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과 열강의 개입
포위된 혁명은 어떻게 살아남았고, 그 승리는 무엇을 대가로 치렀는가?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소비에트 공화국은 백군 장군들과 십여 개 열강의 개입군에 포위된 채 생존을 건 전쟁을 치렀다. 트로츠키가 조직한 붉은 군대는 500만 명 규모로 성장해 콜차크, 데니킨, 유데니치, 브란겔의 군대를 차례로 격파했고, 노동자와 농민 다수는 지주와 구체제의 복귀보다 소비에트 권력을 선택했다. 그러나 승리의 대가는 참혹했다. 전쟁과 기근, 전염병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양측 모두가 자행한 테러와 전시의 비상 통치는 이후 소비에트 국가의 성격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군대도, 동맹도, 빵도 없이: 1918년 초의 소비에트 권력
1917년 11월 7일 페트로그라드에서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는, 1918년 3월이 되기 전까지 사실상 군대라고 부를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구 제국군은 해체 중이었다. 1918년 1월 29일 소비에트 최고총사령관 니콜라이 크릴렌코는 전군의 동원 해제를 명령했고, 수백만 명의 병사들은 총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볼셰비키가 가진 무장력은 공장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적위대뿐이었고, 이들은 도시 방어나 철도 연선의 소규모 작전에는 쓸모가 있었지만 정규전을 수행할 능력은 전혀 없었다. 적군 창설은 1918년 1월 28일 인민위원회 법령으로 공식화되었으나, 그 선언에서 전선의 병사로 이어지는 길은 아직 아무도 닦지 못한 상태였다.
볼셰비키의 정치적 기반도 마찬가지로 허약했다. 10월 혁명 직후의 「소비에트 권력의 승리의 행진」이라는 기간 동안, 적위대와 혁명 수병 분견대는 철도를 따라 모길료프의 옛 군사령부, 키예프, 돈 지역으로 파견되어 산발적인 저항을 진압했다. 그러나 1918년 2월까지도 소비에트 권력이 실제로 통제하는 영토는 페트로그라드, 모스크바와 그 사이를 잇는 철도 축, 그리고 중앙 러시아의 일부 산업 도시들에 국한되어 있었다. 광대한 농촌과 변경 지역은 사실상 권력의 공백 상태였다.
1917년 11월 25일 치러진 제헌의회 선거는 볼셰비키에 냉정한 평결을 내렸다. 사회혁명당이 약 40%의 득표로 다수 의석을 차지했고, 볼셰비키는 25%에 미치지 못했다. 1918년 1월 18일 타브리다 궁에서 소집된 제헌의회는 사회혁명당의 빅토르 체르노프를 의장으로 선출하고 볼셰비키의 「노동과 피착취 인민의 권리 선언」 승인을 거부했다. 다음 날 새벽, 볼셰비키 주도의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는 제헌의회를 강제 해산했다. 혁명 내부의 민주적 대안은 13시간 만에 문을 닫았다.
도시의 상황도 절망적이었다. 전쟁과 혁명의 혼란 속에 공장은 문을 닫았고, 페트로그라드의 산업 노동자 수는 1917년 초 40만 명에서 1918년 봄에는 절반 이하로 줄었다. 식량 부족은 일상이었고, 화폐 가치는 폭락했다. 볼셰비키는 1918년 5월 「식량 독재」를 선포하고 무장 징발대를 농촌으로 보내 곡물을 거두기 시작했지만, 이것이 오히려 농민의 적대를 키우는 불씨가 되었다.
1918년 봄, 소비에트 공화국은 군대도, 동맹도, 빵도 없는 상태에서 존재 자체를 건 싸움을 앞두고 있었다. 남부에서는 코르닐로프의 후계자들이 의용군을 조직하고 있었고,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따라 이동 중이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4만 명은 곧 내전 전체를 바꿔놓을 봉화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브레스트의 시간으로 세운 붉은 군대: 스비야시스크에서 카잔까지
1918년 3월 3일 브레스트 강화는 군대가 해체된 소비에트 정부가 독일의 공세 앞에서 선택한 후퇴였다. 레닌은 즉시 강화를, 부하린은 혁명전쟁을, 트로츠키는 전쟁을 끝내되 강화에는 서명하지 않는 노선을 주장했고, 독일의 2월 공세 뒤 레닌의 노선이 관철되면서 좌파 에스에르는 정부에서 탈퇴했다. 협상과 당내 논쟁, 우크라이나·발트·핀란드에 대한 독일의 점령은 브레스트 강화에서 자세히 다룬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강화가 사 준 여덟 달 동안 무엇이 만들어졌는가다.
1월 28일의 창군 법령은 자원병 원칙에 서 있었다. 봄까지 등록한 지원자는 20만 명 안팎이었지만 그 대부분은 배급과 급여를 바라고 온 실업자와 귀향 병사였고, 전투 부대라 부를 만한 것은 라트비아 소총병과 몇몇 노동자 분견대뿐이었다. 3월 13일 전쟁인민위원이 된 트로츠키는 이 군대를 뒤집었다. 3월 4일 세워진 최고군사회의에 구 제국군 참모 장교들이 들어왔고, 4월 22일 지휘관 선출제가 폐지되고 노동자에게 8주의 군사훈련을 의무화하는 「전인민 군사훈련」이 시작되었다. 5월 29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는 강제 징집을 결의했고 6월 12일 볼가와 우랄의 51개 군에서 첫 징집이 실시되었다. 「차르의 장군들을 다시 불러들인다」는 당내 비난에 트로츠키는 정치위원 제도로 답했다. 4월 6일의 명령은 정치위원을 「가장 위급한 순간에도 혁명적 의무의 화신으로 남을 사람」으로 규정했고, 지휘관의 모든 명령은 정치위원의 부서가 있어야 효력을 가졌다. 내전 기간에 붉은 군대에 복무한 구 제국군 장교는 7만 5천 명 안팎으로, 사단장과 군사령관의 태반이 그들이었다.
이 군대가 처음 시험받은 곳은 볼가였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과 코무치의 인민군은 6월 사마라, 7월 심비르스크를 차지했고, 8월 7일 블라디미르 카펠의 부대가 카잔을 기습해 그곳에 옮겨 두었던 제정 러시아 금 보유고 6억 5천만 루블어치를 손에 넣었다. 카잔에서 모스크바까지는 철도로 800킬로미터였고 그 사이에 적군은 사실상 없었다. 8월 7일 저녁 트로츠키는 훗날 그의 상징이 될 장갑열차에 올라 모스크바를 떠났고, 이틀 뒤 카잔 서쪽 스비야시스크의 작은 역에 사령부를 차렸다. 그가 만난 제5군은 패주하는 부대였다. 8월 말 백군의 기습이 스비야시스크 코앞까지 닿았을 때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연대가 무단으로 기선을 타고 후퇴했다. 트로츠키는 연대장과 정치위원을 포함한 27명을 군법회의에 세워 총살했다. 병사가 도망치면 정치위원이, 정치위원이 도망치면 지휘관이 먼저 총살된다는 원칙이 여기서 세워졌다. 동시에 그는 모스크바에서 공산당원과 사관생도, 발트함대 수병을 끌어와 부대를 채우고, 라스콜니코프의 볼가 소함대로 카잔의 백군 함정을 공격했다.
8월 30일 모스크바에서 레닌이 총격을 받은 그 주에 반격이 시작되었다. 9월 10일 제5군과 볼가 소함대가 카잔을 탈환했고, 9월 12일 가야 가이의 철사단이 심비르스크를 되찾았다. 가이가 레닌에게 보낸 전문 「당신의 고향 심비르스크를 탈환한 것이 당신의 상처에 대한 첫 답례입니다」는 소비에트 전쟁 서사의 첫 문장이 되었다. 10월 7일 사마라가 함락되면서 코무치의 인민군은 우랄 너머로 밀려났고, 사회혁명당의 「제3의 길」은 우파에서 콜차크의 옴스크로 넘어가는 길목에 놓였다. 9월 2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는 공화국을 「무장 진영」으로 선포하고 혁명군사평의회를 세웠다. 트로츠키가 의장을, 라트비아 소총병을 이끌던 이오아킴 바체티스가 초대 총사령관을 맡았다. 붉은 군대는 1918년 말 80만, 1919년 말 300만, 1920년에는 550만 명으로 늘었다. 그 가운데 실제 전투 병력은 늘 5분의 1을 넘지 못했고 탈영병은 1919년 한 해에만 170만 명이 넘었지만, 중앙의 동원과 보급, 지휘 체계를 갖춘 정규군이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상대에게는 없는 조건이었다.
이 군대의 성격을 둘러싼 당내 논쟁은 1919년 3월 제8차 당대회에서 폭발했다. 스미르노프와 보로실로프를 비롯한 「군사반대파」는 구 장교의 기용과 규율의 복원이 혁명군의 성격을 지운다고 공격했고, 트로츠키를 대신해 연단에 선 레닌과 소콜니코프는 「군사전문가 없이 승리한 전쟁은 없다」고 답했다. 대회는 정규군 노선을 승인하되 정치위원 제도와 당의 통제를 강화한다는 절충으로 끝났다. 전문 지식과 당의 감시를 결합한 이 형태는 내전이 끝난 뒤에도 소비에트 군대의 골격으로 남았다.
한 개의 주먹과 열 개의 상륙지: 내전을 전면전으로 바꾼 1918년 5~8월
1918년 초 돈 강의 카자크와 쿠반의 의용군은 반볼셰비키 무장 저항의 거점이었다. 우크라이나의 독일 점령은 그와 성격이 다른, 훨씬 광범한 외국군의 개입이었다. 5월 말부터 8월 사이에 두 개의 사건이 이 국지적 충돌을 전면전으로 바꾸어 놓았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과 연합국의 개입이다.
군단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서 탈영하거나 포로가 된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 약 4만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독립국 건설의 꿈을 품고 러시아 편에서 싸웠으며,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후에는 연합국이 독일에 맞서 싸우는 서부전선으로 가고자 했다. 유일한 길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9,700km를 간 다음 배로 프랑스로 가는 것이었다. 1918년 3월 25일 펜자 협정에서 소비에트 정부는 경호용 소총을 제외한 모든 무기를 넘기는 조건으로 이 여정을 보장했다.
협정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철도는 단선이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조건에 따라 서쪽으로 송환되는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포로들에게 열차가 우선 배정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군은 볼셰비키가 자신들을 독일 편으로 넘기려 한다는 의심을, 볼셰비키는 군단이 연합국의 반혁명 도구가 될 것을 의심했다. 5월 14일 첼랴빈스크 역에서 동쪽으로 가는 군단 열차와 서쪽으로 가는 헝가리 포로 열차가 마주쳤다. 헝가리 쪽에서 날아온 쇳조각에 군단원 한 명이 다쳤고, 군단은 해당 헝가리인을 끌어내 린치했다. 현지 소비에트가 개입해 군단원들을 체포하자, 군단은 역을 급습해 동료들을 빼내고 도시를 장악했다.
트로츠키는 5월 25일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모든 제대를 즉각 무장해제하고, 저항하는 자는 사살하라」는 명령을 전선에 내렸다. 군단은 첼랴빈스크에서 열린 군대대회에서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무장한 채 가겠다고 결의했다. 6월 초까지 군단은 펜자에서 크라스노야르스크에 이르는 철도 연선의 소비에트 권력을 차례로 무너뜨렸고, 6월 8일에는 사마라를 점령해 사회혁명당 계열의 제헌의회 의원위원회(코무치)라는 첫 반볼셰비키 정부의 출현을 가능케 했다. 7월까지 군단은 블라디보스토크를 포함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 전 구간을 통제했다. 불과 두 달 만에 4만 명의 외국 군대가 볼가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대륙의 지정학을 다시 썼다.
이 반란과 병행하여 연합국의 개입도 현실화되었다. 개입의 첫 구실은 방어적이었다: 무르만스크와 아르한겔스크에 쌓아둔 연합국 지원 물자가 독일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는다는 명분이었다. 1918년 3월 4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다음 날, 영국 해병대 170명이 무르만스크에 상륙했다. 이 상륙은 현지 무르만스크 소비에트가 독일군의 침공을 두려워해 요청한 것이었고, 트로츠키조차 처음에는 이를 환영했다. 그러나 6월이 되자 연합국 병력은 1만 2천 명을 넘어섰고, 8월 2일에는 아르한겔스크에도 상륙했다. 극동에서는 일본이 1918년 1월 이미 블라디보스토크에 해병대를 상륙시켰고, 4월에는 병력을 증강했다. 8월 3일에는 영국·프랑스·미국 군대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윌슨 대통령은 개입에 반대하다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구출이라는 명분으로 5천 명의 북러시아 파견대와 8천 명의 시베리아 파견대를 승인했다. 일본은 최대 7만 명까지 증파해 자국의 시베리아 완충국 구상을 추진했다. 개입국은 14개국에 달했고, 상륙 지점은 북쪽의 무르만스크·아르한겔스크에서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 남쪽의 오데사와 흑해 연안, 카스피 해 너머의 캅카스까지 유라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반란과 개입은 서로를 먹여살렸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시베리아 철도를 장악하자 연합국은 「체코인 구출」을 개입 확대의 공개적 명분으로 삼았다. 연합국이 상륙하자 군단은 자신들을 연합국 선봉대로 여기며 반볼셰비키 전선 형성을 더욱 과감하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1918년 여름이 끝날 무렵, 소비에트 공화국은 사실상 사방에서 포위되었다. 3월에 체결한 독일과의 강화는 숨 돌릴 틈을 주었을 뿐, 평화를 주지는 않았다. 내전은 이제 러시아인들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독일의 점령과 남쪽의 개입
1918년 독일은 우크라이나·발트·핀란드에 걸쳐 광범한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스코로파츠키의 헤트만 정권을 뒷받침했고, 발트에서는 군정과 친독 국가 구상을 추진했으며, 핀란드에서는 발트 사단이 백군을 지원했다. 이는 연합국의 반볼셰비키 개입과 목적·시기가 다른 중앙동맹국의 전쟁 정책이었다. 11월 정전협정 제12조에 따른 독일군의 조건부 잔류는 이듬해 발트 자유군단 문제로 이어졌다. 브레스트 강화와 발트 독립전쟁이 이 연결을 다룬다.
흑해에서는 프랑스군과 그리스군이 1918년 12월부터 오데사 일대에 개입했다. 그러나 현지의 복잡한 정치적 동맹과 소비에트 측의 군사적 압박, 병사들의 전쟁 피로 속에서 1919년 4월 철수했다. 영국군의 개입도 북러시아와 시베리아에 한정되지 않았다. 던스터포스의 1918년 바쿠 작전은 석유와 교통로, 오스만 진격에 대한 우려와 연결됐고, 뒤이은 캅카스 주둔 및 중앙아시아의 말레슨 사절단은 별도의 지역적 이해를 드러냈다. 이 개입들을 처음부터 하나의 통일된 소련 전복 작전으로 묶으면 각국의 목표와 철수 시점을 놓치게 된다.
남부: 빙상 행군에서 차리친까지, 1918년의 의용군과 돈 카자크
동부에서 체코 군단이 철도를 장악하던 그 여름, 남부에서는 다른 종류의 전쟁이 자라고 있었다. 1917년 11월 옛 총사령관 미하일 알렉세예프가 돈 카자크의 수도 노보체르카스크에 도착해 장교와 사관생도를 모아 의용군을 조직했고, 12월 코르닐로프가 탈출해 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돈 카자크는 아직 싸울 뜻이 없었다. 카자크 병사들은 전선에서 돌아와 중립을 선언했고, 아타만 칼레딘은 1918년 2월 11일 「카자크가 자기 아타만을 버렸다」는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 적위대가 로스토프와 노보체르카스크로 들어오자 의용군 약 4천 명은 2월 22일 남쪽 쿠반의 초원으로 떠났다. 훗날 백군의 신화가 된 「빙상 행군」이다. 3월 얼어붙은 강을 건너고 쿠반 카자크 부대와 합류한 이 군대는 4월 10일 쿠반의 중심 예카테리노다르를 공격했고, 4월 13일 코르닐로프가 사령부를 덮친 포탄에 죽었다. 안톤 데니킨이 사령관을 이어받아 남은 병력을 돈으로 되돌렸다.
살려 준 것은 돈 카자크의 봉기였다. 3월과 4월 적위대의 징발과 처형이 돈의 스타니차들을 돌아세웠고, 4월 카자크들이 노보체르카스크를 되찾았다. 5월 16일 카자크 의회는 표트르 크라스노프를 아타만으로 선출했다. 크라스노프는 우크라이나에 들어와 있던 독일군과 손을 잡았다. 독일은 돈에 소총 1만 정 이상과 포, 탄약을 넘겼고 크라스노프는 곡물로 값을 치렀다. 연합국을 바라보던 데니킨은 이 「독일 지향」을 경멸했고, 두 사람의 불화는 1918년 남부 반볼셰비키 진영의 특징이 되었다. 6월 23일 의용군은 제2차 쿠반 원정에 나서 8월 16일 예카테리노다르를, 8월 26일 노보로시스크를 점령해 흑해로 나가는 문을 얻었다. 10월 8일 알렉세예프가 병으로 죽으면서 데니킨이 정치와 군사를 함께 쥐었다.
크라스노프의 돈군은 볼가의 차리친을 겨누었다. 차리친은 북캅카스의 곡물과 바쿠의 석유가 중앙 러시아로 올라가는 길목이었고, 돈군에게는 동쪽의 우랄 카자크와 이어질 다리였다. 7월부터 8월, 9월부터 10월, 1919년 1월의 세 차례 공격이 모두 실패했다. 이 방어전은 소비에트 쪽에도 다른 이유로 기억되었다. 1918년 6월 식량 조달 전권을 갖고 차리친에 온 스탈린이 군사 지휘까지 손에 넣고, 트로츠키가 보낸 구 제국군 장교 사령관들(스네사레프, 시틴)을 불신하며 그들의 명령을 무시한 것이다. 보로실로프의 제10군과 스탈린의 「차리친 그룹」은 지역 방어에 성공했지만 총사령부와의 충돌은 10월 트로츠키가 레닌에게 스탈린 소환을 요구하는 데까지 갔다. 군사전문가와 당 간부의 이 갈등은 이듬해 폴란드 전선에서, 그리고 20년 뒤 군 숙청에서 다시 나타난다.
1918년 겨울 남부의 전선은 두 개의 붕괴로 다시 그려졌다. 하나는 북캅카스의 붉은 군대 제11군이었다. 보급이 끊기고 발진티푸스가 덮친 이 군대는 1919년 1월 데니킨의 공세 앞에서 흩어져 아스트라한까지 카스피 해 연안 사막을 걸어 후퇴했고, 수만 명이 길에서 죽었다. 다른 하나는 독일의 패전이었다. 후원자를 잃은 크라스노프는 1919년 1월 8일 데니킨의 지휘 아래 들어가 「남러시아군」을 만드는 데 동의했고, 2월 아타만직을 내놓았다. 연합국은 11월 노보로시스크에 도착해 데니킨을 유일한 상대로 삼았다. 이렇게 1919년 봄, 의용군과 돈군, 쿠반군을 합친 데니킨의 군대가 남부의 단일한 백군이 되었다.
여기에 붉은 군대 자신이 데니킨을 도왔다. 1919년 1월 24일 당 조직국은 돈 카자크 상층을 「대량 테러」로 제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탈카자크화」로 불리는 이 정책 아래 몇 주 동안 스타니차마다 처형이 이어졌고, 3월 돈 강 상류의 뵤셴스카야에서 카자크 봉기가 일어나 붉은 군대 남부전선의 후방을 두 달 동안 묶어 두었다. 봉기군은 6월 데니킨의 기병과 합류했다. 그 틈으로 데니킨은 6월 하리코프와 예카테리노슬라프, 6월 30일 차리친까지 차지했고, 7월 3일 차리친에서 모스크바 진격 명령을 내렸다. 1918년 4천 명으로 초원을 떠났던 군대가 1년 뒤 모스크바를 겨누게 된 것은 백군의 힘만이 아니라 카자크 지방에서 소비에트 권력이 저지른 실책의 결과였다.
총력전의 후방: 총살과 징발의 1918~1920년
1918년 8월 30일,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모이세이 우리츠키가 생도 출신 청년 레오니트 카네기세르의 총에 암살되고, 같은 날 저녁 모스크바에서는 사회혁명당원 파니야 카플란이 공장 노동자 집회를 마치고 나오는 레닌에게 권총 두 발을 쏘아 중상을 입혔다. 이 두 사건은 한 달 전부터 좌파 에스에르 봉기와 V. 볼로다르스키 암살로 긴장이 쌓여 있던 볼셰비키 지도부에 결정적 전환을 가져왔다.
인민위원회는 9월 5일 「적색 테러에 관하여」라는 포고를 발표했다. 드미트리 쿠르스키 법무인민위원이 기초한 이 법령은 "계급 적들을 강제수용소에 격리하고, 백위대 조직·음모·반란에 연루된 모든 자는 총살한다"고 명시했으며, 총살된 자의 이름과 이유를 공개하도록 규정했다. 법령은 테러를 후방 확보의 체계적 수단으로 제도화한 것이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법령 발표 전부터 이미 약 1,300명의 '부르주아 인질'이 체카에 의해 처형되었고, 공식 발표 후 첫 두 달 동안 전국에서 1만 명에서 1만 5천 명이 약식 처형되었다. 이는 제정 러시아가 1825년부터 1917년까지 92년간 선고한 사형 집행 건수의 두세 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적색 테러를 백색 테러와 구분한 것은 그 이론화의 정도였다. 체카 간부 마르틴 라치스는 기관지 『적색 테러』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개별 인물과 전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부르주아지를 하나의 계급으로서 근절하고 있다. 수사할 때 피의자가 말과 행동으로 소비에트 권력에 맞섰다는 증거를 찾지 말라.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그는 어느 계급에 속하는가? 그의 출신과 교육과 직업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이 피의자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 계급 출신 자체가 사형 선고의 근거가 된 것이다.
백색 테러는 이와 달리 체계적 법령 없이 자행되었으나, 그 잔혹성에서는 뒤지지 않았다. 콜차크군은 점령지에서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를 대량 처형했다. 1918년 12월 옴스크에서는 크라실니코프 장군의 부대가 수감 중이던 사회주의 활동가와 노동자 수백 명을 학살했다. 남부에서는 데니킨군과 카자크 부대가 유대인 포그롬을 일삼아 수만 명을 학살했으며, 백군의 진격과 후퇴는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을 동반했다. 특히 도시를 포기하기 직전의 보복 학살이 빈번했다.
이와 병행하여 소비에트 정부는 경제 전체를 전쟁 동원 체제로 재편했다. 그 출발점은 1918년 5월 13일의 식량독재령이었다. 알렉산드르 츠류파가 이끄는 식량인민위원회는 곡물 독점을 무력으로 집행할 권한을 얻었고, 도시 노동자로 편성된 무장 식량분견대가 농촌으로 파견되었다. 1918년 6월에는 빈농위원회가 조직되어 마을 내부에서 부농의 곡물을 적발·몰수하는 임무를 맡았다. 볼셰비키의 구상은 마을을 계급 전선으로 재편해 빈농을 부농에 대립시킨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징발대가 종자용 곡식과 최소한의 식량마저 가져가면서 마을 전체가 저항했다.
올랜도 파이지스의 기록에 따르면, 1918년 7월과 8월에만 식량징발대에 맞선 농민 봉기가 200건 이상 발생했다. 사마라 지방의 한 마을에서는 분견대원들이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자, 농민들이 밤에 당 사무소에서 자던 12명 전원의 목을 베어 마을 입구에 장대를 세워 전시했다. 볼셰비키는 이를 '에스에르-쿨라크의 반란'으로 규정했으나, 실상은 가장 가난한 농민까지 가담한 마을 전체의 저항이었다.
1919년 1월, 식량독재는 식량할당제로 확대되었다. 중앙이 각 현에 할당량을 정하면, 현은 군으로, 군은 향으로, 향은 개별 농가로 할당량을 쪼개 내려보냈다. 모스크바가 결정한 할당량은 수확량 추산이 아니라 국가의 필요량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남는 곡식이 아니라 종자와 식량까지 징발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1920년까지 징발 대상은 곡물에서 감자·고기·우유·계란까지 거의 모든 농산물로 확대되었다.
도시에서는 공업 국유화가 가속되었다. 1918년 6월 28일 법령으로 대규모 공장이 국유화된 데 이어, 1920년 11월에는 노동자 5인 이상의 소규모 작업장까지, 마을 대장간과 재봉소조차 국유화 대상에 포함되었다. 사적 상업은 금지되었고, 모스크바의 수하렙카 시장 같은 곳은 '부르주아 잔재'로 간주되어 폐쇄되었다. 배급은 계급 배급제로 운영되어, 노동자 1범주에서 부르주아 4범주까지 모스크바는 4:3:2:1, 페트로그라드는 8:4:2:1의 비율로 배분했다. 레닌은 부르주아에게 "배급의 8분의 1"만 주거나 아예 주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화폐는 무제한 발행으로 가치가 폭락했고, 1920년 말에는 주택·철도·우편·의료가 무료화되면서 화폐 경제 자체가 폐지 대상이 되었다.
전시 공산주의는 붉은 군대에 최소한의 빵과 무기를 공급해 내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농민은 파종 면적을 줄여 대응했고, 1920년 주요 곡창 지대의 수확량은 전쟁 전의 4분의 1로 감소했다. 페트로그라드는 인구의 70퍼센트, 모스크바는 절반 이상을 잃었다. 1920~1921년 사이 탐보프 반란을 비롯한 농민 전쟁이 전국을 휩쓸었고, 결국 1921년 3월 크론시타트에서 혁명이 자기 아들들에게 총을 겨누게 되었다. 테러와 징발로 관통된 이 3년은 소비에트 국가가 생존의 조건을 마련한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그 생존이 스스로의 사회적 토대를 잠식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민주주의의 최후와 군사독재의 탄생: 콜차크의 등장과 첫 패배
1918년 11월 17일 밤, 옴스크에서 카자크 부대가 SR 계열 지도부의 자택을 급습했다. 전러시아 임시정부(우파 디렉토리) 의장 니콜라이 압크센티예프, 내무장관 블라디미르 젠지노프 등이 체포되었고, 디렉토리 경비 대대는 무장 해제되었다. 수상 표트르 볼로고츠키는 다음 날 아침 긴급 각료회의를 소집해 "전권을 단일 지도자에게 이양한다"는 결의를 채택했고, 비밀 투표로 전쟁·해군장관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선출되었다. 콜차크는 "최고 통치자" 칭호를 취하고 자신을 정식 제독으로 진급시켰다. 두 달 전 우파 국가회의에서 타협으로 탄생한 민주 연립정부는 이로써 종말을 맞았다.
반볼셰비키 진영의 주도권이 SR 의회주의에서 군부 독재로 넘어간 이 쿠데타의 배후에는 입헌민주당(카데트) 동부지부, 특히 빅토르 페펠랴예프가 있었다. 영국 군사대표 알프레드 녹스는 몇 달 전부터 "이 나라에는 채찍이 필요하다"고 공언해 왔다. 콜차크 자신은 정치 경험이 전무했다. "나는 군사기술자일 뿐 정치에는 문외한"이라고 말했고, 권력을 "십자가"에 비유했다. 그러나 그가 장악한 자원은 실질적이었다: 카잔에서 탈취한 제정 금 보유고(6억 5천만 금루블 상당), 영국이 1년간 공급한 소총 60만 정과 기관총 6,831정, 그리고 약 10만 명의 병력이었다. 군대는 세 개로 편성되었다: 라돌라 가이다의 시베리아군(북부), 미하일 한진의 서부군(중앙), 알렉산드르 두토프의 오렌부르크군(남부).
1919년 3월 4일, 백군 춘계 공세가 개시되었다. 결정타는 중앙에서 나왔다. 한진의 서부군 약 4만9천 명이 붉은 군대 제5군(약 1만 명)과 제2군 사이를 파고든 것이다. 제5군은 나흘 만에 궤멸했고, 3월 16일 한진은 우파를 무혈 점령했다. 이어 4월 10일까지 부굴마를 확보하며 볼가 강 100km 앞까지 접근했다. 북쪽에서는 가이다군이 사라풀을 점령했고, 남쪽에서는 두토프가 오르스크를 취했다. 백군은 사마라와 카잔을 위협했고, 모스크바는 동부전선으로 예비 병력을 긴급 전환해야 했다.
그러나 승리 자체가 패착이었다. 한진군의 전선은 250~300km로 늘어졌고, 남쪽의 두토프군과는 작전적 간극이 벌어졌다. 이 틈을 미하일 프룬제가 파고들었다. 동부전선 남부집단군 사령관으로서 그의 수중에는 제1군(가야 가이), 제5군(미하일 투하쳅스키), 투르케스탄군(게오르기 지노비예프)이 있었다. 구상은 단순했다: 부줄루크에 타격 집단을 집결시켜, 가장 멀리 튀어나온 한진군의 좌측면을 남에서 북으로 찔러 올라가는 것.
4월 22~25일, 가야 가이의 제1군이 살미시 강에서 바키치 장군의 제4군단을 격멸해 두 개 사단을 소멸시켰다. 이 승리로 한진군의 후방이 노출되었다. 4월 28일, 프룬제의 주력이 부구루슬란 남동쪽에서 한진의 제11·제6사단을 타격했다. 바실리 차파예프의 제25사단과 겐리흐 에이헤의 제26사단이 선봉이었다. 5월 4일 붉은 군대는 부구루슬란을 탈환했고, 5월 13일 부굴마에 입성했다. 예비대로 급파된 블라디미르 카펠의 볼가 군단마저 5월 15~19일 벨레베이 전투에서 분쇄되었다.
한진군이 벨라야 강 너머로 퇴각하자, 북쪽의 가이다 시베리아군은 측면이 위험해졌다. 바실리 쇼린의 북부집단군은 사라풀-봇킨스크 방면에서 반격해 6월 7일 이젭스크를 탈환했고, 같은 날 투르케스탄군은 벨라야 강을 도하했다. 6월 9일 우파가 함락되자 콜차크군은 우랄 산맥 너머로 총퇴각을 시작했다. 두 달 만에 공세는 궤멸로 반전되었고, 동부전선의 주도권은 결정적으로 붉은 군대에 넘어갔다. 옴스크 쿠데타로 탄생한 군사독재의 첫 번째 대시험은 끝났다. 지나치게 늘어진 전선, 후방 농민의 적대, 정치적 정통성의 결여, 패배의 요인은 이미 이 단계에서 선명했다.
오룔과 풀코보, 그리고 시베리아의 얼음: 1919년 10월부터 1920년 2월까지의 반전
1919년 10월 둘째 주, 소비에트 정권은 붕괴 직전이었다. 10월 13일 데니킨의 의용군 제1군단(사령관 쿠테포프)이 오룔을 점령했고 정찰대는 툴라주까지 출몰했다. 모스크바까지 350킬로미터, 백군이 여기까지 온 적은 없었다. 열흘 뒤인 10월 20일에는 유데니치의 북서군이 페트로그라드 외곽 풀코보 고지에 도달했다. 적군 총사령관 세르게이 카메네프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내전 전체를 통틀어 이보다 어려운 상황을 기억할 수 없다."
데니킨의 「모스크바 지령」(7월 3일)은 원래 세 방향에서 동시에 진격한다는 구상이었다. 브란겔의 캅카스군이 사라토프로, 시도린의 돈군이 보로네시로, 마이-마옙스키의 의용군이 쿠르스크-오룔-툴라 축선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모스크바로. 그러나 7월에 콜차크가 우랄 너머로 밀려나면서 동부전선의 적군 병력이 남부전선으로 쏟아져 내려왔고, 9월에는 폴란드의 피우수트스키가 「통일되고 불가분의 러시아」를 고수하는 데니킨과의 동맹을 거부하고 소비에트 측과 비밀 휴전을 맺었다. 적군은 서부전선 병력까지 남부로 돌릴 수 있었다. 여기에 9월 말 네스토르 마흐노의 혁명반란군이 백군 후방을 뚫고 데니킨의 사령부가 있던 타간로크로 쇄도하자, 의용군은 모스크바 공세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정예 연대를 후방으로 빼야 했다.
10월 11일, 예고로프가 지휘하는 적군 남부전선이 반격에 나섰다. 핵심은 라트비아 소총병사단과 에스토니아 소총병사단, 그리고 프리마코프의 적색 카자크 기병여단으로 편성된 타격집단이었다. 쿠테포프의 정예 사단들(코르닐로프, 드로즈돕스키, 마르코프)이 오룔을 향해 북진하는 동안, 라트비아 사수들은 측면에서 크로미로 파고들어 의용군의 배후를 위협했다. 오룔은 10월 20일 새벽 에스토니아 사단과 제9소총병사단에 의해 탈환되었다. 동시에 부됸니의 기병군단은 보로네시에서 마몬토프와 시쿠로의 백색 기병대를 격파했다. 부됸니는 전선 사령관의 명령을 어기고 직접 맞붙기를 선택했으며, 10월 24일 보로네시에 입성했다. 11월 15일 카스토르나야 철도 분기점이 함락되면서 의용군과 돈군은 두 동강이 났다.
위기가 무너진 것은 남부만이 아니었다. 페트로그라드 전선에서 트로츠키는 직접 북상해 방어를 조직했다. 유데니치군 제3보병사단이 모스크바-페트로그라드 철도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페트로그라드에 먼저 입성하려 한 실수 덕에, 토스노의 철도 분기점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트로츠키는 모스크바에서 지원군과 보급품을 실어 나를 수 있었다. 10월 21일 적군 제7군이 풀코보에서 반격을 개시해 백군을 차르스코예 셀로와 파블롭스크에서 몰아냈고, 10월 31일 루가가 탈환되었다. 유데니치군은 에스토니아 국경으로 밀려났고, 소비에트 정부와 평화 협상을 진행 중이던 에스토니아 정부는 백군의 무장 해제를 조건으로만 입국을 허용했다. 북서군은 12월 5일 공식 해산되었다.
동부에서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붕괴가 진행 중이었다. 10월 중순 토볼강 전선이 무너지면서 콜차크군은 조직적 저항력을 상실했고, 11월 14일 옴스크가 적군 제5군(사령관 에이헤)에 함락되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대시베리아 빙상 행군」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따라 동쪽으로 2천 킬로미터를 후퇴하는 참극이었다. 영하 40도의 한파 속에서 발진티푸스가 군대를 휩쓸었고, 철도 통제권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쥐고 있어 백군 부대는 열차를 타지도 못했다. 12월 중순 동부전선 총사령관에 임명된 블라디미르 카펠 장군은 보병들을 이끌고 크라스노야르스크의 봉기를 우회해 바이칼 호수 얼음판을 걸어서 건넜으나, 자신은 동상과 폐렴으로 1월 26일 사망했다.
콜차크 자신은 열차로 이르쿠츠크를 향했으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이미 자신들의 귀환을 우선시하고 있었다. 12월 27일 연합군 사령부는 체코 군단에 콜차크의 열차를 확보하라고 지시했고, 1월 14일 체코 군단은 콜차크와 러시아 제국의 금 보유고를 이르쿠츠크의 사회혁명당 계열 「정치중심」에 넘겼다. 정치중심은 곧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에 권력을 이양했고, 2월 6일 밤부터 7일 새벽 사이 콜차크와 총리 빅토르 페펠랴예프는 이르쿠츠크 군사혁명위원회의 결정으로 우샤콥카 강변에서 총살되었다. 그들의 시신은 얼음을 뚫은 앙가라 강 구멍으로 던져졌다. 레닌이 스클랸스키에게 보낸 암호 메모, 즉 "콜차크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퍼뜨리지 말라"는 중앙의 개입을 시사하지만, 현장의 이르쿠츠크 볼셰비키들 또한 자발적으로 같은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1919년 10월의 동시 위기는 소비에트 권력이 지상 최대의 군사적 시험을 통과한 순간이었다. 3개 전선에서 동시에 벌어진 이 반전은 백군 진영의 구조적 모순, 즉 통일된 지휘의 부재와 점령지 민중의 적대, 그리고 '통일되고 불가분의 러시아'라는 구호가 연쇄적으로 만들어낸 외교적 실패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콜차크의 시베리아 정부가 증발하고 데니킨군이 흑해 연안으로 밀려나며, 개입국들의 정치적 의지도 함께 증발했다. 영국은 1919년 말까지 백군 지원에 약 1억 파운드를 썼으나, 국내 노동계의 반대와 백군의 명백한 패색 속에 철수를 결정했다. 1920년 2월 7일 콜차크의 총살은 한 인물의 최후일 뿐 아니라, 열강의 개입이 결정적으로 실패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1920년: 서쪽의 휴전과 크림의 백군 패배
1920년 봄 소비에트 러시아는 폴란드와 브란겔의 크림 백군이라는 서로 다른 전선을 상대했다. 폴란드·페틀류라의 키예프 공세 뒤 적군은 반격했으나 8월 바르샤바에서 패배했다. 10월 12일 서명한 휴전은 18일 발효됐고, 1921년 3월 18일 리가 조약으로 국경이 정해졌다. 민스크는 소비에트 쪽에 남았으며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서부 영토가 폴란드에 편입됐다. 작전과 동맹, 강화의 비용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다룬다.
국경 지대의 강화
에스토니아의 타르투 조약(2월), 리투아니아의 모스크바 조약(7월), 라트비아의 리가 조약(8월), 핀란드의 타르투 조약(10월)은 주변 전선을 줄이려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독립을 확보하려는 이웃 국가들의 필요가 만난 결과였다. 폴란드와의 리가 조약은 같은 해가 아니라 1921년 3월이다. 이 일련의 강화는 백군을 지원하던 주변국들을 영구적인 반소비에트 연합으로 묶을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상세한 경위는 발트 독립전쟁으로 이어진다.
브란겔의 마지막 거점
남쪽에서는 이 패배와 거의 동시에 내전 최후의 막이 올랐다. 브란겔은 1920년 여름 크림에서 북타브리야로 진출해 곡창지대를 장악하고 잠시 숨을 돌렸으나, 10월 붉은 군대의 반격에 다시 반도로 밀려났다. 미하일 프룬제가 지휘하는 남부전선은 14만 6천 명의 병력과 985문의 포를 집결시켜 브란겔의 4만 1천 명을 압도했다. 크림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았다. 페레코프 지협의 튀르크 성벽(터키 성벽)은 폭 11킬로미터, 깊이 10미터의 해자를 갖춘 천연 요새였고, 백군은 3~5줄의 철조망과 3열의 참호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프룬제의 계획은 정면 돌파가 아니라 우회였다. 11월 8일 밤, 기온이 영하 12도까지 떨어진 가운데 6군 소속 15·51·52사단 병력 약 2만 명이 시바시의 얼어붙은 갯벌 7킬로미터를 도하해 방어가 취약한 리투아니아 반도로 상륙했다. 이튿날 튀르크 성벽은 협공에 무너졌고, 백군은 20~25킬로미터 남쪽의 유순 방어선으로 물러났다. 코르닐로프 충격연대의 완강한 저항과 이반 바르보비치 장군의 기병 역습이 있었지만, 네스토르 마흐노의 혁명반란군이 기관총을 장착한 타찬카로 백군 기병대를 분쇄하며 전세를 결정지었다. 11월 11일 유순 방어선이 뚫렸고, 크림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브란겔은 이미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11월 13일부터 16일까지 126척의 군함과 수송선, 예인선, 바지선에 군인과 민간인 약 14만 5천 명이 올랐다. 피난민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고, 이후 갈리폴리 반도의 막사로 흩어졌다. 유럽 러시아에서 조직된 백군의 무장 저항은 이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그 종말은 바르샤바에서의 패배와 짝을 이루었다. 붉은 군대가 세계혁명의 교두보를 세우려던 서쪽 길이 막힌 바로 그 계절에, 남쪽에서는 마지막 백군 거점을 쓸어내며 제국의 영토를 회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3의 혁명」인가, 반혁명인가: 크론시타트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브란겔이 크림에서 철수한 1920년 11월, 볼셰비키 지도부는 내전이 끝났다고 선언했다. 현실은 달랐다. 전시 공산주의의 연장 속에서 나라는 내전의 연장선에 있는 새로운 종류의 전쟁으로 빠져들었다. 1921년 2월 체카는 전국에서 118건의 농민 봉기를 집계했다. 가장 규모가 큰 탐보프 봉기에서 알렉산드르 안토노프가 이끄는 농민군은 2만 명에 가까운 병력으로 현을 장악하고 '노동농민동맹'이라는 대안 정부를 세웠다. 시베리아에서는 수천 명의 농민 유격대가 식량 징발대와 충돌했다. 볼가 강 하류와 북캅카스에서도 무장 저항이 번졌다. 레닌은 제10차 당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소부르주아적 반혁명은 의심할 여지 없이 데니킨, 유데니치, 콜차크를 합친 것보다 더 위험하다」.
1921년 3월 크론시타트 수병과 주민은 소비에트의 재선거와 정치적 자유, 징발의 종식을 요구하며 봉기했다. 정부는 이를 군사적으로 진압했다. 같은 시기 제10차 당대회는 곡물 징발을 현물세로 바꾸는 신경제정책과 당내 분파 금지를 추진했다. 양보와 통제 강화는 동시에 진행됐으며, 신경제정책이 요새 함락 뒤에야 결정된 것은 아니다. 결의·전투·진압 이후의 처벌은 크론시타트 봉기에서 다룬다.
전쟁과 징발로 취약해진 농업에 1921년 가뭄이 겹치며 볼가 유역과 주변 지역에 대기근이 발생했다. 소비에트 정부의 정책 전환과 국제 구호는 위기를 완화했지만 막대한 사망과 사회적 붕괴를 막기에는 늦었다. 식량 정책과 미국구호국을 비롯한 구호의 경위는 볼가 기근에서 이어진다.
한편 극동에서는 아직 총성이 멈추지 않았다. 1920년 4월, 소비에트 러시아는 일본 점령군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기 위해 완충국인 극동공화국을 수립했다. 표면적으로는 다당제 민주공화국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모스크바가 통제하는 임시방편이었다. 수도는 베르흐네우딘스크였다가 치타로 옮겼다. 1921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군의 묵인 아래 백위파 쿠데타가 일어나 메르쿨로프 형제의 프리아무르 임시정부가 들어섰고, 1922년 7월에는 젬스키 소보르가 미하일 디테릭스를 군사 독재자로 추대했다. 그러나 1922년 6월 일본 정부가 시베리아에서 10월 말까지 완전 철수를 선언하면서 백위파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인민혁명군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붉은 군대가 동진했고, 1922년 10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에 입성했다. 내전이 시작된 지 4년 반 만의 일이었다. 11월 15일 극동공화국은 스스로를 해산하고 RSFSR에 합병되었으며, 한 달 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수립되었다. 학자 조너선 스밀레가 지적했듯, 이로써 유럽 전역에 걸친 혁명의 물결이라는 1917년의 약속은 사실상 접힌 셈이었다. 살아남은 것은 혁명이 아니라, 내전의 용광로에서 주조된 국가 하나였다.
승리인가, 비극인가, 전주곡인가: 한 세기 동안의 평가
볼셰비키는 이겼다. 1922년 말 소비에트 권력은 옛 제국 영토의 태반을 장악했고, 12월 30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승리'는 좁은 의미의 군사적 승리였다.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독립을 지켰고, 폴란드는 리가 조약으로 서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절반을 가져갔다. 소비에트 연방은 제정 러시아보다 작은 나라로 출발했다.
인적·물적 대가는 참혹했다. 전투 사망, 양측의 테러, 1921~22년 볼가 기근, 티푸스와 콜레라 등 전염병까지 합쳐 700만에서 1,2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된다. 1921년 산업 생산은 1913년의 5분의 1로 추락했고, 도시 인구는 굶주림을 피해 농촌으로 흩어졌다. 소비에트 정권이 이만한 파괴 위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이후 모든 건설의 배경 조건이었다.
역사가들이 오늘날까지 논쟁하는 지점은 크게 셋이다.
첫째, 볼셰비키가 이긴 이유다. 소비에트 사학은 붉은 군대의 우월한 조직과 노동자·농민의 지지를 강조했고, 냉전기 서방 학자들은 백군의 무능과 분열에서 답을 찾았다. 오늘날의 합의는 양쪽 모두 진실의 일부라는 것이다. 백군이 농민에게 줄 토지 개혁도, 소수민족에게 줄 자치 약속도 내놓지 못한 반면, 볼셰비키는 적어도 적으로부터 땅을 지키는 쪽으로는 농민을 자기 편으로 묶을 수 있었다. 붉은 군대가 옛 제국 장교 7만여 명을 군사전문가로 동원한 반면, 백군은 민간 행정조차 세우지 못했다. 에반 모즐리는 "백군은 전쟁에서 이기기에는 충분한 군대를, 평화를 지배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국가만을 가졌다"고 평했다.
둘째, 전시 공산주의의 성격이다. 레닌 자신도 후에 "실수였다"고 말한 이 정책이 전시 비상조치였는지, 아니면 공산주의로의 이념적 지름길이었는지는 첨예한 논쟁거리다. 라르스 리와 피터 홀퀴스트는 강제 징발과 국가 통제의 뿌리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를 비롯한 모든 교전국의 전시 동원 체제에 있었다고 보았다. 반면 리처드 파이프스 등은 전시 공산주의에서 이미 스탈린 체제의 원형이 갖추어졌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의 연구는 양쪽 모두를 인정하는 쪽에 가깝다. 전시 공산주의는 분명 비상 상황에 대한 즉흥적 대응이었지만, 볼셰비키 지도부는 그 즉흥성을 이념의 언어로 정당화했고, 그 과정에서 일당 독재, 정치경찰의 광범위한 권한, 경제의 중앙집권화라는 소비에트 체제의 지속적 특징들이 굳어졌다.
셋째, 내전이 소비에트 체제의 유전자에 남긴 흔적이다. 1921년 3월 제10차 당대회는 크론시타트 수병들의 총성을 들으며 두 가지 역사적 결정을 내렸다. 하나는 신경제정책으로의 전환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내 분파 활동의 금지였다. 경제에서는 후퇴하고 정치에서는 조이는 이 이중 결정이 이후 소비에트사의 기본 패턴이 되었다. 시오반 필링은 "일당 국가, 광범한 권한을 가진 정치경찰, 극단적 경제 중앙집권, 토론을 선동으로 대체하는 방식, 국가 이익을 위한 관료적 인구 동원, 이 모든 것이 전시 공산주의 아래서 굳어졌다"고 지적한다.
내전은 혁명의 생존을 보장했지만, 그 생존의 방식이 혁명의 내용을 바꾸었다. 1917년의 노동자 통제와 소비에트 민주주의, 자유로운 논쟁의 공간은 1922년에 이르러 군사적 명령 체계와 일당 독재, 비밀경찰의 감시로 바뀌어 있었다. 이 변형이 내전이라는 용광로 없이 가능했을지는,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답할 수 없는 질문으로 남아 있다.
우크라이나의 라다·헤트만·디렉토리아와 농민군의 전쟁은 우크라이나 혁명과 전쟁에서 연결해 읽을 수 있다.
결과
1922년 말 소비에트 권력은 옛 제국 영토 대부분에서 승리했고, 12월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산업 생산은 붕괴하고 도시 인구는 흩어졌으며, 1921~22년 볼가 기근까지 포함하면 인적 손실은 천만 명 안팎으로 추산된다. 크론시타트의 경고 앞에서 당은 전시 공산주의를 버리고 신경제정책으로 전환했지만, 내전에서 단련된 군사적 명령과 비상조치의 통치 문화는 이후 당과 국가의 습속으로 남았다.
연표와 지도
1918.03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 적군 (소비에트 정권)
- 백군과 외국 간섭군
- 독일·오스트리아 점령
- 독립 국가와 인접국
- 마흐노 운동 지역
- 마흐노 유격 지역
- 흐리호리우 봉기 (1919년 5월)
경계는 근사치이며 작전 기록을 바탕으로 개략적으로 그렸습니다. 마흐노·흐리호리우 밖의 전선 뒤 봉기와 유격 지역, 백군 지역 안에 고립된 적군 거점(오렌부르크·우랄스크 등)은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마흐노 지역과 흐리호리우 봉기(1919년 5월 중순의 최대 범위)는 우크라이나 혁명 지도와 같으며, 빗금은 법외로 선언된 시기의 유격 지역입니다. 극동공화국(1920~1922)은 소비에트 측으로 칠했습니다.
- 11918.01.28붉은 군대 창설 법령
인민위원회가 자원병 원칙의 노동자·농민 붉은 군대를 창설했다. 봄까지 등록한 지원자는 20만 명 안팎이었지만 전투 부대라 부를 만한 것은 라트비아 소총병과 몇몇 노동자 분견대뿐이었고, 구 제국군은 1월 29일 크릴렌코의 동원 해제 명령으로 해체되고 있었다.
- 21918.03.03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조약
소비에트 정부는 독일과 가혹한 강화 조약을 맺어 우크라이나와 발트 지역 등 광대한 영토를 내주었다. 격렬한 당내 논쟁 끝에 레닌은 혁명의 생존을 위해 「숨 돌릴 틈」이 필요하다며 조약 수용을 관철했다. 협상과 독일의 동방 점령은 별도 문서 「브레스트 강화」에서 다룬다.
- 1918.03–06트로츠키, 정규군을 세우다
3월 13일 전쟁인민위원이 된 트로츠키는 지휘관 선출제를 폐지하고 구 제국군 장교 수만 명을 군사전문가로 기용하되 정치위원의 부서로 통제했다. 4월 22일 전인민 군사훈련이 시작되었고 5월 29일 강제 징집이 결의되어 6월 12일 볼가·우랄에서 첫 징집이 실시되었다.
- 31918.04.13빙상 행군과 코르닐로프의 죽음
돈에서 쫓겨난 의용군 약 4천 명이 2월부터 쿠반 초원을 행군한 끝에 예카테리노다르를 공격했고, 4월 13일 코르닐로프가 사령부를 덮친 포탄에 죽었다. 데니킨이 사령관을 이어받았다. 봄의 돈 카자크 봉기와 5월 크라스노프의 아타만 선출이 이 군대를 살려 냈다.
- 41918.05.25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
첼랴빈스크의 충돌 뒤 트로츠키가 군단의 무장해제를 명령하자,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이동 중이던 약 4만 명의 군단은 이를 거부하고 6월 초까지 펜자에서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 철도 연선의 소비에트 권력을 무너뜨렸다. 6월 8일 사마라에 사회혁명당 계열의 코무치 정부가 세워졌다.
- 51918.03–08열강의 개입
3월 무르만스크에 영국 해병대가 상륙한 것을 시작으로 8월까지 아르한겔스크, 블라디보스토크, 뒤이어 오데사와 캅카스에 14개국의 병력이 들어왔다. 일본은 최대 7만 명을 시베리아에 보냈다. 독일은 같은 해 우크라이나·발트·핀란드를 점령한 가장 큰 개입국이었다.
- 61918.08.07–09.10카잔의 상실과 탈환
8월 7일 카펠의 부대가 카잔과 제정 금 보유고를 빼앗자 트로츠키는 장갑열차로 스비야시스크에 사령부를 차리고 도망친 연대의 지휘관과 정치위원을 총살하며 제5군을 다시 세웠다. 9월 10일 카잔, 12일 심비르스크, 10월 7일 사마라가 탈환되었다. 붉은 군대의 첫 승리였다.
- 71918.09.05테러의 시대: 적색과 백색
8월 30일 우리츠키 암살과 레닌 저격 뒤 인민위원회는 「적색 테러에 관하여」 포고를 냈다. 첫 두 달 동안 1만 명에서 1만 5천 명이 약식 처형되었다. 백군 점령지에서도 노동자와 사회주의자의 대량 처형, 유대인 포그롬이 이어졌다.
- 81918.07–1919.01차리친 방어전
크라스노프의 돈군이 볼가의 요충 차리친을 세 차례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식량 조달 전권을 갖고 온 스탈린이 군사 지휘까지 손에 넣고 트로츠키가 보낸 구 제국군 장교들과 충돌한 이 방어전은 소비에트 지도부 내부 갈등의 시작이 되었다.
- 1918–1920전시 공산주의
1918년 5월의 식량 독재, 6월의 빈농위원회, 1919년 1월의 식량 할당제로 국가는 무장 분견대를 보내 곡물을 징발했고, 공업은 소규모 작업장까지 국유화되었으며 사적 상업은 금지되었다. 붉은 군대에 빵과 무기를 공급한 이 체제는 농민의 저항과 도시 인구의 이탈을 낳았다.
- 91918.11.18콜차크, 「최고 통치자」가 되다
옴스크에서 카자크 부대가 사회혁명당 계열 디렉토리 지도부를 체포한 뒤 각료회의는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에게 전권을 넘겼다. 반볼셰비키 진영의 주도권이 의회주의에서 군사독재로 넘어갔고, 영국은 소총 60만 정을 공급했다.
- 101919.03–06동부전선: 콜차크의 춘계 공세와 붕괴
3월 한진의 서부군이 우파를 점령하고 볼가 100킬로미터 앞까지 진출했으나, 4월 말 프룬제의 남부집단군이 늘어진 측면을 찔러 5월 부구루슬란과 부굴마를 되찾고 6월 9일 우파를 탈환했다. 콜차크군은 우랄 너머로 총퇴각했다.
- 111919.07.03데니킨의 「모스크바 지령」
돈 카자크 봉기가 붉은 군대 후방을 묶은 틈에 하리코프와 차리친을 차지한 데니킨은 차리친에서 세 방향의 모스크바 진격을 명령했다. 브란겔은 이 명령을 「남러시아군의 사형 선고」라 불렀다. 8월 마몬토프의 기병이 붉은 군대 후방을 휩쓸고 8월 31일 백군은 키예프에 들어갔다.
- 121919.10위기의 정점: 오룔과 페트로그라드
10월 13일 데니킨의 의용군이 모스크바 350킬로미터 앞 오룔을 점령했고 10월 20일 유데니치의 북서군이 페트로그라드 외곽 풀코보 고지에 닿았다. 라트비아·에스토니아 소총병 사단의 반격이 10월 20일 오룔을 되찾고, 부됸니의 기병이 보로네시에서 백군 기병을 격파했으며, 트로츠키가 조직한 제7군이 유데니치를 밀어냈다.
- 131920.02.07콜차크의 최후와 개입의 퇴조
11월 14일 옴스크가 함락된 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따라 2천 킬로미터를 후퇴한 「대시베리아 빙상 행군」 끝에, 체코 군단이 넘긴 콜차크는 이르쿠츠크에서 총살되었다. 영국은 백군 지원에 약 1억 파운드를 쓴 뒤 철수를 결정했다.
- 141920.04–10폴란드-소비에트 전쟁
피우수트스키와 페틀류라의 키예프 공세 뒤 붉은 군대가 반격해 바르샤바까지 진격했으나 8월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했다. 10월 휴전과 1921년 3월 리가 조약으로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 서부가 폴란드에 편입되었다. 같은 해 발트 3국·핀란드와의 조약이 북서 국경을 그렸다.
- 151920.11페레코프 돌파와 크림 철수
11월 8일 밤 프룬제의 부대가 얼어붙은 시바시를 건너 브란겔의 페레코프 방어선을 우회했고 11일 유순 방어선이 뚫렸다. 브란겔은 11월 13일부터 16일까지 126척의 배에 군인과 민간인 14만 5천 명을 태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철수했다. 유럽 러시아의 백군 저항은 끝났다.
- 161921.03크론시타트와 신경제정책
탐보프를 비롯한 농민 전쟁이 전국을 휩쓰는 가운데 크론시타트의 수병이 봉기해 소비에트 재선거와 징발 종식을 요구했고, 정부는 이를 진압했다. 같은 시기 제10차 당대회는 곡물 징발을 현물세로 바꾸는 신경제정책과 당내 분파 금지를 함께 결정했다.
- 171922.10.25블라디보스토크와 내전의 종결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인민혁명군으로 위장한 붉은 군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어왔다. 11월 극동공화국은 스스로 해산해 러시아에 합병되었고, 12월 30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수립되었다.
관련 인물 459명
지도부28
전쟁인민위원으로 붉은 군대를 창설하고 장갑열차로 전선을 오가며 전쟁 수행을 지휘했다.
전쟁 지도부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브레스트 강화를 관철해 혁명의 생존을 확보하고, 노농국방회의를 통해 전쟁 수행 전체를 총괄했다.
국가 조직자야코프 스베르들로프1885–1919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으로 전시 소비에트 국가기구를 조직하다 1919년 3월 급서했다.
우크라이나 정부 수반크리스티안 라콥스키1873–1941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내전기 우크라이나의 소비에트 권력을 이끌었다.
소비에트 라트비아 정부 수반페테리스 스투치카1865–1932소비에트 라트비아 정부 수반으로 이 사건에 관여했다.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창설자이자 전우크라이나 중앙군사혁명위원회 의장표도르 세르게예프 (아르툠 동지)1883–19211918년 2월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해 인민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제1 도네츠크 군대를 조직했으며, 전우크라이나 중앙군사혁명위원회 의장으로서 우크라이나 내전 전선을 지휘했다. 1920년에는 바시키르 전권위원으로 '검은 독수리' 봉기를 진압했다.
부하라 혁명위원회 의장 · 부하라 작전과 토후국 전복의 지도자파이줄라 호자예프1896–19381920년 9월 붉은 군대의 지원을 받은 차르주이 봉기로 부하라 토후국을 전복하고 부하라 인민소비에트공화국 인민나지르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내전기 중앙아시아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의 핵심 지도자였다.
리투아니아와 리트벨의 소비에트 정부 지도자빈차스 카프수카스1880–19351918년 12월 소비에트 리투아니아 정부의 수반이 되어 1919년 1월 빌뉴스에 들어가고 2월 리트벨을 이끌었으나, 4월 폴란드군의 빌뉴스 점령 뒤 러시아로 물러났다.
우크라이나 중앙라다 의장인 역사학자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1866–1934중앙라다 의장으로 브레스트의 별도 강화와 독일군의 진입을 받아들였고, 1918년 4월 29일 헤트만 쿠데타로 권력을 잃었다.
적군과의 동맹을 뒤집은 우크라이나 아타만니키포르 흐리호리우c.1885–19191919년 4월 소비에트군 편에서 오데사를 점령한 뒤 5월 반란을 일으켰고, 그의 부대는 옐리사베트흐라드에서 유대인 1,500명 이상을 학살했다. 7월 마흐노 측에 사살되었다.
에스토니아 노동 코뮌의 지도자얀 안벨트1884–19371918년 11월 29일 나르바에서 선포된 에스토니아 노동 코뮌의 수반으로 두 달 남짓 에스토니아 동부를 통치했고, 1919년 6월 코뮌 해산 때까지 이끌었다.
외교 인민위원게오르기 치체린1872–19361918년 외교 인민위원이 된 뒤 봉쇄와 개입 속에서 소비에트 외교와 국경 강화를 이끌었다.
1919년부터 붉은 군대 총사령관세르게이 카메네프1881–19361919년 7월 바체티스의 뒤를 이어 총사령관이 되어 여러 전선의 작전을 조정했다.
당 중앙 지도자로 정책 방향 결정니콜라이 부하린1888–1938적군 최초의 총사령관이오아킴 바체티스1873–1938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정부 수반미콜라 스크리프니크1872–1933최초의 최고총사령관 및 혁명재판소 의장니콜라이 크릴렌코1885–1938극동공화국 입안자알렉산드르 크라스노쇼코프1880–19371920년 4월 일본군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기 위한 완충국 극동공화국을 설계하고 정부 수반이 되었다.
부중대장바실리 추이코프1900–1982열아홉 살에 제28연대 부중대장으로 동부전선과 폴란드 전선에서 싸웠고 1919년 연대장이 되었다. 네 차례 부상을 입었다.
기구부대 정치위원게오르기 프로코피예프1895–1937혁명군사평의회 위원발레리 메즐라우크1893–19381918년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정부에서 군사 문제를 맡고 여러 군의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일했다.
법무인민위원이사크 시테인베르크1888–1957좌파 사회혁명당의 법무인민위원으로 1917년 12월부터 1918년 3월까지 체카의 권한을 제한하려 했고 브레스트 강화에 반대해 정부를 떠났다.
군수 생산 조직가표트르 보그다노프1882–1938우파 디렉토리 의장니콜라이 압크센티예프1878–1943전러시아 임시정부 의장으로 반볼셰비키 민주 진영을 이끌었으나 1918년 11월 18일 옴스크에서 카자크 부대에 체포되어 콜차크 쿠데타로 실각, 해외로 추방되었다.
몽골 침공을 이끈 광신적 백군 군벌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1886–1921그는 몽골로 넘어가 중국군을 몰아내고 불교 신정 정권을 세웠다가 1921년 붙잡혀 처형됐다.
콜차크군 서부군 사령관미하일 한진1871–19611919년 3월~4월 볼가 방면으로의 전략적 돌파를 이끌었고, 과도하게 늘어진 전선이 부구루슬란에서 프룬제의 반격 목표가 되었다.
콜차크 정부의 총리빅토르 페펠랴예프1885–19201918년 11월 콜차크를 최고 통치자로 옹립한 옴스크 쿠데타의 설계자였고, 이후 콜차크 정부의 총리를 지냈으며 1920년 콜차크와 함께 총살당했다.
북부 백군 사령관이자 아르한겔스크 정부 수반예브게니 밀레르1867–1939북부 백군 사령관이자 아르한겔스크 정부 수반으로 영국·미국 간섭군과 협력했으며, 망명 후 1937년 파리에서 NKVD에 납치되었다.
집행 · 지휘132
동부전선에서 콜차크군을 격파했고 1920년 남부전선 사령관으로 페레코프를 돌파해 브란겔을 크림에서 몰아냈다.
적군 사령관미하일 투하쳅스키1893–1937제5군으로 콜차크를 추격했고 서부전선군을 이끌고 바르샤바로 진격했으며 1921년 크론시타트 진압을 지휘했다.
차리친의 지휘관클리멘트 보로실로프1881–1969차리친 방어전을 지휘하고 부됸니의 제1기병군에서 정치 지도를 맡아 남부 전선을 누볐다.
체카 의장펠릭스 제르진스키1877–1926반혁명과 사보타주에 맞서는 비상위원회를 이끌며 후방을 통제했고 적색 테러의 집행을 지휘했다.
우크라이나 전선 사령관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1883–19381918~19년 우크라이나에서 소비에트군을 지휘해 독일 점령군 철수 후의 권력 수립을 이끌었다.
군 정치위원이바르 스밀가1892–1937공화국 혁명군사회의 위원으로 여러 전선의 정치위원을 지냈고 폴란드 전쟁에서 서부전선군에 배속되었다.
군사정보 수장 겸 총참모부 정치위원드미트리 쿠르스키1874–19321919~1920년 전러시아 총참모부 및 야전참모부 정치위원, 공화국 혁명군사회의 위원을 지냈고, 1919년 12월부터 1920년 1월까지 등록국(Registrup)을 이끌며 적군 군사정보 체계를 구축했다.
제1기병군 사령관세묜 부됸니1883–19731919년 11월 제1기병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데니킨군을 보로네시-카스토르나야에서 격파하고, 1920년에는 북타브리야와 크림에서 브란겔군을 분쇄했으며,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도 참전했다.
남부전선·남서전선 사령관알렉산드르 예고로프1883–1939남부전선 사령관으로서 데니킨 백군을 오룔-보로네시-로스토프에서 격파했고, 남서전선 사령관으로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키예프를 탈환하고 르부프로 진격했다.
적군 해군 사령관표도르 라스콜니코프1892–1939볼가 소함대 사령관으로 카잔을 탈환하고 '죽음의 바지선'에서 포로 432명을 구출했으며, 영국군에 체포되어 브릭스턴 감옥에 수감된 후 포로교환으로 귀환했다. 이후 볼가-카스피 소함대 사령관으로 엔젤리 상륙작전을 지휘했고, 발트함대 사령관을 지냈다. 두 차례 적기훈장을 받았다.
펜자 당위원회 의장·카스피-캅카스 전선 정치위원예브게니야 보시1879–19251918년 펜자에서 식량 징발과 농민 봉기 진압을 지휘했고, 이후 카스피-캅카스 전선과 리투아니아-벨로루시 SSR 방어평의회에서 정치위원으로 복무했으며, 데니킨 전선에서는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 특별 전권위원으로 활동했다.
제25소총병사단장바실리 차파예프1887–1919제25소총병사단을 지휘하여 동부전선의 부구루슬란·벨레베이·우파 작전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적기훈장을 받았다. 1919년 9월 5일 르비셴스크에서 우랄 코사크의 기습으로 전사했으며, 사후 소설과 영화로 소비에트 내전 신화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우랄 소비에트 지도자 · 차르 일가 처형 조직필리프 골로쇼킨1876–1941예카테린부르크에서 우랄 소비에트 권력을 주도했고 차르 가족 처형의 주요 조직자였다.
크림 타격단 책임자예핌 예브도키모프1891–19401920년 11월 체카 「크림 타격단」을 이끌어 항복한 브란겔군 병사들에 대한 대량 처형을 조직했고, 이 현장의 폭력이 그의 경력을 만들었다.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모이세이 우리츠키1873–1918적색테러를 억제하려 했으나 1918년 암살되어 오히려 그 방아쇠가 됐다.
체카 지도부뱌체슬라프 멘진스키1874–1934제르진스키의 후계자로 병상에서도 보안기구를 지휘했다.
크림 체카 의장스타니슬라프 레덴스1892–19401920년 크림 체카 의장으로 항복한 브란겔군에 대한 대량 보복을 지휘했다. 뒷날 스탈린의 처남이 되었으나 1940년 총살됐다.
붉은 지휘관바실리 블류헤르1890–1938내전의 영웅으로 극동에서 백군과 간섭군에 맞섰다.
붉은 지휘관이오나 야키르1896–1937남부전선의 내전 영웅으로 훗날 군 개혁을 이끌었다.
붉은 지휘관이에로님 우보레비치1896–1937스물세 살에 군을 지휘한 붉은 군대의 젊은 사령관이었다.
여단장 · 27·41소총병사단블라디미르 트리안다필로프1894–19311918년 6월 붉은 군대에 입대하여 우랄 전선에서 두토프, 남부·남서 전선에서 데니킨과 브란겔에 맞서 싸웠다. 1919년 5월 돈 지역에서 부상당했고, 27·41소총병사단 여단장으로 페레코프 전투와 1921년 볼가 유역 전투에 참가했다. 내전 공로로 적기훈장을 받았다.
RSFSR 식량인민위원으로 식량독재 집행알렉산드르 슐리흐테르1868–1940적군 사단장으로 반란 진압알렉산드르 토도르스키1894–1965우크라이나 체카 의장으로 적색 테러 주도프세볼로트 발리츠키1892–19371919년부터 우크라이나 체카에서 일했고 내전기 우크라이나 후방의 봉기 진압과 적색 테러 집행에 관여했다. 뒤에 우크라이나 GPU·NKVD 수장이 되었다.
적군 작전국장으로 주요 작전 기획보리스 샤포시니코프1882–1945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위원예멜리얀 야로슬랍스키1878–1943체카 부의장 및 미하일 대공 처형 관여가브릴 먀스니코프1889–19451918년 6월 페름에서 미하일 대공의 납치·살해를 조직했다. 뒤에 당내 언론 자유를 요구하는 「노동자 그룹」을 이끌어 레닌과 충돌했다.
최고경제회의 부의장으로 군수 관리게오르기 로모프 (오포코프)1888–1937적군 기병 지휘관그리고리 코톱스키1881–1925재무인민위원으로 전쟁 재정 담당니콜라이 크레스틴스키1883–1938교통·대외무역 인민위원레오니트 크라신1870–1926이르쿠츠크 군관구 사령관마르테먄 류틴1890–1937제3군 사령관 및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미하일 라셰비치1884–1928우랄 적군 지휘관세르게이 므라치콥스키1888–1936캅카스 소비에트화 지휘그리고리 오르조니키제1886–1937해군인민위원 및 내전 지휘관파벨 디벤코1889–1938제8군 및 제13군 정치부장로잘리야 제믈랴치카1876–1947제1기병군 내전 지휘관세묜 티모셴코1895–1970체카 부의장야코프 페테르스1886–1938체카 부의장으로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봉기 진압과 「록하트 음모」 수사를 지휘했고, 1919년 페트로그라드와 키예프의 방어 시기에 비상 전권을 행사했다.
제6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남부전선 정치국장블라디미르 포툠킨1874–1946제6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과 서부전선·남부전선 정치국장을 역임하며 내전을 치렀다. 스탈린의 개인적 지시로 특별분견대를 지휘하고 전선혁명재판소 순회법정을 주재했으며, 키예프 해방 작전의 지휘 공로로 1920년 적기훈장을 받았다.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군 사령관표트르 바라노프1892–1933제4도네츠크군 사령관을 지냈고, 제8군·동부전선 남부집단·투르케스탄 전선·제1군·제14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내전 전역에서 복무했으며, 1921년 크론슈타트 진압에 참가해 적기훈장을 받았다.
체카 제1부의장 겸 특별재판소장이반 크세노폰토프1884–1926내전기 내내 제르진스키의 오른팔로서 체카의 '불변 지도핵심 4인' 중 한 명으로 후방 보안을 총괄했다. 좌파SR 봉기 진압, '전술중앙' 재판,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을 직접 지휘했으며, 특별재판소장으로서 적색 테러의 사법적 골격을 만들었다.
로마노프 일가 처형 지휘관야코프 유롭스키1878–19381918년 7월 16-17일 밤, 이파티예프 하우스 사령관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로마노프 일가 11명의 처형을 직접 지휘하고 차르를 자신의 마우저 권총으로 사살했다. 이후 시신 은닉과 훼손까지 진두지휘했다.
체카 정치수사 요원야코프 아그라노프1893–1938군수보급 책임자알렉산드르 세레브롭스키1884–1938체카 간부알렉산드르 고르킨1897–1988붉은 군대 사단 정치위원아브라아미 자베냐긴1901–1956캅카스 체카·GPU라브렌티 베리야1899–19531919~1920년 바쿠와 그루지야에서 정보·지하 활동을 했고 1921년 아제르바이잔 체카에 들어가 캅카스 체카·GPU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체카 요원보리스 베르만1901–1939남부전선에서 데니킨 백군 격퇴에두아르트 베르진1894–1938체카 의장글레프 보키1879–19371918년 우리츠키 암살 뒤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이 되어 적색 테러 첫 달의 처형을 지휘했고, 이후 동부전선과 투르케스탄의 특별부를 맡았다.
제7군 정치부장그리고리 예브도키모프1884–1936제1기병군 포병대장그리고리 쿨리크1890–1950북카프카스 혁명군 총사령관 대행이반 페드코1897–1939혁명군사재판소장이반 골랴코프1888–1961내전기 혁명군사재판소에서 재판을 맡았다. 뒤에 소련 최고재판소장이 되었다.
25소총병사단장이반 쿠탸코프1897–1938붉은 군대 지휘관이반 리하초프1896–1956기병여단장이반 마슬렌니코프1900–1954체카 주요 직책이즈라일 다긴1895–1940체카 수사관미하일 리트빈1892–1938중대장 · 대대장막심 푸르카예프1894–1953체카 특별부장미하일 케드로프1878–19411918년 북부 전선에서 연합국 개입군에 맞선 방어를 지휘한 뒤 체카 특별부장으로 군 방첩을 맡았고, 아르한겔스크와 볼로그다의 처형으로 악명을 얻었다.
체카 활동미하일 트릴리세르1883–19401918~1921년 시베리아와 극동에서 지하 활동과 체카 업무를 맡았고, 극동공화국의 정보기관을 이끌었다.
연대장·군사위원미르 자파르 바기로프1895–1956체카 의장게오르기 몰차노프1897–1937체카 의장니콜라이 안티포프1894–1938체카 기관 근무니콜라이 리치코프1897–1959체카 군 방첩니콜라이 니콜라예프-주리드1897–1940붉은군대 정치장교폴리나 젬추지나1897–1970방첩·정보 부서표트르 페도토프1900–1963공급위원표트르 보이코프1888–1927체카 부의장세묜 로보프1888–1937기병여단장세묜 우리츠키1895–1938체카 수사관세르게이 오골초프1900–1976체카 활동아브람 슬루츠키1898–1938체카 기관솔로몬 모길렙스키1885–1925체카 비밀작전부장스타니스와프 메싱1890–19371918년 모스크바 체카에서 시작해 1920년 모스크바 체카 의장이 되었고 비밀작전부를 이끌었다.
체카·OGPU 부대 지휘관바실리 체르니셰프1896–1952군사재판소 판사바실리 울리히1889–19511919년부터 혁명군사재판소 판사로 내전기 군사 재판을 맡았다. 뒤에 1930년대 대숙청 재판의 재판장이 되었다.
붉은 카자크 지휘비탈리 프리마코프1897–1937기병대 지휘블라디미르 크류코프1897–1959군정위원블라디미르 폴론스키1893–1937군사정보국장게오르기 퍄타코프1890–1937체카 전권대표레오니트 자콥스키1894–19381918년 체카에 들어가 남부와 우크라이나 전선의 특별부에서 방첩을 맡았다.
체카 근무지노비 우샤코프1895–1940사단 정치부장테렌티 데리바스1883–1938내전기 붉은 군대 사단 정치부장을 지낸 뒤 1920년 체카로 옮겼다.
체카 특별부 부장미하일 프리놉스키1898–1940군사재판소 부의장이오나 니키첸코1895–1967선전부 정치위원라자르 카가노비치1893–19911918년 니제고로드에서 당 조직을 이끌고 1919년 보로네시에서 데니킨군에 맞선 방어를 조직했으며 1920년 투르케스탄에서 일했다.
아스트라한 군사행정부 사령관세르게이 키로프1886–19341919년 아스트라한 방어를 조직해 볼가 하류를 지켰고, 1920년 붉은 군대의 바쿠 진입과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화를 이끌었다.
현 체카 부장마트베이 베르만1898–19391918년 시베리아의 현 체카 부장으로 백군 후방에서 지하 활동을 했고 콜차크 붕괴 뒤 시베리아 체카에서 일했다.
체카 요원브세볼로드 메르쿨로프1895–1953체카 요원나움 에이팅곤1899–19811920년 고멜 체카에서 경력을 시작해 사빈코프 계열 조직의 침투를 수사했다.
체카 요원니콜라이 블라시크1896–1967국립 수상 운송국장얀 루주타크1887–19381918년부터 수상 운송을 국유화·관리하는 국립 수상운송국을 이끌어 볼가 소함대와 물자 수송의 기반을 만들었다.
텔라비 체카 정치국장라브렌티 차나바1900–1955체카 요원겐리흐 야고다1891–19381919년 체카에 들어가 1920년 특별부와 관리부에서 일했고, 내전 뒤 제르진스키 아래에서 빠르게 승진했다.
체카 요원야코프 세레브랸스키1892–19561920년 바쿠에서 체카에 들어가 특별부에서 일했다.
그로즈니 방어전 사령관니콜라이 기칼로1897–19381918년 8~11월 그로즈니 소비에트군을 지휘해 백카자크·산악 반군에 맞서 100일 방어전을 이끌었고 적기훈장을 받았다.
제44소총병사단장니콜라이 쇼르스1895–1919보훈 연대를 조직해 키예프 탈환을 이끌었고 제44소총병사단장으로 코로스텐 철도 방어전을 지휘하다 1919년 8월 전사했다.
극동 전선의 볼셰비키 군사 지도자세르게이 라조1894–1920자바이칼 전선에서 세묘노프 백군과 싸우고 프리모리예 유격대를 총지휘했으며, 1920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 봉기를 조직해 극동의 콜차크 통치를 무너뜨렸다.
식량인민위원알렉산드르 추루파1870–1928식량인민위원으로 1918년 5월 식량독재령을 집행했고, 식량군을 조직해 곡물 강제 징발 체계를 총괄했다.
체카 지도부·우크라이나 체카 의장마르틴 라치스1888–19381918년 10월 적색 테러의 계급 원칙을 공식화했다. 피의자의 계급 출신을 기준으로 삼으라는 지시는 적색 테러의 이론적 정당화가 되었다.
투르키스탄 군대 사령관게오르기 지노비예프1887–1934동부 전선 반격 작전에서 부구루슬란, 벨레베이, 우파 전투를 지휘했다.
콜차크 추격전의 적군 5군 사령관겐리흐 에이헤1893–19681919년 11~12월, 토볼에서 옴스크, 톰스크,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 콜차크의 후퇴를 끝까지 압박했다.
제13군·우안집단 사령관로베르트 에이데만1895–19371920년 여름 제13군 사령관 겸 우안집단 사령관으로 드네프르 강을 건너 카홉카 교두보를 장악해, 크림에서 진출한 브란겔군의 측면과 후방을 겨누는 돌파구를 만들었다.
적군 부대 지휘관표도르 트루힌1896–1946내전 중 적군 중대·대대·연대를 지휘했다.
적군 지휘관블라디미르 고레프1900–19381918년부터 1921년까지 적군 지휘관으로 러시아 내전에 참전했다.
여러 전선의 혁명군사평의회 위원니콜라이 쿠즈민1883–1938내전 동안 여러 전선의 혁명군사평의회에서 복무했다.
서부전선 정보부서 책임자아르투르 스타솁스키1890–19371919년 11월부터 1920년 12월까지 서부전선에서 첩보·정보부서를 이끌었다.
적군 사단장과 원정군단 지휘관보리스 펠트만1890–1937내전 중 제55소총사단장과 탐보프 농민반란 진압 원정군단 지휘관을 지냈다.
식량 조달 담당 차관알렉산드르 스미르노프1877–1938내전기에 식량인민위원부 차관으로 곡물 조달을 담당했다.
제12군 혁명군사위원회 위원블라디슬라프 코시오르1891–19381920년 제12군 혁명군사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전러시아 총참모부 부서장레프 마랴신1894–1938내전기에 전러시아 총참모부의 보편군사훈련 부서를 이끌었다.
투르키스탄 당 기관 지도자아크말 이크라모프1898–1938내전기에 투르키스탄에서 당 기관을 이끌었다.
강제 곡물 징발 조직자모이세이 칼마노비치1888–1937내전기에 벨라루스와 리투아니아-벨라루스 식량인민위원으로 강제 곡물 징발을 조직했다.
내전기 수송 담당 철도인민위원블라디미르 넵스키 (페오도시 크리보보코프)1876–19371918~1919년 철도인민위원으로 내전기 수송을 책임졌다.
전선에서 활동한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콘스탄틴 메호노신1889–1938공화국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여러 전선에서 활동했다.
적군 연대·여단의 부관과 참모장볼데마르 울메르1896–19451919년부터 1922년까지 적군 연대와 여단에서 부관과 참모장으로 복무했다.
내전기 후방 지휘관안드레이 젤렌초프1896–1941내전기에 붉은 군대의 군사위원과 후방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제5군 정치국장이반 추구린1883–1947내전기인 1918~1919년 제5군 정치국장을 지냈다.
제5군 정치부장바실리 카유로프1876–1936내전 중 동부전선 제5군 정치부장을 맡았다.
바쿠 점령을 이끈 장갑열차 지휘관미하일 G. 예프레모프1897–1942내전 시기 장갑열차 부대를 이끌고 바쿠를 점령했다.
체카 특별기병대대 지휘관미하일 차렙스키1898–1963내전에서 체카 기병대에 참전하고 특별기병대대를 지휘했다.
정치위원바실리 볼스키1897–1946내전기에 연대·사단·군단급 정치위원으로 복무했다.
그루지야 소비에트화의 혁명위원장필리프 마하라제1868–19411921년 2월 혁명위원회 의장으로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다.
남부전선 보급·위생 담당파벨 라지미르1891–1920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보급과 위생을 조직했다.
동부전선 사령관미하일 무라비요프1880–19181918년 6월 동부전선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맞서는 전선을 지휘했다.
장갑열차 지휘관아나톨리 젤레즈냐코프1895–1919내전기에 기관총 사수와 장갑열차 지휘관으로 돈·크라스노프·데니킨 부대와 싸웠다.
정치부장으로 복무세묜 주콥스키1896–1940내전 중 투르케스탄 전선 제4군 정치부 부장 등을 역임했다.
혁명재판소 복무클라브디야 니콜라예바1893–19441919년 가을 유데니치 백군이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할 때 제2시구역 혁명재판소에서 복무했다.
적군 대대·연대 지휘관니콜라이 크루친킨1897–1938내전기에 적군 대대와 연대를 지휘했다.
참여222
초기 협상 대표로 이 사건에 관여했다.
전선 정치위원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차리친 방어와 남서전선에서 정치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이 시기 군사 지도부와 빚은 갈등은 이후 당내 대립의 씨앗이 되었다.
좌파 에스에르 봉기의 지도자마리야 스피리도노바1884–19411918년 7월 볼셰비키와 결별하고 좌파 에스에르 봉기에 가담했다. 독일 대사 미르바흐 암살을 조언했으며, 봉기 진압 후 체포되어 1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혁명 공로로 사면되었다. 이후 1919년 다시 체포되어 크렘린 병원에 감금되었고 탈출해 지하 활동을 이어갔다.
우크라이나 혁명반란군 총사령관네스토르 마흐노1888–1934아나키스트 농민군인 우크라이나 혁명반란군(마흐노프시나)을 이끌고 남부 우크라이나에서 데니킨과 브란겔의 백군에 맞섰다. 적군과 두 차례 전술적 동맹을 맺었으나 매번 볼셰비키에 의해 동맹이 파기되었다. 1921년 적군의 포위 섬멸 작전으로 패배하고 국외로 탈출했다.
캅카스 지하조직 재건자카모1882–19221918~1920년 캅카스와 남러시아에서 볼셰비키 지하조직을 재건했고, 1920년 4월 바쿠 무장봉기를 준비하는 데 적극 참여했다.
전선 촬영감독 · 붉은 군대의 전투를 기록한 선전영화 제작자레프 쿨레쇼프1899–19701919년 여름 에두아르트 티세와 함께 동부전선에서 전투 기록영화를 촬영했고, 1920년 6월 서부전선 혁명군사회의의 임무를 받아 표트르 예르몰로프와 함께 전투 장면과 극 장면을 촬영하여 선전영화 〈붉은 전선에서〉를 제작했다.
선전선 『붉은 별』 호 편집자, 『베드노타』 편집장뱌체슬라프 카르핀스키1880–1965내전기 선전선 「붉은 별」 호에서 신문 『붉은 별』을 편집했고, 빈농층을 대상으로 한 볼셰비키의 대표적 대중지 『베드노타』의 편집장으로 전시 농민 동원과 선전의 핵심 통로를 맡았다.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선전교도부장으로도 복무했다.
핀란드 적색정부 수반쿨레르보 만네르1880–19391918년 핀란드 내전 당시 핀란드 인민대표단 의장으로 적색정부를 이끌었고, 4월에는 적위대 총사령관을 겸임하며 독재권을 부여받았다. 패배 후 소비에트 러시아로 망명하여 모스크바에서 핀란드 공산당을 공동 창당했다.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의 내무 인민위원지그마스 안가리에티스1882–1940소비에트 리투아니아와 리트벨 정부의 내무 인민위원으로 1918~1919년 소비에트 국가 건설에 참여했다.
해군 정치위원라리사 레이스네르1895–1926볼가 소함대의 정치위원이자 종군기자로 내전을 기록했다.
핀란드 혁명정부 교육 인민위원오토 빌레 쿠시넨1881–19641918년 핀란드 노동자 혁명정부(인민위원회의)에서 교육 인민위원을 지냈다. 내전 패배 후 RSFSR로 망명했고, 같은 해 모스크바에서 핀란드 공산당을 공동 창립했다.
붉은 테러의 도화선V. 볼로다르스키 (모이세이 골드시테인)1891–1918페트로그라드의 선전 인민위원으로, 1918년 그의 암살이 붉은 테러의 불씨가 됐다.
보로트비스트 지도자·제12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올렉산드르 슘스키1890–19461918년 1월 중앙 라다에 맞서 좌파 에스에르 봉기를 이끌었고, 헤트만 정부에 대항한 민중봉기에 참여했다. 보로트비스트 중앙위원으로서 1919년에는 드니프로 좌안에서 디렉토리(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총재부)에 대항한 봉기를 조직했으며, 내전 후반에는 제12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폴타바·오데사 현 집행위원장을 지냈다.
서부전선 총사령관 및 벨라루스·아르메니아 소비에트화 지도알렉산드르 먀스니코프 (먀스니캰)1886–1925붉은 군대 작전 기획 및 군사 교육알렉산드르 스베친1878–1938크론시타트 봉기 진압 참여알렉산드르 보론스키1884–1937군사혁명위원회 위원 및 우크라이나 전선 참여안드레이 부브노프1884–1938혁명군사평의회 위원 및 군 정치위원아르카디 로젠골츠1889–1938첸트로시비리 의장으로 시베리아 소비에트 권력 수립보리스 슈먀츠키1886–1938차파예프 사단 정치위원드미트리 푸르마노프1891–1926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얀 가마르니크1894–1937동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게오르기 블라고느라보프1896–1938전우크라이나 혁명위원회 위원그리고리 그린코1890–1938서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이오시프 운쉴리흐트1879–1938시베리아 내전기 당 조직가이반 스미르노프1881–1936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 및 정치국원레프 카메네프1883–1936내전 참전키릴 메레츠코프1897–1968내전기 기병대 지휘관콘스탄틴 로코솝스키1896–196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스타니스와프 코시오르1889–1939당·군 행정에서 내전 지원발레리안 쿠이비셰프1888–1935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레오니트 세레브랴코프1888/1890–1937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 대표단 서기레프 카라한1889–1937적군 정치위원레프 메흘리스1889–1953내전 참전 붉은군대 병사미하일 코시킨1898–1940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화 주도나리만 나리마노프1870–1925압하지야 무장 봉기 조직네스토르 라코바1893–1936식량인민위원으로 공급 관리니콜라이 브류하노프1878–1938모스크바 군관구 초대 사령관니콜라이 무랄로프1877–1937최고경제회의 의장 및 좌파 공산주의자발레리안 오볼렌스키1887–193810월 봉기 작전사령관 및 적군 조직가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1880–1948제11군 혁명군사위원폴리카르프 므디바니1877–1937극동공화국 군사위원 및 시베리아 당 지도자파벨 포스티셰프1887–1939최고경제회의 및 정부 지도자알렉세이 리코프1881–1938적군 정치총국장 및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세르게이 구세프1874–1933내전기 적군 항공 정비사 및 정치위원세르게이 일류신1894–1977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1885–1937브레스트-리토프스크 대표 및 투르케스탄 전선 참여그리고리 소콜니코프1888–1939군사혁명위원회 위원 및 노조 지도자미하일 톰스키1880–1936벨라루스 공산당 중앙국 서기빌헬름 크노린1890–1938코카서스 당 조직가비사리온 로미나제 (베소)1897–1935우크라이나 산업 복구 지도블라스 추바리1891–1939적군 정보부 창설 및 요원얀 베르진1889–1938코민테른 의장 및 정치국원그리고리 지노비예프1883–1936고리키 콜로니 설립자 · 내전 고아들의 교육자안톤 마카렌코1888–19391920년 내전과 기근으로 발생한 수백만 명의 부랑아(베스프리조르니키) 문제에 대응하여 폴타바 인근에 비행청소년을 위한 고리키 콜로니를 설립했다. 이 경험은 이후 '마카렌코 시스템'의 토대가 되었다.
폴레프콤 위원·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책임서기펠릭스 콘1864–19411920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중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폴레프콤) 위원으로 비아위스토크에서 폴란드 소비에트 정부 수립을 시도했고, 1921년에는 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책임서기로 내전 말기 우크라이나의 당 조직을 이끌었다.
혁명 선전 예술가 · 〈붉은 쐐기로 백군을 분쇄하라〉엘 리시츠키1890–19411920년 발표한 선전 포스터 〈붉은 쐐기로 백군을 분쇄하라〉는 적군의 백군 진영 돌파를 기하학적 도형만으로 형상화해 내전기 소비에트 선전 그래픽의 상징이 되었다.
중앙무슬림군사대학 의장 · 바시키르군의 적군 편입 주선자미르사이드 술탄-갈리예프1892–1940중앙무슬림군사대학 의장으로서 바시키르 군대가 적군 편으로 넘어오는 협상을 주선했다. 1919년 7월 10일 명령 제10호에 서명하여 바시키르 공화국에 대한 선동과 바시키르 민족 탄압을 금지시켰다. 1921년에는 크림에서 적색 테러의 실태를 조사하여 대규모 초과 처형을 보고했다.
폴란드 전선 정치위원보리스 아르바토프1896–19401919년 폴란드 전선에서 정치위원으로 복무하며 내전에 참전했다. 같은 해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에 입당했다.
적군 등록국(GRU의 전신) 초대 국장세묜 아랄로프1880–19691918년 11월 적군 등록국의 초대 국장에 임명되어 소비에트 군사정보 체계의 기초를 구축했으며, 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적군 건설에 참여했다. 체카의 창립 구성원이기도 했다.
흑해 반란 주동자앙드레 마르티1886–19561919년 4월 프랑스 전함 장 바르호에서 적군 지원을 거부하는 수병들의 반란을 주도했고, 콘스탄티노플 군법회의에서 중노동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잠수함 함장악셀 베르그1893–1979붉은 군대 자원입대알렉산드르 파뉴시킨1905–1974남북전쟁 참전알렉세이 안토노프1896–1962내전 참전알렉세이 판필로프1898–1966군사정치 및 참모 업무알렉세이 스테츠키1896–1938내전 참전알렉세이 자도프1901–1977붉은군대 입대알렉산드르 바르민1899–1987혁명군사평의회 위원알렉산드르 벨로보로도프1891–1938정찰병알렉산드르 골로바노프1904–1975내전 참전알렉산드르 고르바토프1891–1973붉은군대 보병알렉산드르 노비코프1900–1976붉은 군대 복무알렉산드르 트로야놉스키1882–1955붉은 군대 복무알렉세이 수르코프1899–1983남북전쟁 참전안드레이 크랍첸코1899–1963남북전쟁 참전안드레이 흐룰료프1892–1962붉은 군대 이론가안드레이 스네사레프1865–1937내전 종군안드레이 예료멘코1892–1970오데사 유격대 활동안나 판크라토바1897–1957붉은 군대 자원입대아우구스트 코르크1887–1937적군 복무보리스 게센1893–1936적색 파르티잔 조직데먄 코롯첸코1894–1969방어선 구축드미트리 카르비셰프1880–1945남북전쟁 전역 참전드미트리 렐류셴코1901–1987공화국 최고군사평의회 위원에프라임 스클랸스키1892–1925내전 참전필리프 골리코프1900–1980내전 참전필리프 옥탸브리스키1899–1969적군 입대표도르 톨부힌1894–1949군 정치위원게오르기 이세르손1898–1976크론시타트 요새 포대장게오르기 란게마크1898–1938내전 종군게오르기 자하로프1897–1957군사혁명위원회 의장그리고리 카민스키1895–1938적위대 · 파르티잔그리고리 코샤첸코1901–1983정치위원그리고리 시테른1900–1941적군 복무일리야 일리프1897–1937제5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인노켄티 스투코프1887–1936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공화국 인민위원이오시프 바레이키스1894–1938적군 정치위원이사크 샤피로1895–1940붉은군대 합류이반 바그라먄1897–1982내전 참전이반 페듀닌스키1900–1977내전 종군이반 코네프1897–1973정찰병이반 코발료프1901–1993파르티잔 활동이반 파파닌1894–1986내전 참전이반 페레시프킨1904–1978내전 참전이반 페트로프1896–1958내전 참전이반 튤레네프1892–1978적위대 조직알렉산드라 킴1885–1918내전 종군키릴 모스칼렌코1902–1985크론시타트 봉기 진압 참여콘스탄틴 팜필로프1901–1943내전 참전쿠즈마 갈리츠키1897–1973정치위원겐리흐 류시코프1900/1902–1945러시아 내전 참전로디온 말리놉스키1898–1967내전 종군마트베이 자하로프1898–1972붉은 군대 창설 지휘미하일 본치-브루예비치1870–1956내전 참전미하일 카투코프1900–1976적군 입대미하일 호진1896–1979대대장·연대장미하일 키르포노스1892–1941내전 참전미하일 말리닌1899–1960내전 종군미하일 샬린1897–1970내전 참전미하일 슈밀로프1895–1975내전 참전미트로판 네델린1902–1960군사인민위원모이세이 루히모비치1889–1938적군 합류미콜라 흐빌로비1893–1933정치위원니콜라이 고르부노프1892–1938붉은군대 복무니콜라이 이그나토프1901–1966내전 참전니콜라이 크릴로프1903–1972북드비나 소함대 입대니콜라이 쿠즈네초프1904–1974붉은 군대 통신병니콜라이 프수르체프1900–1980내전 참전니콜라이 푸호프1895–1958붉은 군대 복무니콜라이 샤탈린1904–1984내전 참전니콜라이 바투틴1901–1944내전 참전니콜라이 보로노프1899–1968내전 참전니콜라이 야코블레프1898–1972내전 참전파벨 바토프1897–1985내전 참전파벨 쿠로치킨1900–1989붉은 군대 참모장파벨 레베데프1872–1933내전 참전파벨 미프1901–1938내전 참전파벨 로트미스트로프1901–1982파르티잔 지휘관파벨 리발코1894–1948붉은 군대 복무파벨 유딘1899–1968러시아 내전 참전파벨 지가레프1900–1963내전 참전표트르 코셰보이1904–1976내전 참전세묜 보그다노프1894–1960남북전쟁 참전세묜 겐딘1902–1939남북전쟁 참전세묜 크리보셰인1899–1978내전 참전세묜 라보치킨1900–1960적위대 조직세르게이 후댜코프1902–1950제1기병군 복무예핌 슬라프스키1898–1991파르티잔 부대 지휘관시디르 콥파크1887–1967붉은 군대 자원입대바실리 포포프1903–1964붉은 군대 자원입대바실리 소콜롭스키1897–1968내전 참전바실리 자루빈1894–1972적군 복무빅토르 바카예프1902–1987붉은 군대 자원입대빅토르 말체프1895–1946붉은군대 입대빅토르 나세트킨1905–1950붉은 군대 입대블라디미르 쿠라소프1897–1973적위대블라디미르 트리부츠1900–1977정치위원야코프 알크스니스1897–1938붉은 군대 복무야코프 골레프1894–1960혁명군사평의회 위원예핌 샤덴코1885–1951붉은 군대 입대잘만 파소프1905–1940내전 참전이반 야쿠봅스키1912–1976적군 병사아르투르 아르투조프1891–1937적군 병사바실리 블로힌1895–1955적군 병사블라디미르 데카노조프1898–1953정치지도원세묜 피린1898–1937구축함 승조원이반 이사코프1894–1967적군 병사이반 호흘로프1895–1973적군 해군 수병이반 유마셰프1895–1972파르티잔 대원이반 테오도로비치1875–1937적군 병사얀 스텐1899–1937선전 포스터 작가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1893–1930적군 병사미하일 콜초프1898–1940적군 복무뱌체슬라프 몰로토프1890–1986적위대원이반 톱스투하1889–1935군수열차 보조원안드레이 플라토노프1899–1951붉은 군대 병사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1898–1948붉은 군대 병사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1895–1977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 인민위원·남서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볼로디미르 자톤스키1888–1938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의 인민위원과 남서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일했다.
붉은 군대 병사야코프 페도렌코1896–1947붉은 군대 병사니콜라이 예조프1895–1940붉은 군대 병사아르세니 즈베레프1900–1969한인사회당 위원장·한인 적위군 조직자이동휘1873–19351918년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한인 적위군을 조직해 우수리 전선에서 적군과 함께 백군 및 일본 개입군에 맞서 싸웠다.
마흐놉시치나 군사혁명평의회 의장프세볼로트 예이헨바움1882–1945나바트 연합을 공동 창설하고 마흐노 혁명반란군의 군사혁명평의회(RVS) 의장을 지내며,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 운동의 지적 발전을 주도했다.
크론시타트 봉기 지도자스테판 페트리첸코1892–19471921년 3월 발트함대 수병들의 봉기를 이끌며 임시혁명위원회 의장으로 '당 없는 소비에트'를 내걸었다. 진압 후 핀란드로 망명했다.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의 정치 지도자토마시 가리그 마사리크1850–1937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프랑스 이송을 위해 볼셰비키와 펜자 협정을 체결하고 협상했다.
붉은군대 기병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1904–19361919년 8월 자원입대해 코톱스키 기병여단과 제1기병군에서 복무했고, 1920년 8월 르보프 근교에서 부상을 입고 전역했다.
모스크바 당 지도자블라디미르 자고르스키1883–1919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서기로 내전기 수도의 당을 이끌었고, 1919년 9월에는 제르진스키와 함께 도시방어위원회를 공동 지휘했다.
적군 동부전선 간부이반 말체프1898–19401918년부터 1921년까지 적군 동부전선에서 정치·군사 간부로 복무했다.
캅카스의 정치 활동가보리스 셰볼다예프1895–1937내전기 캅카스에서 정치 활동을 했다.
소비에트 내전 지휘관알렉산드르 파르호멘코1886–1921내전에서 백군과 독일 점령군에 맞서 싸웠다.
남부전선의 붉은 군대 장교안드레이 블라소프1901–19461919년 남부전선에서 백군과 마흐노 세력에 맞서 싸웠다.
붉은 군대 복무자미하일 조셴코1894–19581919년 붉은 군대에서 복무하다 건강 악화로 제대했다.
붉은군대 정보요원발터 크리비츠키1899–19411919년부터 1921년까지 붉은군대 정보 활동을 시작했다.
붉은 군대 복무 군인게오르기 자루빈1900–19581918년부터 1922년까지 내전기에 붉은 군대에서 복무했다.
내전 중 학술원 기록과 장비 보존알렉산드르 카르핀스키1847–1936혁명과 내전의 혼란 속에서 학술원의 장비와 기록을 보존했다.
데니킨군과 싸운 당원야코프 드롭니스1890–19371919~1920년 데니킨 의용군과 싸웠다.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안드레이 콜레가예프1887–19371919~1920년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했다.
내전기 전선위원회 활동가이반 아쿨로프1888–1937내전기에 전선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식량 조달 계통에서 일한 당원표트르 코가노비치1887–1938내전기에 식량 조달 계통에서 일했다.
돈 지역 소비에트 권력 수립 참여자세르게이 시르초프1893–1937내전기에 돈 지역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했다.
적군 창설 참여자바실리 시미트1886–19381918년 페트로그라드 노동조합 중앙국 의장으로 적군 창설에 참여했다.
붉은군대 기병 병사니콜라이 펙렌코1901–19511918년부터 1921년까지 붉은군대 기병 부대에서 병사로 복무했다.
백군으로 내전에 참전알렉산드르 발크1866–1957내전기에 백군 의용군과 남러시아군에 참전했다.
백군 진영 참여자표도르 로디체프1854–19331918~1920년 백군 진영에 참여했다.
붉은 군대 공병병일리야 스타리노프1900–2000남부전선에서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에 참전했다.
붉은 군대 장교알렉세이 비노그라도프1899–1940내전에서 콜차크·마흐노·브란겔과 싸웠다.
적군 측 내전 참전자세묜 발라쇼프1874–1925발라쇼프는 내전에서 전투에 참전했다.
적군 참전 군인보리스 차긴1899–19871920~1921년 남북전쟁에 참전했다.
내전기 공장 재건 참여자표도르 글라드코프1883–1958내전기에 노보로시스크 시멘트 공장 재건에 직접 참여했다.
콜차크 백군 공병 장교세르게이 주크1892–19571918~1919년 콜차크 백군에서 공병 장교로 복무했다.
적군 라트비아 소총병야니스 칼른베르진슈1893–19861919년부터 1920년까지 적군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남부전선에서 내전에 참전했다.
붉은 군대 보병 장교콘스탄틴 베르시닌1900–19731919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을 겪었다.
내전 정치위원이반 카바노프1898–1972내전에서 정치위원을 거쳐 전기공업 관료로 성장했다.
백군 측 인물알렉세이 톨스토이1883–1945혁명 후 백군 편에 섰다가 1919년 망명했다.
적군 정보·유격 활동가알렉산드르 오를로프1895–1973내전기에 적군에서 정보·유격 임무를 수행했다.
코무치 활동가빅토르 체르노프1873–19521918~1920년 반볼셰비키 투쟁에 참여하고 사마라 코무치에서 활동했다.
적군 군의관표도르 단1871–19471919~1920년 적군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붉은군대 소년병파벨 수도플라토프1907–1996내전 중 붉은군대 소년병으로 복무했다.
남북전쟁 기병 자원병안드레이 그레치코1903–1976그레치코는 기병대 사병으로 남북전쟁에 참전했다.
적군 적위대원너지 임레1896–1958볼셰비키에 가담해 적위대원으로 내전을 치렀다.
혁명 방어를 호소한 멘셰비키율리 마르토프1873–1923마르토프는 백군과 외국 간섭에 맞서 혁명을 방어하라고 노동자들에게 호소했다.
전투부대에 들어가려 나이를 올린 청년니콜라이 포드고르니1903–1983내전 중 전투부대에 들어가려고 나이를 세 살 올렸다.
반대 · 저항58
핀란드 백군 사령관으로 이 사건에 관여했다.
백군 창설자라브르 코르닐로프1870–1918돈 지방에서 의용군을 조직해 남부의 반소비에트 무장투쟁을 시작했고, 1918년 4월 예카테리노다르 공격 중 전사했다.
반소비에트 망명 정객알렉산드르 케렌스키1881–197010월 봉기 직후 크라스노프의 카자크 부대와 함께 페트로그라드 탈환을 시도했다가 실패했고, 이후 망명지에서 열강의 개입을 호소했다.
백군 이념가·외교책임자표트르 스트루베1870–19441918년 반볼셰비키 지하조직 '민족중심'(Национальный центр)을 공동 창립했고 돈 민간평의회 위원으로 의용군 창설을 도왔다. 데니킨 특별회의 위원, 브란겔 정부 외교책임자로 프랑스의 사실상 승인을 이끌어냈으며, RSFSR에서 궐석 사형을 선고받았다.
반볼셰비키 무장투쟁 지도자보리스 사빈코프1879–19251918년 3월 조국과 자유수호동맹(SZRiS)을 창설해 야로슬라블·리빈스크·무롬 봉기를 조직했고, 1920~1921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는 폴란드 측에 서서 반소 군사활동을 이끌었다.
좌파 에스에르 7월 봉기의 정치 지도자보리스 캄코프1885–1938PLSR 중앙위원회 상임간부회 의장으로서 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에 반대하는 1918년 7월 봉기를 계획·지휘했으며, 제5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레닌과 공개적으로 논쟁했다. 봉기 진압 후 지하로 잠적했고 궐석으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에스토니아 독립전쟁 초기 정부 수반콘스탄틴 페츠1874–19561918년 11월 임시정부 수반으로 권력을 넘겨받아 붉은 군대가 탈린 앞까지 온 첫 겨울에 정부를 지켰고, 라이도네르의 임명과 강제 징집, 영국 함대의 지원을 관철했다.
에스토니아 독립전쟁 총사령관요한 라이도네르1884–19531918년 12월 23일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1919년 1월 반격과 6월 체시스 전투를 지휘했고, 유데니치와는 조건부로 협력하되 페트로그라드 공격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타르투 강화기의 에스토니아 총리얀 퇴니손1868–1941?1919년 11월 총리가 되어 타르투 강화 협상을 뒷받침했고, 1920년 2월 2일 조약이 그의 정부 아래 체결되었다.
라트비아 독립전쟁기의 총리카를리스 울마니스1877–19421918년 11월부터 임시정부 총리로 리예파야로 밀려나고 배 위로 피신하는 위기를 넘겨 1919년 7월 리가로 돌아왔고, 베르몬트군을 격퇴한 뒤 1920년 리가 강화와 토지개혁을 이끌었다.
1919년 친독 라트비아 정부 수반안드리에우스 니에드라1871–19421919년 4월 리예파야 쿠데타 뒤 5월 10일 폰 데어 골츠가 뒷받침한 친독 정부의 수반이 되었고, 6월 체시스 전투 뒤 정권이 무너져 독일로 피했다.
라트비아 독립 승인을 이끈 외교관지그프리츠 안나 메이에로비츠1887–1925초대 외무장관으로 연합국 사절단을 움직여 독일군 철수를 이끌어 냈고, 1920년 8월 리가 강화와 1921년 연합국의 법적 승인을 얻어 냈다.
핀란드와 발트의 독일군 지휘관뤼디거 폰 데어 골츠1865–19461919년 2월 리예파야에서 독일군과 향토방위군을 지휘해 5월 리가를 탈환했으나 라트비아 정부를 장애물로 여겨 쿠데타를 뒷받침했고, 체시스 패배 뒤 10월 소환되었다.
리가를 공격한 서러시아 의용군 사령관파벨 베르몬트-아발로프1877–19731919년 10월 8일 철수를 거부한 독일 병력으로 이루어진 서러시아 의용군을 이끌고 리가를 공격했다가 11월 11일 격퇴되었고 12월 독일로 물러났다.
리투아니아 초대 대통령안타나스 스메토나1874–19441919년 4월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어 붉은 군대, 베르몬트군, 폴란드군과 싸우는 첫 정부들을 이끌었다.
리투아니아 초대 총리와 외무장관아우구스티나스 볼데마라스1883–19421918년 11월 초대 총리로 군대 창설을 늦추었다가 사퇴했고, 이후 외무장관으로 파리와 국제연맹에서 빌뉴스 문제를 다투었다.
빌뉴스를 점령한 폴란드 장군루치안 젤리고프스키1865–19471920년 10월 9일 피우수트스키와 협의한 「항명」으로 빌뉴스를 점령하고 중부 리투아니아를 세워 1922년 폴란드에 편입시켰다.
에스토니아에서 벨로루시로 옮겨간 반소비에트 지휘관스타니스와프 부와크-바와호비치1883–19401919년 5월 백군 북부군단의 일원으로 프스코프를 점령했고, 유데니치와 갈라져 에스토니아 편에 섰다가 1920년 부대와 함께 폴란드로 옮겼다.
독일 지원을 요청한 핀란드 원로원 수반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1861–1944백색정부의 수반으로 만네르헤임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일에 군사 개입을 요청했고, 1918년 3월 7일 독일과 조약을 맺었다.
중앙라다 총서기국과 디렉토리아의 지도자볼로디미르 빈니첸코1880–1951중앙라다 총서기국 의장으로 우크라이나의 별도 강화 노선을 승인했고, 소비에트군의 키예프 점령 직후인 1918년 1월 말 사임했다.
프랑스 군사고문막심 베강1867–19651920년 영불 연합사절단에 참여해 폴란드 참모부에 자문했다.
좌파 SR의 총격야코프 블륨킨1900–1929좌파 사회혁명당원으로 1918년 독일 대사 미르바흐를 쏘아 좌파 SR 봉기의 방아쇠를 당겼다.
콜차크 백군 장교로 참전레오니트 고보로프1897–19551919년 콜차크군에 징집되어 포병 장교로 복무하다 부대와 함께 붉은 군대로 넘어가 1920년 카호프카와 페레코프에서 포병대를 지휘했다.
콜차크 정부 언론국장니콜라이 우스트랴로프1890–1937콜차크 정부의 언론국장으로 옴스크에서 백군의 선전을 이끌었고, 망명 뒤 소비에트 국가를 러시아 국가의 계승자로 받아들이는 「스메나 베흐」 노선을 세웠다.
백군 후원알렉산드르 구치코프1862–1936옛 전쟁장관으로 망명지에서 백군, 특히 브란겔의 군대를 위한 자금과 무기 조달에 힘썼다.
백군 군의관미하일 불가코프1891–19401919년 백군에 군의관으로 징집되어 북캅카스에서 복무했고, 이 경험이 『백위군』과 『투르빈가의 날들』의 바탕이 되었다.
백군 징집병니콜라이 세묘노프1896–1986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수반시몬 페틀류라1879–1926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집정내각(디렉토리야) 수반으로서 볼셰비키·백군·폴란드 세력 사이에서 독립을 수호하려 싸웠고, 1920년 패퇴 후 폴란드로 망명했다.
레닌 저격범파니 카플란1890–19181918년 8월 30일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저격해 중상을 입혔다. 이 사건과 우리츠키 암살은 적색 테러 공식 포고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백군 볼가 군단장블라디미르 카펠1883–19201919년 5월 벨레베이 작전에서 한진의 서부군을 구원하기 위해 예비대로 투입되었으나 프룬제의 남부집단군에 격파되었다. 이후 대시베리아 빙상 행군을 이끌다 1920년 1월 동사했다.
우크라이나국의 헤트만파울로 스코로파츠키1873–19451918년 4월 독일 점령군의 지원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중앙라다를 무너뜨리고 우크라이나국의 헤트만으로 즉위했으며, 12월 페틀류라의 반헤트만 봉기로 퇴위했다.
탐보프 농민봉기 지도자알렉산드르 안토노프1889–19221920~1921년 최대 규모의 반볼셰비키 농민봉기인 탐보프 봉기('안토놉시나')를 이끌었다. 투하쳅스키의 화학무기 진압으로 봉기는 패배했고 1922년 GPU에 사살되었다.
백군 최고 통치자알렉산드르 콜차크1874–19201918년 11월 옴스크 쿠데타로 '전러시아 최고 통치자'에 추대되어 동부 백군을 이끌었고, 1920년 2월 이르쿠츠크에서 볼셰비키에 총살되었다.
남러시아군 총사령관안톤 데니킨1872–1947의용군 사령관에서 남러시아군 총사령관으로 백군 최대 병력을 지휘했고, 1919년 가을 모스크바 공세로 오룔까지 진격했으나 반격에 패퇴했다.
북서군 사령관니콜라이 유데니치1862–19331919년 10월 페트로그라드 교외까지 진격했으나 붉은 군대에 격퇴되었고, 이후 에스토니아로 철수했다.
백군 최후의 총사령관표트르 브란겔1878–1928데니킨의 후임으로 남러시아군을 수습해 크림에서 최후의 저항을 조직했고, 1920년 11월 페레코프 함락 후 약 15만 명을 대피시켰다.
바르샤바 전투의 폴란드군 사령관유제프 피우수트스키1867–19351920년 4월 키예프 공세를 개시했고, 바르샤바 전투에서 투하쳅스키의 적군을 격파하는 반격을 설계했다.
백군의 첫 거점을 마련한 돈 카자크알렉세이 칼레딘1861–1918그는 1917년 10월 직후 소비에트 권력을 거부하고 돈에 첫 백군 거점을 열었으며, 1918년 2월 카자크들의 이탈에 절망해 자살했다.
일본군 지원을 받은 자바이칼의 백군 아타만그리고리 세묘노프1890–1946그는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시베리아 동부를 지배했고 콜차크와도 충돌했다.
백군 의용군의 창설자미하일 알렉세예프1857–1918그는 차르 니콜라이 2세의 퇴위를 이끌어 낸 마지막 참모총장이었으며, 이후 백군 의용군을 창설해 2월 혁명과 내전을 연결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상 독일 측 책임자막스 호프만1869–19271918년 1월 18일 소비에트 대표단에 영토 요구 지도를 제시했고, 파우스트슐라크 작전 이후 강경 조건을 추진하며 트로츠키와 대립했다.
오렌부르크 카자크 아타만알렉산드르 두토프1879–1921볼가와 우랄을 잇는 전선을 열어 소비에트 러시아와 투르키스탄을 갈라놓았다.
돈 카자크 아타만표트르 크라스노프1869–1947돈 카자크 아타만으로서 독일과 협력했으며, 훗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편에서 카자크 부대를 조직해 1947년 처형됐다.
모스크바 공세를 지휘한 백군 사령관블라디미르 마이-마옙스키1867–1920데니킨 의용군 사령관으로 쿠르스크와 오룔을 점령해 백군 중 모스크바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지만, 지나치게 늘어진 전선과 돈 군대와의 협조 실패로 공세가 붕괴했다.
콜차크 정권의 참모장이자 마지막 백색 통치자미하일 디테릭스1874–1937콜차크 정권의 참모장과 마지막 프리아무르 통치자를 지냈으며, 로마노프 일가 처형에 대한 수사를 주관했다.
백군 최연소 장군이자 마지막 전투 지휘관아나톨리 페펠랴예프1891–1938백군 최연소 장군 중 한 명으로, 1922~23년 야쿠티야 원정을 지휘했으며 이 전투는 내전의 마지막 전투로 평가된다.
시베리아 임시정부와 콜차크 정부의 총리표트르 볼로고츠키1863–19251918년 11월 18일 각료회의를 주재하여 콜차크를 최고 통치자로 추대했다.
크림반도를 지킨 백군 장군야코프 슬라시초프1885–19291920년 초 크림반도를 방어하고 페레코프 요새를 설계했다.
사마라 점령을 이끈 군단 지휘관스타니슬라프 체체크1886–1930펜자에서 8천 명을 지휘하고 1918년 6월 사마라를 점령하여 코무치 정부를 세웠다.
군단 동부 집단 지휘관라돌라 가이다1892–1948노보니콜라예프스크 방면 군단을 지휘하고 이르쿠츠크 점령을 이끌었다.
백군 운동 이데올로그바실리 슐긴1878–1976내전기에 백군 운동의 선전가이자 이데올로그로 활동했다.
백군에 가담한 장군블라디미르 사하로프1853–1920내전기 크림에서 백군에 가담했다.
붉은 군대에 맞서 리가를 탈환한 지휘관한스 폰 만토이펠-쇠게1894–19191919년 5월 22일 리가 탈환 공격 선두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백군 사단 지휘관니콜라이 스코블린1893–1937/1938?러시아 내전에서 백군 장교로 싸우고 코르닐로프 사단을 지휘했다.
소련에 맞선 출병군 참모우시지마 미쓰루1887–19451918~1919년 시베리아 출병군 참모로 수송과 배치를 담당했다.
볼셰비키에 맞선 SR 무장분대 조직자아브람 고츠1882–1940내전기에 SR 무장분대를 조직해 볼셰비키와 백군 양쪽에 맞섰다.
백군 지역의 군주제 선전가블라디미르 푸리슈케비치1870–19201919~1920년 백군 지역에서 군주제 선전활동을 했다.
반볼셰비키 활동가미하일 로댠코1859–19241917년 10월부터 1920년까지 돈과 크림에서 백군 지역의 반볼셰비키 활동을 했다.
대상 · 피해12
1918년 헤트만 스코로파츠키 정부 아래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를 창설해 초대 총재를 지냈다. 1919년 키예프에서 소비에트 권력이 수립된 뒤 로스토프로 향하다 발진티푸스에 걸려 크림에 고립되었고, 1920년 타브리다대학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2월 크림혁명위원회는 '정치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며 그를 체카의 삼엄한 호위 아래 모스크바로 추방했다.
에스토니아 공산주의 지하조직 지도자빅토르 킹기세프1888–1922노동 코뮌 시기부터 에스토니아 공산주의 지하 조직을 이끌었고, 1922년 5월 탈린에서 체포되어 이틀 뒤 처형되었다.
바쿠 코뮌 지도자스테판 샤우먄1878–1918캅카스 볼셰비키의 지도자로 1918년 26인 바쿠 인민위원과 함께 처형됐다.
혁명으로 폐위되고 내전 중 처형니콜라이 2세1868–1918체코 군단이 우랄로 다가오던 1918년 7월 17일 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가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처형 결정에 대한 중앙의 개입 여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1919년 노보로시스크에서 백군에 체포된 연출가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1874–19401918년 입당한 연출가로 1919년 노보로시스크에서 백군에 체포되어 처형 위기를 넘겼고, 1920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연극의 10월」을 이끌었다.
반볼셰비키 에스에르 지도자피티림 소로킨1889–1968반볼셰비키 봉기를 준비하다 체카에 체포, 사형을 기다리며 에스에르 탈당을 선언했다. 레닌이 「프라우다」로 화답했고 1922년 '철학의 배'로 추방.
반란 주모자로 지목된 크론시타트 포병대장알렉산드르 코즐롭스키1864–19401921년 3월 크론시타트 요새의 포병대장으로 봉기했으나, 볼셰비키는 3월 2일 포고에서 그를 거짓으로 ‘반란의 주모자’로 지목했고 이후 핀란드로 망명했다.
우파 지도부 의원블라디미르 젠지노프1880–1953옴스크 쿠데타 때 코사크에게 체포되었고, 이후 파리에서 관련 문서집을 발간했다.
페름에서 체카에 납치·살해된 로마노프미하일 로마노프1878–19181918년 6월 페름에서 현지 체카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살해됐다.
백군의 총살 대상소피야 야놉스카야1896–1966내전기 백군에게 체포되어 총살 직전 살아남았다.
체카에 체포·처형된 시인니콜라이 구밀료프1886–19211921년 타간체프 사건에 연루되어 체카에 체포·처형되었다.
백군에 체포된 볼셰비키그리고리 보이틴스키1893–19531919~1920년 백군에 체포되어 사할린에 유형되었다.
목격 · 기록6
1920년 폴란드 전쟁에서 부됸니의 제1기병군에 종군했고, 그 경험을 단편집 「기병대」로 남겼다.
내전기의 시인마리나 츠베타예바1892–1941남편이 백군에 복무하는 동안 궁핍한 모스크바에서 내전의 세월을 시로 기록했다.
돈 지방의 연대기 작가미하일 숄로호프1905–1984돈 카자크 지역을 휩쓴 내전의 비극을 장편 「고요한 돈강」으로 형상화했다.
『철류』의 작가 · 내전의 서사시를 기록하다알렉산드르 세라피모비치1863–19491924년 발표한 『철류』는 1918년 타만 군대의 전설적 행군을 문학으로 되살린 내전 서사시의 기념비다. 세라피모비치는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종군기자로 활동했고, 혁명 후에는 『이즈베스티야』와 『프라우다』 특파원으로 내전 전선을 누볐다.
증언한 혁명가빅토르 세르주1890–1947페트로그라드의 내전과 기근을 문학으로 증언한 코민테른 작가였다.
『내전사』 편찬자지가 베르토프1896–19541921년 뉴스 필름을 편집해 13권짜리 기록영화 『내전사』를 만들었다. 필름은 뒤에 대부분 사라졌다.
관련 용어
출처: Evan Mawdsley, The Russian Civil War (Birlinn, 2008)W. Bruce Lincoln, Red Victory: A History of the Russian Civil War (Simon and Schuster, 1989)Jonathan D. Smele, The Russian Civil Wars, 1916–1926: Ten Years That Shook the World (Oxford University Press, 2015)Stephen Kotkin, Stalin, vol. 1: Paradoxes of Power, 1878–1928 (Penguin, 2014)Sheila Fitzpatrick, The Russian Revolution (Oxford University Press, 4th ed., 2017)자료 6자료 7자료 8자료 9자료 10Peter Kenez, Civil War in South Russia, 1918: The First Year of the Volunteer Arm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1)Peter Holquist, Making War, Forging Revolution: Russia's Continuum of Crisis, 1914–1921 (Harvard University Press, 2002)Francesco Benvenuti, The Bolsheviks and the Red Army, 1918–1922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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