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1945

대조국전쟁

소비에트 인민은 어떻게 파시즘의 전쟁 기계를 분쇄했으며, 그 승리의 대가는 무엇이었는가?

1941년 6월 나치 독일의 기습 침공으로 시작된 대조국전쟁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지상전이었다. 소련은 개전 첫 해의 파국적 손실을 딛고 공업 기반을 통째로 동쪽으로 옮겨 재무장했으며,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에서 전세를 뒤집고 1945년 베를린까지 진격해 나치 독일을 무너뜨렸다. 독일 국방군 지상 전투력의 약 80%가 동부전선에서 소모되었고, 파시즘 격파의 압도적 부담을 짊어진 것은 다민족 소비에트 인민이었다.

전쟁 전야: 조약, 국경, 그리고 믿지 않은 정보들

1941년 6월 22일 일요일 새벽 3시 15분, 독일군 포병은 2,900킬로미터 전선을 따라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그날 아침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 최소한의 토대는 1939년 8월 23일 밤, 모스크바에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가 서명한 독소불가침조약에 놓여 있었다. 공개 조문은 10년간의 불가침과 중립을 약속했지만, 부속 비밀의정서는 동유럽을 두 나라의 이익권역으로 갈랐다. 일주일 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고, 9월 17일 소련군도 동쪽에서 진입해 폴란드는 네 번째로 분할되었다. 이어 소련은 발트 3국에 기지 조약을 강요한 끝에 1940년 여름 이를 병합했고, 핀란드와는 105일간의 겨울전쟁을 치렀으며, 루마니아로부터 베사라비아와 북부코비나를 접수했다. 소련의 서쪽 국경은 수백 킬로미터 앞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새 국경은 낡은 방어선을 무용하게 만들었다. 1930년대 구소련 국경에 구축된 요새지대, 이른바 「스탈린 선」은 해체되거나 방치되었고, 새 국경의 「몰로토프 선」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1941년 6월까지 완성된 벙커는 계획의 4분의 1에 불과했다. 국경의 붉은 군대는 종이 위에서는 강력했다. 다섯 개 서부 군관구에 171개 사단, 약 330만 명의 병력, 15,000대가 넘는 전차, 10,000대 이상의 항공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숫자는 허약한 토대를 감추고 있었다.

1937–1938년 대숙청은 붉은 군대의 지휘부를 말 그대로 참수했다. 원수 5명 중 3명, 군단장 15명 중 13명, 사단장 136명 중 110명이 처형되거나 투옥되었다. 1941년 6월 15일 현재 붉은 군대의 장교 439,143명 중 절반은 복무 경력이 2년 미만이었고, 필요한 장교 수에서 67,000명이 모자랐다. 중대와 대대는 갓 임관한 19세 소위들이 지휘했다. 기계화 군단은 전차는 많았으나 정비 인력과 수송 차량, 무전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고, 구식 전차의 비율은 80%에 달했다. 겨울전쟁에서 드러난 무능(수오무살미에서 사단 단위로 포위 섬멸된 참상)은 히틀러에게 「썩은 문을 걷어차면 무너진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히틀러의 결정은 1940년 7월 31일, 프랑스가 항복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내려졌다. 육군참모총장 프란츠 할더의 일기는 이렇게 기록했다: 「러시아는 청산되어야 한다. 시기는 1941년 봄.」 12월 18일 히틀러는 지령 제21호바르바로사 작전」에 서명했다. 목표는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까지 소련 서부를 점령하고, 소비에트 국가를 멸망시키며, 『우랄까지의 영토를 게르만화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통상적인 국가 간 전쟁이 아니었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부하들에게 이 전쟁이 『유대-볼셰비즘의 섬멸』이며 『슬라브 열등인종에 대한 독일인의 생존 투쟁』이라고 가르쳤다. 점령 정책인 『종합계획 동방』은 수천만 슬라브인의 추방·노예화·절멸을 예정하고 있었다.

그 모든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소련은 독일의 전쟁 기계에 원자재를 계속 공급했다. 1940년 2월 11일 체결된 독소통상협정은 소련이 1년 반 동안 곡물 100만 톤, 광물유 90만 톤, 면화 10만 톤, 크롬 광석 10만 톤 등을 독일에 납품하도록 규정했다. 침공 당일 새벽 국경을 넘은 마지막 화물 열차들 가운데는 소련산 곡물을 실은 것도 있었다.

스탈린은 경고의 홍수 속에 살았다. 1941년 1월부터 6월 사이 소련 정보기관은 독일의 침공 준비에 관한 최소 80건 이상의 구체적 보고를 입수했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도쿄에서, 「알타」와 「도라」는 베를린에서, 국경수비대는 국경선에서 날짜까지 정확히 보고했다. 처칠은 이니그마 해독 정보를 근거로 스탈린에게 직접 경고 편지를 보냈다. 6월 13일, 침공 9일 전, 소련은 TASS 성명을 발표해 독일과의 전쟁이 임박했다는 루머를 『소련과 독일 사이에 쐐기를 박으려는 세력들의 서투른 선전』이라 일축했다. 스탈린은 독일군의 병력 집중을 자신을 도발로 끌어내려는 영국의 함정으로 읽었고, 동시에 1942년까지 전쟁을 늦출 수 있다고 계산했다. 국경 부대는 도발을 피하라는 명령 아래 전투 배치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그날 아침을 맞았다.

6월 22일 오전 5시 30분, 독일 대사 슐렌부르크가 몰로토프의 집무실에 들어가 선전포고문을 전달했을 때, 독일군은 이미 소련 영토 깊숙이 진입해 있었다. 몰로토프의 대답은 이랬다: 『우리가 이럴 만한 짓을 했단 말인가?』

전쟁의 첫 열흘: 충격, 붕괴, 그리고 공장을 뜯어 옮기다

1941년 6월 22일 새벽 3시 15분, 독일 공군은 소련 서부 국경의 비행장 66곳을 동시에 강타했다. 이날 하루에만 소련 공군은 항공기 약 1,200대를 잃었고, 대부분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첫 1주일 동안 손실은 4,000대를 넘었다. 개전 첫날 정오,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라디오에 나서 「우리의 대의는 정의롭다. 적은 분쇄될 것이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국경에서는 완전한 붕괴가 진행 중이었다. 독일 중앙집단군 예하의 구데리안 제2기갑집단과 호트 제3기갑집단은 각각 부크 강과 네만 강을 단숨에 건넜고, 6월 28일에는 민스크 동쪽에서 두 집게발이 만났다. 드미트리 파블로프 대장이 지휘하는 소련 서부전선의 제3군, 제4군, 제10군, 제13군은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이중 포위망에 갇혔다. 7월 9일 포위망이 정리되었을 때 붉은 군대는 42만에서 47만 명을 상실했고, 서부전선은 사실상 소멸했다. 파블로프를 포함한 서부전선 지휘부는 직무 태만 혐의로 소환되어 전쟁 발발 꼭 한 달째 되는 날 총살되었다.

스탈린 자신도 붕괴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6월 29일 민스크 함락 소식을 들은 그는 군사 브리핑 도중 「레닌이 세운 국가를 우리가 망쳐버렸다」고 외친 뒤 쿤체보의 다차로 떠나 이틀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나스타스 미코얀, 라브렌티 베리야, 몰로토프 등이 직접 찾아갔을 때, 스탈린은 「왜 왔나?」라고 물었다. 미코얀은 훗날 회고록 『타크 빌로』에서 이렇게 썼다: 「그가 우리가 자신을 체포하러 왔다고 생각한 게 분명하다.」 그러나 정치국원들은 스탈린에게 새로 설치될 국가방위위원회(GKO) 의장직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고, 7월 3일 스탈린은 처음으로 라디오에 나서 「동지들이여, 시민들이여, 형제자매들이여」라는 파격적인 호칭으로 시작하는 연설을 했다.

전선이 무너지는 와중에 평행선상에서 전개된 또 하나의 거대한 작전이 있었다. 6월 24일, 전쟁 3일째에 당 중앙위원회와 인민위원회소개위원회를 설치했다. 초대 의장은 철도인민위원 라자르 카가노비치였으나, 개전 1주일 만에 소개 물량이 폭증하면서 그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미코얀의 기록: 「시간도 수송력도 부족했다. 카가노비치가 소개위원회의 신속하고 효율적인 운영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7월 초에 분명했다.」 7월 3일 GKO가 발족한 직후, 소개위원회 의장은 노조중앙평의회 서기 니콜라이 시베르니크로 교체되었고, 미코얀이 제1부의장으로, 알렉세이 코시긴미하일 페르부힌이 부의장으로 보강되었다.

위협받는 지역에는 3만 2천 개의 공업 기업이 있었고 8,800만 명이 살고 있었다. 1941년 7월부터 12월까지 소개위원회는 대기업 1,523개를 포함한 2,593개의 공장을 해체해 우랄, 시베리아, 중앙아시아로 보냈다. 철도 화차는 약 150만 량이 동원되었고, 공장 노동자와 그 가족 약 1,200만에서 1,800만 명이 기계와 함께 동쪽으로 이동했다. 페르부힌이 훗날 기록한 대로 「이런 규모와 단기간의 소개는 사전에 계획되거나 상정된 적이 없었다.」 1941년 봄까지도 소련 군사 교리는 전쟁을 적의 영토에서 수행한다는 원칙 위에 서 있었고, 스탈린은 소개 계획 수립이 패배주의를 조장할 것을 우려해 이를 억제했다. 그 결과 첫 주에는 지방의 당·군 지도자들이 제각각 판단해야 했고, 어떤 이는 단호히 움직이고 어떤 이는 망설이다 장비를 적에게 넘겨주었다. 공습과 피난민 행렬, 후방에 침투한 독일 첩보·파괴 공작 부대가 뒤섞인 참호선 바로 뒤에서, 한 나라의 공업 기반 전체가 분해되어 기차에 실렸다.

고리가 닫히던 9월: 봉쇄, 교체, 그리고 도쿄에서 온 한 통의 전문

1941년 9월 8일, 독일 북부집단군이 라도가 호숫가의 슐리셀부르크(페트로크레포시)를 점령하면서 레닌그라드는 육지에서 완전히 차단됐다. 봉쇄 고리 안에는 레닌그라드 전선군의 4개 군(8, 23, 42, 55군) 병력 50만 명과 시민 약 250만 명, 발트 함대 전체가 갇혔다. 같은 날 독일 공군은 바다예프 식량창고를 폭격해 3,000톤의 밀가루와 700톤의 설탕을 불태웠다. 개전 전부터 35일치에 불과했던 밀가루 비축량은 이 화재로 더욱 줄어들었고, 11일 뒤인 9월 19일에는 하루 276대의 폭격기가 쏟아져 1,000명이 넘는 민간인이 죽는 최악의 공습이 닥쳤다.

사령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는 도시를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9월 10일 스탈린은 보로실로프를 해임하고 예세냐 공세에서 독일군을 처음 밀어낸 게오르기 주코프를 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주코프가 9월 13일 도착했을 때, 도시 지도부는 이미 공장과 함정 폭파 계획까지 마련해 둔 상태였다. 주코프는 취임 즉시 계엄을 선포하고, 가장 치열한 전선이던 풀코보 고지와 리고보 일대의 42군과 55군에 "서면 명령 없는 철수자는 지휘관·병사 구분 없이 즉결 처형한다"는 명령을 내렸다(9월 17일). 동시에 발트 함대의 153문 함포와 대공포를 지상전에 돌리고, 민간인 수십만 명을 동원해 시내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대전차 해자를 팠다. 독일군은 9월 18일 푸시킨과 크라스노예 셀로를 점령하고 페테르고프에서 핀란드만에 도달해 오라니옌바움 교두보를 본진에서 분리시켰으나, 더는 진격하지 못했다. 전선은 키로프 공장에서 불과 4km, 겨울궁전에서 16km 지점에서 얼어붙었다.

이 9월 한 달, 레닌그라드만 위태로웠던 것이 아니었다. 스탈린이 극동의 정예 사단을 과감히 서부로 빼돌릴 수 있었던 것은 도쿄의 리하르트 조르게가 결정적 정보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조르게의 일본인 공작원 호즈미 오자키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의 측근으로, 내각과 참모본부의 논의 내용을 실시간으로 빼내고 있었다. 8월 25일 조르게는 모스크바에 "일본 지도부는 올해 안에 대소 전쟁을 개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타전했다. 9월 6일에는 "일본은 남방 작전을 준비 중"이라고 확인했고, 마침내 9월 14일 ― 소련이 이 전쟁에서 받은 가장 값진 전문 가운데 하나 ― "우리 모두의 신중한 판단으로, 일본이 소련을 공격할 가능성은 사라졌다"고 알려왔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스탈린은 9월부터 극동에서 14개 사단을 서부로 이동시키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제32·제78·제93·제238소총병사단과 제58·제60전차사단 등이 10월 모스크바 방어전에 투입됐다. 도시는 함락 직전까지 갔지만, 주코프의 강철 같은 통제와 조르게가 도쿄에서 캐낸 한 줄의 판단이 9월의 시간표를 함께 바꾸어 놓은 것이다.

반격의 역설: 모스크바의 승리가 낳은 봄의 파국

1941년 12월 5일 붉은 군대가 모스크바 앞에서 반격으로 전환했을 때, 이는 독일 국방군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당한 최초의 대규모 패배였다. 칼리닌 전선군과 서부 전선군, 남서 전선군의 우익이 동시에 공격에 나서 독일 중부집단군을 수도에서 100~250km 밀어냈다. 기온이 영하 30도 이하로 떨어진 혹한 속에서, 겨울 장비도 없이 여름 군복 차림으로 싸우던 독일군은 동상 전투불능자가 총기 사상자를 웃돌았다.

그러나 승리는 치명적인 과신을 낳았다. 스탈린은 1942년 1월 5일 최고사령부 회의에서 전 전선 총공세를 명령했다. 주코프는 반대했다. 서부 전선군 사령관이었던 그는 병력과 탄약이 고갈되었고 독일군이 여전히 강력하다고 주장하며, 모스크바 방면에서의 집중적인 타격만이 현실적이라고 봤다. 스탈린은 이를 묵살했다. "독일군은 모스크바에서 패배해 혼란에 빠졌다. 그들이 제정신을 차리기 전에 공격해야 한다."

르제프-뱌지마 전략공세(1월 8일~4월 20일)는 스탈린의 과신이 부른 비극이었다. 소련군은 독일 9군이 구축한 거점 방어선에 정면으로 돌진했고, 포병 준비도 항공 지원도 부족한 상태에서 수십만 명이 눈밭에서 쓰러졌다. 제33군 사령관 미하일 예프레모프 중장은 뱌지마 남서쪽에서 포위되었고, 스탈린은 탈출 명령을 끝내 승인하지 않았다. 4월 19일, 부상으로 거동할 수 없던 예프레모프는 아내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 뒤 권총으로 자결했다. 같은 포위망에서 기병대를 이끌고 적진 깊숙이 침투했던 파벨 벨로프 소장의 제1근위기병군단은 5개월간 후방에서 싸우다 간신히 탈출했다. 이 공세 하나만으로 소련군 사상자는 약 28만 명에 달했다.

와중에 최고사령부는 전략적 오판을 거듭했다. 스탈린은 독일의 1942년 여름 공세 주축이 다시 모스크바를 겨냥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예비 전력을 중앙 방면에 집중시켰다. 실은 히틀러가 4월 5일 훈령 제41호(청색 작전)로 지시한 목표는 코카서스 유전지대였다. "마이코프와 그로즈니의 석유를 확보하지 못하면 이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 히틀러의 말이었다.

세묜 티모셴코 원수가 지휘하는 남서 방면의 5월 하리코프 공세는 이 착각이 초래한 최악의 재앙이었다. 바르벤코보 돌출부에서 출발한 소련군 6개 군, 약 76만 5천 명이 독일 제6군을 포위하고자 했으나, 작전 계획을 검토한 보리스 샤포시니코프 총참모장과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는 좁은 공간에 병력을 밀어넣는 것이 "자루에 목을 들이미는 격"이라며 격렬히 반대했다. 티모셴코는 스탈린의 신임을 등에 업고 강행했고, 5월 17일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기갑집단이 남쪽에서 반격해 돌출부의 목을 조르면서 소련군 3개 군 전체가 포위 섬멸되었다. 소련군 사상자 28만 명, 전차 652대 상실. 독일군 손실은 2만 명에 불과했다.

길이 열렸다. 6월 28일 청색 작전이 개시되자 독일 남부집단군은 돈 강을 향해 돌진했고, 7월에는 로스토프나도누가 무질서하게 버려졌다. 남부 전선군 일부 부대들은 모스크바의 명령도 없이 공황 퇴각했다. 분노한 스탈린은 7월 28일 국방인민위원 명령 제227호에 서명했다. 이 명령은 패닉 선동자와 겁쟁이를 그 자리에서 사살하고, 무단 후퇴한 지휘관을 군법회의에 회부하며, 각 전선군에 1~3개씩의 징벌대대를 두도록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이 각인된 것은 명령의 첫 머리에 박힌 문장이었다.

"우리 영토는 사막이 아니라 사람이다. 더 물러선다는 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 조국을 낭비하는 것이다. 물러서기를 끝낼 때가 왔다.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마라!"

같은 달, 독일 제6군은 돈 강 굴곡부에서 볼가 강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8월 23일,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의 제4항공함대는 스탈린그라드에 1,000톤의 폭탄을 퍼부었고, 도시의 목조 건물들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이 단 하루의 폭격으로 주민 약 4만 명이 사망했다. 시가지 주택의 90%가 파괴되었고, 유일한 탈출로인 볼가 강 횡단은 루프트바페의 기총소사 아래 놓였다. 스탈린은 민간인 소개를 허용하지 않았다. 도시에 남은 주민들이 저항 의지를 높일 것이라고 판단해서였다.

9월 12일, 바실리 추이코프 중장이 제62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폐허가 된 스탈린그라드에 도착했다. 그가 이끈 병력은 2만 명, 전차 90대, 박격포 700문에 불과했다. 추이코프는 "우리가 이 도시를 지키든가, 아니면 여기서 죽든가"라고 말했다. 이후 2개월간 독일군은 마마예프 쿠르간, 중앙철도역, 붉은 10월 공장, 바리카디 공장을 한 건물 한 층씩 빼앗으며 진격했지만, 볼가 강 나루터는 끝내 함락하지 못했다. 동시에 게오르기 주코프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는 도시 북쪽 코틀루반 일대에서 네 차례의 대규모 반격을 감행했는데, 2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면서도 독일 제6군의 주력이 시가전에 집중되는 것을 막았다. 이 희생은 후일 '천왕성'의 발판이 되었다.

강철의 역전: 후방이 만들고, 전선이 움켜쥐다

1942년 봄, 동쪽으로 옮겨진 공장들이 속속 가동되기 시작했다. 첼랴빈스크의 키로프 공장은 레닌그라드에서 뜯어온 설비와 현지 트랙터 공장을 합쳐 이른바 「탄코그라드」가 되었다. 니콜라이 파톨리체프가 이끄는 첼랴빈스크 주당은 공장 노동자를 위한 주거와 급식을 책임졌고, 뱌체슬라프 말리셰프의 전차공업인민위원부는 매달 T-34 출고 대수를 올려잡았다. 같은 시기 우랄마시와 스베르들롭스크의 공장들도 전차 차체와 포탑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1941년 가을, 기관총 한 자루도 아쉬웠던 군대가 불과 반년 만에 전차와 항공기와 화포를 쏟아내는 공업 체계를 되살려낸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 생산량만으로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더 놀라운 것은 자원 격차를 박살낸 효율이었다. 1942년 소련의 철강 생산량은 약 850만 톤으로, 3,500만 톤을 생산한 독일의 4분의 1에도 못 미쳤다. 그런데 같은 해 소련이 생산한 전차는 약 2만 4,700대, 독일은 약 4,100대였다. 6배 차이였다. 전투기도 소련 2만 5,400대 대 독일 1만 4,700대로 두 배 가까이 앞섰다. 경제사학자 마크 해리슨이 정리한 이 수치의 비밀은 소련의 동원 모델에 있었다. 독일이 군수 전용 설비에 의존하는 동안, 소련은 1920년대 말부터 트랙터 공장과 자동차 공장을 전차로 전환할 수 있게 설계해 두었다. 전쟁이 나자 민간 공장 전체가 무기 공장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계획의 산물이었다.

노동력의 구조도 완전히 바뀌었다. 1941년 한 해에만 약 800만 명의 남성이 군대에 징집되면서 공장의 빈자리는 여성과 10대 청소년이 메웠다. 1942년 말이면 소련 산업 노동력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다. 노동시간은 1일 11시간, 주 6일이 기본이었고 휴가는 취소되었다. 식량 배급은 전선 병사에게 가장 많고, 중공업 노동자, 사무직, 피부양자 순으로 줄어들었다. 이 체계는 문자 그대로 사람을 태워서 무기를 뽑아내는 구조였고, 1942년 민간 소비는 전쟁 전의 60% 이하로 떨어졌다.

바로 그 1942년 9월 12일 밤, 게오르기 주코프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는 크렘린에서 스탈린에게 스탈린그라드에 관한 보고를 올렸다. 도시는 무너지기 직전이었고, 추이코프의 제62군은 강기슭 몇백 미터 폭의 교두보에 매달려 있었다. 주코프는 지원군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바실렙스키에게 「다른 해법」이 필요하다고 중얼거렸다. 스탈린이 이 말을 듣고 둘에게 작전을 짜보라고 지시했다. 이것이 우라누스 작전의 출발점이었다.

두 장군이 구상한 것은 정면 돌파가 아니라 이중 포위였다. 독일 제6군이 스탈린그라드 시내에 묶여 있는 동안, 그 북쪽과 남쪽 측면을 지키는 루마니아 제3·제4군을 분쇄하고 독일군 배후에서 포위망을 닫는 구상이었다. 추축군 전선은 480km에 걸쳐 있었고, 측면은 대전차포도 제대로 없는 루마니아군이 맡고 있었다. 독일의 예비 전력은 약화된 48기갑군단 하나뿐이었다. 소련의 계획은 1930년대에 발전되었다가 대숙청과 함께 묻혔던 「종심작전」 이론을 부활시킨 것이기도 했다. 적의 전술 방어선이 아니라 작전적 종심 전체를 동시에 무력화한다는 개념으로, 독일의 전격전에 대한 소련식 해답이었다.

스탈린은 11월 13일 이 작전 계획을 승인했다. 자신이 주요 군사 작전의 세부에 간섭하지 않은 첫 사례였다. 봄의 하리코프 참사가 그에게 준 교훈이기도 했다. 그러나 준비는 순탄하지 않았다. 11월 8일, 수송 지연으로 작전 개시일이 17일로 연기되었고, 다시 항공 지원 준비 미비로 19일로 밀렸다. 11월 17일에는 제4기계화군단장 바실리 볼스키 소장이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작전을 연기하거나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병력 상태가 나쁘고 방한 장비도 없어 실패할 것이란 이유였다. 스탈린은 볼스키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고, 볼스키는 명령이 내려지면 수행하겠다고 답했다. 바실렙스키도 작전을 취소할 것을 고려했으나, 주코프는 강행을 주장했다.

볼스키의 우려는 근거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몰랐거나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 우랄 너머에서 매달 2,000대 이상의 T-34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11월 19일 아침 안개를 뚫고 시작된 포격을 견딜 루마니아군의 대전차 화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80분간의 포격으로 통신선은 끊기고 탄약고는 폭발했으며, 3,500문의 포와 카추샤 로켓이 뿜어낸 화력 앞에서 루마니아 제3군은 문자 그대로 무너졌다. 나흘 뒤, 소련군 선봉은 칼라치에서 만나 약 29만 명의 추축군을 포위했다. 이 포위는 첼랴빈스크와 스베르들롭스크와 마그니토고르스크에서 1년 동안 밤낮을 이어간 노동이 전선에서 무기로 바뀐 순간이었다. 후방이 만든 것을 전선이 움켜쥔 것이다.

승리에서 파국으로, 파국에서 계획으로: 쿠르스크로 가는 길

스탈린그라드에서 제6군이 항복한 1943년 2월 2일, 소련 사령부는 역사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판단했다. 바실렙스키는 회고록에 「겨울 공세로 적 100개 사단을 격멸했으며, 그것은 독일 지상군 전체의 약 40%에 해당했다」고 썼다. 이 낙관은 근거가 있었다. 보로네시 전선군의 필리프 골리코프는 2월 8일 쿠르스크를, 16일 하리코프를 점령했고, 니콜라이 바투틴의 남서전선군은 도네츠 강을 건너 드네프르 강을 향해 치달았다. 마르키안 포포프의 기동군은 2월 19일 자포리자에서 불과 20km 떨어진 지점까지 도달했다. 바로 그곳에 독일 남부집단군 사령부가 있었다.

그러나 이 돌출은 함정이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이미 2월 6일 히틀러에게 작전의 자유를 요구했고, 19일 반격을 개시했다. 만슈타인이 구상한 것은 '백핸드 블로', 즉 적의 공세가 정점에 달해 보급선이 끊어진 순간 측면을 강타해 포위 섬멸하는 방식이었다. 실제로 소련 전차 부대들은 연료가 바닥난 채 도로 위에 멈춰 서 있었고, 보로네시 전선군의 일부 사단은 전투 병력이 1,000~1,500명으로 줄어 있었다. 하우서의 제2SS기갑군단이 2월 21일 남쪽에서, 호트의 제4기갑군이 북서쪽에서 타격해 들어와 포포프 기동군과 소련 제6군을 분쇄했다. 3월 15일 SS기갑군단은 하리코프를 재점령했고, 18일 벨고로드마저 독일 수중에 떨어졌다. 소련군은 2월의 진격 거리만큼을 후퇴했고, 양측은 봄 해빙기 라스푸티차 앞에서 멈춰 섰다.

이 패배는 두 가지를 낳았다. 하나는 지도 위의 돌출부였다. 쿠르스크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150km 튀어나오고 남북 200km에 이르는 이 돌출부는 독일군이 보기에 너무나도 '잘라내고' 싶은 형상이었다. 다른 하나는 소련 최고사령부 내부의 냉철한 재평가였다. 스탈린은 처음에 라스푸티차가 끝나는 즉시 선제공세에 나서길 원했으나, 게오르기 주코프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가 이를 말렸다. 주코프는 4월 8일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에서 이렇게 썼다: 「적이 13~15개 기갑사단을 포함한 최정예 병력으로 쿠르스크를 공격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공세로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방어로 적을 소모시키고, 적의 전차를 격파한 뒤 신선한 예비대로 총공세에 나서는 편이 낫습니다.」 4월 12일 회의에서 스탈린은 마지못해 동의했고, 소련군은 사상 처음으로 '의도적 전략 방어'라는 개념을 채택했다.

독일 측에서도 의견은 갈렸다. 쿠르크 돌출부 절단 작전 '치타델레'는 쿠르트 차이츨러 참모총장이 주도했으나, 구데리안은 5월 10일 히틀러에게 「쿠르스크가 어딨는지 세상 누가 알기나 하겠습니까?」라고 물으며 공격 자체에 반대했다. 북부 공격을 맡은 발터 모델은 4월 27일 정찰 사진을 들고 히틀러를 찾아가 소련군이 이미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히틀러는 판터와 티거 전차가 도착할 때까지 공격을 거듭 연기했고, 작전은 5월 3일에서 6월 12일, 다시 7월 5일로 밀렸다. 그 석 달 동안 쿠르스크 돌출부에서는 30만 명 이상의 민간인과 공병들이 9,200km의 참호를 파고, 50만 발이 넘는 대전차 지뢰를 매설하고, 깊이 300km에 이르는 6중 방어선을 구축했다. 1941년과 1942년의 파국적 여름을 겪은 붉은 군대가 처음으로 독일의 공격을 제 발로 걸어 들어오게 만든 싸움판을 설계한 것이다.

독일 후방의 붕괴: 파르티잔, 철도, 그리고 바그라티온

1943년 여름, 쿠르스크에서 독일의 마지막 대공세가 분쇄되고 있을 무렵, 그 후방에서는 전쟁사에 유례없는 규모의 사보타주 작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1943년 7월 14일, 판텔레이몬 포노마렌코가 이끄는 중앙유격대본부는 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명의로 「철도 통신 파괴에 관한 결정」을 발령했다. 일리야 스타리노프 대령이 설계한 2kg급 소형 자석 기뢰와 각종 급조 폭약이 비밀리에 유격대에 배급되었고, 167개 여단·연대 소속 약 10만 명의 파르티잔이 배치되었다. 목표는 하나였다: 독일 중부집단군의 철도 보급망 전체를 동시다발적으로 마비시키는 것.

8월 3일 밤, 「레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독일 측 기록에 따르면 그날 밤에만 전선 전역에서 1만 900여 발의 폭파 장약이 기폭되었고, 그중 8천여 발이 실제로 레일을 절단했다. 벨라루스에서만 철도 운행이 15~30일간 마비되었고, 독일군의 수송량은 35~40% 급감했다. 쿠르스크 전선으로 급파되던 병력과 탄약을 실은 열차들이 도중에 멈춰 서거나 탈선해 전복되었다. 이어 9월 19일부터 개시된 「콘체르트」 작전은 규모가 더 컸다: 193개 부대, 21만 명 이상이 발트해에서 크림반도까지 900km 전선, 400km 종심에서 철도 파괴를 감행했다. 민스크로 향하는 한 50km 구간에서만 643회의 폭파가 집중되었고, 독일군은 결국 병사들을 6m 간격으로 세워 선로를 지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작전들은 단순한 파괴 행위가 아니었다. 스타리노프가 스페인 내전 때부터 다듬어온 사보타주 이론, 즉 최소한의 폭약으로 최대의 혼란을 복구 불가능한 방식으로 동시에 일으킨다는 원칙이 비로소 전략적 규모로 실현된 것이었다. 포노마렌코의 본부는 전선군 군사평의회와 직접 연결되어 파르티잔의 타격을 붉은 군대의 작전 일정에 정확히 맞추었다.

1943년 말까지 벨라루스 파르티잔은 공화국 영토의 약 60%인 10만 제곱킬로미터 이상을 통제했고, 20여 개의 지역 중심지와 수천 개의 마을에서 소비에트 행정이 복원되었다. 독일 점령 체제는 사실상 주요 도로와 철도를 따라 길게 뻗은 얇은 띠로 축소되었다. 1944년 봄, 독일군은 벨라루스에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세 차례 실시했으나 파르티잔의 근거지를 제거하는 데 실패했다. 그 잔혹성, 즉 마을 전체의 주민을 학살하는 방식은 오히려 파르티잔 대열을 더욱 불렸다. 이 무렵 파르티잔 병력은 14만 명에서 37만 명 사이로 추산된다.

1944년 6월 19일 밤, 바그라티온 작전을 사흘 앞두고 제3차 철도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번 목표는 이전보다 더 정밀했다: 비테프스크·오르샤·모길료프를 잇는 주요 간선과 교량이 우선 파괴 대상이었다. 그날 밤에만 9,500건 이상의 폭파가 감행되었고, 독일 중부집단군의 후방 철도망은 결정적인 순간에 마비되었다. 증원군과 탄약을 실은 열차들은 선로 위에 멈춰 섰고, 6월 22일 새벽 포문을 연 붉은 군대를 막아설 독일군은 보급도, 예비대도 없이 참호에 앉아 있었다.

그로부터 3주 후, 독일 중부집단군 38개 사단 중 28개 사단이 사실상 소멸했다. 독일 국방군 역사상 최대의 패배였다. 이 승리의 1등 공신은 당연히 전선에서 싸운 병사들이었지만, 그들의 진격로 뒤편에서 이미 전쟁의 절반을 승리로 이끈 사람들은 숲에서 나온 파르티잔들이었다.

비스와에서 베를린까지: 경주, 해방, 그리고 제국의 종말

1945년 1월 12일, 주코프의 제1벨로루시 전선군과 코네프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비스와 강 교두보에서 독일 방어선을 향해 쏟아져 들어갔다. 비스와-오데르 공세로 불린 이 작전은 23일 만에 500km를 돌파했고, 소련 전차군은 하루 70~100km라는 전격전에도 보기 드문 속도로 독일 본토를 향해 달렸다. 1월 17일 바르샤바가 해방되었고, 2월 초에는 주코프의 선두 부대가 베를린에서 불과 60km 떨어진 오데르 강에 도달해 있었다.

이 진격의 와중에 쿠로치킨의 제60군은 오데르가 아니라 실레지아 공업지대를 향하고 있었다. 1월 27일 오후, 정찰 기병대가 오시비엥침 마을에서 후퇴하는 독일군과 교전한 끝에 아우슈비츠 수용소군에 도달했다. 남아 있던 약 7,000명의 수감자들은 해골 같은 모습으로 막사에 누워 있거나 눈밭에 쌓인 시체 더미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수용소 해방 자체가 작전 목표는 아니었다. 소련군 사령부는 실레지아의 공장 지대를 온전히 확보하라는 스탈린의 지시에 집중하고 있었고, 아우슈비츠는 그 진격로 위에 우연히 놓여 있었다. 하지만 촬영기자 보론초프가 1월 28일부터 찍은 필름과 소련 전쟁범죄조사위원회의 현장 기록은, 머리카락 7톤과 신발 44,000켤레 같은 물증과 함께 뉘른베르크 재판의 증거가 되었다.

4월이 되자 쟁점은 누가 베를린을 먼저 점령하느냐로 좁혀졌다. 스탈린은 4월 1일 작전회의에서 작전경계선을 뤼벤에서 멈춰 그림으로써 주코프와 코네프 사이의 경쟁에 기름을 부었다. 뤼벤 이남은 누구의 담당 구역도 아니었고, 먼저 돌파하는 쪽이 베를린을 가질 자격을 얻는 셈이었다. 주코프는 명예로운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4월 16일 새벽, 143개의 탐조등을 켜고 9,000문의 포가 30분 동안 50만 발을 퍼부은 뒤 공격을 개시했으나, 독일군 사령관 하인리치는 전날 밤 병력을 2선으로 빼두었다. 탐조등 불빛은 연기와 먼지에 반사되어 오히려 공격 부대의 실루엣만 드러냈고, 봄철 해빙으로 질퍽해진 오데르 강변 습지에 전차들이 빠졌다. 젤로프 고지 돌파에 나흘이 걸렸고 소련군 사상자는 3만 명, 전차 손실은 700대를 넘었다.

반면 코네프는 남쪽에서 신속히 돌파한 뒤 스탈린의 허가를 받아 제3근위전차군과 제4근위전차군을 베를린으로 방향 전환했다. 4월 25일, 두 전선군은 베를린 서쪽에서 만나 포위를 완성했고, 같은 날 제5근위군 정찰대가 토르가우에서 미군 제69보병사단과 조우해 엘베 강 회합을 이루었다.

시가전은 잔혹했다. 추이코프의 제8근위군은 남쪽에서 템펠호프 공항을 거쳐 시내로 밀고 들어갔고, 제3충격군은 북쪽에서 국회의사당을 향했다. 독일 방어 병력은 정규군 잔존 부대와 무장친위대, 그리고 10대 소년과 1차대전 참전 노인으로 채워진 국민돌격대가 뒤섞인 45,000명 남짓이었다. 프랑스인, 덴마크인, 노르웨이인 의용병들로 구성된 SS 노르트란트 사단은 포로가 되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특히 격렬히 저항했다. 4월 30일 저녁, 제756연대 병사들이 국회의사당 지붕에 승리의 깃발을 올렸고, 몇 시간 뒤 히틀러는 총통 벙커에서 자살했다.

5월 2일 오전 6시, 베를린 방어 사령관 바이들링 장군이 항복했다. 5월 8일 밤 베를린 카를스호르스트에서 주코프가 독일 국방군의 무조건 항복 문서를 접수했다. 베를린 작전 전체에서 소련군은 81,116명 전사, 28만여 명 부상, 전차 2,156대 손실이라는 대가를 치렀다. 동부전선의 마지막 4개월 동안에도 붉은 군대는 전쟁 전체 사상자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독일은 무조건 항복했고,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났다.

승리가 남긴 것, 가리운 것,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논쟁

대조국전쟁이 끝났을 때 소련이 손에 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승리였다. 독일 국방군은 무조건 항복했고, 히틀러는 자살했으며, 유럽의 파시즘 체제는 소멸했다. 전쟁 전 국제연맹에서조차 배제되었던 소련은 이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거부권을 가진 상임이사국이었고, 동유럽 전역에 자국의 안보 체제를 구축한 초강대국이었다. 붉은 군대가 베를린 국회의사당에 올린 깃발은 단지 한 나치 국가의 종말이 아니라, 1917년 이래 줄곧 포위당해 왔다고 여겼던 혁명 국가가 최초로 유럽의 중심에서 자신의 질서를 세웠음을 선언하는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 승리는 처음부터 균열을 품고 있었다. 사상자 규모부터가 그랬다. 소련 시기 공식 수치는 2,000만 명이었고, 1993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의 안드레예프·다르스키·하리코바 연구팀이 제시한 2,660만 명이 현재까지 가장 널리 인용된다. 그런데 2010년대 후반 러시아 역사가 이고리 이블레프는 4,200만 명이라는 주장을 내놓았고, 빅토르 젬스코프는 군사 손실마저 공식 수치보다 훨씬 크다고 반박했다. 영국의 경제사학자 마크 해리슨은 이블레프의 방법론을 검토한 뒤 "26~27백만 명이 여전히 가장 신뢰할 만한 추정치"라고 결론 내렸지만, 이 수치조차 전후 기근과 강제이주로 인한 사망을 어디까지 포함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절대적인 숫자는 영원히 확정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승리를 가능하게 한 요인을 둘러싼 논쟁은 냉전의 대리전 양상을 띠며 전개되었다. 소련 측은 자국의 산업 동원과 붉은 군대의 전투 역량을 강조했고, 서방 측은 미국의 무기대여법이 없었다면 소련은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냉전이 끝나고 양측 기록이 개방되면서 학계는 보다 균형 잡힌 결론으로 수렴하고 있다. 데이비드 글랜츠와 조너선 하우스는 『거인들의 충돌』(1995)에서 소련군이 1943년 이후 독일군을 능가하는 작전술을 발전시켰음을 입증했고, 리처드 오버리는 『러시아의 전쟁』(1997)에서 계획경제의 동원 능력과 함께 무기대여법이 제공한 항공유·트럭·통신장비의 결정적 기여를 동시에 인정했다. 무기대여 물자의 85%가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에 도착했으므로 소련이 단독으로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높지만, 그 물자가 없었다면 붉은 군대는 1945년 5월이 아니라 1946년에 베를린에 도착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현재의 대체적 합의다.

스탈린의 전쟁 지도력에 대한 평가도 근본적으로 갈라진 채 남아 있다. 조프리 로버츠는 『스탈린의 전쟁들』(2006)에서 스탈린을 승리의 설계자로 재평가했고, 개전 직전 정보 경고를 무시하고 1942년 봄의 조기 총공세를 강행해 하리코프에서 파국을 초래한 결정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비판이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 1937~38년 대숙청이 장교단에 입힌 손상이 1941년의 붕괴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도 여전히 활발한 논쟁의 장이다. 최근 연구는 숙청으로 제거된 장교의 절대 숫자가 과거에 믿어졌던 것보다 적었음을 보여주지만, 숙청이 초래한 심리적 위축과 주도성의 마비가 작전 차원의 재앙으로 이어졌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적다.

이 전쟁이 남긴 가장 복합적인 유산은 기억의 정치다. 역사가 니나 투마르킨은 스탈린이 전쟁의 끔찍한 대가를 은폐하기 위해 전후 기념을 의도적으로 억눌렀고, 브레즈네프 정권이 1965년 승전 20주년을 기점으로 전쟁을 국가적 숭배의 대상으로 격상시켰다고 분석한다. 이 숭배는 「영웅 도시」 서열, 무명용사의 묘, 매년 5월 9일 붉은 광장의 퍼레이드 같은 의례를 통해 모든 소비에트 가정의 상실을 국가 서사 속에 편입시켰다. 소련이 해체된 뒤 이 숭배는 붕괴했지만, 푸틴 시기 러시아에서 대조국전쟁의 기억은 다시 정치적 자원으로 소환되었고, 2015년 우크라이나가 「위대한 조국전쟁」이라는 용어 자체를 법에서 삭제한 것은 그 기억이 지금도 얼마나 첨예한 투쟁의 대상인지를 보여준다.

2,700만이 넘는 죽음이라는 사실 위에는 결코 하나의 이야기만이 놓일 수 없다. 전쟁의 군사적·정치적 결과는 명백하다. 나치 독일은 패망했고 소련은 초강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의 정확한 규모, 누구의 공헌이 결정적이었는지, 그리고 그 희생이 무엇을 의미했는지에 대한 물음은 전쟁이 끝난 지 80년이 지난 지금도 합의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결과

승리의 대가는 약 2,700만 명의 소련 인민의 목숨이었다. 계획경제는 국토의 서부를 잃고도 독일보다 많은 전차와 항공기를 생산해 그 동원 능력을 입증했고, 붉은 군대는 아우슈비츠를 해방하고 유럽 절멸 체제의 심장을 멈춰 세웠다. 이 전쟁은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만들었으며, 파시즘에 대한 승리는 이후 소비에트 사회의 가장 깊은 공동 기억으로 남았다.

연표

  1. 1941.06.22
    바르바로사 작전: 기습 침공

    독일과 그 동맹국들이 300만 명이 넘는 병력으로 발트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전선에서 소련을 침공했다. 몰로토프가 정오의 라디오 연설에서 「우리의 대의는 정의롭다. 적은 분쇄될 것이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2. 1941.06–12
    파국의 여름과 공업의 동방 소개

    개전 첫 몇 달 동안 붉은 군대는 수백만 명의 사상자와 포로를 내며 후퇴했다. 그 와중에 시베르니크가 이끄는 소개위원회는 1941년 말까지 1,500여 개의 대공장과 1,000만 명이 넘는 사람을 우랄, 시베리아, 중앙아시아로 옮겼다. 철도로 나라의 공업 기반을 통째로 이동시킨 이 소개는 전쟁사에서 유례없는 위업으로 꼽힌다.

  3. 1941.09.08
    레닌그라드 포위의 시작

    독일군이 슐리셀부르크를 점령하면서 872일에 걸친 레닌그라드 봉쇄가 시작됐다. 즈다노프가 이끄는 당 조직과 시민들은 기아와 포격 속에서 도시를 지켰고, 라도가 호수의 얼음길 「생명의 길」이 유일한 보급선이 됐다. 봉쇄로 최소 80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4. 1941.09–10
    조르게의 정보와 시베리아 사단

    도쿄의 소련 정보원 리하르트 조르게는 일본이 소련이 아니라 남방을 공격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 정보는 극동의 정예 사단들을 모스크바 방어전으로 이동시키는 결정을 뒷받침했다.

  5. 1941.12.05
    모스크바 반격

    주코프가 지휘한 소련군의 반격이 수도 문턱에서 독일군을 100~250km 밀어냈다. 나치 독일 지상군이 당한 최초의 대규모 패배였으며, 전격전 불패의 신화가 여기서 깨졌다.

  6. 1942.07–11
    스탈린그라드 방어전

    독일군의 하계 공세가 볼가 강까지 도달하자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마라」는 명령 제227호가 내려졌다. 추이코프의 제62군은 폐허가 된 도시에서 건물 하나, 층계 하나를 두고 싸우며 강안의 좁은 교두보를 끝내 지켜냈다.

  7. 1942–1943
    계획경제, 독일을 앞지르다

    국토 서부의 공업지대를 잃고도 소련은 1942년 한 해에만 전차 약 2만 4천 대를 생산해 독일을 크게 앞질렀고, 항공기와 화포에서도 우위를 굳혔다. 우랄로 옮겨진 공장들과 여성·청소년이 대거 투입된 후방 노동이 이 역전을 만들어냈다.

  8. 1942.11.19
    우라누스 작전: 포위

    바실렙스키와 주코프가 입안한 반격이 스탈린그라드 양익의 추축군 전선을 돌파해 독일 제6군 전체를 포위했다. 소련군이 전략적 주도권을 쥐는 전환이 시작됐다.

  9. 1943.02.02
    스탈린그라드의 승리

    포위된 독일 제6군이 항복하고 파울루스 원수를 포함한 약 9만 1천 명이 포로가 됐다. 스탈린그라드는 제2차 세계대전 전체의 전환점으로, 세계에 파시즘이 격파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10. 1943.07–08
    쿠르스크: 마지막 독일 공세의 분쇄

    쿠르스크 돌출부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기갑전이 벌어졌다. 종심 방어로 독일군의 공세를 소진시킨 소련군은 즉시 반격으로 전환했고, 이후 종전까지 전략적 주도권은 단 한 번도 독일로 돌아가지 않았다.

  11. 1943.08–09
    파르티잔 전쟁과 레일 전쟁

    점령지에서는 수십만 명의 파르티잔이 싸우고 있었고, 1943년 여름 「레일 전쟁」과 「콘체르트」 작전으로 독일군 후방의 철도망을 조직적으로 파괴했다. 러시아인, 벨로루시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 등 여러 민족이 함께 싸운 이 저항은 점령 체제를 안에서부터 갉아먹었다.

  12. 1944.06.22
    바그라티온 작전

    침공 3주년이 되는 날 개시된 공세가 독일 중부집단군을 궤멸시키고 벨로루시를 해방했다. 몇 주 만에 28개 사단 규모의 독일군이 소멸한 이 작전은 독일 국방군이 동부전선에서 입은 최대의 패배였다.

  13. 1945.01.27
    붉은 군대, 아우슈비츠를 해방하다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제60군이 아우슈비츠 수용소군을 해방해 남아 있던 약 7,000명의 수감자를 구했다. 소련 종군기자 바실리 그로스만이 앞서 쓴 「트레블린카의 지옥」과 함께, 절멸 수용소의 실상을 세계에 알린 최초의 증언들이 붉은 군대의 진격로에서 나왔다.

  14. 1945.04.16–05.09
    베를린과 승리, 그리고 2,700만 명

    주코프와 코네프의 전선군이 베를린을 포위해 함락시켰고, 5월 1일 국회의사당 위에 승리의 깃발이 올랐다. 5월 8일 밤 카를스호르스트에서 주코프가 독일의 무조건 항복 문서를 접수했다. 승리의 대가는 약 2,700만 명의 소련 인민의 목숨이었고, 독일 국방군 손실의 약 80%가 동부전선에서 발생했다.

관련 인물 378명

주도 · 집행18

스메르시 방첩총국장으로 전시 군 방첩 지휘빅토르 아바쿠모프1908–1954

내무인민위원·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전시 보안·군수·민족이주 총괄라브렌티 베리야1899–1953

NKVD 부인민위원으로 전시 경제총국·유격대 작전 관여보그단 코불로프1904–1953

군 방첩 부대에서 전시 정보·보안 업무비탈리 페도르추크1918–2008

굴라크 철도건설총국장으로 전략 철도·도로 건설에 수용소 노동 동원나프탈리 프렌켈1883–1960

극동 MGB 책임자로 전략방면 보안·방첩 업무세르고 고글리제1901–1953

NKVD 요원으로 1944년부터 보안기관 복무헤이다르 알리예프1923–2003

크림·다게스탄 내무인민위원으로 전선 지역 보안 담당그리고리 카라나제1902–1970

NKVD 제4국 부장으로 적후 유격전·사보타주 작전 지휘나움 에이팅곤1899–1981

NKVD 해외정보국장으로 전시 첩보망 운영, 원자력 스파이 지휘파벨 피틴1907–1971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으로 전선 인근 보안·이주 작전 관여압크센티 라파바1899–1955

스메르시 방첩 책임자로 전선 보안·방첩 활동니콜라이 루하제1905–1955

NKVD 제4국 요원으로 적후 특수작전 수행콘스탄틴 사비츠키1905–1955

내무 인민위원·장관으로 전시 보안·포로·민족이주 관리세르게이 크루글로프1907–1977

NKVD 부인민위원으로 스탈린그라드 방어·민족강제이주 집행이반 세로프1905–1990

자캅카스 국경경비대·방첩 책임자샬바 체레텔리1894–1955

NKVD 제4국장으로 유격전·사보타주·첩보 작전 총괄파벨 수도플라토프1907–1996

베를린 방위구 최후 사령관헬무트 바이들링1891–1955

1945년 4월 23일 임명되어 5월 2일 추이코프에게 베를린을 항복시켰다.

지도부41

최고사령관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

국가방위위원회 의장이자 최고사령관으로 전쟁 지도부 전체를 총괄했다.

부최고사령관게오르기 주코프1896–1974

모스크바 방어전과 스탈린그라드·베를린 작전을 지휘·조율했고, 카를스호르스트에서 독일의 항복 문서를 접수했다.

총참모장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1895–1977

총참모장으로 우라누스 작전과 바그라티온 작전 등 주요 전략 공세를 입안했다.

국가방위위원회 부의장뱌체슬라프 몰로토프1890–1986

6월 22일 개전을 인민에게 알린 라디오 연설을 했고, 외무인민위원으로 반파시즘 연합 외교를 이끌었다.

중앙유격대본부장판텔레이몬 포노마렌코1902–1984

중앙유격대본부장으로서 '철도전쟁'과 '콘체르트' 작전을 기획·지휘해 독일 후방 보급선을 마비시켰다. 1941년 9월 스탈린에게 유격대 중앙지휘기구 창설을 건의해 채택되었다.

참모총장으로 전쟁 초기 작전 계획 지휘보리스 샤포시니코프1882–1945

해군인민위원·최고사령부 스타프카 위원니콜라이 쿠즈네초프1904–1974

전 기간 해군인민위원으로 소련 해군을 지휘했고, 1941년 6월 22일 오전 3시 전 함대 전투태세 1호 발령으로 해군을 기습 손실에서 구했다. 스타프카 위원으로 흑해·발트 함대 작전을 총괄하고 얄타·포츠담 회담에 참석했으며, 1945년 2월 국가방위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작전국장 → 부참모장 → 총참모장알렉세이 안토노프1896–1962

1942년 12월 작전국장으로 기용된 후 쿠르스크, 바그라티온, 비스와-오데르, 베를린에 이르기까지 소련군의 모든 주요 전략작전을 입안했다. 스탈린의 신뢰를 받아 야전사령관들보다 크렘린 집무실을 더 자주 드나들었고, 원수 계급 없이 승리훈장을 받은 유일한 군인으로 얄타·포츠담 회담에도 참석했다.

공군 총사령관 겸 스타프카 대표알렉산드르 노비코프1900–1976

1942년 4월 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전선 공군을 항공군으로 재편하고 동종 항공군단을 창설했으며, 스타프카 대표로서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쾨니히스베르크·베를린·만주 작전에서 항공전력을 조율했다. 1943년 세계 최초의 항공원수, 1944년 최초의 항공 총원수가 되었다.

포병 총사령관·스타프카 대표니콜라이 보로노프1899–1968

전 기간 적군 포병을 총괄하고 스타프카 대표로서 스탈린그라드·레닌그라드·쿠르스크의 결정적 순간마다 현장에 파견되었다. 천왕성 작전의 포병 준비를 직접 설계했으며, 포위된 독일 6군 섬멸 작전(콜초 작전)의 총괄 지휘를 맡아 파울루스를 직접 신문했다.

해군 제1부인민위원 겸 주참모부장이반 이사코프1894–1967

전쟁 내내 발트·흑해 함대와 육군 간 협동작전을 조정했고, 레닌그라드 '생명의 길' 구축을 주도했으며, 북캅카스 전선 부사령관으로 세바스토폴 방어와 캅카스 전투에서 함대와 지상군의 연계를 지휘했다. 1942년 투압세에서 독일 공습으로 왼쪽 다리를 잃었으나 치료 후 복무를 재개했다.

제8기병군단장알렉세이 자도프1901–1977

제32근위소총군단장알렉산드르 로딤체프1905–1977

하리코프 민병대 정치위원알렉세이 예피셰프1908–1985

후방군 총국장안드레이 흐룰료프1892–1962

소대장빅토르 체브리코프1923–1999

파르티잔 조직가데먄 코롯첸코1894–1969

포병총국장그리고리 쿨리크1890–1950

제15소총군단장이반 페듀닌스키1900–1977

NKVD 부대장이반 마슬렌니코프1900–1954

적군 통신부대장이반 페레시프킨1904–1978

대령이반 야쿠봅스키1912–1976

제1전차군 사령관키릴 모스칼렌코1902–1985

베를린·프라하 공격 지휘드미트리 렐류셴코1901–1987

남서전선 사령관미하일 키르포노스1892–1941

제64군 사령관미하일 슈밀로프1895–1975

제4대전차여단 사령관미트로판 네델린1902–1960

적군 주임외과의니콜라이 부르덴코1876–1946

경호 책임자니콜라이 블라시크1896–1967

소총군단장파벨 바티츠키1910–1984

비행중대 부사령관파벨 쿠타호프1914–1984

파르티잔 지휘관표트르 아브라시모프1912–2009

제24근위소총사단장표트르 코셰보이1904–1976

레닌그라드 방어 지도자표트르 포프코프1903–1950

전차부대 훈련국장세묜 크리보셰인1899–1978

제1항공군 사령관세르게이 후댜코프1902–1950

지휘관세르게이 미할코프1913–2009

파르티잔 조직 책임자알렉산드르 셸레핀1918–1994

스타프카 대표세르게이 시테멘코1907–1976

제17항공군 사령관블라디미르 수데츠1904–1981

33군 사령관미하일 G. 예프레모프1897–1942

스탈린이 퇴각을 허가하지 않아 뱌지마에서 포위되었고, 1942년 4월 자결했다.

참여296

제62군 사령관바실리 추이코프1900–1982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에서 제62군을 지휘해 도시를 지켰고, 1945년 베를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았다.

개전기 국방인민위원세묜 티모셴코1895–1970

개전 당시 국방인민위원으로 1941~42년 서부·남서 방면의 방어전을 지휘했다.

국가방위위원회 위원클리멘트 보로실로프1881–1969

국가방위위원회 위원으로 개전 초 레닌그라드 방면을 지휘했고 파르티잔 운동의 조직에도 관여했다.

레닌그라드 당 지도자안드레이 즈다노프1896–1948

872일의 봉쇄 기간 내내 레닌그라드의 당 조직과 방어를 이끌었다.

소개위원회 의장니콜라이 시베르니크1888–1970

소개위원회 의장으로 1,500여 개 대공장과 1,000만 명이 넘는 인원의 동방 이동을 지휘했다.

보급 총책아나스타스 미코얀1895–1978

붉은 군대의 식량·연료·피복 보급과 연합국 원조 물자의 수용을 총괄했다.

철도인민위원라자르 카가노비치1893–1991

전시 철도를 운영해 공업 소개와 전선 보급의 수송을 떠받쳤다.

전차공업 인민위원뱌체슬라프 말리셰프1902–1957

전차공업 인민위원으로 우랄의 「탄코그라드」에서 T-34의 대량생산을 조직했다.

전선 군사평의회 위원니키타 흐루쇼프1894–1971

스탈린그라드 전선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방어전과 반격에 참여했다.

전선 사령관로디온 말리놉스키1898–1967

스탈린그라드 반격에서 구원 시도를 저지했고, 이후 전선군 사령관으로 우크라이나 해방과 부다페스트 점령을 지휘했다.

『프라우다』 주필 겸 전쟁사 편찬위원장표트르 포스펠로프1898–1979

전 기간 『프라우다』 주필로서 전시 선전을 지휘하고 스탈린상 상금을 국방기금에 기부했으며, 이후 6권본 「대조국전쟁사」 편찬위원장을 맡았다.

전선군 사령관콘스탄틴 로코솝스키1896–1968

모스크바 방어(16군), 스탈린그라드 포위 및 파울루스 생포(돈 전선군), 쿠르스크 방어, 바그라티온 작전(1벨로루시 전선군), 동프로이센·포메라니아·베를린 작전(2벨로루시 전선군)을 지휘했다. 1944년 6월 소비에트 연방 원수가 되었고 1945년 6월 24일 붉은 광장에서 승리 퍼레이드를 지휘했다.

첼랴빈스크 주당 제1서기 · '탱코그라드'와 우랄 의용전차군단 창설니콜라이 파톨리체프1908–1989

첼랴빈스크 주당 제1서기로서 전쟁 물자 생산을 위해 지역 경제 전체를 재편했고, 1943년 우랄 의용전차군단 창설의 조직자이자 직접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군사기술위원회 위원장·원자력 계획의 발판을 놓은 물리학자아브람 이오페1880–1960

개전 직후 군사기술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고, 레닌그라드 봉쇄 중 시당 군사공학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42년 9월 국방위원회는 카잔에 피난해 있던 이오페의 LFTI 핵물리학 연구실을 기반으로 제2연구소(훗날 쿠르차토프 연구소)를 설립해 소련 원자력 계획의 공식 출발점이 되었다.

전선군 사령관 ·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키예프니콜라이 바투틴1901–1944

남서전선군 사령관으로 우라누스 작전을 계획·집행해 스탈린그라드 포위를 완성했고, 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으로 쿠르스크 남측면을 방어한 뒤 벨고로드-하리코프 반격으로 전환했으며, 1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으로 키예프를 해방하고 코르순 포위전과 우안 우크라이나 해방을 지휘했다. 1944년 2월 후방 시찰 중 UPA 매복에 중상을 입고 4월 사망했다.

전선군 사령관 · 스텝·제2·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이반 코네프1897–1973

쿠르스크 전투에서 스텝전선군을 지휘했고, 코르순-셰브첸콥스키 포위전으로 적을 섬멸했으며, 비스와-오데르 작전과 베를린·프라하 진격으로 전쟁을 마무리했다. 1944년 원수 진급, 두 차례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제3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 · 최연소 전선 사령관이반 체르냐홉스키1907–1945

60군 사령관으로 쿠르스크와 드네프르 도하에서 두각을 나타내 첫 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4년 37세의 나이로 제3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에 올라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비테프스크·민스크·빌뉴스를 해방했고 두 번째 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5년 2월 동프로이센 공세 중 포탄 파편에 전사했다.

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레오니트 고보로프1897–1955

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으로서 포위된 도시의 방어를 체계화하고, 1943년 이스크라 작전으로 봉쇄를 돌파했으며, 1944년 1월 27일 레닌그라드-노브고로드 공세로 872일의 봉쇄를 완전히 해제했다. 1944년 원수 진급, 1945년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주영 소련 대사·외무인민부위원이반 마이스키1884–1975

1932년부터 1943년까지 런던 주재 소련 대사로 재임하며 전시 연합국 외교의 핵심 채널로 기능했다. 1941년 7월 마이스키–시코르스키 협정에 서명하여 소련-폴란드 외교 관계를 복원했고, 영국과의 군수 물자 공급 및 렌드리스 협상을 주도했다. 1943년 귀국 후 외무인민부위원으로 얄타·포츠담 회담에 참여했으며 대독일 배상 문제를 주도했다.

중앙유격대본부 벨라루스 대표·지하 콤소몰 지도자키릴 마주로프1914–1989

1942년 9월 중령 계급으로 독일군 후방의 벨라루스에 파견되어 중앙유격대본부 대표로 활동했고, 점령지에서 벨라루스 콤소몰 지하 중앙위 서기로서 청년 파르티잔 조직을 지도했다.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적기훈장과 조국전쟁훈장 1급을 받았다.

레닌그라드 방어위원회 부의장·식량위원장·전선군사평의회 위원알렉세이 쿠즈네초프1905–1950

872일의 봉쇄 기간 내내 레닌그라드 방어의 실무를 총괄했다. 방어시설 건설과 식량 공급을 주재했고, 발트함대·북부전선·레닌그라드 전선·제2충격군 군사평의회 위원을 겸했다. 중장(1943) 계급으로 쿠투조프 훈장 1·2급, 적기훈장, 조국전쟁훈장 1급을 받았다.

서부방면군·제1우크라이나 방면군 참모장, 서부방면군 사령관바실리 소콜롭스키1897–1968

서부방면군 참모장으로 모스크바 반격을 계획했고, 제1우크라이나 방면군 참모장으로 베를린 작전의 입안에 기여했으며, 1945년 5월 독일 무조건 항복 조인식에 입회했다.

항공공업인민위원알렉세이 샤후린1904–1975

전 기간 항공공업인민위원으로 Yak-1·MiG-3·Il-2·La-5의 양산 체제를 구축하고, 개전 직후 약 100개 항공공장의 우랄·시베리아 대피를 지휘해 루프트바페를 생산력으로 압도했다.

스탈린 비서실장 · 전쟁 기간 군사작전 자료 준비, 얄타·포츠담 회담 실무 참여알렉산드르 포스크료비셰프1891–1965

1941~1945년 전 기간 스탈린 비서실에서 군사작전 자료를 준비했고 테헤란 회담 준비,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에 직접 참여했다. 전쟁 중 소장 계급을 받았다.

볼호프·카렐리야 전선군 사령관, 제1극동전선군 사령관키릴 메레츠코프1897–1968

개전 이틀 만에 체포·고문당했다가 9월 석방되어 전선에 복귀했다. 볼호프 전선군 사령관으로 1943년 1월 이스크라 작전에서 레닌그라드 봉쇄를 돌파했고, 1944년 카렐리야 전선군 사령관으로 페차모-키르케네스 작전을 지휘해 노르웨이에서 전쟁을 마쳤다. 1944년 10월 원수 진급. 1945년 8월 제1극동전선군을 지휘해 관동군 격파의 주타격을 가했고 승리훈장을 받았다.

탄약 제1부인민위원미하일 흐루니체프1901–1961

탄약 제1부인민위원(1942~1946)으로서 포탄·항공폭탄·각종 탄약의 증산을 총괄했고, 1945년 전시 생산 조직 공로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KV·IS 중전차 설계자, 첼랴빈스크 키로프 공장(탱코그라드) 수석설계자니콜라이 두호프1904–1964

1941년 7월 레닌그라드에서 첼랴빈스크로 대피해 KV 전차의 컨베이어 생산을 조직했고, 1943년 6월 국방위원회 결정으로 수석설계자에 임명되어 KV-85, IS-1, IS-2, IS-3 중전차와 자주포를 개발했다. 1945년 9월 전차 설계 공로로 첫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제4·제3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 발칸 해방을 지휘한 원수표도르 톨부힌1894–1949

스탈린그라드에서 57군을 지휘했고, 이후 전선군 사령관으로 돈바스·크림·루마니아·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헝가리·오스트리아를 해방했다. 야시-키시뇨프 작전의 성공으로 1944년 9월 원수로 진급했고, 1945년 승리훈장을 받았다.

핀스크 소함대 복무, 부상·포로 탈출한 해군 문예교관미하일 리프시츠1905–1983

1941년 7월 핀스크 소함대에 배속되어 벨라루스·키예프 방어전에 참가했다. 9월 22일 총상을 입고, 10월 20일 독일 기병에게 붙잡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총살 직전 탈출, 10월 25일 소련군 진지에 도달했다. 이후 해군 문예교관 및 강사로 복무하며 적성훈장을 받았고 1946년 3월 대위로 전역했다.

남부전선·북캅카스전선 정치위원 → 218사단·28군단 정치부장니콜라이 셸로코프1910–1984

개전 초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시의장으로 대피를 지휘한 뒤 남부전선 군사평의회 작전반장으로 참전, 북캅카스전선 후방 정치부 차장을 거쳐 218 로모다노-키예프 사단과 28 리보프 군단 정치부장으로 캅카스·우크라이나·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전투에 참가, 대령으로 종전했다.

아조프·도나우 소함대 사령관세르게이 고르시코프1910–1988

흑해함대 순양함여단장으로 개전을 맞아 오데사 방어와 그리고리옙스키 상륙작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아조프 소함대 사령관(1941–1942, 1943)으로 케르치-페오도시야 상륙작전과 케르치-엘티겐 상륙작전을 지휘했고, 1942년 11월 노보로시스크에서 47군을 일시 지휘해 함대 지휘관이 육군을 지휘한 유일한 사례를 남겼다. 도나우 소함대 사령관(1944)으로 야시-키시뇨프·베오그라드·부다페스트 작전에서 하천-육상 합동작전을 지휘하고 다수의 전술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

원자 과학 책임자이고리 쿠르차토프1903–1960

전쟁 중 시작된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과학 책임자였다.

파르티잔운동 중앙참모부 부장라브렌티 차나바1900–1955

벨로루시 국가보안 수장으로 서부전선 특별부를 관장했고 1942년부터 파르티잔운동 중앙참모부 부장을 지냈다.

전시 외교관막심 리트비노프1876–1951

전시 주미 대사로 연합국 협력의 통로를 열었다.

강제이주 열차를 조직한 수송총국장솔로몬 밀시테인1899–1955

전쟁 중 NKVD 수송 부문을 운영하며 1943년과 1944년 카라차이인과 칼미크인, 체첸인, 잉구시인의 강제이주 열차를 편성하고 움직였다. 그 공로로 받은 수보로프 훈장 2급은 민간인을 강제이주시킨 대가로 주어진 전공 훈장이었고, 소비에트 국가 자신이 1962년 이를 취소했다.

군 정치총국장레프 메흘리스1889–1953

붉은 군대의 정치총국을 이끈 스탈린의 대리인이었다.

스메르시 부국장파벨 메시크1910–1953

전쟁기에 NKVD 경제국을 운영한 뒤 스메르시 방첩의 부국장을 지냈고, 1945년부터는 원폭 계획의 보안과 방첩을 맡았다.

국가보안인민위원브세볼로드 메르쿨로프1895–1953

1941년 2월과 1943년 4월 두 차례 국가보안인민위원이 되어 1946년까지 전시 정보와 방첩을 이끌었다. 1944년 3월 카라차이인과 칼미크인, 체첸인, 잉구시인 강제이주의 공로로 쿠투조프 훈장 1급을 받았고, 소비에트 국가 자신이 1962년 이를 취소했다.

전연방노조중앙평의회 서기·간호사 양성·아동 소개·영국 파견클라브디야 니콜라예바1893–1944

전연방노조중앙평의회 서기로서 간호사와 위생대원 양성, 아동 후방 소개, 군부대 후원을 총괄했고 붉은군대 총정치국 비상근 강사로 활동했다. 1942년 노조 대표단과 함께 영국에 파견되었으며, 귀환 중 무르만스크로 향하는 호송선단이 독일 공군의 공습을 받자 부상자 응급처치에 앞장섰다.

소대·중대장으로 북서전선·발트 해방 작전 참전아나톨리 체르냐예프1921–2017

전시 선전 책임자·모스크바 당 서기로 전쟁 지도알렉산드르 셰르바코프1901–1945

정치국원·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전시 농업·운송 담당안드레이 안드레예프1895–1971

샤라시카에서 Tu-2 폭격기 설계안드레이 투폴레프1888–1972

리투아니아 공산당 제1서기로 공화국 전시 동원 주도안타나스 스니에치쿠스1903–1974

부인민위원·산업건설총국장으로 전시 공장 이전·건설 지휘아브라아미 자베냐긴1901–1956

석유산업 인민위원으로 코카서스 유전 방어·이전 및 전시 에너지 공급니콜라이 바이바코프1911–2008

농업인민위원·장관으로 전시 식량 생산과 공급 총괄이반 베네딕토프1902–1983

폴란드 공산당 지도자로 소련 주둔 폴란드군 조직 참여볼레스와프 비에루트1892–1956

붉은군대에서 복무, 정치장교로 활동보니파티 케드로프1903–1985

군용기 전기·무선 장비 설계에 참여보리스 체르토크1912–2011

정치장교로 제18군 등에서 복무, 소장으로 종전레오니트 브레즈네프1906–1982

국방위원회·군사평의회 활동으로 전시 군사정치 업무니콜라이 불가닌1895–1975

국경경비대 정치지도원으로 전선 복무콘스탄틴 체르넨코1911–1985

주독 대사로 1941년 6월 독일의 선전포고 수신블라디미르 데카노조프1898–1953

코민테른 서기장으로 반파시스트 선전·저항운동 지도게오르기 디미트로프1882–1949

카자흐스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후방 군수 지원딘무하메드 쿠나예프1912–1993

포병소위로 제1·2벨로루시 전선에서 베를린까지 진격에발트 일리옌코프1924–1979

이젭스크 시당 제2서기로 군수생산 지휘프롤 코즐로프1908–1965

중앙위 선전국장으로 전시 이념·선전전 지휘게오르기 알렉산드로프1908–1961

근위박격포 정찰대장으로 전투 참여게오르기 아르바토프1923–2010

포대정찰반장으로 쾨니히스베르크·세바스토폴·민스크 해방전 참전게오르기 샤흐나자로프1924–2001

군·전선 사령관으로 카프카스·우크라이나 작전 지휘안드레이 그레치코1903–1976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로 공화국 전시 동원 주도그리고리 아루티노프1900–1957

통신병으로 레닌그라드·발트 전선에서 복무, 부상그리고리 로마노프1923–2008

주미 대사로 전시 동맹외교·유엔 창설 참여안드레이 그로미코1909–1989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국가원수)으로 전시 국가 대표미하일 칼리닌1875–1946

수학자로 전시 항공기 플러터 문제 해결 등 군사 연구므스티슬라프 켈디시1911–1978

소련 제88독립소총여단에서 복무, 극동 전선 대일전 준비김일성1912–1994

전선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남부·제1우크라이나 전선 정치업무알렉세이 키리첸코1908–1975

국방위원회 전권대표로 항공공장 감독, 전투기 생산 관리안드레이 키릴렌코1906–1990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지도자로 소련 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조직클레멘트 고트발트1896–1953

스웨덴 주재 대사로 핀란드와의 평화 협상 추진알렉산드라 콜론타이1872–1952

샤라시카에서 로켓 보조이륙 장치 개발, 항공 작전 지원세르게이 코롤료프1907–1966

국방위원회 부의장·러시아공화국 총리로 레닌그라드 보급선 '생명의 길' 운영알렉세이 코시긴1904–1980

에너지 학자로 전시 전력 공급 계획 수립글렙 크르지자놉스키1872–1959

군사공학기술대학 수학 주임으로 군수 최적화 연구레오니트 칸토로비치1912–1986

항공공장 당비서로 전투기 생산 조직예고르 리가초프1920–2021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의장으로 국제 선전·자금 모금 활동솔로몬 로조프스키1878–1952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항공기 생산 총괄게오르기 말렌코프1902–1988

우크라이나 공산당 간부·전선 정치업무 담당드미트리 마누일스키1883–1959

T-34 전차 수석설계자, 전쟁 초기 투입된 주력전차 개발미하일 코시킨1898–1940

화학공업 인민위원으로 전시 화약·화학제품 생산 주관미하일 페르부힌1904–1978

전투기 설계국에서 군용기 개발 참여미하일 얀겔1911–1971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로 바쿠 유전 전시 운영 총괄미르 자파르 바기로프1895–1956

공병장교로 카렐리야·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복무, 부상니콜라이 오가르코프1917–1994

붉은군대에서 정치·무선정찰 업무 수행누리트딘 무히트디노프1917–2008

3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베를린 전투 지휘파벨 리발코1894–1948

항공공장 당비서로 군용기 생산 지휘페트로 셸레스트1908–1996

식품공업 부인민위원으로 전시 식량 가공·보급 담당니콜라이 포드고르니1903–1983

비철금속공업 인민위원으로 전시 알루미늄·마그네슘 생산 책임표트르 로마코1904–1990

파르티잔 분견대장·여단 정치위원으로 벨라루스 적후투쟁 지휘표트르 마셰로프1918–1980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으로 소련 내 체코슬로바키아 부대 조직루돌프 슬란스키1901–1952

고스플란 간부로 전시 계획경제 운영 참여막심 사부로프1900–1977

군수공장 노동자로 전시 무기 생산 참여안드레이 사하로프1921–1989

남서방면군 총사령관으로 초기 전쟁 지휘세묜 부됸니1883–1973

Il-2 스투르모빅 설계, 주요 근접항공지원기 개발세르게이 일류신1894–1977

소위로 모스크바 전투·볼호프 전선에서 참전, 중상샤라프 라시도프1917–1983

정치장교로 복무, 소장 진급드미트리 셰필로프1905–1995

알루미늄 공장장으로 항공기 소재 생산예핌 슬라프스키1898–1991

기갑·기계화 부대 지휘관으로 전차전 수행세르게이 소콜로프1911–2012

고스플란 경제학자로 전시 경제총동원 계획 수립스타니슬라프 스트루밀린1877–1974

스타브로폴 지방당 제1서기로 북캅카스 유격대 지도미하일 수슬로프1902–1982

전설적 파르티잔 사령관,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종단하는 대규모 기습 수행시디르 콥파크1887–1967

철금속 인민위원으로 전차·무기 생산용 철강 공급 책임이반 테보샨1902–1958

군수공장장으로 전시 생산 지휘니콜라이 티호노프1905–1997

농학자로 전시 증산 방법 보급, 식량 생산에 기여트로핌 리센코1898–1976

로켓연구소·샤라시카에서 항공기용 보조로켓 개발발렌틴 글루시코1908–1989

탄약인민위원으로 전시 탄약 대량생산 체계 구축·지휘보리스 반니코프1897–1962

로켓전투기 BI-1 무장 설계 등 항공기 개발 참여바실리 미신1917–2001

통계학자·고스플란 위원으로 전시 경제 통계·계획 참여바실리 넴치노프1894–1964

소련군 복무, 전선 후방 지원 임무 수행빅토르 그리신1914–1992

항공기 공장 제도공·설계사로 Pe-2 폭격기 생산 참여빅토르 마케예프1924–1985

카튜샤 다연장로켓포 발사대 설계블라디미르 바르민1909–1993

순항미사일·펄스제트 엔진 개발, 초기 무인기 설계블라디미르 첼로메이1914–1984

화학방호군 장교로 전선 복무블라디미르 셰르비츠키1918–1990

외무 부인민위원으로 전시 외교·선전 활동, 나치 범죄 규탄안드레이 비신스키1883–1954

자유독일민족위원회 참여, 독일군 상대 선전·병사 이탈 공작발터 울브리히트1893–1973

자유독일민족위원회 활동, 독일군 포로 정치교육빌헬름 피크1876–1960

의용군으로 모스크바 전투부터 동프로이센까지 참전, 소령 종전야코프 크론로트1912–1984

물리학자로 화약·폭발물 연구 및 초기 핵무기 이론 작업야코프 젤도비치1914–1987

전선 복무 중 중상, 해병대 자원입대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1923–2005

어린 장교로 독소전 전선에서 전투드미트리 야조프1924–2020

물리학자로 폭발물·핵분열 연구, 원자폭탄 프로젝트 참여율리 하리톤1904–1996

재무인민위원으로 전쟁 재정·국채·화폐개혁 담당아르세니 즈베레프1900–1969

과학아카데미 해군과학기술위원회 위원, 카잔 피난 중 회고록 집필알렉세이 크릴로프1863–1945

1941년 카잔으로 피난하여 소련 과학아카데미 해군과학기술위원회 상임 전문가로 활동했고, 피난 중 『나의 회상록』을 집필했다. 1941년 나침반·자이로콤파스 이론으로 스탈린상 1급을, 1943년 조선과학 평생 공로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키세가치 신경외과 후송병원(제3120호) 원장알렉산드르 루리야1902–1977

1941년 8월부터 첼랴빈스크주 키세가치 요양소에 설치된 400~500병상 규모의 신경외과 후송병원을 이끌며 뇌 손상 병사들의 진단·치료·재활 체계를 구축했다. 두부 외상 후유증 연구와 노동요법 기반 재활로 신경심리학 임상 방법론의 토대를 닦았고, 이 공로로 노동적기훈장을 받았다.

전시 작곡가 · 『전쟁과 평화』, 제5교향곡, 『이반 뇌제』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1891–1953

대피 생활 속에서도 오페라 『전쟁과 평화』(1942), 제5교향곡(1944), 피아노 소나타 제7·8·9번, 영화 『이반 뇌제』 음악을 작곡했으며, 제5교향곡은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과 연결된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카자흐 SSR 국가방위위원회 전권위원주마바이 샤야흐메토프1902–1966

카자흐 SSR의 국가방위위원회 전권위원으로서 서부 지역에서 철수한 50만 명 이상의 피난민과 수백 개 공장의 공화국 내 배치를 총괄했고, 전선을 위한 군수 생산과 군사 훈련을 조직했다.

제201라트비아소총병사단 포병대대 정치위원아우구스트 보스1916–1994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복무했으며, 두 차례 부상과 포탄 충격을 입고 1943년 1월 스타라야 루사 근처에서 중상을 입어 그해 7월 전역 판정을 받았다. 그가 복무한 사단은 1942년 10월 근위대 칭호를 받아 제43근위라트비아소총병사단으로 개칭되었다.

『카자흐 SSR사』 편찬 지도자안나 판크라토바1897–1957

1941년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와 함께 알마아타로 소개되어, 모스크바·레닌그라드·알마아타의 역사학자들을 이끌고 소련 최초의 공화국 통사 『카자흐 SSR사』(1943년 초판, 1949년 증보판)를 집필했다. '1941-1945년 대조국전쟁의 용감한 노동을 위하여' 메달을 받았다.

여성항공연대 창설자 겸 587폭격연대장마리나 라스코바1912–1943

1941년 10월 스탈린에게 직접 여성 전투비행부대 편성을 설득해 NKO 명령 제0099호로 3개 여성항공연대(586전투·587폭격·588야간폭격)를 창설했다. 587폭격연대를 직접 지휘하여 Pe-2 폭격기로 전환 훈련시켰고, 1943년 1월 연대를 스탈린그라드 전선으로 인도하던 중 악천후로 추락사했다.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 청년 동원 총괄니콜라이 미하일로프1906–1982

전 기간 콤소몰 제1서기로 재임하며 수백만 청년을 전선과 군수 공장으로 동원했다. 전후 『Meeting the Challenge: Soviet Youth in the Great Patriotic War』를 저술해 콤소몰의 전쟁 수행을 공식 기록했다.

항공공업 제1부인민위원 · 전투기 대량생산 총괄표트르 데멘티예프1907–1977

전 기간 항공공업 제1부인민위원으로서 118개 항공·관련 기업의 동부 대피와 전시 생산 체제로의 전환을 지휘했으며, Yak·MiG·Il-2·La-5 등 신형 전투기의 연속 생산을 조직해 루프트바페를 생산력으로 압도하는 데 기여했다. 1941년 9월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석탄공업인민위원부 콤비나트 장·부인민위원알렉산드르 자샤트코1910–1963

전쟁 기간 내내 몰로토프우골·툴라우골·스탈린우골 콤비나트를 이끌며 돈바스 탄광 인원과 장비의 동방 대피를 지휘했고, 해방된 탄광의 복구와 함께 전선 및 군수공장에 석탄을 공급했다. 1943년 10월 붉은군대의 석탄 공급 공로로 레닌 훈장을 받았다.

GKO 보급 보좌관미하일 스미르튜코프1909–2004

인민위원회의 사무국 부국장으로서 GKO 보급 전권위원 미코얀의 보좌관을 겸임하며 붉은 군대의 군수 물자 공급 실무를 담당했다.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스테판 아코포프1899–1958

1941년 9월부터 전 기간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으로서 KV·IS 중전차와 SU 자주포의 동력계통 생산을 총괄했고, 전시 공로로 노동적기훈장(1942), 적성훈장(1943), 레닌 훈장(1944), 쿠투조프 1급 훈장(1945)을 받았다.

전기공업인민위원이반 카바노프1898–1972

전기공업인민위원으로서 발전설비의 동방 대피와 새로운 전력 시설 건설을 지휘했다. 1943년부터 국방위원회 산하 레이더위원회 위원을 겸했다.

전선군 참모장 · 사단장세르게이 비류조프1904–1964

제132소총사단장으로 개전 첫해 다섯 차례 부상을 입었고, 이후 톨부힌 휘하에서 남부전선·제4우크라이나전선군·제3우크라이나전선군 참모장으로 돈바스·크림·야시-키시네프·베오그라드 공세 작전을 기획해 우크라이나·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해방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MiG-3 전투기 공동 설계자미하일 구레비치1893–1976

미코얀과 공동 설계한 MiG-3는 대조국전쟁 초기 소련 공군의 주력 전투기였다. 1941년 이 기체의 설계로 1급 스탈린상을 받았다.

제629소총연대장 · 소비에트연방영웅알렉세이 코르투노프1907–1973

1944년 7월 29일 밤 비스와 강을 선발대로 도하해 루치미아를 점령하고 11차례의 반격을 격퇴했다. 이 공로로 1945년 3월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SMERSH 방첩국장 (남서부전선 → 제3우크라이나전선)표트르 이바슈틴1909–2002

남서부전선과 제3우크라이나전선의 SMERSH 방첩국장으로 야시-키시뇨프, 부다페스트, 빈 작전에 참여했으며 루마니아의 추축국 이탈 협상을 수행했다. 전쟁을 오스트리아에서 마감했다.

La-5·La-7 전투기 설계자세묜 라보치킨1900–1960

OKB-21 수석설계사로서 La-5와 La-7을 개발했다. 1941~1945년 그의 전투기 22,000대 이상이 생산되어 소련 전시 전투기 총생산의 37%를 차지했으며, 동부전선 제공권 장악의 핵심 전력이 되었다. 이반 코제두프는 라보치킨 전투기로 62대의 적기를 격추했다.

개전 전 GRU 총국장 · 전선군 사령관필리프 골리코프1900–1980

1940-41년 GRU 정보총국장으로서 독일 침공 경고를 평가했고, 10군 사령관으로 모스크바 반격에 참가했으며 브랸스크·보로네시 전선군을 지휘했다. 1943년 1월 오스트로고시스크-로소시 및 보로네시-카스토르나야 공세로 적 25개 사단을 격멸하고 하리코프를 해방했으나, 3월 독일군의 반격으로 하리코프를 상실하고 전선 지휘에서 물러났다.

레닌그라드 전선 군수 수송 및 대피 총괄보리스 베셰프1903–1981

교통인민위원부 특별전권대표로서 1941년 봉쇄 직전 두 달간 레닌그라드에서 철도로 74만 명의 시민과 90여 개 공장 설비를 대피시켰다. 이후 쿠이비셰프 철도국장으로 중앙-우랄 간 전략 수송을 지휘했으며, 1945년 베를린 공세 준비 당시 20일간 4만 량의 군수 화차를 전선에 투입하는 수송 작전을 조직했다.

제57군 정치부장게오르기 치뇨프1907–1996

1941년 824포병연대 군정위원으로 참전해 칼리닌 전선 정치국 부국장, 제4충격군 정치부장을 거쳐 1943년 5월부터 종전까지 제57군 정치부장으로 모스크바 방어전, 드네프르 전투, 우안 우크라이나·몰다비아·루마니아·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헝가리·오스트리아 해방 작전에 참여했다.

장거리항공대(ADD) 사령관 · 스타프카 직속 전략폭격 지휘알렉산드르 골로바노프1904–1975

스탈린 직속의 장거리항공대(ADD)를 지휘하며 베를린·쾨니히스베르크·플로이에슈티 전략폭격을 주도했고, 항공대를 350대에서 2,000기 이상으로 확장해 스타프카의 독자적 타격군으로 키웠다. 1943년 붉은 군대 최연소 원수로 진급했다.

제62군 참모장·제5군 사령관니콜라이 크릴로프1903–1972

오데사·세바스토폴 방어전에서 연해군 참모장으로 시작해,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추이코프 휘하 제62군 참모장으로 시가전을 지휘했다. 이후 제5군 사령관으로 바그라티온 작전과 동프로이센 공세, 만주 작전을 이끌어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안드레이 예료멘코1892–1970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남동전선(후에 스탈린그라드 전선)을 지휘했고, 천왕성 작전에서 남쪽 포위망을 닫아 파울루스의 제6군을 가두었다. 전쟁 동안 여덟 개 전선군을 지휘했으며, 제4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으로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해방을 완수했다.

제4항공군 사령관콘스탄틴 베르시닌1900–1973

쿠반 공중전에서 전선 항공대를 결정적 축선에 집중시키는 혁신적 운용으로 제공권을 장악했고, 벨라루스 공세에서의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 공군 총사령관으로서 제트기 전환을 진두지휘했다.

코브로프 데그탸료프 공장 군수 생산 조직자파벨 피노게노프1919–2004

1941년 7월 22세의 나이로 코브로프 제2공장(데그탸료프 공장)에 배치되어 곧바로 ShVAK 항공기관포 생산에 투입되었고, 전 기간 동안 기관총·대전차소총·항공기관포 공장장으로 군수 생산을 지휘했다. 1944년 적성훈장을 수훈했고 1943년 당에 입당했다.

극동전선·태평양함대 군사평의회 위원니콜라이 페고프1905–1991

프리모르스키 주당 제1서기로 전시 내내 극동전선 및 태평양함대 군사평의회 위원을 겸하며 대일 방어 태세와 군수 생산을 총괄했다. 1941년 10월 스탈린이 소집한 회의에서 유마셰프·아파나센코와 함께 극동 방어 계획을 보고했고, 파르티잔 기지 구축과 전차·항공기·장갑열차 건조를 주도했다.

발트 함대 사령관블라디미르 트리부츠1900–1977

전 기간 발트 함대를 지휘하며 탈린 철수, 한코 피난, 레닌그라드 봉쇄 방어 및 돌파, 발트 해역 해방 작전을 지휘했다. 개전 직전 함대에 전투태세 1호를 발령해 기습 피해를 최소화했다.

항공공업 부인민위원 겸 Yak 계열 전투기 수석설계자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항공기 설계자)1906–1989

Yak-1·Yak-7·Yak-9·Yak-3 전투기로 소련 전투기 전력의 3분의 2를 공급했으며, 항공공업 부인민위원으로 공장 동방 대피와 양산 체제 재구축을 지휘했다. 전쟁 기간 Yak 계열 전투기 4만여 대가 생산되어 붉은 군대 항공 전력의 중추가 되었다.

모스크바 방어선 구축 책임자미하일 야스노프1906–1991

모스크바 전투 당시 모자이스크 방어선 건설 작전반과 모스크바 방어시설 건설국을 이끌며 수도를 직접 방어하는 요새선을 구축했다.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소장 겸 국립광학연구소(GOI) 과학 지도자세르게이 바빌로프1891–1951

FIAN을 카잔으로, GOI를 요시카르올라로 소개시킨 후 방위 연구로 전환했다. 야광 도료, 음향 기뢰 제거 장비, 파손 장비 금속의 현장 분광 분석기(스타일로스코프)를 개발했고, 1943년 적외선 기술 GKO 전권위원으로 임명되었다.

툴라 주 NKVD 국장 겸 시 방위위원회 위원블라디미르 수호돌스키1907–1966

1941년 가을 구데리안의 기갑군이 툴라에 접근했을 때, 노동자 대대와 파르티잔 부대를 조직하고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후방에서 압베어 첩보망을 무력화했다. 툴라 시 방위위원회 3인 중 한 명으로서 45일간의 시 방어전을 지휘했다.

석탄공업인민위원바실리 바흐루셰프1902–1947

전쟁 발발 후 돈바스의 채탄 설비를 동부로 대피시키고 쿠즈바스·카라간다에 새 탄전을 열어 전시 연료 공급을 책임졌으며, 1943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차장으로 참전, 브랸스크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병원에서 AK-47 구상을 시작하다미하일 칼라시니코프1919–2013

1941년 10월 브랸스크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후송된 병원에서 동료 병사들이 소련 소총의 신뢰성 문제를 한탄하는 것을 들은 것이 자동화기 설계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서부전선 통신부장, 극동 소련군 총사령부 통신국장니콜라이 프수르체프1900–1980

1941년 7월 3일 서부전선 통신부장으로 임명되어 스몰렌스크 서쪽 그네즈도보 지휘소에서 티모셴코에게 보고하고 임무를 개시했다. 모스크바 방어전 기간 동안 사령부 통신망을 유지했으며, 1945년 대일전에서는 극동 소련군 총사령부 통신을 지휘했다. 전쟁 공로로 수보로프 2급 훈장, 쿠투조프 1·2급 훈장, 네 차례 적기훈장을 받았고 1945년 9월 2일 스탈린의 종전 명령에서 통신부대가 특별히 지목되었다.

성형작약·누적효과 이론 연구자미하일 라브렌티예프1900–1980

전쟁 기간 성형작약탄의 누적효과 이론을 연구해 대전차 무기 개발에 기여했으며, 총기 소음기 개발에도 참여했다. 1944년 조국전쟁훈장 2급을 받았다.

충칭 주재 정보총책 · 바르바로사 작전 계획 입수알렉산드르 파뉴시킨1905–1974

1939년부터 1944년까지 충칭 주재 소련 대사 겸 정보총책으로서 최대 12개 정보거점을 지휘했다. 1941년 5월 독일 무관으로부터 입수한 독일 최고사령부의 바르바로사 작전 계획을 모스크바로 타전했으며, 이는 전쟁 임박을 알리는 가장 완전한 정보 중 하나로 평가된다. 또한 일본의 대소 공격 가능성을 감시하는 임무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야전병원 선임 외과의, 경동맥·대동맥 직접 수혈법 개발보리스 페트롭스키1908–2004

핀란드 전선과 대조국전쟁 기간 야전병원 선임 외과의로 복무하며 경동맥과 흉부대동맥에 직접 혈액을 주입하는 수혈법을 개발해 대량 출혈 환자를 구했다. 적성훈장(1942)과 조국전쟁훈장 2급(1943)을 받았다.

Su-2 경폭격기 · Su-6 공격기 설계자파벨 수호이1895–1975

그의 Su-2는 개전 당시 13개 연대에 배치되어 국경 방어전, 키예프·모스크바 방어,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 전투에서 운용되었다. 1943년 Su-6 공격기로 스탈린상 1급을 받아 상금 전액을 국방기금에 기부했다.

전투기·경폭격기 설계자니콜라이 폴리카르포프1892–1944

I-16·I-15·I-153 전투기는 개전 시 소련 전투기 전력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Po-2(U-2)는 야간 폭격기로 전 전선에서 운용되었다. 전쟁 중 스탈린상 2회(1941·1943)를 수상했으며, I-185 개발을 지속하다 1944년 사망했다.

조선공업 인민위원 겸 탱크공업 제1부인민위원이반 노센코1902–1956

전 기간 조선공업 인민위원으로 잠수함·전투정 생산을 지휘하는 동시에, 1941~42년 탱크공업 제1부인민위원을 겸임해 고리키의 크라스노예 소르모보 조선소에서 T-34 탱크 12,000대 생산을 감독했다.

연합군 최고 득점 전투기 에이스이반 코제두프1920–1991

330회 출격, 120회 공중전에서 64대를 격추했으며 단 한 번도 피격되지 않았다. 1945년 2월 소련 조종사 최초로 Me-262 제트전투기를 격추했고, 세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소련 검찰총장 · 전범 재판 조직자콘스탄틴 고르셰닌1907–1978

1943년 소련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전시 사법을 총괄했고, 정치국 비밀위원회 위원으로서 소련 전역의 사형 선고를 승인했다. 블라소프·크라스노프 재판과 뉘른베르크·도쿄 전범 재판의 소련 측 기소 준비를 주도했다.

215항공대대 조종사·편대장 · 유격대 중앙본부 임무 수행보리스 부가예프1923–2007

215항공대대에서 Po-2 등으로 수백 회 적 후방으로 침투하여 유격대 중앙본부의 병력·물자 수송과 정보 임무를 수행했으며, 공로로 1945년 8월 적성훈장을 받았다.

65군 사령관 ·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파벨 바토프1897–1985

65군을 이끌고 스탈린그라드 포위·소탕, 드네프르 도하(첫 영웅 칭호), 바그라티온 작전(이중 화력 제대 전술로 보브루이스크 돌파), 비스와-오데르 및 베를린 작전까지 전 기간을 지휘했다. 전쟁 중 65군의 전과는 최고사령관 명령으로 23회나 특기되었다.

포병총국(GAU)장니콜라이 야코블레프1898–1972

전 기간 GAU를 이끌며 적군의 포병 보급·개발·편제를 총괄했고, 140회 스탈린에게 호출되어 전쟁 물자 문제를 직접 보고했다.

제2근위기병군단장블라디미르 크류코프1897–1959

비스와-오데르 작전과 동포메라니아 작전에서 제2근위기병군단을 이끌었고, 1945년 4월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건설인민위원세묜 긴즈부르크1897–1993

전 기간 Наркомстрой를 이끌며 시베리아 방위 공장, 체바르쿨 제강공장의 75일 건설, 라도가 호수 30km 송유관 부설을 직접 지휘했다.

866연대 전투비행대장알렉산드르 콜두노프1923–1992

최고의 Yak 에이스(412회 출격·46기 격추, 두 차례 영웅). 1944년 니시 상공에서 미군 P-38과의 유일한 미소 교전을 종결시켰다.

무장인민부위원블라디미르 노비코프1907–2000

무장인민부위원으로 전 기간 소화기·포병 무기 생산을 조직했고, 1942년 34세의 나이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선군 사령관막심 푸르카예프1894–1953

칼리닌 전선군 사령관으로 르제프·벨리키예루키 작전을 지휘했고, 제2극동전선군 사령관으로 만주 쑹화강 공세를 이끌었다.

조종사알렉산드르 예피모프1923–2012

군인알렉산드르 포크리시킨1913–1985

병사알렉산드르 프로호로프1916–2002

노동자알렉산드르 세라피모비치1863–1949

병사안드레이 시냡스키1925–1997

당 간부아르비트 펠셰1899–1983

철도 기술자보리스 셰르비나1919–1990

과학자이사크 키코인1908–1984

음악감독티혼 흐레니코프1913–2007

적군 복무알렉산드르 고르바토프1891–1973

해군 장교아르세니 골롭코1906–1962

적군 복무표트르 데미체프1917–2010

군사 수의학 아카데미 생도이반 보듈1918–2013

해군 장교이반 파파닌1894–1986

해군 장교이반 유마셰프1895–1972

육군 장교쿠즈마 데레뱐코1904–1954

육군 장교쿠즈마 갈리츠키1897–1973

참모마트베이 자하로프1898–1972

적군 복무미하일 밀1909–1970

라이히슈타크 깃발 게양자미하일 예고로프1907–2000

지원병미하일 자이체프1923–2009

적군 복무무함메트나자르 가푸로프1922–1999

병사니콜라이 바소프1922–2001

참전 군인니콜라이 이노젬체프1921–1982

조종사니콜라이 카마닌1908–1982

전차 부대 장교파벨 로트미스트로프1901–1982

징집병블라디미르 세미차스트니1924–2001

정치지도원세묜 쿠르콧킨1917–1990

수사관레프 시바르츠만1907–1955

노동자투르다쿤 우수발리예프1919–2015

스탈린의 통역사발렌틴 베레시코프1916–1998

소형화기 설계자바실리 데그탸료프1880–1949

군인바실리 카자코프1916–1981

군인블라디미르 돌기흐1924–2020

군인블라디미르 고보로프1924–2006

노동자블라디미르 코마로프1869–1945

군인유리 즈다노프1919–2006

전차군 중장 · 베를린 진군알렉세이 판필로프1898–1966

붉은 군대 복무 (소령)알렉세이 시티코프1912–1993

여러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알렉세이 젤토프1904–1991

제5공병군 사령관알렉산드르 코마롭스키1906–1973

전차소대장 · 북캅카스 전선 참전알렉산드르 랴시코1915–2002

소대장·포대장,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전알렉산드르 시도렌코1917–1982

여러 전선 군무역국장알렉산드르 스트루예프1906–1991

통신소대장·중대장·연대통신주임알렉산드르 수하레프1923–2021

적군가무단 복무알렉세이 아주베이1924–1993

참모총국 작전장교, 여러 전선에서 종군아나톨리 그리브코프1919–2008

전차여단장 · 제2전차군 사령관안드레이 크랍첸코1899–1963

무선기술병, 베를린 입성보리스 스투칼린1923–2004

공병 중장, 마우트하우젠에서 순교드미트리 카르비셰프1880–1945

서부전선 사령관드미트리 파블로프1897–1941

붉은 군대 복무, 서부·발트 전선, 두 차례 부상필리프 봅코프1925–2019

흑해함대 사령관필리프 옥탸브리스키1899–1969

공병 복무, 적성훈장·용기메달 수훈필리프 예르마시1923–2002

총참모부 정보국장 · 여러 전선 군사평의회 위원표도르 쿠즈네초프1904–1979

정치장교, 레닌그라드 방어전 참가표도르 모르틴1918–1990

돌격항공사단장·돌격항공군단장게오르기 바이두코프1907–1994

예비전선 군사평의회 위원게오르기 포포프1906–1968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 · 서부전선군 부사령관게오르기 자하로프1897–1957

NKVD 특별부 작전장교,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전그리고리 그리고렌코1918–2007

독립무선대대 복무, 모스크바 방공군그리고리 키순코1918–1998

극동전선 사령관 · 하산·할힌골 전투 지휘그리고리 시테른1900–1941

여러 전선 군사평의회 위원이오시프 시킨1906–1973

전차공업 인민위원이사크 잘츠만1905–1988

기병사단장 · 기계화기병집단 사령관이사 플리예프1903–1979

정보총국(GRU) 국장이반 일리초프1905–1983

서부전선 · 제3벨로루시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이반 호흘로프1895–1973

군사수송국장 · 중앙군사수송국장이반 코발료프1901–1993

328소총사단장, 코카서스에서 베를린까지이반 파블롭스키1909–1999

오데사·세바스토폴 방어 지휘이반 페트로프1896–1958

소대장·중대장·대대장, 독소전 참전이반 트레티야크1923–2007

남부전선 사령관이반 튤레네프1892–1978

NKVD 특별부서 · SMERSH 작전요원이반 우스티노프1920–2020

소대장→대대장, 6개 전투훈장, 3차례 부상이반 야코블레프1918–2002

제66군 군사위원, 스탈린그라드 전투레오니트 멜니코프1906–1981

북부전선·레닌그라드 전선·제61군 사령관마르키안 포포프1902–1969

대조국전쟁 참전, 중상미하일 게오르가제1912–1982

제3항공군·제1항공군 사령관미하일 그로모프1899–1985

제1근위전차군 사령관미하일 카투코프1900–1976

레닌그라드 전선 사령관미하일 호진1896–1979

제16군·여러 전선군 참모장미하일 말리닌1899–1960

항공정비사, 전투항공연대 복무미하일 레셰트뇨프1924–1996

벨라루스 파르티잔 활동 지도미하일 지먀닌1914–1995

304소총사단장 · 13군 사령관니콜라이 푸호프1895–1958

NKVD 특별부서장 · 스메르시 부국장니콜라이 셀리바놉스키1901–1997

소련 공군 총사령관파벨 지가레프1900–1963

제10근위군 부참모장 · 제8소총사단 참모장페트로 그리고렌코1907–1987

NKVD·NKGB 제2국(방첩) 국장표트르 페도토프1900–1963

소대장·중대장, 볼호프·레닌그라드 전선표트르 루셰프1923–1997

통신연구소 기술자, 전선 파견표트르 플레샤코프1922–1987

제2근위전차군 사령관, 베를린 첫 진입세묜 보그다노프1894–1960

남서부·남부 전선 NKVD·SMERSH 복무세묜 츠비군1917–1982

해군보병 장교, 레닌그라드 방어전 참전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1923–1991

붉은 군대 병사, 부상으로 제대세르게이 마냐킨1923–2010

제16공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세르게이 루덴코1904–1990

정찰 장교, 모스크바 방어전·카렐리야 전선바딤 마트로소프1917–1999

스탈린그라드·베를린 작전 참전발렌틴 바렌니코프1923–2009

레닌그라드 전선·여러 야전군 군사평의회 위원바실 므자바나제1902–1988

소련-일본 전쟁 참전바실리 아르히포프1926–1998

제49근위소총사단장, 드네프르 도하바실리 마르겔로프1908–1990

소위에서 소령까지, 오데사·세바스토폴·캅카스 전역 참전바실리 페트로프1917–2014

전투항공연대장, 전투 출격 수행바실리 스탈린1921–1962

붉은군대 복무, 카렐리야 전선 참전바실리 톨스티코프1917–2003

전차여단 참모장, 모스크바~베를린 전역 참전빅토르 쿨리코프1921–2013

발트함대 잠수함교육대대 참모장, 레닌그라드 방어전 참가블라디미르 카사토노프1910–1989

제4충격군·제1발트전선군 참모장블라디미르 쿠라소프1897–1973

중앙 파르티잔운동 사령부 정치국장블라디미르 말린1906–1982

316근위박격포연대 복무, 민스크·바르샤바·베를린 전투블라디미르 피로시코프1924–2009

전차여단 지휘 · 4근위기계화군단 작전과장블라디미르 톨룹코1914–1989

주자동차장갑전차총국장 · 국방 인민위원야코프 페도렌코1896–1947

붉은 군대 복무, 제1벨로루시 전선군에서 베를린 입성유리 드로즈도프1925–2017

기관총 소대장·중대장, 남서전선·3·4우크라이나전선유리 막시모프1924–2002

전차대대 참모장·대대장, 베를린까지 진격예브게니 이바놉스키1918–1991

우랄 제183전차공장장유리 막사료프1903–1982

니즈니타길 우랄 제183전차공장장으로 약 3만 5천 대의 T-34를 생산해 소련 전차 전력의 중추를 형성했으며, 1943년 사회주의 노동 영웅 칭호를 받았다.

라디오 코시치우슈코 책임자소피야 제르진스카야1882–1968

라디오 코시치우슈코의 폴란드어 방송 책임자로, 점령된 폴란드를 향해 공산주의 메시지를 송출했다.

첩보원·파르티잔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첩보원)1911–1944

나치 점령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 중위로 위장해 활동하며 쿠르스크 전차 공세 정보를 입수하고 고위 관리들을 제거한 전설적 첩보원.

군비인민위원드미트리 우스티노프1908–1984

군비인민위원으로 전쟁 기간 내내 포병·소화기·탄약의 대량생산 체계를 지휘했다. 1942년의 생산 역전에서 군비 부문은 결정적 몫을 차지했다.

제1발트전선군 사령관이반 바그라먄1897–1982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제1발트전선군을 지휘해 비테프스크 북쪽의 독일 전선을 돌파하고 북부집단군을 쿠를란트에 고립시켰다.

제60군 사령관파벨 쿠로치킨1900–1989

제60군 사령관으로서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를 해방한 부대를 지휘했다.

파르티잔 사보타주 기술 설계자일리야 스타리노프1900–2000

그는 철도 전쟁, 콘체르트 작전,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파르티잔이 사용한 지뢰와 사보타주 기술을 설계했으며, 그의 훈련과 장비 덕분에 하룻밤에 1만 건의 폭파가 가능했다.

작전 실패 경고를 보낸 군단장바실리 볼스키1897–1946

천왕성 작전 직전 스탈린에게 실패를 경고하는 편지를 썼다.

목격 · 증언18

정보 장교리하르트 조르게1895–1944

도쿄에서 바르바로사 침공과 일본의 남진 방침을 보고해 시베리아 사단의 서부 전용을 가능하게 했다.

종군기자바실리 그로스만1905–1964

스탈린그라드에서 종군하며 전투를 기록했고, 「트레블린카의 지옥」으로 절멸 수용소의 실상을 처음 세계에 알렸다.

전시 논설가일리야 에렌부르크1891–1967

「크라스나야 즈베즈다」의 논설로 전선과 후방의 항전 의지를 벼린 전시의 대표적 문필가였다.

제7번 「레닌그라드」 교향곡의 작곡가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

전쟁 초기 레닌그라드에 남아 음악원 소방대원으로 복무하며 제7교향곡을 쓰기 시작했다. 1942년 8월 9일, 봉쇄된 레닌그라드에서 연주된 이 교향곡은 소련 저항의 세계적 상징이 되었다.

『바실리 죠르킨』의 시인, 전선 신문 종군기자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1910–1971

서남전선과 서부전선(후일 제3벨로루시 전선군)의 군사신문 종군기자로 복무하며 『바실리 죠르킨』(1942–1945)을 연재했다. 이 시는 전선 병사들의 사랑을 받으며 대조국전쟁의 문화적 상징이 되었고, 공로로 조국전쟁훈장 1·2급을 수훈했다.

『크라스나야 즈베즈다』 종군기자 · 「나를 기다려 주오」의 시인콘스탄틴 시모노프1915–1979

할힌골 전투부터 베를린 함락까지 종군기자로 전 전선을 누볐고, 1941년 7월 모길료프 전차전을 목격했으며 1945년 5월 독일 항복문서 조인식에 참석했다. 시 「나를 기다려 주오」(1941)는 전시 소련에서 가장 사랑받은 서정시로, 병사들의 품에 접혀 다니며 귀환을 기원하는 기도문이 되었다.

전시 논설가·스탈린 연설문 기초자알렉세이 톨스토이1883–1945

개전 첫날부터 사망 직전까지 약 60편의 애국 논설을 발표했고, 1941년 11월 7일 스탈린의 붉은광장 연설에서 '위대한 선조들' 구절을 기초했다. 1943년 스탈린상 상금 10만 루블을 전차 건조에 기부했고, 파시스트 범죄 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포위의 시인안나 아흐마토바1889–1966

레닌그라드 봉쇄를 견디며 전시의 저항을 시로 남긴 시인이었다.

종군기자·전쟁소설 《젊은 근위대》 집필알렉산드르 파데예프1901–1956

전쟁 특파원으로 전선 취재·기록안드레이 플라토노프1899–1951

종군기자로 전선 체험, 소설 《그들은 조국을 위해 싸웠다》 집필미하일 숄로호프1905–1984

역사가로 나폴레옹 전쟁 연구, 전시 애국적 글 발표예브게니 탈레1874–1955

종군기자알렉세이 수르코프1899–1983

전쟁 특파원레프 톨쿠노프1919–1989

종군기자·다큐멘터리 감독알렉산드르 도브젠코1894–1956

대령 계급으로 남서전선에서 종군하며 〈우리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를 위한 전투〉(1943)를 제작했고, 단편 〈전투의 전날 밤〉은 스탈린의 개인적 찬사를 받았다.

대조국전쟁 기억 정치의 탁월한 기록자니나 투마르킨1945–

스탈린이 전쟁 기억을 억압하고, 브레즈네프가 숭배로 격상시켰으며, 1985년 이후 그 숭배가 도전받았다고 분석한 전쟁 숭배 연구의 결정적 권위자로 인용된다.

침공 결정을 기록한 독일 육군 참모총장프란츠 할더1884–1972

1940년 7월 31일자 일기에서 히틀러가 소련을 파괴하기로 결정한 사실을 기록했으며, 이는 바르바로사 계획 일정의 핵심 사료이다.

아우슈비츠 첫 촬영 기사알렉산드르 보론초프1919–1991

1945년 1월 28일 아우슈비츠에 도착해 최초로 수용소를 촬영했고, 그 영상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증거로 쓰였다.

관련 용어

출처: David M. Glantz and Jonathan House, When Titans Clashed: How the Red Army Stopped Hitler (1995)Richard Overy, Russia's War (1997)Evan Mawdsley, Thunder in the East: The Nazi-Soviet War, 1941–1945 (2005)Mark Harrison, Accounting for War: Soviet Production, Employment, and the Defence Burden, 1940–1945 (1996)Jochen Hellbeck, Stalingrad: The City that Defeated the Third Reich (2015)Vasily Grossman, A Writer at War: Vasily Grossman with the Red Army 1941–1945, ed. Antony Beevor and Luba Vinogradova (2005)G. F. Krivosheev (ed.),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1997)자료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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