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 2월 3일, 카베의 추종자 69명이 르아브르 항구에서 배에 올랐다. '이카리아로 가자!' 그들은 신대륙에 지상의 공산낙원을 세우러 떠났다.
프랑스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이자 이카리아 운동의 창시자. 1840년 『이카리아 여행』을 출판하여 노동자 협동조합에 기반한 공산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했고, '공산주의(communisme)'라는 말을 처음 정치적 용어로 정립했다. 약 40만 추종자를 거느린 당대 가장 대중적인 사회주의 옹호자로, 『진정한 기독교』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사회 평등의 복음으로 재해석했다. 1848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와 일리노이에 이카리아 공동체를 세웠고, 1898년까지 이어진 미국 최장수 비종교 공동체 실험이 되었다. 계몽주의 유토피아 사상과 노동자 운동을 잇는 교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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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디종 출생. 변호사 자격 취득
1830–18317월혁명 참여 후 바스티아 검찰총장. 코트도르 하원의원 당선
1833–1834『르 포퓰레르』 창간. 반정부 논설로 반역죄 유죄 판결, 영국 망명
1834–1839영국에서 로버트 오웬과 교류하며 공산주의 사상 구상
1840『이카리아 여행』 출판. 스스로 '공산주의자'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
1841–1847『르 포퓰레르』 복간. 약 40만 명 독자층 확보, 『진정한 기독교』 출간
1848추종자들과 미국으로 이주. 텍사스·일리노이에 이카리아 공동체 설립
1849–1856노부 이카리아 공동체 지도자. 내부 갈등 속 1856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사망
필리프 페탱은 제1차 세계대전의 장군으로, 베르됭 전투의 승리와 병사들의 사기를 회복한 지휘로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1940년 독일의 침공 앞에서 전쟁 지속을 반대하고 휴전을 요청했으며, 의회가 헌법 제정 권한을 넘긴 뒤 비시 프랑스의 국가수반으로 공화국을 권위주의 체제로 대체했다. 그의 정부는 독일과 협력하고 반유대주의 법령을 시행해 점령 질서에 프랑스 국가기구를 결합시켰다. 해방 뒤 고등법원은 그를 적과의 내통과 반역으로 사형 선고했으며, 드골은 이를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공화국의 포도주 통 속에 사회혁명의 포도주를 준비하십시오!」 — 1905년 5월 1일, 마로생의 포도 재배 협동조합을 방문한 자리에서
장 조레스는 프랑스 사회주의 통합의 중심 인물로, 1902년 프랑스 사회당을 이끌고 1905년 쥘 게드의 혁명적 사회당과 통합해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를 출범시켰다. 1904년 창간한 《뤼마니테》를 통해 개혁적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고,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반유대주의와 군국주의에 맞서 공화국의 양심을 대변했다. 마르크스주의 계급 분석에 기초한 《프랑스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사》(1900~1903)를 저술해 프랑스 혁명사학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14년 7월, 독일 사민당과의 국제적 총파업으로 세계대전을 막으려 했으나 개전 사흘 전 민족주의자 라울 비용의 총탄에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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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타른주 공화파 의원으로 국민의회 진출
1892–1893카르모 광부 총파업 지지, 독립 사회당 의원으로 재선
1898–1902드레퓌스 사건에서 진보 진영의 양심으로 활동, 《라 프티트 레퓌블리크》 편집
1934년 1월 내내 그의 지면은 연루된 의원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냈고, 2월 6일 아침 신문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에게 호소했다. 그날 밤 광장에 모인 대열의 앞자리에는 악시옹 프랑세즈의 행동대 카믈로 뒤 루아가 있었다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아들로 태어나 의학을 공부하다 문필로 옮겨 간 논객으로, 모라스와 함께 《악시옹 프랑세즈》를 창간하고 그 논조를 만들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파리 선출 하원의원을 지냈으며, 인신공격과 고발을 무기로 삼는 그의 문체는 프랑스 정치 언어에 한 세대의 흔적을 남겼다. 1923년 아들 필리프의 죽음을 경찰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벌인 소송에서 명예훼손으로 유죄를 받고 1927년 벨기에로 달아났다가 1930년 사면으로 돌아왔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에서 그는 연루된 정치인들의 이름을 날마다 지면에 올려 「도둑들의 공화국」이라는 구도를 만들었고, 이 지면 공세가 2월 6일 광장으로 이어졌다.
막심 베강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페르디낭 포슈의 핵심 참모로 연합군 작전을 조율하고 1918년 휴전 조건을 독일 대표단에 낭독한 프랑스 장군이다. 전간기에는 폴란드·레반트에서 프랑스의 군사적 영향력을 수행했으며, 1940년 5월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어 독일군의 돌파 뒤 본토에서 계속 싸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휴전을 권고했다. 그는 비시 정부와 북아프리카에서 제한적 협력을 택했지만, 유대인 박해 정책을 가혹하게 집행했고 독일과의 전면 협력에는 거리를 두었다. 전후 반역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1948년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며, 이후 페탱의 기억을 옹호했다.
「이것은 드레퓌스의 복수다!」, 종신형 선고를 듣고 리옹 법정에서, 1945년 1월 27일
프로방스 마르티그에서 태어나 청년기에 청력을 잃은 시인이자 논객으로,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악시옹 프랑세즈를 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그가 말한 「통합민족주의」는 왕정 복고와 의회 공화국의 폐기를 내걸고 유대인, 개신교도, 프리메이슨, 외국인을 프랑스를 안에서 좀먹는 「네 개의 연합국」으로 지목했다. 1926년 교황청이 악시옹 프랑세즈를 단죄했음에도 세력은 유지되었고, 1938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 내내 그의 신문은 「도둑들」을 날마다 지목했고 2월 6일 아침 지면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들에게 호소했다. 1940년 페탱의 집권을 「신의 뜻밖의 선물」이라 부르며 비시를 지지했고, 점령기 내내 저항 세력과 유대인을 지면에서 고발했다. 1945년 1월 대적 협력 혐의로 종신형과 공민권 박탈을 선고받았다.
1940년 7월 10일, 그는 사임하지 않은 채 헌법법을 공포했고 다음 날 대통령직은 페탱에게 넘어갔다.
알베르 르브룅은 광산공학 교육을 받은 프랑스의 중도우파 공화주의 정치가로, 오랜 의회·각료 경력을 거쳐 제3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으로서 제3공화국의 제한된 국가원수 관행 속에서 내각 불안정과 좌우 세력의 충돌을 조정했지만, 행정부를 직접 이끌 권한은 좁았다. 1940년 패전 국면에서 그는 북아프리카에서 항전을 계속하려 했으나 필리프 페탱을 정부 수반으로 지명했고, 7월 10일 헌법법에 서명했다. 그는 사임하지 않았지만 그 서명과 권력 이양은 비시 체제로 이어진 헌정적 단절의 핵심 장면이 되었다.
「집권하는 동안 나는 집무실을 거의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밖에 나가 파리 교외를 지나며 고물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2인승 자전거의 행렬을, 맞춰 입은 스웨터 차림의 노동자 부부들을 보았을 때, 그래도 내가 어렵고 어두운 삶들에 일종의 갠 하늘을, 한 줄기 트임을 들여놓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리옴 재판 진술, 1942년 3월
드레퓌스 사건으로 정치에 들어와 1920년 투르 대회에서 다수파의 코민테른 가입에 맞서 사회당(SFIO)의 「낡은 집」을 지킨 지도자. 1936년 인민전선 정부의 총리로 마티뇽 협정을 중재하고 2주 유급휴가와 주 40시간제를 입법했으며,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자 총리이자 최초의 유대인 총리로서 극우의 표적이 되었다. 1940년 페탱 전권 위임에 반대한 80인 중 한 명으로 비시 정권의 리옴 재판에서 피고석을 인민전선 변호의 연단으로 바꾸었고, 부헨발트 억류에서 살아 돌아와 1946년 말 과도정부 총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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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1906국사원 법관이자 문예비평가,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조레스를 따라 사회주의 운동에 입문
모리스 가믈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모 경험과 공화국 군부의 조정자로서의 명성을 바탕으로 프랑스군 최고지휘부에 오른 장군이었다. 그는 독일과의 장기전을 예상하며 마지노선에 기대는 방어 구상을 세웠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사르 공세를 제한하고 독일의 벨기에 침공에 대비해 주력을 딜강과 벨기에 국경으로 전진시키는 선택을 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의 아르덴 돌파와 세당의 붕괴 뒤 해임되었고, 프랑스 패전의 책임을 둘러싼 재판과 독일 억류를 겪었다.
1928년 그는 한 부에 10상팀짜리 일간지를 창간해 발행 부수를 백만 부 가까이 끌어올렸다. 신문은 손해를 봤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값이 싼 만큼 널리 읽혔고, 그 지면에서 자란 언어가 1934년 2월 광장에 나온 대열들의 언어가 되었다
코르시카 출신으로 향수 산업에서 당대 유럽 최대의 재산을 쌓은 실업가. 1922년 《르 피가로》를 사들이고 1928년에는 값싼 대중지 《라미 뒤 푀플》을 창간해 반공과 반유대, 반의회 선동의 무기로 삼았다. 조르주 발루아의 파소와 초기 불의 십자단을 지원했고 1933년에는 연대 프랑스를 직접 만들어 자금을 댔다. 그의 이력은 1930년대 프랑스 극우 동맹의 물음, 곧 누가 이 조직들의 비용을 댔는가에 대한 대답의 큰 몫이다. 1934년 2월 6일 광장에는 그가 세운 조직이 대열로 나와 있었고, 그는 그해 7월 이혼 소송과 재정 파탄 끝에 죽었다.
레닌은 로스메르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다섯 가지나 여섯 가지 언어로 침묵을 지키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 필리프 로브리외, 『프랑스 공산당 내부사』에서 인용
미국 태생의 프랑스 혁명적 생디칼리스트이자 코민테른 지도부 핵심 인물.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라 비 우브리에르》를 발행하며 반전 국제주의 운동을 조직했고, 모스크바에서 17개월간 체류하며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을 주도했다. 프랑스 공산당 정치국원으로 활약하다 1924년 트로츠키 옹호로 제명된 후 좌익반대파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투신했으며, 1938년 자신의 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만년에는 알제리 전쟁 반대 선언에 서명했고 회고록 『레닌의 모스크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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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914CGT 기관지 《라 비 우브리에르》 편집 —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혁명적 생디칼리슴 운동 주도
1915–1918반전 국제주의자로 치머발트 회의 프랑스 참가 조직 — 전쟁 내내 반전 활동 지속
1919–1920제3인터내셔널 가맹위원회 활동 — 모스크바 파견, 17개월 체류하며 코민테른 집행위원 선출
1921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대회 주도 — 로조프스키·톰 만과 함께 임시평의회 간부
1922–1924프랑스 공산당(PCF) 정치국원 겸 《뤼마니테》 사무총장 — 당내 좌파 지도부 핵심
1924.10트로츠키 반대 운동에 반발하여 수바린·모나트와 함께 PCF에서 제명
1929–1931프랑스 최초 트로츠키주의 조직 공산주의자동맹 결성 참여 — 전술적 차이로 1931년 탈퇴
1938.9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 개최 — GPU의 암살 위협 속 비밀 진행
1939멕시코 방문 — 트로츠키와의 우정 회복, 듀이위원회 참여, 트로츠키 손자 시에바의 후견인
「그렇다면 나는 거리에 있게 되겠군요」, 해임을 통보하는 달라디에와의 전화에서, 1934년 2월 3일. 우파 신문은 이 말을 거리로 나가겠다는 예고로 읽었고, 시아프는 실직을 뜻했을 뿐이라고 했다
코르시카 아자시오 출신의 경찰 관료로 1927년부터 1934년까지 파리 경찰청장을 지냈다. 좌파 시위에는 엄격하고 극우 동맹의 가두 행동에는 관대하다는 평이 따라다녔으며, 우파 신문과 참전군인 조직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1934년 2월 3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자 우파는 공화국이 자기 편 경찰을 쳐낸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사흘 뒤 콩코르드 광장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해임된 뒤에도 파리에서 우파 정치의 중심 인물로 남았고, 1940년 비시 정권이 레반트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해 부임하던 길에 지중해 상공에서 비행기가 격추되어 죽었다.
로베르 투숑은 산악전과 보병 교육으로 명성을 쌓은 프랑스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경험과 알프스 부대 지휘를 바탕으로 승진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의 돌파 뒤 제6군을 지휘하며 마지노선에서 이동한 부대들을 아isne 방어선에 급히 배치했고, 샤를 드골의 제4기갑사단도 몽코르네 반격에 투입했다. 그러나 전차부대는 충분히 통합되거나 지원되지 못했고, 그의 군은 전선의 틈을 막은 뒤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휴전 뒤 퇴역한 그는 비시의 국가평의회와 리옹 국가재판소에 참여해 군인으로서의 경력과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협력이 겹치는 유산을 남겼다.
폴 레노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공화국 정치가로, 경제·식민지·국방 문제에서 독자적인 노선을 보였다. 그는 나치 독일의 위협에 맞서 재무를 전시 체제로 돌리고 기갑·공군 중심의 현대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0년 프랑스가 붕괴하자 영국과의 동맹을 유지하고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계속하려 했지만, 정전파에 밀려 총리직을 사임했고 이후 비시 정권과 독일에 억류되었다. 해방 뒤에도 의원과 헌법 논의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며 강한 의회주의를 지켰다.
샤를 들레스트랭은 제1차 세계대전의 포로 경험과 기갑부대 지휘를 거친 프랑스 장군으로, 현대전에서 전차의 역할을 중시했다. 패전과 휴전 뒤에도 저항을 선택한 그는 샤를 드골의 지명으로 비밀군의 초대 지휘관이 되어 여러 저항운동의 군사 조직을 묶었다. 그는 장 물랭과 협력해 점령지 전역으로 조직을 넓혔지만 1943년 6월 9일 체포되었고, 후임을 정해야 하는 상황은 칼뤼르 회의의 배경이 되었다. 나치 수용소에서 살해된 그는 사후 해방훈장을 받았다.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이보다 큰 승리는 없었다」, 마티뇽 협정 타결 직후 라디오 연설에서, 1936년 6월
성냥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1909년 서른 살에 노동총동맹(CGT) 사무총장이 되어 1940년까지 이끈 프랑스 노동운동의 얼굴. 혁명적 생디칼리슴에서 출발했으나 1914년 신성동맹을 받아들이며 개혁주의로 옮겨 갔고, 베르사유 조약의 노동 조항 기초와 국제노동기구(ILO) 창설에 참여했다. 1936년 재통합된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에 서명했으며, 비시 정권 아래 억류되어 독일로 이송되었다가 살아 돌아와 1948년 공산당 주도의 CGT에서 갈라져 나온 「노동자의 힘」(FO)의 창립 의장이 되었고 195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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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906오베르빌리에 성냥 공장 노동자, 아버지를 실명시킨 백린에 맞선 파업으로 해고
1909–1940노동총동맹(CGT) 사무총장
1914.08반전 총파업 노선을 접고 「신성동맹」 수용, 조레스 장례식에서 연설
1919–1921베르사유 조약 노동 조항 기초, ILO 창설 참여; CGT 분열로 혁명파가 CGTU로 이탈
1936.03–06재통합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 서명, 조합원 100만에서 400만으로
샤를 욍치제르는 프랑스 식민보병 출신의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발칸 전선과 전간기 해외 지휘·협상에서 경력을 쌓았다. 1940년 세당 방면 제2군을 지휘하며 독일군의 돌파를 막지 못했고, 그 판단은 프랑스 패전의 책임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비판받았다. 그는 전투를 계속할 수 있는 한계가 임박했다고 보았으며, 페탱 정부의 전권대표단 의장으로 6월 22일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이후 비시의 국방장관이 되어 협력국가의 군사 재편을 맡았고, 1941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1939년 8월 모스크바에서 그는 소련과의 군사협력을 협상했지만, 대표단의 권한과 서방의 결단은 이미 제한돼 있었다.
프랑스 육군 장성 에메 두멩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자동차 수송과 전간기의 기계화 구상을 통해 현대적 제병협동을 밀어붙인 군인이다. 1939년 8월 모스크바에서 프랑스 군사대표단을 이끌며 소련과의 군사협력을 모색했지만, 영국의 소극적 협상과 서방의 상충한 계산 속에서 회담은 독일과 소련의 협정으로 끝났다. 1940년 프랑스군 최고사령부에서 아르덴 방어와 제9군 붕괴를 마주한 뒤에도 재건과 군사사 저술에 관여했다.
피에르 라발은 변호사와 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출발했지만 전후 우파로 이동해 제3공화국의 핵심 각료와 총리를 지냈다. 1940년 패전 뒤 그는 페탱이 국민의회에서 전권을 얻고 헌정 질서를 폐기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비시 체제의 중심에 섰다. 라발은 독일과의 협력이 프랑스의 지위를 보전할 수 있다고 믿었고, 1942년 복귀한 뒤 노동력 제공과 경찰 협력을 확대했다. 해방 후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1945년 처형되었다.
「바보들 같으니. 저들이 무엇에 환호하는지 안다면」, 뮌헨 협정에서 돌아와 부르제 공항의 환호 인파를 보고 측근에게 (동승자들의 증언으로 전하는 말), 1938년 9월 30일
빵집 아들 출신의 역사 교사로 급진당을 이끈 정치인. 1934년 2월 6일 폭동 이튿날 총리에서 물러났고, 급진당을 이끌고 인민전선에 참여해 블룸 내각의 국방장관을 지냈다. 1938년 4월 총리로 돌아와 9월 뮌헨 협정에 서명했고, 11월 법령으로 주 40시간제를 해체하고 항의 총파업을 꺾어 인민전선을 끝냈다. 1939년 9월 대독 선전포고를 했고 독소 불가침조약 뒤 공산당을 불법화했으며, 1940년 3월 핀란드 지원 실기의 책임을 지고 실각했다. 비시 정권의 리옴 재판에서 블룸과 나란히 피고석에 섰다가 부헨발트에 억류되었고, 전후 하원에 복귀해 1958년까지 활동했다.
2월 6일 밤 그의 대열은 하원 뒤편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돌입 대신 해산을 명령했다. 좌파는 그 밤에서 파시즘의 총연습을 보았고 극우는 그를 배신자라 불렀다. 두 평가는 그 뒤로도 그를 함께 따라다녔다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생시르를 거쳐 모로코와 1차 대전에서 복무하고 중령으로 예편한 직업군인. 1931년부터 참전군인 조직 불의 십자단을 이끌며 수십만 규모의 대중운동으로 키웠고, 규율과 자동차 대열을 앞세운 그 행동양식은 프랑스 좌파에게 파시즘의 얼굴로 보였다. 1934년 2월 6일 밤 그의 대열은 하원 뒤편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돌입 대신 해산을 명령했고, 이 신중함 때문에 극우 진영 안에서 배신자로 몰렸다. 1936년 인민전선 정부가 동맹을 해산하자 프랑스사회당(PSF)을 세워 선거정치로 방향을 틀었고, 이 당은 1930년대 말 프랑스 최대의 우파 정당이 되었다. 1940년 페탱을 지지해 비시 국민평의회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영국에 정보를 넘기는 조직을 운영하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독일에 억류되었고, 해방 뒤에는 비시 부역 혐의로 프랑스 당국에 다시 구금되었다가 1946년 병으로 죽었다. 그가 파시스트였는가 아니면 권위주의적 보수의 프랑스적 형태였는가는 스테른헬 이래 오늘날까지 프랑스 우파 연구의 중심 논쟁으로 남아 있다.
1919년 4월 19일, 흑해의 전함 장 바르호 위에 붉은 깃발이 올랐다. 백군 지원을 거부한 수병들의 반란 지도자로 체포된 앙드레 마르티는 콘스탄티노플 군법회의에서 중노동 20년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 해군 기관사로 복무하던 1919년, 백군 지원을 거부하며 전함 장 바르호의 반란을 이끌어 중노동 20년형을 받았다. 1923년 사면 후 프랑스 공산당에 합류해 하원의원·중앙위원을 지냈고, 1935년 코민테른 서기 겸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국제여단 정치위원으로서 알바세테에서 여단을 조직했고, 엄격한 규율로 '알바세테의 도살자'라 불렸다. 1952년 PCF에서 축출되었으나 30년간 프랑스 공산주의와 코민테른 국제 활동의 중심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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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프랑스 해군 기관병 입대
1919흑해 함대 반란 지도 — 전함 장 바르호에서 백군 지원 거부, 체포 후 중노동 20년형
「거리도 우리 것이다」라는 뜻으로 그는 의회 의석과 준군사 조직을 함께 유지했다. 1934년 2월 6일 밤 콩코르드에 도착한 대열 가운데 청년애국단이 있었고, 그날 죽은 열다섯 명 가운데 여럿이 그 조직의 단원이었다
1차 대전 참전 뒤 하원의원이 된 정치인으로, 1924년 좌파연합의 집권에 맞서 청년애국단을 세워 수만 명 규모의 준군사 조직으로 키웠다. 파란 외투와 베레모를 갖춘 이 조직은 공산당 집회를 습격하고 거리를 다투는 일을 활동으로 삼았고, 그러면서도 지도자는 의회 안에 자리를 두고 있었다. 이 이중성은 프랑스 극우 동맹들의 특징이었다. 1934년 2월 6일 청년애국단은 콩코르드 광장의 주력 대열 가운데 하나였고 사망자도 그 대열에서 나왔다. 1940년 페탱 전권 위임에 찬성표를 던졌고 점령기 파리 시의회 의장을 지냈으며, 해방 뒤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는 제1차 세계대전과 모로코 전쟁을 거친 프랑스 직업군인으로, 1940년 패전 속에서도 사단의 결속을 지킨 지휘관이다. 비시 정권 아래 복무했지만 1942년 독일군의 남부 프랑스 점령에 맞서라는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고, 투옥과 탈출 뒤 자유 프랑스에 합류했다. 육군 B와 프랑스 제1군을 지휘하며 프로방스 상륙 이후 툴롱과 마르세유를 해방하고 라인강과 다뉴브강까지 진격했으며, 1945년 베를린 항복식에서 프랑스를 대표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식민전쟁을 지휘하던 중 암으로 사망했고 사후 프랑스 원수로 추서되었다.
릴 시장 출신의 사회당 정치인으로 블룸 내각의 내무장관. 1936년 6월 파업 국면에서 점거 공장에 대한 강제 해산을 거부했고, 인민전선 강령의 첫 항목이던 극우 동맹 해산을 집행했다. 극우 주간지 『그랭구아르』가 1차 대전 중 탈영했다는 날조 기사를 퍼붓자 군 명예심사와 하원의 압도적 표결이 거듭 무고를 확인했지만 캠페인은 멈추지 않았고, 그는 11월 17일 릴의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례에는 수십만이 모였고, 그의 죽음은 언론의 명예훼손을 규제하는 입법 논의를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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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1914릴의 사회주의 학생운동, 당 기관지 기자
1914–1918전우의 시신을 수습하러 나갔다 포로가 되어 독일 수용소 억류
1925–1936릴 시장
1928–1936하원의원, 사회당 노르 연맹 지도자
1936.06내무장관, 점거 공장 강제 해산 거부와 극우 동맹 해산 집행
1936.07–11『그랭구아르』의 탈영 날조 캠페인, 군 심사와 하원 표결로 거듭 무고 확인
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군인·저항 지도자·정치가로, 1940년 패전 뒤에도 전쟁을 계속할 프랑스의 대표성을 자임했다.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를 조직해 비시 정권의 정통성 주장에 맞섰고, 해방 뒤에는 임시정부를 이끌며 국가 재건의 방향을 둘러싼 갈등을 드러냈다. 그는 강한 행정부와 국가적 자율성을 중시해 제5공화국을 세웠지만, 개인 권력과 식민지 전쟁을 둘러싼 긴장도 남겼다.
“삶은 값비싸지 않으며, 죽음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명예와 이상에 맞게 사는 것이다.”
베르티 알브레히트는 여성해방과 반파시즘을 결합한 프랑스의 활동가로, 피임과 낙태의 권리를 주장하며 여성주의 잡지를 만들었다. 나치즘의 위험을 일찍 경고하고 독일인 망명자를 도운 일은 앙리 프르네와의 협력, 그리고 지하 저항운동 콩바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Les Petites Ailes와 Vérités의 제작을 맡고 콩바의 사회사업을 조직하며 체포와 투옥, 탈출 뒤에도 활동을 계속했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고문받은 뒤 프레즈네 감옥에서 숨졌고, 사후 해방의 동료로 추서되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파업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 『르 포퓔레르』 1면에 실은 기고의 제목이자 결론, 1936년 5월 27일
교사 출신의 사회당(SFIO) 좌파 지도자. 1935년 당내 분파 「혁명적 좌익」을 결성해 인민전선을 지지하되 그 너머의 혁명적 출구를 주장했고, 1936년 5월 파업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 『르 포퓔레르』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를 실어 논쟁의 한복판에 섰다. 블룸 총리실의 공보 업무를 맡으면서도 급진화를 멈추지 않았고, 1938년 당에서 제명되자 노동자농민사회당(PSOP)을 세웠다. 전쟁 중 멕시코에 망명했고, 전후 SFIO에 복귀해 죽을 때까지 당내 좌파와 반식민주의 진영에 섰다.
코민테른 3대 지도기구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비볼셰비키. 그리고 최초의 스탈린 비판 전기 저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지 열흘 뒤인 1917년 11월 17일, 스물두 살의 수바린은 이렇게 썼다: "레닌과 그 동지들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볼셰비키와 그 지도자의 독재가 될 것이 두렵다. 이는 러시아 노동계급에게, 그리고 이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재앙이 될 수 있다. […] 우리가 바라는 것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합의로 안정된 권력을 조직하고, 그것이 한 인간의 권력이 아니라 진정한 인민의 권력이 되는 것이다." — 「최대강령파 코뮌」, 『세 푸아 디르』 제78호
코민테른 3대 지도기구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비볼셰비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 트로츠키 옹호로 제명된 후 1935년 최초의 스탈린 비판 전기를 출간, 소비에트학의 선구자로 활동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14프랑스군 동원 —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전선 참호전 경험
1916SFIO 입당, 반전 소수파 기관지 《Le Populaire》에서 활동 — '수바린' 필명 채택
1919제3인터내셔널 위원회 활동 — 코민테른 선전물 배포
1920.5'무정부주의 음모' 혐의로 체포 — 산테 교도소 수감 중 《Bulletin Communiste》 집필
「기회주의, 합법주의, 의회 환상이 있었다… 우리가 당 앞에서 용기 있게 이 자기비판을 수행한다면 대중 사이에 투쟁에 유리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20구 파리에서 레옹 블룸을 꺾고 국회의원이 된 이후 37년간 프랑스 공산당 지도부에서 모리스 토레즈의 2인자로 활동한 정치인. 제2차 세계대전 중 점령 하 프랑스에서 지하당을 지휘했으며, 전후 국민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1947년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PCF의 참여 정부 노선을 '의회 환상'이었다고 자인하며 마셜 플랜에 대한 투쟁적 반대로의 전환을 상징했다. 1969년 대통령 선거에서 21.3%를 득표, 프랑스 공산당 사상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금속노동자와 노동조합 활동가로 출발한 샤를 티용은 1919년 해군 mutiny에 참여한 뒤 프랑스 공산당과 CGTU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는 1940년 독일 점령에 맞선 민족해방과 노동계급의 단결을 호소했고, 1941년부터 공산주의 무장조직을 통합해 프랑스 유격대·의용군(FTP)을 이끌었다. 해방 뒤에는 장관과 의원으로 국가 재건에 참여했지만, 당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1952년 권력에서 밀려났고 1970년 공산당에서 제명됐다.
1934년 4월 그는 코민테른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사회당과의 즉각적 공동행동을 요구했다. 6월에 제명되었고, 7월에 당은 그가 요구한 바로 그 협정에 서명했다
생드니의 금속노동자 출신으로 스물여섯에 하원의원이 되고 코민테른 집행위원까지 오른 프랑스공산당의 젊은 지도자. 리프 전쟁 반대 선동으로 투옥되었고 1927년에는 코민테른 특사로 중국에 파견되었으며, 1931년부터 생드니 시장을 지냈다. 1934년 2월의 위기 직후 그는 당론에 앞서 사회당과의 즉각적 공동행동을 공개로 요구했고, 모스크바의 소환을 거부해 6월 27일 제명되었다. 한 달 뒤 당은 그가 요구한 것과 같은 통일행동협정에 서명했지만 그는 이미 밖에 있었다. 1936년 프랑스인민당(PPF)을 세워 파시즘 쪽으로 옮겨 갔고, 1941년 반볼셰비키 프랑스의용군단에 참여해 독일군복을 입고 동부전선에서 싸웠으며, 1945년 2월 독일에서 연합군 항공기의 기총소사를 맞고 죽었다.
장 물랭은 프랑스의 고위 관료이자 공화주의자로, 나치 점령에 맞선 국내 레지스탕스를 자유 프랑스와 연결한 조직가였다. 그는 샤를 드골의 위임을 받아 경쟁하던 저항운동들을 조정하고, 정치세력과 노동조합까지 포괄하는 국민저항위원회를 세웠다. 그의 통합 작업은 독립성을 지키려는 여러 세력의 긴장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1943년 체포와 고문으로 중단되었다.
레지스탕스 의장에서 마셜 플랜의 설계자까지, 몰로토프에게 유럽 분열이 소련 탓이라고 응수한 외무장관
1947년 7월 2일 파리 3국 회담 마지막 세션, 몰로토프가 마셜 플랜을 '유럽을 둘로 가르는 음모'라고 비난하자 비도는 '유럽을 분열시키는 것은 바로 소련의 행동'이라고 조용히 응수했고, 이튿날 베빈과 함께 16개국 초청장을 발송했다.
1943년 장 물랭 체포 후 국민저항위원회(CNR) 의장직을 이어받아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이끌었고, 해방 후 기독교민주주의 정당 인민공화운동(MRP)을 창당했다. 외무장관으로서 1947년 파리 3국 회담에서 몰로토프의 '유럽 분열' 비난에 맞서 소련의 행동이야말로 유럽을 가르고 있다고 정면 반박했고, 소련 이탈 후 영국과 함께 서유럽 16개국을 규합해 마셜 플랜 수용을 주도했다. 1946년과 1949년 두 차례 총리를 지냈으며 디엔비엔푸 포위 당시 미국에 원자폭탄 지원을 요청할 만큼 식민지 전쟁에 매달렸다. 알제리 독립에 반대하며 1962년 비밀리에 '제2의 CNR'을 조직했다가 면책특권을 박탈당하고 브라질로 망명, 1968년 사면으로 귀국했으나 영향력은 회복하지 못했다.
「우리의 단순하고 인간적인 목표는 프랑스의 청년 대중이 스포츠에서 기쁨과 건강을 찾게 하고, 노동자들의 여가를 조직해 그들이 되찾은 삶의 기쁨과 존엄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차관 취임 라디오 연설, 1936년 6월 10일
변호사 출신의 사회당 하원의원으로, 블룸 정부가 세계 최초로 만든 여가·스포츠 담당 차관직을 맡았다. 국철 40% 할인 「인민 티켓」과 유스호스텔 확충, 대중 스포츠 자격증으로 1936년 여름 60만 명의 생애 첫 유급휴가를 조직했고, 여가 정책을 노동자에게 존엄을 돌려주는 일로 정의했다. 1939년 동원을 자원해 1940년 6월 9일 엔 강 전선에서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오늘날 프랑스 전역의 수천 개 경기장과 체육관이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1941년 쿠프라에서 그는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프랑스 국기가 휘날릴 때까지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고 서약하게 했다.
필리프 르클레르 드 오트클로크는 1940년 패전 뒤 드골의 자유 프랑스에 합류해 식민지 군대와 망명군을 하나의 전투력으로 묶은 프랑스 장군이다. 그는 쿠프라에서 스트라스부르까지 이어지는 목표를 제시했고, 아프리카 전역에서 단련한 기동전을 제2기갑사단에 이식했다. 1944년 8월에는 연합군의 파리 우회 구상에 맞서 수도로 진격해 프랑스군과 레지스탕스가 주도하는 해방을 실현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는 군사적 승리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식했지만, 194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해 그 판단을 끝까지 펼치지 못했다.
뱅상 바디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급진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지방 행정과 의회에서 활동하며 참전군인과 공화국의 권리를 옹호했다. 1940년 7월 그는 헌법 개정 자체에는 열려 있었지만 페탱에게 권력을 넘겨 공화국을 없애는 데는 반대했고, 이를 밝힌 27인 동의안의 발의를 시도한 뒤 전권 부여에 반대표를 던졌다. 비시 당국의 시장직 정지 뒤 레지스탕스에 참여했으며 체포되어 다하우로 deport되었다. 전후에는 다시 의원과 참전군인 담당 장관을 지냈지만 식민 지배와 프랑스의 해외 주둔을 옹호하는 한계도 보였다.
앙리 프르네는 프랑스 육군 장교 출신으로, 1940년 패전 뒤 군사적 규율과 애국주의를 지하 저항의 조직 원리로 바꾼 인물이다. 그는 처음에는 페탱과 국민혁명이 프랑스를 구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지만, 비시의 협력과 억압을 겪으며 입장을 바꾸었다. 베르티 알브레히트와 함께 국민해방운동을 세우고 지하 신문을 확장해 콩바를 주요 저항운동으로 발전시켰으며, 전후에는 포로·강제이송자·난민의 귀환을 맡았다.
앙리 롤탕기는 금속 노동자 출신의 프랑스 공산주의자이자 국제여단 참전자로, 스페인 내전과 반나치 레지스탕스에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그는 1944년 8월 파리 지역 프랑스 국내군(FFI) 사령관으로서 동맹군이 입성하기 전에 봉기를 조직하고 지휘했다. 그의 활동은 노동운동의 조직 경험과 무장 저항을 결합해 수도 해방을 내부에서 추진한 사례였다. 전후에는 군과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레지스탕스의 독자적 역할을 공적으로 옹호했다.
1942년 7월 2일, 그는 독일 점령 당국의 유대인 체포에 프랑스 경찰을 투입하겠다고 동의했다.
르네 부스케는 프랑스의 고위 관료로, 비시 정권의 경찰 협력을 국가 주권의 외형과 결합해 추진했다. 그는 독일 보안기관과 협상해 프랑스 경찰을 동원할 자율성을 확보하는 한편, 유대인 박해와 추방을 실행하는 체계에 경찰력을 제공했다. 1942년 7월 벨디브 검거에서 그의 행정적 결정은 대규모 체포와 강제 이송을 가능하게 했으며, 해방 뒤에는 숙청을 피하고 금융·정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복귀했다.
'생산자가 자신의 실존 조건을 통제하려면 전적으로 새로운 사회관계가 발전되어야 한다' — 『경제계산과 소유형태』(1971)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CEMI를 설립해 소련 계획경제 연구를 개척했고, 나세르·네루·벤 벨라 정부의 경제 고문을 지냈다. 1963년 쿠바 '대논쟁'에서 체 게바라의 중앙집중화 노선에 맞서 분권적 시장요소를 옹호했으며, 마오쩌둥 사상에 경도되어 알튀세르와 함께 '경제주의'를 비판했다. 『소련에서의 계급투쟁』(1974-1982)에서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했고, 1972년 르몽드는 그를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마르크스주의자'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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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공산청년동맹 가입 후 프랑스 공산당 입당
1936모스크바 5개월 체류, 대숙청 목격, PCF 제명
1944–1948노동부 관료, EPHE 연구주임
1950s이집트·인도·알제리 정부 경제 고문, 유엔 전문가로 인도 제2차 5개년 계획 참여
「내 차례다. 하나의 등식을 제시하겠다: 식민주의 = 사물화」 — 『식민주의 담론』(1950)에서 유럽 식민주의를 '사물화' 한 단어로 규정하며 반식민주의 이론의 핵심 명제를 던지다.
마르티니크 출신 시인·극작가·정치인. 1935년 파리에서 상고르·다마스와 함께 '네그리튀드' 개념을 창안하고 흑인 문화 정체성 회복 운동을 주도했다. 초현실주의 장시 『고향으로의 귀환 수첩』(1939)과 반식민 에세이 『식민주의 담론』(1950)에서 식민주의를 유럽 파시즘의 원형으로 비판하고 '식민주의=사물화' 정식을 제시했다. 프란츠 파농의 스승이자 멘토였으며, 1945년부터 47년간 프랑스 국민의회 의원, 56년간 포르드프랑스 시장을 지냈다. 1956년 소련의 헝가리 개입에 항의해 프랑스 공산당을 탈퇴하고 1958년 마르티니크 진보당을 창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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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파리에서 L'Étudiant noir 창간, '네그리튀드' 개념 최초 제시
1939『고향으로의 귀환 수첩』(Cahier d'un retour au pays natal) 출간
“이데올로기는 길에서 경찰이 ‘이봐 거기!’ 하고 부르면, 몸을 돌리는 바로 그 순간에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 —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마르크스의 저작에 '인식론적 절단'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SA)와 중층결정 개념을 통해 구조적 마르크스주의를 창시했다. ENS 철학 교수로서 데리다·푸코·부르디외·바디우 등 프랑스 지성계 한 세대를 가르쳤다. 스탈린주의의 이론적 공백을 메우려 했으나, 공산당과의 긴장과 정신질환 속에서도 전후 마르크스주의를 철학의 중심으로 밀어올렸다. 1980년 정신적 발작 속에서 아내를 살해한 비극은 그의 사상적 유산을 오래도록 덮었다.
피에르 조르주는 프랑스 공산주의자이자 레지스탕스 전사로,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으로 싸우며 일찍부터 반파시즘 무장투쟁을 경험했다. 1941년 8월 21일 파리 바르베 지하철역에서 알퐁스 모제르를 사살한 행동은 프랑스 공산당의 무장 저항을 가시화했지만, 독일 점령군의 인질 처형과 저항 세력에 대한 탄압도 격화시켰다. 그는 프레도, 뒤에는 파비앵 대령이라는 이름으로 지하 전투원과 마키를 조직했고, 파리 해방 뒤에는 파비앵 부대를 이끌고 동부 전선으로 향했다. 1944년 지뢰 폭발로 사망하면서, 그의 생애는 점령에 맞선 결단과 그에 뒤따른 가혹한 보복의 긴장을 함께 남겼다.
기 모케는 파리 출신의 프랑스 공산주의 청년 활동가로, 아버지의 투옥 뒤 지하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1940년 열여섯 살에 체포되어 프랑스 당국의 수감과 행정구금을 거쳤고, 1941년 샤토브리앙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독일 점령군은 낭트의 카를 호츠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그를 인질로 선정해 1941년 10월 22일 처형했으며, 그의 죽음은 점령과 협력 체제가 젊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부과한 대가를 상징했다.
피에르 브루에는 프랑스의 트로츠키주의 역사가이자 교사운동 활동가로, 공산주의와 20세기 혁명운동의 역사를 연구했다. 에밀 테밈과 함께 쓴 『스페인의 혁명과 전쟁』은 1930년대 스페인에서 혁명 과정이 패배한 원인을 공화국 내부의 계급투쟁과 스탈린주의적 정책의 충돌 속에서 분석했다. 그는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문헌을 발굴하고 편집하며, 혁명적 실천과 역사 서술을 결합하려 했다.
앙리 루소는 제2차 세계대전기 프랑스와 비시 체제, 그리고 그 기억의 변화를 연구한 프랑스 역사가다. 이집트에서 태어난 유대계 가정이 수에즈 위기 뒤 프랑스로 이주한 경험은 그의 역사적 관심과도 맞닿아 있다. 대표작 《비시 증후군》은 해방 이후 프랑스 사회가 협력과 책임을 망각하거나 재구성해 온 과정을 분석했으며, 그는 레지스탕스의 규모와 국민적 단결을 과장하는 기억의 신화를 ‘레지스탕시알리슴’이라 불렀다. 그의 작업은 역사적 사실과 집단기억, 현재의 정치적 사용을 구별하면서도 서로의 관계를 추적하는 현대사 연구의 중요한 흐름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