CNT 가입
1920–1922로스 후스티시에로스 결성, 알폰소 13세 암살 계획이 발각되어 사라고사로 피신
1922–1923아스카소·가르시아 올리베르와 로스 솔리다리오스 조직, 히혼 스페인은행 「수용」
1924–1926쿠바·멕시코·칠레·아르헨티나를 도는 「수용」 원정, 파리에서 체포되어 라상테 감옥 수감
1927–1931석방 후 벨기에 체류, 이베리아아나키스트연맹(FAI) 활동; 제2공화국 선포와 함께 바르셀로나 귀환
1931–1936친화그룹 「노소트로스」 결성, 잦은 체포와 유형 속에 CNT 좌파의 얼굴이 됨
1936.07.19–20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을 이끌고 아타라사나스 병영 함락, 동지 프란시스코 아스카소 전사
1936.07–11두루티 종대를 편성해 아라곤 전선으로, 해방 지역의 토지·공장 집단화 추진
1936.11.14종대 일부를 이끌고 마드리드 방어전에 합류
1936.11.19–20카사데캄포 전선에서 총상을 입고 이튿날 사망, 총알의 출처는 지금도 논쟁
1936년 체포된 뒤 마우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고, POUM은 그의 부재 속에서 안드레우 닌의 지도 아래 놓였다.
호아킨 마우린은 스페인의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노동운동가로, 카탈루냐에서 대중적 혁명정당의 길을 모색했다. 그는 노동자농민블록을 이끌며 공산당의 스탈린주의 노선과 결별했고, 1935년 안드레우 닌과 함께 POUM을 창설해 초대 총서기가 되었다. 1936년 군사봉기 때 국민파 지역에 갇혀 체포된 뒤 내전 전 기간을 감옥에서 보냈으며, 그의 부재 속에서 닌이 당을 이끌었다. 석방과 망명 뒤에는 뉴욕에서 문필과 통신 사업으로 활동하며 스페인 혁명의 경험을 기록했다.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 후 더트는 말했다. '스탈린이라는 태양에도 당연히 약간의 흑점은 있다.' 소련 체제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바로잡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덧붙였다.
영국 공산당 창립 당원으로 반세기 동안 수석 이론가를 지낸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저널리스트. 1934년 《파시즘과 사회혁명》에서 파시즘을 독점자본주의 위기의 극단적 형태로 분석했고, 1940년 《인도 투데이》로 마르크스주의 인도사 서술을 개척했으며,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반전 노선을 둘러싸고 해리 폴릿을 대신해 총서기를 역임했다.
「기회주의, 합법주의, 의회 환상이 있었다… 우리가 당 앞에서 용기 있게 이 자기비판을 수행한다면 대중 사이에 투쟁에 유리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20구 파리에서 레옹 블룸을 꺾고 국회의원이 된 이후 37년간 프랑스 공산당 지도부에서 모리스 토레즈의 2인자로 활동한 정치인. 제2차 세계대전 중 점령 하 프랑스에서 지하당을 지휘했으며, 전후 국민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1947년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PCF의 참여 정부 노선을 '의회 환상'이었다고 자인하며 마셜 플랜에 대한 투쟁적 반대로의 전환을 상징했다. 1969년 대통령 선거에서 21.3%를 득표, 프랑스 공산당 사상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군복을 입는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이제부터 내 행동이 내 성실함을 증명할 것이다」
마드리드 출신의 벽돌공으로 CNT 건설노조를 이끌다 내전 직전 투옥되었고, 반란 발발과 함께 풀려나 과달라하라·쿠엥카에서 봉기를 진압하는 종대를 조직했다. 제14사단을 거쳐 제4군단장이 된 그는 과달라하라 전투에서 이탈리아 지원군단을 격퇴하며 공화국 진영에서 손꼽힌 아나키스트 지휘관이 되었다. 1939년 3월 네그린 정부의 공산당 의존에 반발해 카사도의 쿠데타를 지지했고, 공산군이 마드리드를 장악해 가던 순간 메라의 제4군단 예비대가 시내로 진입해 3일 만에 저항을 분쇄함으로써 전쟁의 종결 경로를 결정지었다.
금속노동자와 노동조합 활동가로 출발한 샤를 티용은 1919년 해군 mutiny에 참여한 뒤 프랑스 공산당과 CGTU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는 1940년 독일 점령에 맞선 민족해방과 노동계급의 단결을 호소했고, 1941년부터 공산주의 무장조직을 통합해 프랑스 유격대·의용군(FTP)을 이끌었다. 해방 뒤에는 장관과 의원으로 국가 재건에 참여했지만, 당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1952년 권력에서 밀려났고 1970년 공산당에서 제명됐다.
내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내 희곡들을 이해했다 — 마르크스야말로 내 희곡의 유일한 관객이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극작가이자 서사극의 창시자였다. 1920년대 후반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한 후, 감정적 몰입을 거부하고 관객의 비판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낯설게 하기'와 변증법적 연극론을 정립했으며, 《서푼짜리 오페라》·《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사천의 선인》 같은 작품들로 자본주의와 전쟁을 무대 위에서 해부했다. 1933년 나치를 피해 스칸디나비아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1947년 HUAC 조사 후 유럽으로 돌아와 1949년 동베를린에 헬레네 바이겔과 함께 베를리너 앙상블을 창립해 전후 세계 연극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베이징에서 김익상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오. … 우리가 먼저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김익상은 그 자리에서 의열단에 가입했고, 수주 뒤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졌다.
의열단을 조직해 6년간 일본 식민통치 기관에 대한 폭탄 투척과 요인 암살을 지휘한 무정부주의적 독립운동가. 이후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해 연합전선을 모색했으며,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광복군 부사령관 겸 군무부장으로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해방 후 좌우합작에 힘쓰다 여운형 암살로 남한 내 입지가 무너지자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해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을 역임했으며, 1958년 숙청당했다. 의열투쟁에서 통일전선 정치로, 다시 분단 후 조선 내각까지, 조선 혁명 진영 전체를 가로지른 유일한 인물이다.
"다행히도 역사는 인민이 쓰는 법이다" — 숙청되어 카이펑으로 압송되던 1969년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말.
중국공산당 노동운동의 초기 조직자로서 안위안 탄광 파업을 지도하고 상하이·우한에서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1939년 「공산당원의 수양」을 집필해 마르크스주의 당 건설 이론에 독창적으로 기여했으며, 1945년 당 규약에 마오쩌둥 사상을 명문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에 취임해 대약진 실패 후 경제 조정을 주도하며 '삼자일포' 등 실용주의 노선을 밀어붙였으나, 이는 마오와의 치명적 분열로 이어졌다. 문화대혁명 발발 후 '자본주의 노선의 사령관'으로 몰려 1968년 모든 직위에서 해임·제명되었고 1969년 구금 중 사망했으나, 1980년 덩샤오핑에 의해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로 전면 복권되었다.
1937년 스페인 내전을 계기로 〈올 맨 리버〉의 체념적 가사를 바꿔 불렀다: "하지만 나는 계속 웃는다 / 우는 대신에 / 나는 계속 싸워야 한다 / 죽는 그날까지." 웨일스에서 "예술가는 편을 들어야 한다. 나는 선택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고 선언했다.
미국의 베이스-바리톤 가수이자 배우, 전미 풋볼 올아메리칸 출신의 사회주의 운동가. 할렘 르네상스의 스타로 《쇼 보트》와 《오셀로》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1934년 소련 방문 후 평생 사회주의와 반식민주의를 지지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를 후원하고 아프리카문제위원회를 이끌었다. 매카시 시대 여권이 박탈되고 블랙리스트에 올랐으나 소련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고, 1958년 대법원 판결로 여권을 되찾았다. 그의 예술과 정치적 헌신은 흑인 해방운동과 국제 반제국주의 투쟁을 잇는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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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919러트거스대학, 미식축구 올아메리칸 2회, 졸업생 대표
1919–1923컬럼비아 로스쿨, NFL 선수 활동
1924–1928《황제 존스》 등 주연, 할렘 르네상스 스타로 부상
1928–1939런던 《쇼 보트》로 세계적 명성, 《오셀로》(1930)로 영국 첫 흑인 오셀로
즈다노프의 심전도를 읽고 쓴 편지 한 통이 의사들 음모 사건의 불씨가 된 크렘린 심장 전문의
크렘린 주치의가 「내 말을 믿지 티마슈크 같은 사람 말을 믿겠느냐」며 그녀의 심근경색 진단을 묵살하자, 그녀는 상부에 편지를 썼고 4년 후 의사들의 음모의 불씨가 되었다.
1926년부터 크렘린 병원에서 근무한 심장 전문의로, 1948년 8월 28일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심전도를 판독하고 '심근경색' 진단을 내렸으나 상급 의사들에게 묵살당했다. 이에 당과 국가보안부에 세 차례 항의 편지를 보냈고, 4년 후 이 편지들은 1953년 '의사들의 음모' 사건 조작의 근거로 부활했다. 1953년 1월 '의사-살인자들을 적발한 공로'로 레닌 훈장을 받았으나 스탈린 사후 4월에 박탈당했고, 이후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에서 지목되며 '정보원'이라는 낙인이 평생 따라다녔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대개 나이가 들면 제정신을 찾는다. 젊을 때는 혁명가였다가 결혼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정착하지. 그러나 나는 이 나이에 이르도록 아직 제정신이 들지 않았다.
— 1984년 인터뷰에서
브라질 혁명가·정치인. 1925~1927년 '프레스테스 종대'를 이끌고 내륙 2만 5천 km를 행군해 '희망의 기사'라 불렸다. 1935년 코민테른 집행위원, ANL 봉기 지도 후 9년간 수감. 1943년부터 37년간 브라질 공산당 사무총장으로 노동운동과 반독재 투쟁을 지휘했고 쿠데타 후 망명 중에도 당을 이끌었다. 유럽공산주의 전환을 거부해 축출됐으나 끝까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했다.
1935년 6월 18일, 장팅 중산공원의 작은 언덕. 총살형 집행을 앞둔 취추바이는 풀밭에 앉아 집행인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바로 여기가 좋군!" 그리고 《인터내셔널》을 부르며 숨을 거두었다.
5·4운동 세대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러시아어를 익혀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볼셰비키 혁명의 현장을 중국에 생생히 전했다. 1923년 귀국 후 천두슈의 뒤를 이어 CCP 임시 중앙을 이끌며 광저우 봉기 등 무장투쟁 노선을 추진했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실각 후에는 루쉰·마오둔과 함께 좌익작가연맹을 이끌며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을 중국에 정초했고, 《인터내셔널》을 비롯한 러시아·소비에트 문학 번역에 헌신했다. 1935년 국민당에 체포되어 장팅에서 총살당했으며, 사형장까지 《인터내셔널》을 부른 최후로 혁명적 순교의 상징이 되었다.
장 물랭은 프랑스의 고위 관료이자 공화주의자로, 나치 점령에 맞선 국내 레지스탕스를 자유 프랑스와 연결한 조직가였다. 그는 샤를 드골의 위임을 받아 경쟁하던 저항운동들을 조정하고, 정치세력과 노동조합까지 포괄하는 국민저항위원회를 세웠다. 그의 통합 작업은 독립성을 지키려는 여러 세력의 긴장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1943년 체포와 고문으로 중단되었다.
1948년 소련과의 결별 뒤 그는 소비에트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베오그라드의 감옥에서 사라졌다.
안드리야 헤브랑은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크로아티아 공산당의 전시 지도자로, 점령에 맞선 조직과 해방지대의 정치 건설을 이끌었다. 전후에는 경제 재건과 중공업 중심의 발전 계획을 주도하며 티토에 이어 유고슬라비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의 자치적 정치 표현과 경제 노선을 둘러싼 긴장은 티토와의 충돌로 이어졌다. 1948년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의 결별 뒤 그는 소비에트 정보망과 연계된 인물로 지목되어 당에서 축출되고 체포되었으며, 1949년 감옥에서 사라졌다.
스레텐 주요비치는 세르비아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이자 노동운동 조직가로, 제1차 세계대전과 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전쟁을 거쳤다. 그는 전쟁기 파르티잔 봉기를 조직하고 최고사령부에서 활동했으며, 해방 뒤 재무장관을 맡았다. 1948년 티토와 스탈린의 충돌에서 그는 소비에트 노선을 지지한 유일한 반대자로 중앙위원회 회의에 나섰고, 그 선택으로 당과 공직에서 축출되어 구금되었다. 1950년 자기비판 뒤 석방되고 훗날 당에 복귀했지만, 그의 경력은 혁명적 국제주의와 유고슬라비아의 자율성 사이의 균열을 드러낸다.
스페인 내전과 레지스탕스의 지휘관 '갈로', 코민포름의 자아비판을 겪고 톨리아티의 뒤를 이은 PCI 사무총장
1964년 톨리아티의 뒤를 이어 PCI 사무총장이 되었을 때, 론고는 '나는 두목이 아니라 서기다'라고 선언했다.
1921년 리보르노 대회에서 이탈리아 공산당(PCI) 창당에 참여했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갈로'라는 이름으로 국제여단 총감독으로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가리발디 여단을 지휘하며 이탈리아 레지스탕스를 이끌었고, 전후 PCI 부서기로 톨리아티를 보좌했다. 1947년 코민포름 창립 회의(슈클라르스카 포렝바)에 에우제니오 레알레와 함께 PCI 대표로 참석해 프랑스 공산당과 함께 격렬한 자아비판을 받았으며, 이후 PCI의 노선을 강경 투쟁으로 전환시켰다. 1964년 톨리아티 사후 사무총장이 되어 '이탈리아식 사회주의' 노선과 모스크바에 대한 자율성을 추구했고,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지지하며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정식 반대했다.
호즈미 오자키는 아사히 신문 기자이자 공산주의자로, 리하르트 조르게의 도쿄 첩보망에서 가장 핵심적인 일본인 정보원이었다. 그는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브레인으로서 내각의 최고위급 기밀에 접근할 수 있었고, 1941년 9월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고 남방으로 진출할 것이라는 결정적 정보를 조르게에게 전달해 모스크바 전투의 향방을 바꾸었다. 1941년 10월 체포되어 전시 일본에서 유일하게 국가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사형 집행 전 감옥에서 아내와 딸에게 보낸 편지는 『사랑은 별비처럼』으로 출간되어 전후 일본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내 나라의 푸른 하늘 아래 평범한 마을 공동묘지의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 묻어다오” — 모스크바 유언, 1963년
오스만 살로니카 출신의 나즘 히크메트는 1921년 소련에서 마야콥스키와 레닌을 만나 평생의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터키로 돌아와 자유시를 도입하며 문학 혁신을 일으켰다. 《835행》에서 16,000행 대서사시 《내 조국의 인간 풍경》에 이르기까지, 민중의 삶과 독립전쟁을 노래한 방대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군사법정의 28년형으로 12년간 수감되었고 피카소·사르트르·로브슨의 국제 석방운동을 촉발했다. 1951년 소련 탈출 후 13년간 세계평화운동과 반식민주의에 헌신했으며, 시는 5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유네스코는 2002년을 '나즘 히크메트의 해'로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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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첫 시 〈조국의 비명(Feryad-ı Vatan)〉 발표
1918이스탄불 해군사관학교 졸업, 해군 장교 복무
1921터키 독립전쟁 참가 위해 아나톨리아로 이동, 무스타파 케말과 만남
1922–1924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 볼셰비키당 입당
1924–1925터키 귀환, 잡지 《아이든르크(Aydınlık)》 편집 — 불법 터키공산당 기관지
1929첫 자유시집 《835행》 출간 — 터키 시의 혁명
1933–1935《밤에 온 전보》로 첫 투옥, 부르사 교도소에서 《셰이흐 베드레딘 서사시》 집필
1928년 12월, 멕시코시티의 격렬한 당 회의에서 비탈리가 메야에게 소리쳤다 — "잊지 마라: 인터내셔널에서 나가는 길은 둘뿐이다, 제명되거나 죽거나!" 한 달 후 메야는 거리에서 암살당했다.
쿠바 공산당을 공동 창립한 학생운동 지도자로, 아바나 대학에서 반제국주의 학생투쟁을 조직하고 카를로스 발리뇨와 함께 1925년 쿠바 최초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을 세웠다. 마차도 독재에 쫓겨 멕시코로 망명한 후에도 혁명운동을 이어가다 1929년 25세의 나이로 암살당했으며, 쿠바 혁명 좌파의 상징적 순교자로 카스트로 세대에게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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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아바나 대학 법학부 입학 — FEU 공동 창립, 서기 역임
1923FEU 회장 취임 — 제1차 전국학생대회 주최, 호세 마르티 인민대학 설립
1924아바나 공산주의 그룹 가입, 반제국주의 동맹 쿠바 지부 결성
1925카를로스 발리뇨와 함께 쿠바 공산당 창당 — 중앙위원; 체포 후 18일 단식투쟁
1926대학 제적, 당에서 2년간 제명 — 온두라스·과테말라 거쳐 멕시코시티로 망명
1926–1927쿠바 혁명적 망명자 협회(ANERC) 창립 — 『쿠바 리브레』 등에 기고
1927브뤼셀 식민지 억압 반대 세계대회 참석 — 모스크바에서 국제노조인터내셔널 4차 대회 참관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쓰던 금고 안에는 오직 한 장의 사진만이 보관되어 있었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이 금고를 열자, 그 안에는 김책과 함께 찍은 낡은 사진 한 장만이 남아 있었다.
1920년대 만주에서 조선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을 거치며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고,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최용건과 함께 '만주파 3인방'으로 불리며 유격전을 지휘했다. 1945년 귀국 후 김일성의 최측근으로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설과 김일성 추대 운동을 주도했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부수상 겸 산업상으로 취임해 전후 산업 기반 복구를 진두지휘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전선사령관으로 인민군을 지휘했으며, 1951년 1월 전시 중 과로로 사망했다. 사후 그의 이름은 김책시·김책공업종합대학·김책제철소에 붙여졌다.
코민테른 흑인국장에서 범아프리카 독립운동의 설계자로, 제국 질서와 결별한 혁명적 저널리스트
「판-아프리카주의냐 공산주의냐?」 — 냉전의 이분법을 거부하며, 아프리카 해방은 그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한 마지막 저작의 제목
트리니다드 출신 범아프리카주의 이론가이자 저널리스트. 1929년 모스크바에서 프로핀테른 흑인국장으로 임명되어 식민지 노동자 조직화를 이끌었으나, 소련이 식민지 해방보다 열강 외교를 우선하자 1934년 결별했다. 런던에서 국제아프리카서비스국(IASB)을 이끌며 1945년 맨체스터 범아프리카회의를 조직, 전후 탈식민화 의제를 설정했다. 콰메 은크루마의 최측근 조언자로서 가나 독립과 아프리카 연합 구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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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트리니다드 아로우카에서 출생 — 본명 맬컴 아이번 메러디스 너스
1924–1927미국 유학, 피스크·하워드 대학 — CPUSA 입당(1927)
1929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에 보고 — 프로핀테른 흑인국장 임명, 모스크바 시소비에트 대의원
1930함부르크에서 흑인노동자국제노동조합위원회(ITUCNW) 조직, 월간 『니그로 워커』 편집
1933–1934나치 집권 후 추방 — 소련의 식민지 정책 전환에 반발하여 코민테른과 결별, 1934년 제명
1934–1945런던 정착 — IASB 의장, 1945년 맨체스터 범아프리카회의 조직
1947–1957은크루마의 조언자, 『가나 혁명』(1953) 출간 — 가나 독립운동 지원
1957–1959가나로 이주, 은크루마의 아프리카문제 고문 — 1959년 런던에서 사망, 유해는 가나 크리스천스보르 성에 안장
대장정을 완주한 유일한 조선인, 팔로군 포병사령관에서 조선의용군 총사령을 지낸 연안파 군사지도자
30여 명의 조선인이 대장정에 나섰으나 오직 무정만이 살아남아 옌안에 도착했다.
중국공산당에 1925년 입당하여 대장정에 참가한 유일한 조선인으로, 팔로군 포병사령관까지 올랐다.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조직해 총사령을 맡으며 연안파의 핵심 군사지도자가 되었다. 해방 후 북조선으로 돌아와 조선인민군 포병사령관 겸 제2군단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으나,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1950년 12월 패전 책임과 살인 혐의로 숙청되었다. 그의 몰락은 연안파 제거의 신호탄이었다.
1932년 상하이 사변 당시 "오늘 중국은 '양국의 투쟁' — 신생 중화소비에트공화국과 부패한 중화민국의 투쟁"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하며, 이 대립이 "현재 중국 정치생활 전체의 핵심"이라고 규정했다.
중국 공산당 초기 지도부에서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의 핵심 지도자로, 모스크바 쑨원대학 유학 시절 파벨 미프의 후원을 받아 1931년부터 1937년까지 코민테른 주재 중공 대표를 지냈다. 스탈린 노선에 충실한 교조주의자로서 마오쩌둥의 주요 정치적 경쟁자였으며, 마오는 『실천론』과 『모순론』에서 왕밍의 노선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항일민족통일전선 노선을 제시했으나, 1942년 정풍운동에서 교조주의의 표적으로 숙청된 후 1956년 소련으로 망명하여 모스크바에서 여생을 보냈다.
“나는 죽어서도 조선의 독립과 내가 평생 믿어온 사회주의가 승리하는 것을 보고 싶소.” — 옌안에서 님 웨일즈에게 남긴 말
평북 용천 출신. 1919년 3·1운동 참가 후 일본·중국으로 건너가 1922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에서 수학하고 1927년 광저우 봉기에 홍군 측으로 참전했으며, 1936년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했다. 1937년 옌안에서 미국 언론인 님 웨일즈와 22차례 인터뷰를 진행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 《아리랑》(1941)은 조선 독립운동사의 생생한 증언으로 남았다. 1938년 캉성의 보안기관에 의해 '트로츠키스트·일본 간첩'으로 몰려 처형되었고, 1983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복권되었다.
코민포름 창립 회의의 이탈리아 대표로, 스탈린의 전화선을 목격한 공산주의자에서 반공 비판자로 전향한 인물
“스탈린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회의의 절대적 지배자였다. 토론 중에 우리가 이 사실을 의식하게 된 것은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성과 크렘린 사이에 직통 전화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966년 회고록)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의사로, 전후 연립정부에서 외무차관을 지냈고 폴란드 대사를 역임했다. 1947년 코민포름을 창립한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회의에 이탈리아 대표로 참석했으며, 1966년 회고록은 크렘린으로 직통된 스탈린의 전화선과 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에 대한 즈다노프의 사전 계획된 공격을 포함한 회의의 가장 상세한 목격 증언이 되었다.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계기로 이탈리아 공산당과 결별했고, 이후 반공 비판자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통신』을 창간했다.
앙리 프르네는 프랑스 육군 장교 출신으로, 1940년 패전 뒤 군사적 규율과 애국주의를 지하 저항의 조직 원리로 바꾼 인물이다. 그는 처음에는 페탱과 국민혁명이 프랑스를 구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지만, 비시의 협력과 억압을 겪으며 입장을 바꾸었다. 베르티 알브레히트와 함께 국민해방운동을 세우고 지하 신문을 확장해 콩바를 주요 저항운동으로 발전시켰으며, 전후에는 포로·강제이송자·난민의 귀환을 맡았다.
후안 모데스토는 스페인 공산당의 군사 조직가에서 출발해 공화군의 핵심 지휘관으로 성장했다. 그는 제5연대와 제5군단을 이끌며 민병대를 정규 군대로 통합하는 전쟁의 변화를 구현했다. 1938년 에브로군 사령관으로서 공화국의 마지막 대공세를 지휘했지만, 장기 소모전은 병력과 물자의 열세를 뒤집지 못했다. 패전 뒤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자신의 전쟁 경험을 기록했다.
정풍운동에서 그는 "당에 이렇게 큰 손실을 끼쳤으니,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얼마나 많은 일을 더 해도 이 손실을 메울 수 없다"고 고백하며 "모든 악결과의 가장 주요한 책임자는 바로 나"라고 말했다.
중국공산당 총서기(1931–1935)로서 장시 소비에트 시기와 대장정 초기 당을 이끌었으며, 모스크바 쑨원대학 출신 '28인의 볼셰비키' 일원으로 왕밍과 함께 코민테른 좌경 노선을 대표했다.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에게 실각한 후 조직부장, 신화통신사 사장, 『해방일보』 사장을 지내며 중공 언론·선전의 제도적 기초를 세웠다. 1946년 충칭 협상 후 옌안으로 귀환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으며, 당내에서는 그를 '정직하고 박식했던' 초기 지도자로 기억한다.
대중이 자신을 '마오의 가장 훌륭한 제자'로 여긴다는 말에 린뱌오는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아무 재능이 없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마오 주석에게서 배운 것이다.'
린뱌오는 중국 공산당의 가장 뛰어난 군사지휘관 중 한 명으로, 만주에서 랴오선·핑진 전역을 지휘해 국민당 주력을 섬멸하고 인민해방군을 베이징으로 진군시켰다. 1955년 10대 원수 중 3위로 서열되었으며, 국방부장으로서 마오쩌둥의 개인숭배를 주도하고 문화대혁명을 적극 추진했다. 1966년 당의 유일한 부주석으로 마오의 공식 후계자로 지정되어 최고 권력에 근접했으나, 1970년대 초 마오와의 갈등 속에 실각했다. 1971년 9월 쿠데타 시도 실패 후 소련으로 탈출하던 중 몽골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사했다.
“사형 찬반에 대한 그 모든 헛소리 — 전부 헛소리다, 동무들. 집행하라! 필요하다면 법정 판결 없이도.” — 1982년, 슈타지 간부들 앞에서
베를린 빈민가 출신의 공산주의 투사로, 1931년 경찰관 살해 후 소련으로 망명해 NKVD 훈련을 받았다. 스페인 내전 참전 뒤 1945년 귀환하여 동독 국가보안부 창설을 주도했고, 1957년 장관에 올라 32년간 9만 명 규모의 감시 기구를 이끌었다. 슈타지는 동독 사회 전반을 통제했고, 제3세계 무장투쟁 세력과 서유럽 극좌 조직 지원으로 냉전기 사회주의권 안보 협력망을 확장했다. 1989년 체제 붕괴로 물러났고 통일 후 1931년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48년 3월 제2차 당대회에서 허가이는 돌연 연단에 올라 이미 사과한 간부들을 향해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사과는 공허한 말일 뿐"이라고 질타했고, 이 발언은 당내 규율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소비에트 고려인 혁명가로, 1945년 소련 점령 당국의 파견을 받아 평양에 도착한 후 조선로동당 창립의 핵심 조직자로 활동했다. 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 겸 제2부위원장으로서 소련식 간부당 노선을 추진했으며, 한국전쟁 중 60만 당원 중 45만 명을 검증·제명하는 대대적 당 정비를 주도했다. 대중당을 구상한 김일성과 당 조직 노선을 둘러싸고 충돌해 1951년 실각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기 '소련파'의 부상과 몰락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앙리 롤탕기는 금속 노동자 출신의 프랑스 공산주의자이자 국제여단 참전자로, 스페인 내전과 반나치 레지스탕스에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그는 1944년 8월 파리 지역 프랑스 국내군(FFI) 사령관으로서 동맹군이 입성하기 전에 봉기를 조직하고 지휘했다. 그의 활동은 노동운동의 조직 경험과 무장 저항을 결합해 수도 해방을 내부에서 추진한 사례였다. 전후에는 군과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레지스탕스의 독자적 역할을 공적으로 옹호했다.
재판에서 검사의 사형 구형에 답하며: 「검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법원의 판결을 미리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1949년 9월)
헝가리 공산당 정치인으로, 내무장관(1946~48) 시절 국가보안기관(ÁVH)을 창설하고 초기 숙청을 주도하며 라코시 체제 구축의 핵심 인물이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 헝가리 대대 정치위원으로 참전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지하 저항운동을 조직했다. 라코시가 자신의 인기를 위협으로 간주하자 외무장관으로 좌천되었다가 1949년 티토주의자라는 조작된 혐의로 체포·처형되어 동유럽 최초의 대규모 스탈린식 쇼재판 희생자가 되었다. 1956년 10월 6일 10만 인파가 모인 복권 장례는 3주 후 헝가리 혁명의 전주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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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불법 헝가리 공산당(KMP) 및 공산청년동맹(KIMSZ) 입당
1935건설노동자 파업 주도, 체포·추방
1937–39국제여단 헝가리 대대 정치위원·당서기로 스페인 내전 참전, 에브로 전투에서 중상
'미국의 사회주의는 투표함을 통해 올 것이다' — 1996년 클리블랜드 플레인 딜러와의 인터뷰에서.
핀란드계 이민 노동자의 아들로 철강 파업 현장에서 성장하여 41년간 미국 공산당을 이끈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다.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하고 스미스법으로 투옥된 후 당권을 장악, 모스크바 노선에 충실히 경도되어 네 차례 대선에 출마한 냉전기 미국 공산주의의 얼굴이었다.
브라질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가이자 도시 게릴라전 이론가. 바이아주 이탈리아계·아프리카계 혼혈 가정에서 태어나 1934년 브라질 공산당(PCB)에 입당했다. 1946년 PCB 소속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1948년 당이 불법화되며 의석을 잃었다. 1964년 군사 쿠데타 이후 무장 투쟁을 주장하며 PCB와 결별, 1968년 도시 게릴라 조직인 민족해방행동(ALN)을 창설했다. 1969년 《도시 게릴라 소교본》을 집필해 전 세계 혁명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같은 해 상파울루에서 경찰의 매복 작전으로 사살되었다.
하노이 사립학교의 젊은 역사 교사 시절, 그는 칠판에 나폴레옹 전역의 상세한 작전도를 그려내곤 했다. 학생들은 그를 '장군'이라 불렀다. 15년 후, 그는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를 항복시켰다.
역사 교사 출신으로 정규 군사 교육 없이 베트민 군대를 창설해 디엔비엔푸 전투(1954)에서 프랑스를 격파한 20세기 최대의 게릴라 전략가. 제국주의 군대를 야전에서 패배시킨 최초의 식민지 해방군 사령관이었다. 30년간 국방장관으로 재임하며 인민군을 기계화 연합군으로 성장시켰고, 호치민 루트를 설계해 남부 전선의 물류망을 구축했다. 대미 전쟁에서는 군사적 손실을 감내하면서도 미국의 정치적 의지를 꺾는 인민전쟁 전략을 고수했다. 전쟁 후 환경 문제에 개입하며 권력에서 물러난 노년까지 공적 발언을 이어갔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남일 대장과 해리슨 중장은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18부의 정전협정문에 서명했다. 3년 전쟁을 멈춘 10분, 그는 조선의 얼굴이었다.
러시아 극동에서 태어난 고려인으로, 1937년 강제이주로 중앙아시아로 옮겨갔으며 소련군 장교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베를린 공방전에 참전했다. 1946년 조선 북부로 파견되어 김일성의 측근으로 부상했고,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 총참모장을 맡았다. 1951년부터 2년간 판문점 휴전회담 공산측 수석대표로서 협상을 이끌었고 1953년 7월 27일 조선인민군 대표로 정전협정에 서명해 전 세계에 조선의 얼굴로 알려졌다. 전후 외무상·부수상을 지내며 소련파 고려인 동료들이 숙청되는 와중에도 살아남았으나, 1976년 원인 불명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1944년 10월 20일, 다프체비치가 지휘한 유고슬라비아군과 소련군이 베오그라드에 입성했다.
페코 다프체비치는 스페인 내전과 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전쟁을 거친 몬테네그로계 공산주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몬테네그로 봉기에서 출발해 사단과 군단을 지휘했고, 1944년 베오그라드 해방에서 소련군과 함께 작전한 제1군집단을 이끌었다. 1945년 제1군 사령관으로서 스렘 전선 돌파와 전후 군대의 정규화를 맡았으며, 훗날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총참모장을 지냈다. 그의 경력은 혁명적 전투조직이 국가의 상설 군대로 전환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생긴 정치적 긴장을 함께 보여 준다.
「내 차례다. 하나의 등식을 제시하겠다: 식민주의 = 사물화」 — 『식민주의 담론』(1950)에서 유럽 식민주의를 '사물화' 한 단어로 규정하며 반식민주의 이론의 핵심 명제를 던지다.
마르티니크 출신 시인·극작가·정치인. 1935년 파리에서 상고르·다마스와 함께 '네그리튀드' 개념을 창안하고 흑인 문화 정체성 회복 운동을 주도했다. 초현실주의 장시 『고향으로의 귀환 수첩』(1939)과 반식민 에세이 『식민주의 담론』(1950)에서 식민주의를 유럽 파시즘의 원형으로 비판하고 '식민주의=사물화' 정식을 제시했다. 프란츠 파농의 스승이자 멘토였으며, 1945년부터 47년간 프랑스 국민의회 의원, 56년간 포르드프랑스 시장을 지냈다. 1956년 소련의 헝가리 개입에 항의해 프랑스 공산당을 탈퇴하고 1958년 마르티니크 진보당을 창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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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파리에서 L'Étudiant noir 창간, '네그리튀드' 개념 최초 제시
1939『고향으로의 귀환 수첩』(Cahier d'un retour au pays natal) 출간
상하이 무대에서 문화대혁명의 정점까지: 마오쩌둥의 아내이자 사인방의 수장으로 중국 혁명예술을 재편한 정치인
1980년 재판에서 장칭은 '나는 마오 주석의 개였다. 그가 물라고 하면 나는 물었다'고 외치며 모든 혐의를 부인했고, 법정 밖으로 끌려나가면서도 혁명 구호를 외쳤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핵심 지도자이자 '사인방'의 수장으로, 마오쩌둥의 부인으로서 중국공산당 내 가장 강력한 여성 정치인이었다. 1930년대 상하이에서 좌익 연극·영화 배우로 활동하다 1937년 옌안으로 가 마오쩌둥과 결혼했고, 20년간 정치에서 배제된 후 1963년 경극 혁명을 계기로 공적 무대에 복귀했다. 1966년 중앙문화혁명소조 부조장에 임명되어 《해서파관》 비판으로 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열었고, 8개의 혁명적 양판희를 제정해 전통 예술을 프롤레타리아 주제로 재편했으며, 1969년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마오 사후 1976년 10월 체포되어 '반혁명 범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감형되었고, 1991년 5월 병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81년 2월 23일, 테헤로 중령의 민위대원 200명이 의사당에 난입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의원 전원이 바닥으로 몸을 던질 때, 66세의 카리요는 자리에 앉아 담배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스페인공산당(PCE) 서기장(1960–1982)으로, 베를링구에르·마르셰와 함께 유로코뮤니즘을 주도한 핵심 이론가이다.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후 모스크바와 단절하고 민주적 사회주의 노선을 정립했으며, 『유로코뮤니즘과 국가』(1977)에서 의회 민주주의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을 주장했다. 프랑코 사후 귀국해 스페인의 평화적 민주 이행에서 대화와 화해 정책으로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1981년 2·23 쿠데타 당시 의사당에서 총격 속에도 자리를 지킨 몇 안 되는 의원으로 기록되었다.
중국 이민 노동자의 딸로 브린마에서 철학 박사를 받았으나 인종차별로 학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노동자당에 입당했다. C.L.R. 제임스, 라야 두나옙스카야와 존슨-포레스트 경향의 3인 핵심으로서 소련 국가자본주의론과 『국가자본주의와 세계혁명』을 공저했고, 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수고』를 최초로 영역했다. 1953년 흑인 자동차 노동자 제임스 보그스와 결혼 후 디트로이트에 정착해 트로츠키주의와 결별하고 흑인해방 중심의 공동체 혁명 실천으로 전환, 90대까지 『다음 미국 혁명』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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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에서 중국 이민자 식당 주인의 딸로 출생, 중국명 위핑(玉平)
1935바너드 칼리지 졸업
1940브린마 칼리지에서 조지 허버트 미드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 취득
1940–1945시카고 대학 철학 도서관에서 저임금 사서로 근무, 세입자 권리 운동으로 노동자당 입당
1945–1947C.L.R. 제임스·두나옙스카야와 존슨-포레스트 경향 결성, 마르크스 『1844년 수고』 첫 영역
1947SWP에 합류, 필명 '리아 스톤'으로 존슨-포레스트 경향 저술 활동
1950제임스·두나옙스카야와 『국가자본주의와 세계혁명』 공동 저술
1951SWP 탈퇴, 코레스폰던스 출판위원회 결성 참여
1953흑인 자동차 노동자·정치 활동가 제임스 보그스와 결혼, 디트로이트로 이주
1962C.L.R. 제임스와 결별, 부부 독자 노선으로 코레스폰던스 이끌며 디트로이트 공동체 운동 집중
어느 날 부대가 행군할 때 갈대밭에서 적 5~6명이 장군님을 겨누었다. 김정숙 동지는 몸으로 장군님을 가리고 리볼버로 적을 쓰러뜨렸다.
김정숙은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 휘하 여군 부대장으로 복무하며 보천보 전투 등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한 빨치산 투사였다. 1940년 김일성과 결혼하여 소련 극동에서 아들 김정일을 낳았고, 해방 후 조선민주여성동맹 창립에 기여했으며 1949년 출산 중 사망한 뒤 '백두여장군'으로 추존되어 '3대장군' 백두혈통 정치신화의 핵심이 되었다.
문화대혁명 '사인방'의 이론가, 상하이 인민공사를 조직하고 부르주아지 전면독재를 주창한 정치인
1980년 재판에서 장춘차오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수년 후 가족 면회가 허용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핵심 이론가이자 '사인방' 구성원. 1938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상하이에서 《해방일보》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1958년 「부르주아 법권 사상을 타파하자」를 발표해 마오쩌둥의 주목을 받았고, 문화대혁명기 중앙문화혁명소조 성원으로 1967년 상하이 인민공사를 조직해 기존 시 정부를 전복시켰다. 1975년 부총리로서 「부르주아지에 대한 전면독재를 실시하자」를 집필해 사회주의 이행기 계급투쟁 노선을 정식화했으며, 마오 사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98년 석방될 때까지 마오주의 신념을 고수했다.
유성철 작전국장의 증언: '바로 내 앞에 가던 강건 총참모장의 지프가 폭발음과 함께 길옆으로 곤두박질했다. 지뢰였다. 강건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만주 항일유격대와 소련 제88독립소총여단에서 활동한 김일성의 측근으로, 1948년 조선인민군 창군과 함께 초대 총참모장에 올랐다. 1950년 5월 29일 소련 군사고문단장 바실리예프 중장과 함께 남침을 위한 '선제타격작전계획'을 완성했고, 전쟁 발발 후 전선사령부 참모장으로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격을 지휘했다.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된 9월 8일, 금강 인근에서 후퇴하는 국군이 매설한 지뢰가 탄 지프가 폭발해 즉사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직접 관을 운구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었으며, 사후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피에르 조르주는 프랑스 공산주의자이자 레지스탕스 전사로,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으로 싸우며 일찍부터 반파시즘 무장투쟁을 경험했다. 1941년 8월 21일 파리 바르베 지하철역에서 알퐁스 모제르를 사살한 행동은 프랑스 공산당의 무장 저항을 가시화했지만, 독일 점령군의 인질 처형과 저항 세력에 대한 탄압도 격화시켰다. 그는 프레도, 뒤에는 파비앵 대령이라는 이름으로 지하 전투원과 마키를 조직했고, 파리 해방 뒤에는 파비앵 부대를 이끌고 동부 전선으로 향했다. 1944년 지뢰 폭발로 사망하면서, 그의 생애는 점령에 맞선 결단과 그에 뒤따른 가혹한 보복의 긴장을 함께 남겼다.
『라 레푸블리카』와의 인터뷰(1981년 7월 28일)에서 이탈리아 정당 체제의 구조적 부패를 '도덕적 문제(questione morale)'로 명명하며: "오늘날 정당들은 무엇보다 권력과 후견주의의 기계다. 사회와 사람들의 삶에 대한 지식은 빈약하거나 왜곡되어 있고, 사상·이상·정책은 거의 없거나 모호하며, 감정과 시민적 열정은 제로다." 이 표현은 이후 수십 년간 이탈리아 정치 담론의 기준점이 되었다.
이탈리아 공산당(PCI) 서기장(1972–1984). 소련 지도를 거부하는 민주적 사회주의 노선인 유로코뮤니즘을 주창했으며, 1976년 총선에서 PCI 사상 최고인 34.4% 득표율로 이끌었다.
“우리 아프리카인들은 사회주의로 '개종'될 필요도, 민주주의를 '배울' 필요도 없다. 둘 다 우리의 과거 — 우리를 낳은 전통 사회 — 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 1962년 에세이 「우자마」
탄자니아의 독립운동 지도자, 건국 대통령, 그리고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가. 1954년 TANU를 창당해 비폭력 독립투쟁을 이끌었고, 1961년 독립을 성취했다. 1967년 아루샤 선언으로 전통적 공동체성을 현대 사회주의와 접목한 독자적 발전 모델인 우자마(Ujamaa)를 제시하고 은행·산업 국유화와 무상교육 확대를 추진했다. 집권 기간 내내 남아프리카 해방운동을 후원했으며 비동맹운동의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1985년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 아프리카 지도자로서는 드물게 평화적 정권 이양을 실현했고, 말년에는 부룬디 내전 중재에 헌신했다.
“마르크스주의는 행동의 지침이지 경직된 도그마가 아니다.” — PKI 간부들에게 반복한 말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서기장(1951–1965). 수카르노의 마르해니즘 노선 아래서 노동자·농민·여성·청년·문화 부문 대중조직을 체계적으로 건설했고, 1955년 총선에서 PKI를 인도네시아 최대 정당으로 만들었다. 당원 300만 명에 이르는 세계 3위 공산당을 이끌었으나, 1965년 9·30운동 직후 수하르토의 반공숙청 속에서 당과 함께 처형되었다.
기 모케는 파리 출신의 프랑스 공산주의 청년 활동가로, 아버지의 투옥 뒤 지하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1940년 열여섯 살에 체포되어 프랑스 당국의 수감과 행정구금을 거쳤고, 1941년 샤토브리앙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독일 점령군은 낭트의 카를 호츠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그를 인질로 선정해 1941년 10월 22일 처형했으며, 그의 죽음은 점령과 협력 체제가 젊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부과한 대가를 상징했다.
「감옥에서는 적의 움직임만 보인다. 감옥은 싸움을 하기에 가장 어려운 곳이다.」 — 《117일》(1965)
남아공 공산당과 ANC에서 활동한 백인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이자 언론인. 진보 매체 《가디언》 편집장으로 인종차별 정책을 고발했고, 자유헌장 기초위원으로 참여했다. 반역죄 재판 피고를 거쳐 90일 구금법 첫 백인 여성 수감자가 되었고, 독방 체험을 《117일》로 남겼다. 망명 후 아프리카 해방운동을 연구했으며, 모잠비크에서 아파르트헤이트 경찰의 소포 폭탄에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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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위트워터스랜드 대학 사회과학 학사, 진보학생연맹 창립 참여
1946–1950s《가디언》 편집장 — 신문 금지 후 《클라리온》《뉴 에이지》 등으로 재창간
"모든 부정의는 싸워야 한다, 비록 자기 마음속에서뿐일지라도 — 그리고 나는 싸웠다." — 『망명』, 안드레 블첵·로시 인디라와의 대화
식민지 감옥에서 첫 소설을 쓰고, 독립 후에는 레끄라(Lekra)에서 문화운동을 이끈 인도네시아 최대의 작가. 1965년 쿠데타 뒤 수하르토에 의해 부루 섬에 14년간 수용되었고, 연필조차 금지된 수용소에서 동료 수감자들에게 구술해 「인간의 대지」로 시작되는 부루 사부작을 완성했다. 평생 금서 작가로 살았으나, 그의 작품은 40개 언어로 번역되며 반식민·반권위주의 문학의 기념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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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947독립전쟁에 참전, 자카르타 주둔 — 반식민 선전 활동
1947–1949네덜란드군에 체포, 부킷두리 감옥에서 첫 소설 『도망자』 집필
1950–1964레끄라에서 활동, 『타락』 등 집필 — 소련·중국 문화교류 참여, 고리키·톨스토이 번역
1960중국계 차별을 비판한 『화교』로 수카르노 정권하 9개월 구금
1965–1979수하르토 쿠데타로 체포 — 부루 섬에서 정치범으로 14년 구금, 구술로 부루 사부작 완성
그는 후일 회고했다: "나는 분노한 나머지 가구용 칼을 들고 스피커 기둥에 올라가 전선을 끊으려 했다."
스타니스와프 마티야는 포즈난 체겔스키(ZISPO) 공장의 목수로, 동료들의 신임을 얻어 노동자 권리 수호의 대변인이 된 인물이다. 1956년 6월 바르샤바 협상에 나선 27인 대표단의 수장으로서 임금 인상과 세금 환급 약속을 받아 냈으나, 정부가 이를 하루 만에 번복하자 6월 28일 봉기의 비공식 지도자로 떠올랐다. 진압 후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겪고 공장에서 해고당했지만, 1980년 연대노조의 명예 회원이 되어 1981년 포즈난 십자가 추모비를 제막한 상징적 인물로 남았다.
아민이 부관에게 소련군에 경고하라 명하자 부관은 '쏘는 쪽이 소련군입니다'라고 답했다. 아민은 재떨이를 집어던지며 외쳤다. '거짓말이다, 그럴 리 없어!'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 칼크파의 실질적 2인자이자 1978년 4월 혁명의 군사적 설계자. 미국 유학 시절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후 귀국하여 당내 군부 조직책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부수상·외무장관·국방장관을 거치며 타라키를 제치고 실권을 장악했다. 1979년 9월 타라키를 축출·처형하고 당과 국가의 최고직에 올랐으나, 가혹한 숙청과 반란 확산 속에 소련은 그를 통제 불능으로 판단했다. 12월 27일 KGB 특수부대의 타지베크 궁전 습격으로 살해되었고, 이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서막이 되었다.
파업 3일째 바웬사가 종료를 선언하자, 그는 피엔코프스카와 함께 문을 막고 떠나던 노동자들을 돌려세워 임금 투쟁을 연대 파업으로 바꾸었다.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의 크레인 기사로, 1980년 8월 해고가 연대(Solidarity) 탄생의 불씨가 된 폴란드 노동운동가이다. 16년간 용접공으로 일하며 작업량 기준의 270%를 채운 '노동 영웅'이었지만, 상사의 비자금 횡령을 고발하며 당국과 맞서 반체제 인사가 되었다. 파업 3일째 바웬사가 파업 종료를 선언하자 알리나 피엔코프스카와 함께 문을 막고 노동자들을 돌려세워 임금 투쟁을 연대 파업으로 바꾸었다. 이후 바웬사의 독주와 노조의 변질을 비판하며 거리를 두었고, 2010년 스몰렌스크 항공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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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입사, 용접공으로 16년 근무 후 크레인 기사로 전직
1968상사의 비자금 횡령을 고발, 해고 위기를 부서 노동자 전체의 지지로 막아냄
1978자유노조 해안지부(WZZ) 공동 창립, 지하 신문 『해안의 노동자』 편집
1980-08-07불법 노조 활동으로 해고, 정년 5개월을 앞둔 시점
1980-08-14해고가 그단스크 파업을 촉발, 공장간파업위원회(MKS) 간부회 일원으로 8월 협정 서명
1980년 파업이 시작되자 그는 노동자 조직과 자유로운 정보의 족쇄가 마침내 끊겼다고 선언했다.
야체크 쿠론은 폴란드의 사회주의적 이상을 당 관료제의 지배와 분리해 다시 사유한 역사가이자 조직가였다. 카롤 모드젤레프스키와 함께 쓴 「당에 보내는 공개서한」은 관료제가 노동계급을 지배한다고 비판하면서 노동자 평의회와 민주적 다원주의를 제안했다. 그는 1976년 노동자 방어위원회(KOR)를 공동 창립해 노동자와 지식인을 연결했고, 1980년에는 연대의 핵심 자문역으로 노동자 자주관리 노선을 밀었다. 1981년 12월 13일 계엄령 첫날 밤 구금된 뒤에도 지하 연대를 지지했으며, 1989년 이후에는 노동·사회정책 장관으로 전환기의 사회적 권리를 다뤘다.
마리안 유르치크는 슈체친 조선소 출신의 노동운동가로, 1980년 파업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국가와 협상한 지도자였다. 그는 8월 30일 슈체친 협정에 서명했지만, 단결권 보장을 얻지 못한 채 경제적 양보를 받아들였고, 하루 뒤 그단스크에서 더 폭넓은 합의가 성립하면서 두 지역의 차이가 선명해졌다. 계엄 뒤에는 수감과 재판을 겪었으며, 훗날 레흐 바웬사 진영과 거리를 두고 독자적 노동조합 노선을 이어 갔다.
1981년 12월 13일 그의 체포 소식이 우제크 광산에 전해지자 광부들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일하지 않기로 했다.
얀 루드비차크는 광부이자 폴란드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의 우제크 광산 사업장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그의 체포는 광부들이 계엄령에 맞서 파업하고 체포된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게 만든 직접적 계기였다. 석방 뒤에도 그는 강등과 감시를 견디며 광산 안에서 지하 출판물을 배포했고, 1989년 연대 재건을 준비했다.
1989년 4월 9일, 그는 트빌리시 독립 시위의 조직자로 체포되었지만 45일 뒤 대중의 압력으로 풀려났다.
메라브 코스타바는 음악가·시인이자 그루지야의 독립과 인권을 위해 싸운 반체제 운동가였다. 그는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와 함께 지하 출판과 헬싱키 인권운동을 조직하며 소비에트 체제의 민족·종교 억압에 맞섰다. 장기간의 수감과 시베리아 유배 뒤 1987년 귀환한 그는 1988년 이후 대중적 독립운동과 트빌리시 시위를 이끌었다. 1989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그루지야는 그를 민족영웅으로 기렸다.
"부자유하고 억압받는 자들 가운데 위대한 사람은 오직 억압자를 파괴하기 위해 투쟁하는 자뿐이다" — 『유럽은 어떻게 아프리카를 저발전시켰는가』 (1972)
가이아나 노동계급 가정에서 태어나 24세에 런던대학 SOAS에서 아프리카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대학과 자메이카 서인도제도대학에서 강의하며 범아프리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결합한 독자적 분석을 구축했다. 1972년 출간된 『유럽은 어떻게 아프리카를 저발전시켰는가』는 노예무역과 식민주의,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아프리카의 저발전을 구조적으로 생산했다고 논증하며 제3세계 역사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1974년 귀국 후 노동인민동맹(WPA)에서 활동하며 다인종 노동계급 연대에 기반한 사회주의 정치를 전개했다.
“우리가 협상하는 이유는 사회주의를 위한 더 나은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다. 나는 공산주의자다.” — 암살 직전 인터뷰, 1993년
남아공 공산당 사무총장이자 민족의 창(Umkhonto we Sizwe) 참모총장으로, 반아파르트헤이트 무장투쟁에서 협상 전환까지 남아공 해방운동의 좌익을 이끈 혁명가. 1993년 극우 이민자에게 암살되면서 민주이행을 위기로 몰아넣었으나, 그의 죽음은 오히려 1994년 총선을 확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누구의 뒷마당도 아니며, 결코 팔리지 않을 것이다.” — 헌터칼리지 연설, 뉴욕, 1983년 8월
그레나다의 혁명가이자 인민혁명정부 수상(1979–1983). 런던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귀국해 신JEWEL운동(NJM)을 이끌며 1979년 부패한 게일리 정권을 무너뜨렸다. 집권 후 문맹률을 35%에서 5%로, 실업률을 50%에서 14%로 낮추고 무상의료·여성평등임금·출산휴가를 도입했다. 쿠바와 협력해 국제공항을 건설했으며, '우리는 누구의 뒷마당도 아니다'라는 반제국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1983년 부수상 버나드 코드의 내부 쿠데타로 처형되었고, 이는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으로 이어졌다.
의사들이 생명을 구하려 애쓰는 병상에서 팔라흐는 말했다: '내 행동은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 그리고 동료 학생들에게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말고 살아서 투쟁하라고 당부했다.
1969년 1월 16일, 바르샤바조약군 점령 5개월 만에 체코 사회가 체념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 바츨라프 광장에서 분신한 카렐대학교 학생. 검열 폐지와 소련군 기관지 발행 중단을 요구하며 자신을 '인간횃불 1호'라 부른 그는 사흘 만에 사망했다. 20만 명이 운집한 장례식은 정상화 직전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항의였고, 20년 후 그의 기일 시위는 벨벳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내겐 양심이 있고, 그래서 내 양심이 시키는 대로 말하러 여기 왔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 우리는 우리 땅에서 소수민족이 되어가고 있다.」
1987년 8월 라글레 파레크, 티트 마디손 등과 함께 MRP-AEG를 공동 창립하고 히르베파르크 집회에서 '우리는 우리 땅에서 소수민족이 되어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집회 후 언론의 인신공격 보도에 항의해 두 달간의 단식 투쟁을 시작했고, 단식 중 붉은 광장에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공개를 요구하는 팻말을 들었다가 강제 송환되었다. 이후 에스토니아 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유머 신문 「로사 리프」의 편집에도 참여했다.
티이트 마디손은 에스토니아의 반체제 활동가이자 작가로,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정치범으로 수감되었다. 석방 뒤 MRP-AEG를 세우고 1987년 히르베파르크 집회를 조직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비밀 의정서 공개와 그 결과의 청산을 요구했다. 집회는 소련 말기 에스토니아에서 대중이 공개적으로 정치적 목소리를 낸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당국은 그를 스웨덴으로 추방했다. 귀국 후에는 에스토니아의 독립 회복 과정과 민족주의 정치에 참여했으며, 말년에는 홀로코스트 부정으로 비판받는 저술을 남겼다.
1987년 8월 23일 정오, 히르베파르크에 아무도 없었다. 열두 시가 되자 2천에서 5천 명이 한꺼번에 모여들었다. 파레크는 회고했다. 「믿을 수 없었어요. 우리는 뭔가를 해야만 했어요.」
에스토니아 장교의 딸로 태어나 일곱 살에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건축가로 일하던 중 반체제 사미즈다트 활동으로 1983년 체포되어 4년간 수용소에 갇혔고, 석방 7개월 만에 MRP-AEG를 공동 창립해 히르베파르크 집회를 조직했다. 이 집회가 발트 독립운동의 출발점이 되었고, 이듬해 에스토니아 최초의 비공산 정당 ERSP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독립 회복 후 첫 내각의 내무장관을 지냈으나 1993년 풀라패 위기로 사임했고, 이후 가톨릭으로 개종해 스탈린주의 희생자 추모비 건립을 주도했다.
클루지 출신의 헝가리계 개혁교회 목사로, 차우셰스쿠 정권의 조직적 마을 파괴 계획(체계화)을 공개 비판하고 헝가리 TV와의 비밀 인터뷰에서 인권 유린을 고발하며 세큐리타테의 표적이 되었다. 1989년 12월 16일 티미쇼아라에서 당국의 강제 퇴거 집행을 막으려 모인 신도들의 저지로 시작된 시위는 곧 반체제 봉기로 확산되어 루마니아 혁명의 직접적 발단이 되었다. 혁명 후 오라데아의 개혁교회 주교로 선출되어 교회 재건과 헝가리어 교육에 힘썼으며, 2007년부터 2019년까지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1917년 3월 1일 병사분과 회의에서 그는 가명 ‘막심’으로 명령 제1호의 핵심 조항을 정리했다.
1890년대 분트에 입당해 1905년 리가 총파업을 지휘하고 1907년 런던 당대회에 분트 대표로 참석한 유대계 사회민주주의자다. 1917년 망명에서 귀국해 멘셰비키 '방위주의자'로 활동했고, 3월 1일 병사분과 회의에서 가명 '막심'으로 명령 제1호의 핵심 조항을 정리했으며,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아르한겔스크로 유배되었다.
"이 길에서는 돌아올 수 없다"며 눈물로 노동자들에게 테러를 만류했으나, 스스로 겨울궁전 지하에 다이너마이트를 쌓았다 — 동료의 증언.
뱌트카 출신 목수로, 1878년 러시아 최초의 정치적 노동자 조직 '북러시아 노동자 동맹'을 빅토르 옵노르스키와 함께 창립했다. 1880년 겨울궁전에 목수로 위장 취업해 황제 식당 아래에 다이너마이트를 반입·폭파했으나 알렉산드르 2세는 지각으로 살아남았다. 1881년 3월 이후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이 되었고, 1882년 오데사에서 스트렐니코프 검사 암살에 가담해 체포·처형당했으며, 레닌은 크렘린 사무실에 마르크스와 나란히 할투린의 고부조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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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1875뱌트카 사범학교 입학, 성적 불량으로 퇴학; 목수 기술 습득
1875–1877페테르부르크로 이주, 공장들에서 목수로 일하며 혁명 서클 가입; 카잔 시위(1876) 참가 후 비합법 지위로 전환
1878빅토르 옵노르스키와 함께 '북러시아 노동자 동맹' 창립, 강령 작성 — 러시아 최초의 정치적 노동자 조직
1879.9스테판 바티시코프라는 가명으로 겨울궁전 목수로 취업, 다이너마이트를 매일 조금씩 반입
1880.2.5겨울궁전 지하실에서 폭탄 폭파 — 귀빈 지각으로 황제는 무사했으나 근위병 11명 사망, 56명 부상
1880–1881모스크바로 도피, 노동자 선전 활동 지속
1881.3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1882.3.18오데사에서 니콜라이 젤바코프와 함께 스트렐니코프 검사 암살; 마부로 위장했으나 체포
1882.3.22오데사에서 가명으로 군사재판 후 교수형 — 겨울궁전 폭파범임이 밝혀지지 않은 채 처형
1922년 오르조니키제의 집에서 그는 세르고를 ‘스탈린의 당나귀’라고 불렀고, 곧 뺨을 맞았다.
아카키 코바히제는 1920년대 초 그루지야 공산당 지도부에서 활동한 그루지야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모스크바가 추진한 자캅카스 통합을 둘러싼 논쟁에서 지역 당 간부들의 자율성과 민족적 권리를 옹호하는 편에 섰다. 1922년 세르고 오르조니키제에게 ‘스탈린의 당나귀’라고 말한 뒤 뺨을 맞았고, 이 사건은 레닌이 그루지야 문제와 당내 강압을 비판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이제 이 법정 앞에서, 이 나라 국민 앞에서, 캘리포니아 주가 나에 대해 제기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합니다」 — 1971년 1월 5일 법정 진술
미국 마르크스주의-페미니스트 철학자이자 감옥 폐지 운동의 핵심 이론가. 1968년 CPUSA 입당, 1980·1984년 부통령 후보 출마. 1970년 체포·16개월 수감 후 무죄 평결로 국제 연대 운동 촉발. 『여성, 인종, 계급』(1981)으로 인종-성별-계급 교차 분석을 정초했고 감옥-산업복합체 개념을 발전시켰다. 1997년 비판적 저항(Critical Resistance)을 공동창립해 폐지 민주주의를 제도화했으며, UC 샌타크루즈 석좌교수로 퇴임했다. 반세기 넘게 급진 사상과 실천의 교차점에 서 있는 살아있는 혁명가.
상세 이력 보기
1944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출생 — '다이너마이트 힐' 흑인 중산층 이웃에서 성장
1965브랜다이스대학 우등 졸업 —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제자
1968CPUSA 입당, 블랙팬서당 LA 지부에서 정치교육 담당
1969UCLA 철학과 조교수 임용 — 공산당원 자격으로 즉시 해고, 법원 판결로 복직
1970–1972마린 카운티 법정 무장 사건 연루로 체포, FBI 10대 지명수배 — 16개월 수감 후 전면 무죄 평결
1979소련 레닌 평화상 수상
1980, 1984CPUSA 부통령 후보 — 거스 홀의 러닝메이트
1981『여성, 인종, 계급』 출간 — 교차성 분석의 고전
1991CPUSA 탈당,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위한 통신위원회(CCDS) 공동창립
1991–2008UC 샌타크루즈 역사의식·페미니스트 연구 교수 — 2008년 석좌교수 퇴임
1997비판적 저항(Critical Resistance) 공동창립 — 감옥-산업복합체 폐지 운동의 제도적 기반
얀 룰레프스키는 폴란드의 노동조합 지도자이자 민주화 운동가로, 비드고시치 지역 자유노조를 이끌었다. 그는 1981년 농민들의 독자적 노동조합 등록 요구를 연대의 의제로 받아들였고, 3월 19일 지방 국민평의회 회의장에서 민병대에게 폭행당했다. 이 사건은 자유노조가 전국 경고파업을 조직하고 계엄 선포 전의 긴장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계엄기에 internment를 겪었으며, 민주화 뒤에는 국회의원과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다.
1980년 8월 15일, 그녀가 발티츠카 오페라 인근에서 전차를 세우자 그단스크 대중교통 파업이 시작됐다.
헨리카 크지보노스는 그단스크의 전차 운전사이자 노동조합 활동가로, 조선소 안팎의 노동자 행동을 연결한 인물이다. 1980년 8월 15일 전차를 세워 대중교통 파업을 촉발했고, 그 소식은 다른 사업장으로 퍼져 도시 전체의 연대 행동을 넓혔다. 그녀는 사업장 간 파업위원회에서 대중교통 노동자를 대표하고 8월 협정에 서명했으며, 이후 계엄 아래에서는 수감자 지원과 지하 출판물 배포에 참여했다. 훗날 가정위탁시설을 운영하고 국회의원이 된 경력은 거리의 노동자 행동과 돌봄·제도 정치가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