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성개혁 운동과 나치의 파괴 (1897~1935)
세계 최초의 동성애자 권리 단체와 성과학 연구소를 낳은 독일 성개혁 운동은 왜 형법 제175조와 제218조를 끝내 없애지 못했는가? 그리고 이 운동은 어떻게 1933~1935년 민족사회주의 정권 아래 그토록 빨리 무너졌는가?
1871년 형법의 제175조와 제218조에 맞서 1897년 히르슈펠트의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 1905년 슈퇴커의 모성보호동맹이 생겼다. 오일렌부르크 사건은 동성애를 정치 문제로 만들었고, 1919년 성과학 연구소와 영화 〈다른 이들과 다르게〉가 나왔다. 바이마르 시기 운동은 인권동맹 같은 대중 조직과 세계 성개혁 연맹으로 커졌고, 1929년 제국의회 형법 위원회가 제175조 단순 처벌 조항을 빼고 1931년 제218조 반대 대중 운동이 일었으며 라이히의 섹스폴이 공산당 안에 생겼다. 그러나 운동은 이론과 정당 사이에서 갈라졌고 두 조항은 끝내 살아남았다.
제정기의 출발: 형법 제175조·제218조와 첫 운동 단체
독일 성개혁 운동이 맞선 것은 1871년 북독일 연방 형법과 함께 시행되어 이듬해 제국 형법이 된 두 조항이었다. 제175조는 남성 사이의 성행위를, 제218조는 임신중절을 처벌했다. 제국법원은 제175조를 성교와 비슷한 행위로 좁게 해석했고, 제218조는 임신부와 시술자를 함께 징역으로 다스렸다. 1 2 3
제175조. 남성 사이에서, 또는 사람과 짐승 사이에서 저질러진 자연에 반하는 음행은 금고에 처한다. 시민적 명예권의 상실도 선고할 수 있다. 4
§. 175. Die widernatürliche Unzucht, welche zwischen Personen männlichen Geschlechts oder von Menschen mit Thieren begangen wird, ist mit Gefängniß zu bestrafen; auch kann auf Verlust der bürgerlichen Ehrenrechte erkannt werden. 4
제175조에 맞선 첫 조직은 1897년 5월 15일 의사 마그누스 히르슈펠트가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의 자기 집에서 출판인 막스 슈포어 등과 세운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였다. 세계 최초의 동성애자 권리 단체였던 이 위원회는 6000명의 서명을 모은 폐지 청원을 냈고, 1898년 사회민주당 의장 아우구스트 베벨이 이를 제국의회에 올렸으나 실패했다. 1903년에는 동성애자 잡지 《데어 아이게네》의 발행인 아돌프 브란트를 중심으로 아이게네 공동체가 생겼다. 5 6 7
제218조에 맞선 운동은 여성운동 안에서 자랐다. 1905년 2월 26일 헬레네 슈퇴커가 이끈 모성보호동맹이 베를린에서 다시 창립되어 미혼모와 그 아이들을 돕고 성교육과 피임을 알렸으며, 슈퇴커는 그해부터 제218조 폐지를 가장 먼저 요구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08년 독일 여성단체연맹 총회는 카밀라 옐리네크의 제218조 폐지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성보호동맹은 회원의 3분의 1이 남성이었고, 베벨과 스위스 정신과 의사 오귀스트 포렐도 회원이었다. 8 3 9
오일렌부르크 사건과 동성애 문제의 정치화 (1906~1909)
동성애를 처음 전국의 정치 문제로 만든 것은 오일렌부르크 사건이었다. 1906년 11월 언론인 막시밀리안 하르덴은 주간지 《미래》에서 황제 빌헬름 2세의 벗 필리프 추 오일렌부르크와 베를린 시 사령관 쿠노 폰 몰트케를 동성애자 「카마릴라」로 공격했다. 1907~1909년 이어진 재판에서 히르슈펠트는 감정인으로 나서 몰트케에게 동성애적 기질이 있다고 진술했다가 재심에서 철회했고, 브란트는 총리 뷜로를 동성애자로 지목했다가 징역형을 받았다. 10 11 12
사건은 동성애를 공론장에 끌어냈지만 혐오도 키웠다. 1909년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 제175조 유죄 판결이 늘었고,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의 뮌헨 지부는 1908년 해산했다. 1909년 정부의 형법 개정 초안은 제175조를 여성에게까지 넓히려 했다. 운동이 바라던 공론화는 이루어졌으나, 그것은 처벌의 강화로 돌아왔다. 10 1
오일렌부르크 사건의 여파는 군과 궁정으로 번졌다. 1907년 11월 29일 전쟁장관 카를 폰 아이넴은 제국의회에서 동성애자 장교들에게 전역을 요구했고, 1908년 11월 장교단 「정화」를 맡던 군사 내각 수장 휠젠헤젤러는 황제 앞의 사냥 모임 여흥에서 발레 치마 차림으로 춤추다 심장마비로 숨졌다. 뷜로 총리는 1909년 7월 물러났다. 하르덴과 그 변호사가 유대인이라는 반유대주의 공격도 거셌는데, 이는 뒤에 히르슈펠트를 겨눈 공격의 예고였다. 10

이론의 갈래: 성적 중간 단계론, 남성 결사론,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주류 이론은 히르슈펠트의 성적 중간 단계론이었다. 그는 모든 남녀가 남성적·여성적 특성의 고유한 혼합이며 동성애는 그 가운데 타고난 변이이므로 처벌할 수 없다고 보았고, 1899~1923년 《성적 중간 단계 연감》으로 이를 퍼뜨렸다.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는 이 생물학적 「제3의 성」 이론을 노선으로 삼았다. 13 5
브란트와 아이게네 공동체는 동성애를 여성성과 묶는 이 이론을 거부하고, 남성다운 남성 사이의 사랑을 그리스식 이상으로 내세웠다. 반더포겔의 역사가 한스 블뤼허는 1917년 『남성 사회에서 에로스의 역할』에서 국가가 동성애적 유대로 묶인 남성 결사에서 생긴다는 남성 결사론을 폈다. 그는 「여성적」 동성애를 병적이라 했고, 여성과 유대인을 남성 결사의 타자로 그렸다. 7 14 15 16
1920년대 말에는 정신분석과 마르크스주의를 잇는 흐름이 더해졌다. 빈의 정신분석가 빌헬름 라이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성 억압이 대중적 신경증과 권위주의를 낳으며 성 해방이 혁명적 사회 해방의 조건이라고 보았다. 이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는 히르슈펠트의 생물학과 달리 성의 문제를 계급과 사회 구조에서 찾았다. 17 18
운동 안의 대립: 「제3의 성」 대 「남성 문화」, 그리고 반유대주의
동성애자 운동은 처음부터 한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돌프 브란트는 히르슈펠트의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와 함께 일하다가, 남성과 여성 사이의 「제3의 성」을 내세운 유대인 의사의 이론과 정반대 입장으로 돌아섰다. 아이게네 공동체 사람들은 동성애를 여성성과 묶지 않은 베네딕트 프리틀렌더와 엘리자르 폰 쿠퍼를 따랐고, 자신들의 감정을 「동성애」가 아니라 「친구 사이의 사랑」이라 부르며 히르슈펠트가 동성애를 의학의 대상으로 만든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남성 사이의 사랑이 이성애보다 낫다고 보아 여성 혐오로 기울었고, 말기에는 브란트를 포함한 일부 회원이 반유대주의 경향을 보이며 이성애자보다 우월한 동성애자 「초인」 이론을 폈다. 7
한스 블뤼허와 히르슈펠트의 관계는 협력에서 적대로 바뀌었다. 1912년 그는 아이게네 공동체와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에 함께 속해 있었고, 반더포겔을 「에로스 현상」으로 그린 책의 셋째 권에 히르슈펠트의 서문까지 받았다. 그러나 프로이트와 빌헬름 슈테켈의 갈등에서 히르슈펠트 편에 서지 않으려 했고 반유대주의를 드러내면서 관계가 끊어졌다. 블뤼허는 동성애를 셋으로 나누어 문화를 창조하는 「남성적」 동성애만 정상으로 보고, 잠재적 동성애와 히르슈펠트의 「제3의 성」에 해당하는 「여성적」 동성애는 병적이라 했다. 1916년 『시민적 반페미니즘과 정신적 반페미니즘』에서는 오토 바이닝거처럼 유대인을 「여성성」과 묶어, 유대인이 「남성 결사의 허약」과 「가족 과잉」에 시달린다고 썼다. 전후 그는 개신교도이자 반유대주의자·반페미니스트·군주제주의자가 되어 보수 혁명의 대표자로 꼽혔다. 16
대중 조직을 이끈 프리드리히 라트슈바이트도 히르슈펠트와 부딪쳤다. 1923년 인권동맹 의장이 된 그는 운동의 주도권을 고집했고, 히르슈펠트·브란트와 동의 연령과 남성 성매매 처벌 문제에서 합의하지 못했다. 1923년부터 잠시 세 사람이 제175조 폐지를 위한 행동 위원회를 꾸렸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1930년 나치당의 선거 승리 뒤 라트슈바이트는 오른쪽으로 돌아 유대인 의사 펠릭스 아브라함의 저작 금지를 주장했고, 1931년에는 히르슈펠트를 두고 반유대주의 발언을 했다. 같은 해 그는 히틀러에게 인권동맹과 동성애자들에 대한 나치당의 괴롭힘을 멈춰 달라는 편지를 보냈는데, 히틀러가 이를 「집권하면 청산할 것」이라는 메모와 함께 친위대로 넘겼다고 전한다. 19 20
반유대주의는 운동 밖에서 더 거셌다. 히르슈펠트는 유대인이자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일찍부터 유럽 파시스트들, 뒤에는 나치당의 표적이 되었고, 1920년에는 거리에서 민족주의 활동가들에게 심하게 맞아 경찰이 처음에 죽었다고 여길 만큼 다쳤다. 한편 아이게네 공동체가 내세운 「남성다운 남성」의 이상은 나치즘의 몇몇 면과 맞닿아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21 7
1919년: 성과학 연구소와 영화 〈다른 이들과 다르게〉
11월 혁명 뒤 검열이 사라진 1919년, 성개혁 운동은 두 가지 성과를 냈다. 하나는 영화였다. 리하르트 오스발트가 히르슈펠트의 자문으로 만든 〈다른 이들과 다르게〉는 협박을 받다 제175조로 처벌되어 목숨을 끊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이야기로, 동성애를 드러내놓고 다룬 첫 영화로 꼽힌다. 히르슈펠트가 직접 출연해 관용을 호소했고, 1919년 5월 28일 베를린에서 개봉했다. 22
영화는 큰 논쟁을 일으켰다. 보수 진영은 검열의 부활을 요구했고, 유대인인 히르슈펠트와 오스발트가 「유대인의 악덕」을 퍼뜨린다는 반유대주의 공격이 쏟아졌다. 1920년 5월 영화 검열법이 다시 생기자 영화는 그해 8월 18일 금지되었고 필름이 폐기되었다. 히르슈펠트는 1927년 기록영화 〈사랑의 법칙〉에 줄인 판을 넣었는데, 이 영화도 곧 검열에 걸렸다. 22
다른 하나는 성과학 연구소였다. 히르슈펠트는 1919년 7월 6일 베를린 티어가르텐에 피부과 의사 프리드리히 베르트하임, 신경과 의사 아르투어 크론펠트와 함께 세계 최초의 성과학 연구소를 열었다. 연구소는 성 상담과 진료, 감정, 대중 강연을 맡았고, 트랜스베스타이트 증명서를 발급했으며, 카를 기제가 기록보관소를, 막스 호단이 성 상담소를 이끌었다.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와 나중의 세계 성개혁 연맹도 이곳에 자리 잡았다. 23 24 13
바이마르의 정당과 형법 제175조: 1929년 형법 위원회 표결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형법 제175조 폐지 운동은 대중 운동으로 커졌다. 1920년 베를린에서 생긴 인권동맹은 1923년 출판인 프리드리히 라트슈바이트를 의장으로 맞아 수만 명의 회원과 잡지를 거느린 바이마르 최대의 동성애자 단체가 되었다. 1923년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아이게네 공동체·인권동맹은 공동 행동 위원회를 꾸렸으나, 동의 연령과 남성 매춘 처벌을 두고 갈라졌다. 20 19 5
좌파 정당들도 제175조 폐지에 과반을 얻지 못했다. 1924년 연쇄살인범 하르만 재판 뒤 제175조 판결이 크게 늘었고, 1925년 중도우파 정부는 처벌 범위를 넓히는 형법 초안을 냈다. 초안은 남성 간 관계가 「성격을 무너뜨리고 도덕 감정을 파괴하며」 퍼지면 「민족의 퇴화」를 부른다고 했다. 1 6
1929년 제국의회 형법 위원회에서 이 초안을 논의할 때, 공산당·사회민주당·독일민주당은 15대 13으로 성인 남성 사이의 단순 동성애를 처벌하는 조항을 빼는 데 성공했다. 공산당원 리하르트 린제르트가 위원회 서기로서 공산당을 이 목표로 이끈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가중 사례」를 처벌하는 새 조항은 공산당 3표만 반대한 채 채택되었고, 위원회는 결과를 「한 걸음 전진, 두 걸음 후퇴」라고 평했다. 1930년 3월 독일·오스트리아 형법 통일 의회 위원회는 23대 21로 처벌 조항을 되살렸다. 1 25 26
운동 안의 균열도 깊어졌다. 1929년 11월 린제르트를 앞세운 반대파가 히르슈펠트를 위원장에서 물러나게 했고, 오토 율리우스부르거가 위원장, 쿠르트 힐러가 제2위원장이 되어 위원회는 생물학 대신 심리학·사회학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930년 나치당이 약진하자 라트슈바이트의 인권동맹은 오른쪽으로 돌았다. 5 27 19
형법 제218조 투쟁: 「청산가리」와 1931년의 대중 운동
임신중절을 처벌하는 형법 제218조를 둘러싼 싸움은 바이마르 시기에 의회와 거리로 번졌다. 1920년 독립사회민주당과 사회민주당이 폐지안과 처벌 면제안을 냈고, 공산당은 1922년과 1924년 폐지와 사면 법안을 냈다. 1926년 5월 18일 법으로 일반 중절은 중죄에서 경죄로 낮아졌고, 1927년 제국법원은 생명이 위험할 때의 의사의 중절을 허용했다. 1924년 공산당은 케테 콜비츠의 포스터 「낙태죄 조항을 타도하라!」를 펴냈다. 3 28 29
정당들의 제218조 개혁론은 같은 방향이 아니었다. 1920년 사회민주당 안을 주도한 법률가 구스타프 라트브루흐는 제국의회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낙태의 허용이 아니라 처벌의 폐지일 뿐」이라며, 누구나 제 몸의 주인이라는 「시민적 여권론자」의 개인주의적 논거와는 거리를 두었다. 공산당 의원 빌헬름 쾨넨은 1922년 「파렴치한 낙태죄 조항」의 철폐를 요구하며, 사회민주당 법무장관 라트브루흐가 고통받는 여성들에게 아무 경감도 주지 않는다고 공격했다. 반대로 시민 여성운동의 독일 여성단체연맹을 이끈 게르트루트 보이머는 폐지에 반대했고, 연맹 기관지에는 1920년 낙태 허용이 출생률 붕괴와 성적 방종을 부른다는 글이 실렸다. 3
1926년 독일 의사대회는 해마다 50만~80만 건의 불법 중절과 1만 명가량의 사망을 추정했다. 1929년 9월 6일 베를린에서 초연된 공산당원 의사 프리드리히 볼프의 희곡 「청산가리」는 직장 폐쇄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의 연인이 의사에게 거절당하고 청산가리로 중절하다 숨지는 이야기로, 1929/1930년 시즌 가장 성공한 독일어 연극이 되어 제218조 논쟁을 열었다. 공산당원 산부인과 의사 마르타 루벤볼프는 소련을 본보기로 한 소책자 『낙태냐 피임이냐?』를 냈다. 30 31
1931년 2월 볼프와 슈투트가르트의 의사 엘제 킨레가 영리 목적의 중절 혐의로 체포되자, 공산당이 이끈 대중 항의가 일어나 거의 모든 대도시에 「제218조 반대 투쟁위원회」가 생겼다. 아인슈타인 등이 참여한 「자기 고발 위원회」는 여성과 의사들에게 집단으로 자신을 고발하자고 호소했다. 킨레는 단식 투쟁 끝에 풀려나 전국 집회에서 연설했으나, 두 사람이 풀려난 뒤 운동은 잦아들었고 나치는 반대 선전을 폈다. 3 32 33




세계 성개혁 연맹과 소련과의 교류
히르슈펠트는 독일 운동을 국제 운동으로 넓혔다. 1921년 9월 15~20일 베를린에서 그가 연 국제 성개혁 대회는 뒤에 세계 성개혁 연맹의 제1회 대회로 셈해졌고, 연맹은 1928년 7월 코펜하겐의 제2회 대회에서 정식으로 출범했다. 히르슈펠트·해블록 엘리스·오귀스트 포렐이 공동 의장이었고, 1930년부터 노먼 헤어 등이 이었다. 1929년 런던, 1930년 빈, 1932년 브르노에서 대회가 열렸으나 1931년 모스크바 대회는 열리지 못했다. 34 35
1920년대 소련은 독일 성개혁가들에게 본보기였다. 1923년 1월 보건인민위원 니콜라이 세마슈코가 이끈 대표단이 성과학 연구소를 찾았고, 그리고리 바트키스 등은 소련이 동성애를 처벌하지 않는 것이 숙고한 조치라고 알렸다. 1926년 히르슈펠트는 소련 정부의 초청으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를 찾았고, 〈다른 이들과 다르게〉의 줄인 판은 1928년 소련에서 상영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소련은 1934년 남색죄를 되살리고 1936년 임신중절을 금지해 이 본보기를 스스로 지웠다. 36 37 13 22
연맹은 다양한 흐름의 연합이었다. 1930년 개인 회원 182명에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모성보호동맹 등 가맹 단체를 통해 13만 명가량이 속했고, 헬레네 슈퇴커와 막스 호단, 소련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과 도라 러셀 등이 대회에 나섰다. 그 요구 가운데에는 피임·임신중절의 자유와 동성애 처벌 폐지와 함께 「후손에 대한 우생학적 영향」도 들어 있었다. 34 35

빌헬름 라이히와 섹스폴: 공산당 안의 성정치
성정치를 노동계급 운동 안으로 끌어들인 것은 빌헬름 라이히였다. 1927년 그는 빈에서 노동자를 위한 무료 성 상담소 여섯 곳을 열어 정신분석 상담과 마르크스주의적 조언, 피임 도구를 함께 주었고, 1930년 11월 베를린으로 옮겨 독일 공산당에 들어갔다. 1931년 가을 그는 지역의 성개혁 단체들을 묶어 공산당 산하 「독일 프롤레타리아 성정치 전국연맹」, 곧 섹스폴을 세웠다. 38 39 18
섹스폴은 혼인·임신중절법 개정과 성교육을 요구하며,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권위주의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성적 곤궁이 자본주의에서 비롯한다고 알리려 했다. 그러나 당내에서는 「라이히는 우리 체육관을 사창가로 만들려 한다」는 반발이 거셌고, 당은 그의 책 보급을 멈추고 연맹을 해산했다. 라이히는 1933년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낸 뒤 그해 가을 당에서 제명되었고, 1934년 국제정신분석협회에서도 쫓겨났다. 39 17
라이히는 동성애자를 처벌하는 데 반대했지만 동성애를 자연스러운 성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의 성경제학에서 정상적인 성 발달은 생식기적, 곧 이성애적인 것이었고, 대다수의 동성애는 이성을 향한 사랑의 기능이 아주 이른 시기에 흐트러진 결과이거나 이성과의 관계가 막힌 데서 생긴 것이었다. 히르슈펠트와 달리 그는 동성애를 타고난 것이 아니라 얻어진 것으로 보았다. 『파시즘의 대중심리』(1933)에서 그는 독일 파시즘이 청년 조직의 금욕적이고 성 부정적인 교육으로 권위에 대한 복종을 길렀고, 그 과정에서 어려서부터 충족을 찾는 이성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망이 일부 동성애적·가학적 욕망으로 바뀌었다고 썼다. 「계급의식이란 무엇인가?」(1934)에서는 이성애적 성향이 발달한 청년일수록 혁명 사상에 열려 있고, 동성애적 경향과 성 억압이 강할수록 우익에 끌린다고 했다. 40
그러면서도 라이히는 1936년 『문화 투쟁 속의 성』에서 소련의 낙태 금지와 남색죄 부활을 성혁명에 제동을 건 것이라 비판하고, 동성애가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고 보는 노동자 다수의 관용적 태도 편에 섰다. 그는 동성애를 파시즘과 곧바로 잇는 고리키식 주장이 혼란스럽다고 하며, 룀 같은 선호에 의한 동성애와 이성과의 관계를 빼앗긴 사람들의 필요에 의한 동성애를 뒤섞는다고 지적했고, 동성애자 박해는 나치가 하든 공산주의자가 하든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역사가 캣 모이어는 동성애를 범죄가 아니라 일종의 병리로 본 라이히의 시각이 히르슈펠트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그 역시 동성애자를 박해해서는 안 된다는 데서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고 평한다. 40
섹스폴의 이론은 노동자 성에 관한 논쟁도 낳았다. 빈에서 라이히는 「건강한」 숙련 노동자의 성을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거친」 성과 구별하던 소(小) 카를 카우츠키 중심의 사회민주당원들과 다퉜고, 억압적 성도덕이 노동계급을 「소시민화」한다고 보았다. 당에서 쫓겨난 뒤 섹스폴은 1934년부터 라이히가 스칸디나비아 망명지에서 낸 《정치심리학·성경제학 잡지》를 중심으로 1939년까지 망명 좌파·아나키스트·트로츠키주의자들의 느슨한 모임으로 남았다. 41 39
미셸 푸코는 1976년 『성의 역사』 제1권 『앎의 의지』에서 라이히 같은 성 해방론이 기대던 「억압 가설」, 곧 17세기부터 부르주아 사회가 성을 침묵시키고 억눌러 왔다는 통념을 따져 물었다. 그에 따르면 근대에 일어난 것은 침묵이 아니라 성에 관한 「담론의 폭발」이었다. 가톨릭 고해에서 정신의학과 성과학에 이르기까지 성을 고백하고 분류하고 연구하게 하는 「담론에의 선동」이 늘어났고, 그 과정에서 남색이라는 행위를 저지른 사람이 「동성애자」라는 하나의 「종」으로 분류되었다. 권력은 금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을 앎과 규범의 대상으로 만들어 내는 생산적인 것이며, 18세기부터 국가는 출생률·사망률·혼인·피임 같은 「인구」의 문제를 다스리는 생명 권력으로서 성에 관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억압에 맞서 성을 「해방」하자는 담론도 그것이 고발하는 것과 같은 역사적 맥락에 속할 수 있다고 보았다. 42 43
푸코는 노동계급의 성이 덜 억압되었다는 섹스폴의 생각도 뒤집었다. 그에 따르면 근대의 「성의 장치」는 착취당하는 계급의 성을 억누르려는 것이 아니라 먼저 「지배」 계급이 제 몸과 활력, 수명, 생식력, 자손을 돌보려고 만든 것이었고, 귀족에게 피가 그랬듯 부르주아에게는 성이 그런 것이었다. 다만 푸코도 국가의 성 억압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고, 그것을 전쟁과 노동에 필요한 인구를 만들고 지키려는 생명 권력의 틀 속에서 다시 설명했다. 41 17

1933~1935년: 민족사회주의 정권의 파괴
나치당은 처음부터 성개혁 운동을 적으로 삼았다. 1928년 제175조에 관한 질의에 「동성애를 생각만 하는 자도 우리의 적」이라고 답했고, 히르슈펠트는 1920년 민족주의 활동가들에게 폭행당했고, 그 뒤로도 그의 강연은 폭력배들에게 방해받았다. 1931년 그는 미국 강연 여행을 떠난 뒤 세계를 돌며 독일로 돌아오지 않았다. 1931~1932년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은 돌격대장 에른스트 룀의 동성애를 폭로해 나치를 공격했다. 2 13 21
1933년 집권과 함께 파괴가 시작되었다. 2월 23일 프로이센 내무부는 「자연에 반하는 성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업소를 닫으라고 명령했고, 3월부터 동성애 관련 출판물이 압수되었다. 브란트의 집은 다섯 차례 수색당해 사진과 잡지 6000부를 빼앗겼다. 나치는 집권 직후 임신중절 수단의 광고와 알선도 다시 처벌했다. 2월 국회의사당 화재 뒤 막스 호단은 게슈타포에 붙잡혔다가 망명했다. 2 3 44
1933년 5월 6일 아침, 독일 학생연합 학생들이 악대를 앞세워 성과학 연구소에 쳐들어가 내부를 부수고 수만 점의 자료와 1만 권이 넘는 장서를 털었고, 오후에는 돌격대가 약탈을 이어 갔다. 히르슈펠트는 스위스에 머물다 파리의 영화관에서 뉴스 영화로 이를 보았다. 5월 10일 밤 베를린 오페라 광장의 분서에서 연구소 장서가 불탔고, 부서진 히르슈펠트 흉상의 머리가 막대에 꽂혀 행렬에 실렸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정신분석 서적, 라이히의 책도 함께 불길에 들어갔다. 24 45 18
1934년 6월 30일 장검의 밤에 히틀러는 룀과 돌격대 지도부를 살해했고, 선전은 룀의 동성애를 살해의 명분 가운데 하나로 들었다. 숙청을 지지한 힘러는 뒤에 친위대와 게슈타포, 수용소를 모두 거느리게 되었고, 1934년 12월 게슈타포가 베를린에서 동성애자 일제 단속을 시작했다. 1935년 6월 28일 법으로 9월 1일부터 제175조는 「자연에 반하는」이라는 말을 지워 모든 「음행」으로 넓혀졌고, 「가중 사례」를 다루는 제175조a가 생겼다. 46 2 1
제175조 (1) 다른 남성과 음행하거나 그에게 음행을 위해 몸을 맡긴 남성은 금고에 처한다. (2) 범행 때 스물한 살이 되지 않은 가담자에게는 특히 가벼운 경우 법원이 형을 면제할 수 있다.
제175a조. 다음의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정상참작 사유가 있으면 3개월 이상의 금고에 처한다. 1. 폭력이나 신체·생명에 대한 현재의 위험으로 위협해 다른 남성에게 음행을 강요한 남성. 2. 직무·노동·종속 관계에서 생긴 의존을 악용해 다른 남성이 음행하도록 한 남성. 3. 스물한 살 미만의 남성을 꾀어 음행한 스물한 살 이상의 남성. 4. 영업으로 남성과 음행하거나 그렇게 하겠다고 나선 남성. 1
§ 175 (1) Ein Mann, der mit einem anderen Mann Unzucht treibt oder sich von ihm zur Unzucht mißbrauchen läßt, wird mit Gefängnis bestraft. (2) Bei einem Beteiligten, der zu Zeit der Tat noch nicht einundzwanzig Jahre alt war, kann das Gericht in besonders leichten Fällen von Strafe absehen.
§ 175a Mit Zuchthaus bis zu zehn Jahren, bei mildernden Umständen mit Gefängnis nicht unter drei Monaten wird bestraft: 1. ein Mann, der einen anderen Mann mit Gewalt oder durch Drohung mit gegenwärtiger Gefahr für Leib oder Leben nötigt, mit ihm Unzucht zu treiben, oder sich von ihm zur Unzucht mißbrauchen zu lassen; 2. ein Mann, der einen anderen Mann unter Mißbrauch einer durch ein Dienst-, Arbeits- oder Unterordnungsverhältnis begründeten Abhängigkeit bestimmt, mit ihm Unzucht zu treiben oder sich von ihm zur Unzucht mißbrauchen zu lassen; 3. ein Mann über einundzwanzig Jahre, der eine männliche Person unter einundzwanzig Jahren verführt, mit ihm Unzucht zu treiben oder sich von ihm zur Unzucht mißbrauchen zu lassen; 4. ein Mann, der gewerbsmäßig mit Männern Unzucht treibt oder von Männern sich zur Unzucht mißbrauchen läßt oder sich dazu anbietet. 1
운동의 사람들은 흩어졌다. 히르슈펠트는 파리에서 연구소를 다시 세우려다 실패하고 1935년 5월 14일 67번째 생일에 니스에서 숨졌으며, 세계 성개혁 연맹은 그 뒤 해산되었다. 힐러는 수용소에서 학대받은 뒤 망명했고, 기제는 1938년 브르노에서, 크론펠트는 1941년 모스크바에서 목숨을 끊었다. 슈퇴커와 볼프, 킨레, 라이히도 망명했다. 제175조 유죄 판결은 1932년 801건에서 1937~1938년 8000건 넘게 늘었고, 1936년 동성애·낙태 퇴치 제국 중앙국이 생겼다. 13 34 27 47 48 9 33 32 18 1 2
평가: 성개혁 운동의 성과와 한계, 그리고 전후
독일 성개혁 운동은 세계 최초의 동성애자 권리 단체와 성과학 연구소를 세우고, 제175조와 제218조를 공적 논쟁의 한가운데로 끌어냈다. 1926년 제218조 형량 완화와 1929년 형법 위원회 표결은 그 성과였다. 그러나 운동은 이론과 노선, 정당 사이에서 늘 갈라져 있었고, 두 조항 가운데 어느 것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폐지되지 못했다. 49 1 3
운동의 한계 가운데 하나는 우생학이었다. 히르슈펠트는 성과학과 우생학의 결합을 널리 알렸고, 오늘날 나치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당대의 어휘를 썼다. 그는 이를 강제가 아니라 계몽·피임·임신중절의 합법화로 이루려 했고 나치의 인종 위생과 「안락사」를 단호히 거부했지만, 성과학자 폴크마르 지구슈는 그와 다른 성과학 우생론자들이 나치가 가져다 쓴 담론을 비판할 이론적 무기를 갖추지 못했다고 평했다. 슈퇴커의 제218조 폐지론에도 「품종 개량」 같은 인종주의적 생각이 섞여 있었다. 13 3
전후 두 독일은 다른 길을 걸었다. 동독은 1950년 1935년 이전의 제175조로 돌아가 1950년대 말부터 성인 사이의 관계를 처벌하지 않았고, 1972년 임신 12주 안의 중절을 합법화했다. 서독은 나치 시기 제175조를 1969년까지 유지했고, 통일 뒤인 1994년에야 조항을 완전히 없앴다. 나치 박해를 받은 동성애자들은 오랫동안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했고, 1970년대 동성애자 해방 운동이 분홍 삼각형을 상징으로 되찾았다. 1 3 2
결과
1933년 민족사회주의 정권은 동성애자 업소와 출판물을 없애고, 5월 6일 성과학 연구소를 약탈해 그 장서를 5월 10일 분서에서 태웠다. 1934년 장검의 밤으로 룀이 살해되었고, 1935년 9월 1일 제175조는 모든 「음행」으로 넓혀지고 제175조a가 생겼다. 히르슈펠트는 1935년 5월 니스에서 숨졌고 연맹은 해산했으며, 운동의 사람들은 망명하거나 목숨을 끊었다. 제175조 판결은 열 배로 늘었고, 나치 시기의 조항은 서독에서 1969년까지 이어졌다.
연표와 지도
- 11871.01.01형법 제175조·제218조 시행
북독일 연방 형법이 남성 간 성행위와 임신중절을 처벌하는 조항과 함께 시행되었다.
- 21897.05.15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 창립
히르슈펠트 등이 세계 최초의 동성애자 권리 단체를 세웠다.
- 31905.02.26모성보호동맹 재창립
헬레네 슈퇴커가 이끈 모성보호동맹이 베를린에서 다시 창립되었다.
- 41906.11.17오일렌부르크 사건의 시작
하르덴이 《미래》에서 오일렌부르크와 쿠노 폰 몰트케를 빗대어 공격했다.
- 51919.05.28〈다른 이들과 다르게〉 개봉
동성애를 드러내놓고 다룬 첫 영화가 베를린에서 개봉했다.
- 61919.07.06성과학 연구소 개소
히르슈펠트가 티어가르텐에 세계 최초의 성과학 연구소를 열었다.
- 71921.09.15베를린 국제 성개혁 대회
뒤에 세계 성개혁 연맹의 제1회 대회로 셈해진 대회가 열렸다.
- 81926.05.18제218조 형량 완화
일반 임신중절이 중죄에서 경죄로 낮아졌다.
- 91928.07.03세계 성개혁 연맹 출범
코펜하겐의 제2회 대회에서 연맹이 공식 출범했다.
- 101929형법 위원회 표결
제국의회 형법 위원회가 15대 13으로 성인 남성 간 단순 동성애 처벌 조항을 뺐다.
- 111929.09.06「청산가리」 초연
프리드리히 볼프의 희곡이 제218조 논쟁을 열었다.
- 121931.02볼프·킨레 체포
두 의사가 중절 혐의로 체포되어 제218조 반대 대중 운동이 일어났다.
- 131933.02.23동성애자 업소 폐쇄 명령
프로이센 내무부가 「자연에 반하는 성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업소를 닫으라고 명령했다.
- 141933.05.06성과학 연구소 약탈
학생들과 돌격대가 연구소를 약탈했다.
- 151933.05.10베를린 분서
오페라 광장에서 연구소 장서가 불탔다.
- 161934.06.30장검의 밤
히틀러가 룀과 돌격대 지도부를 살해했다.
- 171935.05.14히르슈펠트 사망
히르슈펠트가 망명지 니스에서 숨졌다.
- 181935.09.01제175조 강화
「음행」 전체로 처벌을 넓히고 제175조a를 새로 둔 법이 시행되었다.
관련 인물 30명
지도부2
집행 · 지휘3
참여18
1898년 제175조 폐지 청원을 제국의회에 올렸고, 모성보호동맹 회원이었다.
아이게네 공동체 지도자아돌프 브란트1874–1945《데어 아이게네》를 펴내며 남성다운 동성애를 내세웠고, 1907년 뷜로를 지목했다가 징역형을 받았다. 1933년 집을 수색당했다.
남성 결사론자한스 블뤼허1888–1955동성애적 유대가 국가를 세운다는 남성 결사론을 펴 히르슈펠트의 이론에 맞섰다.
성과학 연구소 공동 설립자아르투어 크론펠트1886–19411919년 연구소를 함께 세웠고, 망명지 모스크바에서 1941년 목숨을 끊었다.
연구소 기록관리인카를 기제1898–1938연구소 기록보관소를 맡았고 영화 〈다른 이들과 다르게〉에 출연했다. 1938년 브르노에서 목숨을 끊었다.
연구소 성 상담소장막스 호단1894–1946연구소의 성 상담소를 이끌며 노동자 성교육을 폈고, 1933년 게슈타포에 붙잡혔다가 망명했다.
인권동맹 의장프리드리히 라트슈바이트1876–1932인권동맹을 바이마르 최대의 동성애자 단체로 키웠으나 1930년 오른쪽으로 돌았다.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 서기리하르트 린제르트1899–1933공산당을 제175조 폐지로 이끌었고, 1929년 히르슈펠트를 사퇴시킨 반대파를 이끌었다.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 제2위원장쿠르트 힐러1885–19721929년 위원회를 이끌었고, 1933년 수용소에서 학대받은 뒤 망명했다.
판화가케테 콜비츠1867–19451924년 공산당이 펴낸 포스터 「낙태죄 조항을 타도하라!」를 만들었다.
의사·극작가프리드리히 볼프1888–19531929년 희곡 「청산가리」로 제218조 논쟁을 열었고 1931년 체포되었다.
의사엘제 킨레1900–19701931년 볼프와 함께 체포되어 제218조 반대 대중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산부인과 의사마르타 루벤볼프1887–1939소련을 본보기로 한 소책자 『낙태냐 피임이냐?』를 냈다.
물리학자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제218조에 맞선 「자기 고발 위원회」에 참여했다.
세계 성개혁 연맹 공동 의장해블록 엘리스1859–19391928년 연맹의 첫 공동 의장이 되었다.
세계 성개혁 연맹 공동 의장오귀스트 포렐1848–1931모성보호동맹 회원이었고 1928년 연맹의 첫 공동 의장이 되었다.
세계 성개혁 연맹 공동 의장노먼 헤어1892–19521930년부터 연맹을 이끌었고 히르슈펠트가 죽은 뒤 해산했다.
섹스폴 창설자빌헬름 라이히1897–19571931년 공산당 안에 섹스폴을 세웠고 1933년 제명되었다.
대상 · 피해3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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